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장군의 탈라스전투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있었나?

2023. 7. 12. 12:30한국사/중국사

I. 머리말

필자는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이 당나라에서 서역세력-아랍세력과 싸운 탈라스 대평원의 전투가 어디일까 궁금했었다. 기존의 사학계의 주장인 중앙아시아  지역이 아니라면 말이다. 필자는 프랑스지역이 당나라 등의 중국사 지역이라 추정했다. 요즈음 필자는 "발해가 공격한 당나라의 등주가 어디인가?'라는 글을 쓰면서, 고구려계인 서고트왕국의 귀족들이 프랑크왕국(당나라)과 사라센제국(신라) 사이의 전쟁에서 프랑크왕국(당나라)의 편을 든 것을 보고, 고선지 장군의 활동에 대해 궁금해지며, 이에 접근하게 되었다. 아래 고선지 장군의 자료를 보면서 더욱 가능성을 보고, 이글을 쓰게 되었다. 

 

 

II. 고선지에 대한 자료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아래 자료는 필자에게 몇가지 주목을 끌었다. 이들 자료에 대해 검토하면서 고선지 장군의 활동 영역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 고선지 장군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정의

?∼755.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

개설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다.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를 지냈다. 그래서 그를 하서 혹은 안서 출신의 고구려 후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고구려 유민이 사막곡(沙漠曲)으로 많이 유입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고,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詧)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 같은 고구려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 元和姓纂≫에 의한 주(注)를 단 것을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본래 서강인(西羌人)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중국에 동화된 이민족 사이에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욕할 때, 한화(漢化)의 정도를 기준으로 종족적 멸시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한 예가 호장(胡將) 안록산(安祿山)과 가서한(哥舒翰) 사이에서도 보인다.

이와 같이, 고선지는 한화된 호장이나 주변인으로부터 시기를 받을 만큼 빛나는 전적(戰績)을 세웠다. 마지막 참형을 당하였을 때도 그 배후에는 그에 대한 시기가 깔려 있는 듯하다.

 

≪신당서≫ 권135에는 그의 용모가 말쑥하고 수려하여 무장답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사계는 그가 유완(儒緩)한 것에 대해 늘 근심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 영민하고 도량이 넓으며 용감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 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세운 음공(蔭功)을 입어 유격장군이 되었으나 곧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섰다고 하며,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모두 그를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안서군에 있을 때, 절도사 전인완(田仁琬)과 개가운(蓋嘉運)은 그가 장차 큰 재목이 될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뒤 부몽영찰에 의하여 여러 차례 발탁되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개원(開元) 말에 이르러 병력 2,000을 거느리고 톈산 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가, 곧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때문에 기록은 그에 관한 초기의 사적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 : Gilghit)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발탁된다.

토번족 정벌이라는 임무를 띤 그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 : 지금의 Shignan 지방)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이름난 힌두쿠시 준령을 넘고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한 후,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간의 제휴를 단절시켰다.

제1차 원정에서 불름(佛菻 : 동로마)·대식(大食 : 아라비아) 등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사라센 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홍려경어사중승(鴻臚卿御史中丞)에 올랐으며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 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 Tasuhkent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이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자, 이에 분기한 서역 각국과 사라센은 이듬 해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怛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이를 막기 위하여 고선지는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하자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제2차 탈라스 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이 해 11월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이 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확기(彍騎)와 삭방(朔方)·하서(河西)·농우(隴右) 등의 군대였다. 여기에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에서 5만 명을 선발군으로 뽑아 패전한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반란군이 동관으로 쳐들어 오자 본래 방어 지역인 협현(狹縣)을 무단으로 떠나 동관(潼關)으로 이동했는데,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이 사실을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사적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선지 열전이 있다. 이 두 문헌을 두루 살펴볼 때, 소발률(小勃律 : 지금의 Gilghit 부근)과 안서절도사 부몽영찰과의 관계 등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가 ≪신당서≫보다 상세하다.

