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kturk (고(高)씨 튀르크 ?)는 고구려인가?

2022. 7. 1. 09:33한국사/고구려

1. 서 론

본 글에서는 'Gokturk (중공 사학자들은 돌궐이라 주장)가 고구려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페르시아가 신라라 추정했다. 그런데 7세기에 백제와 신라,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 시기에 Gokturk와 Persia의 전쟁 역사가 서양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돌궐과 신라의 전쟁 역사는 한국사에 없다. 그래서 혹시 Gokturk와 페르시아 전쟁이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이 아닌가 한다. 아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Gokturk의 지배영역을 보면 고구려로 판단되는 흉노의 지배영역과 유사하다.  따라서 충분히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필자는 고구려가 서유럽까지 진출했다고 확신하지만,  동부 아시아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를 설명하려면 이 지역까지의 고구려 진출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식민사학계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중공사학자들이 돌궐이라고 표시하는) Gokturk영역이 고구려가 아닌가 하는 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당나라 역사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말갈과 돌궐로 갔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즉 고구려의 수도를 포함한 일부 지역만을 당나라와 신라가 정복하고 타 지역은 정벌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유연과 장수왕의 지두우 도모에 대한 글에서  유연이 말갈족이 아닌가 필자는 추정했다. 말갈은 고구려와 동일체 국가는 아니지만 거의 고구려의 부속국처럼 같이 움직인 사실이 역사에 여실히 나타난다. 따라서 말갈처럼 돌궐도 고구려의 한부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래 지도에서 Gokturk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여 준다. 즉 고구려가 광개토태왕 시 서유럽까지 진출했다가  이후 점차 동쪽으로 밀려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당나라와 돌궐의 관계는 당나라 후반기에 직접적 전쟁을 한다. 그래서 당나라를 프랑스지역의 프랑크왕국 지역으로 추정하는 필자로서는 중공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돌궐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돌궐에 대한 의문은 후에 다시 검토하기로 하고, 본 글에서는 Gokturk가 고구려인가에 대해 초점을 두어 분석하고자 한다. 

 

AD  600년의  Gokturk영역 (자료 : Wikipedia)

 

 

훈족의 지배 영역 (자료 : Wikipedia)

 

 

Map of First Turk Khagnate (552-603) (source : Wikipedia)

 

 

2nd Turkic Khaganate (652-744)  in AD 720 (source : Wikipedia) By User:पाटलिपुत्र - Background: Natural Earth. Free vector and raster map data @ naturalearthdata.com,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19446699

 

2. 페르시아 - Gokturk 전쟁

페르시아-Gokturk의 전쟁은 Wikipedia자료에서 3차에 걸쳐 기록된다. 1차는 588-589년 기간 동안, 2차 전쟁은 606-608년 기간 동안, 3차 전쟁은 627-629년 기간동안이다. 이 기간 동안 신라는 진평왕 시기(재위 579-632)이다.  고구려는 평원왕 (재위 : 559-590), 영양왕 (재위 : 590-618), 영류왕 (재위 : 618-642) 기간이다. 또한 백제도 관련이 있는데, 이 시기의 백제는 무왕 시기 (재위 : 600-641)이다. 

 

1) 1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 (588-589) 

 

먼저 1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우선 위키피디아 자료를 먼저 살펴 보고, 이에 해당하는 시기의 신라, 고구려의 상황을 검토하고자 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이 전쟁은 페르시아 사산왕조와 Gokturk의 영향하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Hephthalite의 전쟁이다. 전쟁의 동기는 사산왕조의 알렉산더라 할 수 있는 Khosrow I (재위 : 531-579) 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위해 한 전쟁이다.

 

AD 557년 사산왕조의 호스로1세는 Turks와 연합하여 Hephtalite를 공격하여 Oxus강(=아무다리야강)을 경계로 Turks와 양분하여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588년 튀르크 칸 Bagha Qaghan 은 Hephtalites와 연합하여 사산왕조가 점령한 Oxus강 남부지역을 공격한다.  그리하여 Talaqan (아프카니스탄 북동부 경계지역), Badghis (아프카니스탄 북서부 경계지역)  Herat (아프카니스탄의 북서부 호라산의 중심도시) 등의 도시들을 점령한다.

 

이에 대응하여 사산왕조의 Bahram의 군대는  588년 4월 Hyrcanian Rock 전투에서 Turks와 Hephtalites의 대군에 대승한다. 그리고 이어 589년 Balkh을 점령하여 Turk의 보물과 칸의 금관을 취한다. 그리고 Oxus강을 건너 Turks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Turks의 왕 Bagha Qaghan을 사로 잡아 죽이고 부하라 근처인 Baykand까지 진군한다. 그리고 죽은 Turks 칸의 아들 Birmudha를 생포해 수도 크테시폰으로 압송했다. 그러나 Birmudha는 Bahram에게 다시 보내져 Transoxiana로 보내진다. 이리하여 사산왕조는 사마르칸트, Chach 등의 소그디언 도시들을 지배하게 된다. 

 

아프카니스탄의 Herat 도시의 위치

 

이제 이에 대응하는 신라와 고구려의 상황을 살펴 보자 

 

아래 신라 진평왕 자료를 보면 586년 천둥과 벼락이 쳤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587년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588년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다고 기록된다. 즉 신라에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있었다는 판단이다. 삼국사기 기록은 날씨를 비유해 상황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고려시대 신라 출신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라 신라에게 불리한 내용은 특히 그렇게 묘사한다. 587년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났다는 것은 망명한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설명이 별로 없는 것이 아쉽다. 588년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은 것도 이상하다. 정변이 아니면 전쟁으로 죽을 수 있다. 원광법사가 589년 진(陳, 남조, 557- 589 존재)에 들어 갔는데, 진나라가 망한 해이다. 즉 남조의 진나라가 망할 시기에 신라의 상황이 매우 안좋았다는 것이다. 

신라와 남조 진나라는 진흥왕 시기부터 교류가 많았다. 필자는 중국 남북조의 역사 기록을 수상하게 판단한다. 내용이 부실하고 의도적인 깎아내리기 식의 서술이 많다. 중국 사가들이 비한족에 대해 흔히 하는 역사 기록 방법이다. 즉 남북조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이것이 주 목적이 아니므로 일단 넘어가는데, 남조 진나라의 역사가 신라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특히 남조의 진나라는 한수(漢水) 유역을 북주에 정복당했다고 기술된다. 한수(漢水)에 대해 중국사가 언급한 예이다. 어쩌면 한수(漢水)는 그래서 프랑스의 르와르강일지도 모른다. 즉 한(漢)나라가 있던 지역의 강이란 말이다. 

 

반면 588-589 기간의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에 관한 내용에서는 페르시아의 승리가 있었으므로 이 기록을 보아서는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프랑스 론강의 서쪽에 있는 남조의 진나라에 관한 신라의 급박한 사정으로, 동쪽의 페르시아 국경 이야기는 도외시 될수도 있다. 

 

-신라 진평왕 (재위 : 579-632) 삼국사기 자료 중 588-589 시기 내용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AD 586)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AD 587)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AD 588)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AD 589)

(자료 :진평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자료 인용)

 

 

그럼 고구려의 기록은 어떠한가? 고구려의 기록도 586년 장안성으로 천도한 기술이 먼저 눈에 띤다. 필자는 장안을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있는 마드리드 또는 코르도바 정도로 추정한다.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즉 서고트왕국(476-711)이다.  그리고 대비하고자 하는 기간 587-589년 기록은 공백으로 되어 있다. 김부식이나 일제가 기록을 지운 것으로 판단된다. 590년 진이 멸망한 소식을 듣고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한다고 기록된다. 즉 고구려의 기록도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에 관한 기록에 대해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단지 신라나 고구려 모두 중국사의 남북조 지역에 관련된 기록뿐이다. 

 

- 고구려 평원왕 (재위 : 559-590) 삼국사기 자료 (588-589)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586)

587-589 : 3년 공백

三十二年 진이 멸망한 소식을 듣고 수의 침입에 대비하다 (590)

(자료 : 평원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자료 인용)

 

백제의 기록을 참고로 보아도 588-589 기록은 별 내용이 없다. 587-588 기록은 공백으로 되어 있어 고구려사 (587-589 공백)와 같이 누군가 지워서 공백으로 남긴 것 같다. 

