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위만조선 (BC 194 - BC 10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23. 9. 20. 04:57역사 자료/위만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만조선

[ 衛滿朝鮮 ]

이칭별칭유형시대
이칭 만조선(滿朝鮮), 이칭 위씨조선(衛氏朝鮮), 이칭 위만조선(魏滿朝鮮)
지명/고지명
고대/초기국가/고조선

요약

위만조선은 초기 국가시대에 위만이 집권한 서기전 2세기 초부터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한 서기전 108년까지의 조선이다. 위만 집권 이전을 고조선으로, 이후를 위만조선으로 부른다. 14세기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합쳐서 고조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의

 

초기 국가시대, 위만이 집권한 서기전 2세기 초부터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한 서기전 108년까지의 조선.

 

개설

 

위만(衛滿)이 집권한 서기전 2세기 초부터, 서기전 108년에 멸망할 때까지의 조선을 가리킨다. 문헌 사료는 위만의 집권 과정과 그의 손자로 전하는 우거(右渠) 대의 멸망 과정을 주로 전한다. 『삼국유사』는 위만의 집권 이전 시기 조선을 고조선으로, 이후 시기 조선을 위만조선으로 구분하였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는 만(滿)이라고만 전하고,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과 『후한서(後漢書)』에는 위만(衛滿)으로, 『삼국유사』에는 위만(魏滿)으로 전한다. 이에 따라 위만조선을 만조선(滿朝鮮), 위씨조선(衛氏朝鮮), 위만조선(魏滿朝鮮)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립

 

『사기』에 따르면,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한(漢)나라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가자, 위만도 망명하였다. 위만은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동의 새를 나갔다.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거주하며, 점차 진번(眞番) · 조선의 만이 · 옛 연나라 · 제(齊)나라의 망명자를 역속시키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위략』에 전하는 내용은 조금 다르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니,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준왕에게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위만은 준왕을 설득하여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 머물며 고조선의 번병(藩屛)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규(圭)를 하사하였으며, 100리 땅을 봉하여 고조선의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망명한 사람들을 꾀어서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위만은 사람을 보내서 준왕에게 거짓으로 "한의 군대가 10도로 나뉘어 이르니, 도읍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한 후, 들어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이 위만과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후한서』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왕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사기』, 『한서』와 달리 『위략』과 『후한서』에는 고조선의 준왕이 등장하며, 특히 『위략』에는 위만과 준왕의 관계를 상세히 전한다.

 

도읍의 위치

 

『사기』와 『한서』는 위만조선의 도읍을 왕험(王險)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왕검(王儉)으로 표기하였다. 왕험의 위치에 관한 문헌 사료는 크게 두 종류의 기록이 전한다. 첫째, 왕험의 위치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전하는 기록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라는 찬(瓚)의 견해를 인용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며,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본래 한나라의 낙랑군 왕험성이다〔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라고 전한다.

 

둘째, 왕험의 위치는 곧 험독현이라고 전하는 기록이다. 『사기집해(史記集解)』는 왕험성의 위치에 관해 "창려의 험독현이다〔昌黎有險瀆縣〕."라는 서광(徐廣)의 말을 인용하였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에 대한 주석에는 "조선왕 만의 도읍이다.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험독이라고 하였다〔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라는 응소의 견해가 인용되어 있다.

 

이에 따라, 왕험의 구체적인 위치에 관해서는 크게 평양설과 요동설이 대립하고 있다. 평양설의 경우,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명 와당 및 「낙랑 호구부」 등의 물질자료를 토대로 낙랑군을 평양으로 비정한 뒤, 위의 사료들 가운데 낙랑 관련 사료를 중시하며,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을 군치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반면 요동설의 경우, 서기전 2세기, 즉 위만조선 시기의 고고학적 유적, 유물은 평양 지역보다는 요동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성과 낙랑군치의 위치를 구분한다.

 

관제

 

『사기』와 『위략』에서 상(相), 장군(將軍). 비왕(裨王) 등 위만조선의 관명이 확인된다. 상의 경우,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 조선상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니계상(尼谿相) 삼(參) 등의 인물이 전한다.

 

상에 관해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관직제도 아래의 관직으로 보기도 하고, 독자의 세력기반을 가진 수장적 성격으로 보기도 한다. 상에 대한 해석에 따라 장군의 해석도 달라지는데, 상을 관직으로 볼 때, 문관으로서의 상과 무관으로서의 장군을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직 체계의 주요 구성 요소로 이해한다.