최근의 고선지에 대한 연구로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 Ed.)가 종래의 중국 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한 후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내어 밝힌 ≪서돌궐사료 Documents Sur les Tou·Kiue Occidentaux≫가 있다. 또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슈타인(Stein)은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또한 세계 최초로 섬유질의 제지법이 고선지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751년 제2차 탈라스 전투에서 이들에게 잡힌 포로 중에 제지장(製紙匠)이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이룩한 빛나는 전과를 통하여 그는 뛰어난 지휘자로서 통솔력과 전술이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① 서역 소발률국을 토벌한 것, ② 당나라와 아라비아가 석국과 탈라스 성을 쟁탈하기 위하여 싸운 격전, ③ 탈라스 전투 이후 제지법이 아라비아에 전파된 것 등은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자료 : 고선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의 자료 내용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 주목을 끈다. 

 

1) 고선지는 사진(四鎭) 절도사, 안서(安西) 절도사를 지냈다.

2) 선임 안서절도사 부용영찰은 서강인(西姜人)이다.

 

3) 일찍이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 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4)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 : Gilghit)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발탁된다.

 

5) 제1차 원정에서 불름(佛菻 : 동로마)·대식(大食 : 아라비아) 등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

 

6)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 Tasuhkent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7)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자, 이에 분기한 서역 각국과 사라센은 이듬 해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怛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750년).  이를 막기 위하여 고선지는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출전하였다.

 

8)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하자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9) 제2차 탈라스 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10)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11) 이 해 11월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12) 이 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확기(彍騎)와 삭방(朔方)·하서(河西)·농우(隴右) 등의 군대였다.

 

13) 여기에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에서 5만 명을 선발군으로 뽑아 패전한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III. 고선지 자료 분석을 통한 활동 영역 분석 

 

상기 주요 내용에서의 지역 명칭을 바탕으로 고선지 장군의 활동 영역을 분석해 보자. 

 

1) 고선지는 사진(四鎭) 절도사, 안서(安西) 절도사를 지냈다.

 

안서절도사는 서역의 안서 사진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절도사이다. 790년에는 토번에게 함락당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안서사진절도사는 서역을 안무하고 쿠처, 소륵(疏勒), 우전(于闐), 언기(焉耆) 4진과 안서도호부를 관할하였고, 24,000명의 인구를 거느렸다....

 

790년, 안서 지역이 토번에게 함락당하였고, ...."

(자료 : 안서절도사, 위키백과)

 

사진은 4개의 진(鎭)을 가진 지역이라는 것이다. 진(鎭)은 바닷가에 있는 수군기지가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요수 가까이 있는 장령진(長嶺鎭) 등의 예이다. (필자의 글,  https://lainfos.tistory.com/137 참조) 

아래 3)의 자료에 의하면, 고선지는 중국의 서쪽에 있는 하서지역의 유민으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공의 서쪽은 바다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서, 서쪽에 있던 토번의 전신인 토욕혼은 서해에 접해 있었다. (필자의 글, https://lainfos.tistory.com/57  참조)  위의 자료에서 토번에게 안서 사진이 함락되었다는 기록은 안서가 이베리아반도 근처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진절도사, 안서절도사 직명으로 보아도 고선지 장군이 활동했던 영역은 중앙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선임 안서절도사 부용영찰은 서강인(西姜人)이다. 부용은 서강인 성이다. 

 

안서 절도사 부용영찰의 부용은 서강인의 성이라 한다. 즉  서쪽의 강족인 지역사람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강족이 사는 강거지역이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라고 추정했다.  (필자의 글, https://lainfos.tistory.com/367 참조).

 

필자는 안라국이 이베리아반도의 안달루시아지역이 아닌가 추정했다. 따라서 안서지역은 안달루시아의 서쪽지역이 아닌가 한다. 즉 안서절도사는 이베리아반도의 서쪽지역을 담당하는 절도사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강거와 강족이 사는 곳이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면, 서쪽의 강족 출신 성을 가진 부용영찰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인 안서지역 절도사가 되는 것이 이해가 간다. 

