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마한의 구사한국은 지중해의 코르시카이다

2023. 1. 24. 08:39한국사/기타

부제 : 구사한국, 구야한국, 구노국은 견이이며 키메리언이다

부제 : 구야한국은 가야이다. 

 

부제 : 가라해는 이태리 서부의 Tyrrhenian Sea이다

 

부제 : 가라는 카르타고이다.

 

 

1. 남마한의 구야한국과 한단고기 기록

 

'한단고기 고구려본기 중

 

협보가 마한의 산중에 살았는데 그를 따라서 사는 자가 수백여집이나 되었다. 여러해 동안 흉년이 들어 떠돌아 다니다가 장혁을 알게 되었다. 이에 무리를 꾀어 양식을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바다와 포구를 거쳐 조심조심 배를 저어 곧장 구사한국에 이르렀다. 이곳이 가라해 북쪽해안이다. 여기서 머문지 몇 달만에 아소산에 옮겨 살았다. 이 사람이 다파라국 시조이다.

 

협보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외에 실질적인 2인자로 추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부여에서 온 유리가 왕이 되자 미움을 사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마한의 구사한국 혹은 구야한국에 도달했다고 전한다.

 

구야한국은 남가라로, 전성기에는 대가라로 불렸고, (한반도) 남단뿐만 아니라 바다건너 왜 지역의 구주에 또 하나의 분국을 이루었고, 구주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한단고기에 전하길 구주에 있던 구야한국은 변진 구야국인들이 모여 산 곳으로, 구야본국인들이 직접 다스렸다고 한다. '

 

 

 

2. 남마한의 구사한국과 코르시카

 

필자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은 프랑스의 론강의 지류인 Jabron river라 했다. (본 블로그 글, '요수인 압록수는 Rhone river이다', '졸본천은 론강의 지류인 Jabron river이다' 참조) 이곳에서 협보가 내려온 곳은 프랑스 남부 해안이다. 따라서 상기 글에서 협보가 정착한 '구사한국'은 Corsica island로 보인다. 구사 -> 코르시카 (불어로 '코르스(Corse) ->고르스->구사)로 한문 구사한국은 코르스를 음차한 것으로 판단된다.

 

남마한의 구사한국이라 했다. 따라서 마한의 영역이면서 남쪽에 위치한 것이란 뜻이다. 필자는 마한이 이베리아 반도, 이태리반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이에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르시카의 위치는 남마한이라 할 만하다.

 

필자는 필자의 다음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임나 가라는 지중해에 있었다'라는 글에서, 왜의 임나성은 시실리아섬에, 그리고 왜의 가라성은 샤르데냐섬에 있는 Cagliari (Latin : Caralis) castle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가라는 가야로 판단되며, 카르타고가 가라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왜는 별도 지역이고 임나와 가라는 가야가 아닌가 한다.

 

 

3. 구야한국, 구노국과 견이 및 키메리언

 

아래 코르시카 위키피디아 자료에서 Herodotus는 코르시카섬을 Kurnos, Kyrnos라 했다 한다. 설명도 없고 그 뜻도 모른다 한다. 필자는 이 이름이 구노국(狗奴國)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르노스, 키르노스 -> 구르노, 키르노 -> 구노 가 아닌가 한다. 왜의 여왕 비미호는 구노국(狗奴國)왕과 불화를 겪었다 한다.

 

구노국과 구야한국이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같은 개 구(狗)자를 썼다. 견이(犬夷), 견융(犬戎)이라 불리는 동이의 한 부족으로서, 필자는 이들이 이 지역에 진출한 키메리언이 아닌가 한다.

 

아래 그림에서 키메리언이 개를 이끌고 전투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키메리언은 스키타인의 일종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진출했다. 즉 배사법의 활을 쓰는 이들은 고구려와 연관있는 부족으로 보인다. 협보는 주몽의 개국공신이었다. 따라서 협보가 남쪽으로 내려와 구사한국을 세웠는데, 키메리언과 관련 있어 보인다.

 

이 그림에서 저자는 로마공화국도 같은 모습이라 했다. 위키피디아 자료를 보면, 코르시카는 이태리 반도의 Etruscan문명과 연관성이 깊다고 기술한다. 따라서 협보는 이태리반도 서쪽 해안을 타고 내려 오다가 코르시카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코르시카 원주민들은 Ligures(=Ligurians)이라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아래 지도에서 Ligurian이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다. 즉 필자가 고려한 협보의 남하와 같은 경로를 생각할 수 있다.

