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신라

토함산과 폼페이

CG PARK 2023. 10. 5. 13:59

I. 머리말

 

필자는 초기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있지 않았나 추정한다. 박혁거세의 모습과 한나라를 멸망시킨 신나라의 왕망 모습도 유사하고, 신주가 진흥왕이후 생긴 것과 더불어, 진한(秦韓)의 위치가 이곳이 아닐까 하는 여러 정황상 그렇다. 백인으로 추정되는 석탈해가 금관가야 김수로왕과 싸운 곳은 카르타고로 추정되는 것, 몽믈랑산으로 추정되는 태백산에 제사 지내는 모습, 라인강으로 추정되는 니하가 언급되는 모습, 살수는 독일의 라인강의 지류 Saar river로 추정되는데, 신라가 고구려와 살수에서 싸운 기록, 그리고 장수왕 시기 신라 10주를 점령하였을 때의 신라의 모습과 서로마제국의 이태리반도의 고트족에 의한 점령 등을 고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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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석탈해, 일성왕, 아달라왕 모두 백인이었다

부제 : 왜국도 지중해에 있었다. 부제 : 협보도 백인이었다 1. 김수로왕은 백인이었다. 뇌질 청예와 정견모주 : 최치원의 석리정전 - 최치원의 석리정전: 정견 모주의 아들, 뇌질 청예(수로왕),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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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시실리섬,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1. 장보고의 청해진 위치 연구의 의의 1) 신라와 당의 강역의 모호성 본 블로그 글,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로마는 백제이다”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이고 로마가 백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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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필자의 추정에 의하면, 이태리반도에서의 베스비오화산 폭발이 있던 79년에 신라에서 어떤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만큼 큰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잿더미에 묻혀 잊혀졌다가 20세기 들어 발견되었으니, 만약 역사적 기록이 정확하다면 분명 이에 대한 기록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필자의 추정이 검증되는 계기도 되므로,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다.

 

II. 토함산은 화산이다

 

우선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기원후 79년은 신라의 석탈해 왕(재위 : AD 57-80)의 재위 마지막 시기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석탈해왕 시기에 토함산이 처음 언급된다. 왕에 즉위한 후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다음 해에 토함산에 올랐다 기록된다. (아래 자료 참조)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57 - 80, 23년)본기

一年冬十一月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57)

二年春一月 호공을 대보로 삼다 (58)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58)

三年春三月 토함산에 오르다 (59)

(자료 : 삼국사기, 석탈해,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 Note)

 

그러면 토함산은 어떤 산인가? 아래 위키백과 자료를 보면, 화산이라 말이 없는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신성시된 산으로 제사를 거행한 산이라는 정도이다. 현재 경주에는 화산이 없는 것을 고려한 것인지 모른다.

 

"토함산(吐含山)은 .........신라시대에는 5악 가운데 동악(東嶽)이라 하여 호국의 진산으로 신성시하였으며 중사(中祀)를 거행하기도 했던 산이다.[1]

..........

 

유래[편집]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탈해는 한편 토해라고도 하여 토해와 토함은 유사음으로 토함산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자료 : 토함산, 위키백과)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의 자료를 보면 토함산은 화산으로 판단된다. 실성이사금 15년(416)에,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3장이나 솟아 오르다'는 표현, 그리고, 무열왕 4년 (657)에, '토함산의 땅이 불타다'는 기록을 보면 그렇게 판단된다.

 

 

III. AD 62년 지진과 AD 79년 화산 폭발

 

그러면, 석탈해 시기에 화산폭발이 기록되어야 한다. 그런데 79년에는 화산 폭발의 기록은 없고, 변란이나 외적의 침입 같은 표현인 "혜성이 나타나다"라는 표현이 있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러면서도 '강한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라는 기록으로 어떤 자연재해적인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64년에는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57 - 80, 23년)본기

一年冬十一月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57)

二年春一月 호공을 대보로 삼다 (58)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58)

三年春三月 토함산에 오르다 (59)

................

八年冬十二月지진이 일어나고 눈이 오지 않다 (64)

九年春三月 알지가 태어나고 국호 계림으로 고치다 (AD 65)

..............