 

그러면 이 시기의 당나라가 이베리아반도 서쪽(안서)지역까지 차지하고 있었냐가 문제가 된다. 이보다 약 50년전쯤에 측천무후시기가 있었는데, 측천무후시기의 당은 토번과 전쟁을 하였다.  당항, 강주, 청해에서 토번의 가르친링과 전쟁했다 한다. 필자는 당항을 모로코의 탕헤르가 아닌가 추정하였고, 강주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으니, 이 시기의 당나라가 이미 이베리아반도 서쪽을 차지 하지 않았나 추정한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후일  주(周)나라를  건국하는데, 이를 무주라 한다. 그러면 과거 주나라가 이베리아 반도 서쪽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주(周)나라라고 측천무후가 건국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측천무후 시기에 당나라는 토번의 가르친링과 당항(黨項), 강주(康州), 청해(靑海)에서 싸웠다 했다. 필자는 당항이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가 아닌가 추정하였다. (필자의 글, https://lainfos.tistory.com/376  참조). 강주도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다 추정했다.  청해는 바다를 일컫는데, 대서양 아니면 지중해로 추정된다. 즉 주나라는 서유럽에 있었다는 추정이다. 

 

아래에서 보듯이, 중국 주나라시기(BC 1046 - BC 771)의 유럽 지도를 보면, 이베리아반도 서쪽을 포함하고 있다. 

 

Urnfield Culture Period (BC 1300- BC 750) (source : Wikipedia)

 

Europe in late bronze age (BC 1300-BC 700)(source : Wikipedia)

 

3) 일찍이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 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유민으로서 당나라의 서쪽의 강제 이주를 당한 고구려유민의 귀족출신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한편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압록강 이북의 안시성(安市城) · 환도성(丸都城)
( 환도산성하 고분군)등 항복하지 않은 성 11개와 도망한 1)  7개의 성 등과 같이 당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강제 사민을 시행하였다. 이와같이 사민된 자들은 중국 내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한 기사를 예시하면 아래와 같다.
① 총장(總章) 2년 고구려민 3만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옮겼다.
( 신당서』 권220 『고려전』)

②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 농우의 여러 州로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이로부터 안동에 있는 고구려의 구호(舊戶)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突厥), 말갈(靺鞨) 등으로 흩어졌다. ( 『구당서』권199「고려전」)

더욱이 고구려 유민의 강제 사민에 대해서 『구당서』 권5 『고종본기(高宗本紀)·하』 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총장 2년) 5월 경자(庚子) 고려의 호(戶) 2만 8천 2백과 거(수레;車) 1천 8십 승(乘), 우(소:牛) 3천 3백 두(마리;頭), 마(馬) 2천9백 필(匹), 타(낙타;駝) 6십 두(頭)를 옮겨 내지로 들게 하였는데 내주(萊州)와 영주(營州)에서 반차(般次) 발견(發遣)하여 강회(江淮) 이남과 산남(山南), 병주(幷州) 양주 이서(以西)의 여러 주의 공한지(空閑地)에 안치케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이루어진 고구려 유민에 대한 중국 내지로의 사민은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좌절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초치였다. 이와 동시에 고구려 유민의 중국 내지로의 사민은 중국으로의 고구려 문화를 이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총장 2년(669)에 강제 사민 조치 중, 빈약한 자들은 성에 남아 있게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강제 사민된 3만 호의 고구려인은 대부분 고구려의 상층부에 속하는 호민(豪民)일 개연성이 농후하다. 특히 병양주의 감숙방면으로 이주한 유민가운데에는 당제국의 군사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커다란 공적을 올린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이다.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선지(高仙芝)이다. "

