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은 북해지역의 Saxons족인가?

2022. 9. 4. 03:50한국사/기타

본 글은 최근 필자가 쓴 글 'Gokturk는 고구려인가?' 라는 글을 쓰면서, 지금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돌궐의 위치를 Gokturk 위치로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만약 Gokturk가 고씨계 튀르크라고 하는 고구려라면, 돌궐의 위치는 다시 추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보던 중, 아래 실위 관련 기록중 돌궐은 실위의 서쪽에 있었다는 기록을 보고 확신을 갖게 되어 이글을 쓰게 된다. 필자는 실위를 덴마크지역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리고 평소 프랑스 지역을 중국의 역사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는 요수 즉 압록수가 프랑스의 론강이라는 추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아울러 필자는 패수는 라인강으로 추정했다.

 

최근 '강동6주는 독일의 엘베강 동쪽에 있었다' 라는 글을 쓰면서, 또한 흑수말갈지역이 모스크바지역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밝힌, '흑해위 마자르족은 흑수말갈인가?' 라는  글을 쓰면서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몇년전에 공유한 문무님의 자료가, 최근에 필자가 쓴 흑수말갈과 지금 쓰는 돌궐과 관련하여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필자 또한 놀라게 된다. 

 

 

I. 신당서 실위 문헌에 의한 돌궐의 위치

 

아래 신당서 북적 실위 중 번역문을 소개한다. 돌궐의 위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 실위는 글단(거란)이 별종으로 동호의 북변이며, 대개 정령(당나라 북적 철륵)의 묘예 (여러 대를 걸친 먼 후대의 자손)이다.  땅은 황룡 북에 근거하고, 노월하 근방이며, 경사(수도)에서 곧바로 동북 7천리에 있으며, 동은 흑수말갈이고, 서는 돌궐이며, 남은 글단(거란)이고 북은 빈해 (바다에 가까이 닿아 있음)이다. "

 

(출처 : 실위와 거란어 언어/몽골실위 괸련 중국 정사 발번역 by 길공구,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blog.naver.com/lainfos), 카테고리, 실위, 공유글 참조)

 

 

상기 실위의 기록은 여러 지역의 위치를 말해 주고 있다. 즉 실위는 거란의 별종으로 동호의 북변에 있으며, 정령의 후예이며, 황룡국 북에 근거하고, 당나라의 수도 (경사) 동북쪽 7천리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위의 동쪽에 흑수말갈이 있으며, 서로는 돌궐이 있고, 남으로는 거란이 있으며, 북으로는 바다에 접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위치설정은 지금의 역사계에서 돌궐을 Gokturk로 본다면 전혀  맞지 않는다.  Gokturk 아래에 거란이 있지 않으며, 옆으로 길게 뻗은 Gokturk의 동쪽에 황두실위 등의 실위가 존재하지 않으며, 실위의 북쪽에는 바다에 닿아 있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위치설정은 필자의 추정과는 정확히 들어 맞는다. 필자는 황두실위를 언급하며, 실위지역이 덴마크지역의 Schleswig지역이라 추정했다. 금발의 서양인을 황두실위로 추정하면, 상기 자료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즉 동호가 실위의 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독일 북쪽을 의미하며, 정령을 정복한 흉노의 모돈선우가 이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모돈선우의 흉노는 성을 경계로 한(漢)나라와 접해 있었다. 즉 한나라가 이근처에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황룡국이 독일의 서북쪽지역이라고 유리왕의 해명태자 이야기와 로마의 Varos장군 이야기를 거론하며 추정했는데, 실위가 이들의 북쪽지역이므로 황룡국 추정을 옹호해준다. 

 

실위의 동쪽에 흑수말갈이 있다고 했다. 필자는 흑수가 모스크바 강이라고 최근 추정했다. 

 

 

실위의 남쪽으로는 거란이 있다고 했는데, 필자는 이미 거란이 Allemannia, 독일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추정했다. (필자의 글,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거란은 어디에 있는가?', '고려의 강동6주는 독일의 엘베강 동쪽에 있었다' 참조)

 

실위의 북쪽으로는 바다와 접했다고 했는데, 발틱해나 북극해를 말하지 않나 생각한다. 

 

실위의 서남쪽 7천리에 당나라의 수도 즉 경사가 있다고 했다. 실위를 덴마크지역으로 보면, 7천리 서남쪽은 대강 프랑스 남부 Toulouse,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혹은 마드리드 지역이 된다. 후한서 군국지에 낙양의 동북쪽 3600-5000리에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이 있다한 것과 유사한 결과를 보인다. 낙양은 프랑스 남부지방의 Narbonne가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수도가 프랑스 남부나 스페인지역에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는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니하인 패수가 독일의 라인강이 될 수 있다는 필자의 심증에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실위의 서쪽에 돌궐이 있다고 했다. 실위를 덴마크 북쪽지역으로 추정할 때, 스웨덴(황두 실위), 핀란드 (몽골실위)의 서쪽에 있는 돌궐은 노르웨이지역 또는 그 서쪽의 영국 등으로 추정된다.

 

재야사학자 문무님은 고문서를 해석하면서 돌궐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당황했다는 글을 썼다.  (필자의 다음 블로그(blog.daum.net/lainfos), 카테고리, 고구려,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고구려' by 문무,  공유 글 참조)

 

II. 재야사학자 문무님의 문헌 연구에 의한 돌궐의 위치

 

 

아래 재야사학자 문무님의 글을 옮겨 놓는다.  필자가 수년전에 공유했던 글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꺼내어 보고 매우 놀라게 된다. 아래 글에서 보듯이, 가살돌궐은 이태리 반도 북쪽의 중부유럽지역으로 추정되고, 이들의 북쪽에 있는 우제 돌궐은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이른다는 추정이다. 그리고 고구려 영역이 이들을 포함하고 러시아의 모스크바 지역까지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어 당황했다는 것이다. 중국 고전을 통한 해석이 이에 이르니 매우 깊은 통찰력에 필자도 감탄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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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를 넘나드는 고구려(高句驪) / 우제(牛蹄)돌궐(突闕)과 고려(高驪영토(領土)


    ○ 엊그제 게시판(揭示板) NO. 383 “대진(大秦)이 중국(中國)이 될 수 있을까?”를 위해 통전(通典)서융(西戎)편을 보다가수년(數年동안 찾지 못해 그 위치(位置)를 알 수 없었던 우제돌궐(牛蹄突闕)과 흑 거 자(黑車子)』 두 곳의 대략적(大略的위치(位置)를 알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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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판(揭示板) NO. 385 “고구려(高句驪부흥 군(復興軍)과의 격전장 호 로 하(瓠蘆河)”를 보면, “호 로 하(瓠蘆河)”를 설명(說明)한다거나글란(契丹선대(先代)들이 살았던 곳을 설명(說明)하는 원전(原典기록(記錄)에 꼭 나오는 단어(單語)인 우제돌궐(牛蹄突闕)”이란 말이 있는데통상적(通常的)으로 나라이름 또는 종족(種族)의 이름 등으로 이해(理解)하고 있는데이들에 대한 설명(說明)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무척 난해(難解)한 문장으로 알고 있었다.


    더구나 호 로 하(瓠蘆河)”는 분명(分明)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변경(邊境)지방에 있었던 하천(河川)이므로이 하천(河川)의 위치를 찾는다면고구려(高句驪)의 영토를 찾는데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나찾지 못했었는데이렇게 우연히 그곳을 찾았으니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찾고 나니생각지 않던 북유럽과 러시아의 모스크바 쪽 방향으로 올라가니 난감(難堪)하기만 하다.그렇다고 그 기록을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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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新五代史 四 夷 附 錄 第 一 契丹


         《 云 契 丹 之 先 , 常 役 回 紇 , 後 背 之 走 黑 車 子 , 始 學 作 車 帳 。 又 北 , 牛 蹄 突 厥 , 人 身 牛 足, 其 地 尤 寒 , 水 曰 瓠 ( , 夏 秋 冰 厚 二 尺 , 春 冬 冰 徹 底 , 常 燒 器 銷 冰 乃 得 飲


    〔2資治通鑑 / 202권 당기18. 고종(高宗). 함형4년 :


         《 閏 五 月燕 山 道 總 管右 領 軍 大 將 軍 李 謹 行 大 破 高 麗 叛 者 於 瓠 蘆 河 之 西胡 嶠 曰 : 黑 車 子 之 北有 牛 蹄 突 厥人 身 牛 足』。 其 地 尤 寒水 曰 瓠 蘆 河夏 秋 冰 厚 二 尺,秋 冬 冰 徹 底常 燒 器 銷 冰乃 得 飲余 按 唐 書 劉 仁 軌 傳此 瓠 蘆 河 當 在 高 麗 南 界新 羅 七 重 城 之 北 俘 獲 數 千 人餘 衆 皆 奔 新 羅。 時 謹 行 妻 劉 氏 留 伐 奴 城高 麗 引 靺 鞨 攻 之劉 氏 擐 甲 帥 ( ) 守 城久 之虜 退。 上 嘉 其 功封 燕 國 夫 人。 謹 行靺 鞨 人 突 地 稽 之 子 也武 力 絕 人為 諸 夷 所 憚。》


     〔3讀史方輿紀要 山西 :


          《 瓠 (盧 瓜在 漠 外<(註釋)> / 胡 嶠 曰: 黑 車 子 之 北有 牛 蹄 突 厥人 身 牛 足,其 地 有 寒 水曰 瓠 (盧 瓜夏 秋 冰 厚 三 尺春 冬 冰 徹 底常 燒 器 銷 冰乃 得 飲 雲


