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고구려

고구려 - 수, 당 전쟁은 유럽에서 있었다

CG PARK 2022. 10. 28. 06:34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요서는 이 강의 서쪽 즉 프랑스지역이 된다. 따라서 중국사는 이 프랑스 지역에서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요동의 역사, 동이의 역사는 요수의 우측, 즉 론강의 우측에 있는 역사로 추정한다. 이와 관련 하여 필자는 그동안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며, 이를 증명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 필자가 증명하지 못한 것이 있다. 즉 고구려와 수, 당의 큰 전쟁이다. 이는 누가 보아도 요수를 건너서 공격해 온 수나라, 당나라의 공격이며, 고구려가 잘 막아낸 역사이다. 그만큼 역사를 숨기고자 하는 역사 왜곡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숨겨야 한다. 이것이 그대로 들어 나면 역사왜곡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 하다. 그 눈물 겨운 노력을 보면 역사학자로서의 자존심도 모두 팽개친 듯하다. 그러나 꼬리는 잡히기 마련이다. 필자는 오늘 이들의 숨긴 꼬리를 필자 또한 눈물겨운 노력으로 찾아내어 이들의 역사적 왜곡을 밝히고자 한다.

 

I. 598년 중국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

 

삼국사기 고구려편을 보면 수나라는 남조의 진나라를 589년 멸한 후 약 10년이 지난후 598년 고구려를 침범해왔다. 고구려도 수나라가 진나라를 통합한 이후 수나라의 침입에 대응하여 준비한 것으로 기록이 나온다. 필자는 남조의 진나라가 남조의 남제, 후량의 위치에 있어, 북제의 남쪽으로 판단한다. 즉 프랑스의 동북쪽에 있는 북제의 남쪽이니까, 바로 부르군디언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는 진흥왕의 롬바르드 신라와도 가까이 있으며, 또한 서고트왕국을 고구려로 추정할 때, 고구려와도 피레네 산맥을 건너 남쪽으로, 또한 동쪽으로 요수(론강)를 사이에 두고 수나라가 인접하게 된다. 신라와 수나라는 롬바르드가 프랑스와 접한 국면이다. 이 시기에는 동고트왕국이 신라의 진흥왕에게 점령 당한 이후이기 때문에, 고구려는 이 지역에 없었다.

 

아래 598년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투에 대해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 보자. 598년 수나라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고 기술되며, 또한 수나라는 7개월만에 침략에 실패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5만의 군대로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다. 필자는 수나라의 30만군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프랑스 지역에 있다면 그런 숫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오손도 10만군을 가질 정도였으며, 그때 매우 강력한 나라였다고 했다. 즉 10만 정도의 병사였을 것이다. 후일 현 중공의 지역으로 역사왜곡하면서 숫자를 부풀린 것 아닌가 한다. 30만 동원하여 5만군사에 졌으니 말 그대로라면 그야말로 형편없는 병력이다. 그래서 당나라군이라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본기 (590-618)

 

一年冬十月 영양왕이 즉위하다 (590)

一年 수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벼슬을 주다 (590)

二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591)

二年春三月 수가 왕을 책봉하다 (591)

二年夏五月 수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다 (591)

三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592)

593-596 : 4년 공백

八年夏五月 수에 조공하다 (597)

 

九年春二月 수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다 (598)

九年夏六月 수 문제가 영양왕의 관작을 빼앗다 (598)

九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다 (598)

九年秋九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598)

(자료 : 영양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아래 위키백과 내용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598년 말갈 1만명으로 요서의 임유관(臨渝關)을 선제 공격했다는 것이다. 임유관은 강가에 있는 수군기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제1차 고구려-수 전쟁

 

영양왕이 즉위했을 때 중국 대륙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 문제는 북쪽으로 눈을 돌려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수나라는 우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마침내 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598년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다. 그러나 임유관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수 문제는 이에 격분하여 음력 6월에 한왕 양량과 왕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주라후로 하여금 보급을 맡겨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주라후의 보급선을 미리 알아챈 고구려군은 주라후의 보급선을 격파하여 군량 보급을 끊었고, 때마침 장마가 닥쳐 수나라의 30만 대군은 끝내 5만 명의 정예병을 이끈 고구려의 장수인 병마원수 강이식의 전략에 말려들어 결국 대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고 만다.

 

수 문제는 이 소식을 듣고 출전 장수들을 모두 불러들여 잡아들인 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었으며, 다시 한 번 고구려를 침공하고자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고구려 침공 계획은 중단되었다.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영양왕의 예상대로 수 문제는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무렵 백제에서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수나라는 백제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자료: 영양왕, 위키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이에 수문제는 보급지원 포함한 수륙군 30만명을 보내 요동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급망 공격과 장마 등에 의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철수한다. 아래 자료를 보면 임유관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대패한 것으로 보인다. 상기 위키자료를 보면 수나라에서 패한 장수 등을 감옥에 가두거나 죽인 것으로 보아 크게 패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요동성 공격은 612년 2차 공격에서도 반복된다. 그런데 아래에서 보겠지만, 이때 경로를 보면 아래 지도에서 알프스, Jura mountains, Vosges mountains을 넘을 수 없으니, Strasbourg위를 넘어 우측으로 가서 다시 아래로 진격하는 경로가 된다. 평양성은 스위스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스위스 쥬리히로 추정했다.

 

"이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六軍)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왕의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隋軍이] 遼水에 진주하자, 元도 두려워하여 使臣을 보내어 사죄하고 表文을 올리는데, ‘遼東 糞土의 臣 元 云云’하였다. 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려

 

(자료 : 영양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론강과 라인강 부근 지형 및 도시 (source : Worldatlas.com)

 

 

이러한 상황을 알고, 프랑크의 자료를 살펴 보자. 그런데 아래 프랑크자료에서는 프랑크의 모든 전쟁을 형제간의 전쟁으로 묘사하여, 프랑스지역이 모두 프랑크시대부터 프랑스역사지역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형제간 지역 배분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동북부의 Austrasia, 서북부의 Neustria, 남쪽의 Burgundy로 나눌 수 있는데, 분배된 형제들의 전쟁지역을 보면 경계가 분명치 않다. 서로 상대방의 영토를 뛰어 넘어 영토를 보유하는 이해되지 않는 분배를 하고 있다. 당시 수군 아니면 보병인데, 아무리 강과 바다를 이용한 이동이라해도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는 영토배분이다. 즉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자료이다. 이렇게 된 연유는 외세의 침입을 모두 내전으로 왜곡하려니 이런 무리가 생겼다고 본다.