(자료 : 유민의 강제적 이주,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 중, 문화원형백과, 한국콘탠츠진흥원, 인용출처 : 필자의 블로그, https://lostcorea.tistory.com/1756 참조)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는 당나라의 서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고선지가 젊었을 때,  하서군, 사진지역, 안서지역으로 이동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후에  안서절도사, 사진절도사가 된 것도 역시 이 서쪽지역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진지역은 바닷가에 접한 수군기지 지역이라 추정한 것은 위에서 언급했다. 따라서 대서양쪽에 접한 프랑크왕국과 이베리아반도지역이 당시 당나라의 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는 현 중공지역을 당나라지역으로 간주하고, 중앙아시아를 서역지역으로 추정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4)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 : Gilghit)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발탁된다.

 

필자는 토욕혼, 토번이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토욕혼은 서해 개국공이라는 직책을 북위 효문제로부터 받았던 것에 기반한 추정이다. 사라센제국은 이 당시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서아시아지역까지 점하고 있던 대제국이었다. 필자는 사라센제국을 신라로 추정한다. 이 당시의 비잔틴제국도 통일신라로 필자는 판단한다. 따라서 위의 747년 토번과 사라센제국의 동맹은 신라와 토번의 동맹으로 판단된다. 신라가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하여, 고구려로 추정되는 서고트왕국의 영토인 이베리아반도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 지역에 측천무후시기부터 진출한 당나라와 대결하는 상황으로 보여진다. 이 시기에 고구려 유민세력인 고선지 장군은, 서고트족의 세력으로, 당나라인 프랑크왕국 편에 서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프랑크왕국 역사에서도 이 시기 사라센제국과의 전쟁에서 서고트세력의 도움을 프랑크왕국이 받았다고 기록된다.  즉 필자이 추정이 이 지역의 역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선지징군의 활동영역을 중앙아시아로 추정하는 기존 역사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나라를 현 중공지역으로 추정하는 것이 틀렸다는 방증이다. 

 

5) 제1차 원정에서 불름(佛菻 : 동로마)·대식(大食 : 아라비아) 등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

 

당히 충격적인 내용이다. 고선지장군이 불림과 대식의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특히 불림이란 나라는 아래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로마제국이나 이탈리아 지역이라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로마지역까지 왔다는 것은 너무 긴 원정이고 불가능해 보인다. 즉 이 내용은 고선지장군이 활동했던 당나라가 중공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프랑스지역이라는 것을 말한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대식국은 아랍국이고 사라센제국이다. (아래 자료 참조) 당시 사라센제국은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 이태리반도,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당시 당나라는 필자는 프랑스지역과 이베리아반도 일부를 점한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불림이라 불리는 이태리지역을 점할 수 있다. 진흥왕 시기의 신라의 일부로 판단되는 롬바르디지역을, 당나라로 추정되는 프랑크왕국은 이후 샤를마뉴 황제 시기에 흡수 점령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고선지장군이 이룩할 수 있는 업적이다. 그러나 상기 72개국의 항복 표현은 다소 과장된 면도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다음 3곳을 가리켰다. 첫째는, 로마령 서아시아와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뜻하였다. 이란어의 Frōm, Hrōm Pōrum, Hrūm과 알타이어의 Purum등의 한자 음역(音譯)이며, '普嵐·伏盧尼·拂懍’' 등으로도 기록되었다. 둘째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의 북부, 발흐 동쪽의 요충지 푸룸(Purum)을 가리킨다. 셋째는 원(元)나라 초엽에 이탈리아를 가리킨 명칭이다."

