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5. 14:14ㆍ한국사/고구려
부제 1: 고구려의 평양성 위치 추정의 검증
부제 2: 고구려 소수림왕은 전진의 부견인가?
부제 3: 백제의 수곡성, 치양성 위치 추정
지난 글에 이어 고구려 소수림왕시기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고구려의 수도, 특히 평양성의 위치를 검증하고자 한다. 이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평양성 공격과 관련되기도 하므로, 관련하여 분석하며, 수곡성, 치양성에 대한 위치 추정도 겸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전진의 부견과 많은 유사점이 있는 바, 이에 대해서도 1차적으로 검토하며, 연관되어 있는 고국원왕 시기의 분석도 겸하고자 한다.
V. 소수림왕 시기 고구려와 백제, 전진 상황을 고려한 평양성 위치 추정
- 고구려 소수림왕 (371-384) 시기
二年夏六月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 (372)
二年夏六月 태학을 세우다 (372)
三年 율령을 반포하다 (373)
四年 승려 아도가 오다 (374)
五年春二月 초문사와 이불란사 두 사찰을 창건하다 (375)
五年秋七月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다 (375)
六年冬十一月 백제를 침범하다 (376)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七年冬十一月 백제를 정벌하고 전진에 조공하다 (377)
八年秋九月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다 (378)
379-382 : 4년 공백
十三年秋九月 혜성이 나타나다 (383)
十四年冬十一月 소수림왕이 죽다 (384)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I,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 비교 4 (350-390) 참조)
- 고국원왕(331-371) 시기의 고구려
二年春三月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 (332)
四年秋八月 평양성을 증축하다 (334)
五年春一月 신성을 쌓다 (335)
九年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오다 (339)
十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다 (342)
十二年秋八月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기다 (342)
十二年冬十一月 전연의 모용황이 남도로 침략하다 (342)
十三年春二月 전연의 모용황이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다 (343)
十三年秋七月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13]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343)
十五年冬十月 전연이 침략해 와서 남소성을 빼앗다 (345)
346-348 : 3년 공백
十九年 송황을 전연으로 돌려보내다 (349)
350-354 : 5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355)
二十五年冬十二月 전연이 왕모 주씨를 돌려보내다 (355)
356-368 : 13년 공백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369)
四十年 전연이 망하다 (370)
四十一年冬十月二十三日 고국원왕이 죽다 (371)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I,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 비교 4 (350-390) 참조)
- 백제 근초고왕 (346-375)시기
348-365 : 18년 공백
二十一年 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366)
二十三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368)
二十三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368)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69)
二十四年冬十一月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369)
二十六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71)
二十六年冬十月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다. (371)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371)
二十八年春二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373)
二十八年秋七月 청목령에 성을 쌓다. (373)
二十八年 독산성의 성주가 신라로 도망치다. (373)
三十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해 수곡성을 빼앗다. (375)
三十年冬十一月 근초고왕이 죽다. (375)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I,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 비교 4 (350-390) 참조)
- 백제 근구수왕 (375-384) 시기
二年冬十一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376)
三年冬十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三年冬十一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377)
五年春三月 사절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379)
五年夏四月 흙비가 종일 내리다 (379)
六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380)
六年夏五月 땅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다 (380)
八年 비가 내리지 않아 굶주린 사람이 많이 발생하다 (382)
十年春二月 대궐 뜰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히다 (384)
十年夏四月 근구수왕이 죽다 (384)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I,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 비교 4 (350-390) 참조)
1) 평양성 전투 지역 추정
371년 근초고왕은 패하에서 고구려에 승리하고 같은해 평양성을 공격했다. 여기서 패하는 라인강인 패수 또는 다뉴브강의 패하로 추정된다.
Zurich (Old Town, Lindenhof) in Switzerland (source : Wikipedia)
그동안 패하전투를 다뉴브강 상에서의 전투가 아닌가 했는데, 그 경우 평양성이 부다페스트가 아닌가 했었다. 실제 위키자료는 이곳이 훈족의 수도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고 지리고 내용을 참조하면 단군시대의 왕험성이 있는 평양성은 스위스의 쥬리히 지역으로 필자는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패하전투는 라인강인 패수의 전투인가 아니면 다뉴브강에서의 패하전투인가가 문제가 된다.
필자는 서북쪽으로 흐르는 패수가 라인강이라고 추정했다. 동남으로 흐르는 패수는 다뉴브강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근초고왕 시절 평양성을 공격(371)하기 전의 패하에서의 전투(371)는 라인강 또는 다뉴브강으로 추정된다. 두가지 경우 모두 분석해 보자.
(1) 371년 패하전투가 라인강 전투로 가정하는 경우
라인강을 넘어 평양성인 스위스 쥬리히를 공격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평양성을 오기 전에 국내성, 환도성 전투가 있었을텐데, 그런 언급이 없는 것이 의문을 준다. 여하튼 371년 패하전투를 라인강 전투로 가정하는 경우, 백제가 라인강 서쪽을 점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백제가 요서나 중국측 영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서에 있는 백제가 근초고왕 시절에 추가로 점령한 지역인지, 아니면 온조왕 시절부터 있던 한산이란 수도가 이곳에 있었는지 파악이 필요하다.
우선 근초고왕과 소수림왕 시절부터 보자.
근초고왕은 369년 한수(漢水)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했다. 그리고 371년 패하에서 고구려에 승리하고 이어 평양성 공격(371)에서 고국원왕을 죽게 한다. 그리고 같은 해 371년 한산으로 수도를 천도한다.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는 어떠한가? 아래 두 기록을 보면, 376년 고구려는 백제의 북쪽변경을 공격하고, 이듬 해 377년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한다. 고구려는 같은 해 377년 백제를 정벌하고 전진에 조공한다. 그리고 거란이 378년 고구려 북쪽 변경을 침범한다. 즉 평양성 서부의 라인강 서쪽에서 백제가 공격한 느낌을 주고, 고구려는 이러한 백제를 정벌해, 중국에 있는 전진에 조공하며, 거란의 침입을 받는다. 이 당시에는 전연이 370년 멸망해 이 요서 요동 지역에는 Alamanni가 없었다. 필자는 거란이 프랑크족이 아닌가 추정한다. 프랑크족은 초기 북해변의 Belgique지역에 있었으며, 프랑스 북부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 삼국사기 기록>
六年冬十一月 백제를 침범하다 (376)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七年冬十一月 백제를 정벌하고 전진에 조공하다 (377)
八年秋九月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다 (378)
<백제 근구수왕 시기 삼국사기 기록>
二年冬十一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376)
三年冬十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三年冬十一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377)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I,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 비교 4 (350-390) 참조)
다시 백제의 지역으로 돌아가 보자. 근초고왕은 분명 한수(漢水)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했다 (369년) 하였다. 그러면 이와 유사한 시기에 중국사에서 한수(漢水)란 지명을 이용한 기록이 있는가? 필자는 한수(漢水)라는 지명을 남북조 시대 역사에서 찾았다.
