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0. 12:42ㆍ한국사/중국사
다음 블로그의 글 ' 하나라, 상(은)나라, 주나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및 '상나라의 수도 '박'은 이라크의 바그다드인가?'에서 필자는 상나라가 이집트 및 이란 이라크지역의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blog.daum.net/lainfos, 카테고리 한민족역사)
그런데 최근 고구려와 고트족의 연관 관계를 연구하면서, 낙랑지역이 발칸반도의 Dacia 지역 가까이 있는 Carpi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낙랑지역은 고조선이 있던 지역이며, 하나라의 멸망과도 관련이 있는 지역이기에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또한 고트족과 훈족이 경략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 자료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Lost civilization인 미케네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상나라와 관련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 현 중공땅에는 하나라, 주나라 유적이 없고 오직 상나라 유적인 갑골문자만 나온 것을 상기하게 되고, 상나라는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기존의 서부지역을 지키기 힘들어서 주나라에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아메리카의 마야문명 등이 인신공양을 하는 등 상나라와 유사한 행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들과의 연관성이 어떻게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Grand Canyon에 있는 Kincaid Cave에서 불상이 나오면서도 이집트인의 유적이 나왔다는 기사를 과거 블로그 글을 정리하면서 최근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몇 년전에는 이 기사의 신빙성에 대해 의심을 하였었다. 워낙 감추는 것이 많은 미국인지라, 그리고 이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말이다. 그러나 최근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는 상나라의 동방행에 대한 주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펜을 들게 되었다.
아래 내용에서 보듯이 단군 왕검인 단제는 하나라 걸왕이 군사를 막고 약속을 어기는지라, 몰래 견이와 낙랑군과 상나라을 동원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관중의 빈, 기 지역에 관청을 두었다 했다.
"하(夏)나라 걸왕이 폭정을 하자 상(商)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니 하(夏)의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니, 단제께서 읍차 말량을 시켜 다른 제후국들(구이九夷, 구환九桓)의 군사로 지원하니 상(商)이 사죄하고 물러났다. 이에 단군조선이 군사를 물리려 하니 걸왕이 군사를 막고 약속을 어기는지라, 단군조선은 몰래 신지 우량을 보내 견이와 낙랑군을 동원해 상(商)과 함께 하(夏)를 멸망시키고, 관중의 '빈', '기(岐)' 지역에 관청을 세웠다." (자료: 환단고기 단군세기)
우리는 상기 언급한 블로그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에서 낙랑이 발칸반도 위의 Carpi지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Carpi도 Dacia의 일부라는 주장도 있다. Free Dacian이라는 것이다. Dacia는 필자가 판단하기에 '대하' (Daxia, 중국자료)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대하의 안읍이 이집트인지 Dacia인지는 메소포타미아지역인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하나라는 대하에 안읍, 양성이라는 도읍지가 있었다. 따라서 하나라는 나일강의 홍수를 다스려 흥한 이집트의 왕국(BC 2040 - BC 1650)(아래 자료 참조)을 포함하면서, 발칸반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지역을 점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The pharaohs of the Middle Kingdom (2134-1690 BC) restored the country's stability and prosperity, thereby stimulating a resurgence of art, literature, and monumental building projects.[33] Mentuhotep II and his Eleventh Dynasty successors ruled from Thebes, but the vizier Amenemhat I, upon assuming the kingship at the beginning of the Twelfth Dynasty around 1985 BC, shifted the nation's capital to the city of Itjtawy, located in Faiyum.[34] From Itjtawy, the kings of the Twelfth Dynasty undertook a far-sighted land reclamation and irrigation scheme to increase agricultural output in the region. Moreover, the military reconquered territory in Nubia that was rich in quarries and gold mines, while laborers built a defensive structure in the Eastern Delta, called the "Walls-of-the-Ruler", to defend against foreign attack.[35]"
(source : Ancient Egypt, Wikipedia)
"The Sumerians practiced similar irrigation techniques as those used in Egypt.[77]"
(source : Sumer, Wikipedia)
그래서 단군조선의 단제는 하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발칸반도로 내려오는 길에 낙랑군을 합류해 공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발칸반도를 내려와 그리스의 남쪽에 이르면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의 도시들이 있다. 이 미케네문명이 상나라의 시기이다. 즉 BC 1600-BC 1100 기간의 문명이다.