 

"Theudebert II (French: Thibert ou Théodebert) (c.585-612),[1] King of Austrasia (595–612 AD), was the son and heir of Childebert II. He received the kingdom of Austrasia plus the cities (civitates) of Poitiers, Tours, Le Puy-en-Velay, Bordeaux, and Châteaudun, as well as the Champagne, the Auvergne, and Transjurane Alemannia.

 

During his early years, his grandmother Brunhilda ruled for Theudebert and his brother Theuderic II, who had received the realm of Burgundy. After the two brothers reached adulthood, they were often at war, with Brunhilda siding with Theuderic. In 599,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Sens, but then the two brothers allied against their cousin Chlothar II and defeated him at Dormelles (near Montereau), thereby laying their hands on a great portion of Neustria (600–604). At this point, however, the two brothers took up arms against each other;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Étampes. In 605, Theudebert refused to aid his brother whose kingdom was invaded by Clothar II.

 

(Theudebert I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ks)

 

"Theuderic II (also spelled Theuderich, Theoderic or Theodoric; in FrenchThierry(587–613), king of Burgundy (595–613) and Austrasia (612–613), was the second son of Childebert IIAt his father's death in 595, he received Guntram's kingdom of Burgundy, with its capital at Orléans, while his elder brother, Theudebert II, received their father's kingdom of Austrasia, with its capital at Metz. He also received the lordship of the cities (civitates) of ToulouseAgenNantesAngersSaintesAngoulêmePérigueuxBloisChartres, and Le Mans. During his minority, and later, he reigned under the guidance of his grandmother Brunhilda, evicted from Austrasia by his brother Theudebert II.

 

In 596, Clotaire II, king of Neustria, and Fredegund, Clotaire's mother, took Paris, which was supposed to be held in common. Fredegund, then her son's regent, sent a force to Laffaux and the armies of Theudebert and Theuderic were defeated.

 

In 599, Brunhilda was forced out of Austrasia by Theudebert and she was found wandering near Arcis in Champagne by a peasant, who brought her to Theuderic. The peasant was supposedly rewarded with the bishopric of Auxerre. Theuderic welcomed her and readily fell under her influence, which was inclined to vengeful war with Theudebert at the time. Soon, Theuderic and his brother were at war. He defeated Theudebert at Sens, but their cousin Clotaire's restless warmaking prompted them to ally against him. They resumed the fight against Neustria and, in 600, defeated Clotaire at Dormelles (near Montereau) on the Orvanne. The land between the Seine and the Oise was divided between Theuderic and Theudebert, with Theuderic receiving the territory between the Seine and the Loire including the Breton frontier. They also campaigned together in Gascony, where they subjugated the local population and instated Genialis as duke.

 

At this point, however, the two brothers took up arms against each other resulting in Theuderic's defeat of Theudebert at Étampes. Theuderic's kingdom was invaded by Clotaire in 604, and was also confronted by Clotaire's son Merovech and his mayor Landric. Theuderic met them at Étampes on the Louet, but Theudebert refused him aid. Theuderic won the day, but his mayor of the palaceBerthoald was killed. The next mayor, Protadius, a partisan of Brunhilda, encouraged war with Austrasia, but the nobles assassinated him and battle was never met, a pact being enforced by Theuderic's men.

 

(source : Theuderic I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ks)

 

단지 위 자료에서 참고할 만한 것은 Theoderic II와 Theodebert II의 할머니 Brunhilda가 고트족 왕의 딸이라는 것이다. 즉 고구려왕의 딸이다. 이말은 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고구려계통이라는 것이 된다. Brunhilda는 Theoderic II편을 항상 들었다 했다. 즉 Theoderic II가 고구려 관련 세력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판단할 때, 599년 Theoderic II가 Sens에서 Theodebert II를 패배시켰다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1차 수나라-고구려 전쟁과 관련된 기록이 아닌가 한다.

 

Division of Gaul, Franks (587-613) (source : Wikipedia)

(The kingdom of Chlothar at the start of his reign (yellow). By 613 he had inherited or conquered all of the coloured portions of the map.)

 

위 지도에서 보면 Sens의 위치는 세느강변에 있어 상당히 안으로 들어 온 도시이다. 임유관으로서는 가능한 위치이지만, 요동성으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지역으로 보인다. 수나라군이 패퇴를 거듭해 이 지역까지 쫓겼을 가능성도 있다. 거의 80-90% 병사가 전멸하였다 하니 말이다. 그리고 장마와 전염병 핑계를 말하는 것을 보니, 강물이 넘치거나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세느강변까지 밀렸을 지도 모른다. 다음 612년 2차 수나라-고구려 전쟁은 보다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가능하다. 살수라는 강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II. 612년의 고구려의 수나라에 대한 살수대첩

 

수문제는 한번의 고구려 공격 실패로 다시는 고구려 침입 염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수양제가 다시 고구려 공격을 준비한다. 607년 고구려 사신과 수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쳤다는 삼국사기 기록이다. 필자는 돌궐을 스칸디나비아세력이나 삭슨족의 세력으로 추정했다. 수-고구려 전쟁을 앞두고 우군 확보를 위한 외교전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양제가 직접 돌궐의 처소에 간 것을 보면, 프랑스 북부나 프랑스 동북부 삭슨족의 지역에 갔었을 수 있다. (수에서 당으로 이전되는 과정을 보니, 돌궐이 많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당나라, '당태종'(나무위키) 자료 참조) 그러니 프랑크 내부에 돌궐의 세력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판단된다.) 모두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한 주변지역 우군 확보전략이다. 돌궐의 일부인 삭슨족이 프랑스 동북부지역에 있다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가 된다. 동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 길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2차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612년 요동성 공격으로 시작한다. 역시 1차 고수전쟁과 같은 경로로 판단된다. 즉 Alsace지역인 Strasbourg위쪽으로 동쪽으로 가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스위스의 평양성을 공격하는 경로이다. 수나라의 내호아가 수군으로 평양성을 공격한 것은 론강을 따라 올라가서 평양에 접근한 경로이거나 라인강을 따라 내려가는 경로를 택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결국 수나라군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수공 활약으로 살수에서 대패한다. 필자는 살수가 스위스 북쪽의 Saar river이거나, 패수인 라인강의 지류 Moselle river의 지류인 Saar river(Alsace지역)로 추정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본기 (590-618)