아래 자료에서 중국 남조(南朝)의 진(陳)나라 (557-589) 시기에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정복당했고' 란 내용이 나온다. 남조 진(陳)나라는 남조 최후의 왕조로서, 남조 중 가장 약체였다고 한다. 이시기는 신라의 진흥왕 (540-576), 진지왕 (576-579), 진평왕 (579-632) 시기인데, 특히 진흥왕과 교류(565-571)가 많았다 한다.
"진(陳, 557년 ~ 58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 지방에 건국된 남조 최후의 왕조이다. 남진(南陳)이라고도 한다.
진나라를 건국한 진패선(陳覇先)은 미천한 가문의 군인 출신으로 후경(後景)의 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 난을 진압하고, 원제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다. 북제(北齊)에게 동조한 소연명(蕭淵明)을 제위에 올린 동료 왕승변(王僧弁)을 타도하고 경제를 추대하였으나, 이후 경제의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정복당했고, 거기에 양자강 중하류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사실상 양나라 때에 비해 영토가 크게 축소하여 남조 왕조 중 가장 국력이 약소했다.
진패선은 왕승변의 부장과 강남의 토호의 반란을 평정하다 죽고, 형 시흥왕 진도담의 아들 문제가 제위를 물려받아 영주를 확보하고, 북주를 비롯한 북제, 후량과 대치했다. 문제(文帝)는 내정에 전념하여 국내를 안정시켰다.
문제의 아들 임해왕 때 북주, 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을 평정했으나, 실권을 장악한 4대 선제(宣帝)가 그를 폐위하고 즉위하여 국력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575년 명장 군사를 시켜 북제를 공격해, 숙적 왕림(王琳)을 죽이고 수양을 빼앗아 강북으로까지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선비족에 의해 다시 영토를 잃게 된다.
이때 북제를 병합한 북주가 재빨리 남정을 계획하였고, 그동안 진나라는 후주가 즉위해 사치와 향략을 일삼아 국력이 피폐했다. 북제는 진왕 양광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하약필, 한금호를 선봉으로 강을 건너 건강을 함락하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400년에 걸쳐 분열되었던 위진남북조시대가 종결되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565년 진나라는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신라로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1]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2][3][4][5][6]
(자료 : 진 (陳) (남조), 위키백과,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남조, 펌글 참조)
필자는 이러한 남조의 진(陳)나라가 진흥왕 시기의 신라가 아닌가 한다. 필자가 쓴 백제의 한성에 대한 추정의 글에서, 일본사기의 기록을 인용해,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 성왕이 포기한 한성지역과 평양지역이 있는데, 신라가 한성지역에 들어가 우두방, 니미방을 세웠다 했고, 성왕시 기록에 '백제의 동북쪽 변경에 신라가 신주를 설치했다'(553년)고 했다. 한수와 한산, 한성을 모두 유사한 지역으로 가정한다면, 진흥왕이 설치한 신주지역은 한성 즉 한수지역이 되고, 한수지역을 점했던 남조의 진(陳)나라가 신라가 되며, 이후 북주에게 이 지역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신라의 진흥왕은 555년 북한산을 순행했고, 557년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했다. 남조의 진(陳)나라는 557년 시작하고 589년 망한다. 즉 이 지역은 백제지역이었는데, 신라가 진흥왕 시절 확보한 지역으로 판단된다. 필자도 놀라게 되는 이러한 결과는 프랑스, 스페인의 중국땅이 남북조시대에 진정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여기서 모두 검토할 수는 없고 차후 차차 연구할 것이다.
다시 돌아 간다면, 즉 고구려의 평양성은 스위스 쥬리히 지역이고,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한 루트는 라인강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간 경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백제가 라인강 서쪽 지역에 요서지역 또는 프랑스의 르와르강으로 추정되는 한수이남의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한수, 한산, 한성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문자왕 시절 한성 공격(507년) 시도의 한성(漢城)이 프랑스 Clermont--Ferrand 지역이라는 것이며, 횡악에서의 전투에 머물렀다는 횡악은 결국 피레네 산맥이 되는 것이다. 백제가 오래 전부터, 한산에서 사냥하고, 횡악에서 사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되며, 그래서 한성지역은 성왕시 백제의 동북변경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백제의 지역은 온조왕 시기에 낙랑군이 우측에 있게 된다. 즉 온조왕 시기에서의 한산도 이 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건국지역도 이 근처지역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전연이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 영주 자사, 낙랑공 고구려왕 이라 했다. 그런데 북제(550-577) 무성제가 신라 진흥왕을 낙랑군공이라 했다. 즉 낙랑군이 있던 스위스 쥬리히의 평양지역은 고구려에서 신라지역으로 변경되었다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라의 진흥왕이 한성과 평양성 지역을 차지해, 한성지역은 우두방, 평양지역은 니미방을 설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쥬리히 남쪽에 있는 Sihl river가 신라하(Sylaha, 新羅河)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백제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내용에 해당하는 로마사의 기록은 없어 보인다. 371년, 377년 두번에 걸친 전쟁이며,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계기가 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은 없어 보인다. 이 당시 서로마사는 Alamanni에 대한 공격(365-374)과 Alamanni의 일부라 여겨지는 Lentienses대한 승리(378) (=Battle of Argentovaria in Colmar, Alsace, France)가 언급되는데, 필자는 Alamanni는 선비족인 모용부 즉 연나라로 추정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이 백제의 근초고왕과는 거리가 있다는 언급을 앞에서 했다. 즉 이 당시 서로마사는 고구려나 중국사 지역에서의 역사를 기술한 역사로 보인다.
(2) 371년 패하 전투를 다뉴브강 전투로 가정하는 경우
평양성을 스위스의 쥬리히로 추정하는 경우, 평양에 이르는 경로는 위에서 살펴본 라인강 서쪽에서 공격하는 경우와, 알프스산맥 남쪽에서 공격하는 경우, 그리고 알프스산맥 동쪽에서 공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알프스 산맥 남쪽에서 공격하는 경우도 가능하나, 알프스를 직접 넘는 경우이므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왕험성인 평양성의 지리적 이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3의 경우로서, 알프스 동쪽에서의 평양성 공격을 상정할 수 있다. 이 경우는 371년 패하의 전투가 다뉴브강에서의 전투가 되며, 이는 백제와 고구려 즉 로마제국과 다뉴브강 위에 있는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진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러면 이와 유사한 시기에 로마제국 특히 동로마제국이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쥬리히쪽을 공격한 역사가, 특히 371년, 377년 즈음에 있는가 보자.
