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7. 02:01ㆍ한국사/중국사
필자는 중국의 역사가 요수인 론강의 서쪽에 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프랑스의 프랑크 역사가 중국의 역사일 것이란 추정이다. 그래서 이제, 수나라의 시기에 대하여 프랑크 역사와 대조하여 그 진실을 확인해 보자. 특히 전쟁의 역사가 영토분쟁의 역사이기 때문에 역사에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다. 이점을 고려하여 전쟁사 중심으로 비교하고자 한다.
수나라 전쟁 역사에서 우리는 크게 몇가지 사실을 요약할 수 있다.
1) 우선 그동안 북제, 북주 등의 시기로 갈라진 중국이 북주로 통일되었는데, 이어서 수나라로 바끤 것이다. 이런 상황이 프랑크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볼 것이다.
2) 두번째는 돌궐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동안 북제, 북주 모두 돌궐에 공물을 바쳤는데, 수나라 또한 돌궐과 대치하게 된다. 수나라는 유연을 멸망시킨 돌궐과의 전쟁이 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추가적인 자료를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프랑크역사에서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 보자.
그리고 6세기 후반 동돌궐과 서돌궐의 분열이 있었는데,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수나라가 부추켜, 동돌궐이 약화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다. 과연 이런 역사가 프랑크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고자 한다.
3) 세번째는 수나라는 587년 후량(서량)을 공격해서 멸망시킨다. 후량은 이전부터 괴뢰정부로 있던 나라였는데, 남조의 진나라로 일부 통합되지만, 일부가 서쪽에 남아 존재하다가 수나라에 의해 통합된다. 이러한 역사가 프랑크 역사에서 있었는지 살펴 보자. 주로 프랑크 지역의 남서쪽 지역이 대상이 될 것이다.
4) 넷째로, 수나라는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 시킨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게 한다. 남조의 진나라는 남조의 남제가 있던 장소이다. 즉 북제의 남쪽이 남제이다. 따라서 프랑크의 남동쪽 지역이 해당한다. 남조의 진나라를 수나라가 멸망 시키는 역사가 프랑크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또한 남조와 북조의 경계가 프랑크역사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관심을 가지고 보자.
5) 다섯째로, 수나라는 토욕혼과 전쟁이 있었다. 필자는 광개토태왕이 점령한 토욕혼이 대서양 연변의 포루투갈 지역이라 추정했다. 따라서 이 근처 지역이 토욕혼, 토번의 역사가 있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프랑크의 남서부 지역의 역사를 잘 살펴볼 일이다.
6) 여섯째로, 수나라가 돌궐과의 전쟁이 일단락되니, 고구려와의 전쟁이 있었다. 612년에는 고구려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을 이루는 역사가 있게 된다. 필자는 이미, '고구려-수 당 전쟁은 유럽에서 있었다'라는 글에서 이에 대해 이미 검토했다. 여기서는 이에 대한 재검증 차원에서, 특히 599년, 612년, 613년 시기의 프랑크 역사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I. 수나라의 전쟁 역사
1) 수나라의 통일 상황
"수문제는 선양 받아 수나라를 개국하고 즉위 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장성을 복구해 돌궐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고 회수와 장강을 이었으며 뒤이어, 곧 북조 괴뢰정권인 강릉 일대의 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다. 수나라 군세는 회하를 따라 늘어선 적의 요새를 정복해야 한다든지, 혹은 기나긴 보급선을 유지해야 한다든지 등의 걱정들에서 해방된 상태였다. 왜냐면 이미 북주 시절부터 남조의 수도 건강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요소인 회수 인근 장강 북쪽을 모조리 다 장악했고, 장강 상류의 촉까지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제 수나라는 과거 서진이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함대를 촉 땅에서 강을 따라 내려보낼 수 있었고 진은 과거 오가 그랬듯이 양면전선을 맞이해야 했다. 진숙보가 그나마 멀쩡했다면 멸망의 시기는 조금 늦춰졌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수나라 인재풀을 보면 사실상 조금 유예가 더 길어진 정도다. 강남 정권이 화북 정권의 공격을 막으려면 전통적으로 형주(양번) 방어선과 사천(백제성) 방어선 그리고 회남 일대를 차지하고 합비쪽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데, 진숙보 시절에 이미 저 요충지는 모조리 다 수나라에 넘어간 상태였다."
(자료 : 수나라,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수나라)
수나라가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다 한다. 낙양은 동쪽에 있고 장안은 서쪽에 있다는 것이다. 장안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후의 글 수당교체기에 관한 글에서 살피고자 한다. 당태종이 왕이 되기 전에 돌궐을 끌어 들여 장안을 공격하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수문제는 돌궐에 대한 방어를 하기 위해 장성을 쌓아 대비했다 한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 언급은 없고 막연히 북방으로 언급했다. 만약 삭슨족을 돌궐로 고려한다면, 프랑크의 동쪽 라인강이 주요 방어선이 된다. 실제 라인강을 따라 많은 성곽과 요새가 있다고 위키피디아 자료는 말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회수와 장강이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즉 장강이 어디인가를 알아내면 회수의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필자는 장강이 르와르강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의 제일 긴 강(길이 1006km, 625 miles)이기도 하다. 필자는 Rhone 강(길이 814km, 506 miles)을 압록수 즉 요수라 추정했다. 삼국유사는 중국의 3대 강을 황하, 장강, 압록수라 했다. 장강이 르와르강이고 압록수가 론강이라면 황하만 남는다.
필자는 황하가 Rhine강 (길이 1230km, 760 miles)이 아닌가 한다. 유럽에서 라인강과 다뉴브강이 홍수로 물이 많이 넘치는 강으로 꼽힌다. 그리고 중국사에서 황하 유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고려된다. 즉 라인강은 중국사의 동쪽에 있어 외부와의 전쟁시 많이 언급되겠지만, 중국내의 통일전쟁에서는 언급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인강이 길이 면에서나, 범람의 면에서나, 위치상으로도 황하가 아닌가 한다.
어느 블로거가 '황하의 물길은 어떻게 변했을까'(필자의 네이버블로그, 카테고리 수나라, 공유글 참조)라는 글에서, '삼십년 하동(河東), 삼십년 하서(河西)'란 말이 있다고 했다. 즉 황하의 범람으로 물길이 자주 변하여, 어느 마을이 삼십년은 강의 동쪽에 있고 삼십년은 강의 서쪽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공의 황하는 동서로 흐른다. 물론 일부 구간이 남북으로 흐르지만 대세는 동에서 서로 흐른다. 그렇다면 삼십년 하북, 삼십년 하남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동과 하서의 움직임은 강이 남북으로 흐른다는 말이 아닐까? 라인강은 남북으로 흐른다.
중국사학자들은 황허가 황하, 양자강이 장강, 란찬강(메콩강)이 요수라 주장한단다. 그러면 중국사의 대부분은 요서지역인데, 메콩강 서쪽의 역사가 된다. 즉 그들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중국사를 기존의 중공지역으로 하는 것은 엉터리라는 결과를 낳는다.
장강을 르와르강으로 추정할 때, 장강과 가까운 회수는 세느강이나 손강 또는 Dordogne river, 또는 Garonne강 지류 Lot강일 수 있다. (아래 지도 참조) 회수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하니, 운하공사가 있었는지 프랑스 역사에서도 알아 볼 일이다. 회수의 남쪽을 회남으로 고려할 때, 회수는 동서로 흐르는 강이 된다. 또한 장강과 같이 남조의 방어선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회수는 Dordogne river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량의 수도 강릉(江陵, 강의 언덕의 뜻)은 Dordogne river 바로 아래의 Bordeaux (보르도)가 될 수 있다. 프랑크 역사에서 이곳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Rivers in France (source : Wikipedia)
"물론 그 과정에서 정적인 군벌들과 북주 근왕 세력의 저항을 받았으나 문제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정제를 비롯한 우문씨 황족을 모두 주살했다. 북방의 돌궐이 자주 침입하자 장성을 세운 뒤에 성 수십 곳을 쌓아서 장성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후 화친을 맺어 북방을 안정시켰다.
이후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저항과 반감을 극복하고자 남벌을 진행하여 개황 7년(587년)에 소씨의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황제인 진숙보는 사치와 방종에 빠졌고 간신들의 이야기에만 귀기울여서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는데 양견은 차남 양광에게 군사를 주어 진나라를 쳐서 없애고 마침내 오래도록 분열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자료 : 수문제,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수나라)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 이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낙양은 장안의 동쪽에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프랑크 역사로 본다면, 장안과 낙양의 후보지가 어디냐가 중요해진다. 프랑크역사에서는 서쪽의 Orleans, 동쪽의 Paris, Metz, 등이 지역적 수도로 거론된다.
필자는 Toulouse를 고구려의 장안성으로 추정하고, 낙양을 Narbonne로 추정했으나, 수 당의 수도인 장안과 낙양이 이곳인지 회의가 간다.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남조 후량(서량)의 수도 강릉(江陵)은 Garonne river(가론강)의 Bordeaux(보르도)일 수 있으며, 진나라의 수도, 건강은 Clermot-Ferrand(클레르몽-페랑) 일 수 있다. 필자는 Clermont-Ferrand이 백제의 한성이 아닌가 추정했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한성을 취했다 했다. 그래서 남조의 진나라(557-589)가 신라의 진흥왕이 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남조와 북조의 경계는 장강(長江)이나 한수(漢水)인 Loire강(르와르강)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다. (아래 지도 참조)
촉(蜀)지역은 프랑크의 동쪽 산맥지역이 아닐까 한다. 르와르강 상류지역인 Jura Mountains지역 근처가 아닐까 한다. 촉은 유비의 촉한(蜀漢)이란 말이 있다. 즉 한(漢)나라 지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르와르강이 한수(漢水)가 아닌가 한다. 남조의 진(陳)나라 역사에서 한수(漢水)지역을 빼앗겼다고 했다. 그리고 이 근처의 Clermont-Ferrand이 백제의 한성(漢城)으로 추정된다. 이조의 한성부도 여기인지도 모른다.
수(隋)나 당(唐)도 지역이름을 따서 지은 나라이름으로 생각한다. 아직 어느 지역인지 이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다. 이들이 선비족으므로 르와르강 북쪽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성지역은 세느강(Seine river), 르와르강(Loire river), 손강(Soane river), 라인강(Rhine river)이 모이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아래 지도 참조)
프랑스 강, 산맥, 주요 도시 등 지형지세 지도 (자료 : WorldAtlas.com)
2) 수나라와 돌궐의 전쟁
북방의 돌궐이 자주 침입하자 장성을 세운 뒤에 성 수십 곳을 쌓아서 장성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후 화친을 맺어 북방을 안정시켰다.
(자료 : 수문제,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수나라)
중국지역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589년 한족들을 정복한 선비족 정복왕조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했을때, 당시 북방의 돌궐과 수나라가 대치하게 되었다. 유연을 멸망시킨 새로운 패권자 돌궐은 수나라와 대립관계가 된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은 약화되었다. 수나라와 돌궐의 전쟁이 멈추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자료 : 돌궐, 위키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돌궐)
돌궐에 대해서는 두가지가 있다. 즉 돌궐에 대비해 장성을 쌓았다는 것과 서돌궐과 동돌궐의 싸움을 부추켜 동돌궐이 약하게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위 자료가 Gokturk자료가 아니길 바란다. Gokturk는 필자는 고구려로 추정한다. 돌궐은 북해나 발트해에 있던 세력으로 보인다. 따라서 원문자료를 보지 않는한 상기 자료에 신뢰를 주기 힘들다.
돌궐의 지역으로 보이는 스칸디나비아에서는 West Geatish Kingdom과 East Geatish Kingdom이 있었고 서로 전쟁을 한 역사가 있다. East Geats는 Denmark와 합세하고, West Geats는 Swedes와 합세하여 West Geats가 이겼는데, 이때가 750년경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위 돌궐역사와 시간상의 차이가 꽤 된다.(필자의 글, 돌궐은 북유럽의 누구인가? 참조)
프랑크 역사에서는 외부세력의 침입을 감추고자 형제간 싸움으로 모두 기술하였기 때문에 거의 기록을 볼 수 없다. 단지 511년 스칸디나비아의 침입이 있었고, 이후 삭슨족의 침입이 거론되었다. 프랑크의 Charlemagne왕이 Saxons족을 잔인하게 죽인 것을 보면 그동안 프랑크가 이들에게 많이 시달린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3) 수나라의 후량 (서량) 공격 (587년)
"이후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저항과 반감을 극복하고자 남벌을 진행하여 개황 7년(587년)에 소씨의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진을 공격하였다. "
(자료 : 수문제,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수나라)
"후경의 난 와중에 양나라 황족 소찰은 서위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번국이 되기를 자청한다. 서위는 소찰을 양왕(梁王)으로 삼고, 후경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효원제를 공격해 죽인 후 소찰을 양나라의 황제에 앉히니 이것이 후량의 탄생이다. 오대십국시대의 주전충이 세운 후량과 구분하기 위하여 서량(西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후량은 강릉 주변의 일부 지역만을 장악한 서위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양나라의 정사인 <양서>에서는 후량의 황제들을 본기가 아니라 소정덕, 소기, 소동, 소연명 등 괴뢰 황제와 함께 열전에 수록하고 있다.
후량은 서위을 대신한 북주, 북주를 대신한 수나라 때까지 괴뢰 정권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북주와 수나라는 강남에 지배권을 넓히기 위해 진패선이 세운 진(陳)이 양나라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정권이며, 그래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후량이야말로 정통성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결국 후량은 남북조 통일 직전 수문제 양견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 진나라 동양주 자사 소엄과 오주 자사 소환이 황제를 자칭하며 수나라에 대항했다.[1] ...... 또한 수나라 말기 파릉에서 거병하여 양왕을 칭했던 소선은 소엄의 손자였으며 그는 당고조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당나라 때도 많은 양나라 황족 후손들이 등용되었다."