二十一年秋八月 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기다 (AD 77)

二十三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AD 79)

二十四年夏四月 강한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AD 80)

二十四年秋八月 왕이 죽다 (AD 80)"

(자료 : 삼국사기, 석탈해,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 Note)

 

그래서 폼페이 대폭발 시기 이전에, 폼페이에서는, 63년 또는 64년 큰 지진이 있었다 기록된다. (아래 두산백과 자료 참조)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었다."

(자료: 폼페이, 두산백과)

 

 

.AD 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시 영향권 지역 (자료 : 위키피디아)

 

이에 관련하여 로마사 기록을 보니, AD 64년에 로마에 큰 불이 있었다 기록된다. 우리가 '쿼바도스 도미네' 영화로 잘 아는 네로황제시기의 로마에 난 대형 화재라 한다. 그런데 석탈해왕 재위시기 AD 57-AD 80 기간은 로마사에서 Nero 황제 (AD 54-68), Vespasian 황제 (69-79), Titus 황제 (79-81)의 세 황제 시기에 해당한다.

 

또 한가지 기록은 AD 62년에 폼페이에 큰 지진이 있었다 한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5-6도 진도의 지진이라면 상당히 큰 지진이다. 이 기록이 삼국사기의 64년 지진기록과 2년이 차이나지만, 같은 사건을 말하지 않나 판단된다. 그리고 이 지진은 79년 폭발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고 위키피디아 자료는 말한다.

 

"The inhabitants of Pompeii had long been used to minor earthquakes (indeed, the writer Pliny the Younger wrote that earth tremors "were not particularly alarming because they are frequent in Campania"), but on 5 February 62[36] a severe earthquake did considerable damage around the bay, and particularly to Pompeii. It is believed that the earthquake would have registered between 5 and 6 on the Richter magnitude scale.[37]

 

On that day in Pompeii, there were to be two sacrifices, as it was the anniversary of Augustus being named Pater Patriae ("Father of the Country") and also a feast day to honour the guardian spirits of the city. Chaos followed the earthquake; fires caused by oil lamps that had fallen during the quake added to the panic. The nearby cities of Herculaneum and Nuceria were also affected.[37]

(source : Pompeii,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

 

"The AD 79 eruption was preceded by a powerful earthquake in 62, which caused widespread destruction around the Bay of Naples, and particularly to Pompeii.[48] Some of the damage had still not been repaired when the volcano erupted.[49] The deaths of 600 sheep from "tainted air" in the vicinity of Pompeii indicates that the earthquake of AD 62 may have been related to new activity by Vesuvius."

(source: Vesuvius,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

 

IV. 화산 폭발과 진휼정책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기록은 Titus황제 시기에 언급된다. (아래 자료 참조)

 

"Although Titus's brief reign was marked by a relative absence of major military or political conflicts, he faced a number of major disasters. A few months after his accession, Mount Vesuvius erupted.[62] The eruption almost completely destroyed the cities and resort communities around the Bay of Naples. The cities of Pompeii and Herculaneum were buried under metres of stone and lava,[63] killing thousands.[64] Titus appointed two ex-consuls to organise and coordinate the relief effort and personally donated large amounts of money from the imperial treasury to aid the victims of the volcano.[58] Additionally, he visited Pompeii once after the eruption and again the following year.[65]

 

During the second visit, in spring of 80, a fire broke out in Rome and burned large parts of the city for three days and three nights.[58][65] Although the extent of the damage was not as disastrous as during the Great Fire of 64 amd crucially spared the many districts of insulae, Cassius Dio records a long list of important public buildings that were destroyed, including Agrippa's Pantheon, the Temple of Jupiter, the Diribitorium, parts of the Theatre of Pompey, and the Saepta Julia among others.[65] Once again, Titus personally compensated for the damaged regions.[65] According to Suetonius, a plague also broke out during the fire.[58] The nature of the disease, however, and the death toll are unknown."