    ● 위 신오대사(新五代史글란(契丹)편과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및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편에 <본문 청색 주석 녹색>으로 표시(標示)한 우제돌궐(牛蹄突闕)에 대한 위치를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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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通典서융(西戎) / 대식(大食)
        대식(大 食사라센제국을 칭한다.’고 한다.】 편의 주석(註釋)의 두 환 경 행 기(杜 環 經 行 記)를 보면,
      《 又 云 : 『苫 國 在 大 食 西 界周 迴 數 千 里 (中略). 其 苫 國 有 五 節 度 , 有 兵 馬 一 萬 以 上 北 接 可 薩 突 厥 可 薩 北 又 有 突 厥 足 似 牛 蹄, 好 噉 人 肉.』 또 이르기를 :『 점 국苫國 대진(大秦)을 말한다.은 대식(大食)의 서쪽지경에 있는데둘레를 도는데(周迴수천(數千)리이다중략그 나라 점 국(苫國)”은 다섯 개의 절도가 있으며병마(兵馬)는 1만 이상이 있으며북쪽으로 가살(可薩)돌궐(突闕)과 연이어져 있다가살(可薩)돌궐(突闕)의 북쪽으로는 또 돌궐(突闕)이 있다다리가 우제(牛蹄)와 닮았는데, 사람들은 고기 씹는 것을 좋아한다


    ○ 점 국(苫國)’이 대진(大秦)’이고, ‘대진(大秦)’이 로마라 했을 때,


      ➀ 이탈리아 반도(半島)”점 국(苫國곧 대진(大秦)의 북쪽지방에 가살(可薩)돌궐(突闕)이 있다하였으니그곳은 현재(現在)스위스 및 독일오스트리아와 헝가리체코 등지이다.


      ➁ 그 북쪽에 또 돌궐(突闕)이 있는데다리()가 우제(牛蹄)와 닮았다고 한 우제돌궐(牛蹄突闕)” 이다이곳이 어딜까지도(地圖)를 펴 놓고 보니, “스칸디나비아 반도(半島)”와 발 틱 해()”이며, “러시아의 서(西)쪽 북단(北端)지방모스코바 서쪽이다.


    ● 이러한 지형지리(地形地理)로 보았을 때,


      ➀ 『대진(大秦)국이현 로마 땅이 될 수 있을까?』 대식국(大食國)을 사라센 제국(帝國)이라고 한다면그 서쪽지방에 있는 이태리반도는 점 국(苫國곧 대진(大秦)”이 될 수 있다.


      ➁ 『고구려(高句驪가 현 러시아 서쪽지방까지를 영토(領土)로 했을까?』 역사서(歷史書기록의호 로 하(瓠蘆河)” 및 우제돌궐(牛蹄突闕)”의 위치로 볼 때고구려(高句驪)의 서쪽 지경은 러시아 서쪽 북단(北端)까지로 볼 수 있다.


      ➂ 위의 것들은 역사서(歷史書기록에 따라지형지리(地形地理)와 방향(方向), 기후(氣候)등을 참고하여 설명(說明)한 것이다.


    ○ 도대체 고구려(高句驪)와 신라(新羅)는 어떤 나라였을까역사서(歷史書)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나그 윤곽을 잡을 만 하면또 달라지니 말이다이러한 결과(結果)로 보면고구려(高句驪)는 유라시아유럽과 아시아를 함께 호칭하는 말이다.의 북반구를 지배(支配)했던 거대제국(巨大帝國)을 운영했던 제국(帝國)이었다는 알 수 있다.


     【 황하(黃河)’의 남북(南北)안으로부터, ‘기련 산맥(祁連山脈)’과 하서회랑(河西回廊)’, 신강(新疆)의 천산산맥(天山山脈)’으로, ‘아랄 해와 카스피 해’, ‘흑해(黑海)’로 연결(連結)되는 축(), 선상(線上)의 이북(以北)지방은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라 할 수 있을 것 같다신라(新羅)는 그 남쪽지방을 통치(統治)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원전(原典)에 대한 또 다른 고증(考證)본을 찾기 전까지는 비정(比定), 추정(推定)”으로 남겨 놓고 싶다.

                             2012년 09월 13일 <글쓴이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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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문무의 조선사해설 : 인용출처 :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386H/386 )

 

 

필자가 과거 10년전 문무님의 공유 자료 기록을 복사해 나열하며 언급하는 것은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방향과 너무나 일치하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필자도 볼가 불가리아, 흑수말갈에 관한 글을 쓰면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고구려, 발해가 진출한 것을 추정하고 놀란 일이 있다. 심지어 Kievan Rus도 고려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에 관한 글은 지금 작성중입니다)

 

그리고 지금 쓰는 돌궐에 관한 글은 이들 지역이 Saxons족이 있던 중북부유럽과 이들이 이동한 현재 영국지역과 주위 섬들, 그리고 Saxons족에 뿌리를 두고 이동한 것으로 짐작되는 바이킹의 활동지역이 바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 주위의 섬 중에는 덴마크 우측 발트해에 해모수, Gotaland(고트족의 땅) 등의 지명도 있다. 바이킹족의 주 활동지역 중 일부 섬, Faroe islands, Shetland에는 고조선시대의 마한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적도 발견된다. (아래 글에서 언급할 내용). 필자는 덴마크지역이 북부여 지역으로 돌아간 동부여의 후손들이 세운 두막루가 있는 곳이라 추정했다. 

 

따라서 상기 문무님의 추정이 필자의 추정과 매우 일치하며, 최근에야 필자는 상기 내용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는 필자가 추정한 실위의 위치가 맞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상기 실위의 서쪽에는 돌궐이 있고, 실위의 우측에는 흑수말갈이 있다는 내용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III. 숙신의 역사

 

돌궐의 역사가 Saxons족의 활동과도 연관이 깊다는 것을 필자는 파악했는데, 필자는 Saxons족이 숙신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숙신과 고구려의 관계를 연구하며, 숙신이 켈트족이 아닌가 추정했다. 따라서 숙신에 대한 자료를 다시 보게 된다. 

아래 기록에서 보면 숙신은 고조선인들을 부르던 호칭이었다는 언급이 눈에 띤다. 그리고 후일 여진족의 선조라는 기록이 또한 눈에 띤다. 필자는 최근 '고려가 획득한 강동6주는 독일의 엘베강 동쪽에 있었다'는 글을 썼다.  고려는 동여진을 쫓아내고 이들 지역에 강동6주를 설치했다 하였다. 서양사에서는 이 지역이 Saxons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바로 이웃한 동쪽이다. 즉 Saxons족이 여진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Saxons족은 숙신이면서 여진족이라는 것인데, 아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결론이다. 

 

"기원전 6∼5세기 중원 북계를 비롯한 산둥반도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종족.식신·직신.

 

중국의 고전인 『국어(國語)』·『좌씨전(左氏傳)』·『일주서(逸周書)』·『사기(史記)』·『회남자(淮南子)』·『산해경(山海經)』등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식신(息愼)·직신(稷愼)이라고도 하며,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사용하는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朝鮮)이라는 왕조명을 갖기 이전에 고조선인들을 부르던 호칭으로도 보기도 한다.

 

초기 기록인『국어』에 나온 바에 따르면, 숙신은 당나라 때의『진서(晋書)』에 언급된 것처럼 흑룡강(黑龍江) 중·하류의 주민이 아니었다. 즉, 고조선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중원(中原) 북쪽 경계를 비롯해 산둥반도 및 남만주 주민을 총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숙신의 후손으로 꼽고 있는 종족으로서는 한(漢)대의 읍루(挹婁), 후위(後魏)대의 물길(勿吉)과 수·당대의 말갈(靺鞨), 발해 멸망 후의 여진(女眞)이다. 따라서 숙신은 일반적으로 여진족의 선조로 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대체로 그들의 종족 계통과 기원, 분포지역, 읍루 및 예맥(濊貊)·고조선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는데 고아시아족 기원설과 순퉁구스, 몽고족, 동이(東夷)의 은인(殷人) 기원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최남선(崔南善)·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은 숙신을 조선과 같은 어원으로 생각해 그들의 기원을 백두산 부근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반해 슈미트나 시라코고로프 등과 같이 고아시아족설(古亞細亞族說)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발상지와 거주지로 흑룡강 유역과 연해주 북단을 거론하였다. 또한, 숙신이 중원 북쪽 경계로부터 흑룡강 중·하류로 이동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을 하북계(河北界), 산둥반도, 발해만(渤海灣) 양안(兩岸), 황하(黃河) 유역의 중원지구 등으로 상정한다.

 

다시 말해, 숙신의 발상지는 오히려 중원 북계 및 요서(遼西)·요동(遼東)과 같이 대개 고조선과 일치하는 곳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흑룡강 중·하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 말∼7세기 초의 춘추시대(春秋時代)를 기록한 문헌에는 중국 동북부에 활약한 종족으로 산융·영지·고죽·도하 등이 등장할 뿐 숙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기원전 7세기 이전 숙신이 북경 동북 지방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기원전 8∼7세기 이후에는 길림성 북쪽 일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발음과 명칭상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고조선과 동일 실체로 보기는 어렵다.

 

 

 

숙신의 후신인 읍루족은 부여(夫餘)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읍락 별로 공납을 납부했는데, 3세기 초에 가혹한 징수에 저항해 이탈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이들의 후신인 물길이 5세기 종반에 발흥하여 ....... 고구려의 북경(北境) 및 농안의 부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후 물길-말갈계 집단이 농안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들어와 거주하다가 6세기 말 고구려의 북진에 의해 일부는 수나라의 요서지방으로 망명하고, 일부는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들 말갈은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를 건국의 주요 세력이 된다."