(자료: 후량,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남조)
지난 글, '북제, 북주 시기의 프랑크왕국 역사와 남북조 및 돌궐역사'에서 후량은 부르군디왕국에 있던 고구려 세력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신라계의 진(陳)나라에게 이들 지역이 넘어 가고, 이후 잔존한 일부 후량세력이 서쪽으로 가서 서량이 존재하게 된다. 이 서량을 수나라가 587년에 멸망 시켰다는 것이다. 이 서량은 강릉 주위의 일부지역만을 장악하였다 한다. 프랑크지역에서는 보르도를 위시한 Gascony지역이 아닌가 한다. (아래 지도 참조) 프랑크역사에서는 이들 지역에서 서고트왕국과 전쟁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서고트왕국이 고구려라고 추정했다. 즉 서량이 위치한 Gascony 지역, 이 지역에서 프랑크와 서고트왕국의 전쟁, 그리고 고구려 세력이라는 점이 일치한다. 이 지역에 고구려의 장안성으로 추정되는 Toulouse가 있다.
Location of Gascony in France (source : Wikipedia)
4)수나라와 남조 진(陳)나라의 전쟁
우선 수나라의 남조 진나라 공격에 관한 자료를 보자. 적색글자 부분이 눈길을 끄는 내용이다.
"수나라의 진 정벌 준비는 587년 시작되었다. 산둥 반도, 후베이성, 한수(漢水), 그리고 가장 선박이 많이 건조되던 촉의 영안(永安)까지, 대규모 전함 건조가 여러 장소에서 행해졌고 수 제국 대장군 양소는 영안에 머물면서 향후 자신이 지휘할 함대의 규모를 보고받고 있었다. 북조 국가들은 기병을 동원한 육전에는 강했지만 수전에 능하지 못했던 반면, 남쪽의 육조 국가들은 대대로 선박의 건조와 함대의 운용에 능했고 건강의 정복을 위해선, 북조 정권은 어떻게든 장강에서 남조 수군을 정면에서 몰아낼 힘을 지닌 독자적인 함대를 건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
588년 가을, 문제는 과거 오나라를 치던 서진처럼 진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이었고, 51만 8천이라는 대군으로 진을 침입했다. 수나라 8개 군이 촉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장강 북변 전면에 배치되었다. 수나라 대군을 상대할 진의 전력 약 10만은 장강 상류부터 바다에 이르는 모든 구간을 막아내야 했다. 진의 군대는 주로 전선의 (서쪽) 끝과 수도 건강 인근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수나라의 기본 전략은 장강 (상류)의 양소 군단이 진의 수군을 묶어둠으로서, 진의 수도 건강을 마주보고 있던 총사령관 양광이 이끄는 본군이 장강 (하류)를 빠르게 도하하는 최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만약 이 전략이 실패로 끝나 진의 수군이 건강 방어를 위해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여전히 양소의 수군은 장강을 따라 동진하며 건강을 공격하는 수나라 육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한편 진에선 장강을 지키던 장수가 이걸 보고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으나, 시문경이 묵살하고 상소하지도 않았다.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이걸 알면서도 태연히 "왕기가 여기 있다. 북제의 군대가 세 번, 북주의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으나, 패배하고 돌아갔다. 천명이 여기 있는데 저놈들이 뭘 하겠는가?"라며 큰소리만 쳤다. ....
정명 3년(589년) 정월, 수나라 오주 총관 하약필이 교묘하게 장강을 건너 경구를 점령하고 종산으로 진격했다. 건강에는 10만 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진숙보는 공신이자 대장군 소마가의 후처를 범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이에 소마가는 종군을 거부하였다. ..... 덕분에 진나라 군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589년 수나라의 본대는 장강 (하류)를 도하하여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손쉽게 함락했다. "
(자료 : 수나라,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수나라)
수나라와 남조 진(陳)나라의 전쟁은 위 기록에서 보듯이 강을 통한 수전이 주를 이루었다. 북조의 국가들은 기병을 통한 육전에 능했고, 남조의 국가들은 수전에 능했다 한다. 그래서 수나라는 대규모 전함 건조를 하며 준비했고, 수나라 8개군이 촉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장강 북변에 전면에 배치되었다 한다. 아래 지도를 보면, 장강은 르와르강으로 추정되는데, 촉은 Jura Mountains지역에 가까운 지역이라 할 때, 르와르강이 시작하는 지점에 있다. 대서양까지 강으로 이어진다. 즉 르와르강을 중심으로 남북조가 대치를 이룬 상황이다. 프랑스에서는 르와르강 주위에 많은 성곽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을 Chateaux de la Loire라 총칭한다. 즉 르와르강의 성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역사적 현장인지도 모른다.
Rivers in France (source : Wikipedia)
Physical France (source : Wikipedia)
5) 수나라와 토욕혼 전쟁
필자는 토욕혼이 대서양변의 포루투갈에 있었다 추정했다. 이는 북위가 토욕혼에 '서해개국공'이란 직책을 주었기 때문이다. 토번을 통일했다는 '손첸캄포'라는 인물 이름도 Sonchen Campo로 읽혀진다. 즉 송나라지역 초원이란 뜻이다. 그리고 Campo는 스페인어이다. 손첸캄포라는 이름의 사진도 가짜로 판단된다. 보다 큰 육체의 건장한 장군스타일이었을 것이다. 아래 글을 보면 토욕혼과 토번을 구분하는데, 토번이 보다 넓은 지역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측천무후 시기에 토번에 대한 공물을 바치는 것을 중단했다가 토번의 침략으로 큰 낭패를 본다. 따라서 이때 좀더 자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포루투갈 지역은 피레네 산맥으로 프랑스로부터 막혀 있다. 따라서 대서양을 통한 수군의 공격으로 해변의 토욕혼을 수나라가 종속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7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약해져서 동돌궐과 함께 수나라에 종속되었다. 7세기 중엽 이후로는 분열된 토번을 통일한 손첸 감포가 등장하였고, 강성해진 토번은 토욕혼을 크게 위협하였다. 토욕혼의 마지막 왕이었던 모용낙갈발(慕容諾曷鉢)은 토번의 침공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고, 토욕혼은 672년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 모용낙갈발은 당나라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왕을 가한(可汗)이라 했으며, 유목 생활을 하였고 일부에서는 농경도 행했다. 실크로드 주변답게 상업도 발달했다."
(자료 : 토욕혼,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토욕혼-토번)
6)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수나라와 고구려 전쟁은 이미 필자가 쓴 글, '고구려-수 당 전쟁은 유럽에서 있었다'에서 자세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아래 자료만을 싣는 것으로 대신한다.
대외적으로도 수나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과 토욕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영토는 넓어졌다. 그러나 양광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으나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러한 요구를 부당하다 생각하고 거절하였다. 그 후 수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고구려는 이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양광은 아버지 양견이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양제는 총3번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양제의 1차 공격
612년 정월 양제는 113만 3800명을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출발만 해도 40일이 걸렸으며 그 행렬이 자그마치 1천여리(400km)가 되었다. 좌장군 우문술의 군사 45만명, 우장군 우중문이 이끄는 군사 45만명의 대규모 출정이었다. 그리고 양제 자신이 이끄는 군사 수만해도 26만명, 행렬이 200(73km)여리에 달했다. 거기다 병참지원까지하면 약 300만명에 달했다.
그들의 목적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었으며 이를 위해 먼저 1차적으로 부수도인 국내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지역인 요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만들고 고구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수나라 군사들이 건너지 못해 우왕좌왕하자 고구려군은 이틈을 이용해서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강을 건너기에 앞서 많은 수나라 군사가 죽어야했다. 양광은 부교건설 책임자인 우문개를 질타했고 군사를 재정비한 다음 부교를 다시 만들어 도하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도하에 성공하여 고구려군은 수많은 수나라 군사앞에 무너져 1만군사를 잃고 요동성으로 대피한다.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고 100만군사면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요동성 높이만해도 30m 게다가 주변의 산과 더불어 길이가 3.5km나 되었다. 수나라 군사는 성벽을 올라가려 시도하였지만 사다리가 요동성벽보다 낮아 올라갈 수 없었고 그틈을 이용한 고구려군이 돌과 화살세례를 퍼부었으며 결과적으로 피할 수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문과 성벽 등을 파괴하려 했지만 고구려군의 성은 중국의 돌성과는 전혀 다른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다 돌을 쌓으면 끝인 중국의 성과는 달리 고구려의 토성은 돌을 쌓은다음 흙으로 애워 감싸서 견고력이 더욱 단단한 성질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중국의 성으로 기준으로만든 수나라의 무기로써는 부수지 못 한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수양제가 자신의 명령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기 때문에 공격할 기회를 노려도 수양제에게 보고를 해야했고 따라서 군사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어 공격을 해도 고구려군이 이를 먼저 눈치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수나라 수군의 장수 내호아는 수군 10만명을 평양성 인근에 상륙시킨후 부수도를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는 양광의 명령을 거부한거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육군과 수군이 협공으로 평양성 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양광이 출정전에 각 장수들에게 내렸었는데 내호아는 전공에 집착한 나머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려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집착은 패배로 이어져 고구려 영양왕의 동생 건무에 의해 수나라 수군의 절반 이상이 궤멸되어 내호아는 급히 퇴각해야했다.
수나라 육군 상황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요동성을 포위한지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100만명의 수나라 군사중 단 한명의 군사도 이 성벽에 오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수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만의 별동군을 편성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별동군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양제는 이 군사들에게 100일치 식량을 한꺼번에 줘버렸고 무거운 짐때문에 군사들은 갈때마다 식량을 파묻어버렸다. 결과적으로 굶주려 싸울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눈치챈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항복을 청하며 동시에 수나라 군사들의 동태를 살핀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이나 고구려왕이 올 때에는 반드시 잡으라는 양제의 기밀명령에 따라 을지문덕을 잡으려 했으나, 우문술, 유사룡 등 주변 장수들이 항복한 장수를 잡아들이면 저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을지문덕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나중에 염탐하기 위한 거짓 항복라는 것을 알아챈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살수를 건넌 별동군은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사들이 포위한 것은 의미가 없어 결국 퇴각을 결정한 별동군은 다시 살수를 건너게 되었다. 이 때 을지문덕이 미리 살수에 쌓아두었던 댓목을 터트렸고 수나라 30만 별동군은 살수에서 수장되었다.[출처필요] 결국 수나라 30만 5000명중 살아 돌아간 군사는 2,700명이었으며, 이것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이 소식을 들은 양광은 크게 분노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그해 10월 퇴각한다. 결과적으로 양제의 1차칩입은 처참한 패배로 막을내리게된다.
양제의 2차 공격
그러나 양광은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613년 3월 양제는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다시 공격했다. 지난번의 패배를 되새긴 양광은 이번에는 별동군을 모아 공격을 하고자 하였다. 도하를 건넌 수나라 군사는 요동성보다 토성을 높게 쌓아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는 이러한 수나라의 화살 세례에 쉽사리 대항을 하지 못했고 양광은 효력이 있다고 판단해 계속적으로 화살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나라 측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제의 폭정을 지켜본 수나라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광과 함께 이 소식을 들은 양현감의 친구 곡사정은 이번 반란에 자신에게 미칠 일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에 투항한다.
반란에 당황한 양광은 우왕좌왕하다가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을 하자 급히 퇴각을 결정한다. 또한 고구려 군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식량과 무기를 모두 버리고 퇴각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고구려군이 뒤를 추격하여 수나라 군사 수천 명이 운명을 달리해야 했다. 결국 양제의 2차 침입도 제대로 된 공격없이 패배의 쓴맛을 맛 본채 막을 내리게 된다.
양제의 3차 공격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고자했다. 그러나 많은 신료대신의 반대에 부딪쳐야 했다. 양현감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터지고 있으며 국가의 부를 모두 탕진해 우선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집이 센 양광은 고구려 공격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는 엄한 군령을 내린다.
결국 614년 3월 다시 고구려공격에 나선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들은 계속된 전쟁의 패배로 인해 싸울 의지가 젼혀 없었으며 고구려 공격 개시하기도 전에 탈영병이 발생했고 우왕좌왕하는 수나라 군사들 앞에서도 양광은 무리하게 고구려 공격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측에서 사신을 보냈다. 항복을 할 것이니 군사들을 철수시키라는 것이다. 또한 양제의 2차칩입때 투항했던 곡사정을 묶어 같이 보내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다. 따라서 수나라 군사상황에도 별반 다를게 없다고 판단을 했고 양제의 자존심을 추켜세워 수나라 군사들을 철수시키려 했던 것이다. 양광은 대소신료의 주장에 못이기는 척하고 군사를 철수시킨다.
(자료 : 수양제, 위키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수나라)
이상으로 수나라의 전쟁 역사를 살펴 보았는데, 고구려와의 전쟁을 제외하면, 모두 중국내 지역의 전쟁으로 판단된다. 즉 프랑크내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프랑크역사에서 부르군디언 지역은 여러 가지 상황상 수나라 등의 전통적인 북조 중국세력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남조의 진, 후량(서량), 토욕혼 등의 세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한다. 이들을 묶어서 부르군디로 한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르군디와 관련하여 유의하여 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II. 수나라 시기(581-613)의 프랑크 역사
Division of Franks in 587 - 613 (source : Wikipedia)
1. Childebert II (r 575-596, Austrasia, 592-596, Burgundy)의 프랑크 역사
"Childebert II (c.570[1]–596) was the Merovingian king of Austrasia (which included Provence at the time) from 575 until his death in March 596,[2] as the only son of Sigebert I and Brunhilda of Austrasia; and the king of Burgundy from 592 to his death, as the adopted son of his uncle Chilperic.
