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지마이사금이 공격한 가야의 황산하는 시실리섬의 Salsu이다

2023. 1. 24. 08:22한국사/가야

1. 신라 지마이사금의 가야 전쟁 (AD 115-116)

 

《삼국사기》 지마 이사금 (112 - 134, 22년) 본기

 

四年春二月 가야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다 (115)

四年秋七月 가야를 친히 정벌하다가 황산하에서 퇴각하다 (115)

五年秋八月 가야를 치다가 큰 비 때문에 중단하다 (116)

(자료 : 지마이사금, 삼국사기, 출처 : 나무위키)

 

 

1) 지마이사금이 싸운 가야의 특징

 

a) 신라 남쪽의 가야

 

필자는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있었다 추정함. 따라서 이태리 반도의 남쪽에 있는 가야로 추정

 

b) 가야를 공격할 때 바다를 건넜다는 표현 없다.

 

가야는 여러 나라가 있으나, 그 중 이태리반도의 남쪽에 있으면서 특별히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태리반도에 접한 시실리가 아닐까 한다.

 

 

c) 황산하 : 황산에 있는 강

 

황산하에서 퇴각했다 하므로, 시실리섬에 황산하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시실리 섬에 Salso (Salsu; Sicilians) 란 강이 있다. 살수라는 것으로 읽힌다. 즉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살수, 또는 사리수는 무슨 뜻일까? 그런데 튀르크어로 Sarisu는 Yellow water라 한다.

 

Sarysu river (in southern Kazakhstan) : meaning yellow water in Turkic languages (source : Wikipedia)

 

그런데 주위에 황산이 있을까? 시실리섬에는 북쪽에 산맥이 있다. 에트나산 등의 화산이 3개가 있다. 그런데 살수와 가까운 곳에 Enna 란 도시가 있다. 그런데 이 주위의 광산은 황(Sulphur)을 생산하는 지역이라 한다. 즉 황산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따라서 황산하는 Enna옆을 지나는 Salsu river라 판단된다.

 

 

Salso (Salsu;Sicilian) river in Sicily (source : Wikipedia)

 

"The River Salso (Sicilian: Salsu), also known as the Imera Meridionale (Greek: Ἱμέρας; Latin Himera), is a river of Sicily. It rises in the Madonie Mountains (Latin: Nebrodes Mons; Sicilian: Munti Madunìi) and, traversing the provinces of Enna and Caltanissetta, flows into the Mediterranean at the western end of the Gulf of Gela at the seaport of Licata, in the Province of Agrigento. Its small deltaic system there is dominated by marine processes rather than fluvial ones. It is a seasonal torrent, with brief but violent floods during the winter rains (from November to February), and all but dry in summer droughts. In November 1915 the iron bridge across the river's mouth collapsed during floods, and 119 people were swept away in the flood and lost.[2] The Salso, which is the longest river of Sicily at 144 kilometres (89 mi), has a drainage basin area of about 2,122 square kilometres (819 sq mi)."

(source : Salso, wikipedia)

 

"The Sarysu (Kazakh: Сарысу, Sarysu; Russian: Сарысу́, Sarysu) is a river in Karaganda, Turkistan and Kyzylorda Regions of Kazakhstan. It is 671 kilometres (417 mi) long, and has a drainage basin of 81,600 square kilometres (31,500 sq mi).[1]

The name sary su means yellow water in Turkic languages."

(source : Sarysu, Wikipedia)

 

 

d) 음력 8월에 큰 비가 내리는 곳

 

116년에 지마이사금이 재침 했을 때, 큰 비가 와서 중단했다 한다. 그런데 이때가 음력 8월이다. 한반도에서는 장마철이 양력 6-8월경이다. 음력으로는 4월-7월이다. 음력 8월은 이미 양력 9-10월에 들어선 가을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장마철이 아니다. 그러나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시실리섬은 어떤가? 이곳의 기후는 여름에 건조하고 비가 매우 적게 온다. 반면 11월-2월의 겨울에 비가 많이 온다. 그래서 이 살수강은 급류가 되고 홍수를 일으킨다. (아래 자료 참조). 따라서 가을인 음력 8월에 폭우가 올 확율이 높지 않을까?