 

- 백제 위덕왕 (554-598) 삼국사기  588-589 기간 기록 

 

三十三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586)

587-588 : 2년 공백

三十六年 수가 진을 평정하다 (589)
三十六年 수의 배가 탐모라국으로 표류하다 (589)

590-591 : 2년 공백

三十九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592)
四十一年冬十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594)

595-597 : 3년 공백

(자료 : 위덕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자료 인용)

 

즉 1차 페르시아 튀르크전쟁 관련하여서는 신라와 고구려의 기간에는 모호한 표현과 공백으로 남아 있어 판단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2) 2차 페르시아-튀르크 전쟁 (606-608)

 

2차 페르시아 튀르크전쟁은 606-607년 기간에 걸쳐 일어 나는데, 튀르크, 헤프탈리트 연합군이 다시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침략함으로서 발발한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언 장군 Smbat IV Bagratuni 의 승리로 607년 끝나게 된다. 606년 튀르크, 헤프탈리트 대군이 동부 페르시아 Tus 도시를 침략했는데,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2000의 정예 중기병, Aswaran으로 이들을 물리친다. 튀르크, 헤프탈리트군은 왕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는데, 30만명에 달했다는 과장된 기록도 있다. 이들 병력은 호라산지역을 유린하고 Tus요새를 함락시키고, Isfahan까지 공격한 후 철수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군은 동부 페르시아군을 다시 정비하고 결국은 튀르크 헤프탈리트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백병전 속에 적의 리더를 죽였다. 리더 장수를 잃은 튀르크 헤프탈리트군은 사기를 잃고 무질서하게 후퇴하게 되었고, 페르시아군 Aswaran 정예 중기병들은 이들을 추격하여 많은 적군을 섬멸했다. 즉 2차 전쟁도 페르시아군의 승리로 끝난다. 

 

 

Iran에서의 Tus도시와 Isfahan 의 위치 

 

 

이에 대한 신라와 고구려의 상황을 살펴 보자. 

 

신라 자료를 보면 비록 606-607년 기간은 공백으로 되어 있으나, 608년 고구려의 침입역사가 기록되었다.  608년 원광이 걸사표를 지었다. 그리고 북쪽에서 고구려의 침입으로 신라는 우명산성을 잃었다고 기록된다. 이 기록은 2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 기록과 연관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고구려가 신라 북쪽에서 공격하는 지리적 여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에서는 이란 깊숙히 Isfahan까지 튀르크군이 진출하는 것으로 보아 튀르크군의 승리로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의 우명산성 함락이란 승리와 유사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튀르크 페르시아 전쟁에서 튀르크는 고구려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이 당시의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라고 추정한 바 있다. 

 

- 신라 진평왕 시기 삼국사기 자료 (606-608)

二十七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AD 605)

606-607 : 공백
三十年 원광이 걸사표를 짓다 (AD 608)
三十年春二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AD 608)
三十年夏四月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빼앗다 (AD 608)
三十一年春一月 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AD 609)

(자료 : 진평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자료 인용)

 

고구려 자료를 보면 신라 북쪽에서의 전쟁 기록외에 607년 돌궐 극한 처소에서 고구려 사신과 수양제가 마주쳤다는 기록이 있다.  즉 돌궐의 위치가 어디인지 의문이지만 고구려와 수나라가 돌궐과 서로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즉 수나라가 고구려를 612년 공격하기 앞서, 주변국과의 동맹 또는 비적대국으로 삼기 위한 외교전을 고구려와 수나라가 돌궐에서 펼쳤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해 돌궐의 위치가 위 지도에서 말하는 Gokturk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고구려와 수나라는 요수를 사이에 두고 큰 전쟁을 했다. 필자는 요수는 프랑스 론강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와는 거리가 멀다. 필자는 돌궐이 북유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요수인 프랑스 론강을 두고 좌우에서 대치하는 세력간 싸움에서  그 남쪽이나 북쪽의 세력이 상대방과 연합하는 것이 두려운데, 남쪽은 백제나, 신라가 될 것이고, 따라서 자연적으로 북쪽의 세력이 돌궐의 세력이 된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 등의 지역일 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은 상기 2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과 관련된 것일 수 있다. 동시에 고구려는 백제와의 전쟁도 겸하고 있다. 즉 남쪽의 백제, 남쪽의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이로 인해 신라와 백제가 수나라와 연합하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즉 고구려는 프랑스의 론강 북쪽에서 페르시아 북쪽에 이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위의 Gokturk지역이 고구려 지역이라는 것에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고구려  영양왕 (재위 : 590-618) 시기  606-608 기간 자료

 

十四年秋八月 신라 북한산성 공격에 실패하다 (603)

604-606 : 3년 공백

十八年 고구려 사신과 수 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치다 (607)
十八年夏五月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十九年春二月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608)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608)

609-610 : 2년 공백

二十二年春二月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다 (611)

(자료 : 영양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자료 인용)

 

2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은 튀르크가 페르시아 깊숙히 쳐들어 왔다가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었다. 즉 튀르크의 승리라는 것이다. 나중에 페르시아가 일부 반격을 하여 일부지역을 회복한 것을 놓고 승리했다고 기록된 것이라 추정된다. 따라서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을 침범해 우명산성을 취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다만 백제의 기록은 관련된 것이 없고, 고구려가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가 수나라와 연합할 지 고민하는 모습을 아래 백제 기록은 보여 준다. 백제 기록에서는 수나라 사절이 왜에도 간 것을 기록하고 있다. 즉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앞서 돌궐, 왜, 신라, 백제와 외교를 먼저 하면서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백제는 611년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한 것으로 기록되어, 고구려와 연합으로 신라, 수나라 연합에 대항할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611년 수나라에 사신(국지모)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하기도 하는 양다리 외교를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위세가 매우 강했음을 엿볼 수 있다. 

 

-백제 무왕 (재위 : 600-641) 시기 607-608 자료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605)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토우)가 내리다 (AD 606)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AD 606)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AD 607)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08)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AD 608)

609-610 : 2년 공백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11)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611)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AD 611)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611)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612)

(자료 : 무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자료 인용)

 

3) 3차 튀르크 페르시아 전쟁 (627-629)

 

3차 튀르크 페르시아 전쟁은 서곡튀르크칸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인데, 기존의 2차에 걸친 전쟁과 다른 것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전쟁이 아니라 Transcaucasia지역에서의 전쟁이며, 여기에 비잔틴제국이 곡튀르크와 연합하고,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아바르(Avars)와 연합한다는 점이다. 627년 서곡튀르크칸국의 Tong Yabghu와 비잔틴제국의 Heraclius 황제에 의해 전쟁은 일어 난다. 이는 그동안의 비잔틴제국-사산왕조 페르시아 간의 전쟁이 주 원인이었으며, 이 전쟁으로 인해 향후 수백년동안 다가오는 중동에서의 힘의 균형을 변형시키는 드라마틱한 이벤트들 (니베아전투, 이슬람의 페르시아 장악)의  전조가 되었다. 아바르와 페르시아에 의한 최초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격에 이어, 비잔틴제국의 Heraclius 황제는 고립되게 되었다. 그는 Orthodox Church때문에 Transcaucasia의 아르메니언 기독교세력에 의존할 수도 없었고, 종교적으로 더 관용적인 페르시아에 더 친근함을 갖는 Iberia왕 (transcaucasia 지역)에게 의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결국 Tong Yagbhu와 연합하게 된다. 이는 568년이래 Istami 튀르크왕시대부터 실크로드를 무역로를 둘러싸고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비잔틴과 튀르크칸국이 맺은 연합의 연속인 것이다.