 

(자료 : 숙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숙신)

 

상기 자료에서 숙신은 호시와 석노를 이용하였다 했다. 이들은 서양사에서 이용하는 활이다. 따라서 숙신을 동양사의 역사로 보는 것은 이에 맞지 않는다. 필자의 판단에 상기 숙신은 Saxons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물길을 Marcomanni, 말갈은 Magyar 등으로 구분하는데, 보다 자세한 논의는 후일로 미룬다. 

 

그러나 이을형 교수의 아래 주장에 의하면 숙신은 동이족의 조상으로 보다 광범한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아래 자료 참조) 특히 예맥계가 숙신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맥은 부여, 고구려계이다.  아래 언급되는 문헌에서 예맥은 동이의 해상에 있다고 했다. 필자는 '고대 한국사에서 숙신은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숙신의 지역이 발트해, 북해의 지역이며, 동시에 예맥의 지역이며, 켈트족의 지역이라 추정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결론의 추정으로 본 글의 돌궐지역 추정과도 연관된다. 

 

 

"진서각주(晋書斠注)에 보면 동이가 백여국으로 분립했다고 하고 있다.(晋書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四夷), 이는 우리 민족이 여러 부족으로 분파, 분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이족중(東夷族中) 4300년 전에 지나 문헌에 나타난 것은 오직 숙신씨뿐이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 [근세 인류학자가 동북민족은 다 숙신(肅愼)에서나왔다]고 했다.(渤海國志長編 卷十六 族俗考 第三).

 

이는 동이족의 시조가 숙신씨라고 가리킨 것이라고 고(故) 최인(崔仁)선생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숙신씨에서 분파된 동이족 중, 숙신씨의 정통을 계승한 자가 바로 한민족(韓民族)이라 하고 있다.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에 [尙書傳 貊海東夷(肅愼之命, 傳原文作貌 釋文作貊)]이라 했다.(黑龍江志稿 卷一 地理志) 즉, 예맥은 동이의 해상에 있다. 숙신지명(肅愼之命)의 원문(原文)에 모(貌)로 기록했는데 전문(篆文) 초문(草文)에 해석하는 석문(釋文)에 맥(貊)이라 풀이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숙신을 맥(貊)이라 풀이했다는 뜻이다. 즉 숙신이 예맥이요 예맥이 숙신이라 가리키는 것이다. 또 서전(書傳) 여오장(旅獒章) 주(注)에 주무왕(周武王) 당시에 숙신씨 화살을 수입했다고 하고, 동서(同書) 무성편(武成篇)에 주무왕(周武王) 당시 예맥(銳麥;濊貊)이 한족(漢族)과 병칭(竝稱)되어 있다.

 

숙신씨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요, 예맥은 동이족의 주체로서 동이족의 시조와 동이족의 주체가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은 숙신(肅愼)이 예맥(銳麥;濊貊)이요 예맥이 숙신이라는 사실을 더욱 긍정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숙신씨와 그 지류(支流)가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에 합병되어 완전히 한민족(韓民族)으로 성장했다. 후한서 동이전에 숙신씨의 분파인 읍루(挹婁)가 한(漢)나라가 흥(興)한 후 부여(夫餘)에 합병됐다.

 

진서각주에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 숙신(肅愼), 읍루를 합병했다고 하고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 할 때에 그 이십사군(二十四軍) 우익(右翼)에 숙신도(肅愼道)가 있는 것을 보면 숙신이 고구려에 합병 된지 오래다 하고, 송서(宋書)에 고구려가 숙신씨의 고시(고(楛矢), 석족(石鏃)을 지나에 수출했다고 하고 있는데 앞뒤가 안 맞는 점은 유의할 점이다."

 

(자료 : 이을형, '숙신씨 예맥조선 낙랑조선 역사 숨겼다', 스카이데일리, 2021. 9.21.,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오손/오환/숙신, 펌글 참조)

즉 이을형 교수가 주장하는 숙신은 유럽의 켈트족으로 판단되며, 우리의 단군 조선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그 위의 글에서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숙신에 관한 글은 유럽의 Saxons족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

켈트족과 Saxons족은 엄연히 다르다. 이후 분석되는 글에서 밝히게 되겠지만, 켈트족은 반농, 반목의 행태를 지니지만, Saxons족은 배를 타고 다니며 약탈로 생활하는 부정적 이미지의 바이킹과 유사한 행태를 가졌다. 아래 글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Saxons족이 흉노의 별종인 돌궐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한다. 

 

 

IV. Vikings 이전의 Northern Isles의 역사

 

돌궐은 흉노의 별종이라 했다. 흉노는 고구려의 전신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돌궐도 고구려의 모습을 보일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필자가 추정하는 고구려 지역이었던 중부 유럽지역은 또한 마한의 지역이었다. 해두국이 마한의 거수국이라 했다. 백두산 주위 10국의 역사를 필자는 알프스산맥의 몽블랑 산의 주위 역사로 추정했다. 또한 Gaul 지역 (프랑스지역)의 Aedui 지명은  해두국이라 추정했다.  그리고 필자는 흉노의 잔재가 중북부유럽에서 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왜나하면 한(漢)나라의 지역은 프랑스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돌궐은 흉노의 별종이라 한다면, 그리고 돌궐이 바이킹지역으로 추정된다면, 이들 지역의 생활모습에서 한민족의 모습과 같은 현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이를 감안하고 살펴 보자.

서양사에서 바이킹의 활동은 9세기에 시작된다. 그런데 중국사에서 거론되는 돌궐은 6세기부터 많은 활동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 영역 중에서,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매우 핵심적인 섬인 북해의 Faroe Islands와 Shetland islands의 역사를 보면서, 바이킹 이전의 역사에서 흉노의 별종인 돌궐의 흔적이 있나 보고자 한다. 

 

    Vikings exploration and territories (source : Wikipedia)

 

1. Faroe Islands의 역사

 

"There is some evidence of settlement on the Faroe Islands before Norse Viking settlers arrived in the ninth century AD. Archeologists found burnt grains of domesticated barley and peat ash deposited in two phases; the first dated between the mid-fourth and mid-sixth centuries, and another between the late-sixth and late-eighth centuries.[15][16] Researchers have also found sheep DNA in lake-bed sediments, which were dated to around the year 500. Barley and sheep had to have been brought to the islands by humans. As Scandinavians did not begin using the sail until about 750, it is unlikely they could have reached the Faroes before then, and it is more likely the settlers came from Great Britain or Ireland.[17][18]

9세기에 바이킹이 도착하기 전에 Faroe 섬에 이미 정착한 분명한 흔적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경작된 보리가 탄 알갱이와 토탄재가 두 단계에 걸쳐 저장된 것을 발견했다. 첫째 년대는 4세기 중반과 6세기 중반시기이고, 두번째 년대는 6세기 후반과 8세기 후반사이의 것이다. 연구자들은 또한 호수바닥에서 약 500년경으로 보이는 양(sheep)의 DNA를 찾아냈다.  보리와 양은 모두 인간에 의해 섬으로 옮겨진 것들임에 틀림없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750년에 가서야 항해를 시작하였으므로, 그들이 이 Faroe섬에 도착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이들 섬의 원주민들은 바이킹의 선조라기 보다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Archaeologist Mike Church noted that Dicuil, an Irish monk of the early ninth century, may have mentioned the Faroes. Dicuil wrote in his geographical work De mensura orbis terrae that there were heremitae ex nostra Scotia ("hermits from our land of Ireland/Scotland") who had lived on the northerly islands of Britain for almost a hundred years until the Vikings arrived.[19] Church suggested that the people living there might have been from Ireland, Scotland, or Scandinavia, or possibly from all three.[20] According to a ninth-century voyage tale, the Irish saint Brendan visited islands resembling the Faroes in the sixth century. This association, however, is not conclusive.[21]

 

고고학자 Mike Church는 9세기초의 아일랜드 수도승 Dicuil이 Faroe섬을 언급하였을 수 있다고 했다. Dicuil은 그의 지리서에서, 바이킹이 도착하기 100년 전에 Britain의 북쪽섬에 살았던, 우리땅 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서 온 hermits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Church는 거기 살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또는 스칸디나비아, 또는 세곳 모두에서 왔던 사람들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9세기의 항해 이야기에 의하면, 아일랜드의 saint Brendan은 6세기에 Faroes와 비슷한 섬을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Norsemen settled the islands c. 800, bringing Old West Norse, which evolved into the modern Faroese language. According to Icelandic sagas such as Færeyjar Saga, one of the best known men in the island was Tróndur í Gøtu, a descendant of Scandinavian chiefs who had settled in Dublin, Ireland. Tróndur led the battle against Sigmund Brestisson, the Norwegian monarchy and the Norwegian church.

 

Norsemen (북게르만인을 일컫는 말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조상)은 800년에 이 섬에 정착하면서, Old West Norse언어를 가져왔고, 이것이 현대의 Faroe지역 언어로 진화했다. 아이슬란드 Sagas (전설)에 의하면, 이 섬의 가장 유명한 사람중의 하나는 Trondur i Getu인데, 이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정착했던 스칸디나비아인 chief의 후손이다. Trondur는 노르웨이 군주, Sigmund Brestisson과 노르웨이 교회에 대항하여 전쟁을 리드했다. 