 

"It is a seasonal torrent, with brief but violent floods during the winter rains (from November to February), and all but dry in summer droughts." (Salso, Wikipedia)

 

 

2. Sicily의 역사

 

시실리가 그럼 한민족과 관련 있는 역사가 되는가? 잠시 시실리 역사를 보며 생각해 보자.

 

1) Ancient tribes : 고인돌의 역사

 

시실리의 고대 역사를 보면 고인돌이 발견된다. 필자는 아직 고인돌의 역사를 잘 모르지만, 한반도에 많은 고인돌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필자가 짐작하기에 배가 닿는 강변이나 해안에 주로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여하튼 시실리섬도 바다에서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고인돌의 역사가 있다. (아래 자료 참조)

Dolmen of Avola, east Sicily

아래 자료에서는 시실리의 선조들은 이베리아반도(Catalonia)에서 오거나, 일리리언부족 (발칸반도 서쪽)으로 추정한다. 또는 에게해로부터 건너 왔다는 설도 있다. 기원전 8000년으로 거슬러 올라 가는 동굴벽화도 발견되었다 한다.

The original classical-era inhabitants of Sicily comprised three defined groups of the ancient peoples of Italy. The most prominent and by far the earliest of these, the Sicani, who (Thucydides writes) arrived from the Iberian Peninsula (perhaps Catalonia).[19][20] Some modern scholars, however, suggest classifying the Sicani as possibly an Illyrian tribe.[21] Important historical evidence has been discovered in the form of cave drawings by the Sicani, dated from the end of the Pleistocene epoch around 8000 BC.[22] The arrival of the first humans on the island correlates with the extinction of the Sicilian Hippopotamus and the dwarf elephant. The Elymians, thought to have come from the area of the Aegean Sea, became the next tribe to join the Sicanians on Sicily.[23]

Dolmen of Monte Bubbonia, south Sicily

고인돌은 기원전 3000-2500년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시실리섬은 서북쪽은 유럽으로부터, 반면 동쪽은 지중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아래 자료 참조)

 

Recent discoveries of dolmens on the island (dating to the second half of the third millennium BC) seem to offer new insights into the culture of primitive Sicily. It is well-known that the Mediterranean region went through a quite intricate prehistory, so much so that it is difficult to piece together the muddle of different peoples who have followed each other. The impact of two influences is clear, however: the European one coming from the Northwest, and the Mediterranean influence of a clear eastern heritage.[24][25][need quotation to verify]

No evidence survives of any warring between the tribes, but the Sicanians moved eastwards when the Elymians settled in the northwest corner of the island. The Sicels are thought[by whom?] to have originated in Liguria; they arrived from mainland Italy in 1200 BC and forced the Sicanians to move back across Sicily and to settle in the middle of the island.[22] Other minor Italic groups who settled in Sicily included the Ausones (Aeolian Islands, Milazzo) and the Morgetes of Morgantina.

2) Phoenician, Carthaginian, Greek and Roman period

Main articles: Magna Graecia, Ancient Rome, and Sicilia (Roman province)

Ruins of the ancient Phoenician city of Motya

Temple of Hera at Selinunte (Temple E)

페니키언은 시실섬의 서쪽에 그리스인들보다 먼저 정착했다. 기원전 750년에 그리스인들은 시실리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동남쪽 끝의 시라큐스가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다. 남부 이태리에도 그리스인들은 진출했다. 시실리는 올리브와 포도가 풍부하여 무역이 활발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Phoenician settlements in the western part of the island predates the Greeks.[26] From about 750 BC, the Greeks began to live in Sicily (Σικελία – Sikelia), establishing many important settlements. The most important colony was in Syracuse; others were located at Akragas, Selinunte, Gela, Himera and Zancle.[27] The native Sicani and Sicel peoples were absorbed into the Hellenic culture with relative ease, and the area became part of Magna Graecia along with the rest of southern Italy, which the Greeks had also colonised. Sicily was very fertile, and the successful introduction of olives and grape vines created a great deal of profitable trading.[28] A significant part of Greek culture on the island was that of the Greek religion, and many temples were built throughout Sicily, including several in the Valley of the Temples at Agrigento.[29]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는 시라큐스를 공격하였으나, 시라큐스는 스파르타와 코린트와 동맹을 맺어 아테네를 패퇴시켰다. 아테네군과 배들은 파괴되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아래 자료 참조)