근구수왕으로 추정되는 동로마제국의 Valens황제의 기록에는 371, 377년 고트족의 침입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며, 주로 다뉴브강 위의 발칸반도쪽에서의 전투가 전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트족의 압도적인 우세로 기록된다. (아래 치양성 전투 분석 참조) (Valens 황제시의 자세한 기록은 이미 전 글 (1)에서 살펴 보았으므로 생략함.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동로마제국(E.Roma), 펌글 Valens, 참조) 즉 Valens황제의 경우, 오스트리아까지 접근한 전투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서로마제국의 황제 Valentinian I의 기록은 어떤가? 아래에서 설명되지만, 근초고왕이 전쟁 수행 중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곡성 전투는 Valentinian I가 죽은 Brigetio 지역 즉 Komarom 지역으로 추정되었다. 이 지역은 항가리와 슬로베니아의 경계지역으로서 무역의 중심지였다 한다. 이 지역까지 서로마황제가 원정온 것을 보면, 더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Valentinian I의 기록에서도 수곡성 싸움을 제외하고는 동로마쪽에서 스위스 쥬리히쪽을 공격한 기록은 없어 보인다. 서로마제국 Gratian 황제도 쥬리히인 평양성 공격 기록은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하면, 다뉴브강쪽에서 평양성 공격 루트는 로마사 기록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즉 이 경로는 가능성이 있으나, 실제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내성, 환도성 공격에 대한 언급이 없어 다소 회의적이지만, 라인강 서쪽에서의 평양성 공격 가능성이 있다고 잠정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백제의 요서지역이나 중국지역 확장과 연관되는 바,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더 연구해 보아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판단한다.
2) 전진의 부견과 고구려 소수림왕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구려 소수림왕과 전진의 부견과 유사한 점이 많다. 죽은 연대도 384년으로 같다. 백제의 근구수왕도 384년 죽는다. 즉 고구려, 백제, 전진의 3개국왕이 같은 해에 서거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먼저 전진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전진이 고구려가 될 수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전진의 비수대전은 전진과 동진과의 전쟁인데, 북조의 전진인 고구려 소수림왕과 남조의 백제 근구수왕의 전쟁은 아닌지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가정은 남조의 연대와 백제의 왕들의 재위기간이 아래와 같이 묘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이미 북위가 고구려라고 추정하였기 때문이다.
백제 왕 재위기간과 중국 남조 나라 존속기간 비교표
백제 : 구이신왕 - 심근왕 (420-479) ----- 남조 유송 : (420-479)
구이신왕 (420-427), 비유왕 (427-435),
개로왕 (455-475), 문주왕 (475-477),
심근왕 (477-479)
백제 : 동성왕 (479-501) -------------------남조 남제 (479-502)
백제 : 무령왕 - 성왕 (501-554) ---------- 남조 양 (502-557)
무령왕 (501-523), 성왕 (523-554)
백제 위덕왕 (554-598) --------------------- 남조 진(陳) (557-589)
이제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에 대해 잠시 살펴 보자.
"오호십육국시대에 티베트계 저족이 세운 국가. 국호는 진(秦)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아 가장 먼저 나타난 이 국가를 전진(前秦)이라고 따로 구분한다. 북진(北秦), 호진(胡秦)[2], 부진(符秦), 저진(氐秦)으로도 불렸다.
황하 연안에서 할거 중이던 포홍(蒲洪)은 후조(後趙)와 염위(冉魏)의 대립으로 화북이 혼란해지자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성을 부(苻)로 고쳤다.[3] 부홍은 서쪽으로 진격해 옛 근거지 관중을 점거하려 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부홍의 뒤를 이은 아들 부건(苻建)은 삼진왕의 칭호를 버리고 동진(東晉)의 관작을 따르면서 관중으로 진격했다. 장안 지역에서 할거하던 두홍(杜洪)은 방심하다가 부건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부건은 역시 옛 근거지 관중으로 돌아가려는 강족의 요양(姚襄)을 격파하고 관중에서 하남 일대에 걸쳐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351년 부건은 동진의 관작을 버리고 천왕(天王)에 올라 국호를 대진(大秦)으로 정하였으며, 이것이 전진(前秦)이라 불리는 왕조의 시작이다. 352년에 부건은 마침내 황제에 오른다.
그 뒤 부건은 두홍의 잔당을 소탕하고, 관중으로 쳐들어온 동진의 양주자사 사마훈을 물리치면서 관중을 평정해 나갔다. 그 뒤 동진의 북벌군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지만, 승상 부웅(苻雄)이 잘 대처한 덕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4]
그 뒤 355년 6월, 관중을 통일한 지 1년도 채 안 지나 부건은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원래 태자였던 부장(苻萇)은 환온의 1차 북벌 때 다쳐 354년에 죽어서 새로 세운 태자인 부생(苻生)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애꾸였던 .. 부생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부웅의 뒤를 이었던 부견(苻堅)도 목숨이 위험해 반정을 계획했다. 왕맹(王猛)[5]이라는 명재상을 얻자 그는 357년,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폐위・살해하고 전진의 천왕(天王)에 올랐다.
그 뒤 부견은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면서 국력을 키워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로의 확장을 시작하면서 동진의 형주(荊州)를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농서(隴西)를 정벌한다. 하지만 367년 전진의 왕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뺀 관중 전체가 조각조각으로 나뉠 만큼 전진은 위험했다. 그러나 당시 전연(前燕)의 정권을 잡던 모용평(慕容評)이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368년 한 해를 모두 써 부견은 반란 평정에 성공한다.
369년에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하며 낙양 근교 호뢰관(虎牢關) 서쪽의 땅을 할양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자 왕맹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연에 군사를 보내주어 환온의 북벌군을 물리치는 것을 도와준다. 그 뒤 전연의 왕족 모용수(慕容垂)가 망명해오자 그를 받아들이고 호뢰관 서쪽 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369년 말에 전연을 공격했으며 370년에는 전연을 멸망시켰다. 373년에 동진의 사천(四川) 지방을 정복하고, 승상 왕맹이 죽은 뒤인 376년에는 전량(前凉)과 대(代)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고 동진의 양자강 이북을 차지하며 서역을 평정하여 오호십육국 시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자료 : 전진,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전연, 펌글 참조)
즉 화북지역이 후조와 염위의 전쟁으로 혼란해지자, 삼진왕을 칭하며 태생한 전진은 황하 연안에서 출발하여, 관중지방과 장안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관중에서 하남에 이르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351년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하고 부건은 352년 황제로 칭한다. 동진의 북벌군에게 위기에 몰리지만, 숭상 부웅이 잘 대처해 나갔지만, 부건은 355년 6월 병사한다. 뒤를 이은 부생은 포학하자, 목숨의 위험을 느낀 (부웅의 뒤를 이은) 부견은 357년 반정을 일으킨다.
