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은 누구인가? (최종편)

2023. 3. 13. 02:07한국사/기타

부제 : 북아프리카의 마우리족은 누구인가? (최종편)

 

그동안 북아프리카의 마우리족에 대해 기원전 220년부터 반달왕국시대 전까지, 즉 로마제국의 지배시기까지 살펴 보았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양상을 보였다. 기원전의 시대는 월지족의 모습부터, 협보가 있었던 구야한국의 모습, 그리고 왜국, 변한, 가야, 남마한 등의 모습도 보였다. 이제 반달왕국 시대를 넘어, 비잔틴제국, 그리고 사라센제국의 우마이야왕조의 지배시기를 거치면서 이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0세기에 들어 Fatimid Caliphate시기부터는 서하의 시기로 판단되는 바, 이는 별도의 연구를 통해 차후 알아 보고자 한다.

 

IV. 비잔틴시대의 마우리족과 반달왕국, 비잔틴의 전쟁

 

 

서로마제국이 사라진 후, 반달왕국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반달왕국, 비잔틴제국 시기에도 이들은 더 내륙쪽으로 들어가 이들의 지배를 피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After the fall of Rome, the Germanic kingdom of the Vandals ruled much of the area. Neither Vandal nor Byzantine could extend effective rule; the interior remained under Mauri (Berber) contro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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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ndal king Huneric (477-484) exiled 4966 catholic bishops and priests across the southern border of the Vandal kingdom into Mauri territory.[23]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반달족의 왕 Hilderic (523-530)도 마우리족의 공격을 제어하지 못했다. 비잔틴제국과 강화조약을 맺은 Hilderic이 실각하고 Gelimar가 뒤를 잇자, 비잔틴제국은 이를 핑계삼아 이 지역에 침입한다. Belisarius는 이 지역에서 로마시대와 같은 관리를 회복했고, 반달족 왕 Gelimar는 마우리족에 피신했다가 3개월을 버티다가 항복했다. (아래 자료 참조)

 

Hilderic (523-530) was not able to control Mauri attacks.[24] In 530 he was deposed and replaced with Gelimer. The Byzantine Emperor, Justinian, used this as an excuse for invasion, as he had treaty relations with Hilderic. Justinian's general Belisarius quickly reestablished control over the former Roman province of Africa. King Gelimer sought refuge with a Mauri chieftain in the city of Medeus on Mount Papua. There, he was besieged for three months, until the city's suffering became too unbearable and he surrendered.[25]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반달왕국의 북아프리카 점령은 중부 유럽에 있던 반달족 즉 소월지의 대월지에의 회귀라 해석된다. 여기에는 고트족의 지휘와 참여도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백제 정복후, 후견세력의 점령이 아닌가 한다. 반달왕국의 왕이름 Huneric (477-484)은 훈족과 관련된 이름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멸할 때, 부하들이 끝까지 추격하자 했는데, 장수왕이 그들의 뒤에는 야마토정권이 있으니 그만두자 했다 한다. 이 야마토 정권이 북아프리카에 있는 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한성백제가 프랑스 Clermont-Ferrand을 한성으로 하는 백제라 추정했다.

 

전한이 망한 해인 AD 8년 온조가 마한의 정복을 계획한 것을 보면, 당시 전한이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포함하고 있었다면, 온조의 백제가 이들 지역에 진출했을 수 있다. 따라서 한성백제가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할 수 있다. 만약 북아프리카를 전한이 포함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온조의 백제가 이들 지역까지 정복했다면, 이들 북아프리카지역은 남마한이었을 것이다.

 

로마가 공화국시기부터 북아프리카를 계속 지배지역으로 한 것을 보면, 전한이 그리고 그후 백제가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후한은 전한이 지배하던 서역까지 진출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후한은 이베리아반도나 북아프리카 지역을 지배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흉노의 묵특선우가 서역의 26개국을 점령했다는 기록은 이베리아 반도나 북아프리카지역을 점령했다는 기록으로 판단된다. 즉 흉노의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나 북아프리카까지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라는 흉노의 조상이라 했고, 월나라도 흉노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구야한국도 이 지역과 관련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와 뿌리가 같은 백제가 이들 지역을 지배 관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왕국과 모레타니아왕국이 월지국 대월지와 유사한 존재기간을 나타내고 있는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오손을 프랑스중남부 지역에 있던 Ossetians으로 필자는 추정했다. 따라서 오손을 월지가 망하게 했으며, 월지는 흉노의 공격으로 더 서쪽 (남쪽)으로 가서 북아프리카에 대월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추정과도 연관된다.

 

그리고 대월이라 불리는 월나라에서 초나라가 생겼으며, 항우와 유방은 이 초나라 지역 출신이다. 진(秦)이 망하게 된 진승 오광의 난도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그래서 유방은 후일 진승을 추모하기도 했다. 월나라는 춘추오패의 하나였으며, 존속기간은 (BC 473이전 - BC 306)으로 추정된다.

 

월나라 세력이 결국 한(漢)나라에 귀속되어 제후국이 되어 해양세력으로 발전했다는 아래 기록이 눈길을 끈다. 즉 북아프리카는 전한(前漢)의 제후국이란 것이다. 그리고 해양세력이 되었다 하는 것은 바닷가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월나라는 고대 남방민족이라 했다. 중국의 위치를 프랑스로 보는 필자는 남방이면 북아프리카지역이 된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월나라를 지금의 베트남 등으로 추정하나, 이는 중국사의 위치를 현 중공의 위치로 보는 오류를 따른 결과이다. 필자는 여러 이유를 들어 현 중공의 위치가 고대사 중국의 위치가 아님을 주장했다.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후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범려 구천을 보좌할 때 가장 세력이 강력했으며, 후에 점점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기원전 306년 구천의 6대손인 무강 때 초나라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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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6년, 구천왕의 6대손인 무강왕의 시대에 초나라 위왕의 원정으로 초나라에 패했다. 무강왕은 초나라의 추격을 받다가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월나라 세력은 멸망 이후 일부는 초나라에 흡수되었다. 한나라 건국 한나라에게 귀속되어 민(閩), 동월(東越) 등이 제후국이 되어 해양 세력으로 발전한다."