 

 

Politics on the island was intertwined with that of Greece; Syracuse became desired by the Athenians who set out on the Sicilian Expedition during the Peloponnesian War. Syracuse gained Sparta and Corinth as allies and, as a result, the Athenian expedition was defeated. The Athenian army and ships were destroyed, with most of the survivors being sold into slavery.[30]

Greco-Roman theatre at Taormina

 

Greek Syracuse는 동쪽 시실리를 지배하고, 카르타고는 서쪽 시실리를 지배했다. 두 문명은 충돌하여 Greek-Punic wars를 촉발했다. 그리스는 로마 공화국과 BC 262년에 평화조약을 맺고, 로마는 시실리를 로마공화국의 첫 지방 식민지로 삼고자 하였다. 로마는 1차 Punic war에서 시실리의 카르타고 지배지역을 공격하여 이겼고, 시실리는 BC 242년에 이태리반도 이외지역에서 최초의 로마 지방이 된다.

 

2차 Punic War에서 카르타고는 시실리를 되찾으려 공격했다. 시실리섬의 그리스인들은 카르타고편에 섰다. 시라큐스에 사는 아르키메데스는 카르타고를 도왔고, BC 213년, 로마가 시라큐스를 침범할 때 살해되었다. 로마의 Consul Valerian은, BC 210년, 로마원로원에서, 더 이상 카르타고인은 시실리에 남아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아래 자료 참조)

 

Greek Syracuse controlled eastern Sicily while Carthage controlled the West.[31] The two cultures began to clash, leading to the Greek-Punic wars. Greece had begun to make peace with the Roman Republic in 262 BC, and the Romans sought to annex Sicily as their republic's first province. Rome attacked Carthage's holdings in Sicily in the First Punic War and won, making Sicily the first Roman province outside of the Italian Peninsula by 242 BC.[32]

In the Second Punic War, the Carthaginians attempted to take back Sicily. Some of the Greek cities on the island sided with the Carthaginians. Archimedes, who lived in Syracuse, helped the Carthaginians, but was killed by the Romans after they invaded Syracuse in 213 BC.[33] They failed, and Rome was even more unrelenting in its annihilation of the invaders this time; Roman consul M. Valerian told the Roman Senate in 210 BC that "no Carthaginian remains in Sicily".[34]

시실리는 동쪽의 Syracuse와 서쪽의 Lilybaeum으로 나누어지고, 아우구스투스가 라틴어를 보급하려 했으나, 그리스문화권으로 남는 것이 허락되었다. BC 70년 Verres, 시실리 governor가 온 뒤로 시실리는 급격히 쇠퇴했다. 시실리에서는 두번의 노예 반란이 있었다: 1차 Servile war (BC 135-132), 2차 Servile war (BC 104-100)(아래 자료 참조)

 

As the empire's granary, Sicily was an important province, divided into two quaestorships: Syracuse to the east and Lilybaeum to the west.[26] Some attempt was made under Augustus to introduce the Latin language to the island, but Sicily was allowed to remain largely Greek in a cultural sense.[26] The once prosperous and contented island went into sharp decline when Verres became governor of Sicily. In 70 BC, noted figure Cicero condemned the misgovernment of Verres in his oration In Verrem.[35]

The island was used as a base of power numerous times, being occupied by slave insurgents during the First and Second Servile Wars, and by Sextus Pompey during the Sicilian revolt. ...