필자는 앞에서 위수가 관중지역을 통과 하고 장안을 그 밑에 두었는데, 위수가 Lot river이고 장안은 Toulouse로 추정했다. 전진의 부견은 357년 포악한 부생을 폐위하고 천왕을 칭했다. 이후 내치를 개혁하고 366년부터 외정에 나선다. 동진의 형주를 공격하고 농서를 정벌한다. 367년 왕족들의 반란으로 한때 위기를 맞았으나 1년동안 진압하여 반란 평정에 성공한다.
이후 369년 동진의 환온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한다. 전연은 전진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낙양근교 호뢰관 서쪽땅을 할양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전진은 제안을 받아 들여 전연을 도와 동진의 북벌군을 물리친다. 이후 모용수가 망명해오자 받아 들이고, 할양받을 땅을 논하면서 전연을 공격해 멸망시킨다. 즉 동진의 전연공격이 전진의 개입으로 이어져, 결국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키는 계기가 된다. 부견은 이후 373년 동진의 사천지방을 정복하고, 376년에는 전량과 대나라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고, 동진의 장강 이북을 차지하며, 서역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전성기를 이룬다.
오호십육국 역사가 대개 그렇게 묘사되듯이, 사람들이 곧잘 죽어 버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고 한다. 춘추필법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왜곡이다. 필자는 존재 자체도 의심할 수도 있다고 본다. 여기서 위 전진의 역사를 년대별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351 : 관중지방, 하남지방 지역으로 대진 건국, 352년 부건 황제 칭함
355 : 부건 병사, 부장 죽어 부생 이음
357 : 부견이 반정, 황제 오름 (357-384)
366 : 동진의 형주지역 공격, 농서 정벌
367 : 왕족들의 반란, 1년 동안 진압 성공
369 : 동진의 전연 공격, 전진이 전연을 도와 동진 격파, 모용수 망명 받음
370: 전진에 의해 전연 멸망
373: 동진의 사천지방 정복
376 : 전량, 대나라 멸망시킴, 화북 통일, 동진의 장강 이북 차지, 서역 평정
383 : 동진 정벌 위한 비수(회하의 지류) 대전 패배
농서의 걸복국인 반란이후 각지 반란,
384 : 모용홍, 모용충의 서연의 공격으로 장안버리고 도주, 후진의 요장에게 부견 죽음
385 : 부비가 진양에서 황제 오름, 진양에서 평양(平陽) 진출, 모용영의 습격으로 대패
동진의 낙양 습격하다 전사
386 :부등이 능동에서 황제 오름,
이후 후진의 요장과 여러 차례 전투, 초반 우세, 후반 대패
(386 : 선비족 탁발규가 대나라 재건, 북위 건국)
394 : 봄 요장 사망, 부등이 요흥과 전투에서 대패
금성(金城)의 걸복건귀에게 아들 인질, 누이 왕후로 보내고, 1만명 기병 지원 약속받음
394 : 7월 요흥의 대군이 걸복건귀의 원병을 맞으러 산에서 내려온 부등을 원군 오기전에 사로잡아 처형
부등의 태자 부숭이 황중(湟中)에서 황제 오르나 걸복건귀에게 쫓겨남.
구지의 양정에게 도망가나 구지의 양정이 걸복건귀에게 지면서 같이 전사. 전진 멸망
우선 상기의 전진의 내용을 삼국사기의 백제 근초고왕 내용과 비교할 때, 별로 유사점이 보이지 않는다. 우선 전연 관련하여 일언 반구도 없다. 그러나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에는 전연에 의해 매우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는 것을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전진과 관련있어 보이지 않는다. 흔한 사신을 보내는 것도, 전진이 아닌 진나라와 신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뿐이다. 우연히도 근초고왕 시 368년 일식이 있었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에서 일식이 있었다는 것은 반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진에서도 부견은 368년 왕족들의 반란으로 1년내 진압하느라 힘썼다는 기록이 있다. 소수림왕 시기에는 13년 공백으로 남아 있는 기간이다. 그 외의 근초고왕 기록은 고구려와 전투한 기록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근구수왕 시기에 고구려와 전투한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동진에 조공한 기록뿐이며, 이후 379-382 기간에는 흙비, 전염병, 지진, 가믐으로 식량난 등이 기록되었다. 이런 시기는 백제가 어려운 상황을 묘사하는 흔한 삼국사기식 기록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전진은 383년 비수대전의 패배가 있기 전에는 화북을 통일하고 동진의 장강이북을 차지한 전성기였다. 따라서 전진과 백제는 거의 유사성이 없다고 판단된다.
반면 고구려와 전진은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 우선 고구려와 전진은 전연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시기에 전연에 3번 싸움에서 한번 패해서 왕모가 인질이 되고,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고국원왕 시기에는 공백기간이 많다. 346-348 : 3년 공백, 350-354 : 5년 공백, 356-368 : 13년 공백으로 약 20년이상이 공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공백기간이 수상하다. 특히 전진이 대진(大秦)을 건국한 351년, 부건이 칭제한 352년이 모두 고국원왕의 공백기간 350-354 기간에 해당한다. 그리고 355년 전진의 부건이 병사하는데, 이해에 고구려는 왕모가 전연의 인질에서 풀려 나고, 이해에 후의 소수림왕이 태자로서 봉해진다. 이 당시 태자가 전연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전진의 부견이 357년 왕이 된 후 본격적인 외정이 366년 시작되는데, 고국원왕 시기에서 356-368년 13년의 공백이 있다. 즉 고국원왕의 공백의 시기에 그리고 소수림왕이 태자였던 시기에, 전진의 부견의 시기가 된다. 370년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하는데, 고구려도 인접한 국가로서 뭔가 역할을 했을 것으로 기대되는데 13년의 공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의 고구려 찬란한 역사 지우기가 아닌가 한다. 아니면 신라 출신의 김부식이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럴 수 있을 수도 있으나, 이 정도의 공백을 남겨 놓을 정도의 막장의 역사가는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일제의 장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한가지 로마사에서 Constans황제 (337-350)가 피레네산맥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데,이를 죽이고 반정을 일으켰다는 Magnus Magnentius (350-353)황제가 있다. 그런데 단순한 왕권싸움으로 알고 지나쳤는데, 조금 이상하다.