 

625년 비잔틴의 Heraclius 왕은 튀르크칸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주면 반대급부로 상당한 부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한다. 튀르크칸국은 그동안 2차 페르시아-튀르크전쟁으로 페르시아에 의해 막힌 실크로드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튀르크칸국은 1000명의 기병을 페르시아 트랜스코카시아지역을 지나 비잔틴제국의 아나톨리아에 보내, 기꺼이 비잔틴제국의 복수를 위해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627년 초, 곡튀르크칸국과 카자르 동맹군은 Derbent에 있는 Caspian Gate (일명 알렉산더 철문)에 접근했다. 이 Caspian Gate는 남쪽의 기름진 아그바니아땅(현대의 아제르바이젠)으로 통하는 코카서스산맥을 지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아그바니아의 경무장 소수의 병력은 중무장 기병으로 이루어진 Tong Yabghu의 군대를 당할 수 없었다. 곡튀르크와 카자르 연합병력은 Derbent시를 유린하고 Aghvania지역을 완전히 파괴했다. Derbent 요새의 함락은 Aghvania에게는 완전한 패닉을 불러왔다. 아그바니아군은 코카서스산맥에 있는 수도인 Partav로 물러났으나, 곡튀르크와 카자르동맹군은 Kalantatuyk 근처에서 이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이들 지역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곡튀르크와 비잔틴의 다음 목표는 Iberia 왕국 (코카서스산맥 북쪽지역)이었다. 이는 사산왕조 페르시아 호스로 2세왕의 부용국이었다. 유명한 쾌락의 무역도시 트빌리시는 카자르군이 포위하고, 여기에 비잔틴의 Heraclius가 합세했다. Heraclius와 Tong Yabghu는 Narikala의 성벽아래에서 만났다. 거의 두달동안 포위하였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자, 카자르군은 겨울에 다시 오겠다고 하며, 초원으로 돌아 갔고, Tong Yabghu도 그의 젊은 아들(또는 조카, Boris Shad)에게 4만군사를 Heraclius를 도와 주라고 맡기고 떠났다.

 

결국 비잔틴의 Heraclius는 627년 12월 12일 티그리스 강둑에 나타났고, Nineveh에서 페르시아 군과 부딪히게 되었다. 1월에는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의 근교에까지 유린했다.  Heraclius의 승리후에 Tong Yabghu는 Tiflis (=Tbilisi의 옛이름)를 다시 포위하여 겨울에 큰 타격을 주었다. Tong Yabghu는 Tiflis를 자신들의 영토로 경영하는 것을 원했으므로, 지역의 지도자, 주민들을 살려 주고 곡튀르크의 속민으로 삼기를 원했다. 630년 4월 Boris Shad는 더 넓은 Transcaucasia 지역의 지배를 위하여, 아르메니아지역까지 3만의 기병으로 침략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온 페르시아의 만명의 군대는 이들에 의해 무참히 패퇴되었다. 그리고 유목민의 군대가 하는 것처럼 그들은 다시 초원으로 물러갔다.

 

 

이러한 3차 상황에 대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상황을 검토해 보자.

먼저 신라의 자료를 보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기록된다. 606년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고, 627년 백제가 두성을 습격해 함락시켰다 기록되었다. 또한 627년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왔다고 기록해 당시의 신라 상황이 매우 안좋음을 나타낸다. 628년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였다고 기록된다. 629년에는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신라, 고구려, 백제가 어우러져 싸우는 모습이 3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상황과 닮아 있다. 

 

이는 3차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은 주로 비잔틴의 Heralius (백제의 무왕 추정)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신라)의 전쟁이라는 점과 일치한다. 그리고 여기에 비잔틴의 지원을 요구받은 Western Gokturk와 Khazar가 합세한 전쟁이었다.  필자는 '후백제의 견훤은 불가리아1제국의 Simeon I왕인가?' 하는 글을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에 이미 올렸다. 여기서 서곡튀르크지역과 카자르지역은 흑해위와 흑해위의 우측 지역으로 고구려지역, 즉 후고구려지역, 왕건, 궁예의 지역임을 밝혔다. 즉 본 글의 Gokturk지역이 고구려라는 것을 말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즉 시기적으로 전후에서 모두 같은 결론에 달한다는 것은 본 분석의 올바름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 신라 진평왕 시기 627-629 삼국사기 자료


四十八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6)
四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다 (AD 626)
四十八年 고허성을 쌓다 (AD 626)
四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오다 (AD 627)
四十九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四十九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다 (AD 627)
四十九年秋八月 서리가 내리다
四十九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五十年春二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AD 628)
五十年 크게 가물어서 비를 빌었다
五十年 백성들이 굶주리다 (AD 628)
五十一年秋八月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AD 629)
五十一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9)

(자료 : 진평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아래 고구려 자료는 627년 공백이외에 별 내용이 없다. 단 신라 김유신이 고구려의 방비성을 쳐부수었다 기록하여, 고구려가 3차 튀르크 페르시아 전쟁과 관련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 고구려 영류왕 (재위 : 618-642) 자료 627-629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626)

627 : 공백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628)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629)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629)

630 : 공백

 

백제 무왕의 기록을 보면 627년 신라의 서부 변경의 두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된다. 코카서스산맥지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서부 변경이 된다. 그리고 가잠성은 여러 번 격전의 대상이 된 전략적 지역의 성이다. 실제 코카서스의 Derbent성도 코카서스산맥을 지나는 요충지이다. 또한 트빌리시 도시성도 그렇다.  따라서 이 부근이 가잠성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은 비잔틴제국 (백제), 사산왕조 페르시아 (신라), 코카서스산맥 북쪽의 Gokturk(고구려)의 삼자가 접하는 지역이다. 필자는 3차 페르시아 곡튀르크 전쟁에 참여한 코카서스산맥 동쪽의 Avars(페르시아 동맹)는 현재 Dagestan 지역으로서,  우리 전통문화인 줄타기, 등의 사당패 문화가 보존된 지역이라고 글,' 춤으로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을 쓴 바 있다.  즉 우리의 역사가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3차 페르시아 튀르크전쟁이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란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또한 곡튀르크가 돌궐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해 준다. 

 

- 백제 무왕 (재위 :  600-641)   627-629 시기 자료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626)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6)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27)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627)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628)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9)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630)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AD 630)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AD 630)

(자료 : 무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이상으로 살펴 본 3차에 걸친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의 역사를 우리의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Gokturk가 돌궐이 아니라 고구려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훈족의 지배지역의 지도와 Gokturk지배 지역이 일치하는 것은 고구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가잠성은 코카서스산맥 지역의 Derbent이나 Tbillisi 일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또한 고구려인 고씨의 튀르크족 Gokturk가 대서양까지 진출한 고구려의 일부로서 점차 동부로 이전하며 쇠퇴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이러한 견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유전자 연구를 아래 인용한다. 즉 2018년 Nature지에 실린 유전자 연구에 의하면, Gokturks는 동아시아 조상의 유전자를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 접촉함에 따라 유럽인의 유전자도 발견되나, Gokturk에 이어진 중앙아시아 튀르크 유전자에서는 더욱 높은 동아시아 조상의 인자가 나타난다고 했다. 즉 소수의 동아시아 원천의 지배층이 중앙아시아의 튀르크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Genetics

A genetic study published in Nature in May 2018 examined the remains of four elite Türk soldiers buried between ca. 300 AD and 700 AD.[56] The extracted samples of Y-DNA belonged to haplogroup Q (sample DA86),[57] haplogroup R1 (samples DA89,[57] DA224) and Haplogroup O (sample DA228[58]).[59] The extracted samples of mtDNA belonged to C4b1 (sample DA86), A14(samples DA89), H2a (samples DA224) and A15c (sample DA228).[60] The examined Türks were found to have more East Asian ancestry than the preceding Tian Shan Huns. Evidence of European ancestry was also detected, suggesting ongoing contacts with Europe. Succeeding Turkic states of Central Asia displayed even higher levels of East Asian ancestry, indicating that the Turkification of Central Asia was carried out by dominant minorities of East Asian origin.[61][62]

(source : Gokturks, Wikipedia)

 

--------- 참고 자료 -------------------------------------------------------------------------------------------

1) First Perso-Turkic War (588-589)

The First Perso-Turkic War was fought during 588–589[4] between the Sasanian Empire and Hephthalite principalities and its lord the Göktürks. The conflict started with the invasion of the Sasanian Empire by the Turks and ended with a decisive Sasanian victory and the reconquest of lost lands.

Background

In 557, Khosrow I (r. 531–579), the king (shah) of the Sasanian Empire, who had greatly increased the authority of his empire, decided to put an end to the Hephthalite Empire domination over Central Asia. He thus allied with the Turks in order to defeat the Hephthalites. The campaign was successful and the region north of the Oxus went to the Turks whilst the south came under Sasanian rule. An agreement was established between Khosrow I and the Turkic Khagan Istämi which set the Oxus as the frontier between the two empires.