 

3) Germanic and Byzantine periods (469–965)

a) Germanic rule (게르만족의 지배)(469–535)

서로마제국은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이 406년 마지막날에 라린강을 건너 대침범이 있은 후에 떨어져 나갔다: 이 사건은 반달족이 429년 북아프리카로 이동한 후 시실리에 영향을 끼쳤다. 프랑크족은 벨기에로부터 남하했다.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해서 결국은 418년에 아키텐지역(프랑스 서남쪽)에 정착했다; 부르군디언은 443년에 사보이(프랑스 동남부)에 정착했다. 이 4개 부족들은 거의 3년동안 프랑스 로마지역을 유린했고, 409년 후반기에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진출했다. 이 4개부족들은 417년 서고트족에 의해 이동되었다. 반달족과 수에비족은 떠나기 전에 이베리아반도에 머물렀다. 수에비족은 439년까지 Galicia(이베리아반도 서북쪽)에 머물렀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의 판단으로는 고트족의 리드하에 반달족, 알랜족, 수에비족이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고, 반달족, 알랜족은 고트족의 지도하에 북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실제 위키피디아 자료에도 고트족이 함께한 표현이 있다. 필자는 고트족의 활동을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의 이 지역 진출로 해석한다.

 

The Western Roman Empire began falling apart after the great invasion of Vandals, Alans, and Sueves across the Rhine on the last day of 406: this event would affect Sicily after the migration of the Vandals to North Africa in 429. The Franks moved south from Belgium. The Visigoths moved west and were eventually settled in Aquitaine in 418; the Burgundians were settled Savoy in 443. The four tribes harried Roman France almost three years, entered and Spain and Portugal in late 409. The four tribes were decimated by the Visigoths in 417 on Roman orders. the Vandals and Sueves were able to re-assert themselves in Iberia until their departure. The Sueves remained in Galicia until 439[37]

 

반달족이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반달족은 440년 시실리의 팔레르모를 포위한다. 이는 반달족왕 가이사르가 로마의 지배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보인다. 반달족은 455년 로마를 포위한 일년후, 다시 시실리섬을 취하려 시도했으나, Rachimir의 456년 코르시카에서의 수군 승리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리하여 시실리섬은 469년까지 로마의 지배로 남게 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After taking Carthage in 439 the Vandals laid siege to Palermo in 440 as the opening act in an attempt to wrest the island from Roman rule personally led by Gaiseric, king of the Vandals.[38] The Vandals made another attempt to take the island one year after the sake of Rome in 455, at Agrigento, but were defeated decisively by Ricimir in a naval victory off Corsica in 456.[39] The island remained under Roman rule until 469.

 

시실리섬은 8년후인 477년에 이태리와 달마티아(발칸반도 서쪽)를 지배한 동고트에 의해 취해졌다. 476-491년 기간동안 이태리를 통치한 동고트왕 오도아케르에게 477년 공물로 지급되었다. 반달족은 시실리의 서쪽해안 Lilybaeum의 조그만 지역을 기반으로 시실리섬을 정복하려 했으나, 491년 반달족은 Lilybaeum을 빼앗겼다. 동고트의 Theodoric the Great가 이태리 전부 포함하여 시실리를 488년부터 정복했다. 고트족은 로마의 문화를 용인했고,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오도아케르는 신라(이태리반도)의 10개성을 정복한 고구려 장수왕으로 추정하며, Theodoric the Great는 고구려 문자왕으로 추정한다.

 

The possession of the island was lost 8 years later in 477 to another East Germanic tribe Ostrogoths who were in control of Italy and Dalmatia.[37] In that year the island was returned for payment of tribute to Odoacer, king of the Ostrogoths, who ruled Italy from 476-91 in the name of the Byzantine (Eastern Roman) Emperor. The Vandals kept a toehold in Lilybaeum, a port on the west coast which they lost in 491 after making one last attempt to conquer the island from this port as their base.[40] The Ostrogothic conquest of Sicily (and Italy as a whole) under Theodoric the Great began in 488. He had been appointed viceroy of the emperor to rule in Italy. The Goths were Germanic, but Theodoric was supportive of Roman culture and government and allowed freedom of religion.[41]

b) Byzantine(비잔틴 시대) (535–965)