 

Italy in Iron age (source : Wikipedia)

 

 

Cimmerian Warriors with dogs (source : The History Files)

 

Cimmerian warriors with dogs (source : The History Files)

 

 

4. 가라해와 Tyrrhenian Sea

 

한단고기에서 협보가 도착한 구사한국은 가라해의 북쪽 해안이라 했다. 그러면 가라해는 어디인가? 필자는 가라가 카르타고가 아닌가 했다. 카르타고를 세운 여왕 Dido는 페니키아의 Tyre에서 망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르데냐, 시실리, 카르타고 등이 카르타고의 세력권이다. 즉 그리스 세력과 대응하는 페니키아 세력권이다.

 

Tyrrhenian Sea이름은 Estrucan과 관련 있다는 Tyrrhenian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Wikipedia에서는 설명한다. 필자는 Tyre에서 건너온 세력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한다.

 

필자는, 트로이전쟁이 있던 Troy는 지금 언급되는 터어키의 서해안에 있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문명권과 페니키아 문명권의 해상세력 다툼이라 볼 때, 페니키아의 중심지였던 Tyre가 트로이가 아닌가 한다. Tyre는 그리스어로 Tylos라 했다 즉 트로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트로이전쟁에서 패한 세력이 카르타고로 이주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서지중해에서 페니키아 세력권을 형성한 것으로 판단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함께 참여한 Dardanian인 Aeneas가 카르타고를 거쳐 이태리 반도의 라티움에 도착해 정착하여 로마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Romulus의 조상이 됐다고 한다. Etruscan과도 관련 있어 보이는 이 로마 공화국의 건국은 로물루스가 늑대의 젖을 먹는 동상처럼, 늑대와 관련 있으며, 늑대를 가축화한 개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키메리언의 이동이 리디아왕국에서 왔다는 것과도 연관될 수 있다.

 

The Capitoline Wolf, long considered an Etruscan bronze, feeding the twins Romulus and Remus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는 Etruscan 청동 조형물 (이태리, Capitolini 박물관) (source : Wikipedia)

 

Etruscan pendant with Swastika symbols(만자 모양), Bolsena, Italy, 700 BC - 650 BC, Louvre (source : Wikipedia)

 

요약하면 가라해는 카르타고인 가라의 세력권 바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현재의 Tyrrhenian Sea와도 Tyre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즉 가라해는 Tyrrhenian Sea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코르시카는 가라해의 북쪽해안이 된다.

 

 

Tyrrhenian sea (source : Wikipedia)

 

 

5. 가라와 카르타고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은 이태리 반도 남부 시실리섬까지 내려갔고, 태자 Athaulf에게 시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까지 가서 식량을 구해올 것을 지시했으나 실패하고 돌아 오고, 이후 로마로 돌아 오는 길에서 서거했다고 위키피디아는 기술하고 있다. 장수왕 시기의 반달족은 북아프리카까지 점령하고 이후 지중해의 왜 또는 가야의 지역으로 보이는 섬들을 모두 정벌하였다. 장수왕의 태자시절 Athaulf로서 가라에 대한 공격이 실패해서 이후 반달족에 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광개토태왕은 장수왕 시기의 반달족 경로를 거치지 않았지만, 시실리아섬, 즉 임나성이 있는 것으로 갔고, 여기서 더 남하한 Athaulf가 카르타고에 있는 가라성을 정벌한 것으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임나성은 시실리섬, 가야의 가라성은 카르타고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Alaric I이 3번이나 포위했다고 하는 로마성은 신라의 금성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기 한단고기 기록에서, 구야한국의 사람들이 바다 거너 더 남쪽으로 내려 가서, 왜의 구주 지역에 새로운 구야한국을 세웠고, 제일 큰나라가 되었다 한다. 그리고 구야한국이 본국 사람들이 다스렸다 한다. 필자는 이 바다 건너 세운 또 하나의 구야한국이 금관가야, 즉 카르타고가 아닌가 한다.

 

금관가야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쓸 예정인데, Tyre에서 카르타고에 망명온 Dido여왕과 허황옥이 배타고 와서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다는 설화가 매우 유사하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지만, 김수로왕이 150년이상 왕으로 있었다는 주장을 보면, 시간상의 정확성은 의문시 된다.

