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료/백제 6

<펌>위구태왕 (부여) - 위키백과

위구태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구태왕 尉仇台王재위대관식전임후임부왕휘이칭별호묘호시호연호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왕조가문부친모친배우자자녀묘소 부여의 ?대 국왕 197년~ ? 위구태왕(尉仇台王) 부태왕 간위거왕 시왕(始王) 이름 해위구태(解尉仇台) 위구태(尉仇台) 미상 미상 위구태왕(尉仇台王) 미상 신상정보 생년 미상(生年 未詳) 부여(夫餘) 몰년 미상(沒年 未詳) 부여(夫餘) 동부여(東夫餘) 백제(百濟) 동부여(東夫餘) 백제(百濟) 시왕(始王) 미상 공손씨(公孫氏) 공손도의 종녀(宗女) 간위거왕(簡位居王) 미상 위구태왕(尉仇台王, 생몰년 미상)은 부여의 왕으로 이름은 위구태(尉仇台)이다. 백제 건국 시조로 전하는 구태(仇台)와 동일한 행보를 보이고, 음운적으로 비슷한 우태(優台)와 관련성이 있을 ..

<펌>구태왕 - 위키백과

구태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태에서 넘어옴) 부여왕 구태에 대해서는 위구태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구태왕은 백제의 시조이다. 중국의 사서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이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했으며,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 딸을 그의 처로 삼아주었다. 그 뒤 마침내 동이 가운데 강국이 되었다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도 있으며, 현재 정설로 인정되는 것은 시조 온조설이다. 구태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구태와 비류, 온조 형제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고, 사학자 이병도의 고이왕과 구태의 동일 인물설을 지지하고 인용한 동아일보사와 미국 ..

<펌>우태 - 위키백과

우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백제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우태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우태 優台재위전임후임부왕휘이칭별호묘호시호연호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왕조가문부친모친배우자자녀종교묘소 북부여의 태자 미상 미상 미상 해부루왕(解扶婁王) 이름 해우태(解優台)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신상정보 생년 미상(生年 未詳) 미상 몰년 미상(沒年 未詳) 미상 북부여(北夫餘) 백제(百濟) 미상 해부루왕(解扶婁王) 미상 소서노(召西奴) 비류(沸流) 온조왕(溫祚王) 미상 미상 우태(優台)는 백제 건국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서손이다. 졸본부여 사람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왕을 낳았다고 한다. 개요[편집] 백제의 건국시조인 비류(沸流..

<펌>비류 - 위키백과

비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른 뜻에 대해서는 비류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비류 沸流재위대관식전임후임부왕휘이칭별호묘호시호연호출생일출생지사망일왕조가문부친모친배우자자녀종교묘소 미추홀국의 초대 국왕 기원전 19년~기원전 18년 비류(沸流) 소서노(召西奴) 온조왕(溫祚王) 우태(優台) 동명성왕(東明聖王) 이름 부여비류(扶餘沸流) 비류(沸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신상정보 생년 미상(生年 未詳) 미상 기원전 18년 백제(百濟) 부여씨(阿莘氏) 우태(優台) 동명성왕(東明聖王) 소서노(召西奴) 미상 부여씨(阿莘氏) 미상 미상 비류(沸流, ? ~기원전 18년)는 우태(優台)의 장남 혹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차남으로, 온조왕(溫祚王)의 형이다. 미추홀국(彌鄒忽國)의 초대 ..

<펌>미추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미추홀 [ 彌鄒忽 ] 이칭별칭유형시대성격소재지 미추홀 지명/지명 고대/삼국/백제 고지명, 도읍지 인천광역시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백제 초기 비류(沸流)의 도읍지. 내용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주몽(朱蒙)의 두 아들 비류(沸流 : 불류라고도 발음함)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온조는 하남(河南)의 땅을 택하고, 비류는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매소홀현(買召忽縣)을 또한 미추홀이라고도 하였다. ‘매소홀(買召忽)’의 ‘매(買)’자는 〉믈(물)의 한자표기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지리지에 ‘수성군(水城郡)’은 본시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이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성(城)’은 ‘홀(忽)’에 해당하며, 〈용비어천가〉에서 ‘소홀..

<펌> 관미령 전투(38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미령전투 [ 關彌嶺戰鬪 ] 사건 고대/삼국 전쟁 387년(진사왕 3) 관미령 말갈족 유형시대성격발생·시작 일시관련장소관련인물·단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387년(진사왕 3)에 있었던 백제와 말갈(靺鞨)의 싸움. 내용 백제는 개국 초기부터 동예(東濊)로 추정되는 말갈의 부단한 침입을 받아왔다. 387년 백제군은 말갈군의 침입을 관미령에서 방어하다가 패하였다. 관미령의 위치에 관해서는 서기전 9년(온조왕 10) 말갈군을 곤미천(昆彌川)에서 방어하다 패한 백제군이 청목산(靑木山)으로 후퇴한 기록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청목산을 개성 송악산이라 했다. 이는 백제 초기의 영토상태로 보아 근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오히려 송악산 수십리 북쪽에 있는 청석동(靑石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