351년 Pannonia지역 (지금의 크로아티아)의 Mursa지역에서 Magnentius는 36,000의 골족 보병과 그외 이태리 북부 Palatinae, Alans, Franks, Saxons 등 동맹군을 이끌고, 로마군과 싸워 비록 졌지만 로마군에게 24,000-30,000명의 군사손실을 초래한 Battle of Mursa Major가 있었다 한다. 로마군에게는 그야말로 Disaster였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353년에는 프랑스 동남부지역인 La batie-Montsaleon (Hautes-Alpes)에서 Battle of Mon Seleucus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Magnentius는 패배하여 칼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반란군이 판노니아지역에서 싸우다가 다시 이동하여 남동부 프랑스에서 싸우는 것은 그 지역적 이동이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바다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3년동안이나 지속되는 것도 그렇고, 많은 여러 부족의 동맹군이 있다는 것도 그렇다. 내부적인 권력 다툼으로 보기에는 규모도 크고 기간도 장기간이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이 아닌가 한다. 이 시기(350-354)의 고국원왕 기록 또한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후에 고국원왕, 소수림왕시기에도 고구려는 프랑스 Gaul지역에서도 전쟁하고, 판노니아지역에서도 전쟁을 했다. Magnentius의 전쟁기간인 350-353 기간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에 또 공백기간 (350-354)이다. 그리고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기록이 고구려 해명태자의 자살방식을 떠올린다. 로마사는 외적의 침입을 곧잘 내부적인 반란으로 묘사한다. 그래야 방대한 영토를 유지한 것처럼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 살펴보는 Gothic Wars(378-382)에서도 이러한 묘사는 나타난다.
언젠가 일제의 장난이 있기 전의 삼국사기 원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로마사의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보다 더 자세하다. 아마 이들이 삼국사기 원본 내용을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또는 삼국사기 전의 기록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밝혀지는 그런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에 불교 전파,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함으로써, 전진의 부견이 왕맹의 조언으로 여러 내치를 확립하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Vakentinian I도 법령 개정, 학교 설립 등을 말하고 있다. 소수림왕 시기도 379-382 : 4년 공백이 있다. 이 시기는 전진의 부견이 383년 비수대전을 준비하는 시기로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 수상하다. 더구나 고구려의 소수림왕과 전진의 부견은 384년 죽은 해가 같다.
384년은, 전진의 부견이 죽는 해이고,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죽는 해이고, 백제의 근구수왕이 죽는 해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진역사와 삼국사기, 로마사를 비교해 보며, 이와 관련 가능성을 유추해보자.
우선 전진의 부견은 비수대전(383)에서 패배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농서의 걸복국인의 반란이 언급되고, 서연(西燕)의 모용홍, 모용충에게 공격을 받아,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다가 후진(後秦)의 요장에게 384년 살해되었다 한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383년에 혜성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384년 죽었다. 혜성의 등장은 삼국사기에서 외적의 침입이나 반란군의 등장을 말한다. 즉 변고에 의한 죽음을 풍기고 있다. 백제의 근구수왕은 384년 죽기 직전, 백제의 상황이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가믐, 흙비, 지진 등의 묘사가 삼국사기에서 어려운 상황을 묘사하는 흔히 쓰는 기술형태이다. 이러한 죽음 형태를 로마사와 비교하면 다소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전개해 본다.
우선 근구수왕의 죽음은 로마의 고트족과의 전쟁 (378-382)에서의 패배로 어려운 동로마의 사정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에서 분석되지만, 로마제국은 375년 수곡성싸움으로 추정되는 Quadi, Sarmatians과의 다뉴브강 전투에서 Valentinian I (근초고왕 추정) 전사한다. 뒤이은 고트족의 전쟁에서 특히 아드리아노플전쟁(378)에서 대패해 동로마제국의 황제 Valens가 죽었다고 한다.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논란이 많지만, 전쟁에 패해 도망치다 죽은 것으로 기술된다. 시신도 못찾았다고 기술된다. 378년 죽었다고 하지만, 378년은 아드리아노플 전쟁이 일어난 해이고, 그후 계속된 고트족의 공격이 382년까지 계속된 것을 보면, 384년에 죽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즉 근구수왕의 죽음은 동로마제국의 왕 Valens의 죽음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반면 Valentinian I의 아들 Gratian 서로마제국 황제(375-383)도 383년 암살된다. 기록에 의하면 383년 Magnus Maximus가 반란을 일으키자, Gratian 황제는 Paris로 진격했으나 패배한다. 그리고 Lyon으로 도주했는데, 살해되었다고 한다.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383)하자 각지의 반란이 일어나고 서연의 공격을 받아 장안에서 도망가고 구체적 위치는 언급되지 않고, 후진의 요장에게 살해되었다는 내용과 다소 유사하다. 그러나 비수대전이 회하의 지류라 하는데, 아직 필자는 이곳이 프랑스지역의 어느 곳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Gratian이 진격한 파리는 세느강이 흐르는데, 동진을 정벌하려는 부견이 싸운 비수와는 거리가 멀다. 전연의 수도였던 용성과 가깝다. 따라서 모용부의 서연의 위치는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모용홍 모용충의 공격을 받아 전진의 부견은 장안을 버리고 도망갔다 했는데, Gratian이 전진의 부견이라면 이 행적은 장안을 파리(시안?)로 묘사한다. 필자는 장안을 Toulouse로 추정했다. 따라서 Paris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후진의 요장에게 죽은 전진의 부견 살해된 장소가 서로마황제 Gratian가 죽은 Lyon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Magnus Maximus세력이 고구려가 아닌가 했는데, 했는데,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 즉 전진의 부견이 고구려의 소수림왕이라면, 전진의 부견으로 추정되는 Gratian을 죽인 Magnus Maximus세력은 고구려의 누구냐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의 소수림왕의 경우는 어떤가? 고구려는 라인강을 두고 중국과 대치하는 상태이므로, 보다 정복적인 활동을 가정한다면, 중국쪽으로 즉 라인강 서쪽으로 고구려가 진출하였을 수도 있다. 이미 고구려 산상왕 시절 중국쪽 위수 (프랑스 Lot강)를 점하였다고 필자는 지난 글 (1)에서 언급했다. 따라서 소수림왕 시절 383년 혜성이 나타났다고 하는 기록은 Magnus Maximus의 383년 반란과 일치한다. 그리고 위치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Magnus Maximus는 고구려내의 반란세력으로 추정할 수 있고, 서로마황제 Gratian의 383년 죽음은 소수림왕의 죽음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Paris, Lyon지역이 고구려 소수림왕이 있었던 지역이 되는 것이다. 즉 전진의 부견이 확보한 화북지역이 소수림왕이 정벌한 지역일 수 있는 것이다. 즉 Magnus Maximus의 반란은 고구려내의 반란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지역을 정벌하러 간 서로마황제 Gratian은 고구려의 소수림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진의 부견이 확보한 화북지역의 영역은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확보한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후진도 고구려일 수 있다는 가정도 된다. 묘하게 전진과 고구려와 서로마제국이 중첩된다. 이는 북조가 고구려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앞으로 이러한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볼 것이다.