 

반면, 상을 수장적 성격으로 보면, 장군을 그들과 길항관계인 왕권의 지지 기반으로 이해한다. 비왕의 경우, 관직제도 바깥의 부왕(副王)으로 보기도 하고, 관직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사기』에 전하는 한나라와의 전쟁 기록 중에 패수서군(浿水西軍)과 패수상군(浿水上軍) 등의 군제도 확인된다.

 

대외 관계

 

『사기』에 따르면, 서기전 2세기 초에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었다. 역할은 새외의 만이를 보호하고 또 그들이 한나라의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며, 여러 만이의 군장들이 한나라에 입조하고자 하면 막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위만은 병위재물(兵威財物)을 얻었고, 이로써 조선 주변의 소읍을 복속시켰으며, 진번과 임둔(臨屯)도 와서 조선에게 복속하여, 위만조선의 영역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중엽에 이르면, 조선과 한나라는 갈등을 빚게 된다. 『사기』 율서(律書)에 따르면, 조선이 신자(臣子)로 복속하였지만, 이후에 군사와 험한 요새에 의지하여 꿈틀거리며 관망하고 있다며, 한의 장군 진무(陳武) 등이 경계한다. 『한서』에 따르면, 서기전 128년에는 예군(濊君) 남려(南閭)라는 인물이 28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관해 『후한서』는 남려 등이 위만조선의 우거왕에게 반(畔)하여 한에 투항하였다고 전한다.

 

『사기』에 따르면, 서기전 1세기 말, 위만의 손자 우거 대의 조선은 한나라에 입조하지 않으며,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가 한에 입조하는 것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한나라가 조선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한편,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고 평가한 『한서』 위현(韋賢)전의 기록과 함께, 흉노계 마구류 등의 물질자료를 통해 위만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짐작하기도 한다.

 

영역

 

위만조선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문헌 사료는 없지만, 위만조선이 멸망한 뒤,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대체로 사군의 범위와 위만조선의 영역을 연결시킨다. 한편, 위만조선의 영역에 관한 중요 쟁점은 『사기』 등에서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경계로 전하는 패수의 위치 비정이다. 위만조선 시기의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청천강설, 압록강설, 혼하설, 어니하설, 요하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다양한 이견이 있다.

 

멸망

 

『사기』 조선열전은 서기전 109년부터 1년여 이어진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을 자세히 전한다. 우거왕 대에 이르러 조선으로 한나라의 망명인들이 많이 유입되었고, 조선은 한나라에 입조하지 않으면서,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입조를 막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나라는 섭하(涉何)를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조선은 끝내 한나라의 조(詔)를 받지 않았다. 돌아가던 섭하는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을 죽였고, 그 공으로 요동 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공격하고 그를 죽였다. 이에 다시 한이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시켜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좌장군과 누선장군의 선공은 모두 실패하였고, 초기 전황은 한나라에게 크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한은 위산(衛山)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사적 권위를 근거로 우거를 설득하고자 하였다. 협박을 받은 우거는 항복 의사를 표현하였고, 사죄를 전하러 태자를 한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이 항복 진행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경계를 넘자, 한나라가 조선 태자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고, 태자는 이들이 자신을 속인다고 판단하여 귀환한 것이다. 타협은 실패하였고, 우거는 항전을 결정하였다. 이에 조선 내부에서는 대신들이 사적으로 누선장군에게 항복 의사를 표하는 등 내부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이 와중에 한나라의 누선장군과 좌장군 간에 알력 다툼이 있었고, 몇 달이 되어도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한나라는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에게 편의종사권을 주고 전장에 파견하였고, 누선장군은 체포되었다. 좌장군이 이끄는 한군이 공격을 다시 시작하자, 조선상 노인 등이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우거가 죽은 뒤에도 대신 성사(成巳)는 끝까지 한나라에 항거하며 왕험성을 지켰으나,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崔)를 시켜 성사를 죽였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멸망하였고, 한나라는 조선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남월, 동월, 서남이 등과는 달리,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침공을 장기간 막아 냈다. 조선 공격을 이끌었던 누선장군 양복은 서인(庶人)에 처하였고, 왕험성을 함락시킨 좌장군 순체는 기시(棄市)에 처하였다는 점을 통해 당시 한나라가 조선과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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