However, in 588, the Turkic Khagan Bagha Qaghan (known as Sabeh/Saba in Persian sources), together with his Hephthalite subjects, invaded the Sasanian territories south of the Oxus, where they attacked and routed the Sasanian soldiers stationed in Balkh, and then proceeded to conquer the city along with TalaqanBadghis, and Herat.[5]

 

The war

 

In a council of war, Bahram was chosen to lead an army against them and was given the governorship of Khorasan. Bahram's army supposedly consisted of 12,000 hand-picked horsemen.[6] His army ambushed a large army of Turks and Hephthalites in April 588, at the battle of Hyrcanian rock,[7] and again in 589, re-conquering Balkh, where Bahram captured the Turkic treasury and the golden throne of the Khagan.[8] He then proceeded to cross the Oxus river and won a decisive victory over Turks, personally killing Bagha Qaghan with an arrowshot.[6][9] He managed to reach as far as Baykand, near Bukhara, and also contain an attack by the son of the deceased Khagan, Birmudha, whom Bahram had captured and sent to the Sasanian capital of Ctesiphon.[8] Birmudha was well received there, and was forty days later sent back to Bahram with the order that the Turkic prince should get sent back to Transoxiana.[8] The Sasanians now held suzerainty over the Sogdian cities of Chach and Samarkand, where Hormizd minted coins.[8]

Ferdowsi's Shahnameh (C.E. 1010) describes in legendary detail the dealings of Bahram Chubin and the Turkic "King Sawa" before and during the battle in which Bahram with his 12,000 men kills Sawa.[10]

(source : Wikipedia, 인용출처 : 잃어버린 한민족사, 카테고리, Gokturk)

 

2) Second Perso-Turkic War (606-608)

 

The Second Perso-Turkic War began in 606/607 with an invasion of Sassanid Persia by the Göktürks and Hephthalites. The war ended in 608 with the defeat of the Turks and Hephthalites by the Sasanians under the Armenian general Smbat IV Bagratuni.

Context

 

In 606/607, the Turks invaded eastern Persia with a large number of men, but were defeated in the first battle near the fort of Tus in Khorasan by a force of 2,000 Aswaran (elite heavy cavalry). Having lost this battle, the Turks and Hephthalites requested reinforcements from the KhaganSebeos exaggerates that 300,000 troops were sent to reinforce the invading army.

 

This force soon overran Khorasan as well as the fort of Tus with its 300 defenders under prince Datoyean. However, the Turks withdrew after their raids, which went as far as Isfahan. Smbat quickly reorganized the eastern Persian forces and finally crushed the Turks and Hephthalites, reportedly killing their leader in hand-to-hand combat (mard o mard).[3]

 

After the death of their leader, which shattered troop morale, the Turks and Hephthalites retreated in a disorderly manner. The Aswaran pursued them, routed them and killed many.

(source : Wikipedia, 인용출처 : 잃어버린 한민족사, 카테고리, Gokturk)

 

3) Third Perso-Turkic War (627-629)

 

The Third Perso-Turkic War was the third and final conflict between the Sassanian Empire and the Western Turkic Khaganate. Unlike the previous two wars, it was not fought in Central Asia, but in Transcaucasia. Hostilities were initiated in 627 AD by Khagan Tong Yabghu of the Western Göktürks and Emperor Heraclius of the Eastern Roman Empire. Opposing them were the Sassanid Persians, allied with the Avars. The war was fought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last Byzantine-Sassanid War and served as a prelude to the dramatic events that changed the balance of powers in the Middle East for centuries to come (Battle of NinevehIslamic conquest of Persia).

Background

Following the First Siege of Constantinople by the Avars and Persians, the beleaguered Byzantine Emperor Heraclius found himself politically isolated. He could not rely on the Christian Armenian potentates of Transcaucasia, since they were branded as heretics by the Orthodox Church, and even the king of Iberia preferred to befriend the religiously tolerant Persians. Against this dismal background, he found a natural ally in Tong Yabghu.[1] Earlier in 568, the Turks under Istämi had turned to Byzantium when their relations with Persia soured over commerce issues.[2] Istämi sent an embassy led by the Sogdian diplomat Maniah directly to Constantinople, which arrived in 568 and offered not only silk as a gift to Justin II, but also proposed an alliance against Sassanid Persia. Justin II agreed and sent an embassy to the Turkic Khaganate, ensuring the direct Chinese silk trade desired by the Sogdians.[3][4]

 

In 625, Heraclius dispatched to the steppes his emissary, named Andrew, who promised to the Khagan some "staggering riches" in return for military aid.[5] The khagan, on his part, was anxious to secure the Chinese-Byzantine trade along the Silk Route, which had been disrupted by the Persians in the aftermath of the Second Perso-Turkic War.[6] He sent word to the Emperor that "I shall take revenge on your enemies and will come with my valiant troops to your help".[7] A unit of 1,000 horsemen fought their way through Persian Transcaucasia and delivered the Khagan's message to the Byzantine camp in Anatolia.

Siege of Derbent

 
Sassanian fortress in Derbent.

Early in 627, the Göktürks and their Khazar allies approached the Caspian Gates at Derbent. This newly built stronghold was the only gate to the fertile land of Aghvania(modern-day Azerbaijan). Lev Gumilev observes that the lightly armed militia of Aghvania was no match against the hordes of heavy cavalry led by Tong Yabghu.[8]His troops stormed Derbent and swarmed over Aghvania, plundering it thoroughly.The fall and sack of Derbent was described in detail by the Armenian historian Movses Kagankatvatsi, thought to have been an eyewitness to the event:

Like waves in the sea, the Turks fell on the town of Chora (Derbent) and destroyed it completely. Seeing the terrible threat posed by this vile, ugly horde of attackers, with their slanting and lidless eyes, and their flowing hair like that of women, the inhabitants were seized by terror. Especially terrifying were the archers, who were skillful and powerful, and rained arrows down like hail then, like savage wolves, shamelessly threw themselves on the people and mercilessly cut them down in the streets and squares of the town. They did not even take pity on the children who hugged their slaughtered mothers, but sucked the children's blood like milk.[9]

 

The fall of the fortress that had been considered impregnable sparked panic all over the country. Aghvanian forces withdrew to their capital, Partav, from whence they made for the Caucasus Mountains. The Göktürks and Khazars overtook them near the village of Kalankatuyk, where they were either slain or taken prisoner.The conquerors imposed upon Aghvania a heavy system of taxation, as reported by Movses:

The Lord of the North wreaked havoc all over the country. He sent his wardens to deal with artisans of all kind, especially those skilled in washing out gold, extraction of silver and iron, as well as making copper items. He imposed duties on fishers and goods from the great Kura and Aras rivers, in addition to the didrachma traditionally levied by the Persian authorities.[10]

 

Siege of Tbilisi

Gokturk khaganate at their height, c. 600 AD:

  Western Gokturk: Lighter area is direct rule, darker areas show sphere of influence.
  Eastern Gokturk: Lighter area is direct rule, darker areas show sphere of influence.

The next objective of the Turkic-Byzantine offensive was the Kingdom of Iberia, whose ruler Stephanus was a tributary to Khosrow II. In the words of Movses Kagankatvatsi, the Khazars "encircled and besieged the famous and great sybaritic trade city of Tbilisi,"[11] whereupon they were joined by Emperor Heraclius with his mighty army.

Heraclius and Tong Yabghu (called Ziebel in the Byzantine sources) met under the walls of Narikala. The yabgu rode up to the emperor, kissed his shoulder and made a bow. In return, Heraclius hugged the barbarian ruler, called him his son, and crowned him with his own diadem.[12] During the ensuing feast the Khazar leaders received ample gifts in the shape of earrings and clothes, while the yabghu was promised the hand of the emperor's daughter, Eudoxia Epiphania.[12][13]

 

The siege dragged on without much progress, punctuated by frequent sallies on the part of the besieged; one of these claimed the life of their king. After two months the Khazars retreated to the steppe, promising to return by the autumn.[14] Tong Yabghu left young Böri Shad, either his son or nephew, in charge of the remaining forty thousand which were to assist Heraclius during the siege. Before long these departed as well, leaving the Byzantines to continue the siege alone and prompting jeers from the besieged.[15]

 

When the Georgians ironically referred to the Emperor as "the goat," hinting at his incestuous marriage, Heraclius recalled a passage from the Book of Daniel about the two-horned ram overthrown by the one-horned goat. He interpreted this as a good sign and struck southward against Persia. on 12 December 627 he appeared on the bank of the Tigris and clashed with Persian forces near the ruins of Nineveh. In January he ravaged the environs of the Persian capital Ctesiphon, signalling a sea-change in the Persian-Byzantine relations.