 

(source : Titus(79-81),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 Flavi dynasty (69-92))

 

Titus황제는 폼페이, 헤라클레니움 시의 폐해를 치유하고 위무하기 위해 79년, 80년 두차례에 걸쳐 폼페이를 방문하고, 황궁재산의 많은 돈을 피해자들을 위해 썼다고 기록된다.

 

아래 삼국사기에서는 파사이사금 시절 AD 81년에 진휼을 베풀었다 기록된다. 그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설명은 없다. 이는 석탈해왕 시기 AD 80년 금성의 동문이 강한 바람에 무너진 해에 어떤 자연재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판단된다.

 

《삼국사기》 파사 이사금 (80 - 112, 32년) 본기

一年秋九月 파사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80)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81)

二年春三月 진휼을 베풀고 사면을 단행하다 (81)

(자료 : 삼국사기, 파사이사금, 나무위키,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 Note)

 

또한 상기 Titus황제 시기 기록에, 81년에 로마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64년 네로황제 시기의 로마 화재같은 정도의 심한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된다. 그런데, 64년에 석탈해왕 시기에 지진이 있었다 기록되었다. 64년 로마 화재의 원인은 지진으로 인한 화재였는지 모른다. 원래 화산 폭발 전에는 지진 등이 일어난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큰 화산 폭발은 신라 뿐만 아니라 백제, 고구려 등 이웃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화산재가 하늘을 가리면 햇빛을 가리개 되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내용이 있나 살펴 보았다.

 

파사이사금 시기 농산물 증진에 특히 노력을 한 것은 이러한 피해에 대응한 조치일 수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삼국사기> 파사이사금 본기

 

三年春一月 농사를 권장하고 군사를 단련시키다 (82)

五年春二月 명선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을 파진찬으로 삼다 (84)

五年夏五月 풍년이 크게 들다 (84)"

(자료 : 삼국사기, 파사이사금,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 Note)

 

V. AD 79년 화산폭발 시기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은?

 

고구려, 백제의 기록에서는 신라에서 토함산이 화산폭발이 있을 수 있는 79-80 기간에 공교롭게도 장기간 공백으로 남아 있다. 고구려는 78-97년 무려 20년기간이 공백으로 남아 있으며, 백제는 78-84년 7년의 공백기간을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이는 관련 기사가 있을 수 있는데, 후대에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제의 장난으로 추론된다.

 

* 고구려의 지진 언급 기록과 78-97(20년) 공백

 

《삼국사기》 유리왕 본기

一年 유리명왕이 즉위하다 (BC 19)

............

二十一年春三月 설지가 국내성으로 천도를 건의하다 (AD 2)

二十一年夏四月 사냥을 하다 (AD 2)

二十一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2)

二十一年秋九月 국내성 지역에 가서 지세를 돌아보다 (AD 2)

二十二年冬十月 국내성으로 천도하다 (AD 3)

二十二年冬十二月 협보가 왕이 정치에 힘쓸 것을 건의하다 (AD 3)

二十三年春二月 왕자 해명을 태자로 삼다 (AD 4)

................

 

《삼국사기》 대무신왕 (18 - 44) 본기

 

一年秋冬十月 대무신왕이 즉위하다 (18)

二年春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19)

...................

 

태조왕 시기

 

(부여태후)

 

63-67 : 5년 공백

 

(태조대왕)

二十五年冬十月 부여가 신기한 사슴과 토끼를 바치다 (77)

二十五年冬十一月 국내성 일대에 눈이 많이 내리다 (77)

 

78 - 97 : 20년 공백

 

四十六年春三月 책성을 순수하고 돌아오다 (98)

(자료 :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메모 Note)

 

 

* 백제시기의 지진 언급 기록과 78-84 (7년) 공백기록

 

《삼국사기》 기루왕 (AD 77 - 128, 53년) 본기

 

一年秋九月 기루왕이 즉위하다 (AD 77)

78 - 84 : 7년 공백

九年春一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AD 85)

九年夏四月 객성이 자미로 들어가다 (AD 85)

十一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87)

十三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다 (89)

 

(자료 : 삼국사기, 백제, 기루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메모 Note)

 