이 미케네문명은 그럼 상나라인가? 아래 미케네 문명의 자료를 보자.
1. Warrior elite가 지배하는 나라
즉 미케네문명은 전사 엘리트가 지배하는 문명이었다.
"A number of centers of power emerged in southern mainland Greece dominated by a warrior elite society,[2][28]"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그러면 상나라도 전사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였는가?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주변 종속들을 대거 복속시키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동방정책을 편 것은 군사력이 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BC 16세기 고대사회에서 전사들이 주요 지배계층일 수 있다고 본다.
"기원전 13세기의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 정책으로 서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주나라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하였다."
(자료: 상나라, 나무위키)
2. Human sacrifice (인신공양)
상나라의 특징인 인신공양이 미케네 문명에서도 있었다.
"그리스 왕후들의 장례식에서는 개·말 내지 노예까지도 영전(靈前)의 공물(供物)로서 도살하는 풍습이 있었다." (자료 : 미케네문명, 위키백과)
미케네문명 전인 미노언 문명에서도 인신공양은 있었다.
"Evidence of possible human sacrifice by the Minoans has been found at three sites: at Anemospilia, in a MMII building near Mt. Juktas considered a temple; an EMII sanctuary complex at Fournou Korifi in south-central Crete, and in an LMIB building known as the North House in Knossos."
(source : Minoan civilization, Wikipedia)
참고로 미국 동남부에서 북부까지 걸쳐 있는 미시시피언 문화에서도 상나라의 특징인 인신공양과 순장의 모습이 나타난다.
(자료 : Mississippian culture, Wikipedia, https://paulcgpark.blogspot.com 글 참조)
3. Trade (상업) : 원자재 수입, 가공품 수출
미케네 문명은 활발한 무역으로 특징 지워진다 (아래 글 참조). 원자재를 수입하고 가공품을 수출했다고 했다. 도자기와 배 (shipbuilding)를 수출했다고 한다.
"Trade over vast areas of the Mediterranean was essential for the economy of Mycenaean Greece. The Mycenaean palaces imported raw materials, such as metals, ivory and glass, and exported processed commodities and objects made from these materials, in addition to local products: oil, perfume, wine, wool and pottery.[89] International trade of that time was not only conducted by palatial emissaries but also by independent merchants.[99]"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Marching soldiers observed by a female figure, in the Warrior Vase, c. 1200 BC, a krater from Mycenae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Reconstruction of a Mycenaean ship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상나라도 이러한 활발한 무역활동때문에 상나라로 불렸다. 청동항아리 유적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상당한 제조기술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상나라의 청동 항아리 (자료: 상나라, 나무위키)
"상인, 상업 등의 商 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상나라의 유민들이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자료 : 상나라, 나무위키)
The İnandık vase also known as Hüseyindede vases, a Hittite four-handled large terracota vase with scenes in relief depicting a sacred wedding ceremony, mid 17th century BC. İnandıktepe, Museum of Anatolian Civilizations, Ankara. (source : Hittites, Wikipedia)
4. 성벽 및 석조 건축물
미케네문명은 석조 건물 및 벽돌 성벽으로 특징 지워진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등 Lost Civilization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벽돌 (limestone) 성벽은 고조선 시대의 그것으로 판단된다. 고조선의 성벽 치를 모방했다는 고구려에서도 limestone으로 많은 watch tower(치)를 세웠다. 미 서부의 Grand Canyon에도 유사한 모습이 발견된다.
거대한 돌을 이용한 것은 이집트문명, 마야문명의 석조 건물과 유사함을 보여 준다.
The Lion Gate, the main entrance of the citadel of Mycenae, 13th century BC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Cyclopean masonry in the southern walls of Mycenae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Hattusa (=capital of Hitties, in Anatolia, Turkey) Rampart in Hittites (BC 1600-1178 BC) (source : Hittites, Wikipedia)
Passageway in the Great Enclosure (source : Great Zimbabwe, Wikipedia)
Ruins near Desert View Tower in Grand Canyon
Old Stone buildings outside Grand Canyon
Part of the galleries within the walls of Tiryns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5. 쇠머리의 형상 - 치우?
미케네문명에서 또 한가지 특이한 형상이 눈에 띈다. 바로 쇠머리 형상의 모습이다.
Silver repoussé rhyton with gold horns, from Grave Circle A at Mycenae, 16th century BC (Archaeological Museum, Athens)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이러한 형상은 미케네문명 전인 미노이언 문명 (=크레타문명) (BC 3000 - BC 1100)에서도 나타난다.