(자료: 월나라, 위키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월나라/월지국)

 

월나라의 기원은 하(夏)왕조라 한다. 상당히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이 하나라가 북아프리카의 사하라지역에 있지 않았나 한다. 사기에 월나라 아래 하나라가 있었고, 월나라 북쪽에 강거가 있다고 했다. 필자는 강거가 강족으로 이베리아반도에 있지 않았나 지난 글에서 추정했다. 하나라의 사하라사막지역의 존재 여부는 워낙 큰 주제이므로 별도의 연구를 하고자 한다.

 

"오, 월 스스로는 황제 후손을 주장하였다. 현재는 오는 주나라 희성, 월은 하나라 사성으로 정의 된다. 사마천은 사서에서 월나라 국성은 사(姒)씨로서 하왕조에서 나왔다고 한다.............

 

월은 고대 남방 민족의 통칭이다. 월나라에서 초나라가 건국되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초나라를 바탕으로 한나라가 건국되면서........초나라 출신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면서........."

(자료: 월나라, 위키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월나라/월지국)

 

 

하(夏)나라의 성씨는 사(姒, 동서사)씨라 한다. 이후 하나라 왕조의 후손인 기(杞)나라가 사씨성이었다 한다. 그러나 모래사(沙)씨가 아닐까? 백제의 성왕이 사비성 수도 이전을 한 것도 이곳의 토착 신진세력인 사(沙)씨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자료 : 성왕, 나무위키 참조)

 

기자(箕子)가 기(杞, 구기자나무 기)나라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집트의 기자(Giza) 피라미트가 연상된다. 기자 피라미트는 기자(Giza)지역에 있어서 칭해진 이름이라 했다. 하(夏)나라, 기(杞)나라, 기자조선의 기자(箕子), 기자(Giza) 피라미트, 사하라 사막, 기원전 6세기에 존재했다는 천문, 수학, 철학에 능통했다는 누미디아왕 Atlas왕, 이들이 모두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사하라 사막에 있었을 수도 있는 전설의 Atlantis가 혹시 기원전 2100 - 기원전 1600 기간에 존재한 하(夏)나라는 아닐까 상상해 본다.

 

 

마우리족은 비잔틴제국의 Belisarius가 이 지역에 진출할 때, 반달족을 몰아 내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리고 Belisarius가 534년 아프리카를 떠나자, 다시 약탈을 시작했다. 비잔틴의 솔로몬 장군이 이들과 치열하게 싸워 약탈을 멈추게 했으나, 536년 비잔틴군의 반란이 있자 다시 마우리족의 약탈은 계속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Otherwise, for the most part the Mauri did not resist Belisarius, but waited for the outcome of the battle and gave their allegiance to the Byzantines when it was done.[24] The Vandals had lost a great deal of the original Roman territory to the Mauri, including everything west of Caesarea.[26] As soon as Belisarius left Africa in 534, the Mauri began raiding again.[27] The general Solomon fought a series of campaigns against them, putting a stop to the raids, until a Byzantine troop rebellion in 536.[27] Following the troop mutiny the Mauri were able to raid again with impunity into Byzantine territory.

 

솔로몬장군은 결국 소환되고 Germanus가 와서 군내의 소동은 멈추었다. 539년 솔로몬장군은 다시 투입되어 마우리족과 싸웠다. 마우리족과의 싸움과 군내부 반란으로, 새로 정복된 지역에서 세금을 걷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Justinian황제는 동고트족과 페르시아에 대항해 싸우느라, 충분한 군대를 마우리족에 대항하여 운용할 수 없었고, 이것이 결국 540년대 이후 마우리족의 반란을 가능하게 했다. (아래 자료 참조)

 

Solomon was recalled and replaced with Germanus, who pacified the troop rebellion; then Solomon was recalled to fight against the Mauri again in 539.[28] Because of the Mauri war and the troop rebellion, the Byzantines had difficulty collecting taxes from the newly conquered province.[29] Justinian was preoccupied with wars against the Ostrogoths and Persians and was unable to apply much resource to controlling the Mauri, opening the door to further Mauri rebellions in the 540s and later.[30]

 

솔로몬장군은 비잔틴영토에서 마우리에 대한 비잔틴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 Sergius가 마우리족의 지역지도자, Levathi를 협상에 초대해 544년 이들을 대학살했다. 이것이 마우리족의 봉기를 초래하여, 솔로몬장군이 살해되었다. Justinian은 Sergius에게 비잔틴의 아프리카지역 관리를 맡겼으나, Sergius는 무능했다. 그래서 Justinian은 Areobindus장군을 보냈다. 누미디아의 비잔틴 duke인 Gontharis는 아프리카왕이 되고자, 마우리족을 몰래 지원했다. 비잔틴군은 급료가 재때 지급되지 않았고 자주 의존할 수 없었다. Gontharis는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Areobindus를 죽였다. 그러나 충직한 아르메니언 비잔틴군인 Artabanes에 의해 Gontharis는 죽었다. Artabanes는 그들의 군대를 다시 통제할 수 있었다. 그의 후계자 John Troglita는 546-547에 있던 마우리족 반란을 진압했다. 이 패배이후 마우리족의 반란은 563년까지 없었으며, 563년 반란도 바로 진압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이러한 자료는 이 당시 백제의 성왕으로 추정되는 비잔틴의 Justinian I이 이들 북아프리카 지역의 가야(마우리족)와 전쟁하여 복속 시키는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가야도 여러 나라가 있던 것처럼, 이들을 모두 마우리족으로 언급하는 위의 자료는 구체적인 가야의 나라이름을 추정할 수 없게 한다.

