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료 298

<펌>사카족 - 두산백과

두산백과 샤카족 요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인(人) 중에서 남하하여 인도에 정주한 한 종족. 원어명 Śākya 사카족(Saka)이라고도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난 종족 이름인 샤카(Śākya)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샤카족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크슈바쿠왕의 후예로 생각하였던 모양이며 인종적으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인도 아리아계로 생각된다.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카스피해 동방에서 파미르 ·힌두쿠시 산지에 걸쳐서 거주한 유목민족이었다. 키로스왕(재위 BC 559∼BC 529)의 정벌로 일부는 페르시아에 예속하였고 그리스 ·로마의 기록에는 흑해에서 파미르 ·타림 분지(盆地)에 이르는 여러 민족이 이 이름으로 총칭되었다. BC 2세기 중엽 대월지족(大月氏族)의 서천(西遷)으로 실강(江) 유역의 ..

<펌>스키타이족 - 위키백과

스키타이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주신하위분파 스키타이족 지역 스키티아 언어 스키타이어 종교 스키타이 종교 타비티 민족계통 이란계 민족 사르마티아인 사카인 소그드인 우크라이나의 역사Історія України 펼치기 선사시대 펼치기 전근대 펼치기 근대 펼치기 현대 v t e 러시아의 역사История России 펼치기 고대 펼치기 중세 펼치기 근대 펼치기 현대 v t e 스키타이족(히브리어: סקיתים 스퀴팀, 고대 그리스어: Σκὐθαι, Σκύθης, 영어: Scythia)은 사카(Saka), 사카이(Sakae), 사이(Sai), 이스쿠자이(Iskuzai), 아스쿠자이(Askuzai)라고도 불리는, 주로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한 이란계 민족에 속하는 유라시아 유목민들이며 이들 남쪽에 있던..

<펌>안정군 (오수 자료) - 위키백과

안정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정군(安定郡)은 중국의 옛 군이다. 전한[편집] 원정 3년(기원전 114년)에 북지군을 분할해 세워졌다.[1] 양주자사부에 속했다.[2]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42,765호, 인구 143,294명이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3]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20현(19현 1도)이다. 일반적으로 첫 현이 치소로 여겨진다. 이름한자대략적 위치비고 고평현 高平縣 구위안시 복루현 復累縣 ? 안비현 安俾縣 ? 무이현 撫夷縣 칭양시 전위안 현 북 조나현 朝那縣 구위안시 펑양 현 동 단순사(端旬祠) 열다섯 곳이 있어 호인 무당이 빈다. 또 추연사(秋淵祠)가 있다. 상군 부시현과 함께 초한전쟁시기..

<펌>요나라가 홀한성을 함락하고 대진국 천자 복식을 쓰다 -한단고기 일부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글로벌이코노믹)

요나라가 홀한성을 함락하고 대진국 천자 복식을 쓰다 [다시 보는 한단고기(桓檀古記)(255)] 2016-08-25 06:53:38 太白逸史•제7: 大震國 本記. 二月丙午 遼太祖 建東丹國 以長子倍 爲人皇王. 王之建元 甘露改 忽汗城 爲天福. 準用天子冠服 被十二旒冕 皆畵龍象 乃用 大震國舊制 以叔 迭刺 爲左大相 大震老相 失名 爲右大相 大震司徒 大素賢 爲左次相 耶律羽之 爲右次相. 赦國內殊死以下 約歲貢 布十萬端 馬千匹. 甘露 二十七年 冬十二月 庚辰 遼罷 東京中臺省 東丹國除. 2월 병오일에 요나라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았다. 왕이 건원을 감로라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하였다. 천자의 관과 의복을 준용하여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마침내 대진국의 옛 제도를 사..