그렇다고 고구려 백제에서 지진의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국내성에 지진이 있었다 자주 언급된다. 백제도 89년에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기록된다. (상기 자료 참조). 즉 신라의 토함산의 화산폭발 가능성, 베수비우스산의 화산 폭발에 관련 글들이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기록에서 한성백제가 고구려에 망해서 개로왕이 죽었다는 기록을 언급하였다. 즉 이웃국가들의 큰 사건이 있었다면 기록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을 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제가 그 흔적을 일부러 지웠을 것이란 추정이다.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실제 일제의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끼'는 이러한 언급을 하였다. "조선의 역사는 그야말로 위대하고 찬란했다. 위대한 조선의 역사를 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아래 자료 참조)

 

https://youtu.be/bYryuhatYzo?si=zYIeUFONjE9Y6aZv

 

로마사에서 베수비우스 화산의 폭발에 대한 기록을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Vespasian황제 시기(69-79)가 아닌 그의 아들 Titus황제시기 (79-81)에 언급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Pliny the Younger가 25년이 지난후 이에 관하여 기록했다 한다. (아래 지료 참조)

 

"Pliny the Younger provided a first-hand account of the eruption of Mount Vesuvius from his position across the Bay of Naples at Misenum but written 25 years after the event.[44] His uncle, Pliny the Elder, with whom he had a close relationship, died while attempting to rescue stranded victims. As admiral of the fleet, Pliny the Elder had ordered the ships of the Imperial Navy stationed at Misenum to cross the bay to assist evacuation attempts."

(source : Pompeii,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

 

VI. 신성시된 토함산과 베수비우스산

 

또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토함산이 신성시된 산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탈해왕이 AD 59년 토함산에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면, 베수비우스산도 신성시된 산이었나? 아래 기록을 보면, 베수비우스산은 Jupiter Vesuvius라는 글귀가 있는 유물이 폼페이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즉 쥬피터(=제우스신)신을 숭배하는 산이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주변의 지역도 Venus, Hercules 등이 숭배된 지역으로 기록된다. 즉 토함산과 베수비우스산은 신성시된 산으로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시실리섬의 Etna화산은 그러한 기록이 없다.

"Vesuvius has a long historic and literary tradition. It was considered a divinity of the Genius type at the time of the eruption of AD 79: it appears under the inscribed name Vesuvius as a serpent in the decorative frescos of many lararia, or household shrines, surviving from Pompeii. An inscription from Capua[8] to IOVI VESVVIO indicates that he was worshipped as a power of Jupiter; that is, Jupiter Vesuvius.[9]

The Romans regarded Mount Vesuvius as being devoted to Hercules.[10] The historian Diodorus Siculus relates a tradition that Hercules, in the performance of his labors, passed through the country of nearby Cumae on his way to Sicily and found there a place called "the Phlegraean Plain" (Φλεγραῖον πεδίον, "plain of fire"), "from a hill which anciently vomited out fire ... now called Vesuvius."[11] It was inhabited by giant bandits, "the sons of the Earth. With the gods' assistance, he pacified the region and continued. The facts behind the tradition, if any, remain unknown, as does whether Herculaneum was named after it. An epigram by the poet Martial in 88 AD suggests that both Venus, patroness of Pompeii, and Hercules were worshipped in the region devastated by the eruption of 79.[12]

(source : Vesuvius,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

 

VII. 왕이름과 산 명칭의 관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토함산의 이름 유례와 관련하여서이다. 위의 위키백과 자료에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탈해가 토해 등으로 토함산의 명칭과 석탈해의 이름이 관련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석탈해(재위 : AD 57- 80)와 재위기간을 마친 년도가 유사한 로마사의 Vespasian황제(재위 : AD 69-79)이름도 Vesuvius화산이름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풀타크가 우리 역사를 보고 이름을 지었을까? 그러나 창작도 한계가 있을 것이니, 이름을 제외한 기록은 원래 기록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VIII. 맺음말

 

이상으로 불완전 하나마, 토함산과 베수비우스산, 그리고 폼페이 사건이 연관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마치고자 한다.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려는 세력은 항상 있기 마련이지만, 일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을 남겨 놓은 이유는 이미 손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숨겨진 역사를 찾는 것이 후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