 

九年秋九月 백제 변경을 침략하다 (598)

599년 : 공백

十一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600)

十一年春一月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하다 (600)

601-602 : 2년 공백

十四年秋八月 신라 북한산성 공격에 실패하다 (603)

604-606 : 3년 공백

十八年 고구려 사신과 수 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치다 (607)

十八年夏五月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十九年春二月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608)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608)

609-610 : 2년 공백

 

二十二年春二月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다 (611)

二十二年夏四月 수의 병력이 탁군으로 집결하다 (611)

二十三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총공격을 명하다 (612)

二十三年春二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다 (612)

二十三年夏五月 수가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 황제가 장수들을 질책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장군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다(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거짓 항복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다 (612)

二十三年秋七月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에 대첩을 거두다 (612)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다 (613)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다시 논의하다 (613)

二十四年夏四月 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613)

二十四年夏四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613)

二十五年春二月 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614)

二十五年秋七月 항복을 청하다 (614)

二十五年秋八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614)

二十五年冬十月 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614)

615 - 617 : 3년 공백

二十九年秋九月 영양왕이 죽다 (618)

(자료 : 영양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그러면 이러한 2차 고수전쟁은 프랑크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수라는 지명이 있어 1차 고수전쟁보다 훨씬 설명이 용이하다. 사실은 이 과정에서 필자는 살수라는 Saar river를 발견한 계기가 되었다.

 

610년에 프랑스 동부의 Austrasia왕 Theudebert II는 Alsace지방을 그의 동생, 부르군디왕 Theuderic II왕으로부터 빼앗는다. 그래서 서로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612년에는 Alsace지역의 Toul 도시(아래 살수 지도 참조)와 Zulpich(독일 서부끝 중간지역 도시, Strasbourg 근처)에서 프랑스동부의 Austrasia왕 Theudebert II는 부르군디왕 Theuderic II왕에게 결정적 패배를 맞는다. 이 지역이 고구려 수 전쟁의 요동성 지역으로 나타난다. 즉 알자스지역에 요동성이 있지 않나 판단된다. 그리고 이 전쟁 패배후, 형제들의 할머니, Brunhilda의 중개로 Theudebert II가 제거된다고 기술된다.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져서 당나라에 망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와 유사한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형제끼리 전쟁하는 양상이지만, 이러한 설정을 무시하고, 지역적 고려를 한다면, Austrasia왕 Theudebert가 살수대첩에서 패배한 수나라가 될 수 있으며, 부르군디왕의 승리가 고구려의 승리가 될 수도 있다.

 

부르군디지역은 부여지역으로 추정된다고 필자는 이미 추정한 바 있다. 광개토태왕시 부하가 되어 같이 싸운 동부여의 무리들이 그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부르군디왕국(511년 프랑크왕 Clovis I에 의해 합병될 때까지)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 (위지도 참조) 그러나 이 지역은 또한 한성백제의 한성이 있는 Clermont Ferrand이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한성백제를 점령한 475년이후 장수왕 시기부터 고구려지역이었을 것이다. 이지역이 동부여라면, 동부여가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 항복했으므로 역시 고구려의 지역이었을 것이다. 부여성이 이 지역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반면 557년 이후 589년까지는 고구려지역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지역을, 진흥왕이 고구려로부터 한성을 취했다 하므로, 진흥왕이 지배한 남조 진(陳)나라(557-589) 지역으로 추정하였으며, 남조의 진나라가 589년 수나라에 의해 멸망 전까지 신라의 지역이었을 수 있다. 이후 진나라를 흡수한 수나라에 의해 점령되었거나, 598년 전쟁이후 고구려에 의해 회복되었을 수 있다. 612년 고구려 자료에서 수나라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했다는 것은 론강지역 우측은 고구려가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즉 부르군디 일부지역은 고구려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Theuderic II 부르군디왕이 고구려왕의 역할을 묘사한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프랑크역사에서도 613년까지 Chlothar II가 모든 프랑크지역을 통일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요수인 론강의 전쟁 기록이 없는 것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측면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Theudebert II와 Theoderic II의 싸움에서, 부르군디왕 Theoderic II의 정체가 의문시 되나, 고구려에 의한 수나라(프랑크)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 역사왜곡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보다 서쪽의 서고트왕국이 점령했던 스페인지역도 고구려로 추정했다. 위 지도의 이태리 반도의 동고트왕국지역도 고구려 지역이었으나, 진흥왕이후 신라에게 일부 빼앗긴 것(롬바르디왕국, 상기 지도)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수나라 보병들이 론강인 압록강 위쪽을 지나 패수인 라인강을 따라 내려오는 공격 루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또한 Theudebert II와 Theuderic II왕과의 Zulpich(=Tolbiac) 전쟁 지역(Alsace지역, 요동성 전투?)으로 나타난다. Theudebert II는 전쟁에서 크게 패해, 도망가다가 Theuderic II에게 붙잡혀 할머니 Brunhilda에 넘겨진다.

 

Brunhilda는 Theudebert II를 유폐했다가 죽게 한다. 이미 상기 Theuderic II 위키피디아 자료에서 Theudebert II는 Brunhilda를 버린 내용을 보았다. 손자가 할머니를 유기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인륜적으로 불가능한데, 서로 다른 세력간 전쟁을 가족간의 이야기로 왜곡하니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렇게 하여 Theudebert II 가 사라진다. 제 2차 고수전쟁에서 패한 수나라 장수를 참하는 역사이거나 수나라가 망하는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Theudebert II (French: Thibert ou Théodebert) (c.585-612),[1] King of Austrasia (595–612 AD), was the son and heir of Childebert II. He received the kingdom of Austrasia plus the cities (civitates) of Poitiers, Tours, Le Puy-en-Velay, Bordeaux, and Châteaudun, as well as the Champagne, the Auvergne, and Transjurane Alemannia.