<펌>동비홀 - 조선향토대백과

조선향토대백과 행정구역정보관 : 황해북도 황해북도 개성시 옛이름 동비홀 표준어 원문 분류행정구역 행정구역정보관>옛이름정보>옛이름 황해북도>개성시 고구려시기 개성군의 옛이름. 동비는 ‘도비/두비’라는 말로서 둥글다는 뜻이고 홀은 성, 고을을 의미하고 있다. 후에 개성군으로 개칭되었다. 마지막 수정일 2010. 12. 31. 【유의 사항】 ⓘ 본 콘텐츠는 1999~2005년 남북공동 편찬사업에 의해 발간된 자료로서, 북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한 자료의 특수성으로 내용의 최신성이나 이미지의 선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점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출처 제공처 정보 조선향토대백과 2008. http://www.cybernk.net/home/Default.aspx 는 북..

<펌>남경 남해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내용 발해의 5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과 15부 가운데 하나인 남해부를 가리킨다. 남경과 남해부의 치소는 동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관청이 하나였는지 분리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신당서(新唐書)』에는 남경남해부를 옥저의 옛 땅이자 발해에서 신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라고 하였고, 옥주(沃州)‧정주(睛州)‧초주(椒州) 3주를 거느린 것으로 나온다. 특산품으로는 남해부의 곤포(昆布: 다시마)와 시(豉: 메주), 옥주의 면(緜) 등이 있다. 남경남해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제기되었던 대표적인 위치 비정설로는 함경남도 함흥설(咸興說)과 함경남도 북청설(北靑說), 함경북도 종성설(鐘城說)‧경성설(鏡城說) 등이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776년 남해부 ‘토..

<펌>남경 남해부 - 위키백과

남경 남해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경南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는 발해의 주요 도시인 5경 가운데 하나다. 개요[편집] 옥저의 고지에 설치되었으며, 옥주(沃州), 청주(睛州), 초주(椒州)의 3개주를 관할했다.[1] 발해 멸망 이후 압록부, 장령부, 부여부, 정리부와 함께 발해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으나 요나라가 이들을 진압한 이후 남해부의 주민들을 (지금의 랴오닝성 안산 시, 잉커우 시 일대로) 강제이주시키고 해주를 설치했고 그 땅은 완전히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었다.[2] 거란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그 위치가 잊혀졌다. 해동역사의 저자 한진서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지금의 북청군, 혹은 함흥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3] 이후 북한정권이 고고학조..

<펌>서경압록부 - 위키백과

서경 압록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경西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서경 압록부(西京鴨淥府)는 발해의 중요 도시인 5경 가운데 하나였다. 서경 압록부는 옛 고구려 땅으로서 발해가 당나라와 교역하는 바닷길에 위치했다.[1] 《요사》(遼史)에는 발해의 서경 압록부가 고구려 때의 고국성(→)으로 성의 높이가 3장이고 동서 및 남북 너비가 20리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개요[편집] 발해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의 수도였다. 936년 경 발해의 귀족 출신인 열만화는 남경 남해부에서 서경 압록부로 이동하여 938년 경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985년 정안국의 수도인 서경 압록부를 공격하여 이듬해인 986년 1월에 멸망시키고, 그 땅에 녹주를 필두로 한..

<펌>동경 용원부 - 위키백과

동경 용원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경東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는 발해의 5경 중 하나이다. 개요[편집] 동경 용원부에 대한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두만강에 가까운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훈춘 시 팔련성(八連城) 유적이 확실시 되고 있다. 발해의 제3대 왕인 문왕의 후기인 785년부터 제5대 성왕대인 794년까지 잠시 수도의 기능을 하였다. 신라와 일본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당시 발해의 교통의 중심지라고 여겨진다. 4개의 주를 관할했다. 발해 멸망 이후 928년, 거란이 동란국을 요양부로 이관시키면서 모든 속현이 폐지, 주민이 요동지역으로 강제 이치되었다. 행정구역[편집] 주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경주 慶州 혼춘시 팔련성..

