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욕혼은 대서양변 포루투갈에 있었던 Suebi왕국이다
2021. 5. 14. 13:55ㆍ한국사/중국사
부제 : 선비족은 중부유럽에 있었던 Suebi족이다.
필자는 그동안 진(秦), 한(漢), 북위 등의 중국(衆國)이 론강인 요수 서쪽에 있는 나라로 추정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선비족이 세운 수나라, 당나라도 여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나라 시절에 토번을 정벌했다 하였다. 토번은 지금의 티베트라 중공 사가들은 주장한다. 그러면서 현 중공의 위치가 제 중국(衆國)의 역사의 중심지라 주장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필자의 주장과 토욕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토번이 과연 서구유럽의 어디에 있었는지 아니면 중공 사가들이 주장하는 지금의 티베트가 맞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토욕혼과 토번의 두산백과 자료를 검토해 보자.
"토욕혼[吐谷渾]은 4세기 중엽 이후 7세기까지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나라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나라가 동서간의 국제무역 중계를 생명으로 하는 상업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 점인데, ........, 북방의 유목민 국가인 유연(柔然)이나 남방 티베트가 세운 여국(女國)과의 교섭도 활발하였으며, ..... 중국의 북조(北朝)와 남조(南朝)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635년 당(唐)나라에 항복하여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663년 ...토번(吐蕃)에게 멸망당하였다."
(자료 : 토욕혼, 두산백과)
즉 토욕혼은 4세기중엽부터 7세기까지 존재한 선비족의 나라이며, 국제무역을 중시한 상업도시의 성격을 가진 나라이며, 북방의 유연과, 남방의 여국(女國)과도 교섭이 활발하였으며, 북조와 남조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663년 토번에게 멸망당하였다.
그럼 토욕혼을 흡수한 토번은 어떤 나라인가? 아래 자료에서 보면, 토번은 7세기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나라로서, 토욕혼의 귀속을 놓고 당나라와 싸워 큰 전쟁을 했으며, 8세기 후반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의 지배력을 빼앗았다. 846년 망했다.
"토번[吐蕃]은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티베트왕국 및 티베트인(人)에 대한 당(唐) ·송(宋)나라 때의 호칭이다.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보에(Bod)라고 불렀으나 중국 사람들은 이들을 토번이라 칭했으며 .....6세기 후반에는 ... 왕조의 기초를 만들고, 손챈감포왕(王) 말기부터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동왕이 죽은 후 토욕혼[吐谷渾]의 귀속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에 의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8세기 후반 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西域)의 지배권을 빼앗기도 하였으나 ..... 846년 붕괴하였고 토번시대는 막을 내렸다. " (자료 : 토번, 두산백과)
즉 토욕혼은 선비족의 나라로서, 유연, 여국, 북위, 남조 등과 교류하였으며, 토번은 토욕혼을 놓고 당나라 크게 전쟁하였으며, 8세기 후반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나무위키 자료에서는 토욕혼에 대해 보다 상세한 자료를 제공한다. 즉 선비족인 모용씨의 일파가 세운 나라로서 서역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하남국, 백란국이란 명칭이 있었다. 371년에는 화북을 평정한 전진의 부견에게 조공하였다. 431년에는 북위와 함께 북하를 멸망시켰다. 7세기초에는 동돌궐과 함께 수나라에 종속되었고, 당나라때에 672년 이웃한 토번에 멸망당했다. 마지막 왕인 모용낙갈발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아래 자료 참조 : 토욕혼, 나무위키)
"토욕혼은 서진(西晉) 시대인 285년부터 7세기 후반까지 서역 지방에 위치했던 국가로서, 국호의 어원은 시조인 모용토욕혼이다. 모용토욕혼은 요서 지방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지도자인 모용섭귀의 장남이다. 훗날 모용선비의 군주가 되어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일으키는 모용외와 사이가 좋지 않아 멀리 서역으로 이주하여 부사를 수도로 삼아 토욕혼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하남국(河南國)"이라 부르며, 티베트에서는 "아시(阿柴)"라고 불렀다. 나중에 국호를 "백란(白蘭)"으로 바꾸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는 명칭은 토욕혼이다.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던 중국 화북 지역과 전쟁과 교류가 잦았다. 371년에는 화북을 평정한 전진의 황제 부견에게 조공을 하기도 하였다. 10대 왕인 모용모괴(慕容慕璝)의 대(426~436)에 이르러서는 전란에 휘말린 진주와 양주의 유랑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세력이 좀 더 커졌다. 이때에 이르러 남쪽으로는 중국 남조와 교류하였고, 북쪽으로는 북위와 손을 잡고 북하를 공격하였으며 431년에 이르러 북하의 마지막 황제를 사로잡아 북위로 압송함으로써 멸망시켰다.