 

(source : Faroe Islan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카테고리, Norse)

 

위의 자료를 고려하면, Faroe섬에서의 4세기-8세기의 정착흔적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지역에서의 이동인들의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 상대적으로 스칸디나비아에서 오는 바이킹의 선조일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의 Picts, 아일랜드의 Irish 등은 켈트인의 후손으로 보인다. 언어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문화상으로도 그렇다. 필자는 이들 켈트인들이 고조선인들이 아닌가 추정했다. (필자의 글, '한국 고대사의 숙신은 누구인가?' 참조).  돌궐인들의 정체가 흉노의 별종이니 이미 이 지역에 진출할 수 있으나, 흉노와 고조선인은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돌궐인보다는 켈트족, 고조선인들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흉노(훈족)의 후손인 고구려의 경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흔적으로 보이는 성곽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을 고려하면 (필자의 글,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 지역 추정' 참조), 고구려 광개토태왕도 발틱해, 북해를 이용한 수군활동이 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의 해모수(Hemmoshus) 지명이나 덴마크의 두막루 등의 위치를 고려하면 단군조선인들(Danes)이 발틱해, 북해에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고구려도 이와 같은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도 이러한 전철을 밟아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중간 4-7세기에,  돌궐의 역사가 존재 했는지는 더 연구해야 알 것 같다. 한편, 위의 문무님의 자료에서 우제돌궐이 고구려의 영역이며,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는 연구결론을 고려하면, 돌궐의 역사가 포함된 지도 모른다. 

 

 

2. Shetland 섬의 역사

 

바이킹의 주요한 활동지역 중에 Faroe islands외에 바로 옆에 Shetland Islands가 있다.  그래서 이 지역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이들 지역은 외진 섬으로서 보다 고대, 중세 유물들이 더 잘 보관된 지역이라는 점도 작용하였다. 

 
The preserved ruins of a wheelhouse and broch at Jarlshof, described as "one of the most remarkable archaeological sites ever excavated in the British Isles".[43]

 

상기 사진은 Faroe섬 옆의 Shetland섬에서 발견된 고대 유적이다.  영국 주위 섬들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고고학적 유적지이다. Shetland Islands에 관한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를 살펴 보자 

 

 

"Humans have lived in Shetland since the Mesolithic period. Picts are known to have been the original inhabitants of the islands, before the Norse conquest and subsequent colonisation in the Early Middle Ages.[5] .........

인류는 중석기 시대이후부터 Shetland에 살아 왔다. Picts(스코틀랜드지역)인들이 이섬들의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정복이 이어지고, 중세시대의 식민화가 이루어졌다. 

 

 

The local way of life reflects the Norse heritage of the isles, including the Up Helly Aa fire festivals and a strong musical tradition, especially the traditional fiddle style. Almost all place names in the islands also have Norse origin.[8] The islands have produced a variety of prose writers and poets, who have often written in the distinctive Shetland dialect. Numerous areas on the islands have been set aside to protect the local fauna and flora, including a number of important seabird nesting sites. The Shetland pony and Shetland Sheepdog are two well-known Shetland animal breeds. Other animals with local breeds include the Shetland sheep, cow, goose, and duck. The Shetland pig, or grice, has been extinct since about 1930..................

 

이 지방의 생활방식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섬 생활방식을 이어 받았다. 특히, Up Helly Aa 불축제(횃불을 들고 모여 바이킹 배인 longship을 태우는 축제)나 강한 음악 전통, 특히 전통적인 fiddle style(바이올린과 유사한 악기)이 그렇다. 섬의 거의 모든 지명은 Norse Origin이다.  섬들에서는 다양한 수필작가와 시인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특별한 Shetland 방언들을 기록했다. 섬들의 많은 지역이 중요한 바닷새의 산란장소를 포함한 지역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확보되어 왔다. Shetland pony나 Shetland Sheepdog(양치는 개)가 유명한 Shetland 동물종이다. 지역적으로 키워지는 다른 동물들은 Shetland 양, 소, 거위, 그리고 오리가 있다. Shetland 돼지는 1930년이후 사라졌다. 

 

Due to the practice, dating to at least the early Neolithic, of building in stone on virtually treeless islands, Shetland is extremely rich in physical remains of the prehistoric eras and there are over 5,000 archaeological sites all told.[44] midden site at West Voe on the south coast of Mainland, dated to 4320–4030 BC, has provided the first evidence of Mesolithic human activity in Shetland.[45][46] The same site provides dates for early Neolithic activity and finds at Scord of Brouster in Walls have been dated to 3400 BC.[Note 5] "Shetland knives" are stone tools that date from this period made from felsite from Northmavine.[48]

 

Entrance to Unstan Chambered cairn , Orkney (source : Wikipedia)

 

적어도 초기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무 없는 섬에서의 석조건물 건축 영향으로, Shetland는 선사시대의 유적이 매우 풍부하며, 모두 5000개가 넘는 유적지가 있다. Mainland의 남쪽 해안의 West Voe의 두엄더미 지역 (4320-4030 BC 시기)에서 Shetland의 중석기시대 첫 인류활동이 발견되었다. 같은 장소에서 초기 신석기시대, BC 3400시대에 이르는 Scord of Brouster in Walls(Walls 지역의 돌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Shetland 섬들의 북서쪽지역 Northmavine지역의 Felsite(가늘게 연마된 Volcanic rock)으로 만들어진 이시기의 돌칼이 "Shetland knives"이다. 

 

Pottery shards found at the important site of Jarlshof also indicate that there was Neolithic activity there although the main settlement dates from the Bronze Age.[49] This includes a smithy, a cluster of wheelhouses and a later broch. The site has provided evidence of habitation during various phases right up until Viking times.[43][50] Heel-shaped cairns, are a style of chambered cairn unique to Shetland, with a particularly large example in Vementry.[48]

 

Chambered cairn, Cross Sections of Maeshowe (source : Wikipedia)

 

중요한 지역인 Jarlshof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은 신석기시대의 활동이 있었음을 말한다. 비록 주요 정착지역은 청동기시대의 것이지만. 또한 원형의 돌집 형태의 대장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지역은 바이킹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주거지역임을 보여 준다. Shetland에 유일한 형태인 적석층 고분의 형태인 Heel-shaped cairns이 특히 Vementry지역에서 큰 규모가 발견되었다. 

 

Numerous brochs were erected during the Iron Age. In addition to Mousa there are significant ruins at ClickiminCulswickOld Scatness and West Burrafirth, although their origin and purpose is a matter of some controversy.[51] The later Iron Age inhabitants of the Northern Isles were probably Pictish, although the historical record is sparse. Hunter (2000) states in relation to King Bridei I of the Picts in the sixth century AD: "As for Shetland, Orkney, Skye and the Western Isles, their inhabitants, most of whom appear to have been Pictish in culture and speech at this time, are likely to have regarded Bridei as a fairly distant presence".[52] In 2011, the collective site, "The Crucible of Iron Age Shetland", including Broch of Mousa, Old Scatness and Jarlshof, joined the UKs "Tentative List" of World Heritage Sites.[53][54 

Broch of Mousa, Shetland (source : Wikipedia)

 

철기시대에는 많은 적석층 봉분이 세워졌다. Mousa외에도 Clickimin, Culswick, Old Scatness, 그리고 West Burrafirth에서 의미있는 유적들이 있다. 비록 origin과 목적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Northern Isles지역의 후기 철기시대의 거주민들은, 역사적 기록은 드물지만,  아마도 Pictish였을 것이다.  Hunter(2000년)는 6세기의 Bridei I of the Picts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Shetland, Orkney, Skye 그리고 서쪽 섬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Pictish로 보인다. 그리고 Bridei를 꽤 먼거리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다."   2011년에, Mousa의 적석층 봉분, Old Scatness, Jarlshof 지역을 포함하여 "철기시대 Shetland의 the Cruicible" 복합지역은 영국의 World Heritage Sites의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source : Shetland,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카테고리, Norse)

 

 

상기 Jarlshof의 원형돌집과 적석층 봉분 유적 사진은 우리 역사의 마한인의 주거 모습과 유사하다. (아래 자료 참조) 이후 글에서 제시되는 바이킹의 문화에서도 마한의 문화와 유사한 점들이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순장 문화, 큰 방패와 창을 쓰는 무기, 지게 사용문화, 브로치, 목걸이, 팔찌 등 보석을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문화 등이다. 상기 유적은 철기시대의 문화라면 마한시대와 매칭될 수 있다고 본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나있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삼한)

 

즉 이들지역이 켈트의 문화권이면서, 마한의 문화권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켈트의 문화권은 단군조선의 문화권이다. 후세에 마한은 이들의 후손일 것이다. 마한 중에서도 중마한은 중부유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예맥계인 부여나 고구려와 연결된다. 이을형 교수가 주장하는 광의의 숙신의 계열이다. 그러나 협의의 이미의 숙신 즉 Saxons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바이킹문화와 연결되면서도 켈트족과 연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느끼기에 Saxons족과 켈트족이 차이가 있는 것처럼, 바이킹과 Saxons족의 차이가 느껴진다. 오히려 켈트족과 바이킹의 천연관계가 더 밀접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3. DNA study of Shetland

 

"Modern DNA studies such as the Viking Health Study are severely flawed as they only account for a tiny fraction of the population.[57]  .....

 

Vikings then used the islands as a base for pirate expeditions to Norway and the coasts of mainland Scotland. ..."

 

Shetland 주민들의 유전자 분석은 이들이 바이킹과 관계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즉 켈트족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바이킹은 노르웨이나 스코틀랜드 본토 해안을 약탈하기 위한 기지로 이섬들을 이용하였을 수 있다.

 

(source : Shetland,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카테고리, Norse)

 

이러한 언급은 또한 바이킹의 원조가 노르웨이나 스코틀랜드지역이 아니라는 뜻을 의미한다. 아래 Saxons의 역사에서 바이킹과 관련성을 함축하고 있는데, Saxons족이 있었던 발트해에 접한 중북부 유럽지역이  바이킹의 출발지역이라는 것일 수 있다. 이 지역은 좁은 의미의 숙신지역으로 연결되며, 후일의 여진족과도 연결된다.