 

During his early years, his grandmother Brunhilda ruled for Theudebert and his brother Theuderic II, who had received the realm of Burgundy. After the two brothers reached adulthood, they were often at war, with Brunhilda siding with Theuderic. In 599,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Sens, but then the two brothers allied against their cousin Chlothar II and defeated him at Dormelles (near Montereau), thereby laying their hands on a great portion of Neustria (600–604). At this point, however, the two brothers took up arms against each other;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Étampes. In 605, Theudebert refused to aid his brother whose kingdom was invaded by Clothar II. In 610, Theudebert extorted Alsace from his brother and Theuderic took up arms against him, yet again.

 

Theudebert was defeated decisively by Theuderic at Toul and at Zülpich in 612.[2][3][4] Theudebert was locked up in a monastery at the order of his grandmother, and killed with his son Merovech.[5] "

(Theudebert I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ks)

 

"Theuderic II (also spelled Theuderich, Theoderic or Theodoric; in French, Thierry) (587–613), king of Burgundy (595–613) and Austrasia (612–613), was the second son of Childebert II. At his father's death in 595, he received Guntram's kingdom of Burgundy, with its capital at Orléans, while his elder brother, Theudebert II, received their father's kingdom of Austrasia, with its capital at Metz. He also received the lordship of the cities (civitates) of Toulouse, Agen, Nantes, Angers, Saintes, Angoulême, Périgueux, Blois, Chartres, and Le Mans. During his minority, and later, he reigned under the guidance of his grandmother Brunhilda, evicted from Austrasia by his brother Theudebert II............

 

In 610, he lost Alsace, the Saintois, the Thurgau, and Champagne to his brother and his men east of the Jura were soundly defeated by the Alemanni. However, he routed Theudebert at Toul (c.611) and later at Tolbiac (=Zulpich) in 612. He captured the fleeing Theudebert in the latter battle and gave him over—after taking his royal paraphernalia—to his grandmother Brunhilda, who had him put up in a monastery. Bishop Ludegast is said to have beseeched him in a fable to spare Theudeberts life.[1][2] Brunhilda probably had Theudebert murdered (along with his son Merovech) to allow Theuderic to succeed to both thrones unhindered...

 

(source : Theuderic I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ks)

 

필자는 Zulpich지역에서 살수인 Saar river를 찾았다. 즉 Toul, Zulpich지역 (독일의 중서부 경계지역, 알자스지역, 아래 지도 참조)에서 Theudebert II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기록이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살수에서 패배한 역사로 판단되는 것이다. 이 전투위치는 Theudebert II와 Theuderic II가 그들이 점한 영토지역과 별 상관이 없는 동쪽으로 떨어진 지역이다. 즉 역사적 전투지역 사실을 어떻게 왜곡해서 조작하려 연구하다 보니 이런 무리를 범한 것으로 추정된다.

 

 

살수로 보이는 Saar river (Rhine강의 지류 Mosel 강의 지류) (자료 : 위키피디아)

 

 

III. 631년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

 

고구려는 631년 당의 사신이 고구려에 와서 수나라를 이긴 기념비를 무너뜨린 것을 보고 당에 대한 전쟁 준비를 본격화 한다. 631년에 천리 장성이 완성되었다고 아래 삼국사기 자료는 말한다. 즉 고구려가 장성을 쌓아 당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래 삼국사기 영류왕 자료에서 619년 '졸본에서 돌아오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이 당시 고구려가 요수에 있는 졸본지역을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고주몽의 졸본천이 압록강 요수인 Rhone river의 지류인 Jadron river로 추정했다. 즉 영류왕시 고구려가 론강 주위까지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당의 전쟁이 요수인 론강을 주위로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는 앞에서 신라의 진흥왕이 진나라 지역인 이곳 부르군디지역을 점하였다가, 수나라에 589년 빼앗긴 것으로 추정했는데, 619년에는 부르군디 일부 지역이 고구려 영역이었다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는 612년에도 고구려의 영역이 요수(론강)의 동쪽이었으므로, 598년 고수 전쟁에서 이겨 이 주위지역을 수나라에서 빼앗았을 수 있다.

 

<고구려 영류왕 시기 (618-642)>

 

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619)

620 : 공백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621)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622)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623)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624)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624)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625)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626)

627: 공백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628)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629)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629)

630년 : 공백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631)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631)

632-637 : 6년 공백

(자료 : 영류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千有餘里(왕동중축장성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천유여리)

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긴 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쪽은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삼국사기 영류왕 14년(631년) 기사.

(자료 : 천리장성,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고구려의 장성은 동북의 부여성에서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리가 되었다고 했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를 고려해 보면, 성과 성을 다 잇는 장성을 쌓았다기 보다, 요새화된 성을 여러개 요동지역에 쌓은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요수의 동쪽에 여러 성을 쌓은 것이다. 그 축성들의 총거리가 천여리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구려의 성은 총 176개이다.[6] 이 중 80%는 요동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수나라의 침공 당시 수나라군은 통상적으로 임유관-영주-회원진-요하를 거치는 루트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고구려군의 첫 번째 주 저항선 역시 회원진-요하 루트의 도하 지점에 있었다. 고구려-당 전쟁 시에는 침공 루트와 방식이 다양해졌는데, 바로 천리장성의 축성으로 인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시 당나라군은 회원진뿐 아니라 요하 하구와 통정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도하 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우월한 기동력을 갖춘 군대가 장성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통상적인 작전으로, 여러 장소가 일거에 공격을 받으면 수비 전력은 자신의 수비 범위에서만 수비가 가능해 상호 지원이 불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방어선에 구명이 나면 수습이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제3차 고당전쟁 때 부여성이 함락되면서 주변 40개 성도 같이 함락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성들이 천리장성의 범주에 포함된 것일 수도 있다....

 

구당서에 따르면 666년 경 요하에는 약 15만의 고구려군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요동성과 같은 고구려 거점성의 병력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러나 1차 침공 이후 고구려에 소규모 공격을 가했던 이세적의 군에 '물에 익숙한 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배치되었고 1차 침공 이후에 당군이 요동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가하지 않았었다는 점[11]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차 고당전쟁 이후 고구려가 당군의 동시다발적인 도하에 대응하고자 요하 유역에 방어군을 대폭 전진 배치 했고, 이 때문에 당군 수뇌부는 요동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따라서 당군은 소규모 습격 시에도 도하 작전에 유용한 부대를 투입했으며...