7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약해져서 동돌궐과 함께 수나라에 종속되었다. 7세기 중엽 이후로는 분열된 토번을 통일한 손첸 감포가 등장하였고, 강성해진 토번은 토욕혼을 크게 위협하였다. 토욕혼의 마지막 왕이었던 모용낙갈발(慕容諾曷鉢)은 토번의 침공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고, 토욕혼은 672년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 모용낙갈발은 당나라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자료 : 토욕혼, 나무위키)
다시 말하면 토욕혼은 서역의 모용씨 선비족의 하나로서, 화북의 전진, 북위에 가까운 나라로서, 이후 수나라, 당나라와 인접한 국가라는 것이다. 토욕혼과 토번의 위치는 전진, 북위, 수, 당에 있던 지역 근처라는 것이다. 특히 토욕혼은 북위와 함께 북하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토욕혼과 토번에 관한 아래 위키자료에서는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즉 북위의 계속된 토욕혼 공격에 마침내 473년 토욕혼 왕인 모용섭은 북위에 항복하고, 모용섭인의 뒤를 이은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북위 효문제가 책봉한 직위가 그 위치를 말해 주고 있다. 즉 서수제군사, 정서장군, 영호서융중랑장, 서해군개국공 등에서 보듯이 서쪽을 많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서수제군사, 서해군 개국공 등에서 보듯이 서해에 인접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지금의 티베트가 서쪽에 바다가 있는가? 절대 불가한 언급이다. 따라서 지금의 티베트는 토욕혼, 토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토욕혼의 시조인 모용토욕혼은 본래 모용선비의 수장인 모용섭귀의 서자로, 아버지로부터 부락민 1700가(家)를 물려받았다. 이후 아버지 모용섭귀가 죽고 285년에 적자인 모용외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모용토욕혼은 말을 방목하는 문제로 모용외와 충돌을 빚자 본래 근거지인 요동을 떠나 서쪽의 음산(陰山) 일대로 이주하였다.[1] 이후 영가의 난(307~312) 시기에 다시 서쪽의 감송(甘松) 일대로 이동하였으며, 그 영역이 백란(白蘭) 일대에까지 달하게 되었다. 모용토욕혼은 317년, 72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토욕혼이라는 국호가 바로 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건국 초기의 토욕혼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강족 · 흉노 등의 세력과 융합하였다.[2]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력충돌도 적지 않아서 329년, 수장인 모용토연이 휘하에 거느렸던 강족인 강총(姜聰)의 배신으로 칼을 맞아 죽기도 하였다.[3]
오호십육국시대
한편 토욕혼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화북의 이민족 국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371년에는 전진의 부견에게 말 1천 필과 금은 5백 근을 바치고 안원장군의 관작을 받았다. 또한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조공을 하고는 백란왕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토욕혼은 걸복건귀가 하사한 작위를 거부하고 충돌을 일으켰다가 걸복건귀의 침공을 받았고, 모용오흘제 때에 이르러서는 장안을 점령한 걸복건귀의 국경을 약탈하였다가 다시 침공을 받고 크게 패하여 1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를 잃었다. 이후에도 걸복건귀와 그 아들 걸복치반에게 수차례 충돌했으나 패하였는데, 모용수락간은 이로 인해 분을 참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
남북조시대
토욕혼은 모용아시 때(417~424)에 이르러 주변의 저족과 강족의 부락들을 합병함으로써 그 영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에 달하여 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4] 또한 모용모괴 때(424~436)에 이르러 진주 · 양주의 유랑민 및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흡수하여 남쪽으로는 촉한과 통하였고, 북쪽으로는 양주 · 대하와 통하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토욕혼은 중국 남조의 유송에 사자를 수차례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또한 북조의 북위와도 교류를 시작하여, 431년에는 북위와 연합하여 대하를 공격하여 그 마지막 황제인 혁련정을 사로잡고는 북위로 압송하였다.
이후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유송은 토욕혼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전을 전개하였는데, 토욕혼은 대체로 유송과 더욱 사이가 가까웠다. 이후 439년, 북위는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후에 토욕혼을 제압하기 위하여 444년 6월에는 토욕혼 내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였으며, 446년 8월에는 마침내 직접 토욕혼을 침략하여 서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451년에 집권한 모용섭인은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쳤고, 북위는 460년 4월에 다시 토욕혼을 공격하였다. 토욕혼은 북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유목민족의 특성을 살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이를 피하는 식으로 대응하였고, 북위는 끝내 토욕혼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470년 이후로도 북위가 수차례 토욕혼을 공격하여 초토화작전을 펼쳤고, 유송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기근에 시달리던 모용섭인은 결국 473년 8월에 북위에 항복하고 해마다 조공하였다. 모용섭인의 뒤를 이은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욕혼은 북위의 번국을 자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서》에 따르면 "새표(塞表) 내에서 부강한 나라로 불러지며, 거의 천조(天朝, 북위)에 준하는 관사(官司)를 두고 여러 나라에 칭제(稱制)하여 스스로 대국(大國)임을 자랑하였다."고 할 정도로[5] 주변 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과 위상을 구축하였다."
(자료 : 토욕혼, 위키백과)
그럼 토욕혼, 토번의 위치는 어디인가? 필자는 북위가 그리고 북연 등 연나라가 프랑스 Gaul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위키자료에서 말하는, 북위의 효문제가 책봉한 토욕혼에 대한 직위에서 언급한 '서해'는 '대서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토욕혼은 대서양에 가까이 있는 서유럽의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이 398년에 토욕을 정벌한 것으로 나오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 고트족왕이 히스패니아 지역까지 정벌한 것을 광개토태왕의 그것으로 판단했다. 즉 토욕혼은 서해인 대서양 가까이 있는 '서해군'의 나라라는 것이다.
"6대 가한인 모용시비(慕容視羆) 때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정복되었고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광개토태왕이 청해성과 신강성 방향으로 넘어 들어와 토욕혼을 공격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실로 지대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광개토태왕은 398년에 토욕혼과 숙신으로 군사를 보냈다. 이 때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北魏)가 후연(後燕)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盛樂)에서 평성(平城)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幽州)를 압박하자 북위(北魏)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숙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永樂八年條 [본문]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事."
(인용출처 :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선비가 세운 나라이다. 대선우,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토욕혼/토번 펌글 참조)
이러한 토욕혼에 대한 위치 추정에 도움을 주는 자료가 또 하나 있다.