Bull rhyton from Kato Zakros (source : Minoan civilization, Wikipedia)
이러한 Sacred Bulls은 히타이트문명에서도 나타난다.
Ceremonial vessels in the shape of sacred bulls, called Hurri (Day) and Seri (Night) found in Hattusa, Hittite Old Kingdom (16th century BC) Museum of Anatolian Civilizations, Ankara.
(source : Hittites, Wikipedia)
아래 수메르 문명에서도 청금석으로 된 쇠머리 장식품이 나온다. BC 2600-2350 사이라 하니 아래 치우의 시기 BC 2700년 이후의 시기이다.
Bull's head ornament from a lyre; 2600-2350 BC; bronze inlaid with shell and lapis lazuli; height: 13.3 cm, width: 10.5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source : Sumer (BC 4500-1900 BC), Wikipedia)
아래 페르시아의 Achaemenid Empire 수도 Persepolis 기둥머리에 쇠머리가 있다는 것은 단순한 제물로서 바친 것이 아닌 힘의 상징, 또는 숭배의 대상인 것을 추측할 수 있다.
A replica of a Persian column from Persepolis currently located in Kholde Barin Park, in Shiraz
(source : Achaemenid Empire, Wikipedia)
쇠머리 하면 우리는 치우를 떠올린다. 혹시나 치우를 뜻하지는 않을까? 게르만인 독일지역에서도 스칸디나비아지역에서도 Ziu, Djiu, Tiw, Tyr, Tiwaz, Dyeus 등의 전쟁신을 섬겼었다. (Https://paulcgpark.blogspot.com, 'Tyr' 글 참조)
치우에 대한 규원사화의 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단군왕검 고조선보다 300여년 앞섰다 하니 BC 2700년경의 인물이다. 시대적으로 미케네문명보다 앞서고 미노이언 문명 중에 있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미케네문명에 나타난다고 해도 합리적인 설명이 된다. 또한 미케네문명은 전사 엘리뜨가 지배하는 문명이었다. 따라서 치우를 숭배할 수 있는 여지가 더 크다고 본다. 그리고 치우라 짐작되는 전쟁신을 고트족, 게르만족인 독일지역, 스칸디나비아지역에서 섬겼다는 것은 치우의 활동 배경이 유럽일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다. 유방이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에 나갔다 했는데, 유방의 한나라는 페르시아 파르티마제국으로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치우의 숭배모습이 중공에 나타나는 것은 상나라인 미케네문명의 동방이동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조선 숙종1년(1675)에 북애노인(北厓老人)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치우가 단군왕검의 고조선 보다 300여년 앞선 신시(神市)시대의 우리 조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치우가 포악한 야만인으로 기록한 중국의 기록과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의 주장을 통렬히 반박하고 있다. 규원사화 태시기(太始記)에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는 황하 북쪽에 살면서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을 관망하다가 황하유역을 차지 했던 염제 유망씨(楡罔氏)가 무도해서 제후들이 배반하고 민심이 떠나자 씨족 내 장수 81명과 병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하여 유망의 본거지인 공상을 쳐서 1년 만에 12제후국을 얻고 이 곳에서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유망이 패주하고 치우가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키니 치우와 탁록에서 일전을 벌리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치우는 대승하여 지금의 희수 유역, 산동, 북경, 낙양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황제헌원은 그 후 10여년간에 70여 회나 치우에게 도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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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황제헌원이 치우를 잡아서 죽였다고 한 기록에 대하여
‘치우의 한 부장이 공을 탐 내 무리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죽은 것을 마치 치우가 잡혀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출처] 치우(蚩尤) 이야기|작성자 동산평천 거사
6. Gold Death Mask
미케네문명에서 또한 특이하게 나타난 것이 Gold Death Mask이다. 올멕문명, 마야문명에서도 사자에 씌우는 마스크가 있었다.
"이들의 주된 유물로는 일명 Olmec Head라 불리는 석조 거대 두상과 가면 등이 있는데,.."