(번역) Childebert II (생몰 570-596)은 메로빙가의 Austrasia왕(이당시 프로방스 지역 포함)으로서 575년부터 596년 3월 죽을 때까지 재위했다. 그는 Austrasia의 Sigebert I과 Brunhilda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592년부터는 uncle Chilperic(Guntram의 오기로 보임)의 양아들로서 죽을 때(596)까지 부르군디왕으로 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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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the assassination of Chilperic in 584 and the dangers occasioned to the French monarchy by the expedition of Gundoald in 585, Childebert threw himself unreservedly to the side of Guntram. By the Treaty of Andelot of 587, Childebert was recognised as Guntram's heir, and with his uncle's help in 587 he quelled the revolt of Dukes Rauching, Ursio, and Berthefried,[6] and succeeded in seizing the castle of Woëvre.[7]
(번역) 584년 Chilperic이 암살당하고 585년 Gundoald의 공격에 의해 프랑크왕국이 위험에 처하자, Childebert는 부르군디의 Guntram쪽에 전적으로 몸을 맡겼다. 587년 Andelot협정에 의해, Childebert는 Guntram의 후계자로 인식되고, 그의 uncle(Guntram)의 도움으로 587년 그는 Rauching, Ursio, Berthefried 공작들의 반란과 싸워 Woevre성(프랑스 동북부 성)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Childebert는 Metz에서 Guntram을 만나기 위해 Chalon-sur-Soane에까지 갔다. 손강가에 있는 이도시가 Guntram왕 (561-592) 당시 부루군디의 실질적인 수도였다고 아래 언급한다. Guntram의 재위기간(561-592;31년)이 남조의 진나라의 존속기간(557-589;32년)이라 한다면, 남조 진나라의 수도 건강이 Chalon-sur-Soane가 될 수 있다. 즉 부르군디왕국이 남조의 진나라일 수 있다.
"Chalon became one of the de facto capitals of the kingdom of Burgundy under Guntram, king from 561 to 592, who died here."
(source : Chalon-sur-Soane,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Location of Chalon sur Soan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587년 그는 Rauching, Ursio, Berthefried 공작들의 반란과 싸워 Woevre성(프랑스 동북부 성)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는 기록은 587년 Woevre 성(아래 지도 참조)에서 외세와의 전투가 있어 막았다는 기록으로 보인다. 위키피디아 자료의 로마사나 프랑크 역사에서는 외세의 침입을 내부 반란으로 왜곡하여 표현하는 방법이 매우 흔하다. 그러므로 위치상으로나 시기상으로나 우측에 있는 삭슨족의 돌궐과의 전쟁을 말하지 않나 판단된다.
Woervre castle 위치 (source : Wikipedia)
Many attempts were made on his life by Fredegund, wife of Chilperic, who was anxious to secure Guntram's inheritance for her son Clotaire II. Childebert II had relations with the Byzantine Empire, and fought on several occasions in the name of the Emperor Maurice against the Lombards in Italy, with limited success.[8]
(번역) Chilperic의 부인 Fredegund는 그녀의 아들 Clotaire II에의 Guntram의 상속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Childebert의 신변에 여러 시도를 하였다.
Childebert II는 비잔틴제국과 관계를 맺고 Maurice황제의 이름으로 이태리에 있는 롬바르드에 대항하여 여러번 싸웠으니,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이 당시 비잔틴제국은 백제이다. 즉 이 당시 연대가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제의 세력인 후량이 이태리 롬바르드인 신라와 다툰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당시는 신라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깨고 한성지역을 차지한 후가 될 것이다. 즉 위덕왕 시기의 백제라 판단된다. 그러나 별 성과가 없었다는 것은 백제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의미이다. Childebert II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보여 준다. 위의 후량세력, 그 전의 북제의 세력, 그리고 이후 진나라를 합병한 수나라의 세력 등이다. 이들 모두는 프랑크 사가들의 왜곡으로 생겨난 복합적인 이미지로 추정된다.
With Guntram, he authorized the Irish monk Saint Colomban to found the abbey of Luxeuil and two other monasteries in the heart of the Vosges and to work with his monks in the various missions and foundations in all the Frankish kingdoms.[9]
(번역) Guntram과 함께, Childebert II는 아일랜드 수도승 Saint Colomban이 Luxeuil Abbey를 세우고, Vosges의 한 중심에 다른 두 왕국을 세우게 하고, 다른 수도승과 함께 프랑크왕국에서 여러 임무와 창립을 하도록 허락했다.
이는 Vosges에 두 왕국이 생기고, Luxeuil지역의 독립(프랑스 동부, Vosges에 근접, 아래 지도 참조), 프랑크왕국에서 여러 분리 독립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Vosges지역, Luxeuil지역은 수나라의 동북부지역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지역일 수 있다. 즉 이들 지역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한가지 가능성으로, 갑자기 아일랜드 수도승이 언급되는 것은 아일랜드 세력이 이곳에 침략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들은 돌궐의 세력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Vosges에 두 왕국이 생겼다는 것은 전쟁후 강화를 통해 이들의 자립을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이 또한 돌궐의 세력일 수 있다고 본다.
Location of Luxeuil-les-Bains in Franc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On the death of Guntram in 592, Childebert annexed the kingdom of Burgundy, and even contemplated seizing Clotaire's estates and becoming sole king of the Franks. However, he and his young wife Faileuba were poisoned to death in 596. He had two young sons: the older, Theudebert II, inherited Austrasia with its capital at Metz, and the younger, Theuderic II received Guntram's former kingdom of Burgundy, with its capital at Orléans.
592년 Guntram이 죽을 때에, Childebert 는 부르군디왕국을 부속시키고, 심지어 Clotaire의 재산을 압류하고, 프랑크의 유일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부인 Faileuba는 596년 독살되었다. 그는 두 어린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Theudebert II는 Metz에 수도를 둔 Austrasia를 물려 받고, 작은 아들 Theuderic II는 Orleans에 수도를 둔 Guntram의 이전 부르군디왕국을 물려 받았다.
(Childbert II (575-596),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592년 부르군디왕 Guntram이 죽었을 때, 남조의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을 말할 수 있다. 596년 Childbert 부부가 독살 되었다 하는데, 누가 독살 했는지 내용이 없다. 그래서 뭔가를 감추고 있는 추정이다. 위의 문맥상으로 Neustria Clotaire측의 모의 가능성이 있다. 앞부분에서 Clotaire의 어머니 Fredegund가 Childebert에게 여러 시도를 했다고 기술했다. 즉 Fredegund가 모의하여 독살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Clotaire 측이 Guntram의 부르군디왕국을 차지하진 못했다.
프랑크동북부에 있던 Austrasia의 Childebert II왕이 Vosges에 두왕국을 세웠다는 앞의 글을 되새기면, Vosges쪽에서 전투를 하여 강화를 맺었다는 것으로 본다. 이는 고구려와의 1차 전쟁 내용일 수 있다. Vosges의 바로 우측에 요동성이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의 글, '고구려-수 당 전쟁은 유럽에 있었다' 참조). 이어서 596년 Childebert 부부가 죽었는데, 수나라의 고구려 1차 침입이 598년 있었다. 즉 고구려에 패한 결과를 이렇게 묘사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592년 Guntram왕국을 접수한 것을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 시킨 것으로 보면, 587년 Woevre성 전투를 삭슨족의 돌궐과의 전쟁과 강화로 보고, 이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기를 시작했는데, 598년 고구려에 패해 수문제가 수양제에 왕권을 이양한 것으로 본다. 수문제는 581-604년 재위기간인데, 수양제는 600년부터 황태자를 했다가 604년 황제가 된다. 따라서 596년 Childebert II부부가 독살당하는 시기가 598-599년 고구려에 패한 후 수문제가 물러나는 시기와 유사하다.
2. Guntram (r 561-592, King of Burgundy)하의 프랑크 역사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부르군디왕국이 수나라가 진나라, 후량, 토욕혼 등을 점령하는 것과 매우 깊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Guntram 왕의 재위기간이 561-592 기간으로서, 후량(555-587)이나 진나라(557-589)의 존속기간을 대강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부루군디 왕국의 Guntram왕 (재위 : 561-592)의 내용을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Saint Gontrand (c. 532 in Soissons – 28 March 592 in Chalon-sur-Saône),[1] also called Gontran, Gontram, Guntram, Gunthram, Gunthchramn, and Guntramnus, was the king of the Kingdom of Orléans from AD 561 to AD 592.[2] He was the third eldest and second eldest surviving son of Chlothar I and Ingunda. On his father's death in 561, he became king of a fourth of the Kingdom of the Franks, and made his capital at Orléans.[3] The name "Gontrand" denotes "War Raven"
(번역) Gontrand (532 in Soissons - 592 in Chalon-sur-Saone), Gontran, Gontram, Guntram, Gunthram, Gunthchramm, Guntramnus 등으로 불리는데, 561-592년 기간동안 Orleans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Chlothar I 과 Ingunda의 셋째 아들이며, 살아 남은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561년 죽었을 때, 프랑크의 4번째 왕이 되었고, 수도를 Orleans에 두었다. Gontrand이라는 이름은 "전쟁 까마귀"라는 의미를 말한다.
Personal life
King Gontrand had something of that fraternal love which his brothers lacked; the preeminent chronicler of the period, St. Gregory of Tours, often called him "good king Gontrand", as noted in the quotation below from the former's Decem Libri Historiarum, in which St. Gregory discussed the fate of Gontrand's three marriages:
The good king Gontrand first took a concubine Veneranda, a slave belonging to one of his people, by whom he had a son Gundobad. Later he married Marcatrude, daughter of Magnar, and sent his son Gundobad to Orléans. But after she had a son Marcatrude was jealous, and proceeded to bring about Gundobad's death. She sent poison, they say, and poisoned his drink. And upon his death, by God's judgment she lost the son she had and incurred the hate of the king, was dismissed by him, and died not long after. After her he took Austerchild, also named Bobilla. He had by her two sons, of whom the older was called Clothar and the younger Chlodomer.[4]
(번역) 개인 생활
Gontrand왕은 그의 형제들이 가지지 못한 형제애를 가졌다. 그 시대의 유명한 연대기인 Gregory of Tours는 그를 자주 '선한 Gontrand왕"이라 불렀다. ....이하 생략.....
Gontrand had a period of intemperance. He was eventually overcome with remorse for the sins of his past life, and spent his remaining years repenting of them, both for himself and for his nation. In atonement, he fasted, prayed, wept, and offered himself to God. Throughout the balance of his prosperous reign he attempted to govern by Christian principles. According to St. Gregory of Tours, he was the protector of the oppressed, caregiver to the sick, and the tender parent to his subjects. He was generous with his wealth, especially in times of plague and famine. He strictly and justly enforced the law without respect to person, yet was ever ready to forgive offences against himself, including two attempted assassinations. Gontrand munificently built and endowed many churches and monasteries. St. Gregory related that the king performed many miracles both before and after his death, some of which St. Gregory claimed to have witnessed himself.
(번역) 생략 : 요약하면 Gontrand이 한때 무절제한 삶을 살았으나, 이를 회개하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선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압박받는 사람들, 병자를 돌보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복속민들에게 부모같이 대하고, 자신의 부를 기아나 전염병 시기에 나누어 주고....등등. 그래서 성인에 들만한 사람이었다는 Gregory가 쓴 내용이다.
이 시기의 신라 진흥왕이나, 진나라의 왕들도 모두 불교에 진심인 왕들이었다. 진나라에서는 신라에 불경을 보내고, 진흥왕은 말년에는 법운이란 법명을 갖고 중이 되었으며, 왕비 사도왕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한다. 이 시기의 백제 성왕도 불가의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불교를 적극 활용했다.
In 567, his elder brother Charibert I died and his lands of the Kingdom of Paris were divided between the surviving brothers: Gontrand, Sigebert I, and Chilperic I. They shared his realm, agreeing at first to hold Paris in common. Charibert's widow, Theudechild, proposed a marriage with Gontrand, the eldest remaining brother, though a council convened at Paris as late as 557 had forbidden such tradition as incestuous. Gontrand decided to house her more safely, though unwillingly, in a monastery in Arles.
(번역) 567년 그의 형인 Charibert I이 죽었고, 그의 파리왕국의 영토는 살아 있는 형제들 (Gontrand, Sigebert I, Chilperic I)에 의해 나뉘어졌다. 처음에는 파리를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동의하며 그의 영토를 나누었다. Charibert 의 과부, Theodechild는 가장 나이 많은 형제 Gontrand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557년 파리에서 열린 회합에서 근친상간의 전통을 금지했었다. Gontrand은,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Arles에 있는 수도원에 그녀를 안전하게 거주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In 573, Gontrand was caught in a civil war with his brother Sigebert I of Austrasia, and in 575 summoned the aid of their brother Chilperic I of Soissons. He reversed his allegiance later, due to the character of Chilperic, if we may give him the benefit of the doubt in light of St. Gregory's commendation, and Chilperic retreated. He thereafter remained an ally of Sigebert, his wife, and his sons until his death. When Sigebert was assassinated later in 575, Chilperic invaded the kingdom, but Gontrand sent his general Mummolus, who was always Gontrand's greatest weapon, for he was the greatest general in Gaul at the time, to remove him. Mummolus defeated Chilperic's general Desiderius and the Neustrian's forces retreated from Austrasia.
(번역) 573년 Gontrand은 Austrasia의 Sigebert I과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575년 그는 Soissons의 Chilperic I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Chilperic의 성격때문에 (Gregory의 언급을 고려하면), 후에 그와의 연합을 바꾸었고 ...Chilperic은 물러났다. 그뒤로는 죽을 때까지, Sigebert, 그의 부인, 그의 아들과 연합하였다. 575년 Sigebert가 암살되었을 때, Chilperic은 왕국을 침범했고, Gontrand은 Mummolus장군을 보냈다. 그 당시 Mummolus는 Gontrand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Gaul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다. Mummolus는 Chilperic의 장군 Desiderius를 패배시켰고, Neustria 군은 Austrasia로부터 퇴각했다.
573년은 북제, 북주가 존재했을 때이다. 즉 Sigebert의 Austrasia, 북제와 남조 진나라가 전쟁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북주, 즉 Neustria의 Chilperic I은 부르군디왕 Gontrand와 사이가 안 좋았고, 결국 북제인 Sigebert와 동맹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이다. 575년 Sigebert가 암살되었고 Neustria의 Chilperic이 침범했다는 것은 북주(Neustria)가 북제 (Austrasia)를 병합(577년)하기 전상황을 의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부르군디의 장군 Mummolus가 Neustria장군 Desiderius를 물리쳤다는 것은 북제를 지원하기 위한 남조의 진나라의 지원전쟁일 수 있다.