 

Conclusion

After the triumph of Heraclius, Tong Yabghu hastened to resume the siege of Tiflis and successfully stormed the city in winter. "With their swords raised, they advanced on the walls, and all this multitude, climbing upon each other's shoulders, rose up the walls. A black shadow fell upon the wobegone citizens; they were vanquished and lost their ground," Movses narrates. Although the Georgians surrendered without further resistance, the city was looted and its citizens were massacred. The Persian governor and the Georgian prince were tortured to death in the presence of Tong Yabghu.[16]

 

The Gokturks, renowned for their expertise in hand-to-hand combat, never excelled in siegecraft. For this reason Gumilev attributes the taking of Tiflis to the Khazars.[17] There are good reasons for believing that this success encouraged Tong Yabghu to grander designs. This time he planned to incorporate Aghvania into his khaganate, rather than to wield a usual campaign of plunder. Before returning to Suyab he instructed Böri Shad and his generals to "spare the lives of the rulers and nobles of that land, in as much as they come out to meet my son, surrender to my rule, concede their towns, castles, and trade to my troops".[18]

 

These words indicate that Tong Yabghu was eager to retain control of the westernmost portion of the Silk Route, as he tightened his grip of its other segments all the way east to China. In April 630 Böri Shad determined to expand his control of Transcaucasia and sent his general Chorpan Tarkhan with as little as 30,000 cavalry to invade Armenia.[19] Using a characteristic ploy of nomadic warriors, Chorpan Tarkhan ambushed and annihilated a Persian force of 10,000 dispatched by Shahrbaraz to counter the invasion.[20] The Turks knew the Sassanid response would be harsh, and so they plundered cities and withdrew their forces back to the steppes.

(source : Wikipedia, 인용출처 : 잃어버린 한민족사, 카테고리 : Gokturk)

 

3. 신라 진평왕 (재위 : 579-632) 기록

 

1. 개요

 

신라의 26대 왕. 연호는 홍제(鴻濟) → 건복(建福).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과 안으로는 왕권 약화 및 정치 불안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신라의 상황을 외교를 통해 극복해내고, 김유신 등의 뛰어난 신하들을 중용해 국가의 기반을 잘 닦아놓은, 신라 상대의 중요한 시기를 이끈 명군이다. 재위 기간 내내 북의 고구려, 서남의 백제의 침략에 시달리는 등 바람질 날은 없었으나, 어쨌든 이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해냈기에 신라가 삼국 시대의 최후 승자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체 스펙이 뛰어나기로도 유명하며, 공주들과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해서 인기있는 왕이기도 하다.

다만, 재위 기간이 워낙 길고, 당대에 김유신김춘추 등을 비롯한 전설적인 화랑들과 정치가 등 우리가 알 만한 삼국통일전쟁 시대의 위인들이 대부분 등장하는 시기라서 그들에 가려져 진평왕 본인은 존재감이 적은 편이다.

 

2. 치세

 

2.1. 즉위

 

영토 개척을 통해 신라의 전성기 기반을 닦은 진흥왕의 장손으로 아버지는 진흥왕의 장남 김동륜이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왕비로는 마야부인승만부인이 있다. 마야부인 같은 경우는 본명이라기보다는 아버지 대부터 작정하고 지은 것. (법륜 역시 의미가 전륜성왕이다.) 백정이란 이름 자체도 실제 인도의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의 이름을 따 온 것이며, 동생에겐 김백반, 김국반이라는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을, 덕만 등에게도 석가모니의 누이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정작 석가모니가 될 왕자가 태어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무려 54년 간이나 그랬던 것.

전왕이자 숙부인 진지왕이 퇴위된 후[5] 꽤나 이른 10대 초반의 나이로 숙부의 왕위를 이었다. 비록 진지왕이 퇴위되고 비정상적인 형태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진평왕은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을 아껴 천명공주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궁의 업무를 총괄하는 내성사신으로 임명하는 등 중용하였다.

 

2.2. 내치

 

진평왕은 즉위하자마자 진흥왕 시대부터의 전쟁 영웅인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고, 580년 2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김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진지왕의 퇴위라는 사건으로 인한 왕권 약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즉위 2년만에 국가의 실권을 그럭저럭 장악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581년 정월에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 583년 정월에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 584년 2월에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고 3월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또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는 등 각종 국가 기관을 설치하고 심지어 연호까지 독자적으로 수립하는 등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정부 부처 설립은 끝이 없어서 586년 정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였고, 591년 2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2.3. 위기와 극복


5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통치했던 진평왕 시기는 국제 정세가 변하가는 시기 속에 있었다. 먼치킨 진흥왕이 백제를 철저히 눌러놓았던 임팩트가 남아서 진평왕의 재위 초기까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평원왕은 진흥왕의 기세에 눌려 죽을 때까지 신라를 침공하지 않았고 백제의 위덕왕도 시도는 몇 번 했지만 딱히 신라에 유효타는 넣지 못했다.

590년 고구려의 온건파 평원왕이 죽은 직후, 그전부터 줄기차게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을 주장해 왔던 강경파 온달이 갓 즉위한 처남 영양왕을 설득하여 진흥왕 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온달이 전사하면서 고구려군은 패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연개소문이 신라가 수나라와 고구려가 싸울 때 죽령 이북을 빼앗아 갔다고 기록하고 있어, 물론 신라가 당항성 쪽으로 중국과 계속 교통하는 것을 봐선 한강 유역 중부지방을 전부 다 빼앗겼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부분은 온달 전쟁 때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일부는 수복했다는 추측도 힘을 얻고 있다.

600년 즉위한 백제 무왕은 602년 4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거의 40년만에 처음으로 신라 침공을 감행하여 아막산성을 침공했으나, 진평왕은 백제군 4만명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603년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진평왕이 직접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에게 동시에 압박을 당하게 되는 중과부적의 상황에 놓인 진평왕은 수양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제 역시 위덕왕 시절부터 줄기차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간청했었고, 아직 고구려와 사이가 나빴던 백제 무왕 또한 수양제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제차 사신을 보내었다.[6][7]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요청과 후방 지원 약속이 조금은 영향을 미쳤는지[8] 611년 4월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다. 612년 정월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고구려의 을지문덕 등의 활약으로 물 말아먹고 끝났다.

한편 백제 무왕은 신라가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때인 611년 10월 얘기치 않게 신라를 기습하여 가잠성을 점령하는 성과를 얻었다(가잠성 전투).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614년까지 후속전이 치뤄졌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잠잠해지자, 616년 무왕이 모란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평왕은 618년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가잠성 전투). 이처럼 620년대초까지 백제와 신라는 치고받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이렇듯 백제, 고구려와의 끊임없는 공방전 속에서 화랑 귀산(602년 사망). 찬덕(612년 사망)과 그의 아들 해론(618년 사망)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진평왕은 고령으로 접어들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진평왕 말년에는 백제 무왕 쪽으로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623년 백제 무왕은 신라 침공을 재개하여 6성을 함락흐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무왕은 626년~627년에도 신라를 침공하여 왕재성 등 3성을 차지, 점점 신라를 압박해 들어갔다.[9]

말년인 630년에는 서라벌에 천재지변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지진이 발생해서 궁궐의 땅이 갈라질 정도였고[10], 631년에는 이를 빌미로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칠숙·석품의 난) 왕은 반란을 미리 알아채고 진압하여 칠숙을 처형하였으며, 석품은 백제로 도망쳤다가 처자식 보려고 몰래 들어오다가 잡혀 죽었다.