Solomon succeeded in establishing Byzantine control over Mauri in Byzantine territory. However, his nephew Sergius invited the chiefs of a local Mauri tribe called the Levathi to a parley, and massacred them in 544. This led to a Mauri uprising, in which Solomon was killed. Justinian gave control of the Byzantine African province to Sergius, but Sergius was incompetent, so Justinian sent Areobindus as general. The Byzantine duke of Numidia, Gontharis, wishing to become king of Africa, supported the Mauri in secret. The Byzantine troops were not being paid on time and were frequently unreliable. Gontharis occupied Carthage and killed Areobindus, only to be killed in turn by an Armenian Byzantine loyalist, Artabanes. Artabanes managed to regain control of the troops. His successor, John Troglita, defeated the Mauri revolt in 546–547. Following this defeat there were no more Mauri rebellions until 563, and this one was quickly suppressed.[31]

 

A.H.M. Jones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비잔틴제국이 반달왕국의 점령이후 마우리족에 대한 지배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심각한 이유는 대부분, 아프리카에 주둔한 군대에 대해 충분한 자원과 자금을 투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Justinian이 다른 곳에서 행해지는 여러 전쟁탓이라는 것이다.

 

마우리족은 반달왕국의 Hilderic이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기간에 많은 지역의 땅을 확보했으며, 비잔틴은 이러한 땅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비잔틴시대에 거의 모든 마을은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요새화되었다. 많은 마을들은 크기에서 축소되고, 줄어든 요새화된 지역에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광장(Forum)이 요새화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번영과 인구를 축소하고, 대부분 마우리족과의 전쟁 위협을 증가시켰다. Jones은 말하기를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투입하지 않음으로써, Justinian정부는 이 지역에서 세금을 걷는데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유지비용이 더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몇몇 마우리족은 해외 용병으로 동원되고, 아프리카에 적어도 2개 연대가 세워졌고, 이집트에 동원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A.H.M. Jones states that the grave difficulties experienced by the Byzantines in establishing control over the Mauri following the conquest of the Vandal kingdom, were in large part due to a failure to supply enough money and resources to the troops stationed in Africa, and this in turn due to the numerous wars being fought by Justinian elsewhere.[32] The Mauri had taken large areas of land from the Vandals during the reign of the ineffective Hilderic, and the Byzantines never recovered these territories. Within the area of Byzantine control, almost every town was fortified, even far from the border areas. Many towns appear to have been reduced in size as populations concentrated within reduced fortified areas. In some towns the forum was fortified. All this suggests reduced prosperity and population and increased threat of war, most likely with the Mauri.[33] Jones argues that because of the failure to commit enough resources to thoroughly pacify the region, it never contributed more taxes to Justinian's government than it cost in resources to maintain control.[34] However, some Mauri were recruited into the Byzantine armies for service overseas, and at least two African regiments were raised and assigned to Egypt.[33]

 

비잔틴에 대한 주요 반란은 569년 일어 났는데, 이때는 Justin II시기로서, 지역 관리가 살해되었다. 그 다음해에도 군 지휘관이 살해되었다. 571년 또 다른 군 지휘관이 살해되었다. Maurice황제시기, 582-602 시기에도 두번의 작은 규모의 마우리족 반란이 있었다. (아래 자료 참조)

 

A major Mauri revolt against Byzantine rule took place in 569, during the reign of Justin II, in which the praetorian prefect was killed. The following year, the magister militum was killed. In 571 another magister militum was killed.[35] During the reign of the Emperor Maurice, 582-602 there were another two, smaller, Mauri rebellions.[36]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백제 성왕 시기의 가야 관련 기록을 보면 이 당시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의 북아프리카, 이태리남부 지역 등의 확보가 혹시 가야와 왜의 지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탁순국을 가야라 하는데, 왜의 이미지도 겹쳐진다.

 

신라가 일부 가야, 즉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을 지배했다는 아래 기록은 또한 신라도 북아프리카에 진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아래에서 베르베르족의 여러 언어를 살펴 보는데, 신라어라 말하며, 동시에 Tachelhit라 하기도 한다고 기록된다. 그리고 베르베르족 언어 중에 Tuareg어가 있다. Tuareg 지역은 사하라사막지역으로 보다 내륙에 있다. Tuareg는 Targa의 복수라 한다. 모로코 중앙지역은 Tamazight언어를 쓴다 한다.

 

이 지역이 신라가 확보한 탁기탄, 탁순국일 수 있다. 유난히 타 발음이 많은 지역이다. 이들 탁순국, 탁기탄 지역은 모로코 서쪽, 모리타니아쪽인데, 신라사람들 (Shilha people)이란 말이 있고, 모리타니아에는 21세기에도 카스트제도가 심해 노예가 있다 한다. 즉 신라의 골품제도가 이 지역에 정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Moors족에도 White Moors는 지배계급이고, Black Moors는 피지배계급이었다 한다. White Moors는 금발이었다고 한다. 신라인은 백인종이라는 것이 석탈해, 일성왕, 아달이사금이 백인이었다는 지난번 글과 일치한다.

