발해가 공격한 당(唐)의 등주(登州)는 어디인가? (1)

2023. 6. 25. 02:14한국사/발해

I. 머리말

 

최근 우마이야왕조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활동을 살펴 보면서 의문의 기록을 보았다. 즉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했던 아랍세력 즉 사라센제국이 프랑스 지역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소위 ''Umayyard invasion of  Gaul'이라는 것이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3041412634 자료 참조)

 

위키피디아 자료에 의하면 우마이야 아랍세력은 732년 프랑스의 Tours(=Poitiers)까지 진출하여 전쟁을 했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3052951323 자료 참조).

 

필자는 이 기록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필자는 프랑크왕국을 중국의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이 시기는 당나라의 시기이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의 사라센제국은 신라로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신라의 통일전쟁 시기도 아닌데, 당나라와 신라가 전쟁을 했다는 셈이 된다. 이는 한국사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쟁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고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732년 발해와 당의 전쟁, 즉 발해의 등주 공격이다. 이 당시 발해는 돌궐과 거란과 협력하여 당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거란은 요서를 공격했다. 돌궐은 발해의 공격에 합세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돌궐을 북유럽의 세력으로 추정했다.   (https://lainfos.tistory.com/287  글 참조)

 

이에 대한 반격으로 신라와 당은 733년 10만의 군사를 동원해 발해의 남쪽을 공격했으나 추위와 눈으로 군사의 반을 잃어 철수했다. 1장이나 되는 눈을 만난 것을 보면 또한 험한 지형을 언급한 것을 고려하면 높은 산맥에서 싸운 것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학자들은 발해와 당의 전쟁을 아랍인 신라와 프랑크왕국의 지방정부(Aquitaine지역)와의 전쟁으로 둔갑시킨 것으로 보인다. 특히 프랑스 서해안 지역은 해상세력인 바이킹이 자주 침입했던 지역이다. 즉 우마이야군을 패퇴시킨 아키텐지역의 군사들은 신라군을 패퇴시킨 발해, 돌궐의 연합군인지도 모른다. 이후 우마이야 아랍군이 피레네산맥 아래로 후퇴한 것은 이들이 눈을 만나 패퇴한 신라군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론 분석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발해가 공격한 등주라는 곳은, 대부분 한국사 자료는 현 중공의 산동지역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나무위키 자료는  호타하를 지나 하북지역인 등주로 기술하였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3137916194 자료 참조).

 

즉 바닷가의 항구가 아닌 강(호타하)으로 연결된 내륙지방에 등주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크왕국의 역사에서 기술되는 전쟁역사와 유사함을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이에 대해 글을 쓰기로 펜을 들었다. 

 

II. 발해, 돌궐, 거란과 당, 신라의 상황

 

발해의 등주 공격은 발해, 돌궐, 거란, 당나라, 신라의 5자와 관련된 전쟁이다. 

그래서 당나라의 당 현종 시기의 돌궐, 거란, 신라, 발해 등과의 관계를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1625337846 자료 참조)

 

 

1)  발해(무왕 시기)와 당나라 (당 현종 시기) 상황

 

먼저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한 이유를 알기 위해 당시 발해의 상황을 알아 보자. 아래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나라가 발해의 후방에 있는 흑수말갈과 교류하게 된 것이 발해에게 위협을 준 것으로 발해는 판단한 것 같다. 발해는 흑수말갈에 공격을 하여 이를 단념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와중에 당과 연결된 흑수말갈에의 공격에 반대하는 발해 무왕의 동생(=대문예)이 당나라로 망명함으로써 일이 커진다. 대문예를 죽이거나 돌려 달라는 발해 무왕의 요구를 당나라는 무시했다. 이에 발해의 무왕은 732년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나라에게 발해의 국력을 보여 준다. 이 시기에 거란과 돌궐이 발해와 연합 작전을 편 것으로 보인다. 733년 신라를 동원한 당나라의 반격은 참패로 끝나며, 당나라는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후에 대문예를 암살하려는 발해 무왕의 낙양 주위에서의 공격은 실패로 끝난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발해가 요수인 프랑스의 론강 우측에서부터 카자르칸국까지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https://lainfos.tistory.com/255글 참조).

 

발해가 동쪽 먼 바다에 이르렀다고 신당서에 천급하고 있으나, 동아시아까지 이르렀는지는 아직 분석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는 흑수말갈은 모스크바강(=흑수)지역에 존재한 세력으로 추정했다.  (https://lainfos.tistory.com/229 ,  https://lostcorea.tistory.com/1646  글 참조).

 

이들은 후에 흑해지역으로 이동하며, 미구에 파노니아지역인 항가리 지역에 정착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고 당나라의 등주의 위치를 알아 보고자 아래 세부 자료를 검토해 보자. 

 

(1) 흑수말갈과 당의 연계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게 된 것은 흑수말갈과의 긴장이 원인이 되었다.  아래 자료를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 발해가 주변으로 세력 팽창하자 흑수말갈은 당과의 접촉 도모

- 흑수말갈은 722년,  725년, 726년, 728년에 걸쳐  당과 교섭

- 당은 흑수말갈 지역을 훅수부로 삼아 기미지배 시도 (아래 자료 참조)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고지(故地)에 자리 잡은 발해가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팽창하자 흑수말갈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당과의 접촉을 도모하였다. 흑수말갈은 722년 처음 당에 사절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725년과 726년 및 728년에 걸쳐 당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은 흑수말갈 지역을 흑수부(黑水府)로 삼아 기미지배를 시도하였다. 이것은 당이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식 중의 하나로서, 현지에 도독부·주·현 등 당의 지방통치단위를 설치하는 한편, 그 지역의 유력자를 그 장관으로 삼아 다스리는 것이었다. 당의 이러한 조치는 발해를 사이에 두고 당과 흑수말갈이 함께 발해를 압박하는 형세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 흑수말갈은 과거와 달리 발해에 알리지 않은 채 당과 독자적인 접촉

- 당나라도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함

- 발해는 위협을 느껴 훅수말갈을 공격하기로 결정 (아래 자료 참조)