 

4. Etymology(어원) of Shetland

 

Shetland 이름의 어원은 고대 켈트족의 이름에서 왔었을 수 있다고 기술된다. 그리고 고대 기록에서 Shetland, the Isles of Cats(Cats는 부족명)는 Scotland 본토 (Kingdom of Cat)와의 연관성이 있음을 아래 자료는 말하고 있다. 즉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들 섬지역은 바이킹보다는 켈트족과 연관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The name Shetland may derive from the Old Norse words hjalt ('hilt'), and land ('land'). Another possibility is that the first syllable is derived from the name of an ancient Celtic tribe.[9][10]

 

In AD 43, the Roman author Pomponius Mela made reference in his writing to seven islands he called the Haemodae. In AD 77, Pliny the Elder called these same islands the Acmodae. Scholars have inferred that both of these references are to islands in the Shetland group. Another possible early written reference to the islands is Tacitus' report in Agricola in AD 98. After he described the Roman discovery and conquest of Orkney, he added that the Roman fleet had seen "Thule, too".[Note 2] In early Irish literature, Shetland is referred to as Insi Catt — "the Isles of Cats" (meaning the island inhabited by the tribe called Cat). This may have been the pre-Norse inhabitants' name for the islands. Cat was the name of a Pictish people who occupied parts of the northern Scottish mainland (see Kingdom of Cat); and their name survives in the names of the county of Caithness and in the Scottish Gaelic name for Sutherland, Cataibh, which means "among the Cats".[13] 

(source : Shetland,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카테고리, Norse)

 

이상으로 바이킹의 중간 활동기지의 중요한 섬들인 Faroe Islands와 Shetland Isalnds에 대해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이들 지역은 바이킹의 origins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히려 켈트족의 후손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들의 유적을 보면 우리의 마한문화 또는 고조선 문화와 유사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바이킹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V. Vikings이전의 Saxons의 역사

 

상기 바이킹의 활동영역인 Faroe Islands, Shetland Islands를 살펴 보면서, 이들 주민들은 바이킹 보다는 켈트족의 후손에 더 가깝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마한의 움집과 가까운 유적을 보았는데, 고대 켈트인들의 유적이며, 어쩌면 단군조선인들의 유적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여기서는 바이킹의 출발지역이 노르웨이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는 언급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이킹들의 원래 고향이며 출발지는  어디일까? 

필자는 Saxons족의 프랑크왕국의 Charlemagne왕과의 30년이 넘는 전쟁의 역사를 보면서, 또한 바이킹의 자료를 보면서, 바이킹의 약탈행위의  동기가 Charlemagne에 대한 복수일 수 있다는 기술이 있는 것을 보았다. 즉  바이킹의 원래 고향이 Saxons족 주거지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발트해에 접한 중북부 유럽지역이다. 독일의 서북부지역이며, 프랑스의 동북부지역이며, 덴마크의 남서쪽 지역이며, 지금의 네델란드지역에 가깝다.

 

돌궐이 이 지역에 있다면, 고구려와 중국사와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즉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 모두 돌궐에게 공물을 바쳤다 한다. 그리고 한때 중국의 하북지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필자는 중국의 역사가 프랑스지역에서 있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프랑스지역의 북쪽에 북제, 북주가 있었을 것이며, 이들 지역은 Saxons족이 거주하던 지역의 서쪽에 있다.  따라서 프랑크왕국의 동쪽인 Austrasia지역에서 자주 충돌했을 가능성이 많다.

 

돌궐은 고구려와는 신성, 백암성에서 싸웠다 했다.  신성, 백암성은 고구려가 거란과의 전쟁을 한 곳이기도 하다. 거란, 즉 Allemannia는 라인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따라서 돌궐이 고구려와 싸운 것은 라인강 주변에서 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Saxons족의 위치가 돌궐족의 위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이킹의 해양세력이라는 가정을 해도, 바이킹이 라인강을 주요 활동지역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발트해에서 라인강을 타고 내려오는 침투로를 생각할 수 있다. 즉 Saxons족 지역이 바이킹의 원래 출발지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들과 관련성이 있을 수 있는 돌궐의 지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Saxons족의 역사를 살펴 보고자 한다. 특히 돌궐의 역사가 중국사에 자주 등장하는 6-8세기에 해당하는 Saxons족의 역사를 살피고자 한다. 이는 Charlemagne왕과의 30년 전쟁 이전시기이기도 하다. 

 

1. Saxons before Charlemagne conquest

 

"The Saxons (Latin:Saxones,German:Sachsen,Old English:Seaxan,Old Saxon:Sahson,Low German:Sassen,Dutch:Saksen) were a group of early Germanic[1] peoples whose name was given in the early Middle Ages to a large country (Old Saxony, Latin:Saxonia) near the North Sea coast of what is now Germany.[2] In the late Roman Empire, the name was used to refer to Germanic coastal raiders, and also as a word something like the later "Viking".[3]  

Saxons족은 지금의 독일의 북해 해안 가까이 있는 중세의 Old Saxony 지역에 있는 초기 게르만 사람들의 그룹이다. 로마제국 후기에는 이러한 이름은 게르만 해변 약탈자들을 칭하는데, 또는 후기의 바이킹과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다. 

 

Their origins appear to be mainly somewhere in or near the above-mentioned German North Sea coast where they are found later, in Carolingian times.

 

이들의 origins은, 카롤링가 프랑크시기에 발견되는 위에서 언급된 독일의 북해변 주위인 것 같다. 

 

In Merovingian times, continental Saxons had also been associated with the activity and settlements on the coast of what later became Normandy.

 

메로빙가 프랑크시기에는, 대륙에 있는 Saxons은 후에 노르만디가 되는 지역의 해안에 정착하고 활동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Their precise origins are uncertain, and they are sometimes described as fighting inland, coming into conflict with the Franks and Thuringians. There is possibly a single classical reference to a smaller homeland of an early Saxon tribe, but its interpretation is disputed (see below). According to this proposal, the Saxons' earliest area of settlement is believed to have been Northern Albingia. This general area is close to the probable homeland of the Angles.[4]

이들의 정확한 origins은 불확실하다. 그들은 때때로 육지로 들어와 프랑크와 Thuringians과 전쟁하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초기 Saxons족의 조그만 고향을 말하는 하나의 단서가 있는데, 그러나 그 해석은 논란이 대상이 된다. 이 근거에 의하면, Saxons족의 초기 정착지역은 Northern Albingia(독일의 엘베강 하류지역)지역으로 믿어진다.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Angles족의 고향에 매우 가까운 지역이다. 

 

(source : Saxon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Anglo-Saxons)

 

Saxons족은 원래 독일의 북해변 해안지역 (Northern Albingia, 엘베강 하류지역)이 origins으로 여겨지며, Angles족과 가까운 곳으로 추정된다. (아래 지도 참조). 이들은 Merovingian Franks시기 (450 - 751)에는 프랑스 북쪽 노르만디 지역에 정착하고 활동하였고, 때때로 해안에서 육지안으로 들어와 프랑크와 Thuringians과 전쟁하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즉 프랑스 북쪽 노르만디에 위치해 있어 북제, 북주 등과 관련된 돌궐의 지역이 될 수 있다. 노르만디 지역에 가까운 곳이 Mont Saint Michel 성곽이다.  이들 Saxons족은 주로 해양세력인데, 또한 육지로 들어와  프랑크족과 Thuringians 부족과 전쟁을 하였다 하였다. 아래 지도의 Thuringians 지역은 독일의 중부지방이다. 즉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독일 중부지역이다. 강을 이용한 침입일 수도 있고, 북해변에 위치한 Saxons족의 공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해변의 지역은 500년경 두막루에 의해 앵글로 삭슨족은 영국지역으로 쫓겨났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전쟁중  돌궐과 고구려의 전쟁 즉 551년 신성과 백암성에서의 싸움은 라인강 등을 이용한 돌궐의 침입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하북을 차지한 돌궐은 중국지역인 프랑스 북부지역으로 노르만디에서 일시적으로 세력을 넓힌 것일 수 있다. 즉 프랑크왕국의 북서쪽 Neustria와 북동쪽 Austrasia 지역을 침범한 것일 수 있다. 즉 삭슨족이 돌궐세력일 수 있다는 가정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독일 중부의 Thuringia지역 (자료 : 위키피디아)

 

 

2. History of Saxons

 

위에서 언급한 삭슨족의 돌궐 가능성은 삭슨족의 역사를 더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 삭슨족의 역사를 살펴 보자. 

 
Possible locations of the Angles, Saxons and Jutes before their migration to Britain.