(자료 : 올멕문명, 나무위키)
Death mask, known as the Mask of Agamemnon, Grave Circle A, Mycenae, 16th century BC, probably the most famous artifact of Mycenaean Greece.[26]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7. Mycenaean Chariot warriors
미케네문명에서 마차를 이미 사용했다. 마차를 위한 대규모 도로공사등도 있었다. 귀족들의 여성은 화려한 악세사리 치장과 활발한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성의 활동적인 모습은 이집트의 Nefertiti 왕비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상업을 주 경제활동으로 하는 상나라 동시대의 특징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에서 출발한 진시황의 진나라도 청동제 무기를 많이 쓰고 마차를 많이 이용한 것이 이러한 미케네문명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Two Mycenaean chariot warriors on a fresco from Pylos (about 1350 BC; left) and two female charioteers from Tiryns (1200 BC; right)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Hittite Chariot, from Egyptian relief (source : Hittities, Wikipedia)
8. Mycenaean Swords
미케네문명의 전쟁용 칼의 모습이다. 청동에 들어 가는 구리, 주석을 교역을 통해 확보했다.
중국의 청동검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Replicas of Mycenaean swords and cups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중국식 청동검 (자료 : 청동검, 나무위키)
9. 미케네 문명과 그 영향권 및 교역 지역
아래자료에서 보듯이 미케네문명 영향권지역은 마케도니아, 에게해 섬들, 소아시아 해변도시, 지금의 시리아지역의 지중해 동안, 이태리 남부 및 중동부 등이 해당한다. 심지어 교역활동은 스페인 독일, 영국지역까지 있었던 것으로 서술된다. 매우 강력한 해상활동을 보여 준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동시대 왕국인 Kassites 왕국 (BC 1595-1155), Mitanni 왕국 (BC 1600-1260), 앗시리아왕국 (Old : BC 2025-1378, Middle (BC 1392-934)), 이집트왕국 (18왕국, BC 1550-1070)과 매우 밀접한 교류를 한 것으로 보아, 미케네 문명은 이들 지역도 같이 지배하는 나라 즉 상나라가 아니었나 판단된다.
"Mycenaean and Mycenaean-influenced settlements also appeared in Epirus,[3][4] Macedonia,[5][6] on islands in the Aegean Sea, on the coast of Asia Minor, the Levant,[7] Cyprus[8] and Italy.[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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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e early 14th century BC, Mycenaean trade began to take advantage of the new commercial opportunities in the Mediterranean after the Minoan collapse.[40] The trade routes were expanded further, reaching Cyprus, Amman in the Near East, Apulia in Italy and Spain.[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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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ed on archaeological findings in the Middle East, in particular physical artifacts, textual references, inscriptions and wall paintings, it appears that Mycenaean Greeks achieved strong commercial and cultural interaction with most of the Bronze Age people living in this region: Canaanites, Kassites, Mitanni, Assyrians, and Egyptians.[99][100][101]"
(source : Mycenaean Greece, Wikipedia)
이집트의 18왕국의 Nefertiti 왕비는 편두를 하였다는 것을 최근 서양학자가 밝혀 냈다. 이미 언급한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 '상나라는 이집트의 18왕국을 포함하고 있었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이런 상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한 역사는 우리가 추적하기에는 용이하지 않다. 워낙 오래된 역사이기도 하고 기록된 역사이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땅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료 인해 약간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다행이라 판단된다.
한편으로는 상나라는 백색을 숭상하고 흰옷을 입었다. 위의 미케네문명의 마차 전차에 탄 병사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의 백의 민족설과 이집트, 중동의 이슬람교의 흰옷,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본 흰옷과 초가집 사진 등이 단편적인 모습으로 판단된다.