In 577, Chlothar and Clodomir, his two surviving children, died of dysentery and he adopted as his son and heir Childebert II, his nephew, Sigebert's son, whose kingdom he had saved two years prior. However, Childebert did not always prove faithful to his uncle. In 581, Chilperic took many of Gontrand's cities and in 583, he allied with Childebert and attacked Gontrand. This time Gontrand made peace with Chilperic and Childebert retreated. In 584, he returned Childebert's infidelity by invading his land and capturing Tours and Poitiers, but he had to leave to attend the Baptism of Chlothar II, his other nephew, who now ruled in Neustria. Supposed to take place on 4 July, the feast of St. Martin of Tours, in Orléans, it did not and Gontrand turned to invade Septimania. Peace was soon made.
(번역) 577년 그의 살아 남은 두아들, Chlothar와 Clodomir는 이질로 죽었고, 그는 아들과 상속자로 조카인 Childebert II를 삼았다. Gontrand는 Sigebert의 아들 Childebert II를 2년전에도 그의 왕국을 구해주었었다. 그러나 Childebert는 항상 그의 uncle에 충직한 것은 아니었다.
581년 Chilperic은 Gontrand의 여러 도시들을 취했고, 583년에는 Childebert와 연합하여 Gontrand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Gontrand이 Chilperic과 평화협상을 했고 Childebert는 물러났다. 584년에는 Childebert의 영토를 침범해 Tours와 Poitiers를 취하여 그의 불충직함에 대응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다른 조카, Nuestria를 다스리는 Chlothar II의 세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떠났다. 7월 4일 Orleans에서 St. Martin of Tours축제가 열리기로 했는데, 열리지 않았고, Gontrand은 Septimania를 침범했다. 화평은 곧 이루어졌다.
Location of Septimania in 537 in Southern France (source : Wikipedia)
577년 Childebert II가 부르군디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577년 북제가 멸망하여, 어머니 Brunhilda와 함께 남조의 진나라로 망명한 것으로 해석되며, 망명와서 기존의 Guntram 아들들과 왕위계승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위의 내용 중에, Childebert II가 Guntram의 후계자가 되고 양아들이 되었으면서도 그렇게 충직하지 않고, 583년에는 Chilperic과 연합하여 Guntram과 싸웠다고 기록한다. 한마디로 Guntram과 Childebert II는 전혀 남남의 별개의 이질집단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581년 북주가 수나라에 통합된다. 즉 Chilperic과 Childebert의 연합이 583년 Guntram과 싸우는 모습은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와 전쟁하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584년에는 Guntram이 Childebert의 영토를 침범해 Tours와 Poitiers를 빼앗았다고 한다. 즉 서로 적이 되어 전쟁하고, 한때 581년에는 Guntram이 Childebert를 두번이나 구해줬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력끼리 필요에 따라 연합하거나 전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592년 Guntram이 죽은 후 Childebert II가 부르군디를 이어 받았다는 기술은 전쟁을 해서 부루군디를 멸망 시키고 합병했다는 것을 왜곡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즉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흡수한 것인데, 별도의 진나라가 프랑스 역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이런 plot를 만들어 기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내에 별도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위적으로 주장하는 역사의 왜곡은 이후 살펴보는 Aquitaine지역에서의 Gondovald의 반란전쟁에서도 여실히 드러 난다.
또 한가지 주목할 내용은 Guntram이 Septimania지방(위 지도 참조)을 584년 이후 공격했다가 곧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기록이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고트족의 영토였다. 즉 남조의 진나라가 이 지역에서 고구려와 싸웠는데,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바로 화해했다는 것이다. Guntram의 패배의 가능성을 보인다.
In 584 or 585, one Gundowald claimed to be an illegitimate son of Chlothar I and proclaimed himself king, taking some major cities in southern Gaul, including Poitiers and Toulouse, which belonged to Gontrand. Gontrand marched against him, calling him nothing more than a miller's son named Ballomer. Gundowald fled to Comminges and Gontrand's army proceeded to besiege the citadel. He could not capture it, but did not need to: Gundowald's followers gave him over and he was executed.
(번역) 584 또는 585년, Gundowald는 자신이 Chlothar의 사생아였음을 주장했고, 또한 왕으로 칭하면서, Gontrand에 속한 Poitiers, Toulouse 같은 남부 Gaul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Guntram은 공격해 들어갔는데, Gundoald는 단지 방앗간의 아들이라며 Ballomer라고 이름지었다. Gundowald는 Comminges로 도주했으며, Guntram의 병력은 시요새(Saint-Bertrand-de-Comminges로 지금 알려진)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함락할 수는 없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GundoWald의 추종자들이 그를 넘겨 처형되었다.
584(585)년, Gundowald가 Gascony나 Aquitaine지역에서 부르군디의 Guntram과 싸운 것은 이 지역에 있던 서량과 진(남조)나라의 전쟁으로 추정된다. Gundowald가 싸움에 패해 죽은 것은 서량이 진나라에 흡수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In 587, Fredegund attempted to assassinate him, but failed. He went, on 28 November, to Trier to conclude a treaty with Childebert; Brunhilda, his sister-in-law, Sigebert's wife, whose ally he had always been; Chlodosind, Childebert's sister; Faileuba, Childebert's queen; Magneric, Bishop of Trier; and Ageric, Bishop of Verdun. This was called the Treaty of Andelot and it endured until Gontrand died.
(번역) 587년, Fredegund는 Guntram을 암살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Guntram은 11월 28일 Trier로 가서 Childebert와 Sigebert의 부인 Brunhilda(제수), Childebert여동생인 Chlodosind, Childebert 부인 Faileuda, 그리고, Trier Bishop인 Magneric, 그리고 Verdun Bishop인 Ageric과 함께 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소위 Andelot 협약이며, Guntrand가 죽을 때까지 지켜졌다.
Also in 587, Gontrand compelled obedience from Waroch II, the Breton ruler of the Vannetais. He forced the renewal of the oath of 578 in writing and demanded 1,000 solidi in compensation for raiding the Nantais. In 588, the compensation was not yet paid, as Waroch promised it to both Gontrand and Chlothar II, who probably had suzerainty over Vannes.
(번역) 587년에, Guntrand는 Waroch II, Vannetais지역의 Breton 지배자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그는 578년 서면으로 작성한 맹세를 갱신하기를 강요했고, Nantais(낭트)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1000 solidi(금화, gold coin)를 요구했다. 588년, Waroch이 Gontrand와 Chlothar II에 약속한 보상은 지불되지 않았다. Gontrand과 Chlothar II는 아마도 Vannes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다.
Location of Vannes in Franc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아래 기록을 보면 Waroch는 6세기 초기 20년이후, Gaul지방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통치 영역으로 두었다. 낭트까지 르와르강 하류의 많은 부분을 정복하였다 한다. 돌궐의 세력이 아닌가 한다.
According to some authors, the name Waroch I and the other names with which he's historically known are eponymous of Bro-erec. After the early twenty years of 6th century, during which he consolidated his control on a large part of Gallic areas, Waroch/Gwereg could conquer large parts of low Loire, until Nantes.
(source : Waroch,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In 589 or 590, Gontrand sent an expedition against Waroch under Beppolem and Ebrachain, mutual enemies. Ebrachain was also enemy of Fredegund, who sent the Saxons of Bayeux to aid Waroch.[5] Beppolem fought alone for three days before dying, at which point Waroch tried to flee to the Channel Islands, but Ebrachain destroyed his ships and forced him to accept a peace,[6] the renewal of the oath, and the surrender of a nephew as a hostage. This was all to no effect. The Bretons maintained their independent mindedness.
(번역) 589 또는 590년, Gontrand은 서로가 적인 Beppolem하의 Waroch와 Ebrachain에 원정대를 보냈다. Ebrachain은 Fredegund(Chilperic부인)의 적이기도 했는데, Fredegund는 Waroch를 도우라고 Bayeux의 삭슨족을 보냈다. Beppolem은 죽기전에 사흘동안 혼자 싸웠는데, 이 시점에서 Waroch는 Channel Islands로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Ebrachain이 그의 배를 부수어, 평화협정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맹세의 갱신과 조카를 인질로 하는 항복 조건이었다. 이것이 전부이고 다른 영향은 없었다. Bretoms은 그들의 독립적인 마음자세는 유지했다.
Fredegund(Chilperic부인)이 Waroch를 도우라고 Bayeux에 있는 Saxons족을 보냈다는 것은 돌궐족을 동원한 느낌이다. 그런데 Fredegund의 Neustria가 결국 프랑크왕국을 통일하는 수나라 (북주의 후예)라 할 때, 결국 수나라가 동돌궐(Soxons of Bayeux)을 동원해 서돌궐(Breton의 Waroch)을 도우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이글의 서두에서 수나라가 동돌궐과 서돌궐을 서로 싸우게 하여 동돌궐을 약하게 했다는 내용을 상기해 볼 때, 이와 관련되지 않나 생각한다. 즉 동돌궐과 서돌궐의 위치가 프랑크의 북변 해변의 좌우에 있는 돌궐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크왕국, 즉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추정된다. 즉 돌궐은 주로 앵글로 삭슨족을 말하는 것이 된다.
Location of Bayeux in Franc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channel islands in France (프랑스 북서부) (source : WorldAtlas.com)
In 589, Gontrand made a final advance on Septimania, to no avail. He fought against the barbarians who menaced the kingdom and quelled a rebellion of his niece Basina at a Poitevin monastery with the aid of many of his bishops in 590.
(번역) 589년에 Gontrand는 Septimania에 마지막 진군을 하나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왕국을 위협하는 Barbarians에 대항하여 싸웠고, 590년 그의 여러 bishops의 도움으로 Poitier 수도원에 있는 그의 질녀 Basina(Chilperic의 딸)의 반란군과 싸웠다.
589년 Gontrand는 남부 프랑스지역을 공격했다. 이 지역은 고트족인 고구려지역으로 보인다. 즉 신라의 세력인 남조의 진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으로 추정된다. 별 성과가 없었다는 것은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590년 Poitiers에서의 전쟁은 Chilperic의 북주세력, 수나라 세력이 남조의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조의 진나라는 수나라에 589년 망했는데, 부르군디의 Guntram은 592년 죽었다고 했다.
Death and veneration
He died at Chalon-sur-Saône in 592, and his nephew Childebert II succeeded him.[7] He was buried in the Church of Saint Marcellus, which he had founded in Chalon. Almost immediately, his subjects proclaimed Gontrand a saint and the Catholic Church celebrates his feast day on 28 March. The Huguenots, who scattered his ashes in the 16th century, left only his skull untouched in their fury. It is now kept there in a silver case.
(번역) 그는 592년 Chalon-sur-Soane에서 죽었고, 그의 조카 Childebert II가 그를 승계했다. 그는 Chalons에 세운 Saint Marcellus교회에 안장되었다. 곧 이어, 그의 속국들은 Gontrand을 성인으로 선언했고, 카톨릭교회는 3월 28일을 그의 날로 기념했다. 16세기에 그의 재를 뿌린 Huguenots는 그의 두개골만을 손타지 않게 보관하고, 지금은 그 장소에 은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source : Guntram,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 프랑크왕국 (481-613))
592년 Chalon-sur-Soane에서 죽은 것은 남조의 진나라가 수도 건강이 함락된 것을 의미하지 않나로 추정된다. Childebert II가 승계했다는 것은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 시키고 합병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2-1. Gundoald 자료
585년 Gundoald에 의해 프랑크왕국이 위험에 처할 지경에 이르렀다. 남부 Gaul(Aquitaine)지방의 usurper king이라 하지만, 남부지역을 놓고 전쟁을 한 세력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남조의 진(陳)나라(589년 수에 병합됨)나 서량(西梁) (587년 수에 병합됨) 또는 토욕혼이 수나라와 전쟁을 한 경우일 수 있다는 판단에, Gundoald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Gundoald or Gundovald was a Merovingian usurper king in the area of southern Gaul in either 584 or 585. He claimed to be an illegitimate son of Chlothar I[1] and, with the financial support of the Emperor Maurice,[2] took some major cities in southern Gaul, such as Poitiers and Toulouse, which belonged to Guntram, king of Burgundy, a legitimate son of Chlothar I. Guntram marched against him, calling him nothing more than a miller's son and named him 'Ballomer'. Gundovald fled to Comminges and Guntram's army set down to besiege the citadel (now known as Saint-Bertrand-de-Comminges). The siege was successful, Gundovald's support drained away quickly and he was handed over by the besieged to be executed.
(번역) Gundoald 또는 Gundovald는 584년 내지 585년에서 남부 Gaul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메로빙가 왕이었다. 그는 Chlothar의 사생아였음을 주장했고, 비잔틴제국의 Maurice황제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 Poitiers, Toulouse 같은 남부 Gaul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그런데 Poitiers, Toulouse는 Chlothar의 법적인 아들인 부르군디왕 Guntram에 속해있었다. Guntram은 공격해 들어갔는데, Gundoald는 단지 방앗간의 아들이라며 Ballomer라고 이름지었다. Gundoald는 Comminges로 도주했으며, Guntram의 병력은 요새(Saint-Bertrand-de-Comminges로 지금 알려진)를 포위하였다. 포위는 성공했고, Gundoval의 지원은 빨리 소진되고 결국 포위된 세력에 넘겨져 처형되었다.
The sole source for Gundovald is Gregory of Tours, who wrote about the events in his 'Histories', books 6 and 7. Gundovald was never king of Aquitaine as is sometimes thought; there was no such separate kingdom at the time. While his main backers were magnates of Austrasia, the Byzantine support consisted of treasure to buy followers and it is probable that Gundovald spent time in Constantinople before setting off to conquer parts of Gaul.
The usage of 'ballomer', a Frankish (possibly offensive) word of which the meaning is not known, is one of the first instances of the mentioning of a Germanic word in a literary source."