 

(자료: 천리장성,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볼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위의 장성 천여리를 계산해 보면, 요수 즉 론강의 하구(지중해)에서 론강이 오른쪽으로 꺾이는 지점정도까지 거리이다.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성곽을 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성은 론강이 우측으로 꺾이는 지점 어디에 있을 수 있다. 이 지역은 앞에서 말한 동부여의 지역 부르군디지역이다. 3차 고당 전쟁의 안시성도 이 근처에 있는 Annecy(안시)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아래 Mornas요새가 그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한다. Mornas는 Orange시에서 가까우며, Avignon의 위에 위치한 곳이다. 로마시대부터 이지역은 스페인지역을 잇는 주요 거점지역이었다 한다. 높이가 200m에 달하는 이러한 거대한 요새를 세운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위키피디아자료는 말한다. 론강의 서쪽의 수, 당과 싸우는 고구려를 고려하지 않으면 이렇게 견고한 성곽을 세우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Location of Mornas in Southeast of France

 

"La forteresse de Mornas, dans le département de Vaucluse, se dresse sur un éperon rocheux de la rive gauche du Rhône, dominant le village de Mornas, établi à son pied, et les environs. Elle eut une importance majeure de l'Antiquité à la Révolution française, à partir de laquelle elle tomba en ruine. ...

 

En 118, les Romains fondèrent la Provincia Romana qui, tout en protégeant Marseille, assurait une liaison terrestre de plus en plus sécurisée vers l'Espagne, son or, son argent, son blé, son huile d'olive…

 

La raison d'être d'une telle superficie fortifiée n'est pas connue.

 

(source : Forteresse de Mornas,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ce)

 

 

Rhone river에 접한 Mornas Fortress in France (source : Wikipedia)

 

 

Mornas 요새 성곽 (고구려 성곽과 유사한 모습이다)

 

이러한 장성 축조는 동북의 부여성 (농안)에서 바닷가의 비사성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천여리 거리를 고려하면 요수인 론강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구려가 수, 당과 접한 패수 (라인강)의 국경도 중요한 방어 성곽 요새가 있을 것이다. 이 라인강 따라 많은 요새와 성들이 있다는 것을 아래 자료는 말하고 있다. 동북의 부여성이 북부여가 있던 덴마크지역이라면 라인강을 따라 성을 축조하는 일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필자는 농안의 부여성이 이곳인지, 아니면 Burgundian 지역의 어느 곳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후일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비사성은 지중해 연안의 어느 성일 수 있다고 본다.

 

"The Rhine and the Danube formed most of the northern inland frontier of the Roman Empire and, since those days, the Rhine has been a vital navigable waterway carrying trade and goods deep inland. Its importance as a waterway in the Holy Roman Empire is supported by the many castles and fortifications built along it."

[출처] <펌> Rhine river|작성자 CG Park

 

 

IV. 645-648년의 고구려 - 당나라 전쟁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1차 645년 연개소문의 정변을 이유로 당이 침략한다. 초기에는 당이 유리하게 전세를 이어 갔으나, 안시성싸움에서 실패하여 철군하게 된다. 그리고 당이 패배한 후, 다시 2차 647년, 3차 648년 고당전쟁이 벌어지나 당이 이기지 못하였다. 결국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고 유언하고 649년 죽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자료에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고구려 영류왕 시기 (618-642)>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638)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640)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640)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640)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641)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642)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642)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642)

 

(자료 : 영류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 본기 (642-668)

 

一年冬十一月 왕이 즉위하다 (642)

一年 신라의 김춘추가 와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다 (642)

二年春一月 왕이 그 부친을 왕으로 봉하다 (643)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조공하다 (643)

二年春三月 당에 도교를 구하니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다 (643)

二年夏閏六月 당태종이 왕을 책봉하다 (643)

二年秋九月 신라가 당에 구원병을 청하다 (643)

二年秋九月十五日 밤이 밝은데 보름달이 보이지 않다 (643)

三年春一月 당이 상리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하다 (644)

三年秋七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 (644)

三年秋九月 당 태종이 백금과 숙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 (644)

三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다 (644)

三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고구려 공격을 위한 병력을 동원하다 (644)

四年春一月 당의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다 (645)

四年春三月 당 태종과 이세적이 출정하다 (645)

四年夏四月 당군이 고구려의 성을 공격하다 (645)

四年夏五月 비사성이 함락되다 (645)

四年夏五月 당군이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45)

四年 백암성이 당 태종에게 항복하다 (645)

四年 개모성이 함락되다 (645)

四年 고구려 군대와 말갈 병력이 당 태종의 군대와 싸워 패하다 (645)

四年 당군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돌아가다 (645)

四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후회하다 (645)

五年春二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이유를 묻다 (646)

五年夏五月 당 태종이 다시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다 (646)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하)

 

六年春二月 당군이 소규모 병력으로 다시 침략하다 (647)

六年夏五月 당의 이세적 군대가 쳐들어왔다 돌아가다 (647)

六年秋七月 당군에 패하다 (647)

六年秋八月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배를 만들게 하다 (647)

六年冬十二月 왕자 임무를 당에 들여보내 사죄하다 (647)

七年春一月 당 태종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다 (648)

七年夏四月 당 고신감의 군대에 패하다 (648)

七年夏六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다 (648)

七年秋七月 평양에서 머리가 2개인 아이가 태어나다 (648)

七年秋七月 당 태종이 배를 만들게 하다 (648)

七年秋九月 평양에서 노루와 이리 떼가 서쪽으로 이동하다 (648)

七年秋九月 당군이 박작성을 공격하다 (648)

八年夏四月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 전쟁을 포기하라고 유언하다 (649)

 

(자료: 보장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 역사 1)

 

 

"당 태종(太宗)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大連]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당나라는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 당 태종은 이적(李勣:李世勣) · 장량(張亮)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약 60일간 사투(死鬪)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 태종은 2차 ·3차(647년 ·648년)에 걸쳐 이적 · 우진달(于進達) ·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자료: 당태종, 위키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당나라)

 

 

그러면 이러한 고당전쟁에 관련 기록이 프랑크 역사에 있는가?