 

"이와 같이 흑수말갈과 당의 교섭은 발해의 입장에서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당시 흑수말갈이 당으로 사신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발해의 국경을 반드시 거쳐야했는데, 이때 흑수말갈은 발해에 사행을 알리지 않은 채 당과 접촉했던 것이다. 사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발해와 흑수말갈은 동일한 시기에 당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다. 말갈은 당 뿐만 아니라 돌궐로 향하는 길 역시 발해에게 먼저 알리고는 했다. 양국의 위치나 당으로 가는 경로 등을 고려하면, 당에 대한 발해와 흑수말갈의 사신 파견은 보통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그러나 흑수말갈이 이 무렵부터 발해 몰래 당에 사절을 보내 교섭을 진행하는 등 당과의 연결을 위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당 역시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발해는 양국의 이러한 관계가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흑수말갈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자료:발해-당 전쟁, 우리역사넷,

인용출처: https://blog.naver.com/lainfos/223137929361)

 

(2) 발해 내 형제의 갈등

​발해 무왕이 흑수말갈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동생 대문예를 시켜 공격하게 하는데, 대문예는 당나라의 공격을 염려해  끝까지 반대하니, 무왕이 제거하려 하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한다. 무왕은 사촌형인 대일하에게 흑수말갈을 공격하게 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흑수말갈이 단독으로 당나라와 접촉하는 일이 줄어든 것이다. 한편 대문예를 죽이라고 당나라에 요구하나 당나라는 발해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자 발해 무왕은 당나라에 선제공격을 한다. 

 

- 726년 발해 무왕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 공격 하게함

- 대문예는 당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공격 중단 건의 및 당나라에 망명

- 발해 무왕은 사촌형인 대일하에게 흑수말갈 공격 하게함 : 일정한 성과 거둠

(아래 자료 참조)

 

"726년 발해의 왕이었던 무왕(武王)은 동생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문예는 일찍이 당에 인질로 머물다 돌아온 인물로,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이 당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그는 이전에 고구려가 당에 대항하다 멸망했음을 들면서 발해의 국력이 고구려보다 못하므로 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 하며 흑수말갈 공격 중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형이었던 무왕의 강력한 의지로 발해 병력은 흑수말갈을 향해 출병하게 되었다. 대문예는 흑수말갈과의 국경에 이르러 다시 무왕에게 상소를 올려 전쟁을 그쳐 달라 청하였는데, 여기에 노한 무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당으로 도망쳤다. 이후 무왕은 도망친 대문예 대신 사촌 형인 대일하(大壹夏)를 보내 흑수말갈 공격을 진행하게 하였다. 726년부터 발해가 등주를 공격하게 되는 732년 사이에 흑수말갈을 비롯한 말갈 부락과 당의 교섭이 줄어든 것으로 보아 이 때 발해의 흑수말갈 공격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 발해 무왕은 망명한 대문예를 죽일 것을 당에게 요구

- 당은 대문예를 유배했다고 하고 죽이는 것은 거절

- 발해는 당을 선제 공격하게됨 (아래 자료 참조)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자 당은 그를 보호하였고, 대문예의 망명 사실을 파악한 발해 무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문예를 죽여 달라 요청하였다. 당의 황제였던 현종은 몰래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역으로 보내놓고 발해에 그가 영남(嶺南) 지역으로 유배되었다고 거짓으로 답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얼마 가지 않아 발해 측에 알려지게 되었고, 무왕은 다시금 당에게 문예를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당은 이번에는 진짜로 문예를 영남 지역으로 보낸 뒤 발해에 거절의 뜻을 알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은 발해 측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뜻을 내비치며 발해를 압박하였고, 발해는 결국 당을 선제공격하는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된다."

(자료:발해-당 전쟁, 우리역사넷,

인용출처: https://blog.naver.com/lainfos/223137929361)

 

(3) 발해의 등주공격과 당의 반격

 

당나라가 발해 무왕의 대문예 처벌 요구에 응하지 않자, 무왕은 돌궐, 거란과 협력하여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대문예를 암살하려 자객을 보내고 마도산에서 거란과 함께 당과 전투를 벌인다. 

 

- 732년 9월, 발해는 장문휴(고구려의 해상세력)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의 등주자사 위준 죽임

- 당은 등주의 발해군을 공격하고자 군대를 보냈으나 발해 병력은 이미 철수

- 733년 발해는 돌궐의 지원을 받아 거란을 도와 요서지역의 마도산 공격

- 당은 733년 1월 대문예를 유주에 파견하여 발해 토벌 시도 : 성과 무

- 당은 신라에 발해의 남쪽 국경지역 공격 의뢰 : 신라군의 성과 없는 철군

- 발해 무왕은 자객을 보내 대문예 암살 시도 했으나 실패 (아래 자료 참조)

"732년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 공격으로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죽이는데 성공하였다. 당은 등주의 발해군을 공격하고자 군대를 보냈으나, 군대가 도착했을 때 발해의 병력은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또 다음 해(733) 발해는 돌궐의 지원을 받아 당을 공격하던 거란을 도와 요서 지역에 있던 마도산(馬都山)에서 당과 전투를 치렀다. 이에 당은 733년 1월 대문예를 유주(幽州)로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토벌하게 하였다. 또한 신라로 사신을 보내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는 이 해 겨울에 출정하였지만 험한 경로와 추운 날씨로 인하여 전공을 거두지 못한 채 철군하였다. 당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당에 대한 선제공격에 성공한 발해 무왕은 여전히 대문예가 살아있음에 불만을 느꼈다. 이에 다시 자객을 보내 대문예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자료:발해-당 전쟁, 우리역사넷,

인용출처: https://blog.naver.com/lainfos/223137929361)

 

(4) 발해와 당을 둘러싼 국제적 배경

 

이 당시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적 배경이 발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거란과 돌궐과 협력하여 당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발해는 발해와 당의 사이에 있는 거란과 당의 븍쪽에 있었던 돌궐 적극적 이용​