우리는 위의 토욕혼 자료에서 유연, 여국에 대한 언급을 보았다. 따라서 여국에 대한 자료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즉 위키백과에서는 여인국이 토욕혼과 가까운 서해에 있다는 것이다.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은 여성들만 산다는 국가이다. 중국의 정사에서 서쪽 티베트에 존재했다고 하며, 서해에 또 다른 여성 왕국이 있었기 때문에 동녀국(東女國)이라고도 불린다."
(자료 : 여국, 위키백과)
아래 성호사설 자료에서는, 직방외기에 보면 여국은 달단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여전사가 활동하는 아마조네스를 생각나게 한다. 한서지리지에서는 유주에 특히 여자가 많다고 했다. 유주는 요동의 요소이다. 의무려산이 있는 곳이라 한다. 의무려산은 순임금이 봉해진 곳으로 요동에 있었다. 즉 여국이 요동과 요서에서 가까울 수 있으며,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했으니 여국도 서유럽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서쪽에 여국(女國)이 있다고 한다.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보면, 다만 “달단(韃靼)의 서쪽에 옛날의 여국이 있었다. 그 나라 풍속에는 봄철에 남자 한 사람만이 그곳에 오는 것을 허용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렸는데 지금은 다른 나라에 병합하고 그 명칭만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장 근사하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만 하면 죽여 버렸다고 하니, 그럼, 봄철에 들어오는 남자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빌려오는 것일 터인즉 이는 한때의 습속일 것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중국 12주 가운데서 대체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주(州)가 많다. 예주(豫州)ㆍ청주(靑州)ㆍ연주(兗州)ㆍ병주(幷州)의 4주는 남자 2에 여자 3, 양주(揚州)는 남자 2에 여자 5, 형주(荊州)는 남자 1에 여자 2, 유주(幽州)는 남자 1에 여자 3의 비율이나 옹주(雍州)는 남자 3에 여자 2, 기주(冀州)는 남자 5에 여자 3의 비율로서, 대체로 옹주는 남자가 가장 많고 유주는 여자가 가장 많다. 그러나 유주는 요동의 요소이다. 그 산(山)은 의무려(醫巫閭)이고 그 소산물은 고기와 소금이다. 지금 들으면 그 지역에는 여자가 적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래 여자들을 그곳에 팔아넘기곤 한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순(舜)이 기주ㆍ연주ㆍ청주ㆍ서주(徐州)ㆍ형주ㆍ양주ㆍ예주ㆍ양주(梁州)ㆍ옹주ㆍ유주ㆍ병주ㆍ영주(營州)의 12개 주를 설치하였는데, 우공(禹貢)에 와서 유주ㆍ병주ㆍ영주를 폐지하고 9주로 만들었고, 주관(周官)에 이르러는 서주ㆍ양주ㆍ여주를 폐지하고 유주와 병주를 첨가하였다. "
(출처 : 성호사설 1권 천지문, 여국, 인용출처 : 여국, 작성자 : 샛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월지국/여인국, 펌글 참조)
아래 위키자료에서는, 아마조네스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사마르트족의 국경지역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조네스(그리스어: Ἀμαζόνες) 또는 단수형으로 아마존(그리스어: Ἀμαζών)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여성 부족이다. 이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와 요정 하르모니아의 자손들이다. 여자 왕, 각료, 전사 등 여자들만으로 역할을 맡아 튼튼한 왕국을 이루었다. 이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 이웃 부족을 침입해 남자들을 빼앗아 강간한 뒤 죽이고, 태어난 아기는 여자만 거두었고 남자 아기는 죽이거나 이웃 나라로 보냈다. 여자 아기들도 오른쪽 유방을 도려내고 길렀는데 이는 활과 창을 잘 다루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이들은 전쟁을 가장 즐겼다.
헤로도투스는 아마조네스가 사르마트족의 스키타이 국경 지역(현재의 우크라이나)에 위치한다고 했으며, 다른 역사가는 소아시아, 리비아, 또는 인도 라고도 했다."
(자료 : 아마조네스, 위키백과)
우리는 아마조네스의 여전사 같은 기록이 켈트족의 문화에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아래 위키자료를 보면, 프랑스의 동북부, Champagne and Bourgone지방에서 La Tene 초기시대에 여성이 전쟁에 참여한 것을 일반적으로 보여준다 했다. 위의 여국에 대한 위키자료에서 동녀국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
또한 Insula Celts가 주거하는 브리튼지역에서는 여성의 전쟁 주도와 여전사의 역할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일반적인 자료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위의 여국에 대한 위키자료에서, 서해에 또 다른 여국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 브리튼지역이 이에서 언급하는 서해의 여국이 아닌가 한다.
"Very few reliable sources exist regarding Celtic views on gender divisions and societal status, though some archaeological evidence does suggest that their views of gender roles may differ from contemporary and less egalitarian classical counterparts of the Roman era.[113][114] There are some general indications from Iron Age burial sites in the Champagne and Bourgogne regions of Northeastern France suggesting that women may have had roles in combat during the earlier La Tène period.
However, the evidence is far from conclusive.[115] Examples of individuals buried with both female jewellery and weaponry have been identified, such as the Vix Grave, and there are questions about the gender of some skeletons that were buried with warrior assemblages. However,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weapons may indicate rank instead of masculinity".[116]
Among the insular Celts, there is a greater amount of historic documentation to suggest warrior roles for women. In addition to commentary by Tacitus about Boudica, there are indications from later period histories that also suggest a more substantial role for "women as warriors", in symbolic if not actual roles. Posidonius and Strabo described an island of women where men could not venture for fear of death, and where the women ripped each other apart.[117] Other writers, such as Ammianus Marcellinus and Tacitus, mentioned Celtic women inciting, participating in, and leading battles.[118] Posidonius' anthropological comments on the Celts had common themes, primarily primitivism, extreme ferocity, cruel sacrificial practices, and the strength and courage of their women.[119]
.......................