(자료 : 불림, 두산백과)

 

"당ㆍ송시대의 중국인이, 좁은 의미로는 아랍, 넓은 의미로는 이슬람 교도를 부른 명칭. 본래는 페르시아어로 아라비아인을 나타내는 타지크, 타지의 음역이었는데, 아랍 정복 이후의 페르시아인 이슬람 교도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또한 터키족이 페르시아인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타지크를 이용한 것에서, 이슬람 교도 일반도 의미하게 되었는데 후에 거의 동의어인 회회(回回)라는 말이 일반적이 되어서 이 말은 없어졌다. "

(자료: 대식, 종교학대사전)

 

즉 대식은 아랍을 뜻하고, 이는  이슬람교도를 뜻하며, 후에는  '회회'라는 말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회회 
(回回)

[회회/훼훼]

명사

  • 1 회흘’의 다른 이름.
  • 2 중국 당나라 때에, 사라센인을 이르던 말.  <네이버 국어사전>

 

네이버 국어 사전에 의하면,  회회는 회흘의 다른 이름이며, 사라센인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①아라비안인을 지칭하는 한자식 표기명. 본래는 대식국(大食國)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짐. 12세기 이후 원(元) 나라에서 이슬람교를 회회교(回回敎)로 개칭한 후 회회는 아라비아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됨. 이들은 고려 시대에 예성강 하구인 벽란도에서 무역을 행하기도 함."

(자료 : 회회, 한국고전용어사전)

 

즉 대식국은 사라센제국을 의미하며, 회회는 사라센인, 이슬람교도를 뜻한다 하였다.  필자는 대식국을 신라로 추정했다.

(필자의 글, https://lostcorea.tistory.com/777   참조)

 

6)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750년 2차 원정에서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을 토벌하고 항복한 석국왕을 장안으로 호송하였다 한다. 여기서 석국은 아래자료에 의하면 강거국이라 불렸다 한다. 필자는 강거국이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석국도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 사라센제국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하자, 위협을 느낀 석국이 당나라인 프랑크왕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를 외면하자, 사라센제국과 연합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고선지 장군이 토벌하고 항복한 석국왕을 장안으로 호송한 것은 사라센제국과 협력하지 못하게 하는 인질의 성격이 있다고 본다. 아래 자료에서도 고선지가 타쉬켄트를 공격하고자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말한다. 즉 석국전투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있었으며, 중앙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국은 북위시대에는 자설국(者舌國), 그 이전에는 강거국(康居國)으로 불리웠으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쉬켄트이다. 그런데 고선지가 타쉬켄트를 공격하고자 했는가에 대한 『신·구당서』 「고선지열전」에서는 관련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자료 : 석국전투, 문화원형백과,  인용출처 : https://lostcorea.tistory.com/1752)

 

즉 석국은 자설국이며, 강거국이라 한다.  필자는 강거국은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 추정했다. 즉  석국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본래 석국은 수(隋) 대업(大業) 연간(605~617)에는 서돌궐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당과 교섭하면서 개원() 초기에 책봉을 받는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점차 강성해지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자 당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파병 요청에 대해 당은 어떠한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그러자 석국은 당에 불만을 품고 신하의 예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고선지는 이슬람세력에 동조하려는 석국을 정벌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당회요』 권99 「석국전」) 이와 관련하여 『구당서』 「이사업전」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보인다.

"천보 10년(751) 이사업은 또 고선지를 따라서 석국을 평정했다. 이 때 오랑캐 아홉 나라와 함께 배반한 돌기시를 쳐부수었다. ""

(자료 : 석국전투, 문화원형백과,  인용출처 : https://lostcorea.tistory.com/1752)

 

필자는 돌궐이 북유럽의 해상세력이라 추정했다.

(필자의 글, https://lainfos.tistory.com/287  참조)

 

기존의 사학계에서 돌궐로 보는 Gokturk는 고구려로 필자는 추정했다.

(필자의 글, https://lainfos.tistory.com/181  참조) 

 

따라서 석국이 수나라 시기에 서돌궐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은 석국이 대서양 바다에 인접한 국가라는 판단이 든다. 수나라는 돌궐의 침입에 골머리를 앓고 공물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들을 대했다. 수나라 시기의 프랑크왕국 시절 돌궐세력은 삭슨족이나 노르웨이 등 북해의 해상세력으로 추정된다. 프랑크역사에서 이러한 역사를 필자는 검토했다. (필자의 글, https://lanfos.tistory.com/233  참조)

 

 

7)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자, 이에 분기한 서역 각국과 사라센은 이듬 해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怛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750년).  이를 막기 위하여 고선지는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출전하였다.