 

탁기탄국에 대한 일본 서기의 기록을 보면, "가라와 신라의 경계사이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는데도, 임나는 구원할 능력이 없어 결국 망했다(541년)"라 했다. (자료 : 탁기탄, 나무위키 참조) 가라는 금관가야의 카르타고, 임나는 시실리섬, 신라는 이때 북아프리카에 진출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탁기탄이 북아프리카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알제리 남쪽 사하라 사막지역인 Targa, Tuareg지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Tuareg지역의 역사에서 Tin Hinan여왕(4-5세기 추정)과 그의 무덤이 있고, 왜의 비미호여왕(AD 189-248)과 그의 무덤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과 탁기탄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고려하면, 왜에 관련된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즉 가야는 왜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구야국은 구야한국이 아닐까 한다. 고구려의 협보가 이베리아반도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면, 구야한국이 모로코지역일 수 있다고 필자는 추정했다. 즉 신라가 확보한 가야지역은 모로코쪽의 서북 아프리카지역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무어인이 후일 이슬람인으로 불리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안라국이 아라가야, 임나인 시실리섬이 아닌가 한다. 신라의 위치인 이태리반도의 바로 남쪽이다. 백제 성왕 시기인 비잔틴제국의 Justinian시기에는 시실리섬 등 남부 이태리가 이들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러나 아래 자료에서 탁순국과 안라국이 가까운 위치라는 뉴앙스를 주는데, 안라국이 남부 이베리아반도의 안달루치아지역일 수도 있다. 발음도 유사하다. 또한 이곳은 마우리족이 자주 진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과거 안라국이 자꾸 이베리아반도 쪽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 있었는데....안식국, 안라국, 안록산 등과 연관해 차후 심층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또한 반로국[12]등을 위시한 가야 연맹을 사비회의를 통해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왜왕 말도 안 듣는 왜인 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탁순국에서 횡포를 부리자 그를 격퇴해주는 대신 가야 남부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아 탁순국은 물론 가야 연맹 No.2인 안라국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서기 543년조에는 임나의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의 군령(郡令, 군장이라는 뜻)과 성주(城主)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가야의 일부 지역까지는 백제가 직할 통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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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가야 소국의 사신들을 초청해 사비회의를 열어 가야 소국을 신라에게서 백제가 보호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고 선물을 뿌리며, 안라국이 신라에도 접촉을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되자 신라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회유와 협박을 하는 등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가야의 일부인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을 먹긴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 지역은 성왕의 영향력 하에 놓인 것이다....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백제의 간섭을 받게 된 안라국은 왜인을 매수해서 백제에게서 벗어나려 해보기도 하고[13] 나중엔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았으나 당시 고구려는 전성기 다 끝나고 내전으로 허약해진 상태라, 동예인까지 박박 긁어모아온 고구려군을 독산성 전투에서 나제 연합군이 대파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진흥왕도 쾌히 수천의 원군을 보내주는 등 나제 동맹이 아직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가야는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해 한강 유역 공격과 관산성 전투에서도 백제의 우군으로 동원되는 등 백제를 돕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 가문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자료 : 성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백제 하)

 

 

가야가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한 후, 한강유역(이태리 북부), 관산성전투에 동원되었다는 위 기록은 상기 비잔틴제국의 마우리족 활동 자료에서 일부 마우리족이 용병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상기 시킨다. 즉 여기서도 가야의 이미지가 마우리족에게 있는 것이다.

 

V. 우마이야왕조 시대의 마우리족과 사라센제국

"The Byzantine Empire would remain in control of North Africa until the late 600s, when the Muslim conquest of the Maghreb ended Byzantine rule in Africa. After the Muslim conquest of the Maghreb, there seem to have been continued Mauri resistance for another 50 years.[37] The Chronicle of 754 still mentions Mauri but by the High Middle Ages the endonym seems to have disappeared, while Christian sources begin to apply the term Mauri, Moors to the Islamic populations of the Maghreb and Andalusia in general."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필자는 이미 우마이야왕조를 문무왕이후의 신라로 추정했다. 따라서 사라센제국인 신라가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것으로 본다. 위 기록을 보면 마우리족은 50년동안 무슬림의 지배에 저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는 무어인의 표현을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치아지역과 마그레브지역의 이슬람인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변했다 한다. 즉 동화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래 마우리족의 문화 분석에서 신라언어, 신라인들이 언급되고, 무어인사이의 강한 카스트제도의 지속은 이를 의미한다고 본다.

 

VI. 마우리족의 문화

 

마우리족의 문화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글에서 살펴 본 바 있다. 여기서는 Berber족의 언어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이중에는 신라어(shilha languages)라는 언어도 있다. 그리고 신라사람들(shilha people)이라는 표현도 있다. 그리고 현재의 모리타니아 국가에선 카스트제도가 워낙 뿌리 깊이 박혀 있어 21세기에 들어 서도 노예가 있었다 한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 살펴 보고, 마지막으로 마우리족이 있는 Atlas지역이 과거 Atlantis가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1) Berbers 언어

 

북베르베르언어로서는 신라어, 중앙 모로코 Tamazight어, Riff어, Shawiya어, Kablye어 등이 있는데, 이들은 세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1) 모로코 아틀라스 언어 (신라어, 중앙 모로코 Tamazight어), 2) Zenati어 (Riff어, Shawiya어), 3) Kabyle언어.

 

"Northern Berber languages spoken by over a million people include Shilha, Central Morocco Tamazight, Riff, Shawiya and Kabyle. They fall into three groups:

  • Moroccan Atlas languages (incl. Shilha, Central Morocco Tamazight)
  • Zenati languages (incl. Riff, Shawiya)
  • Kabyle"

(source: Northern Berber language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누미디아어)

 

중앙 아틀라스 Tamazight어 또는 아틀라스어는 모로코 중앙의 아틀라스 산맥에 있는 230만명에 의해 사용되는 아프리카 아시아언어군의 베르베르족언어이다.