(번역) Gundovald에 대한 유일한 자료는 Gregory of Tours이다. 이 자료에서는 'Histories' 6권과 7권에서 이 사건에 대해 기술했다. Gundovald는 때때로 생각되듯이 Aquitaine의 왕이 절대 아니었고, 이 당시에 분리된 왕국이 없었다. 그의 주요 후원자들은 Austrasia의 거물들이었던 반면, 비잔틴의 지원은 지지자들을 사는 보물로 구성되어서, 아마도 Gundovald는 Gaul 지역의 일부를 정복하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Ballomer라는 의미를 알수 없는 프랑크 단어의 사용은 문학 자료에서 게르만 단어를 언급하는 첫번째 사례중의 하나이다.
Gundovald가 Aquitaine의 왕이 아니었다고 위글에서 강조한 것은 이 지역에 Gundovald왕국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아래 스페인어 지도에는 Aquitaine 왕국 (Reino de Aquitania)으로 기술되었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에서 생활한 Gundovald가 Gaul지역에 온 것은 백제의 장군인 Gundovald가 명을 받아 백제의 지역인 서량의 지역으로 파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서량은 585년 수나라에 의해 병합된다.
Kingdom of Aquitaine in 584-585 by Gundoald (source : Wikipedia)
"Early life
Gundovald was born in Gaul. According to Gregory of Tours, he was educated with great care and wore his hair long in the style of the Frankish kings, At some point, his mother presented him to Childebert I claiming that his father, Chlothar I, hated him. Childebert I had no sons of his own, so he took Gundovald as his own. In response, Chlothar I demanded that Gundovald be presented to him. Chlothar I claimed that Gundovald was not his son. After Chlothar I's death, Charibert I received Gundovald. However, he was again summoned by Sigebert I who denied his legitimacy once more and cut his hair off. Gundovald was sent to Cologne. Despite his rejection by two Merovingian kings, there is good reason to believe that Gundovald was a genuine offspring of Chlothar I. For a start, he was treated as a royal by two family members.[3]
(번역) 생애 초기 : Gundovald는 Gaul에서 태어났다. Gregory of Tours에 의하면, 그는 잘 교육되었고 프랑크왕의 스타일인 긴 머리를 가졌다. 어느 시기에, 그의 어머니는 그를 Childebert I에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 Chlothar I이 그를 미워했다고 주장했다. Childebert I은 자신의 아들이 없어서 Gundovald을 그의 아들로 삼았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Chlothar I은 Gundovald가 자신에게 소개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Chlothat I은 Gundovald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Chlothar가 죽은 후, Charibert I는 Gundovald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Sigebert I에 의해 소환되었고, Sigebert I은 다시 한번 그의 정통성을 부인했고, 그의 머리를 잘랐다. Gundovald는 Cologne로 보내졌다. 두 메로빙가 왕들에 의해 거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Gundovald가 Chlothar I의 혈통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두 가족구성원에 의해 왕족으로 취급되었다.
Furthermore, his upbringing was that of a member of royalty. Gregory of Tours himself may have believed he was a child of Chlothar I due to the fact that during his narrative he mentions that Radegund of Poitiers and Ingitrude of Tours can attest to Gundovald's legitimacy. Gregory thought of the former as a saint and thought highly of the latter while composing book seven of the histories, so he likely would have believed their word about Gundovald.[4]
(번역) 더구나 그의 가정교육은 왕족의 그것이었다. Gregory of Tours는 그가 Chlothar I의 아들이라고 믿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언급에서 Gregory는 Poitiers의 Radegund와 Tours의 Ingitrude가 Gundovald의 정통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Gregory는 Histories 7권을 쓰는 동안, Poitiers의 Radegund를 성인으로 생각했고, Tours의 Ingitrude를 매우 높게 생각해서, 그는 Gundovald에 대한 그들의 말을 믿었을 것으로 보인다.
After escaping Cologne, Gundovald went to Italy, where he was received by the Eastern Roman general Narses.The general might have wanted to establish him as governor of the Frankish provinces in Italy; Liguria, Venetia and the Cottian Alps. Installed there, Gundovald could have possibly rallied the local inhabitants to fight off the Lombard invasions.[5] Narses' plans for Gundovald did not come to fruition as he fell from grace and was replaced by Longinus. Nevertheless during his time in Italy, Gundovald married and had children, before moving to Constantinople, where he stayed until his return to Gaul.
(번역) Cologne에서 탈출해서 Gundovald는 이태리로 갔는데, 그는 동로마 장군 Narses (Justinian I 황제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 장군은 그를 이태리에 있는 프랑크지방 (Liguria, Venetia, Cottian Alps)의 governor로 삼기를 원했을 지 모른다. 그곳에 정착하여, Gundovald는 지역 주민들과 같이 롬바르드의 침입에 싸울 수 있었을 수 있었다. Gundovald에 대한 Narses 장군의 계획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왜나하면 그의 명예가 실추되어 Loginus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이태리에 있는 동안, Gundovald는 결혼을 해서 자녀들을 가졌으나, 콘스탄티노플로 이사가서 Gaul지역으로 돌아올 때까지 거기서 머물렀다.
Location of Cologne in Germany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The empire in 555 under Justinian the Great, at its greatest extent since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its vassals in pink) (source : Wikipedia)
(By Tataryn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9926428)
The territorial evolution of the Eastern Roman Empire under each imperial dynasty until its fall in 1453. (source : Wikipedia)
(By NeimWiki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17682644)
이 당시의 Narses장군은 Justinia I의 명령하에 이태리에 파견(552년)되어 동고트와 싸우고 있었다. 당시 비잔틴제국은 Lombards와 동맹관계였으며, 프랑크는 적이었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이 당시 상황이 백제의 성왕 (비잔틴 Justinian I)과 신라의 진흥왕(Lomards)이 연합하여 고구려(동고트)를 밀어 내고 이태리를 회복하는 상황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Gundovald는 고구려의 영역으로 판단되는 Cologne를 탈출하여, 백제인 비잔틴제국에 갔다가,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 사이가 틀어진 상황에서, 백제 비잔틴제국이 신라 롬바르드세력과 싸우는데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다가 후에 Gaul지역으로 다시 돌아 왔다는 것은 비잔틴제국과 관련한 군사활동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Aquitaine왕국이 백제와 관련 있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후량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한때 후량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했는데,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한성지역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전쟁이 있던 것으로 사료된다. 즉 남조의 진나라와 후량의 전쟁이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의 성왕 사이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이는 서양사에서 공식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역사이다. Gundovald에 관한 기술에서 약간의 편린이 보인다. 그러나 이 자료 마저 연대가 나타나지 않아 남조의 양나라 시기인지 서량의 시기인지 알 수 없어 아쉽다.
Narses was to take more than a year to reach Italy after his appointment (in 551), as his entire army made a long march along the coast of the Adriatic Sea. Totila the Ostrogothic king controlled the sea of eastern Italy and hampered supply ships that set sail for Narses' army. John from Salona led 38 ships and Valerian sailed with 12 to meet Totila's force and bring relief to Ancona.[28] Procopius described the subsequent Battle of Sena Gallica as a naval battle that resembled a battle on land. "There were arrows discharged and fighting at close quarters with sword and spear, just as on a battle field."[29] The Byzantine victory at Sena Gallica was overwhelming, as 36 of the 47 Gothic ships were destroyed, and Gibal, a Gothic admiral, was captured. Historian Archibald R. Lewis pointed out that victory could only come to Narses after Totila's sea dominance was brought to an end.[30]
There were a number of reasons that Narses' march was very slow. Totila had dispatched various troops to employ delaying tactics and the Franks were enemies of Narses' allies the Lombards, and did not allow free passage.
(source : Narse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Hahnentorburg in Cologne, Germany (source : Wikipedia) (고구려의 셩곽으로 보임)
The Gundovald Affair
The reason for Gundovald's return to Gaul is not clear. Gundovald himself claims in the Histories that he was invited back by the Austrasian magnate Guntram Boso, who travelled to Constantinople. However, Guntram Boso himself denied this when confronted by Guntram of Burgundy and suggested Duke Mummolus had invited him back. Regardless, upon his return to Gaul, he was received in Marseilles by Bishop Theodore and subsequently he set off to join Duke Mummolus at Avignon. However, Gundovald was soon forced to flee to an island in the Mediterranean after Guntram Boso arrested Bishop Theodore for introducing a foreigner to Gaul. The Bishop Epiphanius was also implicated in the alleged plot to invite Gundovald back, as he arrived in Marseilles at the same time as him.
(번역) Gundovald가 왜 Gaul지역으로 돌아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Gundovald자신이 Histories에서 주장하기를 그는 Austrasian거물 Guntram Boso이 Constantinople로 여행했을 때, 그에 의해 초대받아 돌아왔다 한다. 그러나 Guntram Boso자신은 부르군디의 Gutram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부인했고, Duke Mummolus가 Gundovald를 초청하였다고 시사했다. 여하튼, Gaul로 돌아오자, 그는 Theodore Bishop에 의해 마르세이유에서 받아들여지고, 이어서 아비뇽에 있는 Mummolus Duke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Gundovald는 곧 지중해의 어느 섬으로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Guntram Boso가 Gaul에 외국인을 끌어 들인 Bishop Theodore를 체포했기 때문이다. Bishop Epiphanius도, Gundovald와 같은 시각에 마르세이유에 도착했으므로, Gundovald를 초대하는데 같이 합세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Gundovald later returned to Gaul again and stayed with Mummolus in Avignon. Accompanied by the Duke and also another called Desiderius, Gundovald soon set off to the district of Limoges, where he was raised up as king on a shield at the tomb of Saint Martin. Gregory writes, as he was carried round the tomb for third time, he stumbled and struggled to stay upright. Following on from these events, Gundovald made a progress through the neighbouring cities. He then planned to move to Poitiers, but was reluctant to do so because he heard an army was being raised against him.
(번역) Gundovald는 후에 다시 Gaul에 돌아 와서 아비뇽에 Mummolus와 함게 머물렀다. Duke와 그리고 Desiderius라 불리는 사람과 함께, Gundovald는 바로 Limoges 지역으로 진군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Saint Martin무덤에서 방어하는 왕으로 키워졌다. Gregory가 쓰기를, 그는 세번째로 Limoges의 Saint Martin 무덤에 왔을 때, 그는 이 지역에서 고전했다. 이러한 사건에 이어서, Gundovald는 이웃도시들 공격에 진전을 이루었다. 그는 Poitiers로 진군하려고 계획했는데, 그러나 그에 대적하는 군대를 모은다는 것을 듣고, Poitiers로 공격하기를 망설였다.
Gundovald는 비잔틴제국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즉 백제와 관련 있는 서량의 활동으로 추정된다. Avignon에서 머물다가 Limoges까지 진군했다고 했다. 당시 서량의 위세가 Aquitaine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 Aquitaine Kingdom이란 말이 어울린다. Poitiers까지 진군하려 했다 한다.
Gundovald also asked for an oath of allegiance to Childebert II, his supposed nephew, in all the territories that had previously belonged to Sigibert I. This reinforces the idea that an Austrasian faction was behind Gundovald's return and revolt. Gundovald also demanded an oath of allegiance to himself in all the territories that had belonged to Chilperic I and Guntram of Burgundy. He then moved on to Angoulême, where he received the oath there and gave bribes to its chief citizens. Then Gundovald moved to Périgueux, where he persecuted the Bishop for not having received him with due honour. Next, he marched on Toulouse and sent messengers to its Bishop Magnulf, but the inhabitants of the city prepared to resist the supposed pretender. However, when they saw the size of Gundovald's army, they opened the gates and let his forces in. After the discussions with the Bishop went wrong, Magnulf was prodded with spears, punched, kicked, tied up with rope and banished from his own city
(번역) Gundovald는, 그의 조카로 추정되는 Childebert II에게, 이전에 Sigibert I에 속한 모든 영토에서, 충성의 맹세를 요구했다. 이것은 Austrasian파벌이 Gundovald의 귀환과 반란의 뒤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Gundovald는, Chilperic I과 부르군디의 Guntram에 속한 모든 영토에서, 그 자신에 대한 충성맹세를 요구했다. 그리고 나서 Angouleme로 이동했는데, Angouleme에서 그는 맹세를 받았고 시민 수장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그리고 Gundovald는 Perigueux로 이동해서 자신을 합당한 대우로 영접하지 않은 Bishop을 핍박했다. 그후 그는 Toulouse로 진격했는데, Toulouse의 Bishop Magnulf에게 메신저를 보냈으나, 그 도시 주민들은 반란군에 대항하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이 Gundovald의 군병력 수를 보고는 성문을 열고 Gundovald의 군을 들어오게 했다. Bishop과의 논의가 잘 되지 않자, Magnulf는 창으로 찔리고, 맞고, 차이고, 로프로 묶여 그 도시로부터 추방당했다.
Gundovald의 위세는 대단하여 Neustria, Austrasia, Burgundy 전역에 그 위세가 떨친 것으로 보인다. 과연 프랑크왕국들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Angouleme, Perigueux, Toulouse 등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은 르와르강 남쪽 지역이다. 즉 주로 남조의 영역인 것이다. 이때는 남조 서량의 시기일 것이다. 북조는 북위가 혼란해져 서위 동위로 나뉘어지는 형세이다. 584년 시기라면 백제 위덕왕 시기인데, 위덕왕 시기에는 의외로 공란으로 되어 있는 연대수가 많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중국의 문서를 바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제가 삭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Gundovald then moved on from Toulouse and was pursued by an army made up of the inhabitants of Tours and Poitevins. He decided to go Bordeaux, where he tried to take a finger bone of Saint Sergius to aid his cause. The bone was broken in the process. The revolt subsequently established a new Bishop of Dax and nullified some of Chilperic's decrees. Gundovald soon sent two messengers to Guntram demanding the portion of Chlothar I's realm that was rightfully his. Guntram stretched the messengers, until they admitted that Gundovald had been asked to accept kingship by Childebert II's leaders. As a result of this, Guntram warned Childebert II not to trust his advisers, before accepting him as his heir.