이제 이러한 동양사가 로마사에 어떻게 나타나나 살펴 보자. 중국사의 전진과 전연, 그리고 이들과 인접한 고구려의 역사는 서로마제국의 Valentinian I 시기의 역사에서 나타난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서로마의 Valentinian I 시기(365-375) 전쟁은 크게, 1) Alamanni와 전쟁, 2) Africa 반란 과 영국에서의 반란진압, 그리고 3) 동부의 항가리 지역에서의 Quadi, Sarmatians과의 전쟁으로 나눌 수 있다. 필자는 이미 Suebi족의 일파인 Alamanni를 선비족의 모용부로 오래 전부터 추정했다. 즉 Valentinian I의 Alamanni정벌은 전진의 전연멸망과 매우 유사하게 기록된다. 반면 아프리카 반란진압, 판노니아 지역에서의 Quadi, Sarmatians과의 전쟁은 백제 근초고왕의 그것으로 보이며, 판노니아지역에서의 전쟁은 고구려와의 수곡성 전쟁으로 판단된다. 아프리카 반란 진압은 근초고왕 시기의 남만 침미다례 정벌로 판단된다. 영국에서의 반란 진압은 아직 파악이 안된 상태이다. 즉 서로마 Valentinian I의 기록은 전진의 역사 (고구려의 역사일 수도 있음), 그리고 백제의 역사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백제의 근초고왕의 역사가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위에서 이미 추정했다. 오히려 백제는 동진과 가까왔다. Valentinian I 대한 자세한 자료 언급은 지난 (1)의 글에서 살펴 보았으므로 여기선 생략하고, 단지 수곡성, 평양성에 대한 언급만을 추가한다.
3) 수곡성 전투지역 추정
수곡성은 Brigetio (항가리와 슬로바키아 경계, 다뉴브강가 Komarom castle) 지역으로 추정된다. Valentinian I는 374년 11월 17일 Savaria에서 Brigetio로 이동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고 기록된다. 이 지역 수곡성 전쟁에서 지면서 Valentinian I 즉 근초고왕은 전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이 지역은 로마가 AD 86년부터 5세기 중반까지 로마군단이 머물렀다. Valentinian I이 죽은 장소로 기술된다. 중세에는 Camarum으로 불리웠다. 즉 현대의 Komarom (Hungary)이다.
"Brigetio (=Szőny) was a town in Hungary. Since 1977, it has been part of the city of Komárom....
The Roman legion Legio I Adiutrix was based here from 86 AD to the mid-5th century and took part in several Parthian wars.[2]
The town was known as Brigetio to the Romans, and was the site of the death of Roman Emperor Valentinian I[3] An important Roman military diploma was found in the town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 it is now in the British Museum's collection.[4] Later during the Middle Ages the town was called Camarum. The town has one of the earliest records of conjoined twins - Helen and Judith.[5] "
(source : Brigetio (=Szony,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364-475), 펌글 참조)
Location of Komarom in Hungary
Location of Komarno (=Komarom) in Slovakia
다뉴브강과 Vah river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Komarom은 다뉴브강 북쪽의 Komarno (in Slovakia)와 다뉴브강 남쪽의 Komarom(in Hungary)의 둘로 나뉘어 있는데, 예전에는 한 지역이었으며, iron bridge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요새의 잔재가 많이 있으며, 수곡성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많이 싸워온 곳으로, 이후에도 오스만제국시절, 최근 2차대전까지도 격전지의 요새지역이 되었었다.
주위에서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나왔으며, 기원전 1세기 켈트족에 의해 정착된 것으로 유물이 말해 준다. 로마는 1세기에 점령하고 2세기에 다뉴브강 남쪽에 요새를 건축한 것으로 기술된다.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다뉴브강 위쪽에도 유사한 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슬로바키아지역에서 요새의 흔적이 아직도 있다. 아래 자료에서 4세기까지 로마지역이었다고 하는데, 375년 고구려가 이 수곡성을 빼앗았다. 이후에도 백제가 고구려와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 503년 고구려 문자왕 시절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했으나 전투결과는 불분명하다 했다. 즉 375년 수곡성을 고구려에 빼앗겼으나, 이후 백제가 다시 회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문자왕 시절 다시 공격하였을 것이다. 이 근처 Savaria 지역을 훈족의 아틸라가 441-445 기간동안 점령하였다는 기술이 있는 것을 보면,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장소임을 알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다뉴브강 중앙에 섬처럼 되어 있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Komárno (Hungarian: Komárom, colloquially Révkomárom, Öregkomárom, Észak-Komárom, German: Komorn, Serbian: Komoran/Коморан) is a town in Slovakia at the confluence of the Danube and the Váh rivers. Historically it was formed by the "old town" on the left bank of Danube, present day Komárno in Slovakia, and by a "new town" on the right bank, present day Komárom in Hungary, which were historically one administrative unit....Komárno is Slovakia's principal port on the Danube. It is also the center of the Hungarian community in Slovakia,....
The name is of Slavic or Latin origin. The first interpretation is straightforward – the name consists of two parts: komár (Slavic/Slovak: a mosquito) and an ending -no (a place name). Thus, Komárno means "a place with many mosquitos", reflecting a location in a swampy area near the Danube.[6] According to another theory, the name could be derived from Latin commercium (a trade center)....
History
Komárno, located at the confluence of the Danube (rom. Ister) and Váh rivers, 108 – 115 meters above sea level, is an old settlement. Findings stem from the Neolithic, Eneolithic period, the Bronze Age. Many archaeological remains found throughout the region surrounding Komárno indicate the area was settled by the Celts toward the end of the 1st Century BC.
During the 1st century AD the Roman Empire extended its frontiers over the region forming the province of Pannonia (present day Transdanubia). Here the Romans, on the southern shore of the Danube, established the military camp and the settlement Brigetio. A chain of fortifications built along the Danube shores protected the camp and town. On the northern shore of the Danube, the fortified bridgehead of Celemantia (near present-day Izsa), was built at the beginning of the 2nd century. Some historians suppose that there was a similar Roman fortress on site of the Komárno Castle because of the strategic importance of the place but excavations have not yet proved this theory. The Romans remained in Pannonia until the end of the 4th century when they were gradually pushed out by the strengthening attacks of barbarian tribes.
Gothic, Slavic and Avar findings have been excavated here from the 7th and 8th century AD. After the collapse of the Avar empire at the end of the 8th century, Komárno had remained one of the last resorts of the Avars. The most significant Avar findings are the so-called Shipyard-graves. They are one of the most significant Avar findings in the Carpathian Basin with 153 graves dated from the 7th–9th Century."
