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r 879-912) - 나무위키

2022. 8. 20. 03:57역사 자료/키예프 루스

키예프 루스 제 2대 대공
올레그 | Oleg of Novgorod
 
이름
올레그
Oleg of Novgorod
현대 러시아어 이름
Олег
고대 노르드어 이름
ᚺᛖᛚᚷᛁ[1]
별명
예언자[2]
전임자
류리크 대공
후임자
생몰년도
?[3] ~ 912년
재위
키예프 루스 대공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키예프 루스 제 2대 대공. 노브고로드 공국의 계보에도 포함되어 있다. 류리크 가문의 가문원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초대 군주 류리크보다도 더욱 신원이 불분명하다. 그의 통치 기간에 최초로 아직 노브고로드 일대가 중심지이던 루스 중앙 정부가 키예프를 장악하고 천도함으로써 키예프 루스가 성립되었다.

2. 생애

올레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군이지 그 어떤 기록도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현지 슬라브인이 아닌 스칸디나비아 출신 바랑인[5]이며 아마 나이로 봤을 때 류리크의 정착에 함께 했던 장수일 것이다. 러시아 원초 연대기[6]에는 류리크의 친척으로, 요아킴 연대기[7]에는 그가 류리크의 처남이라고 전해진다.[8] 보통은 류리크의 친척으로 비정한다. 879년, 류리크가 사망했을 때 그의 적자 이고리, 훗날의 이고리 1세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류리크는 올레그에게 아들이 자랄 때까지 나라를 맡겼다. 사실 키예프의 올가와 같은 케이스로써 그의 위치는 섭정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녀와 달리 올레그는 직접 군주로 즉위했으므로 키예프 루스 대공으로 인정된다.

그가 즉위한 후 최초로 보이는 행적이 바로 키예프 장악이다. 882년, 올레그는 군사를 이끌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 남하하며 스몰렌스크와 류베치를 장악했다. 그 곳에서 그는 일찍이 류리크가 파견했던 부하들의 소식을 들었다. 류리크는 860년 제7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일으켰는데, 이 때 참전했던 부하들 중 일부를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대에 파견했다. 이들을 이끄는 장수는 이방인 뒤레로,[9] 자신의 무력과 동로마에서 세운 전공으로 현지 슬라브인들을 감동시켜 키예프 일대의 군주가 되었다. 이후 지리적으로 멀다 보니 키예프는 노브고로드의 류리크 조정과 교류를 줄이고 반독립적으로 통치되었는데, 올레그는 키예프의 통제권을 잡고자 했다. 올레그는 뒤레에게 사절을 보내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했고, 뒤레는 이를 허락했다. 배를 타고 와서 키예프 앞 강변에서, 올레그는 뒤레에게 사절을 보냈다. 금은보화를 선물로 들고 왔으며, 국가의 일로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몸이 아파서 자신이 갈 수가 없으니 뒤레가 배로 좀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뒤레는 별 의심 없이 올레그의 배로 갔다. 뒤레가 배에 타자 올레그는 돌변해, 그 자리에서 뒤레를 살해했다. 그리고 바로 키예프에 입성했다. 그는 류리크의 어린 아들 이고리를 데리고 왔는데, 키예프 사람들 앞에서 이고리를 보여주면서

내가 바로 여러분의 군주 올레그이며, 이 아이가 류리크 님의 아들인 이고리요.

라며 자신과 이고리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이 선언은 키예프 사람들을 납득시켰고, 올레그는 희생 없이 키예프를 장악했다. 올레그는 이 도시가 루스인들의 도시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자신의 궁정을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겼다. 키예프 루스의 시작이었다. 스몰렌스크 등의 정착촌과 연결되어, 드네프르 강안 일대 전부가 루스인들의 영토가 되었다. 키예프로 천도함으로써 슬라브인들에 대한 통제력이 훨씬 높아졌고, 사방으로 상업과 약탈을 나가기도 쉬워졌다.