 

다행히 Dagobert 프랑크왕 시기에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631-632 시기에 슬라브족의 Samo왕과 전투한 기록이다. 위의 고당전쟁이 645년 1차로 시작했는데, 약 15년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631년 고구려 천리장성이 완성되었고, 그후 고구려 6년의 기록이 공백으로 남아 있어 알 수가 없다. 일제의 지우기인지, 김부식의 지우기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이유로 한 만큼, 645년에 1차 침공이 631년 프랑크 침입으로 보인다. 프랑크의 침입도 아바르 판노니아지역에서의 내전을 이용하여 침입했다고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는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슬라브족 Samo왕과 프랑크와의 전쟁이 고당전쟁이 될 수 있는가? 필자는 그렇다고 본다. 우선 프랑크와 그 동부에 있는 슬라브족의 전쟁이 위치상 당과 고구려의 전쟁이 된다. 그리고 Samo는 사모->소모->소문 즉 연개 소문의 일부 이름이 아닌가 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그는 623-658동안 지배한 것으로 나타나 연개소문의 활동시기와 유사하다. 즉 연개소문 (생물 : 595? - 666?)의 생몰시기를 고려하면, Samo가 재위 시작한 623년은 연개소문이 28살이 되는 해로, 아버지 이은 대대로 직 수행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며, Samo의 재위가 끝나는 658년은 연개소문이 63살 나이로 은퇴할 나이인 것이다.

 

"Samo founded the first recorded political union of Slavic tribes, known as Samo's Empire (realmkingdom, or tribal union), stretching from Silesia to present-day Slovenia, ruling from 623 until his death in 658.

 

According to Fredegarius, the only contemporary source, Samo was a Frankish merchant[1] who unified several Slavic tribes against robber raids and violence by nearby settled Avars, showing such bravery and command skills in battle that he was elected as the "Slavic king" (Latin: Rex Sclavorum). In 631, Samo successfully defended his realm against the Frankish Kingdom in the three-day Battle of Wogastisburg.

...........

 

 

Frankish Kingdom in 628 under Dagobert king (source : Wikipedia)

 

 

The most well-documented event of Samo's career was his victory over the Frankish royal army under Dagobert I in 631 or 632. Provoked to action by a "violent quarrel in the Pannonian kingdom of the Avars or Huns" during his ninth year (631–32), Dagobert led three armies against the Wends, the largest being his own Austrasian army.[5] The Franks were routed near Wogastisburg (Latin castrum Vogastisburg), an unidentified location meaning "fortress/castle of Vogast." The majority of the besieging armies were slaughtered, while the rest of the troops fled, leaving weapons and other equipment lying on the ground. In the aftermath of the Wendish victory, Samo invaded Frankish Thuringia several times and undertook looting raids there.[6] The Sorbian prince Dervan abandoned the Franks and "placed himself and his people under Samo's realm".[7]

 

(번역) Samo의 커리어중에서 가장 잘 기록이 남긴 사건은 Dagobert I, 631-632 사이에 프랑크군에 대한 승리였다. Dagobert I의 9년차 (613-632)에, 아바르 또는 훈족의 판노니아왕국에서의 치열한 다툼에 자극되어, Dagobert I는 3개의 부대를 이끌고 Wends와 전투했는데, 그의 Austrasia군대가 3개 부대중 가장 큰 병력이었었다. 프랑크는 Wogastisburg 근처에서 유린되었다. Wogastisburg는 'Vogast의 성곽/요새'라는 의미를 가졌는데, 아직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필자는 Wogastisburg 전투지역이 Alsace의 Vosges mountains의 지역(아래 프랑스지도의 Strasburg아래 Rhine river 좌측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서 BC 58년 Julius Caesar와 Suebi족 Ariovistus간 전쟁이 있었다. 약 12만의 게르만족 병력이 죽었다고 Caesar는 주장했다 한다. 활과 방패를 이용하고, 때로는 개를 동반하는 켈트족 신 Vosges 이야기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제 처음 건축된지 모른다는 Koenigsbourg Castle이 이 높은 산에 있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Tower 벽 두께가 3m나 되는 Grand Geroldseck castle이 있다. (아래 그림 참조) 이곳이 요동성이 있는 곳인지 모른다. 이곳의 역사적인 전략적 위치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의 위치와 가깝다. 즉 중국의 수, 당과 고구려의 대치하는 전략적 지점인 것이다.

 

론강과 라인강 부근 지형 및 도시 (source : Worldatlas.com)

 

 




View from the castle over the Alsatian plain up to the Black Forest

 

The Château du Haut-Koenigsbourg (French: [ʃɑto dy o kœniɡsbuʁ]GermanHohkönigsburg), sometimes also Haut-Kœnigsbourg, is a medieval castle located in the commune of Orschwiller in the Bas-Rhin département of Alsace, France.[1][2] Located in the Vosges mountains just west of Sélestat, situated in a strategic area on a rocky spur overlooking the Upper Rhine Plain, it was used by successive powers from the Middle Ages until the Thirty Years' War when it was abandoned.

 

(source : Chateau du Haut-Koenigstbourg,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ce)

 

 
 

Ruins of Tower of Small Geroldseck castle overview (source : Wikipedia)

 

 

In 641, the rebellious duke of Thuringia, Radulf, sought an alliance with Samo against his sovereign, Sigebert III.[2] Samo also maintained long-distance trade relationships.[4] On his death, however, his title was not inherited by his sons.[7] Ultimately, Samo can be credited with forging a Wendish identity by speaking on behalf of the community that recognised his authority.[8]

 

(번역) 641년에, Thuringia 공작 Radulf는 프랑크 Sigebert III에 반란을 일으켜 Samo와 동맹을 추구했다. Samo는 또한 장거리 무역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타이틀은 그의 아들들에게 승계되지 못했다. 결국, Samo는 그의 권위를 인정한 공동체를 대표하여 말하는 Wendish identity를 갖게 되었다.

 

(source : Samo,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이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lavs)

 

Thuringia는 여자들만 편두를 한 지역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구려에 가까운 한민족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위글에서 Samo와 동맹을 추구했다는 것은 같이 프랑크를 침범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Samo가 Wendish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의도 존재한다.

 

아래 자료에서 Wends 공작 Valuk는 Lombards족이 그의 영토를 지나 Samo를 서남쪽에서 공격하도록 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Wends는 Samo's Empire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Samo는 Wendish가 아니라는 것이다. Wends는 서남쪽에 있는 슬라브족이다. Samo가 고구려인이라는 가능성을 더 높혀주는 자료이다.