 

47년후, 고트전쟁 (535-554)이 동고트와 비잔틴제국사이에 있었다. 시실리는 Belisarius 장군에 취해질 이태리의 첫부분이었다. 당시 Justinian I왕은 전 로마제국을 회복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비잔틴은 시실리를 베이스로 이용하여 이태리 나머지, 나폴리, 로마, 밀라노, 동고트수도 라베나를 5년내에 정복했다. 그러나, 새로운 동고트왕 Totila는 이태리 반도 전지역을 휩쓸고 내려가, 550년 시실리를 유린하고 정복했다. 그러나 552년 비잔틴 장군 Narses에 의해 Taginae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었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왕을 백제의 성왕으로 추정한다. 롬바르디세력은 신라의 진흥왕세력으로 판단한다.

Forty-seven years later the Gothic War (535–554) began between the Ostrogoths and the Eastern Roman Empire, also known as the Byzantine Empire. Sicily was the first part of Italy to be taken by general Belisarius, who was commissioned by Eastern Emperor Justinian I as part of an ambitious attempt to restore the whole Roman Empire, thereby uniting the Eastern and the Western halves.[42] Sicily was used as a base for the Byzantines to conquer the rest of Italy, with Naples, Rome, Milan, and the Ostrogoth capital Ravenna falling within five years.[43] However, new Ostrogoth king Totila drove down the Italian peninsula, plundering and conquering Sicily in 550. Totila, in turn, was defeated and killed in the Battle of Taginae by Byzantine general Narses in 552.[43]

 

535년 Justinian I왕은 시실리를 비잔틴의 지방으로 하였고, 로마 시대처럼 그리스어가 섬의 주요언어로 계속되었다. 시실리는 다시 아랍군 칼리프 Uthman에 의해 652년 침범되었으나, 아랍은 영구적인 획득에는 실패하고 얼마의 전리품을 가지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8세기 중반까지 약탈은 계속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아랍군은 신라 문무왕이후의 신라세력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아랍군의 비잔틴공격은 신라의 백제 공격이다.

 

In 535, Emperor Justinian I made Sicily a Byzantine province and, as in Roman times, Greek continued to be the predominate language spoken on the island. After the advent of Islam, Sicily was invaded by the Arab forces of Caliph Uthman in 652, but the Arabs failed to make any permanent gains and returned to Syria after gathering some booty.[44] Raids seeking loot continued until the mid-8th century.[45]

비잔틴왕 Constans II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시실리의 시라큐스로 660년 옮기려 결심했다. 다음해, 그는 시실리로부터, 당시 남부 이태리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롬바르드 Benevento 공작을 공격했다. 제국의 수도를 Syracuse로 옮긴다는 소문은 아마도 Constans왕이 668년 암살되는 값을 치루게 했다. 그의 아들 Constantine IV는 왕위를 계승하고, 시실리에서 Mezezius에 의한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당시에도 그리스어는 계속 툥용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백제는 신라에 의해 668년 멸망한다. 비잔틴제국은 소아시아, 터어키에서 전쟁에 패하고 그 왕자는 시실리 섬 시라큐스로 피했다고 기록된다. 위의 사건은 의자왕은 전쟁에 패해 항복하고 그의 왕자가 왜의 도움으로 시실리섬에 피신하여 임나일본부를 세우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광개토태왕 시 점령한 임나가 시실리의 Enna로 판단한다. 가라(금관가야, 구야한국)는 카르타고가 아닌가 한다. 실제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은 시실리와 카르타고(태자의 원정)를 갔었다고 기록된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비문의 왜 임나 가라는 모두 3개의 별도지역으로 추정된다. 왜의 임나 가라가 아닌 것이다. 즉 임나와 가라는 당시의 가야세력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는 왜와 가야와 함께 고구려에 저항했다.