신라는 진평왕 시기에 힘을 축적해 비로소 통일신라로 가기 시작했다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진평왕에 대해 많은 전설과 후대 왕들의 존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평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남성 왕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진평왕 본기

 

一年秋七月 진평왕이 즉위하다 (AD 579)
一年秋八月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AD 579)
一年 친동생을 갈문왕으로 봉하다 (AD 579)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AD 580)
二年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다 (AD 580)
三年春一月 위화부를 설치하다 (AD 581)
五年春一月 선부서를 설치하다 (AD 583)
六年春二月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다 (AD 584)
六年春三月 조부와 승부를 설치하다 (AD 584)
七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AD 585)
七年秋七月 지명이 진에 들어가다 (AD 585)
八年春一月 예부에 영 2인을 두다 (AD 586)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AD 586)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AD 587)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AD 588)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AD 589)
十一年秋七月 홍수가 나서 진휼하다 (AD 589)

590 : 공백
十三年春二月 영객부에 영 2인을 두다 (AD 591)
十三年秋七月 남산성을 쌓다 (AD 591)

592 : 공백
十五年秋七月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다 (AD 593)
十六年 수 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AD 594)

595 : 공백
十八年春三月 담육이 수에 들어가다 (AD 596)
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596)
十八年冬十月 영흥사에 불이 나다 (AD 596)
十九年 삼랑사가 완성되다 (AD 597)

598-599 : 공백
二十二年 원광법사가 돌아오다 (AD 600)

601 : 공백
二十四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602)
二十四年秋八月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다 (AD 602)
二十四年秋九月 지명이 돌아오다 (AD 602)
二十五年秋八月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다 (AD 603)
二十六年秋七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604)
二十六年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다 (AD 604)
二十七年春三月 담육이 돌아오다 (AD 605)
二十七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AD 605)

606-607 : 공백
三十年 원광이 걸사표를 짓다 (AD 608)
三十年春二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AD 608)
三十年夏四月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빼앗다 (AD 608)
三十一年春一月 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AD 609)

610 : 공백
三十三年 수에 군사를 청하다 (AD 611)
三十三年冬十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AD 611)

612 : 공백
三十五年 가뭄이 들다 (AD 613)
三十五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AD 613)
三十五年秋七月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다 (AD 613)
三十六年春二月 일선주를 설치하다 (AD 614)
三十六年 진흥왕비가 사망하다 (AD 614)
三十七年春二月 큰 잔치를 베풀다 (AD 615)
三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615)
三十八年冬十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다 (AD 616)

617 : 공백
四十年 해론이 백제와 싸우다 죽다 (AD 618)

619-620 : 공백
四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1)
四十四年春一月 왕이 황룡사에 거둥하다 (AD 622)
四十四年春二月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다 (AD 622)
四十五年春一月 병부에 대감을 두다 (AD 623)
四十五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3)
四十五年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다 (AD 623)
四十六年春一月 시위부에 대감을 두다 (AD 624)
四十六年春三月 당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AD 624)
四十六年冬十月 백제가 6성을 포위하다 (AD 624)
四十七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5)
四十八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6)
四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다 (AD 626)
四十八年 고허성을 쌓다 (AD 626)
四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오다 (AD 627)
四十九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四十九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다 (AD 627)
四十九年秋八月 서리가 내리다
四十九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五十年春二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AD 628)
五十年 크게 가물어서 비를 빌었다
五十年 백성들이 굶주리다 (AD 628)
五十一年秋八月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AD 629)
五十一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9)
五十二年 대궁의 땅이 갈라지다[17] (AD 630)
五十三年春二月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가다 (AD 631)
五十三年夏五月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다 (AD 631)
五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31)
五十三年 흰 무지개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다 (AD 631)
五十四年春一月 왕이 죽다 (AD 632)

 

 (자료 : 진평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잃어버린 한민족역사, 카테고리 : 신라)

 

4. 고구려의 기록

 

1) 고구려 평원왕 (559-590) 기록

《삼국사기》 <평원왕 본기> (559-590)


一年 평원왕이 즉위하다 (559)
二年春二月 북제가 왕을 책봉하다 (560)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560)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사면하다 (560)
三年夏四月 기이한 새가 궁정에 모이다 (561)
三年夏六月 큰물이 나다 (561)
三年冬十一月 진에 조공하다 (561)
四年春二月 진이 왕을 책봉하다 (562)
五年 큰 가뭄이 들다 (563)
六年 북제에 조공하다 (564)
七年春一月 왕자 원을 태자로 삼다 (565)
七年 북제에 조공하다 (565)
八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566)

 

567-569 : 3년 공백


十二年冬十一月 진에 조공하다 (570)
十三年春二月 진에 조공하다 (571)
十三年秋七月 왕이 패하에서 사냥하다 (571)
十三年秋八月 궁실 수리를 중단하다 (571)

572 : 공백
十五年 북제에 조공하다 (573)
十六年春一月 진에 조공하다 (574)

575 : 공백
十九年 주에 조공하니 주가 왕을 책봉하다 (577)

 

578-580 : 3년 공백


二十三年春二月 많은 별이 떨어지다 (581)
二十三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581)
二十三年冬十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581)
二十三年冬十二月 수에 조공하니 수가 왕을 책봉하다 (581)
二十四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582)
二十四年冬十一月 수에 조공하다 (582)
二十五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583)
二十五年春二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다 (583)
二十五年夏四月 수에 조공하다 (583)
二十五年 수에 조공하다 (583)
二十六年 수에 조공하다 (584)
二十六年夏四月 수 문제가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584)
二十七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585)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586)

587-589 : 3년 공백

三十二年 진이 멸망한 소식을 듣고 수의 침입에 대비하다 (590)
三十二年 수 고조가 왕을 책망하다 (590)
三十二年冬十月 평원왕이 죽다 (590)

 

(자료 : 평원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드러나는 한민족사, 카테고리 : 고구려)

 

 

2) 고구려 영양왕 (590- 618) 기록

 

2.2. 수나라와 전쟁을 벌이다

수나라가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수나라의 전신인 북제와 북주를 부려먹던 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동아시아에 수나라의 패권이 구축되어 가는듯 보였다. 남은 것은 요동의 고구려 뿐이였다. 평원왕은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간첩을 파견하기도 하며 수나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이 쇼크사했다는 식으로 적혀있긴 하다만... 결론적으로 수는 고구려를 가만 냅둘 생각이 없었고 온 국력을 소진하며 고구려를 침공한다.

 

2.2.1. 1차 전쟁 (598)

 

이듬해에 원(영양왕, 고원)이 말갈 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물리쳤다. 고조(高祖)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량(諒)을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1차 전쟁은 598년 영양왕은 직접 말갈 1만을 이끌고 요서의 영주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수 문제가 분노하여 30만 대군을 일으키는 것으로 답했으나...

 

이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六軍)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왕의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隋軍이] 遼水에 진주하자, 元도 두려워하여 使臣을 보내어 사죄하고 表文을 올리는데, ‘遼東 糞土의 臣 元 云云’하였다. 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고 장마와 태풍 등으로 30만 중 8~9할이 전멸하고 때마침 영양왕도 수 문제에게 사과 사신을 보내고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에 있는 신(臣) 고원"[2]이라 칭하는 사과문을 바쳐 교전 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을 암시하는듯한 기록들도 존재하기 때문에[3]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기도 한다.[4]

 

2.2.2. 2차 전쟁 : 살수대첩, 평양성전투 (612)

 

수 양제는 돌궐 계민가한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돌궐에 간 고구려 사신과 마주첬다. 수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 왕더러 입조하라 명했으나 입조는 당연히 없었고, 사실상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결국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한다. 수나라는 113만 대군[5]을 모아 고구려에 보냈다.먼저 양제는 요동을 점령할 계획을 펼쳤지만 실패하자 양제는 수군과 육군을 별동대로 각 정예병 10만 30만을 보내는 작전을 펼쳤다. 육군은 우중문을 총사로하고 육군별동대를 바로 평양성으로 침투하도록 명령하했다. 그리고 수군은 내호아를 총사령으로 하고 산둥지역에서 바로 평양성으로 침투하도록 명령하였다. 양제는 이 두 별동대가 평양성에 모여 합동작전을 펼치도록 명했자만, 수군 내호아는 이를 거역하고 먼저 평양성을 침투하다가 약 5만명의 군사를 잃게된다. 또한 육군별동대 역시 살수대첩에서 약 30만 5000명의 군사를 잃게된다.

2.2.3. 3차 전쟁  (613) : 양현감의 난

수나라는 또다시 쳐들어왔으나 역시 요동성 하나 함락하지 못하고 있다가 본국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퇴각한다.

2.2.4. 4차 전쟁 (614)  : 수나라의 멸망

수나라의 4차 침입 당시에 비사성이 함락되며 수나라의 막대한 물량전에 따른 피로도가 누적됨이 드러났다. 이에 영양왕은 고구려로 넘어온 곡사정을 수양제에게 돌려보내며 화친을 요청한다. 수양제 또한 수나라 내부 사정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회군하게 된다. 그 후 잇따른 실정과 폭압으로 수양제가 피살당함으로써 수제국은 패망하게된다.