 

 

"Ptolemy's Geographia, written in the 2nd century, is sometimes considered to contain the first mentioning of the Saxons. Some copies of this text mention a tribe called Saxones in the area to the north of the lower Elbe.[13] However, other versions refer to the same tribe as Axones. This may be a misspelling of the tribe that Tacitus in his Germania called Aviones. According to this theory, "Saxones" was the result of later scribes trying to correct a name that meant nothing to them.[14] On the other hand, Schütte, in his analysis of such problems in Ptolemy's Maps of Northern Europe, believed that "Saxones" is correct. He notes that the loss of first letters occurs in numerous places in various copies of Ptolemy's work, and also that the manuscripts without "Saxones" are generally inferior overall.[15]

 

2세기에 쓰여진 Ptolemy의 Geographia는 가끔 삭슨족에 대해 처음 언급하는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책의 몇몇 복사본은 엘베강 하류 북쪽의 지역에 있는 삭슨족이라 불리는 부족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버전은 같은 부족을 Axones으로 언급한다. 이는 아마도 Tacitus가 그의 저서 Germania에서 Aviones라고 불리는 부족을 철자가 틀리게 적은 것일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삭슨족은 이들을 뜻하는 이름을 고치려 하는 나중의 기록의 결과였다. 다른 한편, Schutte는, Ptolemy의 북유럽 지도에서 그런 문제를 분석했는데, Saxones이 정확하다고 믿었다. 그는 프톨레미의 작품 여러 사본에서 많은 곳에서 첫째 글자가 없어지는 것을 발견했으며, 또한 Saxones이 없는 사본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혔다. (서양사에서도 일본의 삼국사기 왜곡 같은 역사왜곡의 흔적이 보인다)  

 

Schütte also remarks that there was a medieval tradition of calling this area "Old Saxony" (covering Westphalia, Angria and Eastphalia).[16] This view is in line with Bede who mentions Old Saxony was near the Rhine, somewhere to the north of the river Lippe (Westphalia, northeastern part of modern German state Nordrhein-Westfalen).[17]

Schutte는 또한 중세의 전통에서는 이들지역을 "Old Saxony" (Westphalia, Angria, Eastphalia지역 포함)라고 부른 것을 언급한다. 이러한 시각은 Old Saxony를 라인강 근처, Lippe강(=라인강의 오른쪽 지류) 북쪽 어디(Westphalia, 현재의 독일 Nordrhein-Westfalen 주의 북동쪽 부분) 라고 언급한 Bede와 궤를 같이 한다. 

 

The first undisputed mention of the Saxon name in its modern form is from AD 356, when Julian, later the Roman Emperor, mentioned them in a speech as allies of Magnentius, a rival emperor in Gaul. Zosimus also mentions a specific tribe of Saxons, called the Kouadoi, which have been interpreted as a misunderstanding for the Chauci, or Chamavi. They entered the Rhineland and displaced the recently settled Salian Franks from Batavi, whereupon some of the Salians began to move into the Belgian territory of Toxandria, supported by Julian.[18]

Continental Coast of Germanic peoples (AD 150) (source : Wikipedia)

 

근대에 있어 삭슨이란 이름에 대해 처음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언급은 AD 365년부터인데, 후에 로마 황제가 되는 Julian이 Gaul지역에서 그의 경쟁 황제인 Magnentius의 동맹으로서 한 연설에서 삭슨을 언급했다. Zosimus도,  Kouadoi 이라 불리는, 특별한 부족 삭슨을 언급했는데, 이 Kouadoi (콰도이, 돌궐?)이라 불리는 부족은 Chausi 또는 Chamavi를 오해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들은 라인강지역(Rhineland)으로 들어가, 이제 막 정착한 Salian Franks를 Batavi지역에서 쫓아냈다. 일부 Salian은, Julian의 지원을 받아,  벨기에인 영토 Toxandria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Both in this case and in others the Saxons were associated with using boats for their raids. In order to defend against Saxon raiders, the Romans created a military district called the Litus Saxonicum ("Saxon Coast") on both sides of the English Channel.

In 441–442 AD, Saxons are mentioned for the first time as inhabitants of Britain, when an unknown Gaulish historian wrote: "The British provinces...have been reduced to Saxon rule".[19]

 

이경우와 다른 경우에도, 삭슨족은 그들의 약탈에 있어서 배를 이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삭슨족의 약탈에 방어하기 위해, 로마는 Litus Saxonicum ("Saxon Coast")라 불리는 군사지역을 영국해협 양쪽에 창설했다. AD 441-442년에, 삭슨족은 처음으로 Britain의 정착민으로 언급되었다. 이때 한 골족의 무명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British 지방은 삭슨족의 지배로 좁혀졌다." 

 

Saxons as inhabitants of present-day Northern Germany are first mentioned in 555, when the Frankish king Theudebald died, and the Saxons used the opportunity for an uprising. The uprising was suppressed by Chlothar I, Theudebald's successor. Some of their Frankish successors fought against the Saxons, others were allied with them. The Thuringians frequently appeared as allies of the Saxons.

 

현재의 독일 북쪽에 사는 삭슨족은 555년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때는 프랑크왕국 왕 Theudebald가 죽고, 삭슨족이 이 기회를 이용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Theudebald의 계승자 Chlothar I에 의해 진압되었다. 프랑크왕국의 일부 계승자들은 삭슨족에 대항하여 싸웠고, 일부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Thuringians은 자주 삭슨족과 동맹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 추가 : 삭슨족을 돌궐로 본다면, 중국의 역사에서 일부는 돌궐과 싸웠고, 일부는 돌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그리고 Thuringians지역은 그전부터 고구려의 지역으로 판단되는 바, 고구려와 돌궐의 협력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Netherlands

 

In the Netherlands, Saxons occupied the territory south of the Frisians and north of the Franks. In the west it reached as far as the Gooi region, in the south as far as the Lower Rhine. After the conquest of Charlemagne, this area formed the main part of the Bishopric of Utrecht. The Saxon duchy of Hamalan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formation of the duchy of Guelders.

 

The local language, although strongly influenced by standard Dutch, is still officially recognised as Dutch Low Saxon.

 

네델란드에서는 삭슨족은 Frisians의 남쪽과 Franks의 북쪽지역을 영토로 점령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Gooi 지역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라인강의 하류에 이르렀다. Charlemagne 정복이후에는 이 지역은 Utrecht Bishop의 주요 지역으로 되었다. Hamaland의 삭슨공작 영지는 Guelders공작영지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역 언어는, 비록 표준 네델란드어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지만,  Dutch Low Saxon으로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Italy and Provence

 

In 569, some Saxons accompanied the Lombards into Italy under the leadership of Alboin and settled there.[20] In 572, they raided southeastern Gaul as far as Stablo, now Estoublon. Divided, they were easily defeated by the Gallo-Roman general Mummolus. When the Saxons regrouped, a peace treaty was negotiated whereby the Italian Saxons were allowed to settle with their families in Austrasia.[21] Gathering their families and belongings in Italy, they returned to Provence in two groups in 573. One group proceeded by way of Nice and another via Embrun, joining up at Avignon. They plundered the territory and were as a consequence stopped from crossing the Rhône by Mummolus. They were forced to pay compensation for what they had robbed before they could enter Austrasia. These people are known only by documents, and their settlement cannot be compared to the archeological artifacts and remains that attest to Saxon settlements in northern and western Gaul.

 

569년 일부 삭슨족은 Alboin의 리드하에 이태리의 롬바르드지역에 합류해 거기에 정착했다. 572년 그들은 지금의 Estoublon인 Stablo까지 이르는 남동쪽 Gaul지역을 약탈했다. 분열된 그들은 Gallo-Roman 장군 Mummolus에 의해 쉽게 격파되었다.  삭슨족이 다시 재정비하였을 때, 평화조약이 협상되었고, 이태리 삭슨족은 Austrasia지역(프랑스 동북부지역)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태리에 있는 그들의 가족과 소유믈들과 함께, 그들은 573년 두그룹으로 나뉘어 Provence (프랑스 남동부지역)로 돌아갔다.  한 그룹은 Nice를, 다른 그룹은 Embrun을 경유하여 Avignon에 합류했다. 그들은 이 지역을 유린했는데, 이는 Mummolus가 론강을 건너는 것을 중지시킨 결과이다. 

 

(필자는 삭슨족이 Provence(프로방스)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해석한다. 돌궐족의 낙양지역 (Narbonne) 점령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Austrasia로 들어 가기 전에, 그들이 약탈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할 것을 강요 받았다. (프랑크왕국을 미화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서류상으로만 알려졌으며, 그들의 정착은 유물로 확인되지 못했으며, 이것이 삭슨족이 Gaul지역의 북쪽과 서쪽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에 시시비비의 여지를 준다. 

 

(필자 추가 : 이러한 언급은 실제, 기록상으로 프랑스의 서쪽과 북쪽에 삭슨족이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말이다. 삭슨족을 돌궐로 본다면, 이는 중국사에 있어서 돌궐이 북쪽과, 서쪽에 정착했다는 해석이 되어, 중국의 역사에서 돌궐의 역사 추정과 같은 궤를 나타낸다.)

 

(source : Saxon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Anglo-Saxons)

 

 

3. Saxons in Gaul

 

Division of Gaul (511) (source : Wikipedia)

 

"A Saxon king named Eadwacer conquered Angers in 463 only to be dislodged by Childeric I and the Salian Franks, allies of the Roman Empire.[22] It is possible that Saxon settlement of Great Britain began only in response to expanding Frankish control of the Channel coast.[23]   

 

삭슨족의 왕 Eadwacer는 463년 프랑스의 Angers를 정복했다. 이는 여기에 머물던 Childeric I왕과 로마제국의 동맹인 Salian Franks가 이동하게 만들었다. (463년 돌궐의 이지역에 대한 활동일 수 있다.) 삭슨족이 영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프랑크족이 해협 해안을 지배하면서 확장해 나가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것일 수 있다. 