올레그는 키예프에서 멈추지 않고 주변 슬라브계 부족들의 복속을 시작했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 일대의 슬라브인들이 주로 하자르 칸국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올레그는 이들에게 자신과 연대해 하자르에 대항하자고 부추겼다. 이 결과 드레블랴인, 세베르냐인, 라디미치인과 하자르계 유목민 일부가 키예프 루스에 종속되었다. 이렇게 주변에 영향력을 확대한 후에는, 류리크의 뒤를 이어 907년 제8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레온 6세 시대였다. 루스인들의 남하 소식을 들은 동로마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쇠사슬을 쳤는데, 이 것을 본 올레그는 배에서 내린 후 바퀴를 꺼내 배를 싣고 육지로 배를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함대 손실 없이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올레그는 성을 포위하고 직접 앞서 싸웠다고 하는데, 다른 전쟁으로 여력이 없던 동로마는 배에 달린  하나 당 12 흐리브냐[10]의 금을 주고 루스인들이 동로마에서 용병업을 하는 내용도 포함된 평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공격은 루스 쪽 연대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동로마 쪽 기록에 없어 전임 류리크의 공격과 후임 이고리의 공격을 짜집기해서 창조한 전설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올레그의 별명은 예언자인데, 이는 그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에서 비롯된다. 어느 날, 한 사제가 그의 죽음에 관한 예언을 올렸다. 올레그는 그의 애마 때문에 죽게 될거라는 것이었다. 찝찝해진 올레그는 말을 치우게 시켰다. 몇 년이 지난 후, 올레그는 그 말 생각이 나서 말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았다. 부하는 그의 말이 얼마 전 늙어 죽었다고 전했다. 자신의 죽음을 불러온다고는 하지만 애마였던 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분이 묘해진 올레그는 말의 시체를 보러 갔다. 말의 뼈를 보면서 그는 역시 예언 같은 게 맞을 리 없다고 코웃음쳤다. 그 때, 말의 두개골 안에서 독사 한 마리가 기어나와 올레그를 물었고, 올레그는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배우자나 자녀에 대해선 전설로도 전해지지 않으며[11], 그의 후임으로 류리크의 아들이자 정당한 왕위 계승자 이고리가 별 문제 없이 권좌에 앉았다.

3. 여담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사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 등장한다. 류리크 왕조 초기 인물들이 이래저래 개판이 되어 있는데,[12] 올레그도 뜬금없이 류리크가 일찌감치 낳은 아들로 설정되어 있다. 류리크 가문의 문화가 노르드 문화이므로 그도 올레그가 아닌 스칸디나비아식 이름 헬기로 나온다. 능력치 보정 같은 건 없으며[13] 장남이므로 류리크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플레이할 수 있다.

[1] 발음은 헬기

[2] 러시아어로는 Вещий, 발음은 베쉬

[3] 추정 845년이다.

[4] 실질적으로 키예프를 장악한 것은 882년.

[5] 바랑기안 가드 할 때 그 바랑인 맞다. 이 당시 루스 지역에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을 일컫던 말.

[6] 러시아 고대-중세 역사를 다룬 거의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완벽한 기록. 연대기 작가이자 키예프의 수도사였던 네스토르(1056~1114)가 1113년경에 완성한 연대기이다. 키예프 루스 영토 전역에서 막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쓴 연대기로 많은 역사적 사실은 물론 슬라브 전설, 게르만 전설도 많이 담겨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다만 역사와 전설을 섞어 써서 중요한 데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시대적 한계도 있다.

[7] 노브고로드 초대 주교 요아킴이 썼다고 전해지는 연대기. 18세기 러시아 역사가 바실리 타티쉬체프가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신뢰성에는 의문이 따르는 자료이다.

[8] 보통 류리크의 아내로 전설적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딸을 많이 떠올린다. 요아킴 연대기는 류리크가 자신을 루스 땅으로 처음 초대한 현지 부족장 고스토미슬의 딸 이판다라는 여사제와 결혼했다고 전한다. 이 말대로라면 올레그는 현지 슬라브인이라는 말인데, 이름이나 지위로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낮다.

[9] 뒤레 역시 오만가지 설이 다 있는 사람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선 아스콜트와 뒤레라는 두 명의 장수가 있었다고 하며, 한 사람인데 이름이 아스콜트이고 별명이 뒤레라는 설도 있다.

[10] 연대기가 집필될 즈음의 키예프 루스의 화폐 단위. 현재 우크라이나도 흐리브냐 화를 쓴다.

[11] 일부 중세 기록이 키예프의 올가가 그의 딸이라는 설을 주장하나, 근거는 없다.

[12] 키예프의 올가는 뜬금없이 슬라브인으로 나온다.

[13] 정작 그가 죽인 이방인 뒤레는 고능력치로 고정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