그리고 수나라가 망한 해인 618년, 영양왕도 승하했다.

 

2.3. 신라와 백제를 치다

수나라와 연결하려는 백제를 공격하고, 고승을 보내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또한 선왕인 평원왕때부터 이어져오던 강한 압박의 영향으로 영양왕 초중기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거의 한강에 근접하였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으로부터 문자명왕에 이르는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그 시기를 제외하면 고구려가 가장 많이 남진한 시기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2.4. 신집 편찬

1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600년에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해 신집 5권을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6]부터 전해지는 유기 100권을 압축했다. 설화, 전설 등 잡다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만을 선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5권이라고 해서 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글자 크기나 1권의 쪽수 등에 따라 분량에 차이가 난다. 제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목간에 기록하던 것을 종이에 옮길 경우 부피와 분량이 대폭 압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2.5. 왜와 외교하다

일본에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을 보내 종이, 먹을 전파하고 호류지(法隆寺)의 벽화를 그리게 하는 등 문물 교류에도 이바지했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영양왕 본기 (590-618)


一年冬十月 영양왕이 즉위하다 (590)
一年 수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벼슬을 주다 (590)
二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591)
二年春三月 수가 왕을 책봉하다 (591)
二年夏五月 수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다 (591)
三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592)

 

593-596 : 4년 공백


八年夏五月 수에 조공하다 (597)
九年春二月 수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다 (1차 : 598)
九年夏六月 수 문제가 영양왕의 관작을 빼앗다 (598)
九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다 (598)
九年秋九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598)
九年秋九月 백제 변경을 침략하다 (598)

599 : 공백
十一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600)
十一年春一月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하다 (600)

 

601-602 : 2년 공백


十四年秋八月 신라 북한산성 공격에 실패하다 (603)

 

604-606 : 3년 공백


十八年 고구려 사신과 수 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치다 (607)
十八年夏五月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十九年春二月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608)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608)

 

609-610 : 2년 공백


二十二年春二月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다 (611)
二十二年夏四月 수의 병력이 탁군으로 집결하다 (611)
二十三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총공격을 명하다 (2처 : 612)
二十三年春二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다 (612)
二十三年夏五月 수가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 황제가 장수들을 질책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장군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다(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거짓 항복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다 (612)
二十三年秋七月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에 대첩을 거두다 (612)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다 (613)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다시 논의하다 (613)
二十四年夏四月 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3처 : 613)
二十四年夏四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613)
二十五年春二月 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4차 : 614)
二十五年秋七月 항복을 청하다 (614)
二十五年秋八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614)
二十五年冬十月 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614)

615-617 : 3년 공백
二十九年秋九月 영양왕이 죽다 (618)

(자료 : 영양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드러나는 한민족사, 카테고리 : 고구려)

 

3) 고구려 영류왕 (618-642) 기록

 

2.1. 여수전쟁에서의 맹활약

영양왕의 이복 동생. 수양제의 대대적으로 일으킨 2차 침공에서는 직접 일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적들과 맞서 싸워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인 인물이다. 그것도 보통 활약을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군 장수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평양성 전투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해 내호아가 이끄는 별동대인 수나라 수군[4] 4만 명을 격퇴했다.

살아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이었고 그나마 부관이었던 주법상이 대오를 갖추고 막아내서였다. 총 해군은 10만 명 그중 정예로 훈련 받았던 4만 명 거의 전부가 몰살당했으니....단단히 혼이 난 셈이다.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 밖에서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뒤 평양성 외성의 성문을 열고 외성을 무인지경으로 비워두어 그냥 수나라 군대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내호아의 군사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막지 않자 고구려인들이 모조리 도망갔다고 여기고 신나게 약탈에 몰두했고, 고건무가 지휘하는 500기는 이 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치고나가 당황하는 수나라 군대를 섬멸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에서 수나라 수군이 격파되지 않았더라면 살수대첩도 없었을 것[5]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 - 수 전쟁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명장 중 하나다. 살수대첩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지 한국사 대첩 중에 손에 꼽는다고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 통일된 대륙의 엄청난 물량을 상대하면서 영류왕이 느낀 것은 전쟁에 대한 염증과 평화의 필요성이었던 것 같다. 통일국가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한 고구려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지만, 문제는 전쟁이 고구려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깊숙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 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그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영류왕 본기 (618-642)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AD 618)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619)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618)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619)

620 : 공백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621)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622)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623)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624)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624)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625)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626)

 

627 : 공백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628)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629)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629)

630 : 공백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631)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631)

 

632-637 : 6년 공백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638)

639 : 공백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640)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640)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640)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641)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642)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642)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642)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642)

 

5. 백제 기록

 

** 백제 혜왕 (598-599)

 

2. 생애

일본서기》에 따르면 긴메이 덴노 16년(555) 2월 위덕왕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이 전사했음을 알리기 위해 왜국에 혜왕을 사자로 보낸 기록이 있다. 왜국측은 아버지를 잃어 얼마나 슬프겠냐 위로했고, 이에 혜왕은 왜에서 병기를 지원해준다면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고 싶다며 강한 어조로 뜻을 전했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졌는지 556년 봄, 혜왕이 백제로 귀국할 때 병기와 말을 지원하고, 1,000명의 병력을 호위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 열도를 잇는 뱃길을 신라 수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미저(彌弖,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도)에 왜군을 주둔시켰다. 백제 주력군이 관산성에서 궤멸당한 상황에서 젊을 적의 혜왕이 1년 동안 왜국에 머무르며 왜왕의 신임을 얻고, 담판을 지어 빌려온 왜군은 대신라 방어에 쏠쏠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외의 기록은 없지만 위덕왕과 같은 세대이므로 아버지 성왕 시대부터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 유역 탈환이나 관산성 전투 등 굵직굵직한 사건에 왕자로서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젊은 시절의 혜왕은 호전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즉위

597년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가 왜에 사절로 파견된 후 위덕왕이 몸져 눕게 되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되자 권력 공백을 틈타 혜왕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1년 후 위덕왕이 승하하고, 혜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러한 정황을 석연치 않게 보는 시각들이 많다. 다수의 학자들이 아좌태자가 왜에 가있는 동안 위덕왕을 시해하고 재위에 올랐을 가능성을 유력하게 보고 있다. 위덕왕의 경우 525년생으로 이미 70대의 고령이므로 일단 자연사나 병사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만 혜왕이 시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위덕왕은 승하하기 1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정사를 돌보았을 정도로 몸 상태가 괜찮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아좌태자를 왜에 사절로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좌태자가 왜에 파견된 후 혜왕이 갑작스럽게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혜왕 입장에서는 일본에 있는 태자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귀국하기 전에 왕위에 올라야 했기 때문에 위덕왕이 자연사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정변에 법왕이 깊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소수의 추측이 있다. 고령의 혜왕보다는 젊은 나이의 법왕이 앞장서서 이러한 일들을 꾸미고 진행했다는 것이다.

웅진과 사비 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정변들을 볼 때 정변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를 지원하는 귀족 세력(대성팔족) 또는 외국 세력(왜국)이 배후에 있어야 했다. 혜왕의 정변때도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이와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대성팔족 중 위덕왕의 반대 세력들이 위덕왕과 아좌태자를 시해한 후 곧 죽을 고령의 혜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4. 최후

이렇게 왕위에 오른 혜왕은 즉위 후 1년만에 승하했는데 생년이 명확하지 않지만 형 위덕왕이 70대였던 이상 그도 고대 기준으로는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노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형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라고 쳐도 555년 왜국에 사신으로 간 기록을 봐서 이 때 넉넉히 20살이었다고 쳐도 535년생인데 그러면 왕으로 즉위한 598년 시점에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다.

다만 즉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1년만에 갑작스레 승하했다는 점에서 정변으로 인해 시해당했거나 누군가에게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법왕의 출신이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법왕의 출신에 대해 《삼국사기》는 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수서》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왕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가 정확도가 더 높은 편이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  백제 법왕 (599-600)

 

1. 개요

백제의 제29대 국왕이자 건길지. 재위기간은 599년~600년으로 2년인데 5개월이라는 설도 있다.