 

"Central Atlas Tamazight or Atlasic (also known as Central Morocco Tamazight, variant of tashelhit, Middle Atlas Tamazight, Tamazight, Central Shilha and, rarely, Beraber or Braber; native name: ⵜⴰⵎⴰⵣⵉⵖⵜ Tamazight [tæmæˈzɪxt], [θæmæˈzɪxθ], Arabic: أمازيغية الأطلس المتوسط) is a Berber language[nb 1] of the Afroasiatic language family spoken by 2.3 million[2][3] in the Atlas Mountains of Central Morocco as well as by smaller emigrant communities in France and elsewhere.[4][5]

Tamazight어는 신라어(Tachelhit), 카빌어, Riff어, Shawiya어, Tuareg어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는 베르베르족어이다. 모로코에서는 신라어(Tachelhit) 다음으로 많이 말해지는 언어이다. 모든 5가지 언어들이 Tamazight어에 관련될 수 있지만, 아틀라스 중앙의 사람들은 Tamazight어만을 쓰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Central Atlas Tamazight is one of the most-spoken Berber languages, along with Tachelhit, Kabyle, Riffian, Shawiya and Tuareg. In Morocco, it comes second as the most-spoken after Tachelhit. All five languages may be referred to as "Tamazight", but Central Atlas speakers are the only ones who use the term exclusively. As is typical of Afroasiatic languages, Tamazight has a series of "emphatic consonants" (realized as pharyngealized), uvulars, pharyngeals and lacks the phoneme /p/. Tamazight has a phonemic three-vowel system but also has numerous words without vowels.

(source: Central Atlas Tamazight,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누미디아어)

 

고대 리비코-베르베르족 글자는 Tuareg Tifinagh글자에 속하는데, Tuareg Tifinagh글자는 오늘날까지 베르베르족 Tuareg언어를 쓰는데 이용되고 있으며, Tuareg언어는 아프리카아시아 군에 속하는 베르베르군에 속한다. 이러한 글자의 고대 사용은 암반위 그림 또는 돌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1500년된 Tuareg 여왕 Tin Hinan의 기념비적 무덤이 있는데, 이들의 벽들의 한 곳에 Tifinagh글자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ancient Libyco-Berber script branched into the Tuareg Tifinagh script which is used to this day to write the Berber Tuareg languages, which belong to the Berber branch of the Afroasiatic family. Early uses of the script have been found on rock art and in various sepulchres. Among these are the 1,500 year old monumental tomb of the Tuareg matriarch Tin Hinan, where vestiges of a Tifinagh inscription have been found on one of its walls.

 

Neo-Tifinagh는 베르베르 아카데미에 의해 발전한 현대식 글자이다. 베르베르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카빌리언 디아스포라 멤버에 의해 결성된 문화적 단체이다. 이 글자는 Tuareg Tifinagh를 카빌어 발음에 맞추어 개조한 글자이다. 이 새로운 Tifinagh글자는 이 단체의 적극적 보급활동에 의해 Imazighen이란 전문지도 발행하며, 이 잡지는 알제리와 모로코의 베르베르족 커뮤니티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Neo-Tifinagh is the modern fully alphabetic script developed by Berber Academy, a cultural association formed by members of the Kabylian diaspora in Paris.[2][24][25][26] The script was developed by modifying Tuareg Tifinagh to accommodate Kabyle phonetics.[2] Neo-Tifinagh was spread by Berber Academy's active promotion of the script, including its usage in their bulletin, Imazighen, which was widely read by Berber communities in Algeria and Morocco.[24][27]

이 글자는 더욱 발전되고 북아프리카의 여러 분야에서 쓰이고 있으며, 모로코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Neo-Tifinagh has since undergone further reform and is used in various contexts throughout North Africa.[2] The Royal Institute of Amazigh Culture has standardized Neo-Tifinagh for use as the official orthography of Standard Moroccan Amazigh, an official language of Morocco.[26][28]

 

 

An IRCAM version of Neo-Tifinagh (source : Wikipedia)

 

"The exact evolution of both Libyco-Berber and Tifinagh is still unclear.[14] The latter writing system was widely used in antiquity by speakers of the largely undeciphered Numidian language, also called Old Libyan, throughout Africa and on the Canary Islands. The script's origin is uncertain, with some scholars suggesting it is related to, descended or developed from the Phoenician alphabet[15] while others argue an independent conception with slight Phoenician influences.[16] Its first appearance is also uncertain, but it is no older than the first millennium BCE,[17] with the oldest remains likely originating from the 6th century BCE."

 

Tifinagh언어의 발전과정은 불확실하다. 고대에 Old Libyan으로 불리며, 아프리카와 카나리제도에서 누미디언 언어로 널리 쓰였다. 이 글자의 원천은 확실하지 않으나, 어떤 이는 페니키언 문자에서 진화 또는 계승되었다 하고, 또 다른 이는 페니키아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립된 언어라고 한다. 최초의 출현도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기원전 천년 이전은 아니지만, 기원전 6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에서 나타난다.

 

(source : Tifinagh,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2) 베르베르어 중 신라어 (Silha lanuages)

 

베르베르어 중 신라어라는 말이 있으니, 이에 대해서 살펴 보자.

 

Area of shilha language spoken (red) (source : Wikipedia)

 

신라어는 일반적으로 Tashelhit로 알려진 언어로 모로코 서남쪽에서 말해진다.(상기 지도 참조). 모로코 아랍어에서 이 언어는 '설라'로 불려서 영어이름 Shilha가 생겼다. 인류학자나 역사가들은 Shilha라는 이름을 선호하고, 언어학자들은 Tashelhit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Shilha /ˈʃɪlhə/, now more usually known as Tashelhit /ˈtæʃəlhit/, is a Berber language spoken in southwestern Morocco. The endonym is Taclḥiyt Berber pronunciation: [tæʃlħijt],[2] and in recent English publications the name of the language is often rendered Tashelhit, Tashelhiyt or Tashlhiyt. In Moroccan Arabic the language is called Šəlḥa, from which the English name Shilha is derived. When referring to the language, anthropologists and historians prefer the name "Shilha", which is in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OED). Linguists writing in English prefer "Tashelhit" (or a variant spelling). In French sources the language is called tachelhit, chelha or chleuh.