<펌> 중경 현덕부 - 위키백과

중경 현덕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경中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는 발해의 5경 중 하나이다. 개요[편집]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吉林省) 화룡시(和龍)의 서고성자(西古城子)가 가장 확실시되고 있다. 발해 무왕과 문왕 재위 초기 때까지 (742년 ~ 757년) 수도의 기능을 하였다. 행정구역[편집] 중경 현덕부에는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의 6개주가 있었다. 같이 보기[편집]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서경 압록부(西京鴨淥府)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각주

<펌> 상경용천부 - 위키백과

상경 용천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상경上京역사적 시대 발해의 경 남북국 시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는 발해의 주요 도시였던 5경 중 하나이다. 발해 때는 상경성(上京城) 또는 홀한성(忽汗城)이라고도 했다. 개요[편집] 756년 발해 문왕이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여 수도로 삼았다. 785년에서 794년 사이 수도가 동경 용원부로 잠시 옮겨졌다가 성왕이 다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1] 발해가 요나라에 멸망한 뒤, 태조 야율아보기는 그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설치했으나 928년(요 태종 천현 3년), 동란국을 요양부로 옮기면서 완전히 버려졌고, 버려진 성은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상경용천부를 영고탑장군의 치소였던 영고탑으로 비정한 이래 헤이룽장성 무단장 시 닝안 ..

<펌>위구태왕 (부여) - 위키백과

위구태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구태왕 尉仇台王재위대관식전임후임부왕휘이칭별호묘호시호연호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왕조가문부친모친배우자자녀묘소 부여의 ?대 국왕 197년~ ? 위구태왕(尉仇台王) 부태왕 간위거왕 시왕(始王) 이름 해위구태(解尉仇台) 위구태(尉仇台) 미상 미상 위구태왕(尉仇台王) 미상 신상정보 생년 미상(生年 未詳) 부여(夫餘) 몰년 미상(沒年 未詳) 부여(夫餘) 동부여(東夫餘) 백제(百濟) 동부여(東夫餘) 백제(百濟) 시왕(始王) 미상 공손씨(公孫氏) 공손도의 종녀(宗女) 간위거왕(簡位居王) 미상 위구태왕(尉仇台王, 생몰년 미상)은 부여의 왕으로 이름은 위구태(尉仇台)이다. 백제 건국 시조로 전하는 구태(仇台)와 동일한 행보를 보이고, 음운적으로 비슷한 우태(優台)와 관련성이 있을 ..

<펌>구태왕 - 위키백과

구태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태에서 넘어옴) 부여왕 구태에 대해서는 위구태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구태왕은 백제의 시조이다. 중국의 사서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이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했으며,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 딸을 그의 처로 삼아주었다. 그 뒤 마침내 동이 가운데 강국이 되었다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도 있으며, 현재 정설로 인정되는 것은 시조 온조설이다. 구태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구태와 비류, 온조 형제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고, 사학자 이병도의 고이왕과 구태의 동일 인물설을 지지하고 인용한 동아일보사와 미국 ..

<펌>Asa, Kungsbacka (Halland county in Sweden)

Åsa, Kungsbacka Coordinates: 57°21′N 12°07′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ÅsaCountryProvinceCountyMunicipalityArea[1] • TotalPopulation (31 December 2010)[1] • Total • DensityTime zone • Summer (DST) Åsa Show map of HallandShow map of SwedenShow all Coordinates: 57°21′N 12°07′E Sweden Halland Halland County Kungsbacka Municipality 2.81 km2 (1.08 sq mi) 3,369 1,197/km2 (3,100/sq mi) UTC+..

역사 자료/Norse 2023.11.10

<펌>삼국지 읍루 - 문화원형백과

해동성국 발해 삼국지 읍루 분류 군사/외교 > 발해콘텐츠 > 관련원문보기 목차 이미지 원문 이미지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붉은 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의 담비가 그것이다.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에 신속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黃初) 연간(A.D. 220~226; 고구려 山上王 24~30)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차례 정발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독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노략질을 잘하므로 이웃 나라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동이(東..