 

Some Saxons already lived along the Saxon shore of Gaul as Roman foederati.[citation needed] They can be traced in documents, but also in archeology and in toponymy. The Notitia Dignitatum mentions the Tribunus cohortis primae novae Armoricanae, Grannona in litore Saxonico. The location of Grannona is uncertain and was identified by the historians and toponymists at different places: mainly with the town known today as Granville (in Normandy) or nearby. The Notitia Dignitatum does not explain where these "Roman" soldiers came from. Some toponymists have proposed Graignes (Grania 1109–1113) as the location for Grannona/Grannonum. Although some scholars believe it could be the same element *gran, that is recognised in Guernsey (Greneroi 11th century),[24] it most likely derives from the Gaulish god Grannos.[25] This location is closer to Bayeux, where Gregory of Tours evokes otherwise the Saxones Bajocassini (Bessin Saxons), which were ineffective against the Breton Waroch II in 579.[26][27]  

 

일부 삭슨족은 로마제국의 동맹자로서 Gaul지방의 삭슨 해안에 이미 살고 있었다. 그들은 기록상으로도 남아 있고 고고학적으로나 지명연구에서도  증명될 수 있다. Notitia Dignitatum은 호민관 군대 (Tribunus cohortis)가 삭슨족 해변의 Grannona와 Armoricanae(Breton)지역에 있었다는 언급을 한다.  Grannona의 위치는 불확실하며, 역사학자들이나 지명학자들이 각각 다른 지역을 확인한다. : 주로 현재의 Granville(in Normandy) 주위의 타운으로 말이다. Notitia Dignitatum은 로마군인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지명연구가는 Grannona/Grannonum의 위치로 Graignes (Grania 1109-1113)(노르만디 해안지역)를 제시한다. 또는 Guernsey (노르만디 해안에 접한 영국해협속의 섬)라 생각하는 학자도 있지만, 골족의 신 Grannos에 어원이 있을 것 같다.  이 위치는 Bayeux(노르만디의 Calvados에 있는 시)에 보다 가까운데, Bayeux는 Gregory of Tours가 연상되거나 Saxones Bajocassini(Bessin Saxons)이 떠오르는데, 이곳은 579년  Breton의 Waroch II에 대항하기에는 비효율적인 곳이다. 

 

A Saxon unit of laeti settled at Bayeux – the Saxones Baiocassenses.[28] These Saxons became subjects of Clovis I late in the 5th century. The Saxons of Bayeux comprised a standing army and were often called upon to serve alongside the local levy of their region in Merovingian military campaigns. In 589, the Saxons wore their hair in the Breton fashion at the orders of Fredegund and fought with them as allies against Guntram.[29] Beginning in 626, the Saxons of the Bessin were used by Dagobert I for his campaigns against the Basques. One of their own, Aeghyna, was created a dux over the region of Vasconia.[30]  

 

삭슨족으로 이루어진 laeti(로마제국의 용병집단)가 Bayeux - Saxones Baiocassenses 에 거주했다. 이 삭슨인들은 5세기 후반 Clovis I에 귀속되었다. Bayeux Saxons은 대기하는 군대인데, 메로빙가가 하는  전쟁에서 그들 지역군의 동원에 자주 이용되었다. (돌궐의 지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589년 삭슨족은 Fredefund(=프랑크 Soissons왕국 왕 Chilperic I왕의 배우자)의 명령에 의해 Breton 패션의 모자를 쓰고 Guntram(=Orleans 왕국의 왕, 561-592)에 대항하여 동맹으로서 싸웠다. (수나라 (581-630)시기의 돌궐의 지원 역할일 수 있다.)

 

626년부터, Bessin의 삭슨족은 Dagobert I의 Basques지역 원정에 동원되었다.

(당시 바스크지역은 서고트왕국의 지역이었다. 서고트왕국은 고구려로 추정된다. 또한 바스크지역은 토번지역으로 추정되는 Aquitaine지역과 가깝다. 즉 돌궐과 토번의 대결, 또는 토번과 당나라의 전쟁에 돌궐이 지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삭슨족출신인 Aeghna가 Vasconia(=Gascony)지역을 관장하는 공작으로 임영됐다.

(즉 삭슨족이 프랑스의 남서쪽에 진출했다는 의미이다. 이 지역 가까이에 장안으로 추정되는 Toulouse가 있다. 즉 돌궐이 장안 가까이 진출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source : Saxon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Anglo-Saxons)

 

4. Saxons in Moldavia (Roumania, Balkhan)

 

"Romance languages

 

The label "Saxons" (in Romanian: Sași) also became attached to German settlers who were settled during the 12th century to southeastern Transylvania. From Transylvania, some of these Saxons migrated to neighbouring Moldavia, as the name of the town Sas-cut shows. Sascut lies in the part of Moldavia that is today part of Romania

 

삭슨이름(루마니아어 Sasi)은 12세기에 Transylvania 동남쪽으로 이주한 게르만족의 정착과도 연결된다. 트란실바니아로부터 일부 삭슨족은 이웃의 몰도비아로 이주했다. 타운 이름 Sas-cut이 이를 보여 준다. Sascut은 오늘날 루마니아인 몰도비아의 일부지역에 있다. 

(source : Saxon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Anglo-Saxons)

 

이러한 정보는 삭슨족이 바다를 통해 발칸반도에까지 진출한 것을 말해 준다. 돌궐족이 그들이라면 역시 해상활동으로 12세기에 발칸반도에 진출한 것이 된다. 이시기에는 바이킹의 뒤를 이어 고려시대의 해상활동에 해당한다. 고려의 해상활동은 해상세력인 왕건의 집단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필자는 최근에 유럽의 동쪽 러시아 지역에서 해상활동이 왕성한 Varangians (Vikings의 일종)의 무역활동 지역이 발해, 고려의 지역으로 추정되는 글을 썼다. 

 

5. Root Saxon in Finns and Estonians

 

Non-Indo-European languages

 

The Finns and Estonians have changed their usage of the root Saxon over the centuries to apply now to the whole country of Germany (Saksa and Saksamaa respectively) and the Germans (saksalaiset and sakslased, respectively).

 

The Finnish word sakset (scissors) reflects the name of the old Saxon single-edged sword — seax — from which the name "Saxon" supposedly derives.[12] In Estonian, saks means "a nobleman" or, colloquially, "a wealthy or powerful person". (As a result of 13th-century Northern Crusades, Estonia's upper class comprised mostly persons of German origin until well into the 20th century.)

 

핀란드인과 에스토니아인들은 그들의 삭슨족 뿌리의 용도를 독일 전부에 해당하는 게르만인으로 바꾸었다. 핀란드의 언어 Sakset(Scissors(가위))는 예전의 삭슨의 한 단면 칼 - seax-이름을 반영하는데, 이 단어로부터 "Saxon"이란 이름이 도출됐다.

 

에스토니아 언어로는 Saks가 귀족 또는 부자나 권력자를 의미한다. (13세기 Northern Crusades결과로, 에스토니아의 상류층은 20세기까지 대부분 게르만 origin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source : Saxon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Anglo-Saxons)

 

이러한 정보는 삭슨족이 왕성한 해상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트해를 지나 핀란드, 에스토니아까지 진출했다는 의미이다. 만약 돌궐족이 이들이라면, 돌궐족은 넓은 바다를 누비는 해상활동을 한것이며, 바이킹과 닮은 모습을 보여 준다. 

 

 

VI.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 (551)

 

우리 역사에서 돌궐에 대한 언급은 당나라 시기에 고구려의 사신이 돌궐에 갔는데, 당태종과 마주쳤다는 기록이 있다.  흉노의 별종인 돌궐은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우호국이었는데, 특이하게 돌궐과의 전쟁이 양원왕 시기 551년에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아래 자료 참조)

 

《삼국사기》 고구려 양원왕 본기 (545-559)


一年春三月 양원왕이 즉위하다 (545)
一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545)
二年春二月 배나무가 특이한 현상을 보이다 (546)
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546)
二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546)
三年秋七月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다 (547)
三年 동위에 조공하다 (547)
四年春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도움으로 실패하다 (548)
四年秋九月 환도에서 좋은 벼이삭을 바치다 (548)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548)
五年 동위에 조공하다 (549)
六年春一月 백제가 도살성을 빼앗다 (550)
六年春三月 신라에게 2성을 빼앗기다 (550)
六年夏六月 북제에 조공하다 (550)
六年秋九月 북제가 왕을 책봉하다 (550)
七年夏五月 북제에 조공하다 (551)
七年秋九月 돌궐의 침입을 물리치다 (551)
七年 신라가 10성을 빼앗다 (551)
八年 장안성을 축조하다 (552)

553년 : 공백
十年 백제 웅천성 공격에 실패하다 (554)
十年冬十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554))
十一年冬十月 호랑이가 평양에 들어오다 잡혔다 (555)
十一年冬十一月 금성이 낮에 나타나다 (555)
十一年 북제에 조공하다 (555)

556년 : 공백

十三年夏四月 양성을 태자로 삼다 (557)
十三年冬十月 환도성에서 반역 사건이 일어나다 (557)

558년 : 공백

十五年春三月 양원왕이 죽다. (559)

(자료 : 양원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돌궐이 유연과 우호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10] 앞서 백암성과 신성을 개축한 적이 있는데 이후 돌궐이 이 두 성을 공격했으니 고구려 측에서도 뭔가 낌새를 채고 대비한 모양이다. 이때 고구려의 장군 고흘이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돌궐군 1,000여 명을 참살하며 그들의 침공을 저지시켰지만 이 전투를 눈치챈 남쪽의 나제동맹군이 한강 유역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하류 6군은 백제에게, 상류 10군은 신라에게 그대로 내주고 말았다. 이 때 백제의 성왕은 수도 평양성까지 진격하고 싶어했지만 양원왕이 일단 급한대로 신라의 진흥왕과 일시적인 화친을 맺는데 성공하여 가까스로 무마시킬 수 있었다."