There are instances recorded where women participated both in warfare and in kingship, although they were in the minority in these areas. Plutarch reports that Celtic women acted as ambassadors to avoid a war among Celts chiefdoms in the Po valley during the 4th century BC."
Diachronic distribution of Celtic peoples, in the traditional view:
yellow | Core Hallstatt territory, by the sixth century BC |
light green | Maximal Celtic expansion by 275 BC |
light blue | Lusitanian area of Iberia where Celtic presence is uncertain |
green | Areas where Celtic languages remain widely spoken today |
(SOURCE : Celts,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Celts 참조)
즉 위에서 언급한 여국의 위치가 프랑스 북동부지역 또는 대서양의 브리튼지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과도 교역하는 토욕혼, 토번은 서유럽의 대서양변에 있을 수 있다는 필자의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필자는 과거 중국의 세계지도에서 여인국이 제일 서쪽에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여국, 그리고 북위, 남조 등과 교류한 서해군의 토욕혼, 토번은 대서양가에 있는 나라로 추정된다. 즉 지금의 티베트가 서해군에 있는 토욕혼, 토번의 위치가 아님을 확인 할 수 있다. 그 구체적 위치는 동 시기에 서양사에서 나타나는 역사를 보고서 보다 연구해야 한다.
토욕혼의 왕에게 북위의 효문제는 '서해군 개국공'이라는 직을 수여했다. 그래서 필자는 서해가 대서양이라 추정했다. 따라서 토욕혼은 대서양변에서 찾아야 한다. 또한 토욕혼은 모용씨의 선비족이라 했다. 따라서 선비족이란 전제를 가지고 알아 보고자 한다.
필자는 본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지역 추정' 이란 글에서, 12한국의 하나인 선비국이 Suebi족이 있던 지역이 아닌가 했으나 후일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자 했다. 그래서 Suebi족이 선비족인가에 대해 일차적인 검증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중부유럽에 있던 수에비족은 광개토태왕 시기의 Migration period에 훈족의 이동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포루투갈지역에 Suebi Kingdom을 건설한다. 이 수에비왕국이 대서양에 접하여 있으므로 토욕혼이 아닌가 하는 점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또한 유연, 동호, 북위 등과 연관이 있던 토욕혼의 위치를 감안하여, 유연, 동호, 북위 등의 유럽 위치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점검해 보고자 한다.
먼저 수에비에 대해 알아 보자. 수에비족은 Jordanes에 의하면 스웨덴지역에서 출발한 것으로 기술된다. 그리하여 중부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훈족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기술된다.
그런데 Suebi는 여러 종족을 포함하고 있다. Alemanni, Marcomanni, Quadi, Buri 등도 Suebi에 속한다고 한다. 이들 모두 중부 유럽에서 활동하던 종족들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Marcomanni were a group of early Germanic peoples[1] that eventually came to live in a powerful kingdom north of the Danube, somewhere near modern Bohemia, during the peak of power of the nearby Roman Empire. According to Tacitus and Strabo they were Suebian."
(source : Marcomanni, Wikipedia)
"The Alemanni (also Alamanni;[1] Suebi "Swabians"[2]) were a confederation of Germanic tribes[3] on the Upper Rhine River. First mentioned by Cassius Dio in the context of the campaign of Caracalla of 213, the Alemanni captured the Agri Decumates in 260, and later expanded into present-day Alsace, and northern Switzerland, leading to the establishment of the Old High German language in those regions, by the eighth century named Alamanni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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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afrid Strabo in the 9th century remarked, in discussing the people of Switzerland and the surrounding regions, that only foreigners called them the Alemanni, but that they gave themselves the name of Suebi.[13] The Suebi are given the alternative name of Ziuwari (as Cyuuari) in an Old High German gloss, interpreted by Jacob Grimm as Martem colentes ("worshippers of Mars").[14]"
(source : Alemanni, Wikipedia)
"The Quadi were an early Germanic[1] people who lived approximately in the area of modern Moravia in the time of the Roman Empire. The only known information about the Germanic tribe the Romans called the 'Quadi' comes through reports of the Romans themselves, whose empire had its border on the River Danube just to the south of the Quadi. They associated the Quadi with their neighbours the Marcomanni, and described both groups as having entered the region after the Celtic Boii had left it deserted. The Quadi are thought to have been an important part of the Suebian group who crossed the Rhine with the Vandals and Alans in the 406 Crossing of the Rhine, and later founded a kingdom in northwestern Iberia."
(source : Quadi, Wikipedia)
"The Buri were a Germanic tribe mentioned in the Germania of Tacitus, where they initially "close the back" of the Marcomanni and Quadi of Bohemia and Moravia. It is said that their speech and customs were like those of the Suebi. Such a statement implies that the Buri had recently come from the direction of the Baltic Sea, as other Germanic settlers in Bohemia and Moravia were newcomers, having driven out the Celtic Boii and taken their lands. In Tacitus, the Buri are not linked to the Lugii.