 

"이처럼 발해와 당의 충돌은 그리 긴 기간 동안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발해가 당을 선제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양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한 파악이 선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발해는 자신들과 당 사이에 위치해 있던 거란과 당의 북쪽에 있었던 돌궐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 이무렵 거란과 돌궐은 밀접한 관계

- 698년 이진충의 반란 진합시 당은 돌궐의 힘을 빌림

- 돌궐은 이 기회를 틈타 거란에 영향력 확대

- 거란은 당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적극 협력

- 거란은 730년 영주, 732년 유주, 733년 마도산에서 당군과 전투

- 732년 발해가 바다 건너 등주 공격한 것과 거란의 당의 유주 공격은 밀접한 관련

- 733년 마도산 전투는 거란과 발해의 연합

- 당의 기록은 거란, 돌궐, 발해의 협력 확인 (아래 자료 참조)

 

"이 무렵 거란은 돌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696년에 일어난 이진충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반란 진압 과정에서 당은 돌궐에 힘을 빌리게 되었다. 돌궐은 이 기회를 틈 타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거란 역시 돌궐을 껄끄러워하는 당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거란은 730년 영주를 시작으로 732년에는 유주에서, 733년에는 마도산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732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한 사실은 같은 시기 거란이 당의 동북 방면을 공격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733년의 마도산 전투 역시 732년의 연장선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또 당 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거란은 돌궐·발해와 협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734년이후는 돌궐과 거란의 상황이 분열로 약해지며, 발해에게 불리하게 전개된다. 이후 736년 발해는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다. 

- 734년 돌궐 군주 비가가한의 사망이후 돌궐의 분열

- 돌궐의 지원 없는 거란, 734년 4월 당군에 격파되고 12월에 당에 복속

- 신라 734년 단독으로 발해 공격 시도 (아래 자료 참조)

"따라서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한 사건의 배경에는 당의 대외정책에 대응하여 주변 세력들이 연합한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에 대항하였던 발해, 거란, 돌궐은 일찍이 당에 의해 멸망하여 기미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 집단이었고, 당의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이 무측천의 즉위와 그 세력들의 전횡으로 인하여 잠시 주춤한 사이에 이들은 모두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고, 이 무렵 당에 대한 공세로 전환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734년 돌궐의 군주였던 비가가한(毗伽可汗)이 사망하면서 돌궐 내부는 가한의 자리를 두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돌궐은 더 이상 외부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었고, 돌궐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거란 역시 734년 4월에 당군에 격파되어 그 해 12월에 다시 당에 복속되었다. 또한 당의 편에 서있었던 신라 역시 734년에 단독으로 발해 공격을 시도하자, 국제 정세는 발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발해 무왕은 고립무원의 형세 막기 위해 당과 화친 추진

- 736년 당의 전쟁 포로 돌려 보내며 화친 요청

- 당 역시 억류한 발해 사신 풀어 주며 전쟁 끝냄

- 737년 발해 무왕 사망으로 발해의 대당 강경외교 철회 (아래 자료 참조)

 

 

"이에 무왕은 고립무원의 형세를 막기 위해 당과의 화친을 추진하게 되었다. 736년 전쟁에서 사로잡은 당의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당에 화친을 요청했고, 당 역시 억류하고 있었던 발해 사신을 풀어주면서 양국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737년, 당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주도했던 무왕이 사망하면서 발해의 대당 강경외교는 철회되었다."

(자료:발해-당 전쟁, 우리역사넷,

인용출처: https://blog.naver.com/lainfos/223137929361)

 

아래 자치통감 자료에서도, 733년 1월(봄) 당현종은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 대무예를  토벌케 하였다 기록한다. 유주공격은 732년 거란이 공격하였으며, 유주는 대대로 연나라 사람 거주지역이었으며  (https://blog.naver.com/lainfos/223142643829 자료 참조), 요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733년 정월의 당의 반격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낙양 근처로 파악되는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 거란의 공격에 패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본다. 

"개원(開元) 21년(733) 봄 정월 정사(丁巳) ……(중략)…… [당(唐)]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 대문예(大門藝)를 유주(幽州)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왕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737)를 토벌하게 하였다." (『자치통감』권213, 「당기」29 현종)

 

2) 돌궐과 당의 상황

 

당시 돌궐이 발해와 협력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필자는 돌궐을 해상세력인 북유럽의 세력으로 추정했다. (https://lainfos.tistory.com/221  & https://lainfos.tistory.com/287 자료 참조)

 

반면 중공사가들은 현 중공의 북쪽 지역으로 추정한다. 현 중공의 북쪽지역은 모두 육지 지역이다. 육지전투에서는 산성과 지형을 이용한 요새구축으로 바다로 침범하는 세력보다 방어가 용이하다. 현재의 중공지역은 동지나해로 침략하는 것이 더 용이한 상황이나,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이 당시 당나라가 돌궐의 침입에 매우 허약했던 것은 돌궐이 해상세력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판단된다. 따라서 해상세력인 발해와 돌궐의 협력으로 당나라를 용이하게 침범하고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의 중공지역에서 추정하는 돌궐지역과 발해지역에서는 서로가 해상으로 협력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다. 따라서 돌궐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것을 파악하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필자는 중국사의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 등이 돌궐의 침입을 받아 속국이 되거나 화친하며 조공을 받친 것을 알고 있다. (https://lainfos.tistory.com/233  https://lainfos.tistory.com/270 글 참조) 이글들에서 돌궐은 북유럽의 해상세력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프랑크왕국 지역의 북주, 북제, 수나라, 당나라를 괴롭혔다. 

 

아래 당나라 측천무후이후 시기의 돌궐의 당나라 침입 및 괴롭힘은 이러한 해상세력인 돌궐이라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발해도 북유럽의 발트해에서 활발히 활동한 해상세력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https://lainfos.tistory.com/255 글 참조), 역시 북유럽의 해상세력인 돌궐과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격한 것이 아닌가 한다. 