2. 생애

2.1. 출신

그의 출신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혜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고, 《수서》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다. 백제 역대 국왕들의 가족력에 대해서 가장 정확도가 높은 《일본서기》에서는 법왕의 출신이 언급되지 않는다. 위덕왕의 아들이라면 고령의 숙부를 징검다리로 거쳐서 즉위한 셈이지만, 혜왕의 아들설을 채택한다고 가정하면 법왕은 정변을 일으켜 고령의 아버지 혜왕을 왕위에 올린 뒤 그가 사망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추론이 성립한다.

정황상 혜왕은 선왕 위덕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보는데[4] 이에 법왕이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 측 일부 역사서에는 '부여관(夫餘寬)'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부여관이 법왕 부여선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이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문선의 묘지명에 있는 글자를 필사하면서 법왕의 이름인 '부여선(夫餘宣)'을 '부여관(夫餘寬)'으로 착각하여 생긴 오류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18~19세기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중국의 사서와 당나라 부여문선의 묘지명에 '百濟國王夫餘寬生璋。號帶方郡王。生義慈。唐拜帶方郡王金紫光祿大夫。生隆。熊州都督隆。生文宣。司膳卿左衛大將軍樂浪郡公'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후주서(後周書)》, 《풍속통(風俗通)》, 《만성통보(萬姓統譜)》, 《성보(姓譜)》에서도 '부여관'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주서》에는 저런 내용이 없고, 이들의 원사료가 된 것으로 보이는 북사》와 《수서》에서 무왕의 아버지가 법왕으로 나오기 때문에 부여관이라는 이름이 부여선의 오기라는 의견도 강하다. 현재 이규경이 보았던 부여문선의 묘지명은 행방불명상태다.

 

2.2. 즉위 이전

“성주선원(聖住禪院)은 본래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12년 을해(乙亥, 616)에 백제국 28세인 혜왕의 왕자인 법왕이 오회사를 건립한 곳이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원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바라며 세운 원찰(願刹)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


왕위에 오르기 전 기록으로는 위 기록이 전한다. 다른 문헌 기록과 법왕의 생몰년이 맞지 않는 문제가 있지만, 오회사를 법왕이 왕자 시절이던 598년에 짓기 시작해 616년에 완성됐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존재한다.[5] 아무튼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대목이 존재하는데, 마침 598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사건이 존재한다.

왕이 수나라가 요동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군도(軍道)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高元)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 우리 국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45년(598)


이 전투는 기록이 소략하고, 전면전이라기보단 고구려의 보복성 제스처인데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신라의 한강 하류 영토가 존재하기 때문에 수군을 이용해 소규모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과 종합하면 즉위 이전의 법왕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2.3. 짧은 재위기간

즉위 후에는 불교 신앙을 가진 군주답게 불교를 매우 숭상했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쳐 백성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고, 민간에서 기르는 매나 사냥한 매를 풀어주며, 적군이 쳐들어와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 신분이 승려였던만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삼국유사》 <흥법> 편에 법왕이 살생을 금한 이야기를 실어놓은 후 왕을 찬미하는 를 지어 적어두었다.

짐승도 보호한 왕의 명령 천산에 은혜가 미치고
은택이 돼지 물고기까지 흡족하여 어짊이 온 세상에 넘치네.
성군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말하지 말라.
천상의 도솔천(兜率天)은 꽃다운 봄이 한창일지니.

《삼국유사》 <흥법 제3, 법왕금살>(法王禁殺 : 법왕이 살생을 금지하다)


법왕은 결국 재위기간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서기 600년 5월 승하했다. 사실 혜왕의 아들설을 따르면 혜왕이 70이 넘는 고령으로 사망했으므로[6] 장남인 법왕 역시 적어도 40~50대의 나이에 즉위했을 것이다. 의학이 현대처럼 발달하지 못한 전근대 시대에 이 정도 나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법왕의 재위기간이나 《삼국사기》 기사들을 살펴보면 그는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이 성인병인지 사고인지 뭔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지만 이미 건강에 큰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불교 교리에 집착한 살생금지령 역시 그런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으며, 결정타는 600년 상반기 시점에 칠악사(漆岳寺)에 가서 기우제를 지낸 것이었다. 결국 기우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사망에 대해서는 반대파들에 의해 시해당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법왕의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이런 얘기가 나온 듯하다.[7] 실제로 다음 국왕인 무왕의 경우 일단 사서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와있지만 여러가지 서술을 볼 때 출신이 불확실하며, 임성태자의 후손이라는 토요타 씨 족보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진이왕이라는 국왕이 추가로 들어가 있다. 중국 측 사서인 《수서》와 《북사》는 물론 《일본서기》 또한 혜왕과 법왕의 존재를 누락하고 있어 이 시기에 정치적 혼란이 있었을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법왕에 대한 평가는 불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고려 때와 성리학이 유일한 국가적 사상이 된 조선의 평가가 완전히 달랐다. 《삼국유사》에서는 법왕을 위에서처럼 찬미하여 시까지 지어서 넣어 두었지만, 조선시대의 《동국통감》에서는 불교 믿어봐야 수명을 늘리고 복을 받는 것 따윈 없다고 부처에 현혹되는 것이 의미없다고 혹평했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법왕본기>
一年 법왕 즉위하다 (599)
一年冬十二月 살생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599)
二年春一月 왕흥사를 창건하다.[8]  (600)
二年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다 (600)
二年夏五月 법왕이 죽다 (600)

 

(자료 : 법왕, 나무위키)

 

 

 

** 백제 무왕 (600-641)

 

2.3. 전쟁과 외교

재위 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19]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신라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재위 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20]가잠성(椵岑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여러번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과는 의외로 관계가 안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일본서기 推古天皇 16年(608) 6월 조에 따르면 隋(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에게서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 했던걸로 보인다.[21]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무왕의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무왕 초기에 백제와 왜의 관계가 굉장히 안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562년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백제의 낙동강 진출로 이어져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22] 혜왕 - 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관산성 패전 이후 계속 패전만 했던 것과 달리 신라와 전쟁을 벌여 연전연승함으로서 쇠락해가던 백제가 안정감과 함께 자신감을 찾아갖고 이에 기존의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국제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무왕의 업적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중외교에서는 중원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간보기를 거듭하며 신뢰를 잃었는데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와 수가 충돌했을 때 무왕은 위덕왕과는 달리 수를 돕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군대는 신라로 보낼 뿐이었다. 이런 행보는 당이 백제가 아닌 신라와 손을 잡는 계기가 된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본기 (600-641)


一年夏五月 무왕이 즉위하다 (AD 600)

601년 : 공백
三年秋八月 신라의 아막 산성을 공격하다 (602)

603-604 : 2년 공백
六年春二月 각산성[32]을 쌓다 (AD 605)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605)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토우)가 내리다 (AD 606)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AD 606)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AD 607)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08)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AD 608)

609-610 : 2년 공백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11)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611)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AD 611)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611)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612)
十三年夏四月 대궐 남문에 벼락이 치다 (AD 612)
十三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 인가가 유실되다 (612)

613-615 : 3년 공백

十七年冬十月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616)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616)

617년 : 공백
十九年 신라가 가잠성을 공격하다 (618)

619-622 : 4년 공백

二十四年冬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과하마를 보내다 (AD 623)
二十四年 신라의 늑로현을 공격하다 (623)
二十四年春一月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623)
二十四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623)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24)
二十六年冬十一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5)
二十七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 등을 선사하다 (626)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626)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6)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27)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627)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628)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9)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630)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AD 630)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AD 630)
三十二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31)
三十三年春一月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다 (AD 632)
三十三年春二月 마천성을 개축하다 (AD 632)
三十三年秋七月 신라를 공격하다 (632)
三十三年 왕이 생초원에서 사냥하다 (AD 632)
三十三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32)
三十四年秋八月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33)
三十五年春二月 왕흥사를 준공하다 (AD 634)
三十五年春三月 대궐 남쪽에 연못을 파다 (AD 634)

635년 : 공백
三十七年春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36)
三十七年春三月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AD 636)
三十七年夏五月 장군 우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다 (636)
三十七年夏六月 가뭄이 발생하다 (636)
三十七年秋八月 망해루에서 잔치를 벌이다 (AD 636)

서기 637년 : 38년 봄 2월, 서울에서 지진이 났다.
          - 3월, 다시 지진이 났다.
          -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치니, 
            태종이 사신을 우대하여 위로하고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 단을 보냈다.**
서기 638년 : 39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서기 639년 : 40년 겨울 10월, 다시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자료 : 백제 무왕,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