 

 

6. 가야, 우륵, 진흥왕과 코르시카

 

 

진흥왕 12년(551)에 가야의 우륵이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에 가야금을 전하고 가야금 12곡을 전한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우륵의 가야가 어디인지 언급이 없다. 그런데 신라는 551년 고구려 침입하여 10개군 빼앗았다(삼국사기 자료).이때 고구려는 같은해 돌궐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한다.

 

이 당시 이태리 지역의 롬바르디왕국이 동고트 영역 코르시카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전에 이미 코르시카는 동고트가 점령하고 있어 반달왕국의 침입도 극히 일부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위키피디아 자료는 8세기에 롬바르디왕국이 동고트의 코르시카를 점령한 것으로 기록되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551년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551년 우륵의 가야 항복을 고려할 때, 코르시카가 우륵의 가야국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十二年春一月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다 (AD 551)

十二年春三月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 (AD 551)

十二年 고구려를 침입하여 10개 군을 빼앗다 (AD 551)

十三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 (AD 552)

十四年春二月 황룡사를 짓다 (AD 553)

十四年秋七月 신주를 설치하다 (AD 553)

十四年冬十月 백제 왕의 딸을 소비로 삼다 (AD 553)

十五年秋七月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다 (AD 554)

十五年 백제가 관산성을 공격하다 (AD 554)

十六年春一月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다 (AD 555)

十六年冬十月 북한산에 순행하다 (AD 555)

十六年冬十一月 북한산에서 돌아오다 (AD 555)

十七年秋七月 비열홀주를 설치하다 (AD 556)

十八年 국원을 소경으로 삼다 (AD 557)

十八年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하다 (AD 557)

十九年春二月 귀족의 자제 등을 국원소경으로 옮기다 (AD 558)

十九年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다 (AD 558)

559-561 : 3년 공백

二十三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의 백성을 침략하다 (AD 562)

二十三年秋九月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다 (AD 562)

(자료 : 진흥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 역사)

 

우륵은 대가야국의 가실왕 때 12현금 가야금을 제작하고 연주곡 12곡을 작곡했다 한다. 우륵이 작곡한 12 곡명은 가야의 지명을 언급하였다 한다. 그 곡명이 아래와 같다 :상가라도, 하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해, 상기물,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해, 이사 (자료 : 우륵, 두산백과)

 

즉 가라라는 명칭이 많다. 가라가 가야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카르타고도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가라라 했다. 또한 샤르데냐 섬에도 Carali Castle이 있다. 즉 이부근지역이 모두 가라지역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 가라해를 Tyrrhenian Sea라고 추정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우연히도 코르시카 섬내의 행정조직을 pagi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혹시 우륵의 12곡명 중에 보기가 있는데 이를 말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Administratively, the island was divided in pagi, which in the Middle Ages became the pievi, the basic administrative units of the island until 1768.[2]

(source : Corsica, wikipedia)

 

"가야금은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는 악기였다. 가실왕이 악사 우륵을 왕경까지 불러내 가야금을 만들고 아울러 12곡을 작곡하게 한 것은 백제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가야 세력을 결속하고자 한 목적이 있었다. 가실왕은 ‘제국의 방언이 서로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악성 우륵에게 하나가 아닌 12개 지역에 해당하는 12곡을 짓게 하였다. 가실왕은 음악을 통하여 대가야의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국가 의례에서 각 지역과 관련된 악을 연주하는 것은 바로 그 지역에 대한 관념적인 지배의식의 표현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주변 제국들의 악을 연주하게 하거나 기예를 보이게 했는데 같은 맥락이다.

당시 가야금 곡조에는 모두 15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우륵이 지은 곡이 12곡, 우륵의 제자 니문이 지은 곡이 3곡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제목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해,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등 가야의 지역명이었다. 이 지역들은 대가야연맹을 형성했던 소국이거나, 국방상 주요 거점 지역으로 추정된다. "

(자료 : 우륵, 인물한국사)

 

일찍이 우륵이 지은 12곡명은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獅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다. 이 중에서 「보기」·「사자기」·「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아서 해당 지방 민요의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자료 : 우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 또는 ‘구야한국(狗耶韓國)’으로 기록되었으며, 본가야국(本伽耶國), 즉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모체로서『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락(駕洛·伽落)’·‘가라(加羅)’·‘가라〔加良〕’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야국은 입지적으로 낙동강을 따라 경상도 각 지역과 통하고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들어가는 해로상의 중요지점으로서, 일찍부터 외부세력과 빈번한 교섭이 있어온 지역이다. 특히, 진한(辰韓)·변한의 철자원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동예(東濊)·마한(馬韓)·왜(倭) 등과 철을 매개로 활발한 교역관계를 가지면서 한반도 초기철기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자료: 구야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7. 변한의 철자원과 샤르데냐, 카르타고 주변지역의 철생산