 

Byzantine Emperor Constans II decided to move from the capital Constantinople to Syracuse in Sicily during 660. The following year, he launched an assault from Sicily against the Lombard Duchy of Benevento, which then occupied most of southern Italy.[46] Rumors that the capital of the empire was to be moved to Syracuse probably cost Constans his life, as he was assassinated in 668.[46] His son Constantine IV succeeded him, a brief usurpation in Sicily by Mezezius being quickly suppressed by the new emperor. Contemporary accounts report that the Greek language was widely spoken on the island during this period.[47] In 740 Emperor Leo III the Isaurian transferred Sicily from the jurisdiction of the church of Rome to that of Constantinople, placing the island within the eastern church.[48]

826년 시실리의 비잔틴 사령관 Euphemius는 아내를 죽이고 정부와 결혼하려 했다. Michael II 왕은 이 소문을 듣고 Constantine 장군으로 하여금 결혼을 중지시키고 Euphemius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Euphemius는 반란을 일으키고 Constatine을 죽이고 Syracuse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는 패배하고 북아프리카로 도주했다. 그는 튀니지아의 Aghlabid Emir인 Ziyadat Allah에게 시실리를 지배하고 대신 자신을 장군으로 하고 피난처를 제공할 것을 제의했다. 무슬림군이 시실리섬에 보내졌는데, 아랍군, 베르베르군, 크레타군, 그리고 페르시아군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시실리섬에 보내졌다. (아래 자료 참조)

 

이 당시는 백제를 정복한 신라군이 백제 영역이었던 지중해의 섬들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이다. 백제가 668년 망한 후에도 백제의 부흥운동은 곳곳에서 있었다. 그래서 페르시아군, 크레타섬군,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군 등이 신라군으로서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사산왕조 페르시아도 신라였다고 추정했다.

 

In 826 Euphemius, the Byzantine commander in Sicily, having apparently killed his wife, forced a nun to marry him. Emperor Michael II caught wind of the matter and ordered general Constantine to end the marriage and cut off Euphemius' head. Euphemius rose up, killed Constantine, and then occupied Syracuse; he in turn was defeated and driven out to North Africa.[49] He offered the rule of Sicily to Ziyadat Allah, the Aghlabid Emir of Tunisia, in return for a position as a general and a place of safety. A Muslim army was then sent to the island consisting of Arabs, Berbers, Cretans, and Persians.[49]

시실리섬의 무슬림군의 정복은 시소게임과 같이 저항이 심했다. 비잔틴 시실리는 정복하는데 1세기이상 걸렸다. 제일 큰 도시 Syracuse는 878년까지 버티었고, 그리스 도시 Taormina는 962년에 함락되었다. 아랍에 의해 시실리가 완전히 정복된 것은 965년이다. 11세기에는 비잔틴군이 George Maniakes하에 일부 수복했다. 그러나 결국 Norman 용병들이 세기말에 시실섬을 완전히 재정복했다. (아래 자료 참조)

 

통일신라는 965년 망하고 고려로 이어진다. 따라서 고려가 세워진 926년이후는 고려의 역사로 추정된다. 11세기의 비잔틴군도 고려군으로 추정된다. 

 

The Muslim conquest of Sicily was a see-saw affair and met with much resistance. It took over a century for Byzantine Sicily to be conquered; the largest city, Syracuse, held out until 878 and the Greek city of Taormina fell in 962. It was not until 965 that all of Sicily was conquered by the Arabs.[49] In the 11th century Byzantine armies carried out a partial reconquest of the island under George Maniakes, but it was their Norman mercenaries who would eventually complete the island's reconquest at the end of the century. 

(source ; Sicily, Wikipedia)

 

3. 맺음말

 

시실리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민족의 역사와 많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광개토태왕시 정벌한 가야의 임나지역으로 판단된다. 즉 신라 지마이사금이 공격한 가야가 시실리의 살수, 황산하로 판단된다. 가야가 그리고 왜가 지중해에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심증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시실리가 아라가야인지 안라국인지 추가 연구가 있어야 알 것 같다.  앞으로 금관가야, 구야한국 등에 대해서도 추가 연구가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