 

"In 630–631, Valuk, the "duke of the Wends" (Wallucus dux Winedorum) was mentioned.[13] These Wends referred to the Slavs of the Windic March, which according to some historians was the later March of Carinthia (Carantania) in present Slovenia and Austria. According to Jan Steinhubel, Valuk allowed Longobards to pass through his territory and attack Samo from south-west. Longobards were allies of Franks (Dagobert I) against Samo. If Valuk allowed Longobards to go through his territory, his principality could have not been part of Samo's empire. "

 

(source : Samo's Empire,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lavs)

 

 

According to the contemporary Chronicle of Fredegar, the Battle of Wogastisburg was a battle between Slavs (Sclav, cognomento Winidi[1]) under King Samo and Franks under King Dagobert I in 631. The Frankish armies advanced into the area of the Slavic tribal union in three groups - Alamanni, Lombards, and Austrasian Franks. The first two were quite successful, but the main fighting force was defeated in a three-day battle near a place referred to as Wogastisburg.

 

(번역) Fredegar 연대기에 의하면, Wogastisburg 전투는 631년 Samo왕의 슬라브족과 Dagobert I의 프랑크사이의 전투이다. 프랑크 군대는 슬라브족 연합의 지역으로 3개의 그룹으로 진격했다. - Alamanni, Lombards, 그리고 Austrasian Franks이다. 처음 두 그룹은 꽤 성공적이었으나, 주요 전투부대는 Wogastisburg로 언급되는 지역 가까이서 3일간 전투에서 패배했다.

 

Alamanni는 거란군, Lombards는 신라군, Austrasia 프랑크군은 당나라군으로서 판단된다. 결국 631년 Wogastisburg 전투에서 당나라군이 대패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Vosges mountains 지역의 Alsace지역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아래에 스위스의 Bern 도시가 있는데, 고구려의 중요 거점으로 보인다. 상기 살수 전투도 이 근처에서 있었다.

 

The site of the battle cannot be successfully located because the source, Fredegar's chronicle, gives no geographical specifications. Thus a lot of places claim to be connected with the battle (usually based on linguistic parallels and some excavations), such as Rubín hill near Podbořany (Bohemia), Úhošť hill near Kadaň (Bohemia), Bratislava (Slovakia), Trenčín (Slovakia), Beckov (Slovakia), Váh river = Voga (Slovakia), Staffelberg near Bad Staffelstein (Upper Franconia), Burk near Forchheim (Upper Franconia), Vienna, Augustianis[2][Note 1] and other places along the middle Danube etc.

 

(번역) 전투지역은 잘 파익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Fredegar's chronicles 자료는 특별한 지리적 위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이 전투와 관련 하여 많은 지역이 연관되는데 (이는 언어적 연관성과 유물에 기반한 것), 예를 들면, 보헤미아의 Podborany 가까이 있는 Rubin Hill, 역시 보헤미아의 Kadan 가까이 있는 Uhost hill, 슬로바키아의 Bratislava, Trencin, Beckov, Vah river(Voga), Upper Franconia의 Bad Staffelstein 가까이 있는 Staffelberg, Forchheim 가까이 있는 Burk, Vienna, Augustianis, 그리고 다뉴브강 중류의 다른 지역들이다.

 

(source : Battle of Wogastisburg,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lavs)

 

 

상기 전투지역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언어적 연관성에 의해 추론한 지역으로 보헤미아, 슬로바키아지역, Upper Franconia, Vienna, 다뉴브강 중류 등이 언급되었다. 필자는 전투 지역이 다소 오른쪽으로 이동한 느낌을 갖는데, 언어적 유추로 인한 한계로 보인다. 아니면 프랑스 사학자들의 역사적 왜곡의 시도 결과일 수도 있다. 론강유역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을 감추고자, 이보다 훨씬 동쪽으로 전투지역을 잡는 것이다. 이곳까지 전투가 이어질 수도 있지만, 압록강인 론강 유역의 전투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왜곡의 결과라고도 보여진다.

 

Vienna가 언급되는 것은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고당전쟁에서 평양에 대한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스위스의 쥬리히를 평양으로 추정했는데, 고구려의 평양이 동쪽으로 다소 이동했는지, 아니면 필자의 평양 추정에 오류가 있었는지 좀더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는 요나라의 점령지로 나타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에서도 느낀 점이다.

 

"In 631, Dagobert led a large army against Samo, the ruler of the Slavic Wends, partly at the request of the Germanic peoples living in the eastern territories and also due to Dagobert's quarrel with him about the Wends having robbed and killed a number of Frankish merchants.[16] While Dagobert's Austrasian forces were defeated at the Wogastisburg,[17] his Alemmanic and Lombard allies were successful in repelling the Wends.[18] Taking advantage of the situation at the time, the Saxons offered to help Dagobert if he agreed to rescind the 500 cow yearly tribute to the Austrasians. Despite accepting this agreement, Fredegar reports that it was to little avail since the Wends attacked again the following year.[18] "

 

(source : Dagobert,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아래 Samo's Empire에 대한 자료를 보면, Thuringia지역에 대한 여러 차례 공격을 알 수 있다. 즉 라인강 주변의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계속 쟁점이 되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Samo왕이 죽은 뒤로 슬라브족 연합의 역사가 불확실하다고 아래 기술된다. 그리고 한참 후에 Great Moravia가 이어졌다 한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이어 갔기 때문에, Great Moravia가 다시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The Franks were routed near Wogastisburg; the majority of the besieging armies were slaughtered, while the rest of the troops fled, leaving weapons and other equipment lying on the ground. In the aftermath of the Wendish victory, Samo invaded Frankish Thuringia several times and undertook looting raids there.[14] Dervan, the "duke of the Sorbs" (dux gente Surbiorum que ex genere Sclavinorum), initially subordinate to the Franks, joined the Slavic tribal union after Samo defeated Dagobert I.[15] The Sorbs lived to the east of the Saxon Saale. Dervan participated in the subsequent wars against the Franks, successfully fighting against Frankish Thuringia (631–634), until he was finally defeated by Radulf of Thuringia in 636.....

 

The history of the tribal union after Samo's death in 658 or 659 is largely unclear, though it is generally assumed that it ended. Archaeological findings show that the Avars returned to their previous territories (at least to southernmost modern Slovakia) and entered into a symbiosis with the Slavs, whereas territories to the north of the Avar Khaganate were purely Slav territories. The first specific thing that is known about the fate of these Slavs and Avars is the existence of Moravian and Nitravian principalities in the late 8th century, which attacked the Avars, and the defeat of the Avars by the Franks under Charlemagne in 799 or 802–03, after which the Avars soon ceased to exist.