 

상기 구야국 자료에서 철이 생산되어 주위국들과 활발한 교역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코르시카, 샤르데냐, 북아프리카 지역을 살펴 보니 이들 지역에 철이 생산되고 있다. 현재는 아프리카에서 Mauritania, Algeria(Tunisia와 국경근처지역)가 South Africa와 함께 주요 철생산국이다. 즉 변한의 철 생산지는 가야가 이들 지역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8. 맺음말

 

이상으로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본 구사한국, 구노국, 구야한국이 가야국이며, 코르시카가 그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마치고자 한다. 지난 글에서는 시실리가 가야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본 글에서는 코르시카가 또한 가야의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참고로 코르시카의 역사에 대해 중세까지의 영문 내용을 아래 첨부한다. 다음 글에서는 카르타고가 금관가야가 아닌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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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History of Corsica

 

Geography

 

The history of Corsica has been influenced by its strategic position at the heart of the western Mediterranean and its maritime routes, only 12 kilometres (7 mi) from Sardinia, 50 kilometres (30 mi) from the Isle of Elba, 80 kilometres (50 mi) from the coast of Tuscany and 200 kilometres (120 mi) from the French port of Nice. At 8,778 square kilometres (3,389 sq mi), Corsica is the fourth largest island in the Mediterranean, after Sicily, Sardinia and Cyprus.[citation needed]

Classical antiquity

 

Italy in 400 BCE.

Name

The ancient Greeks, notably Herodotus, called the island Kurnos;[citation needed] the name Corsica is Latin and was in use in the Roman Republic.

 

Why Herodotus used Kyrnos and not some other name remains a mystery, and the phrases of the authors give no clue. The Roman historians, however, believed Corsa or Corsica (rightly or wrongly they interpreted -ica as an adjectival formative ending) was the native name of the island, but they could not give an explanation of its meaning. They did think tha the natives were originally Ligures.[2]

Phoenician and Greek footholds

According to Herodotus, the Phoenicians became the first to colonize the island. Ionian Greeks established a brief foothold in Corsica with the foundation of Aléria in 566 BCE. They were expelled by an alliance of the Etruscans and the Carthaginians following the Battle of Alalia (c. 540-535 BCE). The Etruscans, then Carthage, dominated the island until the Roman Republic annexed it in 237 BCE during the period of the Punic Wars.

Roman era

The island was under Etruscan and Carthaginian influence until 237 BCE, when it was taken over by the Roman Republic. The Etruscans were confined to a few coastal settlements, such as Aléria, and the Carthaginians were strong on neighboring Sardinia. The Romans, however, had a profound influence, colonizing the entire coast, permeating inland and changing the unknown indigenous language to Latin. Corsica remained under Roman rule until its conquest by the Vandals in 430 CE. It was recovered by the Byzantine Empire in 522, adding a late-ancient Greek influence.

Middle Ages

Main article: Medieval Corsica

Modified medieval citadel at Calvi

The Byzantine Empire in 555 AD, including Corsica

After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Corsica was frequented by migrant peoples and corsairs, notably Vandals, who plundered and ravaged at will until the coastal settlements fell into decline and the population occupied the slopes of the mountains. Rampant malaria in the coastal marshes reinforced this decision. Due largely to competition for the island from Ostrogoths Foederati who had settled on the Riviera, the Vandals never penetrated much beyond the coast, and their stay in Corsica was relatively short-lived, just long enough to prejudice the Corsicans against foreign adventurers on Corsican soil.

750 AD

In 534, the armies of Justinian recovered the island for the empire, but the Byzantines were not able to effectively defend the island from continuing raids by the Ostrogoths, the Lombards, and the Saracens. The Lombards, who had made themselves masters of the war- and famine-shattered Italian Peninsula, conquered the island in c. 725.

The Lombard supremacy on the island was short lived. In 774, the Frankish king Charlemagne conquered Corsica as he moved to subdue the Lombards and restore the Western Empire. For the next century and a half, the thus established Holy Roman Empire continually warred with the Saracens for control of the island. In 807, Charlemagne's constable Burchard defeated an invading force from Al Andalus.[3]

 

(source : History of Corsica,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