중공의 호남성 등지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면 육로로 갔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듯이 해상을 통한 무역활동이 활발한 것을 보면 해로를 통한 동방진출이 더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그러나 지중해에서 아시아로 해로를 통해 가려면, 페르시아만을 통해 가거나, 수에즈운하 같은 통로가 있어야 한다. 로마사에서도 인도 등 지역과 많은 교류를 나타낸 것을 보면 이집트에 이런 통로가 과거에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집트 역사에서 보면 BC 19세기경부터 이러한 운하에 대한 공사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아래 자료 참조)
"At least as far back as Aristotle there have been suggestions that perhaps as early as the 12th Dynasty, Pharaoh Senusret III (1878 BC–1839 BC), also called Sesostris, may have started a canal joining the River Nile with the Red Sea. In his Meteorology, Aristotle wrote:
One of their kings tried to make a canal to it (for it would have been of no little advantage to them for the whole region to have become navigable; Sesostris is said to have been the first of the ancient kings to try), but he found that the sea was higher than the land. So he first, and Darius afterwards, stopped making the canal, lest the sea should mix with the river water and spoil it.[13]
Strabo also wrote that Sesostris started to build a canal, and Pliny the Elder wrote:
165. Next comes the Tyro tribe and, on the Red Sea, the harbour of the Daneoi, from which Sesostris, king of Egypt, intended to carry a ship-canal to where the Nile flows into what is known as the Delta; this is a distance of over 60 miles. Later the Persian king Darius had the same idea, and yet again Ptolemy II, who made a trench 100 feet wide, 30 feet deep and about 35 miles long, as far as the Bitter Lakes.[14]
Although Herodotus (2.158) tells us Darius I continued work on the canal,[15] Aristotle (Aristot. met. I 14 P 352b.), Strabo (Strab. XVII 1, 25 C 804. 805.), and Pliny the Elder (Plin. n. h. VI 165f.) all say that he failed to complete it,[15] while Diodorus Siculus does not mention a completion of the canal by Necho II.[16] Pliny the Elder also says that Ptolemy II, who took up the work again, also stopped because of the differences of water level.[11] Diodorus, however, reports that it was completed by Ptolemy II after being fitted with a lock.[17]
Ptolemy II was the first to solve the problem of keeping the Nile free of salt water when his engineers invented the water lock around 274/273 BC.[18]
In the 2nd century AD, Ptolemy the Astronomer mentions a "River of Trajan", a Roman canal running from the Nile to the Red Sea.
Islamic texts also discuss the canal, which they say had been silted up by the seventh century but was reopened in 641 or 642 AD by 'Amr ibn al-'As, the conqueror of Egypt, and which was in use until closed in 767 AD in order to stop supplies reaching Mecca and Medina which were in rebellion.[11]
Thereafter, the land routes to tranship camel caravans' goods were from Alexandria to ports on the Red Sea or the northern Byzantine silk route through the Caucasian Mountains transhipping on the Caspian Sea and thence to India.
During his Egyptian expedition, Napoleon found the canal in 1799."
(source : Canal of Pharaohs, Wikipedia)
동아시아에서 해로를 거쳐 또는 베링해를 통한 육로를 거쳐 아메리카와도 무역활동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타히티섬, 사모아섬, 하와이섬)에서 편두가 발견되었다. 호주의 남동부, 서북부에서도 발견되었다. 바하마제도에서도 발견되었다. 빅토리아 폭포와 가까운 Great Zimbabwe에서 가까운 앙골라에서도 편두의 풍습이 20세기까지 있었다. (Wikipedia, 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 자료 참조). 또한 이들의 문화가 원시문화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 과거에 편두를 한 민족이 이동했다는 의미이다. 이집트의 18왕국의 네페르티티여왕이 편두를 하였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해상활동이 활발한 상나라가 그랜드캐년, 올멕문명, 마야문명으로 이동 및 교역하면서 태평양 섬에 들를 수도 있다고 본다. 베링해를 통한 이동도 미서부 북부지역에 편두를 한 지역이 있다는 것에 또한 이런 경로도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바하마제도에도 편두 풍습이 있는 것을 보면 대서양을 건너 올멕문명에 올 수도 있다고 본다. 미케네문명은 영국, 스페인까지 해상활동으로 진출했다고 했다. 태평양을 건너서 갔다면, 대서양을 건너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추론한다. 미국의 동남부 진출도 이런 경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하는 마야문명에서도 기원전 1500년경에서 시작하는 올멕문명에서도 편두와 인신공양이 있었고, 광물재 등을 수출하고 가공품을 수입한 기록을 보면 먼 지역과 해상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메소아메리카에 등장한 최초의 문명 중 하나이며, 이후 들어선 문명들에게 많은 영향을 남겼다. 우선 종교적 제의로서의 인신공양을 처음 한 것이 올멕인들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의 문자와 달력체계는 이후 마야 문자와 수체계, 달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여러 중남미 문명에서 보이는 고무공을 가지고 하는 놀이를 처음으로 한 것 역시 이들로, 올멕이라는 이름부터가 나후아틀 언어로 '고무 사람(rubber people)'이란 뜻의 올메카틀(olmecatl)이 변형된 것이다. 또한 고유 상형문자도 있었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첫번째 문자체계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주된 유물로는 일명 Olmec Head라 불리는 석조 거대 두상과 가면 등이 있는데, 저 가면을 비롯해서 올멕 문명의 도구 및 예술품의 상당수가 이들의 거점이었던 지역에서는 나지 않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는 당시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무역망이 만들어져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생각된다."