 

- 측천무후 - 예종 대까지 하북을 공포로 몰아 넣은 돌궐의 묵철가한

- 묵철가한 의 716년 죽음 -> 돌궐의 약화

- 발예고, 회흘, 동라, 습, 복고 등 돌궐에 복속한 5개 부족 당에 귀부;당의 북방경계선 안정

- 이후 비가가한(빌게카칸), 궐특근(퀼테긴)에 의해 상당한 회복, 묵철의 전성기 위용 안됨

- 당 현종의 개원지치(713-741): 돌궐수하 부족들을 귀부 시켜 돌궐 침입 저지에 전력투구

  (아래 자료 참조)

 

"이러한 대외 활동에는 천운도 따랐다. 측천무후 치세부터 예종 대에 이르기까지 돌궐의 가한으로써 군림하며 돌궐 제2제국을 전성기에 올려놓고 하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묵철가한(카파간 카간)이 무척이나 허무한 죽음[15]을 당함으로써(716년) 돌궐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발예고ㆍ회흘ㆍ동라ㆍ습ㆍ복고 등 돌궐에 복속되었던 5개 부족이 한꺼번에 귀부해오면서 북방국경선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후 대처에서 미숙함을 보이면서 뒤를 이은 비가가한(빌게 카간)-궐특근(퀼 테긴)에 의해 다시 돌궐은 상당한 세력을 회복하지만 묵철의 전성기와 같은 압도적인 위용은 보여주지 못하게 되면서 현종은 상당히 여유있게 돌궐에 대응할 수 있었다. 물론 개원지치 시절엔 그래도 돌궐이 여전히 힘을 내고 있던 시기이기에 기본적으로는 돌궐 수하 부족들을 귀부시키고 돌궐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17] "

 

(자료 : 당 현종, 나무위키)

 

3) 토번과 당의 상황

 

토번은 발해의 등주 공격과는 관련이 없으나, 이시기 당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필자는 토번의 전신인 토욕혼이 프랑스의 아키텐지역 바로 남쪽 스페인의 Galicia 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 (https://lainfos.tistory.com/57 글 참조) 하였으므로 더욱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 자료에서 보면, 측천무후시기 토번의 가르친링은 당나라와 전쟁을 하며 당나라를 매우 위협한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가르친링에 대한 자료  (https://blog.naver.com/lainfos/223144394651)를 보니 토번은 강주(康州)에서, 당항(黨項)에서, 청해(靑海)에서, 당나라와 싸웠다. 

 

중공사학자들은 강주를 중앙아시아로 주장하고 있다. 당나라와 토번이 여기까지 와서 싸우는 것은 그들이 만든 지도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당항은 당항성, 당항포의 당항이다. 청해는 푸른 바다라는 의미이다. 중공의 청해성은 바다와 아무 관련이 없다. 즉 중공사학자들의 추정, 그리고 당항성을 한반도에서 찾는 한국의 제도권 사학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말하고 있다. 

 

필자는 강주를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https://lainfos.tistory.com/367 글 참조).   

당항은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가 아닌가 추정했다.  (https://lainfos.tistory.com/376 글 참조).

청해는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는 지중해로 추정했다. (https://lostcorea.tistory.com/694 글 참조).

 

따라서 상기의 토번은 이베리아반도 남부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이며, 당나라가 이 지역까지 내려와 전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서고트왕국인 고구려가 망한 후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후 신라의 사라센세력이 이 지역을 점하게 된다. 신라는 나당전쟁을 하며, 고구려의 부흥세력과 합세하기도 했다. 과연 그 지역이 어디인가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혹시 아베리아 반도 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서 후일 추가로 분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측천무후 즉위 (황후:654-683, 황태후:683-690, 황제:690-705) 초, 토번의 가르친링은 당나라 안서 사군을 넘기고 서돌궐 반을 나누어 먹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위세가 강했음

- 700년 가르친링이 내부 정변으로 숙청된 후 토번은 약화됨

- 710년대 토번은 강성하여 당나라 금성공주가 시집가고, 당나라는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지역을 헌납

- 토번은 기병 충원하여 714년 당나라에 대규모 침공 

- 모병제로 재정비한 당은 729년, 석보성(안서, 하서, 농우지역의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을 삭방절도사 이의가 점령 

- 토번은 기세가 꺾여 730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 요청

- 737년 토번과 당의 전쟁 발발 

- 741년 석보성을 토번에게 다시 빼앗김

- 당은 또 다른 요충지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하여 토번을 상대로 우위를 점함

 (아래 자료 참조)

 

" 이시기의 토번은 매우 강성했으며, 측천무후 즉위 초 가르친링은 당나라에 안서 사군 우리에게 넘기고 서돌궐 반 잘라서 나눠 먹는 거 어떠심? 이라고 제안할 정도로[18]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700년 가르친링이 토번 내부의 정변으로 인해 숙청 당하고, 이후 토번은 정치적 혼란에 의해 약화되었다. 그래도 개원 초기(710년대) 토번은 상당히 강성하였던 데다 경운 2년(예종 시기. 710년) 토번으로 시집간 금성 공주[19]의 탁목읍으로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 지역을 그냥 줘 버리는[20] 삽질을 한 결과 다수의 기병을 충원하는 데 성공한 토번군이 714년 대규모로 침공해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나[21], 군제 재정비를 마무리지은 당은 점차 토번의 침공을 막아내고 밀어붙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729년 안서-하서-농우 지역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이었던 석보성을 삭방 절도사 이의[22]가 점령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인 토번은 730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을 요청했다.

이후 737년 다시 토번과 전쟁이 발발하고 석보성을 741년에 다시 빼앗겼지만, 당은 또다른 요충지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하여 토번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였다."

(자료 : 당 현종, 나무위키)

즉 이베리아 반도가 토번과 당의 각축장이 된 것을 고려하고, 발해의 등주 공격에 대해서는 토번의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등주는 적어도 이베리아 반도에는 없었다는 결론이 된다. 즉 등주는 이베리아 반도 북쪽의 프랑스지역에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4) 거란과 당의 상황

 

거란은 중국의 우측에, 그리고 발해의 좌측에 있었다. 즉 거란은 요동과 요서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 732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할 때, 거란은 연나라 지역인 유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돌궐과 거란, 발해가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격했다 한다. 733년 마도산 전투에서는 거란과 발해가 연합하여 당나라에 싸운 것으로 아래 기록된다. 