Ptolemy, however, mentions the Lougoi Bouroi (transliterated by the scholars into Latin Lugi Buri) dwelling in what is today southern Poland between the Elbe, the modern Sudetes, and the upper Vistula. They are distinct from the Silingi (Vandals), who are on the upper Oder. Tacitus and Ptolemy together imply that the Buri may have entered Moravia from Suebia with the Marcomanni and Quadi and then moved into the upper Vistula region, where they allied themselves with the Lugii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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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ntingent of the Buri accompanied the Suebi in their invasion of the Iberian Peninsula and established themselves in modern northern Portugal in the 5th century.[1] They settled in the region between the rivers Cávado and Homem, in the area known as Terras de Bouro (Lands of the Buri).[2]
(source : Buri Tribe, Wikipedia)
선비족과 발음도 비슷한 이들 Suebi가 여러 종족을 포함하고 있는 Group이라는 것은 선비족과도 유사하다. 선비족도 여러 부족이 모여 선비국을 이루었다고 기술된다.
선비는 동호에서 나왔는데, 흉노의 묵돌선우가 동쪽의 동호를 정벌하였다 한다. 동호가 망한 후 선비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선비족이라 했다 한다. 거란족도 선비족에서 갈라진 것이다.
"동호는 후대에 선비와 오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동호계는 선비족에서 갈라진 거란족과 습족, 해족, 오라혼[3], 실위에서 갈린 몽골족으로 이어졌다. " (자료 : 동호, 위키백과)
그런데 이러한 선비족은 3세기에 모용, 걸복, 독발, 탁발 등의 부족집단으로 갈라진다.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에는 연(燕:모용씨)·진(秦:걸복씨)·양(凉:독발씨)이 화북에서 각각 나라를 세웠고, 북위(北魏:탁발씨)는 화북 전체를 통일하여 이른바 북조(北朝)의 기초를 열었다."
(자료 : 선비족, 두산백과)
그런데 이러한 선비족이 Suebi group과 같은 중부유럽에 위치한 것인가? 이는 필자의 그동안 본블로그에 올린 글, '실위는 북유럽의 Schleswig지역이다' 등의 글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실위가 북유럽 덴마크지역에 있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북만주가 덴마크의 북유럽지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호는 이에서 동쪽에 위치하게 되고, 선비족은 중부유럽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Suebi group에 속하는 Alemanni, Marcomanni, Quadi, Buri Tribe 등이 모두 이 지역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Suebi Group이 선비족집단이 되는 것이다.
Suebi 는 'Suebian Knot'라는 머리 모양으로 특징 지워진다. 머리를 묶어 머리 뒤에 올리는 머리모양으로 상투와 약간 차이가 나지만 유사하다. Jordanes는 동고트족이 스웨덴 등의 지역에 그 근원이 있다고 했는데, 몽골실위가 위치한 지역이기 때문에 몽골족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The Great Extent of Suebian Kingdom (AD 455) (source : Wikipedia)
그런데 이러한 Suebi족은 광개토태왕의 훈족시기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포루투갈지역에 Kingdom of the Suebi 를 세운다. 필자는 이 수에비왕국이 서해군에 있던 '토욕혼'이 아닌가 한다. 토욕혼도 선비족의 일원이라 했다. 위의 위키피디아 자료에서 본 것처럼, Suebi의 일원인 Buri족도 같이 동행해서 수에비왕국을 세웠다. 이 수에비왕국의 수도가 Braga이다. 토욕혼의 수도 부사와 발음이 유사하다. 또한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보에(Bod)라 했다 한다. Buri족과 유사한 발음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수에비왕국의 수도였던 Braga에서 매년 축제를 하는데, 그 복장들이 티베트의 사람들 복장과 유사한 느낌이 난다.
Braga city Annual Festival (source : Wikipedia)
이제 역사적 사건들을 비교해 보자. 남쪽으로 내려간 모용씨 선비족의 토욕혼은 북위의 치열한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이 전쟁이 Visgoths와 Suebi Kingdom간의 전쟁과 대비된다. 아래 토욕혼의 자료를 다시 보자.
"토욕혼의 창시자는 모용 토욕혼이며, 그의 이복동생은 전연의 시조인 모용외이다. 기록에 따르면 토욕혼은 모용외와 다투다가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토욕혼은 285년 모용 토욕혼이 창시하였으며, 중국에서 하남국(河南國)으로 알려지게 된다. 티베트에서는 아시(阿柴, Azha)라고 불렸다. 얼마 지나자 백란(白蘭)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알려졌다. 수도는 칭하이 호의 서쪽에 있었으며, 부사(伏俟)라고 불렸다.
토욕혼의 시조인 모용토욕혼은 본래 모용선비의 수장인 모용섭귀의 서자로, 아버지로부터 부락민 1700가(家)를 물려받았다. 이후 아버지 모용섭귀가 죽고 285년에 적자인 모용외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모용토욕혼은 말을 방목하는 문제로 모용외와 충돌을 빚자 본래 근거지인 요동을 떠나 서쪽의 음산(陰山) 일대로 이주하였다.[1] 이후 영가의 난(307~312) 시기에 다시 서쪽의 감송(甘松) 일대로 이동하였으며, 그 영역이 백란(白蘭) 일대에까지 달하게 되었다. 모용토욕혼은 317년, 72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토욕혼이라는 국호가 바로 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건국 초기의 토욕혼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강족 · 흉노 등의 세력과 융합하였다.[2]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력충돌도 적지 않아서 329년, 수장인 모용토연이 휘하에 거느렸던 강족인 강총(姜聰)의 배신으로 칼을 맞아 죽기도 하였다.[3]
오호십육국시대
한편 토욕혼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화북의 이민족 국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371년에는 전진의 부견에게 말 1천 필과 금은 5백 근을 바치고 안원장군의 관작을 받았다. 또한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조공을 하고는 백란왕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토욕혼은 걸복건귀가 하사한 작위를 거부하고 충돌을 일으켰다가 걸복건귀의 침공을 받았고, 모용오흘제 때에 이르러서는 장안을 점령한 걸복건귀의 국경을 약탈하였다가 다시 침공을 받고 크게 패하여 1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를 잃었다. 이후에도 걸복건귀와 그 아들 걸복치반에게 수차례 충돌했으나 패하였는데, 모용수락간은 이로 인해 분을 참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
남북조시대
토욕혼은 모용아시 때(417~424)에 이르러 주변의 저족과 강족의 부락들을 합병함으로써 그 영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에 달하여 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4] 또한 모용모괴 때(424~436)에 이르러 진주 · 양주의 유랑민 및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흡수하여 남쪽으로는 촉한과 통하였고, 북쪽으로는 양주 · 대하와 통하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토욕혼은 중국 남조의 유송에 사자를 수차례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또한 북조의 북위와도 교류를 시작하여, 431년에는 북위와 연합하여 대하를 공격하여 그 마지막 황제인 혁련정을 사로잡고는 북위로 압송하였다.