(자료 : 올멕문명, 나무위키)
"마야인들이 쿠엘로(현재의 벨리즈)에 정착한 시기는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기원전 26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태평양 해안에는 약 기원전 1800년 경에 도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당시 마야인들은 이미 옥수수, 콩, 칠리 고추들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정착을 시작하였으며 도자기를 만들고 점토로 상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자료 : 마야문명, 위키백과)
최근 미국에서 발견되는 유적이 마야문명과 연관될 수 있다는 유튜브 자료들도 있으나, 마야문명이나 올멕문명이 상나라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Grand Canyon에서 발견된 Kincaid Cave에서 나온 유물때문이다.
Kincaid Cave entrance in Grand Canyon
(자료 : "The Pyramids of the Grand Canyon, its “Off-Limit” Areas, & Egyptian Relics" https://dailyoddsandends.wordpress.com/2019/10/20/the-pyramids-of-the-grand-canyon-its-off-limit-areas-egyptian-relics/)
Powell's Cave, Grand Canyon
(자료 : "The Pyramids of the Grand Canyon, its “Off-Limit” Areas, & Egyptian Relics" https://dailyoddsandends.wordpress.com/2019/10/20/the-pyramids-of-the-grand-canyon-its-off-limit-areas-egyptian-relics/)
즉 Kincaid Cave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 금으로 된 이집트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아래 그림 참조) 현재 워싱턴시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이 미서부지역에 왔었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집트 18왕국의 Nefertiti왕비를 나타내는 아래 그림이 발견되었다 한다. (자료 : "The Pyramids of the Grand Canyon, its “Off-Limit” Areas, & Egyptian Relics" https://dailyoddsandends.wordpress.com/2019/10/20/the-pyramids-of-the-grand-canyon-its-off-limit-areas-egyptian-relics/)
A "house altars" depicting Akhenaten, Nefertiti and three of their daughters; limestone; New Kingdom, Amarna period, 18th dynasty; c. 1350 BC. Collection: Ägyptisches Museum Berlin, Inv. 14145 (source : Nefertiti, Wikipedia)
Egyptian Gold Tablet found in tunnel led by Kincaid Cave in Grand Canyon
(source : https://dailyoddsandends.wordpress.com/2019/10/20/the-pyramids-of-the-grand-canyon-its-off-limit-areas-egyptian-relics/)
Egyptian Gold articrafts found in tunnel led by Kincaid Cave in Grand Canyon
(source : https://dailyoddsandends.wordpress.com/2019/10/20/the-pyramids-of-the-grand-canyon-its-off-limit-areas-egyptian-relics/)
Shrine in Kincaid Cave, Grand Canyon
(자료 : "The Pyramids of the Grand Canyon, its “Off-Limit” Areas, & Egyptian Relics" https://dailyoddsandends.wordpress.com/2019/10/20/the-pyramids-of-the-grand-canyon-its-off-limit-areas-egyptian-relics/)
Shrine in Kincaid Cave, Grand Canyon
(자료 : "The Pyramids of the Grand Canyon, its “Off-Limit” Areas, & Egyptian Relics" https://dailyoddsandends.wordpress.com/2019/10/20/the-pyramids-of-the-grand-canyon-its-off-limit-areas-egyptian-relics/)
Articraft found in Kincaid Cave, Grand Canyon (source : https://sites.google.com/site/ancientegyptiansinamerica/ancient-egyptians-grand-canyon, 'Ancient Egyptians, Grand Canyon')
이러한 유물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이집트 18왕국 (BC 1550-1070) 기간중의 BC 1350년경의 Nefertiti 여왕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여왕은 편두를 하였다. 그리고 18왕국 시기가 상나라의 시기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상나라의 일부였던 이집트왕국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Grand Canyon에 온 사람들은 상나라 사람들이라는 추측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강력한 해상활동을 한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아메리카까지 와서 교역을 했을 것으로 또한 정복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Grand Canyon의 이러한 흔적은 올멕문명이나 마야문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북미에서 서부해안 북쪽에 위치한 부상국의 존재나, 편두의 흔적이 북미 서부해안 북부와 북미 동남지역에서 발견되는 것도, 그리고 낙랑과 같은 초가집, 인신공양, 순장의 풍습이 미시시피강 문화에서 발견되는 것도 모두 이러한 퍼즐을 맞추고 있다고 본다. (아래 자료 및 블로그 https://paulcgpark.blogspot.com 위키피디아 영문글 'Mississippian culture' 참조).