- 이무렵 거란과 돌궐은 밀접한 관계

- 698년 이진충의 반란 진압시 당은 돌궐의 힘을 빌림

- 돌궐은 이 기회를 틈타 거란에 영향력 확대

- 거란은 당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적극 협력

- 거란은 730년 영주, 732년 유주, 733년 마도산에서 당군과 전투

- 732년 발해가 바다 건너 등주 공격한 것과 거란의 당의 유주 공격은 밀접한 관련

- 733년 마도산 전투는 거란과 발해의 연합

- 당의 기록은 거란, 돌궐, 발해의 협력 확인 

(아래 자료 참조)

 

"이 무렵 거란은 돌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696년에 일어난 이진충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반란 진압 과정에서 당은 돌궐에 힘을 빌리게 되었다. 돌궐은 이 기회를 틈 타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거란 역시 돌궐을 껄끄러워하는 당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거란은 730년 영주를 시작으로 732년에는 유주에서, 733년에는 마도산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732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한 사실은 같은 시기 거란이 당의 동북 방면을 공격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733년의 마도산 전투 역시 732년의 연장선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또 당 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거란은 돌궐·발해와 협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 발해-당 전쟁, 우리역사넷,

인용출처 :  https://blog.naver.com/lainfos/223137929361)

 

거란은 후에 요나라를 건국하며, 발해를 멸망 시켰다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요나라는 발해의 극히 일부인 요동지방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요나라가 신성로마제국이 된 것 같다. (https://lostcorea.tistory.com/1673 글 참조). 거란은 요나라 시기에도 유주를 놓고 싸웠다. 유주는 요서지방에 있었다 한다. 즉 거란과 요나라는 요서지역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사가들의 주장하는 요나라는 훨씬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따라서 이들은 틀린 주장을 하고 있다. 반면 필자가 주장하는 거란인 요나라는 프랑스 론강의 우측지역이고 현재의 독일 서쪽지역이다. 따라서 요서인 유주지역과 마도산 전투가 있던 지역은 프랑스의 프로방스지역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Narbonne가 낙양이 된다. 천진교도 이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이 지역은 지중해인 청해에서 근접이 용이하다. 즉 발해가 이 지중해를 통해 수군으로 공격하고 거란은 육로를 통해 마도산지역에 진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5) 신라와 당의 상황

 

신라는 이때 성덕왕 시기로서,  733년 당 현종이 신라에게 발해 남쪽 공격을 의뢰했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1619936178 자료 참조)

 

"경신(庚申)에 태복 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게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1장(丈) 가까이 내리고 산길이 험하여 [신라의] 군졸이 절반이나 죽으니 공(功)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자치통감』권213, 「당기」29 현종)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과 함께 범양(范陽)⋅신라(新羅)의 군사 10만으로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공이 없었다. " (『신당서』권136, 「열전」61 오승체)

 

자치통감과 신당서 내용을 고려하면, 당나라 사신 김사란은 당군과 범양, 신라의 군사와 함께 10만의 군사로 발해 남부를 공격했으나, 큰 눈과 험한 산길로 인하여 군졸의 절반이 죽으니 공도 세우지 못하고 철군했다.  즉 당군과 범양의 군사, 신라의 군사가 연합하였으나 추위와 험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10만 군사의 반을 잃고 회군했다는 것이다. 발해에 대패한 전쟁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당시 신라가 이태리반도와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등을 지배했다고 추정하였다. (https://lainfos.tistory.com/321 , https://lainfos.tistory.com/353 , https://lainfos.tistory.com/376, https://lainfos.tistory.com/367 글 참조).

 

이러할 때, 발해 남쪽 공격은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알프스산맥쪽이고 다른 하나는 피레네산맥쪽이다. 여기서 범양의 지명이 키가 될 것 같다. 즉 범양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피레네산맥인지 알프스산맥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범양에 대한 자료를 보면, 범양은 유주자사에 속했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3142643829 자료 참조)

 

즉 요서에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피레네산맥이 아니고 알프스 산맥에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신라, 당, 범양의 연합군은 발해 남쪽 알프스산맥의 전쟁에서 추위와 산악지형에 더해 발해의 군사에 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수로 추정되는 Rhone 강 우측의 알프스 산악지형 지도 (source : Wikipedia)

 

필자가 주장하는 지형에서는 상기 신라, 범양, 당나라군의 참패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중공사가들이 주장하는 지형에서 이것이 가능한가? 

 

우선 발해의 남쪽이라면 한반도 신라가 발해와 접한 곳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 지형에서 이런 추위와 험악한 지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범양은 유주자사에 속하니 범양지역에 신라가 간다면 바다를 넘어 요서에 진출해야 한다. 발해를 육로로 가로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요하까지 수군으로 가서 진출해야 한다. 그리고 요서의 당나라군과 합세해야 하는 상황이다. 신라의 북쪽 국경도 위험하니 저윽이 어려운 작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공의 요하에 이런 험한 지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당시 요하의 주위는 거란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래 지도 참조) 즉 한반도와 중공지역의 거란, 당나라를 고려하면 이러한 상황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현 중공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역사적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6) 발해의 등주 공격(732)이후 발해와 당의 상황

 

발해 무왕은 732년 등주공격이후, 이듬해 733년 자객을 보내 동도(낙양)성 외곽의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를  암살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발해 무왕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공격했다 (아래 자료 참조).

 

천진교는 낙양성 밖의 낭만이 있는 다리로서 백거이 등이 시를 지은 곳이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3142107438  https://blog.naver.com/lainfos/223142106432, https://blog.naver.com/lainfos/223142109275 공유자료 참조)

 

당현종은 하남부에 명령하여 대문예를 공격한 자객들을 죽이라고 명하였다고 아래 기록된다. 