 

서역각국과 사라센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당나라를 공격한 탈라스 대평원 전투 (750)는 유럽에서 어디서 있었는지 아직 필자는 연구하지 못했다.

 

프랑크역사에서는 이 당시 사라센제국과 여러 전쟁을 하였다고 기술된다. 그리고 이후 안사의 난 시기 (755-763)에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있었다. 또한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격(732)과 마도산 공격 (733)도 이 즈음이다. 그래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매우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그래서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안사의 난 분석이 끝난 후 더 잘 알게 될 것으로 믿는다. 또한 이베리아반도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그런데 프랑크역사는 프랑스 지역만의 역사로 한정하여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지역을 연결짓는 전쟁의 역사를 알기 어렵다. 그래서 현재는 차후로 미루고 있는 것이다. 후일을 기약한다. 

 

 

8)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하자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기존 사학계에서는, 갈리록(karluk)은 중앙아시아의 한 부족국가로, 다른 15개 부족이 모여 철륵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철륵은 정령(丁零), 고차(高車)로도 음차되었다.

 

필자는 모돈선우가 정벌한 북쪽의 정령, 혼유, 격곤 등이 중부유럽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했다. 정령은 실위의 조상이라 한다. 그런데 거란의 별종이라는 실위는 북유럽에 있었다 필자는 추정했다.

(필자의 글, https://lostcorea.tistory.com/1703  참조) 

 

따라서 위의 당나라와 동맹을 한 카를루크도 유럽의 북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탈라스전투도 서유럽에서 있었고, 중앙아시아에서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9) 제2차 탈라스 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림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탈라스전투이후 하서절도사로 전임한 것을 보면, 탈라스전투가 이베리아 반도 서쪽에서 있었지 않나 추정된다. 하서는 황하강의 서쪽으로 해석되는 바, 프랑스의 르와르강의 서쪽인 Aquitaine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와 관련이 깊으며, 서고트왕국인 고구려와도 깊은 관련 있는 지역이다.  

 

우림군(羽林軍)은 황제의 친위대라 한다. 이에 임명된 것은 당현종의 신임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우림군은 하늘군사 별자리이다. 병영 별자리를 의미하는 루벽진 앞에 위치한다. 임금의 친위군이라고도 하며, 군대의 기마대를 주관하기도 했다."

(자료 : 45성 우림군 하늘군사별자리, 문화원형백과)

 

10)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밀운군은 아래 자료를 보면 어양군, 영주(迎州) 등으로 언급된다. 어양 지역 이름은 고구려때 정복한 지역이기도 하다. 후한, 고구려, 고려, 조선 등의 지명으로 언급된다. 조선시대에는 의주와 평양을 연결하는 구실을 하였다 한다.

 

영변의 고구려때 이름이 밀운군(密雲郡)이라 한다. (아래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자료 참조).  평안북도 영변은 『택리지』에 “영변부는 산세를 따라서 성을 쌓았는데 가파르고 험하여 철옹성이라 부르며, 평안도 전체에서 외적을 방어할 만한 곳은 오직 여기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다.

 

즉 밀운군의 산세가 험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 고려, 조선 등의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한민족의 활동 영역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부 점한 당나라에서 고선지장군을 밀운군공으로 봉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압록수로 추정하는 프랑스의 론강쪽의 험한 산세를 고려하면 알프스에 가까운 지역이 아닌가 한다. 

 

"밀운군(密雲郡)은 남북조 시대에 세워진 중국의 옛 군이다.

황시 2년 후한대에 버려졌던 어양군의 옛땅을 개척하여 신설한 군으로.."