Great Moravia is viewed of as a continuation or successor state to Samo's Empire.[17] The polity has been called the first Slavic state.[1][2]

 

​(source : Samo's Empire,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lavs)

 

 

필자는 'Old Great Bulgaria (632-668) 역사는 고구려 말기 일부 역사이다'라는 글에서 Khan Kubrat(632-665)도 연개소문과 동일한 인물로 추정했다. 즉 고구려의 지역이 위의 슬라브지역에 머무른 것이 아니고 흑해위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후 발해의 역사가 그리고 고려의 역사가 러시아 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최근 필자는 쓴 바 있다. 이는 고구려가 이들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또한 Gokturk지역도 고구려지역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유라시아 전역에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아래 Khan Kubrat는 632년부터 재위한 것으로 기록된다. 한국사 자료는 연개소문이 642년에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된다. 10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것이 645년 1차 고당전쟁과 631년 프랑크-Samo 전쟁의 시기 차이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즉 631-632년 전쟁은 632년 Kubrat Khan(연개소문)이 등장한 시기와 유사하다. 다시 말하면, 서양사에서는 631-632년 전쟁이 연개소문이 등장한 이후 프랑크가 침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도 631-632년 전쟁이 645년 1차 고당전쟁과 매우 유사한 것을 보여 준다.

 

 

아래 Old Graet Bulgaria에 대한 글의 일부를 참고로 재게한다.

 

** 흑해위 지역의 Old Great Bulgaria (632-668)

 

1) Khan Kubrat 재위기간 (632-665) 은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유사하다.

위키피디어 자료에 의하면, Khan Kubrat를 King of Onogundur Huns, Chief of the Huns 라 한다. 즉 훈족이라는 것은 고구려의 연개소문 (막리지, 총리)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Khan Kubrat가 Onogurs의 dynastic wars 와중에서 Khan 을 승계했다는 기록이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2) Kubrat의 5 아들들의 분열과 멸망 ;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들 일화와 유사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Kubrat의 아들들 사이에 분열이 있어 668년 멸망했다고 기록된다. 즉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정권다툼으로 분열되어 고구려가 망하게 되는 계기가 된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둘째 아들(Kotrag)은 볼가 지역으로 가서 볼가 불가리아를 세우고, 셋째 (Asparukh), 넷째 (Kuber) 아들은 발칸반도로 가서 불가리아 제국의 초석이 되고, 다섯째 아들(Alcek, Alzek)은 이태리로 갔다고 했다. 볼가 불가리아는 발해 지역이고, 발칸반도와 이태리지역은 비잔틴제국의 영역 즉 통일신라의 지역이다. 볼가 불가리아는 Khazars의 압박에 의해 망했다는 추상적인 기록인데, 후에 발해의 일부가 되는 Khazars가 이 지역을 흡수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Old Great Bulgaria (632-668) (source : Wikipedia)

 

 

연개소문의 제국으로 보이는 Samo's Empire는 이후 Great Moravia로 이어진다 한다. 그래서 Great Moravia에 대한 일부 자료를 참조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이 같이 비잔틴제국, 프랑크, 그리고 롬바르드에 대해 싸웠다 한다.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은 고구려이고, 비잔틴제국은 백제이며, 프랑크는 당나라이고, 롬바르드는 신라이다. 즉 고구려는 당나라, 백제, 신라와 전쟁을 한 한민족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 Great Moravia

 

"Large territories in the Pannonian Basin were conquered after 568 by the nomadic Avars who had arrived from the Eurasian Steppes.[49][53] The Slavs were forced to pay tribute to the Avars and to participate in their raids against the Byzantine Empire, the Franks and the Lombards.[49] Even though the Avar settlement area stabilized on the Danube river in the early period of the khaganate (southern border of present-day Slovakia), a smaller (southernmost) part came under their direct military control after the fall of Samo's empire.[54][c] In the late period of the khaganate, the Avars had already inclined to a more settled lifestyle and their co-existence with the local Slavs can be already characterized as some kind of cultural symbiosis.[55][56][57][58]"  

 

(source : Great Morav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lavs)

 

 

이상으로 고구려-수, 당전쟁은 유럽에 있었다는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필자도 노력하여 찾아내는 은폐와 왜곡의 역사를 그래도 이 정도로 찾아낸 것에 대해 나름대로 만족한다. 598년 고수전쟁, 612년 살수대첩 등을 찾아내고, 이러한 필자의 추정이 왜곡된 프랑크 역사앞에서, 긴가 민가하는 상황에서, 631년 슬라브족 Samo's Empire - 프랑크전쟁은 살수(Saar river)전쟁의 위치와 같은 Alsace지역이라는 면에서 필자의 그동안의 추정이 맞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599년 전쟁, 612년 전쟁, 631년 전쟁을 고려할 때, 알자스지역에 요동성이 있지 않나 하는 추정이 가능한 것도 수확으로 보인다.

 

비록 삼국사기 고구려편에서 632-637, 6년 기록이 공백으로 남아 있어,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대세를 맞게 추정한 것으로 만족한다. 삼국사기 6년 기록 공백도 서구의 역사를 고려한 의도적인 기록 지우기일 수 있다. 일제의 정체를 의심케 하는 한 단면이다. 반면, 631-632년 프랑크-Samo 슬라브 전쟁이 645년 1차 고당전쟁과 유사한 동기를 설명하고 있는 점은 이 두 전쟁이 동일한 전쟁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역사는 왜곡하라고 있는 것인가? 중국도 아랍도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서양사학자는 말하지만, 프랑크 역사를 보면 서양사가들도 역사왜곡은 역시 하고 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도 요나라, 금나라,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몽골의 침입 역사도 왜곡되었고, 원나라는 프랑스지역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서양사학자는 없다. 결국, 한반도 역사를 고집하는 식민사학자들까지 포함하여, 전세계 모두가 역사왜곡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자신들의 현재 영토를 합리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한, 역사 왜곡은 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동안 숨겨졌던 왜곡됐던 역사는 언젠가 진실의 빛을 맞이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는데, 많은 이들의 동참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