 

"무예는 문예를 원망함을 그치지 아니하여 몰래 자객을 보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죽이려했으나 실패했다. 현종이 하남[부](河南[府])에 [문예를 공격한] 적당(賊黨)들을 찾아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 (『자치통감』권213, 「당기」29 현종)

 

"무예가 자객을 보내 동도(東都, 낙양)에서 문예를 습격하게 하고,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하였다. (『신당서』권136, 「열전」61 오승체)

 

상기 신당서 자료를 보면, 낙양에 가까운 천진교에서 가까운 곳에 마도산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공땅에서는 요서지역이 아니다. 발해가 바다로 접근해 황허강 따라 올라가야 중공측이 주장하는 낙양에 도달한다. (아래 두번째 지도 참조). 이는 매우 위험한 전략이다. 대문예를 암살하기 위해 치고 빠지는 자객을 보내는데, 이러한 긴 여정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이곳에서 가까운 마도산에서 거란과 발해는 당나라군과 전투를 하였다. 중국사가들이 주장하는 거란의 위치에서 낙양으로 내려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상당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전에 이미 당나라군과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냥 마도산에서 전투했다 한다.  거란군이 마도산까지 오는데 가깝거나 하여 큰 저항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중공사가들이 주장하는 중공의 낙양위치에서는 설명이 안된다. 

 

기존 중공사가 및 한반도 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한 발해 당 거란 돌궐  흑수말갈의 위치 지도

 

중공 사가들이 주장하는 당나라지역에서의 하남도 위치 지도 (자료 : 위키백과)

(By 바람따라구름따라 - https://elfqkr.tistory.com/entry/%EB%8B%B9%E5%94%90%EC%9D%98-%EA%B8%B0%EB%AF%B8%EC%A3%BC%EB%A1%9C-%EB%B3%B4%EB%8A%94-%EA%B3%A0%EA%B5%AC%EB%A0%A4%EC%9D%98-%EA%B0%95%EC%97%AD,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1428036)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서는 이들 지역이 동시에 요서지역이 된다. (상기 론강 유역 지도 참조). 따라서 중공사가들과 한반도 신라를 주장하는 사가들의 주장은 이러한 전쟁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즉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 본 자료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발해의 상황

(1) 발해가 주변으로 세력 팽창하자 흑수말갈은 당과의 접촉 도모

(2) 흑수말갈은 722년,  725년, 726년, 728년에 걸쳐  당과 교섭

(3) 당은 흑수말갈 지역을 훅수부로 삼아 기미지배 시도

(4) 흑수말갈은 과거와 달리 발해에 알리지 않은 체 당과 독자적인 접촉

(5) 당나라도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함

(6) 발해는 위협을 느껴 훅수말갈을 공격하기로 결정

(7) 726년 발해 무왕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 공격 하게함

(8) 대문예는 당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공격 중단 건의 및 당나라에 망명

(9) 발해 무왕은 사촌형인 대일하에게 흑수말갈 공격 하게함 : 일정한 성과 거둠

(10) 발해 무왕은 망명한 대문예를 죽일 것을 당에게 요구

(11) 당은 대문예를 유배했다고 하고 죽이는 것은 거절

(12) 발해는 당을 선제 공격하게됨

(13) 732년 9월, 발해는 장문휴(고구려의 해상세력)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의 등주자사 위준 죽임

(14) 당은 등주의 발해군을 공격하고자 군대를 보냈으나 발해 병력은 이미 철수

(15) 733년 발해는 돌궐의 지원을 받아 거란을 도와 요서지역의 마도산 공격

(16) 당은 733년 1월 대문예를 유주에 파견하여 발해 토벌 시도 : 성과 무

(17) 733년 1월(봄) 당현종은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 대무예 토벌케 함(자치 통감)

(18) 당은 신라에 발해의 남쪽 국경지역 공격 의뢰 : 신라군의 성과 없는 철군

(19) 발해 무왕은 자객을 보내 대문예 암살 시도 했으나 실패

(20) 발해는 발해와 당의 사이에 있는 거란과 당의 븍쪽에 있었던 돌궐 적극적 이용​

(21) 발해 무왕은 고립무원의 형세 막기 위해 당과 화친 추진

(22) 736년 당의 전쟁 포로 돌려 보내며 화친 요청

(23) 당 역시 억류한 발해 사신 풀어 주며 전쟁 끝냄

(24) 737년 발해 무왕 사망으로 발해의 대당 강경외교 철회

 

거란의 상황

(25) 이무렵 거란과 돌궐은 밀접한 관계

(26) 698년 이진충의 반란 진압시 당은 돌궐의 힘을 빌림

(27) 돌궐은 이 기회를 틈타 거란에 영향력 확대

(28) 거란은 당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적극 협력

(29) 거란은 730년 영주, 732년 유주, 733년 마도산에서 당군과 전투

(30) 732년 발해가 바다 건너 등주 공격한 것과 거란의 당의 유주 공격은 밀접한 관련

(31) 733년 마도산 전투는 거란과 발해의 연합

(32) 당의 기록은 거란, 돌궐, 발해의 협력 확인

(33) 734년 돌궐 군주 비가가한의 사망이후 돌궐의 분열

(34) 돌궐의 지원 없는 거란, 734년 4월 당군에 격파되고 12월에 당에 복속

(35) 신라 734년 단독으로 발해 공격 시도

 

돌궐의 상황

(36) 측천무후 - 예종대 (690-712)까지 하북을 공포로 몰아 넣은 돌궐의 묵철가한

(37) 묵철가한 의 716년 죽음 -> 돌궐의 약화

(38) 발예고, 회흘, 동라, 습, 복고 등 돌궐에 복속한 5개 부족 당에 귀부;당의 북방경계선 안정

(40) 이후 비가가한(빌게카칸), 궐특근(퀼테긴)에 의해 상당한 회복, 묵철의 전성기 위용 안됨

(41) 734년 돌궐 군주 비가가한의 사망이후 돌궐의 분열

(42) 당 현종의 개원지치(713-741): 돌궐수하 부족들을 귀부 시켜 돌궐 침입 저지에 전력투구

토번과 당의 상황

(43) 측천무후 즉위초 토번의 가르친링은 당나라 안서 사군을 넘기고 서돌궐 반을 나누어 먹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위세가 강했음