(source : Komarno,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364-475), 펌글 참조)
Siege of Komárom Fortress by the Ottoman Turks in 1594 (source : Wikipedia)
(By Abraham Ortelius - Ungarische Chronik,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03879)
Komárno Fortress ("Comorre"). Engraving from Manesson: Art de la Guerre, 1696
(source : Wikipedia) (By Alain Manesson Mallet - Peace Palace Library,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2687833)
Komarom Fortress in Hungary (source : Wikipedia)
4) 치양성 전투 지역의 추정
동로마제국의 Valens는 376-382 기간동안 고트족과 전쟁을 한다. 필자는 본 블로그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에서 고트족이 고구려라 추정했다. 또한 광개토태왕에 관한 글에서 서고트족의 Alaric I왕이 광개토태왕이라 추정했다. 그리고 5세기의 서고트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와 남프랑스를 차지 하였는데, 이 또한 고구려라 추정했다. 고트족이 고구려라는 것은 필자가 여러 글에서 확인한 바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고트족과 동로마와의 전쟁 중 이시기의 Gothic War (376-382)가 중요한 것은, 특히 378년 있었던 Battle of Adrianople 의 패배로 말미암아 로마는 서로마시대의 멸망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래 자료 참조)
"Flavius Valens (c. 328 – 9 August 378) was Roman emperor from 364 to 378. He was given the eastern half of the empire by his brother Valentinian I after the latter's accession to the throne. Valens was defeated and killed by the Goths in the Battle of Adrianople, which marked the beginning of the collapse of the Western Roman Empire......"
(source : Vale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동로마제국, 펌글 참조)
Battle of Adrianople을 분석하기 앞서 그전에 이루어졌던 고구려와 백제의 치양성 전투로 추정되는 아래 로마와 고트족의 369년 전투를 살펴 보자.
고구려 고국원왕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369)
백제 근초고왕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69)
즉 369년 고구려와 백제는 치양성에서 싸웠는데, 백제가 승리를 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아래 로마사 자료를 보면 치양성전투가 다뉴브강의 하류 Noviodunum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Noviodumum Fort in Romania (source : Wikipedia)
(By Mixolidic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2238266)
고트족의 왕 Ermanaric (297-376)은 다뉴브강북쪽, 흑해에서 발틱해까지, 우랄산맥지역까지 정복한 고트족의 알렉산더라 불리운다. 재임기간이 너무 긴 것이 왜곡된 느낌을 주는데, 고구려의 미천왕과 고국원왕 시기에 해당한다. 훈족의 침입으로 자살했다 하는데, 이는 훈족과 고트족이 동일한 것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만든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에서 Ermanaric 왕은 동로마의 Procopius 반란 (365-366)에 지원병을 보냈다고 기술되는데, 필자는 이 반란 또한 고구려의 침입으로 판단한다. 고국원왕 기록 공백시기 356-368 시기에 해당한다. 이때도 이미 고구려와 백제는 다뉴브강변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것이다. 369년 동로마 황제 Valens는 Noviodunum에서 고트족에게 승리를 거둔다. 고트족왕 Athanaric은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 태자신분의 소수림왕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369년 치양성에서 싸워 백제가 승리했다.
"War against the Goths
During Procopius's insurrection, the Gothic king Ermanaric, who ruled a powerful kingdom north of the Danube from the Euxine to the Baltic Sea,[16] had engaged to supply him with troops for the struggle against Valens. The Gothic army, reportedly numbering 30,000 men, arrived too late to help Procopius, but nevertheless invaded Thrace and began plundering the farms and vineyards of the province.[17] Valens, marching north after defeating Procopius, surrounded them with a superior force and forced them to surrender. Ermanaric protested, and when Valens, encouraged by Valentinian, refused to make atonement to the Goths for his conduct, war was declared.[18]
In the spring of 367, Valens crossed the Danube and attacked the Visigoths under Athanaric, Ermanaric's tributary. The Goths fled into the Carpathian Mountains, and the campaign ended with no decisive conclusion. ......
In 369, Valens crossed again, from Noviodunum, and by devastating the country forced Athanaric into giving battle. Valens was victorious, Athanaric and his forces were able to withdraw in good order and pleaded for peace. ...... In early 370 Valens and Athanaric met in the middle of the Danube and agreed to a treaty that ended the war.[20] "
(source : Vale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동로마제국, 펌글 참조)
Location of Noviodunumin Romania (source : Wikipedia)
"The Battle of Noviodunum was fought in 369 between the Roman Empire and the Thervingi at Noviodunum, Moesia, modern-day Romania. At this time, the leader of the Thervingi, Athanaric was threatening northern Greece. Having repulsed the invaders at Daphne, Emperor Valens secured a decisive victory against Athanaric at Noviodunum. In September 369, Athanaric accepted an advantageous treaty with Valens, but peace between the Goths and the Romans would turn short-lived. "
(source : Battle of Noviodunum,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Balkhans, 펌글 참조)
그러나 이러한 치양성 전투에서의 백제의 승리(369)는 그후 계속적으로 치양성을 보존하게 된다. 495년 고구려 문자왕이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했으나 신라의 지원으로 고구려가 패배했다 기록된다. 로마사에서는 상기 Noviodunum지역이 Aurelian (270-275)시기에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나, 324년 다시 건설하고, Theodosius II(408-450) 때까지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기록된다. 훈족에 의해 443/441 점령되나, 비잔틴제국 시절 (Justin I (518-527) or Justinian I(527-565))에 회복하는 것으로 기록된다. 훈족에 의해 점령되는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 시기인데, 삼국사기는 이때 매우 부실한 자료를 보이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뉴브강가에서의 전쟁에서 로마(백제)는 고트족(고구려)에게 참패를 거듭한다. 우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375년 수곡성 싸움(Komarom castle)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패해 근초고왕(=Valentinian I)이 죽는다. 그리고 이어진 Gothic Wars (376-382)에서 백제는 참패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소수림왕때 이 시기(379-382)는 공백으로 되어 있어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확인 되지 않는다. 일제에 의한 또는 김부식에 의한 의도적인 지우기가 아닌가 한다.
