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료/발해 7

<펌>요나라가 홀한성을 함락하고 대진국 천자 복식을 쓰다 -한단고기 일부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글로벌이코노믹)

요나라가 홀한성을 함락하고 대진국 천자 복식을 쓰다 [다시 보는 한단고기(桓檀古記)(255)] 2016-08-25 06:53:38 太白逸史•제7: 大震國 本記. 二月丙午 遼太祖 建東丹國 以長子倍 爲人皇王. 王之建元 甘露改 忽汗城 爲天福. 準用天子冠服 被十二旒冕 皆畵龍象 乃用 大震國舊制 以叔 迭刺 爲左大相 大震老相 失名 爲右大相 大震司徒 大素賢 爲左次相 耶律羽之 爲右次相. 赦國內殊死以下 約歲貢 布十萬端 馬千匹. 甘露 二十七年 冬十二月 庚辰 遼罷 東京中臺省 東丹國除. 2월 병오일에 요나라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았다. 왕이 건원을 감로라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하였다. 천자의 관과 의복을 준용하여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마침내 대진국의 옛 제도를 사..

<펌>남경 남해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내용 발해의 5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과 15부 가운데 하나인 남해부를 가리킨다. 남경과 남해부의 치소는 동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관청이 하나였는지 분리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신당서(新唐書)』에는 남경남해부를 옥저의 옛 땅이자 발해에서 신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라고 하였고, 옥주(沃州)‧정주(睛州)‧초주(椒州) 3주를 거느린 것으로 나온다. 특산품으로는 남해부의 곤포(昆布: 다시마)와 시(豉: 메주), 옥주의 면(緜) 등이 있다. 남경남해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제기되었던 대표적인 위치 비정설로는 함경남도 함흥설(咸興說)과 함경남도 북청설(北靑說), 함경북도 종성설(鐘城說)‧경성설(鏡城說) 등이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776년 남해부 ‘토..

<펌>남경 남해부 - 위키백과

남경 남해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경南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는 발해의 주요 도시인 5경 가운데 하나다. 개요[편집] 옥저의 고지에 설치되었으며, 옥주(沃州), 청주(睛州), 초주(椒州)의 3개주를 관할했다.[1] 발해 멸망 이후 압록부, 장령부, 부여부, 정리부와 함께 발해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으나 요나라가 이들을 진압한 이후 남해부의 주민들을 (지금의 랴오닝성 안산 시, 잉커우 시 일대로) 강제이주시키고 해주를 설치했고 그 땅은 완전히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었다.[2] 거란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그 위치가 잊혀졌다. 해동역사의 저자 한진서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지금의 북청군, 혹은 함흥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3] 이후 북한정권이 고고학조..

<펌>서경압록부 - 위키백과

서경 압록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경西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서경 압록부(西京鴨淥府)는 발해의 중요 도시인 5경 가운데 하나였다. 서경 압록부는 옛 고구려 땅으로서 발해가 당나라와 교역하는 바닷길에 위치했다.[1] 《요사》(遼史)에는 발해의 서경 압록부가 고구려 때의 고국성(→)으로 성의 높이가 3장이고 동서 및 남북 너비가 20리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개요[편집] 발해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의 수도였다. 936년 경 발해의 귀족 출신인 열만화는 남경 남해부에서 서경 압록부로 이동하여 938년 경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985년 정안국의 수도인 서경 압록부를 공격하여 이듬해인 986년 1월에 멸망시키고, 그 땅에 녹주를 필두로 한..

<펌>동경 용원부 - 위키백과

동경 용원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경東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는 발해의 5경 중 하나이다. 개요[편집] 동경 용원부에 대한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두만강에 가까운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훈춘 시 팔련성(八連城) 유적이 확실시 되고 있다. 발해의 제3대 왕인 문왕의 후기인 785년부터 제5대 성왕대인 794년까지 잠시 수도의 기능을 하였다. 신라와 일본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당시 발해의 교통의 중심지라고 여겨진다. 4개의 주를 관할했다. 발해 멸망 이후 928년, 거란이 동란국을 요양부로 이관시키면서 모든 속현이 폐지, 주민이 요동지역으로 강제 이치되었다. 행정구역[편집] 주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경주 慶州 혼춘시 팔련성..

<펌> 중경 현덕부 - 위키백과

중경 현덕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경中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는 발해의 5경 중 하나이다. 개요[편집]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吉林省) 화룡시(和龍)의 서고성자(西古城子)가 가장 확실시되고 있다. 발해 무왕과 문왕 재위 초기 때까지 (742년 ~ 757년) 수도의 기능을 하였다. 행정구역[편집] 중경 현덕부에는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의 6개주가 있었다. 같이 보기[편집]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서경 압록부(西京鴨淥府)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각주

<펌> 상경용천부 - 위키백과

상경 용천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상경上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는 발해의 주요 도시였던 5경 중 하나이다. 발해 때는 상경성(上京城) 또는 홀한성(忽汗城)이라고도 했다. 개요[편집] 756년 발해 문왕이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여 수도로 삼았다. 785년에서 794년 사이 수도가 동경 용원부로 잠시 옮겨졌다가 성왕이 다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1] 발해가 요나라에 멸망한 뒤, 태조 야율아보기는 그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설치했으나 928년(요 태종 천현 3년), 동란국을 요양부로 옮기면서 완전히 버려졌고, 버려진 성은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상경용천부를 영고탑장군의 치소였던 영고탑으로 비정한 이래 헤이룽장성 무단장 시 닝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