 

신라어는 약 10만 제곱킬로미터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아이슬란드 섬이나 미국의 켄터키주의 크기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High Atlas산맥의 서쪽지역 그리고 Draa River의 남쪽지역이다. (상기 지도 참조) 가장 큰 도시는 해안도시 Agadir(40만 인구) 그리고 Guelmin, Taroudant, Oulad Telma, Tiznit 그리고 Ouazazate 마을등이다.

 

Shilha is spoken in an area covering c. 100,000 square kilometres, making the language area approximately the size of Iceland, or the US state of Kentucky. The area comprises the western part of the High Atlas mountains and the regions to the south up to the Draa River, including the Anti-Atlas and the alluvial basin of the Souss River. The largest urban centres in the area are the coastal city of Agadir (population over 400,000) and the towns of Guelmim, Taroudant, Oulad Teima, Tiznit and Ouarzazate.[citation needed]

 

북쪽과 남쪽으로는 아랍어를 쓴 지역과 경계를 하고 있다. 북동쪽의 Demnate-Zagora라인을 따라 Central Atlas Tamazight 방언지역이 있다. ...실질적인 신라어 사용 커뮤니티는 주로 큰 마을과 모로코의 북쪽 도시들에 있으며, 모로코 해외로는, 벨지움, 프랑스, 독일, 카나다,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에 있다.

 

In the north and to the south, Shilha borders Arabic-speaking areas. In the northeast, roughly along the line Demnate-Zagora, there is a dialect continuum with Central Atlas Tamazight. Within the Shilha-speaking area, there are several Arabic-speaking enclaves, notably the town of Taroudant and its surroundings. Substantial Shilha-speaking migrant communities are found in most of the larger towns and cities of northern Morocco and outside Morocco in Belgium, France, Germany, Canada,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source: Shilha language,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신라어는 사라센제국인 신라의 지배지역중 신라인들이 이미 직접 진출한 지역이 아닐까 한다. 모로코의 지역중 도시 등 큰 마을에서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카스트제도가 강력이 남아 있는 지역도 이에서 가깝다. 즉 신라인의 북아프리카 진출이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 금관가야 등에의 진출이란 역사적 기록과 필자의 추정이 일치한다. 이 지역에 신라가 있었다는 것을 증빙하는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Shilha people이란 어휘도 있다. 이에 대해 이어서 알아 보고자 한다.

 

(3) Shilha people

ⵉⵛⵍⵃⵉⵢⵏ
الشلوح


Flag associated with the Shilha people


Berber woman from Tafraout, South-Morocco.
Regions with significant populations
Atlas Mountains, Sous Valley, Morocco
 Morocco
4,426,000[1]–4,760,000[2]
 France
500,000[3]
Languages
Shilha, Moroccan Arabic
Religion
Sunni Islam
Related ethnic groups
other Berbers

 

여기서 신라사람들은 신라어를 쓰는 지역과 일치한다. 즉 모로코의 지역이다.

 

"The Shilha people (Berber languages: ⵉⵛⵍⵃⵉⵢⵏ, Arabic: الشلوح), or Ishelhien, are a Berber subgroup primarily inhabiting the Anti Atlas, High Atlas, Sous Valley, and Soussi coastal regions of Morocco.[4][5]

 

Overview[edit]

 

신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ishelhien라 불렀다 한다. 이말은 불어로 Chleuh이다. Ishelhien은 또한 Shluh, Schloh로도 알려져 있다. 모두 '신라'라는 발음으로 들린다. 아랍어 사용자들에서는 Chleuh가 일반적으로 베르베르족을 부르는 것으로 쓰인다. 비록 Imazighen이 전체 베르베르인들의 자칭이지만.

 

The Shilha people traditionally call themselves ishelhien. This endonym is rendered as les Chleuh in French.[6] The Ishelhien are also known as Shluh and Schlöh.[4] Among Arabic speakers, Chleuh serves as an appellation for Berbers generally, although Imazighen is the proper Berber self-name for Berbers as a whole.[7]

 

The Shilha people live mainly in Morocco's southern Atlantic coast, the High Atlas Mountains, the Anti Atlas mountains, and the Sous Valley.[4] They are of Berber origin, which along with the Berber people, includes other ethnic subgroups such as the Tuareg, Rif, Kabyle, Shawia and Guanche.[8] The Shilha people are a part of Morocco's Berber-speaking community, and the southernmost residing Berber population.[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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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During the 7th century, the Islamic Umayyad Caliphate invaded the Berber and Byzantine strongholds in the Northwest Africa, seizing Carthage in 698 AD. Although the Umayyads nominally controlled Morocco over the following years, their rule was tenuous due to Berber resistance. Shortly in 739 AD, Umayyad Arabs were defeated by the Berbers at the battle of Nobles and Bagdoura. Morocco remained under the rule of Berber kingdoms such as Barghawata and Midrar... etc. In 789 AD, with the approval of the locals, a former Umayyad courtier established the Idrisid dynasty that ruled in Fez. It lasted until 970 AD, as various petty states vied for control over the ensuing centuries.

 

우마이야왕조가 698년 카르타고를 점령하면서 서북아프리카의 비잔틴지역과 베르베르족을 지배한다. 739년에는 우마이야왕조가 Nobles and Bagdoura전투에서 베르베르족에게 패하였다. 789년에는 지역세력의 동의하에, 전 우마이야왕조 신하가 Idrisid왕조를 Fez에 세웠다. 이들은 970년까지 존재했다. (상기 자료 참조)

 

필자가 우마이야왕조가 신라라는 추정이 여기서 증명된다. 신라사람들이란 항목에 우마이야왕조 역사만 거론된다. 이 지역은 970년까지 신라의 지배지역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신라 중앙정부가 935년 망했으니, 지방지역은 조금 더 오래 지탱했을 것이다.