이후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유송은 토욕혼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전을 전개하였는데, 토욕혼은 대체로 유송과 더욱 사이가 가까웠다. 이후 439년, 북위는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후에 토욕혼을 제압하기 위하여 444년 6월에는 토욕혼 내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였으며, 446년 8월에는 마침내 직접 토욕혼을 침략하여 서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451년에 집권한 모용섭인은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쳤고, 북위는 460년 4월에 다시 토욕혼을 공격하였다. 토욕혼은 북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유목민족의 특성을 살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이를 피하는 식으로 대응하였고, 북위는 끝내 토욕혼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470년 이후로도 북위가 수차례 토욕혼을 공격하여 초토화작전을 펼쳤고, 유송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기근에 시달리던 모용섭인은 결국 473년 8월에 북위에 항복하고 해마다 조공하였다. 모용섭인의 뒤를 이은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욕혼은 북위의 번국을 자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서》에 따르면 "새표(塞表) 내에서 부강한 나라로 불러지며, 거의 천조(天朝, 북위)에 준하는 관사(官司)를 두고 여러 나라에 칭제(稱制)하여 스스로 대국(大國)임을 자랑하였다."고 할 정도로[5] 주변 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과 위상을 구축하였다."
(자료 : 토욕혼, 위키백과)
즉 모용토욕혼은 요동의 근거지를 떠나 서쪽의 음산일대로 이동하고, 다시 영가의 난때 다시 서쪽의 감송일대로 옮겼으며, 그영역이 백란일대까지 달하게 되었다 한다.
필자는 프랑스의 론강을 요수라 추정했다.
따라서 요동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것은 Gaul지역에서 서쪽으로 대서양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북위는 444년 이후 470년까지 토욕혼을 공격했으며, 이후에도 북위의 끈질긴 공격으로 토욕혼은 마침내 473년 북위에 항복하고, 492년에는 북위 효문제로부터, '서해군 개국공 토욕혼왕'이라는 책봉을 받게 된다.
필자는 본 블로그 글, '장수왕이 공격한 북연의 풍홍은 프랑스 북부 Gaul지역에 있었다'라는 글에서 북연이 프랑스 북부, 그 아래에 북위가 있음을 추정했다. 이때의 북위는 Visgoths라 추정했다.
그러면 이러한 Suebi왕국과 서고트왕국 사이의 전쟁이 있었는가?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를 보면, 우선 수에비족의 일부는 중부유럽에 남아 있고, 일부가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선비족의 행태와 유사한 보습이다.
또한 416년부터 470년까지 서고트왕국과 수에비왕국과의 싸움이 묘사되고 있다. 아울러 서고트왕국은 수에비왕국의 내분을 이용한 전쟁도 묘사되고 있다. 토욕혼내의 내분을 이용한 북위의 전쟁과 유사한 내용이다.
아래 위키피디아자료에서 수에비왕국은 439-448년 기간동안 주위의 이베리아반도지역을 거의 통합할 정도로 팽창하였다고 묘사된다. 그런데 토욕혼 자료에서는 모용모괴때 (424-436)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한다. 약 15년의 시차가 난다. 필자는 북연의 풍홍을 구하는 장수왕의 시기와 아틸라가 Gaul지역을 침략하는 시기가 약 15년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이 15년 차이가 나는 토욕혼의 모용모괴시기의 확장은 수에비왕국의 King Rechila의 확장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수에비왕국이 토욕혼이라는 증거이다.
"토욕혼은 모용아시 때(417~424)에 이르러 주변의 저족과 강족의 부락들을 합병함으로써 그 영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에 달하여 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4] 또한 모용모괴 때(424~436)에 이르러 진주 · 양주의 유랑민 및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흡수하여 남쪽으로는 촉한과 통하였고, 북쪽으로는 양주 · 대하와 통하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자료 : 토욕혼, 위키백과)
북위는 473년 토욕혼이 항복하게 하고 위성국으로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470년이후 수에비왕국의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고트족의 아리아즘이 585년까지 지속되었다는 기술이다. 이는 그때까지 서고트왕국의 지배, 즉 북위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석된다. 토욕혼은 672년에 토번에 의해 멸망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미 그전에 당나라에 대항해 싸우다가 종속되었다.