 

(자료 : 밀운군, 위키백과)

 

"영주(迎州)는 본래 고려의 밀운군(密雲郡, 또는 安朔)이었는데, 970년(광종 21) 연주(延州)로 고쳐 지주(知州)로 삼았고, 성종 때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공민왕 때 연산부(延山府)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종 때 도호부를 설치한 적이 있으나 세종 때 무산과 합쳤다. 영주는 청천강 하류에 위치하여 의주와 평양을 연결하는 구실을 하였다. 세조 때 이곳을 떼어 운산(雲山)에 붙인 적이 있으나 위치상 월경지(越境地)가 되어 뒤에 영변으로 환원시켰다."

 

(자료 : 영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평안북도 영변은 『택리지』에 “안주 동북쪽은 영변부다. 영변부는 산세를 따라서 성을 쌓았는데 가파르고 험하여 철옹성이라 부르며, 평안도 전체에서 외적을 방어할 만한 곳은 오직 여기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변의 고구려 때 이름은 밀운군(密雲郡)이다. 고려 초에 연주와 무주로 분리하였으며 공민왕 15년(1366)에 연산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세종 11년(1419) 때다.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묘향산에 임시 보관한 일이 있고, 인조 2년(1624) 이괄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곧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자료 :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1) 이 해 11월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755년 11월 안록산이 범양에서 난을 일으켰다. 범양은 유주에 속하며, 자고로 연나라 사람들이 있던 지역이다. 그래서 안록산이 연(燕) 황제를 칭한지도 모른다. 유럽에서는 Allemannia가 연나라 지역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지역이다. 안사의 난 시기에 프랑크왕국에서는 동부와 남부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 났다. 고선지의 연구는 안사의 난과도 연관이 된다. 안사의 난에 대해 연구 중인데, 이것에 대해 글을 쓴 후 보다 고선지의 유럽활동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2) 이 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확기(彍騎)와 삭방(朔方)·하서(河西)·농우(隴右) 등의 군대였다.

 

비기, 확기는 당나라 군편제의 일종이라 한다. 확기는 장안의 방위만을 위한 일종의 민간인 부대 성격이다. 1년 2차례, 각 1개월씩 교대로 복무하였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4.2. 확기(彍騎)

개원 13년(725년), 당시의 중서령이자 병부상서를 겸임하던 장열(張說)은 기존의 부병제 체제 하에서 조정으로 올라와 숙위하던 것을 폐지하고 대신 이를 전담하는 부대를 창설하자고 건의한다. 이것이 확기이다. 이 확기의 창설은 부병제 유지를 위한 마지막 시도라 할 수 있다.

확기의 대상 인원은 장안 일대 여러 주의 절충부 소속 12만여 명이었다. 특히 장안이 속해 있는 경조부에서 절반 이상, 즉 6만 6천에 달하는 인원이 확기로 귀속되었다. 즉 확기라는 부대는, 이들 수도 근방의 절충부들을 별도로 관리해 국경 방위의 부담을 배제하고 오로지 당의 수도, 즉 장안의 방위만을 전담케 한 것이다. 기존 부병제처럼 1년에 2차례에 걸처 장안으로 상경해야 하는 부담은 여전했지만 대신 머나먼 국경으로 갈 필요는 없어졌다. 또한 그외의 지방의 절충부에서는 장안으로 상번하는 부담을 없애고 오로지 상황에 맞게 국경 방위 업무만을 맡도록 하였다. 즉, 장안 및 정권의 수호와 국경 방위 업무를 완전히 분리시켜 각 지역의 절충부들에게 한 가지 부담만을 지게 한 것이다.