 

Society[edit]

 


A Shilha family

 

마우리족의 신라사람들은 반농 반목생활을 했다 한다. 물이 있을 때는 농업을 하고 건기에는 가축을 이끌고 이동했었다.

 

The Ishelhien mainly live in Morocco's Atlas Mountains and Sous Valley. Traditionally, they are farmers who also keep herds.[13] Some are semi-nomadic, growing crops during the season when water is available, and moving with their herds during the dry season.[4]

 

이들은 서로 도우며 살았는데, 건기나 우기 모두 그러했다. 이들은 매년 축제에 모여서 연대를 확인하였는데, 한 신라 커뮤니티가 다른 먼 지역의 신라케뮤니티를 이 축제에 초대한다.

 

The Ishelhien communities in the southwestern mountains of Morocco cooperated with each other in terms of providing reciprocal grazing rights as seasons changed, as well as during periods of war. These alliances were re-affirmed by annual festive gatherings, where one Shilha community would invite nearby and distant Shilha communities.[14]

 

Language[edit]

Main article: Shilha language

 

The Ishelhien speak Tashelhit, a Berber language. It belongs to the Berber branch of the Afro-Asiatic family.[7][15] Their language is sometimes referred to as Sous-Berber.[16][17]

 

(source : Shilha people,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지역에 '신라어'의 존재, '신라사람들'이라는 어귀는 신라가 이 지역에 진출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마이야왕조가 이 지역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신라에서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 금관가야 등의 북아프리카에 진출한 것이다. 아달라 이사금 시절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때에도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에 진출했는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협보가 바다 건너 왜국의 지역에 구야한국을 세웠고 남마한 지역이라 했다. 구야국이 구야한국이라 할 때, 북아프리카는 남마한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이베리아반도도 마한의 영역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탁순국, 탁기탄, 금관가야 등이 가야이므로, 이 지역은 또한 가야지역이기도 한다. 또한 왜국의 이미지도 보인다. 어디가 가야이고 어디가 왜국이고의 구체적인 지역 분간은 현재로서는 불가하다. 그러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북아프리카에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4) 모리타니아의 카스트 제도

 

무어인들은 또한 철저한 신분제도 즉 카스트제도로 유명하다. 그중에도 지배층은 white moors로서 금발이었다 한다. 피 지배층은 black moors로 피부색이 검은 무어인이었다 한다. 즉 지배층은 외래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카스트제도가 철저하여, 모리타니아에서는 1980년대까지 노예제도가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국제적인 인권의 사각지대로 인식되기도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이러한 철저한 카스트제도는 또한 신라의 골품제도의 특징이다. 따라서 신라의 지배지역임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는 진흥왕 시기에 롬바르디왕국의 이태리 북부진출이 진흥왕의 그것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이 주위의 노르만인들과 달리 카스트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Mauritania is known for its poor human-rights record, most notably the continued practice of slavery, a result of a historical caste system between the Bidhan and Haratin. It was the last country in the world to abolish slavery, in 1981, and criminalized it only in 2007.....

 

This social discrimination is applied chiefly against the "black Moors" (Haratin) in the northern part of the country, where tribal elites among "white Moors" (Bidh'an, Hassaniya-speaking Arabs and Arabized Berbers) hold sway.[31] Slavery practices exist also within the sub-Saharan African ethnic groups of the south............

 

Slavery persists in Mauritania, despite it being outlawed.[90] It is the result of a historical caste system, resulting in descent-based slavery.[90][91] Those enslaved are darker-skinned Haratin, with their owners being lighter-skinned Moors.[91]"

(source: Mauritania,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5) Magrheb (Berbers) 유전자 분석

 

마지막으로 마그레브인들의 유전자 정보 자료를 열거하며 마그레브지역의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즉 Tunisia, Algeria, Morrocco, Mauritania, (Lybia) 지역을 포함하는 Magrheb인들은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유전자는 50% from Middle East(페니키아) and 50% from West Europe (이태리, 이베리아반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이베리아 반도 연안을 통해 북아프리카 모로코 지역으로 내려갔다 한다. 협보의 경로를 합리화 해준다.

 

아래 자료에서 북아프리카의 카빌족은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했다고 기록된다. 이들이 누구인지 아직 알 수 없다. 왜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 확신은 없다. 차후 연구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모로코의 베르베르족은 로마의 식민지전에 이미 유럽인의 농업인 인자가 있었다고 기술한다. 즉 월지나 춘추전국시대의 월나라, 초나라 등의 역사가 이베리아반도와 접한 모로코지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또한 고대의 하나라의 가능성도 보인다. 즉 여기서 사하라 사막쪽에 가까운 곳에 Atlantis의 유적이라 판단되는 Richat Structure(사하라의 눈)가 있기 때문이다.

 

 

"History[edit]

See also: Genetic history of North Africa and History of North Africa

The areas of North Africa that have retained the Berber language and traditions best have been, in general, Algeria, Libya, Morocco and Tunisia. Much of Berber culture is still celebrated among the cultural elite in Morocco and Algeria, the Kabylia, the Aurès, etc. The Kabyles were one of the few peoples in North Africa who remained independent during successive rule by the Romans, the Byzantines, the Vandals, the Ottoman Turks and the Carthaginians.[47][48][49][50] Even after the Arab conquest of North Africa, the Kabyle people still maintained possession of their mountains.[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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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te-Neolithic Kehf el Baroud inhabitants were modelled as being of about 50% local North African ancestry and 50% Early European Farmer (EEF) ancestry. It was suggested that EEF ancestry had entered North Africa through Cardial Ware colonists from Iberia sometime between 5000 and 3000 BC. They were found to be closely related to the Guanches of the Canary Islands. The authors of the study suggested that the Berbers of Morocco carried a substantial amount of EEF ancestry before the establishment of Roman colonies in Berber Africa.[63]

(source : Berbe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6) Atlantis 가능성

 

마지막으로 모리타니아 중서쪽의 사하라 사막에 Atlantis유적이라 말해지는 지역이 있는 것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The Richat Structure, dubbed the "Eye of the Sahara",[63] is a formation of rock resembling concentric circles in the Adrar Plateau, near Ouadane, west–central Mauritania.....