<펌.연어 기름 - 나무위키

연어기름 최근 수정 시각: 2023-10-27 03:21:52 동물성 식용유 식용유 [ 펼치기 · 접기 (가나다순 정렬) ] 1. 개요2. 상세 1. 개요[편집] 연어의 지방에서 얻는 기름. 2. 상세[편집] 주로 한대 지방에서 연어기름을 사용한다. 마가린이 처음 생겨났을 당시에는 연어기름으로 마가린을 만들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생선에서 얻은 기름이라 비린내가 문제되었으며, 결국 나중에 지금처럼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마가린이 보편화되면서 연어기름 마가린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연어기름 또한, 바이오디젤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주로 일본에서 쓰였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삼국시대에 화공을 위한 인화성 물질로 생선기름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펌> 약수, 단군 조선의 서쪽 감숙성을 흐르는 강 -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성헌식의 대고구리 약수, 단군 조선의 서쪽 감숙성을 흐르는 강 문헌과 자료가 가리키는 약수의 위치…조선의 위치 가늠할 수 있어 성헌식 필진페이지 +입력 2019-12-14 15:15:5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흉노의 조상인 색정의 유배지였다가 훗날 사면돼 제후로 봉해지며 봉지로 받은 약수(弱水)는 ‘단군세기’에 “5세 대음단군 10년(B.C 1652년) 기축년 단제께서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서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약수의 대략적인 위치는 ‘수경주(水經注)’에서 몇 권(卷)에 언급돼 있는지를 검색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수경주’는 북위 때 역도원(酈道元)이 현재 중국 대륙에 있는 하수(河水=..

<펌>단기고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기고사 (檀奇古事) 목차 정의 내용 참고문헌 고대사 문헌 719년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탈고한 것으로 전해지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서. 연대기. 정의 719년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탈고한 것으로 전해지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서. 연대기. 내용 원문은 발해문이었다고 하며 약 300년 뒤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현재의 국한문본은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다시 번역한 것이라 하나, 발해본은 물론 한문본도 오늘에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으나, 다른 상고사서와 비교하여볼 때 그 기본틀이 다르지 않아, 면밀한 분석과 재평가가 요망되고 있는 사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대야발의 서문에 이어 제1편 ..

<펌>단군세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군세기 (檀君世記) 목차메뉴 접기 정의 내용 참고문헌 고대사 문헌 1363년 이암이 단군조선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 연대기. 정의 1363년 이암이 단군조선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 연대기. 내용 계연수(桂延壽)의 ≪환단고기 桓檀古記≫에 수록되어 있다. 일찍이 이암은 고려시대 ≪진역유기 震域遺記≫를 저술한 이명(李茗)과 ≪북부여기 北夫餘記≫의 저자 범장(范樟) 등과 더불어 경기도 양주 천보산(天寶山)에 올라갔다가 태소암(太素庵)에서 진기한 고서(古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때 얻은 고서를 읽고 이 책을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태백진훈 太白眞訓≫·≪농상집요 農桑集要≫와 함께 그가 남긴 이른바 ‘행촌삼서(杏村三書)’의 하나로 꼽힌다. 서(序)에 보면 1363년(공민왕 12) 10월 3일 강화도 ..

<펌> 약수 남쪽에 자리 잡았던 부여와 읍루 -스카이데일리 (성현식)

지난 연재에서는 열양의 욕살 색정이 유배 갔던 약수(弱水)가 흉노의 고향이 되고 감숙성을 흐르는 강이라는 사실에 대해 알아봤다. 이번에는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부여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겠다. 약수의 위치를 설명하는 중국기록에 부여(夫餘)와 읍루(挹婁)에 대한 문구가 있어 우리 민족의 강역을 밝히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에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와 에 “읍루국 동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또한

<펌>약수에 살던 흉노족 조상은 단군의 신하 - 스카이데일리

약수에 살던 흉노족 조상은 단군의 신하 단군의 신하 색정, 유배지였던 약수에서 흉노 일으켜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9-12-08 09:30:00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단군세기’ 3세 가륵 단군조에 언급된 예(濊)의 위치가 ‘수경주’에 의해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청장수 부근임이 밝혀짐으로서 그 서쪽으로 하내군 부근에 있어야 할 낙랑군의 위치까지 명백해졌다. 따라서 조선과 고구려의 중심지는 산서성 남부였고 흉노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터키까지 다스렸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해가 될 수 있다. 같은 3세 가륵 단군조에 그런 흉노에 대한 언급이 있다. 바로 “가륵 단군 6년 (B.C 2177, 갑진) 열양(列陽)의 욕살 색정(索靖)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