그동안 로마는 고트족과의 전쟁, Alemanni와의 전쟁만을 언급했었는데, 376-382 고트족과의 전쟁은 훈족과 Alans (흑수말갈)과 고트족의 연합으로 로마에 침입했다고 처음 언급하고 있다. 어떤 서양 사가는 당시 이민족의 침입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고 대개 고트족의 침입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376-382 기간동안 고트족(훈족, 말갈 포함)은 처음에는 불가리아 흑해 가까운 지역(Deultum)으로 공격하다가, 이후 두 방향으로 전진했다. 하나는 일리리움, 판노니아 서쪽, 즉 지금 크로아티아 방면(Adrianople)이다. 다른 팀은 남쪽으로 마케도니아와 테살로니카로 공격했다. 이 전쟁은 로마제국의 처절한 패배로 끝난다. 로마 군사의 2/3의 병력이 전장에서 죽었다 한다. 이 와중에 동로마 황제 Valens가 전사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Goths, joined by their new allies the Huns and Alans, travelled south in search of plunder and close to the city of Deultum won the Battle of Deultum destroying most of the Eastern Roman army and the city. Barzimeres, tribunum scutariorum (Commander of the Guards), was killed and Equitius, cura palatii (Marshal of the Court), was captured.[49] The Goths marched on Augusta Trajana to attack the general Frigiderus but his scouts detected the invaders and he promptly withdrew to Illyria[50] but the city was also destroyed. Equitius later managed to escape from captivity.
Archaeological finds in this region and dated to this period reveal Roman villas with signs of abandonment and deliberate destruction.[51] The devastation forced Valens to officially reduce taxes on the populations of Mœsia and Scythia.[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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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stern Roman army withered under the hot summer sun and the Goths lit fires to blow smoke and ash into the Roman formations. Valens reconsidered the peace offer and was preparing to send Richomeres to meet with Fritigern when two Roman elite Scholae Palatinae units, the Scutarii under Cassio and the Sagittarii under Bacurius, engaged the Goths without orders. This forced the Battle of Adrianople to begin. As the armies engaged, the Greuthungi and Alan cavalry arrived and swung the battle in favor of the Goths. The Roman left flank was surrounded and destroyed and a rout began all along the lines which became a bloodbath for the Roman forces. They were so tightly packed they could not maneuver and some could not lift their arms at all. Few managed to run.[70][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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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bastianus, Traian, tribune Aequitius and thirty-five senior officers had been slain, while Richomeres, Victor and Saturninus had escaped. Two-thirds of the Eastern Roman army lay dead upon the field.[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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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ths, invigorated by their incredible victory, besieged Adrianople but the city resisted......
The Goths launched another assault but it too failed. With this final defeat, the Goths gave up and marched away.[76] They together with some Huns and Alans went first to Perinthus and then to Constantinople. There they were fended off in the small battle of Constantinople with the help of the city's Arab garrison............
In 380, the Goths split.[e] The Greuthungi went to Illyricum and invaded the Western province of Pannonia. What happened is again disputed; they were either defeated by Gratian's forces, or they peaceably signed a deal that settled them in Pannonia. The Thervings went south into Macedonia and Thessaly. Theodosius with his new army marched to meet them but, filled with unreliable barbarians and raw recruits, it melted away. The barbarian soldiers joined Fritigern, and many Romans deserted. With victory the Thervings were free to force the local Roman cities in this new region to pay them tribute. It was then that the Western Roman Empire finally offered some help. Having ended the Gothic invasion of Pannonia, Gratian met Theodosius at Sirmium and directed his generals Arbogast and Bauto to help drive the Goths back into Thrace, which they successfully accomplished by the summer of 381. Theodosius meanwhile left for Constantinople, where he stayed. After years of war, the defeat of two Roman armies and continued stalemate, peace negotiations were opened.[88][89][90]
.........
Goths were given lands inside the Roman Empire itself, in the provinces of Scythia, Mœsia and possibly Macedonia, under their own authority and were not dispersed. This allowed them to stay together as a unified people with their own internal laws and cultural traditions. To seal the agreement, Theodosius threw the Goths a large feast.[94][95]
(source : Gothic War (376-382),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Goths, 펌글 참조)
불가리아 흑해 해안가에 있는 Deultum 위치
Location of Adrianople (= Edirne) in Turkey
이러한 로마(백제)의 고트족과의 전쟁(376-382) 결과로, 고트족 즉 고구려는 스키타이지역, 모에지아지역, 그리고 마케도니아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독립적 운영을 하도록 허가했다는 위에서의 기록은 이 지역 영토를 빼앗겼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항상 로마사는 패배에 대한 변명이 많다. 전형적인 춘추필법의 기록 결과이다. 로마사를 연구하는 서양학자들도 반성을 많이 하고, 보다 솔직해져야 한다.
이 전쟁의 참패 결과는 로마 정부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19살의 Gratian황제는 동로마를 위해 Theodosius I황제를 임명한다. 이 아드리아노플 전쟁의 참패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 기술된다. (아래 자료 참조)
"J.B. Bury, a noted historian of the period, provides a specific interpretation on the significance of the battle: it was "a disaster and disgrace that need not have occurred."[37] For Rome, the battle incapacitated the government. Emperor Gratian, nineteen years old, was overcome by the debacle, and, until he appointed Theodosius I, unable to deal with the catastrophe, which spread out of control.
(source : Vale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동로마제국, 펌글 참조)
이상으로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고국양왕과 광개토태왕 시기의 기록 검토는 글이 너무 길어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본 글에서는 우선 수곡성의 위치가 다시 추정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필자는 과거 수곡성이 그 이름의 유사성으로 그리고 서양학자들이 그린 지도를 참고하여, 크리미아에 있는 Sudak Fortress로 추정했는데, 이는 착오였음을 밝힌다. 그동안 로마사를 보며, 다뉴브강 어디로 심증을 가졌는데, 이번 글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밝히게 되었다. 이는 근초고왕이 수곡성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Valentinian I 황제가 죽은 장소를 찾아내 결국 밝힌 것이다. 위키피디아 자료는 중요한 정보는 꼭꼭 숨기는 경향이 있다. 끈질기게 파고 들지 않으면 찾아내기 힘들다. 가끔은 코끼리 다리 만지는 장님의 심정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찾아내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둘째로 고국원왕 시기에 전연의 공격에 의해 밀려 나는 고구려 상황을 검토하면서, 필자가 발해고 지리고를 통해 추정한, 그리고 지난 (1) 의 글을 통해 추정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 추정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평양성 전투를 검토하면서, 위키피디아의 직접적 자료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평양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한수라는 지명이름을 남조의 진(陳)나라 역사에서 찾아내, 신라와 백제의 프랑스지역, Gaul지역, 즉 중국의 역사지역에서 활동한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 큰 수확으로 여긴다. 이 역시 평양성과 한성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서 얻은 수확이다. 앞으로도 이와 관련하여 추가적인 연구가 계속될 것이다. 신라의 위치도 이태리반도와 관련이 있는지 계속 검토될 것이며, 백제, 고구려의 역사가 언제부터 프랑스나, 이베리아반도에서 있었는지 즉 중국지역에서 활동했는지 파악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야말로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덧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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