1년 2차례, 각 1개월씩 교대로 복무하므로 확기로 인해 확보된 장안의 평상시 방위 병력은 2만여 명. 과거의 부병제 체제 하에서 상번하여 경비하던 병력의 규정상 규모는 10만에 달했으므로 거의 규모가 1/5로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당 전기 북아금군의 역사에서 보듯 빠져나간 위사(衛士, 장안으로 상번하여 경비하는 병사)의 빈자리는 당 황실의 직속 금군인 북아금군의 확충으로 메꿔지고 있었다. 거기다 기존 부병제 하에서 상번하는 위사들 상당수가 탈영, 즉 배군(背軍)해버리곤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당 초의 장안 방위병력 규모에 비해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얼마나 배군 현상이 만연해 있었는가를 알려준다."

(자료: 당나라군, 나무위키)

 

 

하서절도사는 토번과 돌궐 사이를 단절시키는 책무가 있었고, 양주(涼州)에 설치했다 한다. 즉 토번 주위에 있으며, 양주(涼州)에 설치했다. 서량을 고구려로 언급하는 것으로 본적이 있다. 하서는 필자가 추정한 대서양변 Aquitaine 프랑스지역에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농우절도사는 토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했다 하며, 763년 토번의 공격으로 병탄되었다 한다. 즉 농우지역은 토번과 가까운 지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토번의 전신인 토욕혼이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 추정했다. 

 

 

13) 여기에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에서 5만 명을 선발군으로 뽑아 패전한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경사는 수도를 말한다. 장안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당나라의 장안이 프랑스의 Toulouse가 아닌가 한다. 안사의 난 분석이후 보다 확실해 질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안서절도사와 유사한 지역이 아닌가 생각되는 안서도호부라 하면, 보통 현 중공의 서부를 말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이들 지명이 고려시대에 있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시기에 따라 소재지의 변동이 있다. 995년(성종 14) 풍주(豊州)에 설치하였다가 이후 해주(海州)로 옮겼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풍주에 설치된 도호부를 안서도호부라 하지 않지만 이 때 안동·안남·안북 도호부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풍주도호부가 안서도호부로 추정된다. 해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폭지군(瀑池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가 군의 남쪽이 바다에 임하여 있으므로, 해주라 하였다.

983년 12목의 하나였고, 995년 12주 절도사를 둘 때에는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여, 양주(楊州)와 함께 좌우보(左右輔)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4도호를 둘 때, 이름을 바꾸어 해주안서도호부라 하였는데, 1122년(예종 17)에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그 뒤 1247년(고종 34)에 해주목이 되었다."

 

(자료 : 안서도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즉 고려시대의 안서도호부는 1018년 현종 9년에 해주안서도호부라고 하였는데, 해주는 고려 태조 시기 남쪽이 바다에 임하여 있으므로 해주라 하였다는 것이. 이는 현 중공의 안서 도호부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표현이다. 그러나 토번의 병탄을 받은 안서도호부, 안서절도사 지역, 그리고 남쪽이 바다에 접한 해주안서도호부는 필자가 추정한 이베리아반도에서도 일치하는 지형이 된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도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IV. 맺음말

 

이상으로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의 활동 영역에 대해 기존 사학계의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하여 보았다. 동로마제국 또는 이탈리아 반도를 의미하는 불림과 사라센제국을 의미하는 대식 등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은, 좀 과장된 표현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역이 언급되는 것은 고선지의 활동영역이 중앙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필자의 추정에 의한 그동안의 주장을 연결 시키면 이러한 주장도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즉 필자의 대서양에 접한 당나라의 주장이 맞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구나, 하서군, 안서절도사, 사진 절도사 등의 표현도 고선지가 당나라 서쪽의 바닷가에 접한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나라가 현 중공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서양에 접한 프랑스지역에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더구나 토욕혼, 토번이 서해, 청해에 접했다는 표현은 이를 방증한다고 본다. 또한 안서절도사 지역, 안서도호부가 토번에 의해 병탄되옸다는 기록은 이들 지역이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상으로 국내 자료를 통한 고선지의 활동 영역을 추정하는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프랑크역사나 이베리아반도 역사를 통한 그의 활동 영역 분석은 후일로 미룬다. 보다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