"Additionally it has been pointed out that the lack of mention of the Suevi could mean that they were not per se an older distinct ethnic group, but the result of a recent ethnogenesis, with many smaller groups—among them part of the Quadi and Marcomanni—coming together during the migration from the Danube valley to the Iberian Peninsula.[8][9] Other groups of Sueves are mentioned by Jordanes and other historians as residing by the Danube regions during the 5th and 6th centurie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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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Hermeric
In 416, the Visigoths entered the Iberian Peninsula, sent by the emperor of the West to fight off the barbarians arriving in 409. By 418, the Visigoths, led by their king, Wallia, had devastated both the Siling Vandals and Alans, leaving the Hasding Vandals and the Suevi, undisturbed by Wallia's campaign, as the two remaining forces in the Iberian Peninsula.[30] In 419, after the departure of the Visigoths to their new lands in Aquitania, a conflict arose between the Vandals under Gunderic, and the Suevi, led by king Hermeric. Both armies met in the Battle of the Nerbasius mountains, but the intervention of Roman forces commanded by the comes Hispaniarum Asterius ended the conflict by attacking the Vandals and forcing them to move to Baetica,[31] in modern Andalusia, leaving the Suevi in virtually sole possession of the whole province.
In 429, as the Vandals were preparing their departure to Africa, a Swabian warlord named Heremigarius moved to Lusitania to plunder it, but was confronted by the new Vandal king Gaiseric. Heremigarius drowned in the river Guadiana while retreating; this is the first instance of an armed Suebi action outside the provincial limits of Gallaecia. Then, after the Vandals left for Africa, the Swabians were the only barbarian entity left in Hispania.
King Hermeric spent the remainder of his years solidifying Suevic rule over the entire province of Gallaecia. In 430 he broke the old peace maintained with the locals, sacking central Gallaecia, although the barely romanised Gallaeci, who were reoccupying old Iron Age hill forts, managed to force a new peace, which was sealed with the interchange of prisoners. However, new hostilities broke out in 431 and 433. In 433 king Hermeric sent a local bishop, Synphosius, as ambassador,[32] this being the first evidence for collaboration between Sueves and locals. However, it was not until 438 that an enduring peace, which would last for twenty years, was reached in the province.
King Rechila
King Rechila's shortlived conquests (438-448).
In 438 Hermeric became ill. Having annexed the entirety of the former Roman province of Gallaecia, he made peace with the local population,[25] and retired, leaving his son Rechila as king of the Sueves. Rechila saw an opportunity for expansion and began pushing to other areas of the Iberian Peninsula. In the same year he campaigned in Baetica, defeating in open battle the Romanae militiae dux Andevotus by the banks of the Genil river, capturing a large treasure.[33] A year later, in 439, the Sueves invaded Lusitania and entered into its capital, Mérida, which briefly became the new capital of their kingdom. Rechila continued with the expansion of the kingdom, and by 440 he fruitfully besieged and forced the surrender of a Roman official, count Censorius, in the strategic city of Mértola. Next year, in 441, the armies of Rechila conquered Seville, just months after the death of the old king Hermeric, who had ruled his people for more than thirty years. With the conquest of Seville, capital of Baetica, the Suevi managed to control Baetica and Carthaginensis.[34] It has been said,[35] however, that the Suevi conquest of Baetica and Carthaginensis was limited to raids, and Suevi presence, if any, was minute.
In 446, the Romans dispatched to the provinces of Baetica and Carthaginensis the magister utriusque militiae Vitus, who, assisted by a large number of Goths, attempted to subdue the Suevi and restore imperial administration in Hispania. Rechila marched to meet the Romans, and after defeating the Goths, Vitus fled in disgrace; no more imperial attempts were made to retake Hispania.[36][37] In 448, Rechila died as a pagan, leaving the crown to his son, Rechiar.
King Rechiar
Rechiar, a Catholic Christian, succeeded his father in 448, being one of the first Catholic Christian kings among the Germanic peoples, and the first one to mint coins in his own name. Some believe minting the coins was a sign of Suevi autonomy, due to the use of minting in the late empire as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38] Hoping to follow the successful careers of his father and his grandfather, Rechiar made a series of bold political moves throughout his reign. The first one was his marriage to the daughter of the Gothic king Theodoric I in 448, so improv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peoples. He also led a number of successful plundering campaigns to Vasconia, Saragossa and Lleida, in Hispania Tarraconensis (then the northeastern quarter of the peninsula, stretching from the Mediterranean to the Gulf of Biscay, which was still under Roman rule) sometimes acting in coalition with local bagaudae (local Hispano-Roman insurgents). In Lleida he also captured prisoners, who were taken as serfs back to the Sueves' lands in Gallaecia and Lusitania.[39] Rome then sent an ambassador to the Sueves, obtaining some concessions, but in 455 the Sueves plundered lands in Carthaginensis which had been previously returned to Rome. In response, the new emperor Avitus and the Visigoths sent a joint embassy, remembering that the peace established with Rome was also granted by the Goths. But Rechiar launched two new campaigns in Tarraconensis, in 455 and 456, returning to Galicia with large numbers of prisoners.[40]
The emperor Avitus finally responded to Rechiar's defiance in the autumn of 456, sending the Visigoth king Theodoric II over the Pyrenees and into Gallaecia, at the head of a large army of foederati which also included the Burgundian kings Gundioc and Hilperic.[41] The Suevi mobilized and both armies met on 5 October, by the river Órbigo near Astorga. Theoderic II's Goths, on the right wing, defeated the Suevi. While many Sueves were killed in the battle, and many others were captured, most managed to flee.[42] King Rechiar fled wounded in the direction of the coast, pursued by the Gothic army, which entered and plundered Braga on 28 October. King Rechiar was later captured in Porto while trying to embark, and was executed in December. Theodoric continued his war on the Suevi for three months, but in April 459 he returned to Gaul, alarmed by the political and military movements of the new emperor, Majorian, and of the magister militum Ricimer—a half-Sueve, maybe a kinsman of Rechiar[43]—while his allies and the rest of the Goths sacked Astorga, Palencia and other places, on their way back to the Pyrenees.