(자료 : 양원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즉  돌궐의 고구려 신성과 백암성의 침입으로 고구려가 이들을 막는 사이, 나제동맹의 신라와 백제에게 남쪽지역을 많이 빼앗겼다는 기록이다. 어찌보면, 신라와 백제가 돌궐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여지가 보인다. 신성과 백암성은 압록강인 론강에 가까운 지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돌궐은 라인강을 타고 내려온 세력일 수도 있고. 독일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했던 삭슨족의 돌궐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아래 지도를 보면 훈족의 아틸라 시대 북해, 발트해 지역까지 점령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강력한 수군으로 해상활동에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시기의 지도이니, 광개토태왕 시기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진출한 것 같은 성곽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Hunnic Empire in 453

 

Europe in 526 (source : Wikipedia)

 

고구려의 문자왕 시기에는 위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고트왕국(이태리반도), 서고트왕국(스페인지역), 그리고 슬라브지역을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중부의 Thuringians지역도 포함하지 않았을까 한다. 삭슨지역은 덴마크지역과 영국지역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돌궐의 지역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Danes 지역은 필자가 북부여 지역으로 돌아간 두막루지역으로 보인다. 삭슨족 지역의 북쪽에 있는 점이 눈에 띤다. 그러나 이후 양원왕 시기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이태리반도 지역을 빼앗기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비잔틴제국은 당시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Justinian I가 이태리 남부 시실리아 지역등을 점령한 바 있다. 

 

 

VII. 돌궐의 위치에 대한 잠정적 결론

 

돌궐의 위치에 대한 연구는 거란의 별종인 실위의 서쪽에 있다는 기록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실위의 동쪽에 흑수말갈이 있다는 실위에 관한 신당서 기록이다.  필자는 최근 흑수말갈이 모스크바지역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흔히 돌궐이라고 주장하는 Gokturk가 고구려가 아닌가 하는 글을 썼다. 즉 기존의 사학계의 돌궐 위치에 대한 강한 의문에서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중국의 역사가 프랑스지역에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사에 등장하는 돌궐은 이 근처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하여, 프랑스 북쪽 주위의 역사를 살피면서, 바이킹이나 삭슨족의 존재가 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바이킹의 주요 활동 거점의 하나인 북해의 Faroa island, Shetland islands를 살펴 보았다. 이들 지역은 오래된 문명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기에 더욱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이들 지역은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에서 출발한 켈트족 문화지역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단군조선지역이나 마한의 일부지역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마한의 거수국인 해두국이  Aedui in Gaul 로 추정했다. 

 

그래서 다음 대상으로 북해 해안의 Saxons족에 대해 살피게 되었다. 삭슨족은 지금의 독일의 북해 해안 가까이 있는 중세의 Old Saxony 지역에 있는 초기 게르만 사람들의 그룹이다. 로마제국 후기에는 이러한 이름은 게르만 해변 약탈자들을 칭하는데, 또는 후기의 바이킹과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다. 

 

 

"근대에 있어 삭슨이란 이름에 대한 처음의 언급은 AD 365년부터인데, 후에 로마 황제가 된 Julian이 Gaul지역에서 그의 경쟁 황제인 Magnentius의 동맹으로서 한 연설에서 삭슨을 언급했다. 또한  Zosimus도,  Kouadoi 이라 불리는, 특별한 부족 삭슨을 언급했는데, 이 Kouadoi (콰도이, 돌궐?)이라 불리는 부족은 Chausi 또는 Chamavi를 오해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들은 라인강지역(Rhineland)으로 들어가, 이제 막 정착한 Salian Franks를 Batavi지역에서 쫓아냈다."

 

필자는 이러한 기록에서 돌궐의 가능성을 삭슨족에서 강하게 느낀다. 특히 Kouadoi라 삭슨족이 불리웠다는 기록에 주목한다. Kouadoi, 콰도이 -> 콰돌 -> 돌궐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한다. 이후 계속된 삭슨족의 활동을 보면 이러한 심증이 더 깊어진다. 

 

"삭슨족은 그들의 약탈에 있어서 배를 이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삭슨족의 약탈에 방어하기 위해, 로마는 Litus Saxonicum ("Saxon Coast")라 불리는 군사지역을 영국해협 양쪽에 창설했다. AD 441-442년에, 삭슨족은 처음으로 Britain의 정착민으로 언급되었다. 이때 한 골족의 무명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British 지방은 삭슨족의 지배로 쪼그라 들었다.' " 

 

이러한 기록에서 실위의 서쪽에 있는 돌궐이 British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은 해양세력이라는 느낌이다. 

 

"현재의 독일 북쪽에 사는 삭슨족은 555년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때는 프랑크왕국 왕 Theudebald가 죽고, 삭슨족이 이 기회를 이용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Theudebald의 계승자 Chlothar I에 의해 진압되었다. 프랑크왕국의 일부 계승자들은 삭슨족에 대항하여 싸웠고, 일부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Thuringians은 자주 삭슨족과 동맹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록은 삭슨족을 돌궐로 본다면, 중국의 역사에서 일부는 돌궐과 싸웠고, 일부는 돌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그리고 Thuringians지역은 그전부터 고구려의 지역으로 판단되는 바, 고구려와 돌궐의 협력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네델란드에서는 삭슨족은 Frisians의 남쪽과 Franks의 북쪽지역을 영토로 점령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Gooi 지역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라인강의 하류에 이르렀다...

지역 언어는, 비록 표준 네델란드어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지만,  Dutch Low Saxon으로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

 

네델란드지역이 삭슨족과 매우 밀접한 지역이라는 기록이다. 이들이 해상세력인 것을 감안하면, 근대에 이르러 네델란드가 영국과 함께 강한 해상국가였음이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 내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태리에 있는 그들의 가족과 소유믈들과 함께, 그들은 573년 두그룹으로 나뉘어 Provence (프랑스 남동부지역)로 돌아갔다.  한 그룹은 Nice를, 다른 그룹은 Embrun을 경유하여 Avignon에 합류했다. 그들은 이 지역을 유린했는데, 이는 Mummolus가 론강을 건너는 것을 중지시킨 결과이다. "

 

필자는 삭슨족이 Provence(프로방스)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해석한다. 돌궐족의 낙양지역 (Narbonne) 점령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낙양을 프랑스 남동쪽의 Narbonne, 그리고 장안을 프랑스 남부의 Toulouse로 추정한다. 

 

"그들은 Austrasia로 들어 가기 전에, 그들이 약탈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할 것을 강요 받았다. 이들은 서류상으로만 알려졌으며, 그들의 정착은 유물로 확인되지 못했으며, 이것이 삭슨족이 Gaul지역의 북쪽과 서쪽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에 시시비비의 여지를 준다. "

 

이러한 언급은 실제, 기록상으로 프랑스의 서쪽과 북쪽에 삭슨족이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말이다. 삭슨족을 돌궐로 본다면, 이는 중국사에 있어서 돌궐이 북쪽과, 서쪽에 정착했다는 해석이 되어, 중국의 역사에서 돌궐의 역사 추정과 같은 궤를 나타낸다.

 

"삭슨족으로 이루어진 laeti(로마제국의 용병집단)가 Bayeux - Saxones Baiocassenses 에 거주했다. 이 삭슨인들은 5세기 후반 Clovis I에 귀속되었다. Bayeux Saxons은 대기하는 군대인데, 메로빙가가 하는  전쟁에서 그들 지역군의 동원에 자주 이용되었다."

 

이 기록은 돌궐이 5세기 후반 중국의 혼란 시기에 일부 국가의 지원을 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589년 삭슨족은 Fredefund(=프랑크 Soissons왕국 왕 Chilperic I왕의 배우자)의 명령에 의해 Breton 패션의 모자를 쓰고 Guntram(=Orleans 왕국의 왕, 561-592)에 대항하여 동맹으로서 싸웠다."

 

이 기록은 수나라 (581-630)시기의 돌궐의 지원 역할일 수 있다.

 

 

"626년부터, Bessin의 삭슨족은 Dagobert I의 Basques지역 원정에 동원되었다."

 

당시 바스크지역은 서고트왕국의 지역이었다. 서고트왕국은 고구려로 추정된다. 또한 바스크지역은 토번지역으로 추정되는 Aquitaine지역과 가깝다. 즉 돌궐과 토번의 대결을 아니면 토번과 중국의 전쟁에 돌궐이 지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삭슨족출신인 Aeghna가 Vasconia(=Gascony)지역을 관장하는 공작으로 임영됐다."

 

즉 삭슨족이 프랑스의 남서쪽에 진출했다는 의미이다. 이 지역 가까이에 장안으로 추정되는 Toulouse가 있다. 즉 돌궐이 장안 가까이 진출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기록상 삭슨족이 돌궐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Saxons족은 약탈을 포함한 매우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였는데,  이는 돌궐족 또한 약탈과 강력한 해상활동을 하였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돌궐에 공물을 바치는 경우가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고려하면, 고구려의 돌궐과의 전쟁 (551), 즉 신성, 백암성에서의 전쟁은 돌궐이 라인강을 따라 내려온 전쟁일 수 있고, 또는 북해 해안에 거주했던 돌궐이 남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한 기록일 수 있다고 본다.  라인강유역이 후세 바이킹이 주로 활동하던 영역임을 고려할 때, 해상세력과의 전쟁일 수 있다. 또한 장수왕 시기에 해당하는 아틸라 제국의 영토 지도를 고려할 때, 그리고 그 전에 광개토태왕의 활동영역이 스페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을 포함한 것을 고려할 때, 고구려 또한 발틱해, 북해에서 강력한 해상활동을 했는데, 같은 해상세력인 돌궐과 충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은 또한 바이킹의  활동 영역인 바,  발트해, 대서양, 지중해, 흑해에서 활동한 바이킹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안게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러한 해상 영역은  켈트족인 고조선 영역, 고구려 영역, 이어서 발해 영역, 고려 영역이 되는 한민족의 활동영역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필자가 연구한 볼가불가리아, 키예프 루스의 활동영역을 고려하면 그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다 구체적인 중국사에서의 돌궐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프랑크왕국 역사와 대비하며 보다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돌궐의 위치에 대한 보다 확실한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