은허유적의 상나라의 궁전을 복원한 아래 그림에서도 초가지붕을 하고 있다.
"In the Americas, the Maya,[12][13][14] Inca, and certain tribes of North American natives performed the custom (편두). In North America the practice was known, especially among the Chinookan tribes of the Northwest and the Choctaw of the South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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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actice of cranial deformation was also practiced by the Lucayan people of the Bahamas,[17] and it was also known among the Aboriginal Austral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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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Ratzel reported in 1896 that deformation of the skull, both by flattening it behind and elongating it toward the vertex, was found in isolated instances in Tahiti, Samoa, Hawaii, and the Paumotu group, and that it occurred most frequently on Mallicollo in the New Hebrides (today Malakula, Vanuatu), where the skull was squeezed extraordinarily flat.[18]"
(source : 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 (편두), Wikipedia)
"The wattle and daub technique was used already in the Neolithic period. It was common for houses of Linear pottery and Rössen cultures of Central Europe, but is also found in Western Asia (Çatalhöyük, Shillourokambos) as well as in North America (Mississippian culture) and South America (Brazil). In Africa it is common in the architecture of traditional houses such as those of the Ashanti people. Its usage dates back at least 6000 years. There are suggestions that construction techniques such as lath and plaster and even cob may have evolved from wattle and daub. Fragments from prehistoric wattle and daub buildings have been found in Africa, Europe, Mesoamerica and North America.[1]
Evidence for wattle and daub (or "wattle and reed") fire pits, storage bins, and buildings shows up in Egyptian archaeological sites such as Merimda and El Omari, dating back to the 5th millennium BCE, predating the use of mud brick and continuing to be the preferred building material until about the start of the First Dynasty. It continued to flourish well into the New Kingdom and beyond.[2] Vitruvius refers to it as being employed in Rome.[3]"
(source : Wattle and daub (초가집), Wikipedia)
A wattle and daub house as used by Native Americans during the Mississippian period
(source : Wattle and daub, Wikipedia)
중공 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상나라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다. (자료 : 상나라, 나무위키)
이글을 쓴 후 우연히 타인 블로그에서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합뉴스 내용을 발견하여 아래에 옮겨 놓는다. 올멕 문명이 상왕조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면, 그랜드캐년의 이집트 유물도 상나라의 유물이라는 필자의 주장의 신빙성을 높혀 준다 하겠다.
"동이족의 중미 진출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올멕 문명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기존 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대안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올멕 문명은 기원전 12세기에서 서기 2세기경을 전후로 해서 멕시코 동쪽의 멕시코 만과 중미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으로,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평가된다.
이런 가설을 가장 먼저 제기한 학자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유명 고고학자였던 베티 메거스 여사였다. 메거스 여사는 1975년 올멕 문명이 기원전 1천200년경 중국 상(商) 왕조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상왕조는 기원전 1600~1046년에 존재했던 고대 중국 왕조로서, 동이족의 일파로 분류된다.
뒤이어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 교수였던 마이크 쉬(Mike Xu) 박사가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동이족의 중미 진출설은 학계의 관심을 받게 됐다.
중국 상하이 태생인 마이크 쉬 교수는 1996년 펴낸 '올멕 문명의 기원(Origin Of the Olmec Civilization)' 이란 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중앙아메리카 문화의 모태로 여겨지는 올멕 문화에 중국 상왕조의 영향이 깊게 미쳤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제시했다.
이 책에 따르면 1850년대 멕시코 베라크루스주의 라 벤타에서 발견된 거대 석두상에는 이마에 우(雨)자의 상형문자인 소(小)자가 새겨져 있다. 또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경계비에는 갑골문자로 된 전(田), 산(山), 일(日), 천(川)자 등이 쓰여 있다."
(원자료 : 연합뉴스, 2017.3.19, '동이족 중미대륙까지 진출했나?.. "상왕조 갑골문자 발견"',
인용출처 : 동산평찬 거사, 상왕조 갑골문자 발견..북미진출설, https://blog.naver.com/sunonthetree/220962180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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