(번역) Gundovald는 Toulouse로부터 계속 진군하였고, Tours와 Poitiers 주민들로 이루어진 병력에 의해 추격을 당했다. 그는 보르도로 가서, 그의 문제를 도울 Saint Sergius의 finger bone을 취하려 했다. 그뼈는 도중에 부러졌다. 반란은 그후 새로운 Bishop of Dax를 세웠고 Chilperic의 몇몇 법령을 철폐했다. Gundovald는 곧 Guntram에게 두 전령을 보내, 정당하게 그의 것인 Chlothar I영토의 일부를 요구했다. Guntram은 두 전령을 다그쳐서, Gundovald가 Childebert II의 리더들에 의해 왕위를 받을 것을 요구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Guntram은 Childebert II에게 그의 충고자들을 신뢰하지 말 것을 그의 후계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경고했다.
Gundovald가 Childebert II하의 세력과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Guntram이 이를 알고 Childebert II에게 충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Chilperic의 몇몇 법령을 철폐했다는 것은 그의 영토의 일부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Chilperic은 서위 지역, Neustria지역이다. 즉 남조의 서량의 위세는 한때 르와르강을 넘어 북조에까지 이르렀다고 해석된다.
The Siege of Comminges
With Guntram's army approaching, Gundovald soon crossed the Garonne and made for Comminges or Convenae in the foothills of the Pyrenees. The town itself was defended by a 674 metre perimeter wall, so Gundovald decided to make his stand here. When he arrived in Comminges, Gundovald claimed that he had been invited by all those who dwell in Childebert II's realm and ordered the inhabitants to bring food and supplies inside the wall. Furthermore, he told them to hold out for reinforcements. Gundovald also told the men of Convenae to sally forth and fight, but when the citizens of the town were out, Gundovald ordered the gates to be shut on them and the seizure of their possessions.
(번역) Comminges 포위
Guntram의 군이 다가옴에 따라, Gundovald는 곧 가론강을 건너 피레네산맥의 작은 언덕에 있는 Comminges 또는 Convenae에 진을 쳤다. 이 도시 자체는 674미터의 주위 성벽에 의해 방어 되었으므로, Gundovald는 여기에 진을 치기로 결정했다. 그가 Comminges에 도착했을때, Gundovald는 그는 Childebert II의 영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초대되었다고 주장하고, 주민들이 성안으로 음식과 물자를 가져올 것으로 명령했다. 더구나, 그는 지원병력으로서 버티라고 말했다. Gundovald는 또한 Convenae 사람들에게 나가 싸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역 시민들이 나갔을 때, Gundovald는 성문을 닫고 그들의 소지품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Guntram과 Gundovald의 싸움은 남조의 진나라와 서량의 전쟁으로 해석된다. 또는 수나라의 서량 정복 역사(587년)를 Guntram의 공격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Guntram의 부르군디가 Orleans을 수도로 한 것 자체가 이상하다. 부르군디는 남조의 진나라라면 실질적 수도였다는 Chalon-sur-Soane가 남조의 수도 건강 정도가 되는 것 같고, Orleans은 수나라의 수도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When the siege had begun, Guntram's men tried to undermine the moral of the defenders. Men climbed to the top of the Matacan, the only highpoint within hailing distance to insult Gundovald. They made reference to his nickname ballomer, his painting skills and the cutting of his hair by Chlothar I and Sigibert I. Gundovald went on the ramparts and answered back to the attackers.
(번역) 포위가 시작되었을 때, Gutram 휘하사람들은 수비자들의 사기를 약화 시키려 했다. 그들은 Gundovald를 모욕줄 수 있는 신호가 가능한 거리안의 유일한 고지인 Matacan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들은 Ballomer라는 닉네임을 언급했고, 그의 그림솜씨와 Chlothar I 과 Sigibert I에 의한 머리카락 잘림을 언급했다. Gundovald는 성곽으로 가서 공격자들에게 응답했다.
Meanwhile, the siege engines brought by Guntram's army were proving ineffective, so Leudgisel, who was in charge of the siege, ordered the construction of new ones. The constructed siege machines mainly consisted of battering rams, with the aim of knocking down holes in the walls. As Guntram's men approached the walls they were bombarded by stones, as well as flaming barrels of pitch and fat.
However, not all the defenders believed Comminges could hold. Duke Bladast, who supported Gundovald, tried to escape the city by setting fire to the church-house as a distraction.
(번역) 그러는 동안, Guntram군에 의한 포위망은 비효울적임이 드러 났고, 그래서 포위를 책임지고 있는 Leudgisel은 새로운 포위망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건축된 포위망은 주로 성벽에 구멍을 내기 위해 성벽을 부수는 장치로 구성되었다. Guntram의 군이 성벽에 접근함에 따라, 돌로 공격당하고, 불타는 피치 등을 던졌다.
그러나, 모든 수비자들이 Comminges가 지탱할 것이라 믿은 것은 아니었다. Gundovald를 지원했던 Duke Bladast는 혼란시키려고 교회에 불을 지르고 도시를 빠져 나가려 했다.
Guntram's forces were also constructing an agger, a great ramp or mound- opposite the east wall. With this in mind, the besiegers soon sent messengers to Duke Mummolus and asked him to acknowledge Guntram as his true overlord. Together with Bishop Sagittarius and other supporters of Gundovald, Mummolus went to the cathedral, where they all took an oath to hand over Gundovald to his enemies. When the group confronted Gundovald, they suggested that he should try and make peace with Guntram. According to Gregory, Gundovald knew he was being betrayed. Regardless, he left Comminges anyway. Now outside of the town, Ullo, a man of Guntram, pushed Gundovald over and thrust a lance at him. Gundovald survived, but Boso, one of Guntram's men, threw a stone at him. The stone hit Gundovald in the head and killed him. The next day the gates of the town were opened and Guntram's men slaughtered all the common people, while all the buildings, including churches, were put to the flame and destroyed. Nevertheless, Gundovald was dead and his revolt was over."
(번역) Guntram군도 동쪽 성벽 맞은 편에 언덕 더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포위자들은 곧 Mummolus Duke에게 전령을 보내 Guntram을 유일한 지배자로 인식할 것을 요구했다. Bishop Sagittarius와 다른 Gundovald 지지자들과 함께, Mummolus는 성당으로 가서 Gundovald를 적에게 넘길 것을 맹세했다. 이 그룹이 Gundovald를 마주쳤을 때, 그들은 Guntram과 강화하기를 제안했다. Gregory에 의하면, Gundovald는 그들이 배반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하튼, 그는 Comminges를 떠났다. 도시밖에서, Guntram의 부하 Uiilo가 Gundovald를 밀치고 창을 던졌다. Gundovald는 살아 남았으나, Guntram 의 부하 Boso가 그에게 돌을 던졌다. 돌은 Gundovald의 머리를 맞추고 그를 죽였다. 그 다음날, 성문이 열리고 Guntram 병력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죽이고 모든 빌딩, 교회를 포함하여 불지르고 파괴했다. Gundovald는 죽고 반란은 끝났다.
(source : Gundoald,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2-2. General Mummolus 자료
상기 자료에서 Duke Mummolus가 Gundovald와 함께한 세력으로 보이므로 Mummolus가 중요한 인물로 판단되어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자 한다.
Mummolus (also spelled Mommolus or Mummulus), was a Gallo-Roman patrician and prefect who served Guntram, King of Burgundy, as a general in the 6th century.
He was born Eunius to Peonius, Count of Auxerre. Peonius sent his son to Guntram with gifts in order to guarantee his reappointment as count, but Mummolus used his gifts for his own request for the comital office, which he received. Mummolus attained prominence in Gaul during the first Lombard invasion. The patrician Amatus died in battle against them and was replaced in that office by Mummolus.
(번역) Mummolus (또한 Mommolus or Mummulus)는 Gallo-Roman 귀족이며, 부르군디왕 Guntram하 6세기의 장군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도지사였다.
그는 Auxerre 백작 Peonius의 아들 Eunius로 태어났다. Peonius는 그의 아들을 Guntram에 선물과 함께 보냈는데, 이는 백작으로서의 재임명을 받기 위해서인데, Mummolus는 이 선물을 그의 백작 사무소 요구를 위해 이용했고 그래서 받았다. Mummolus는 롬바르드 침입시 Gaul지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Amatus 귀족이 롬바르드와 전투에서 죽었고, 그 사무실에 Mummolus로 대체되었다.
It was in the wars with the Lombards that Mummolus proved himself a uniquely capable strategist. The Lombards were then in the midst of an interregnum known as the Rule of the Dukes and three of their dukes — Zaban of Pavia, Amo, and Rodanus — invaded Provence and were expelled by Mummolus and chased even into Italy. His first victory was a tactical one at Embrun. This was followed up by a defeat of some Saxon raiders who had accompanied the Lombards at Estoublon. The main Saxon army, however, made peace. But when the Saxons came to the River Rhône, they were not allowed to cross, Mummolus stopping them. The Saxons paid a high price in gold and were eventually allowed to cross.
(번역) Mummolus가 유일하게 능력있는 전력가로 증명된 것은 롬바르드와의 전쟁에서였다. 롬바르드는 그때 Dukes의 규정에 따른 부재기간중이었고, 그들 중 3 공작들 - Zaban of Pavia, Amo, Rodanus - 이 프로방스지역을 침범했고, Mummolus가 이들을 격퇴했으며, 심지어 이태리까지 추격했다. 그의 첫번째 승리는 Embrun에서 전술적인 승리였다. 이것은 Estoublon에서 롬바르드를 동반했던 삭슨 약탈자들의 패배로 이어졌다. 그러나 주 삭슨족군은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삭슨족이 론강으로 왔을 때, 그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Mummolus가 그들을 막았다. 삭슨족은 금으로 높은 값을 치루고 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Mummolus장군이 롬바르드(신라)와 전쟁을 한 것을 보면, 백제나 고구려의 세력으로 보인다. 윗글에서 삭슨족이 롬바르드와 동반했다는 기록은 돌궐족이 신라와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551년 돌궐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나제동맹은 고구려를 공격해 롬바르드지역을 확보했다. 이때 필자는 돌궐과 나제동맹과의 연합을 의심했는데, 과연 여기서 드러난다. 이들과 싸운 Mummolus는 그러면 고구려 세력으로 추정된다. 특히 위에서 전투가 벌어진 프로방스지역은 고트족의 영역으로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After the wars with the Lombards, Mummolus went to the aid of the king of Austrasia, Sigebert I, against the king of Soissons, Chilperic I. He successfully recovered Tours and Poitiers. He then met Desiderius, Chilperic's chief general, and defeated him in battle. By this time, he was the proven best general in Gaul. He joined the rebellious duke Guntram Boso and at first supported Gundoald as pretendent king in Aquitaine against Guntram, but abandoned that cause and rejoined Guntram against the insurrection. He sabotaged the rebels' boats in an attempt to drown them in the Rhône, but Guntram Boso reached Avignon, where Mummolus was staying, and besieged it. At the siege of Avignon, Mummolus displayed great tactical knowledge, diverting water from the river to a moat and digging holes in the bed of the moat to make it impossible to cross for the besieging force. Guntram's nephew, Childebert II, sent down an army which relieved Avignon and rescued Mummolus.
(번역) 롬바르드와 전쟁이후, Mummolus는 Soissons왕 Chilperic I과 싸우는 Austrasia왕 Sigebert I를 도우러 갔다. 그는 성공적으로 Tours와 Poitiers를 회복했다. 그리고 Chilperic의 chief general인 Desiderius를 만나 전투에서 패배시켰다. 이때까지, 그는 Gaul에서 검증된 최고의 장군이었다.
그는 Guntram Boso의 반란에 합류하고, Guntram에 대항하는 Aquitaine지방의 반란왕인 Gundovald를 처음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그 동기를 포기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Guntram에 다시 합류했다. 그는 반란군들을 론강에 수장하려 그들의 배들을 파괴했으나, Guntram Boso가 Mummolus가 머무르는 아비뇽에 도착해 포위했다. 아비뇽포위에서 Mummolus는 위대한 전술적 지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강물의 물길을 바꾸어 성 주위에 둘러싼 못으로 흐르게 하고 이곳에 구멍을 파서 포위한 적병이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Guntram의 조카 Childebert II가 병력을 보내 아비뇽을 해방시키고 Mummolus를 구했다.
Mummolus장군은 롬바르드 전쟁이후 북제 지역인 Austrasia왕 Sigebert I을 도우러 간 것을 보면 더욱 고구려와 관련 있는 인물로 보인다. 북제는 고구려와 관련 있는 세력으로 보인다. Chilperic의 장군 Desiderius를 패배시킨 것은 북주와 전쟁하여 이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Guntram Boso, Gundovald와 합류한 것은 고구려군의 백제 서량과의 연합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후 다시 Gutram에 합류한 것은 고구려의 연합이 이제 다시 신라 세력인 남조의 진나라와 연합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신라 진흥왕과의 협상에서 평양에 진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라와 서로 연합하였다.
Gregory of Tours accused Mummolus of subjecting many Franks who had hitherto been free of taxation. During his wars against Chilperic, Mummolus had obtained the enmity of his queen Fredegunda, who accused him of responsibility for the death of her son Theodoric and of practising sorcery. He was eventually captured in a rebellion and ordered executed by Guntram. He left a huge treasure behind, which was consequently plundered, as his family members had mostly been arrested by the king's men.
(번역) Gregory of Tours는 Mummolus가 이제 조세로부터 자유로운 많은 프랑크인들을 복속시켰다고 비난했다. Chilperic에 대항한 그의 전투동안, Mummolus는 그의 여왕 Fredegunda로부터 원한을 샀는데, Fredegund 여왕은 그의 아들 Theoderic(Clothar의 오기?)의 죽음에 그의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였다고 그를 바난했다. 그는 결국 반란중에 붙잡히고 Guntram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는 많은 보물을 남겼는데, 이들은 모두 약탈당했는데, 그의 가족들이 모두 왕의 부하들에게 잡혔기 깨문이다.