Competing kings
When the Visigoths disposed of Rechiar, the royal bloodline of Hermeric vanished and the conventional mechanism for Suevi leadership died with it. In 456, one Aioulf took over the leadership of the Sueves. The origins behind Aioulf's ascension are not clear: Hydatius wrote that Aioulf was a Goth deserter, while the historian Jordanes wrote that he was a Warni appointed by Theodoric to govern Gallaecia,[44] and that he was persuaded by the Suevi into this adventure. Either way, he was killed in Porto in June 457, but his rebellion, together with the armed actions of Majorian against the Visigoths, eased the pressure on the Suevi.
In 456, the same year as the execution of Rechiar, Hydatius stated that "the Sueves set up Maldras as their king."[45] This statement suggests that the Suevi as a people may have had a voice in the selection of a new ruler.[46] The election of Maldras would lead to a schism among the Suevi, as some followed another king, named Framta, who died just a year later.[47] Both factions then sought peace with the local Gallaeci.
In 458 the Goths again sent an army into Hispania, which arrived in Baetica in July, thereby depriving the Sueves of this province. This field army stayed in Iberia for several years.
In 460 Maldras was killed, after a reign of four years during which he plundered Sueves and Romans alike, in Lusitania and in the south of Gallaecia past the valley of the Douro river. Meanwhile, the Sueves in the north chose another leader, Rechimund, who plundered Gallaecia in 459 and 460. This same year they captured the walled city of Lugo, which was still under the authority of a Roman official. As a response, the Goths sent their army to punish the Suevi who dwelt in the outskirts of the city and nearby regions, but their campaign was revealed by some locals, whom Hydatius considered traitors.[48] From that very moment Lugo became an important centre for the Sueves, and was used as capital by Rechimund.
In the south Frumar succeeded Maldras and his faction, but his death in 464 closed a period of internal dissent among the Sueves, and permanent conflict with the native Gallaecian population.
King Remismund
Suebic sword. Conimbriga, Portugal
In 464, Remismund, an ambassador who had travelled between Gallaecia and Gaul on several occasions, became King. Remismund was able to unite the factions of Suevi under his rule, and at the same time restore peace. He was also recognized, perhaps even approved of, by Theodoric, who sent him gifts and weapons along with a wife.[49] Under the leadership of Remismund, the Suevi would again raid the nearby countries, plundering the lands of Lusitania and the Conventus Asturicense, whilst still fighting Gallaeci tribes like the Aunonenses, who refused to submit to Remismund. In 468 they managed to destroy part of the walls of Conimbriga, in Lusitania, which was sacked[50] and then mostly abandoned after the inhabitants fled or were taken back to the north as slaves.[51] The next year they captured Lisbon, which was surrendered by its leader, Lusidio. He later became ambassador of the Suevi to the Emperor. The end of the chronicle of Hydatius in 468 doesn't let us know the later fate of Remismund.
The Suevi probably remained mostly pagan until an Arian missionary named Ajax, sent by the Visigothic king Theodoric II at the request of the Suebic unifier Remismund, converted them in 466 and established a lasting Arian church which dominated the people until their conversion to Catholicism in the 560s.
The Arian period
Little is known of the period between 470 and 550, beyond the testimony of Isidore of Seville, who in the 7th century wrote that many kings reign during this time, all of them Arians. A medieval document named Divisio Wambae mentions one king named Theodemund, otherwise unknown.[52] Other less reliable and very posterior chronicles mention the reign of several kings under the names of Hermeneric II, Rechila II and Rechiar II.[53]
More trustworthy is a stone inscription found in Vairão Portugal, recording the foundation of a church by a Benedictine nun, in 535, under the rule of one Veremund who is addressed as the most serene king Veremund,[54] although this inscription has also been attributed to king Bermudo II of León. Also, thanks to a letter sent by Pope Vigilius to the bishop Profuturus of Braga circa 540, it is known that a certain number of Catholic Orthodox had converted to Arianism, and that some Catholic Orthodox churches had been demolished in the past in unspecified circumstances.[55]......."
(source : Kingdom of the Suebi (409-585), Wkipedia)
선비족과 관련 있는 동호의 위치에 대해서는 우선 흉노의 묵특선우 시절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당시 묵특선우는 동으로 동호를 정복하고, 서로는 월지를 더 서쪽으로 밀어 냈으며, 북으로는 정령, 신려, 혼유, 격곤, 굴역 등을 정벌하였으며, 서역의 26개국을 정벌했다 하였다.
여기서 정령은 실위이다. 필자는 실위가 덴마크에 있는 Schleswig지역이다 주장했다.
따라서 흉노가 이미 BC 200년경 서유럽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도 이 흉노와 접하고 있었다. 동호도 중부유럽에 있게 된다. 즉 선비족이 중부유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수에비가 있던 중부유럽지역이 선비족이 있던 지역이 되는 것이다.
유연은 유전자분석으로 파노니아에 있던 Avars족과 유사하다고 한다. 즉 동유럽과 중부유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의 동호, 선비족의 위치 추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더 나아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던 몽골실위가 몽골의 원류라는 기술을 고려하면, 몽골족도 북유럽에서 출발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후 어떻게 아시아로 이동했는지는 필자도 아직 모른다. 차후 연구가 계속되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토욕혼이 포루투갈의 수에비왕국이었다는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그 이후 수에비왕국의 자료가 있었다면 토번의 자료도 분석할 수 있었을 텐데, 자료가 없어 아쉽다. 후일 당과의 자료분석에서 더 분석될 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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