(44) 700년 가르친링이 내부 정변으로 숙청된 후 토번은 약화됨

(45) 710년대 토번은 강성하여 당나라 금성공주가 시집가고, 당나라는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지역을 헌납

(46) 토번은 기병 충원하여 714년 당나라에 대규모 침공 

(47) 모병제로 재정비한 당은 729년, 석보성(안서, 하서, 농우지역의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을 삭방절도사 이의가 점령 

(48) 토번은 기세가 꺾여 730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 요청

(49) 737년 토번과 당의 전쟁 발발 

(50) 741년 석보성을 토번에게 다시 빼앗김

(51) 당은 또 다른 요충지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하여 토번을 상대로 우위를 점함

 

신라의 상황

(52) 당나라 사신 김사란은 733년 당군과 범양, 신라의 군사와 함께 10만의 군사로 발해남부 공격

(53) 큰 눈과 험한 산길로 인하여 군졸의 절반이 죽으니 공도 세우지 못하고 철군

(54) 신라 734년 단독으로 발해 공격 시도

 

III. 등주와 낙양, 천진교, 마도산의 위치 정보 분석

 

1) 등주에 있던 등나라에 대한 정보

 

등주(登州)는 과거 등(鄧)나라가 있던 지역이라 한다. 그래서 등나라 자료를 찾아 보니 등나라는 기원전 7세기, 춘추시대에 초문왕에 망했다 한다.  나무위키자료에 의하면, 초문왕 (재위 : BC 690 - BC 675)은 BC 678에 등나라를 점령했다. 초문왕은 식나라, 등(鄧)나라, 신(申)나라, 기나라, 채나라, 등을 쳐서 강역을 넓히고 초나라를 장강일대의 패권국이 되게 만드는 기반을 만들었다. (자료 : 초문왕, 나무위키 참조) 

 

즉 등나라는 초나라가 있던 장강일대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등나라도 장강일대에 있었으며, 등나라가 있던 등주도 장강일대에 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즉 장강의 위치가 등주의 위치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2) 발해가 공격한 등주의 위치정보

 

나무위키자료에 의하면 발해가 호타하를 넘어 등주를 공격했다 한다. 호타하가 어느 곳인지 모르지만, 일단 강을 타고 들어가서 등주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위의 요약자료에서, (13) 732년 9월, 발해는 장문휴(고구려의 해상세력)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의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다 했다. 장문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무위키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의 해상세력의 잔당이라는 설이 있다 한다. 필자는 광개토태왕이 진출한 스코틀란드, 이베리아반도 등을 고려할 때 강력한 고구려 수군이 북해, 대서양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장문휴가  해상세력이라 한다면, 즉 수군의 등주 공격이며, 등주는 바닷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가 군대를 보냈을 때는 발해군이 이미 떠나고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위의 요약내용 (14) 당은 등주의 발해군을 공격하고자 군대를 보냈으나 발해 병력은 이미 철수).  발해 수군(장문휴)의 일시적 공격 (raids?) 및 철수일 수 있는 것이다.

 

3) 발해 무왕이 자객 보내 대문예 암살 시도한 낙양 근처 천진교 위치 정보

 

자치통감 자료에 의하면 발해 무왕은 자객을 보내 동도(낙양)성 외곽의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를  암살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발해 무왕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공격했다. 즉 낙양성, 천진교, 마도산 모두 바다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추정된다. 

 

천진교는 낙양성 밖의 낭만이 있는 다리로서 백거이 등이 시를 지은 곳이다. 천진교의 천진(天津)은 강이나 바다에 접한 수군기지 또는 나루터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대 지도의 중공에서는 천진(텐진)과 낙양의 거리가 멀다. (아래 지도 참조). 발해의 수군의 접근이 용이한 곳이어야 하는데 아래 지도는 그렇지 않다. 

 

당현종은 하남부에 명령하여 대문예를 공격한 자객들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즉 낙양성, 천진교는 하남부(강의 남쪽지역)와 근접한 곳이라는 것이다. 위의 지도의 당나라 하남도의 위치가 하남부가 아닌가 한다. 낙양을 포함한 지역으로 보인다. 

 

현재 중공내 황허강, 요하 및 낙양(뤄양) 장안(시안), 천진(텐진)의 위치 지도

 

4) 발해, 거란이 공격한 요서의 유주, 마도산의 위치 정보

상기 요약문에서 (15)번은 발해가 돌궐과 거란과 연합하여 요서지역의 마도산을 공격했다고 했다. ((15) 733년 발해는 돌궐의 지원을 받아 거란을 도와 요서지역의 마도산 공격)

 

중공사가들의 주장에 의한 발해의 등주 공격시 주위 국가들의 지형 

 

돌궐의 지원을 돌궐의 병력 합류로 해석할 수 있는데,   상기 중공지도에서는 불가능하다. 마도산은 요서지역에 있다 했는데, 이미 거란이 요서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즉 상기 지도와 역사적 기록이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마도산이 낙양에 가까이 있다면 거란, 발해 모두 황허강을 타고 한참 들어오거나, 돌궐이 육로로 한참을 내려 와야 한다. 그동안 당나라는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낙양은 제2의 수도인 동도라 하지 않았는가? 즉 이마저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즉 중공측 사가들의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매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해는 발해와 당의 사이에 있는 거란과 당의 븍쪽에 있었던 돌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한다. 그런데 발해는 당나라에 해상으로 접근해야 공격할 수 있다. 육상으로는 발해는 거란의 동쪽에 있어 거란영토를 횡단해야 당나라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육로로는 불가한 공격루트이다. 