(source : Mummolu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Mummolus장군이 프랑크인들을 복속시켰다는 Gregory의 기록은 그가 고구려인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더 강하게 한다. Fredegund는 북주(Neustria)의 세력이다. 즉 Mummolus는 북제와 북주의 전쟁에서 맹활약했다는 것이다. 북제가 고구려 세력과 가깝다는 추정이 더 힘을 받는다. 그러나 Guntram에 의해 처형되었다 한다. 즉 남조의 진나라 세력에 패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신라의 진흥왕 세력에 고구려가 패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주는 결국 당나라로 연결된다. 신라의 연합은 이미 이시기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흡수한 이후, 수나라를 망하게 한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2-3. 남조(유송 - 양)의 역사는 백제의 역사인가
필자는 남조의 역사가 백제의 역사인가에 대해 고민해왔다. 특히 한성지역이 Clermont-Ferrand으로 추정될 때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남조가 스페인 지역인가 생각했지만, 고트족의 고구려지역이란 것을 고려하면 남조는 스페인까지 가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계속된 연구에서 르와르강이 장강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따라서 남조의 역사는 프랑스 르와르강 이남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 백제가 있어 북위와도 싸운 것이다. 즉 한성이 이 지역에 있었고, 횡악은 피레네산맥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남조의 역사가 백제의 역사가 아닌가 한다. 남북조 역사를 춘추필법으로 막장의 역사를 만드는 중국 사가들의 행태를 볼 때, 일부 제외한 남북조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남조의 진나라는 신라세력이라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 그러면 진나라 이전은 백제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남조의 유송은 420-479기간 존재했는데, 이는 백제의 구이신왕부터 삼근왕까지의 재위기간 (420-479)이다. 이 가운데, 한성백제의 멸망의 개로왕이 있다. 이당시 475년 고구려에 한성백제가 멸망하고, 507년 문자왕 시절 한성 공격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횡악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아래 삼국사기 자료 참조)
즉 한성은 475-507년 고구려가 점하였다가 무령왕 시절 백제에게 다시 빼앗겼다는 것이다. 무령왕 시절 한성에서 돌아왔다 (523년), 한수이북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다 (523년) 기록 등은 이를 말해 준다. (아래 삼국사기 자료 참조). 그러면서도 동성왕 시절 한성은 회복 못했어도, 북위와의 3차례 전쟁, 그리고 한산성의 언급은 아직 백제가 이 지역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제가 존재한 479-502기간은 동성왕의 재위기간 479-501과 거의 같다. 한산성, 우두성의 존재는 남제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남제를 이은 양나라는 502-557년기간인데, 백제의 무령왕-성왕에 걸친 기간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무령왕 시기의 한수와 한성의 언급은, 남조 양나라 시기에 백제가 한성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나라시기에도 백제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크 역사에서 비잔틴제국과 연관성을 갖는 Gundovald 등의 존재가 이를 말해준다고 본다. 성왕 시기에 나제 동맹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는데,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빼앗았다고 한국사는 말한다. 이 한강유역 지역이 한수지역이 아닌가 한다. 한수는 르와르강과 손강이 접한 어느 강이 아닌가 한다. 일본서기에, 성왕은 한성을 포기하고, 진흥왕이 취했다 했다. 그래서 양나라가 진나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일부 양나라 세력이 남아 서쪽으로 이동해 서량으로 존재한다. 이 서량 세력이 그래서 백제의 일부라 판단된다. 이들이 Aquitaine kingdomd으로 남아 있던 서량이 아닌가 한다.
프랑크 역사에서 부르군디왕 Guntram의 재위기간이 561-592 기간으로 남조의 진나라 존재기간 557-589기간과 매우 유사하다. 즉 프랑크 역사의 부르군디왕 Guntram의 재위기간동안 진나라가 여기에 존재한 것이다. 이는 신라 진흥왕이 개척하여 이후 진평왕 시기 중에 수나라에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진평왕 시기 587-589기간동안 이를 암시하는 듯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아래 자료 참조)
백제 의 연대기 남조의 연대기 북조의 연대기
북위 (386-534)
구이신왕(420-427) 유송 (420-479)
비유왕 (427-455)
개로왕 (455-475)
문주왕 (475-477)
삼근왕 (477-479)
동성왕 (479-501) 남제 (479-502)
무령왕 (501-523) 양 (502-557)
성 왕 (523-554) 동위 (534-550) 서위 (535-557)
위덕왕 (554-598) 서량 (555-587)
신라 진흥왕 (540-576) 진 (557-589) 북제 (550-577) 북주 (557-581)
신라 진지왕 (576-579)
신라 진평왕 (579-631) 남북조 통일 수나라 (581-619)
<고구려 문자왕 시기>
十五年冬十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눈과 추위로 인해 실패하다 (AD 505)
十六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506)
十六年 백제를 공격하다 (AD 506)
507년 고로(高老)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橫岳)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위키)
十七年 양이 조서를 보내 문자명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507)
十七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507)
(자료 : 고구려 문자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백제 동성왕 시기>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AD 482)
四年冬十月 큰 눈이 내리다 (AD 482)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AD 483)
六年秋七月 남제에 파견하는 사절의 통행을 고구려가 차단하다 (AD 484)
八年秋七月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다 (AD 486)
八年冬十月 대궐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AD 486)
487년 : 공백
十年 위가 침입하다 (AD 488)
.......................
二十二年夏四月 우두성에서 사냥하다 (AD 500)
(자료 : 백제, 동성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백제하)
<백제 무령왕 시기>
六年秋七月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 함락하다 (506)
七年夏五月 장령성을 축조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다 (507)
七年冬十月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하다 (507) (한성 공격)
508-509 : 2년 공백
二十三年春二月 한수 이북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다 (523)
二十三年春三月 한성에서 돌아오다 (523)
二十三年夏五月 무령왕이 죽다 (523)
(자료: 백제 무령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백제하)
<신라 진흥왕 시기>
十四年秋七月 신주를 설치하다 (AD 553)
十六年冬十月 북한산에 순행하다 (AD 555)
十六年冬十一月 북한산에서 돌아오다 (AD 555)
十七年秋七月 비열홀주를 설치하다 (AD 556)
十八年 국원을 소경으로 삼다 (AD 557)
十八年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하다 (AD 557)
十九年春二月 귀족의 자제 등을 국원소경으로 옮기다 (AD 558)
十九年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다 (AD 558)
559-561 : 3년 공백
二十三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의 백성을 침략하다 (AD 562)
二十三年秋九月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다 (AD 562)
563년 : 공백
二十五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AD 564)
二十六年春二月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AD 565)
二十六年秋八月 아찬 춘부에게 국원을 지키게 하다 (AD 565)
二十六年秋九月 품주를 설치하다 (AD 565)
二十六年 진에서 불경을 보내다 (AD 565)
二十七年春二月 기원사와 실제사가 세위지다 (AD 566)
二十七年 동륜을 왕태자로 삼다 (AD 566)
二十七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6)
二十七年 황룡사가 준공되다 (AD 566)
二十八年春三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7)
二十九年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다 (AD 568)
二十九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8)
二十九年冬十月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하다 (AD 568)
569년 : 공백
三十一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70)
三十二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71)
三十三年春一月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AD 572)
三十三年春三月 왕태자인 동륜이 죽다 (AD 572)
三十三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AD 572)
三十三年冬十月二十日 팔관연회를 열다 (AD 572)
573년 : 공백
三十五年春三月 황룡사의 장육상을 주조하다 (AD 574)
三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AD 575)
三十六年 황룡사의 장육상이 눈물을 흘리다 (AD 575)
三十七年 원화를 받들다 (AD 576)
三十七 안홍법사가 돌아오다 (AD 576)
三十七年秋八月 왕이 죽다 (AD 576)
(자료: 신라 진흥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내물왕 -진지왕)
<고구려 평원왕 시기>
二十七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585)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586)
587-589 : 3년 공백
三十二年 진이 멸망한 소식을 듣고 수의 침입에 대비하다 (590)
(자료: 고구려, 평원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백제 위덕왕 시기>
一年秋七月 위덕왕이 즉위하다 (554)
一年冬十月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하다 (554)
555-558 : 4년 공백
六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559)
八年秋七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561)
562-566 : 5년 공백
十四年秋九月 진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567)
568-569 : 2년 공백
十七年 제가 왕을 거기 대장군으로 책봉하다 (570)
十八年 제가 왕을 다시 책봉하다 (571)
十九年 사신을 제에 보내 조공하다 (572)
十九年秋九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572)
573-576 : 4년 공백
二十四年秋七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577)
二十四年冬十月 신라의 서부 변경을 공격하다 (577)
二十四年冬十一月 사신을 우문주에 보내 조공하다 (577)
二十五年 사신을 우문씨의 북주에 보내 조공하다 (578)
二十六年冬十月 혜성이 나타나다 (579)
二十六年 지진이 일어나다 (579)
二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581)
二十八年 수에서 왕을 책봉하다 (581)
二十九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582)
583년 : 공백
三十一年冬十一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584)
585년 : 공백
三十三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586)
587-588 : 2년 공백
三十六年 수가 진을 평정하다 (589)
三十六年 수의 배가 탐모라국으로 표류하다 (589)
590-591 : 2년 공백
(자료 : 백제 위덕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백제하)
<신라 진평왕 시기>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AD 586)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AD 587)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AD 588)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AD 589)
十一年秋七月 홍수가 나서 진휼하다 (AD 589)
590년 : 공백
二十五年秋八月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다 (AD 603)
二十六年秋七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604)
二十六年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다 (AD 604)
(자료 : 신라 진평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진평-문무)
남조의 역사가 백제와 신라의 역사인지에 대한 검토는 더욱 자세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차후 보다 자세히 글을 쓰는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곳에서 일부 편린이나마 언급을 하는 것은 프랑크 역사 연구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 주는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Gundovald 등의 기록에서 백제인 비잔틴제국과의 연관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을, 비록 일부 왜곡된 역사이지만 그래도 프랑크 역사를 통해 발견하는 아이러니를 본다.
3. Theudebert II (r 595-612, Austrasia)의 프랑크 역사
"Theudebert II (French: Thibert ou Théodebert) (c.585-612),[1] King of Austrasia (595–612 AD), was the son and heir of Childebert II. He received the kingdom of Austrasia plus the cities (civitates) of Poitiers, Tours, Le Puy-en-Velay, Bordeaux, and Châteaudun, as well as the Champagne, the Auvergne, and Transjurane Alemannia.
(번역) Theudebert II (c 585-612)는 Austrasia왕 (595-612)으로 Childebert II의 아들이며 계승자이다. 그는 Austrasia왕국 외에도 다음과 같은 도시와 지역을 물려 받았다 : Poitiers, Tours, Le Puy-en-Velay, Bordeaux, Chateaudun, the Champagne, the Auvergne, Transjurane Alemannia.
Division of France 587-613 (source : Wikipedia)
Location of Le Puy-en-Velay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Chateaudun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the Champagne (source : Wikipedia)
Location of Transjurane Alemannia (source : Wikipedia)
Location of the Auvergne (source : Wikipedia)
Theodebert가 차지했다는 위의 지역과 위치를 나타낸 지도를 보면, Austrasia라는 동북부 지역뿐만 아니라 중부이남지역도 상당히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서남쪽의 Bordeuax(보르도)까지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영역 통제가 가능한 지 의문시된다. 물론 Theuderic과 형제라니 그럴 수도 있지만, 둘 사이의 전쟁이 계속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가 의문시된다. 즉 Theudebert의 지역은 동북부 Austrasia 지역에 한정되고, 그외의 지역은 타 세력의 영역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프랑크지역에 서량이나, 남조의 진나라 등의 다른 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한 역사로 보인다.
During his early years, his grandmother Brunhilda ruled for Theudebert and his brother Theuderic II, who had received the realm of Burgundy. After the two brothers reached adulthood, they were often at war, with Brunhilda siding with Theuderic. In 599,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Sens, but then the two brothers allied against their cousin Chlothar II and defeated him at Dormelles (near Montereau), thereby laying their hands on a great portion of Neustria (600–604).
(번역) 그의 어린 시절, 할머니인 Brunhilda가 Theudebert를 대신하여 섭정했고, 부르군디를 물려받은 Theudebert 동생, Theuderic II를 위해서도 섭정했다. 두 형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은 자주 전쟁을 했는데, Brunhilda는 Theuderic편을 들었다. Theuderic은 Sens에서 Theudebert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두 형제는 연합하여 그들의 사촌 Clothar II에 대항하여 싸웠고, Dormelles (Montereau근처)에서 이겼다. 그리하여 Neustria (600-604)의 많은 부분을 그들이 손에 쥐었다.
위의 글에서 Brunhilda가 항상 Theoderic편을 들었다 한다. Brunhilda는 서고트왕의 딸이었다. 즉 고구려 문자왕의 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Theoderic에 대한 편애는 이들이 같은 고구려 계통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Theodebert는 이들과 항상 전쟁하고 대척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형제의 연이라는 것은 꾸며낸 역사로 보인다.
At this point, however, the two brothers took up arms against each other;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Étampes. In 605, Theudebert refused to aid his brother whose kingdom was invaded by Clothar II. In 610, Theudebert extorted Alsace from his brother and Theuderic took up arms against him, yet again.
(번역) 이 시점에서, 그러나, 두 형제는 서로에게 무기를 들었다. Theuderic은 Etampes에서 Theudebert를 패배시켰다. 605년 Theudebert는 그의 동생 왕국이 Clothars II에 의해 침략당할 때, 도와 주기를 거절했다. 610년 Theudebert는 그의 동생으로부터 Alsace를 빼앗았고, Theuderic은 다시 형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610년 Theodebert가 Theoderic으로부터 Alsace지역을 빼앗았다 하는데, 이전의 어느 기록에도 Alsace지역을 Theoderic이 차지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Theodebert가 Jura지역의 Alemannia(거란)를 가졌다 했다. 따라서 이 기록도 신빙성이 전혀 없다. 이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역사를 감추기 위한 왜곡의 역사로 판단된다. 필자는 '고구려-수 당 전쟁은 유럽에 있었다' 라는 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Location of Etampes (source : Wikipedia source pictured)
Theudebert was defeated decisively by Theuderic at Toul and at Zülpich in 612.[2][3][4] Theudebert was locked up in a monastery at the order of his grandmother, and killed with his son Merovech.[5]
(번역) Theudebert는 612년 Toul과 Zulpich에서 Theuderic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Theudebert는 그의 할머니의 명령에 의해 수도원에 갇혔고, 그의 아들 Merovech와 함께 살해되었다.