 

The TV show Atlas of Cursed Places (2020) that aired on the Discovery Channel & National Geographic Channel had an episode that mentions Mauritania as a possible location for the lost city of Atlantis . The location they consider is a geological formation consisting of a series of rings known as the Richat Structure which is located in the Western Sahara."

 

(source: Mauritania,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이는 그리스의 플라톤이 이집트에 가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적은 책에서 전설의 Atlantis에 대해 묘사한 내용과 상기 Richat Structure가 그 dimensions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고대 하(夏)나라 유적이 아닐까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월지(대월)의 아래에 하나라가 있었다 했다. 그리고 월지(대월)의 북에는 강거가 있고, 서쪽에는 안식이 있으며, 동쪽 멀리에는 대완이 있다고 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강거와 강족의 동일성에 대해 언급했다. (필자의 티스토리 글, '하나라는 북아프리카에 있었을까?') 그리고 이 지역이 이베리아반도일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월나라지역이 초나라가 되고, 초나라의 '항우'의 성이 항(項)자인 것도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가 접하는 지역의 특성때문이라 했다. 즉 위에서 모로코의 베르베르족은 로마의 식민지시대 이전에 확립되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리비아의 지역에는 기원전 1000년의 Garamantes문명의 Qanat라는 수로시설도 있다. 즉 하나라가 이집트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대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   론

 

그동안 구야한국이 북아프리카에 있지 않나 하는 관심에서 출발한 연구가 많이 늘어졌다. 누미디아왕국, 모레타니아왕국의 검토에서 이들이 월지의 존재기간과 매우 유사한 것을 보고, 월지, 월나라, 초나라 등 중국사를 보아야 했고, 사마천의 사기에 대월의 아래에 하나라가 있고, 대월의 북에는 강거가 있다는 기록을 보고, 이베리아 반도가 강거의 지역, 강족의 지역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라의 사하라 사막에 있는가를 알아 보는 중에, Tibesti Mountains(티베트산맥?)이라는 지명을 보고, 대하, 그리고 10세기의 탕구트족의 서하도 이 지역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필자는 이미 티베트의 전신인 토욕혼이 대서양에 접한 포루투갈의 Suebi왕국 지역이라 추정했다. 그래서 하나라의 과거 연구 내용을 검토하니, 그리스, 이집트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사하라 지역에 하나라가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후일 리비아의 기원전 천년의 Garamantes문명을 검토한 후, 그리고 Atlantis에 대한 보다 세밀한 연구후에 사하라 사막의 하나라 지역 여부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제한된 자료로 보는 마우리족, 베르베르족은 가야, 왜, 구야한국, 남마한, 변한 등의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어느 지역이 왜이고 어느 지역이 가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다. 자료의 한계도 있다.

 

그러나 구야한국은 이베리아 반도를 따라 내려간 협보를 고려할 때, 모로코지역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신라가 구야(한)국, 탁기탄, 탁순국 등을 점령한 지역이 이 모로코지역쪽인 서북아프리카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이들 지역에 신라어 (Shilha languages), 신라사람들(Shilha people) 이라는 자료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유난히 이 지역에 타(Ta)발음의 지명, 언어명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미 지난 글 연구에서 금관가야는 카르타고지역이라 추정했다. 그러나 안라국, 아라가야는 아직 확실히 추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 남쪽 안달루치아지역이 아닌가 한다. 안식국, 안록산 등과 함께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서사하라지역인 Tuareg지역의 Hinan여왕과 그 무덤, 왜의 역사에서 비미호여왕과 그 무덤 등의 역사적 기록을 고려할 때, 왜의 이미지도 보인다. 필자는 대방에서 바다 건너 칠천리 떨어진 왜의 대마국이 지중해의 Malta섬이 아닌가 한다. 왜는 지중해의 여러 섬에도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연구가 진척되어야 왜의 정체를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

 

로마공화국은 1,2,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카르타고와 치루었다. 그러나 이시기는 기원전 3세기-2세기에 걸친 전쟁이다. 중국사의 진(秦)나라 통일 시기 전후이다. 따라서 한니발이 관여된 2차 포에니 전쟁은 초나라 항우와 유방의 전쟁일 수 있다. 1차는 진나라가 중국 통일전에 오월초 등에 대한 전쟁으로 보인다. 3차는 전한시대의 전쟁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추가로 구체적인 연구가 있을 것이다. 그후에 하나라와 월나라, 그리고 초나라, 한나라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태리반도가 한(漢)나라 영역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온조의 백제사에서 한수와 한강으로 구분한 것인지 모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중국사의 장강이 피레네산맥 옆의 Ebron river인지 프랑스의 Loire river인지 확실하게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월나라, 하나라는 흉노의 조상이었다 한다. 그래서 흉노와 관련이 있는 견이, 견융 등이 키메리언과 관련 있는 것처럼, 아프리카 북부지역까지 흉노, 키메리언과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과제도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10세기에 세워진 탕구트족의 서하 (대하)가 아프리카에 있다면, 이 서하를 멸망시킨 몽골도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한 것이 된다. 또한 왜국과 전쟁을 위해 고려의 도움을 받았던 몽골은 아프리카 지역 원정이 고려와 함께한 왜에 대한 원정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미 송나라가 프랑스지역에 있었다 추정하며, 송나라를 멸망 시킨 몽골이 프랑스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추축하고 있다. 결국 북아프리카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이러한 광대한 주제와도 연관이 있으므로 좀 지루했다해도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