 

돌궐은 당나라의 북쪽에 있다. 위 지도에서 돌궐과 발해의 협력은 육로로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즉 돌궐의 발해 지원이나 합세한 공격은 위 지도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한 북유럽의 돌궐은 해상을 통해 얼마든지 발해와 연합할 수 있다. 즉 돌궐은 해상세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 지도에서는 돌궐이 해상세력이 될 수 없다. 

 

5) 후백제의 수군과 거란의 사신이 잡혀 죽은 후당의 등주 위치

 

등주에 관한 기록중에 후당 시기에 관련 기록이 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35명이 927년 견훤의 후백제에 왔다고 한다. 견훤은 이들을 배웅하려 후백제의 수군을 동행시켜 귀로를 도왔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에서 잡혀 모두 죽었다고 한다.

 

중공사가들의 주장에 의한 후당 이존욱시기의 지도

 

중공사학자들은 후당의 위치가 하남도를 포함한 지역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하남도의 기준이 되는 강은 황허강으로 나타난다. 즉 황허의 남쪽을 하남이라 한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후당내에 등주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위에서 등나라가 있던 곳을 등주라 했다 하였다. 춘추시대 등나라는 초문왕에 멸망했고 초문왕은 장강일대의 강국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위 지도를 보면 장강유역에 있는 초나라와 후당은 거리가 있다. 후당은 황허를 끼고 있고 초나라는 장강을 끼고 있다. 따라서 위의 지도는 중국의 역사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등주는 등나라의 위치를 고려하면 장강 주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양이나 장안은 장강의 북쪽에 있는 것으로 역사기록은 말한다. 필자는 프랑스의 Narbonne가 낙양이 아닌가 했다. 그렇다면 장강은 스페인의 북쪽 국경에 가까운 Ebro river가 될 수 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유일한 긴 강이다. (아래 지도 참조) 그리고 등주는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필자는 견훤이 불가리아 1제국의 Simeon I왕이라 추정했다.

(https://lostcorea.tistory.com/1653 글 참조)

 

후백제는 강주, 무주 등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베리아 반도 일부를 점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당시 거란은 서구사의 Allemania이며, 요수인 론강 주위에 있었다. 요나라도 이 근처인 신성로마제국이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요나라는 론강의 우측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백제 수군이 거란 사신 35명을 배웅했다면 프랑스 남부 지역에 이르려 했을 것이다. 만약 이 부근의 Ebro river를 장강이라 한다면 이 근처에 등주가 있게 된다. 따라서 거란사신과 일부 후백제 수군이 후당의 등주에서 잡혀 죽었다는 사건의 가능성이 Ebro river에서 일어 났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지형 또한 해상세력 발해가 지중해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베리아 반도내의 강들 

 

이러한 추정은 후백제와 거란 사신이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으로 올라 가다 프랑스 서해안에서 잡히는 시나리오 보다 훨씬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구나 강주와 무주에 견훤의 아들들이 관리하고 있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추정이 맞는다면 장강은 Ebro river가 될 수 있고, 프랑스의 Loire강은 황허강이 될 수 있다.

필자는 르와르강이 장강이 아닌가 했는데, 다시 분석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장강 이남의 남조의 역사는 프랑스 남부가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에 있게 된다. 북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월나라, 초나라를 고려한다면 이것이 더 가능성이 높아진다.

 

토번의 가르친링이 측천무후 초기의 당나라와 당항, 강주, 청해에서 싸웠다는 기록은 당나라의 수군과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수군이 싸운 지역은 꼭 당나라가 아프리카 북단까지 내려왔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아프리카 북단까지 당나라가 진출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신라인 우마이야왕조가 고구려인 서고트왕국을 점령한 것이 711년이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668년이다. 그러니 668-711년 사이에 고구려의 부흥운동이 있을 수 있고, 신라와 당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당전쟁을 했을 수 있다. 문무왕이 나당전쟁에서 22곳의 전쟁에서 당나라를 이겼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바다에서의 해전이라 한다. 필자는 이 해전이 백제의 유역인 지중해를 놓고 싸운 것이 아닌가 한다. 지중해에서 해전을 많이 했다면, 가까운 이베리아 반도를 놓고 당나라와 신라가 싸울 수 있다. 668-711년 사이 약 40년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놓고 나당전쟁이 있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마이야왕조가 프랑스 Tours지역을 침입(732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시기에 발해의 등주 기습공격(732년)이 있었고, 그외 낙양 주위의 마도산전투(733년)가 당나라와 발해-거란 사이에 있었다.  돌궐도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와 연합작전을 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이 당시의 상황파악이 복잡하다. 이는 다음편 프랑크왕국의 역사 연구에서 보다 확실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IV. 마무리 글 (1편)

 

금번의 글(1편)에서는,  당나라와 신라, 발해, 돌궐, 거란, 토번의 관계를 살펴 보며, 발해의 당나라 등주공격(732년)의 배경을 분석하고, 또한 733년 신라와 당의 반격의 실패, 그리고 당의 낙양 근처의 천진교에서의 대문예 암살시도 및 요서의 마도산에서 당 - 발해/거란 전투를 살펴 보며, 그 위치를 추정해 보았다.

 

그리고 춘추시대(기원전 7세기)의 등나라가 있던 등주, 927년 후당의 등주에서의 후백제 수군 및 거란 사신의 죽음 사건을 통해 등주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또한 돌궐과 발해의 연합이 가능한 상황이 현 중공지역에서 가능한지 알아 보고, 필자의 추정인 북유럽의 돌궐 해상세력이 발해의 해상세력과 연합하기 더 용이하며, 더 가능성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등나라를 정벌한 초나라의 초문왕이 장강일대의 강국이었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등나라, 등주가 장강에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이 현 중공지역을 중심으로한 중국역사에는 맞지 않는 것을 지적하였다.

 

 

다음 글(2편)에서는, 730년대, 프랑크왕국과 사라센제국인 우마이야 왕조와의 전쟁 등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살펴 보며, 발해의 등주 공격 등과 관련한 검토를 하고자 한다.  이미 본글이 너무 길어져 분리하여,  (2)편에 이어서 글을 쓰고자 한다. 

 

- 이후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