He was married to Bilichildis. His daughter Emma is sometimes thought to have married Eadbald of Kent."
(Theudebert II (r 595-612),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4. Theuderic II (r 595-613, Burgundy, 612-613, Austrasia)의 프랑크 역사
"Theuderic II (also spelled Theuderich, Theoderic or Theodoric; in French, Thierry) (587–613), king of Burgundy (595–613) and Austrasia (612–613), was the second son of Childebert II. At his father's death in 595, he received Guntram's kingdom of Burgundy, with its capital at Orléans, while his elder brother, Theudebert II, received their father's kingdom of Austrasia, with its capital at Metz. He also received the lordship of the cities (civitates) of Toulouse, Agen, Nantes, Angers, Saintes, Angoulême, Périgueux, Blois, Chartres, and Le Mans. During his minority, and later, he reigned under the guidance of his grandmother Brunhilda, evicted from Austrasia by his brother Theudebert II.
(번역) Theuderic II (587-613), 부르군디왕(595-613)이며 Austrasia왕(612-613)은 Childebert II의 둘째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595년 죽었을 때, 그는 Orleans이 수도인 Guntram의 부르군디왕국을 물려 받았고, 그의 형 Theudebert II는 Metz를 수도로 하는 그의 아버지의 Austrasia왕국을 물려 받았다. Theuderic II는 또한 다른 도시들의 lordship을 불려 받았는데, 예를 들어 : Toulouse, Agen, Angers, Saintes, Angouleme, Perigueux, Blois, Chartres, 그리고 Le Mans. 그가 어릴 때, 그는 할머니인 Brunhilda의 섭정을 받았는데, Brunhilda는 Austrasia에서 그의 형 Theudebert II로부터 쫓겨났다.
Theoderic이 Angers, Le Mans 등 서부지역도 점령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의문시된다. 부르군디 지역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 지역은 돌궐의 지역이 아닌가 한다. 즉 돌궐의 세력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부르군디지역으로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부르군디가 이 시기에 남조의 진나라를 합병한 세력으로 보인다. 필자는 Theoderic이 고구려와 관련 있는 세력으로 보았는데, Toulouse등을 차지한 것은 이와 일치하지만, 다른 지역은 또한 억지 끼워넣기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는 수나라의 일부 세력이라는 느낌을 준다.
The Frankish realm as it was after the Treaty of Andelot in 587. The Burgundian kingdom of Guntram (pink) was inherited first by Childebert II and then by Theuderic II. (source : Wikipedia)
프랑스 지형 지역 지도 (source : WorldAtlas.com)
Location of Angers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Perigueux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Blois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Chartres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In 596, Clotaire II, king of Neustria, and Fredegund, Clotaire's mother, took Paris, which was supposed to be held in common. Fredegund, then her son's regent, sent a force to Laffaux and the armies of Theudebert and Theuderic were defeated.
(번역) 598년 Neustria왕 Clotaire II와 그의 어머니 Fredegund (상기 지도의 노란색 지역)는 Paris를 취했는데, Paris는 공동으로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의 아들의 후견인 Fredegund는 Laffaux에 군사를 보냈고, Theudebert와 Theuderic은 패배하였다.
Location of Laffaux in Franc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In 599, Brunhilda was forced out of Austrasia by Theudebert and she was found wandering near Arcis in Champagne by a peasant, who brought her to Theuderic. The peasant was supposedly rewarded with the bishopric of Auxerre. Theuderic welcomed her and readily fell under her influence, which was inclined to vengeful war with Theudebert at the time. Soon, Theuderic and his brother were at war. He defeated Theudebert at Sens, but their cousin Clotaire's restless warmaking prompted them to ally against him. They resumed the fight against Neustria and, in 600, defeated Clotaire at Dormelles (near Montereau) on the Orvanne. The land between the Seine and the Oise was divided between Theuderic and Theudebert, with Theuderic receiving the territory between the Seine and the Loire including the Breton frontier. They also campaigned together in Gascony, where they subjugated the local population and instated Genialis as duke.
(번역) 599년 Brunhilda는 Theudebert에 의해 Austrasia밖으로 내쫓겨졌고, 한 농부가 Champagne의 Arcis근처에서 배회하는 것을 발견하고 Theuderic에게 데려 왔다. 그 농부는 Auxerre bishop으로 보상받았다고 추정된다. Theuderic은 Brunhilda를 환영했고, 그녀의 영향하에 이미 빠져, 그때의 Theudebert에 복수전쟁을 하려 했다. 곧, Theuderic과 그의 형은 전쟁을 했고, Theudebert는 Sens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촌 Clotaire가 쉴틈없이 몰아치는 전쟁으로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Neustria에 대해 전쟁을 다시 시작했고, 600년 Orvanne에 있는 Dormelles (Montereau근처)에서 Clotaire를 패배시켰다. 세느강과 Oise사이의 땅은 Theuderic과 Theudebert사이에 나누어 가졌는데, Theuderic은 세느강과 Breton 국경을 포함한 Loire강 사이의 영토를 받았다. 그들은 같이 Gascony지역에서 군사적전을 했는데, 그들은 이 지역 주민들을 복속시키고, duke Genialis를 임명했다.
Theoderic이 세느강과 Breton국경을 포함한 르와르강 사이의 영토를 받았다는 것은 수나라가 돌궐지역을 안정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Gascony지역을 복속시킨 것은 수나라의 서량 또는 토욕혼에 대한 군사작전으로 보인다. 이는 앞에서 Gundovald 자료 분석에서 언급했는데, 시기상으로 다소 차이가 있다. 따라서 서량이 아니라 이 지역에 있었던 토욕혼에 대한 점령일 수도 있다. 수나라 자료에서는 토욕혼 지역 점령은 제일 마지막 나오지만 연대는 없었다.
Location of Dormelles in Franc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Oise (source : Wikipedia)
At this point, however, the two brothers took up arms against each other resulting in Theuderic's defeat of Theudebert at Étampes. Theuderic's kingdom was invaded by Clotaire in 604, and was also confronted by Clotaire's son Merovech and his mayor Landric. Theuderic met them at Étampes on the Louet, but Theudebert refused him aid. Theuderic won the day, but his mayor of the palace, Berthoald was killed. The next mayor, Protadius, a partisan of Brunhilda, encouraged war with Austrasia, but the nobles assassinated him and battle was never met, a pact being enforced by Theuderic's men. In 610, he lost Alsace, the Saintois, the Thurgau, and Champagne to his brother and his men east of the Jura were soundly defeated by the Alemanni.
(번역) 이 시점에서, 그들 형제는 다시 싸우게 되고, Etamps에서 Theuderic이 패배하게 된다. Theuderic왕국은 604년 Clotaire에 의해 침략당하고, Clotaire 아들 Merovech와 그의 환관 Landric과도 부딪히게 된다. Theuderic은 그들을 Louet에 있는 Etampes에서 마주 하는데, Theudebert는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그날은 Theuderic이 이겼으나, 그의 환관 Berthoald는 죽었다. Brunhilda편인 그다음 환관 Protadius는 Austrasia와의 전쟁을 주장했으나, 귀족들이 그를 암살하고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며, Theuderic사람들에 의해 협정이 맺어졌다. 610년 그는 Alsace, the Saintois, the Thurgau, 그리고 Champagne를 그의 형에게 잃었으며, Jura의 동쪽에 있는 그의 사람들은 Alemanni에게 철저히 패배했다.
Theoderic이 Alsace, the Saintois, the Thurgau 등을 잃었다 하는데, 이 지역은 Theoderic이 차지한 기술이 없다. 특히 Thurgau는 스위스 북쪽지역이다. 즉 롬바르드지역이나 고구려의 평양지역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수나라가 이들 지역에서 외부세력과 전쟁을 해서 패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612년 Theoderic이 Alsace에서 Theodebert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를 살수대첩으로 이긴 전쟁의 역사로 보인다. 즉 상당한 역사적 왜곡을 자행한 기록으로 보인다.
Location of the Saintois in Franc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Thurgau in Switzerland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Champagne in France (source : Wikipedia)
However, he routed Theudebert at Toul (c.611) and later at Tolbiac in 612. He captured the fleeing Theudebert in the latter battle and gave him over—after taking his royal paraphernalia—to his grandmother Brunhilda, who had him put up in a monastery. Bishop Ludegast is said to have beseeched him in a fable to spare Theudeberts life.[1][2] Brunhilda probably had Theudebert murdered (along with his son Merovech) to allow Theuderic to succeed to both thrones unhindered. Theuderic died of dysentery in his Austrasian capital of Metz in late 613[3] while preparing a campaign against his longtime enemy, Clotaire, who had, based on a treaty with Theuderic during the last fraternal war, retaken the duchy of Dentelin."
(번역) 그러나 그는 Toul (611년)에서 그리고 이어서 Tolbiac(612년)에서 Theudebert를 패배시켰다. 그는 Tolbiac전투에서 도망가는 Theudebert를 붙잡아, 물론 그의 왕국을 접수하고, 그를 할머니 Brunhilda에게 넘겼는데, Brunhilda는 그를 수도원에 가두었다. Bishop Ludegast가 Theudebert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간청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Brunhilda는 Theudebert를 그의 아들 Merovech와 함께 죽게 했는데, Theuderic이 방해 받지 않고 양쪽의 왕위를 이어 받게 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Theuderic은 613년 말에 Austrasia수도 Metz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때 Theuderic은 오랜 숙적 Clotaire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Clotaire는 지난 형제간 전쟁에서 Theuderic과의 협정에 의거하여 Dentelin 공작지역(프랑스 북동쪽끝, 벨기에 서남쪽)을 다시 앗아 갔었다.
612년 Tolbiac, Zulpich지역 전쟁에서 Theoderic이 이긴 것은 고구려의 수나라에 대한 승리라고 필자는 이미 '고구려- 수 당 전쟁은 유럽에서 있었다'에서 분석했다. Theodebert가 제거된 것은 수나라가 패한 후 취한 조치로 보인다.
Location of Toul in France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Location of Tolbiac (=Zulpich) in Germany (source : picture of wikipedia source)
(source : Theuderic II (r 612-613, king of Austras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5. Sigebert II(613, Burgundy/Austrasia)시기의 프랑크 역사
"Sigebert II (601[1]–613) or Sigisbert II, was the illegitimate son of Theuderic II, from whom he inherited the kingdoms of Burgundy and Austrasia in 613. However, he fell under the influence of his great-grandmother, Brunhilda. Warnachar, mayor of the palace of Austrasia had Sigebert brought before a national assembly, where he was proclaimed king by the nobles over both his father's kingdoms.
(번역) Sigbert II (601-613)는 Theuderic II의 사생아인데, 613년에 Burgundy와 Austrasia왕국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그는 증조 할머니 Brunhilda의 섭정하에 있었다. Austrasia의 환관 Warnachar는 Sigebert를 의회 앞으로 데려가서 그가 아버지의 양 왕국을 이어 받은 왕이라고 기족들에 의해 선포되었다.
However, when the kingdom was invaded by Clotaire II of Neustria, Warnachar and Rado, mayor of the palace of Burgundy, betrayed Sigebert and Brunhilda and joined with Clotaire, recognising Clotaire as rightful regent and guardian of Sigebert and ordering the army not to oppose the Neustrians. Brunhilda and Sigebert met Clotaire's army on the Aisne, but the Patrician Aletheus, Duke Rocco, and Duke Sigvald deserted her host and Brunhilda and Sigebert were forced to flee, before being taken by Clotaire's men at Lake Neuchâtel
(번역) 그러나 Neustria왕 Clotaire II에 의해 침범되었을 때, Warnachar와 다른 부루군디의 환관 Rado는 Sigebert와 Brunhilda를 배반하고 Clotaire에 합류하여, Clotaire를 올바른 후견인 및 Sigebert의 보호자라고 인식하고 군대가 Neustrians에 대항하지 말것을 명령했다. Brunhilda와 Sigebert는 Clotaire 병력을 Aisne(아래 지도)에서 마주 쳤으나, Duke Rocco, Duke Sigvald인 Patrician Aletheus는 그녀의 주인을 버렸으며, Brunhilda와 Sigebert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Clotaire의 사람 Lake Neuchatel에 의해 붙잡혔다.
Location of Aisne (source : Wikipedia)
Brunhilda, little Sigebert and Sigebert's younger brother Corbo were executed by Clotaire's orders,[2] and Austrasia and Neustria were reunited under Clotaire's rule, who now ruled the entire kingdom of the Franks."
(번역) Brunhilda, 어린 Sigebert 그리고 Sigebert의 어린 동생 Corbo모두 Clotaire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었고, Austrasia와 Neustria는 Clotaire의 지배하에 다시 통일되었으며, 이로써 전 프랑크왕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source :Sigebert II (613),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Clotaire에 의해 Brunhilda와 Sigebert가 제거된 것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가 613년이다. 수나라의 연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6. 맺는 말
이상으로 수나라 시기의 프랑크 역사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이번 분석에서 우리는 프랑크 역사가 많은 왜곡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분석의 어려움이 있었다. 비록 많이 감추고자 했던 역사적 기록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많은 것을 밝힌 것으로 생각한다.
즉 삭슨족의 돌궐의 세력이 프랑크 북부지역, 특히 Breton 지역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프랑스 남서부 지역은 서량이나 토욕혼지역으로 나타난다. 그 지역에서의 전쟁이 이를 말해 준다. Aquitaine왕국이 그들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르와르강이 장강으로 판단되면서, 이 강의 남쪽인 남조의 역사 중 진나라의 역사가 부르군디의 Guntram 왕의 역사가 아닌가 한다. 남조의 수도 건강은 Chalon-sur-Soane로 보인다. 한수도 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기술을 바탕으로 남조의 역사가 백제의 역사가 아니었나 추정했다. 이는 중국의 사가들의 왜곡을 프랑크 역사의 기록으로 추정하는 아이러니를 본다. 이는 백제의 한성이 Clermont-Ferrand이라는 것에 기초한다. 이는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 후에 추가 연구 글이 있을 것이다.
북조의 역사에 대해서는 북제가 고구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 검토가 더 있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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