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1. 11:15ㆍ한국사/고구려
우선 후연과의 전쟁기록을 광개토태왕의 기록에서 살펴 보고, 이를 그 시대의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의 공격경로를 살펴 보자.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상술한 바와 같이, 400년에 모용성은 고구려가 신라로 지원군을 파견하는 도중 조공까지 받았음에도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로 쳐들어왔다. 후연군은 모용희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고 700리에 달하는 땅을 집어 삼켰으니, 사실상 요동의 방어선에 구멍이 난 셈. 신라로 대다수의 병력이 집중된 상황이라 북방으로 방어군을 파견할 수 없었던 고구려는 무력하게 땅을 내줄 수 밖에 없었으나, 다행히 직후 양평령 단등의 반란으로 후연의 요동 진출이 주춤하면서 한숨 돌린 고구려군은 남쪽 신라로 내려와 왜군을 몰아냈고, 이내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 반격의 고삐를 당기기 시작한다.
401년,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 모용성이 사망하고 모용희가 즉위하는 등 후연에 내홍이 계속되는 틈을 타서 광개토대왕은 다시 신성과 남소성을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2년 5월에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보내 북연 평주의 숙군성을 기습 공격했다. 이에 숙군성에 주둔하고 있던 평주 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평주가 고구려에 함락된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인 404년, 대방계를 공격해온 왜군이 광개토대왕에게 격퇴당한 후인 11월에 모용희는 왕후 부씨와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사냥을 벌이는데, 이 와중에 호랑이와 이리에게 죽거나 얼어서 죽은 자가 5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12월 광개토대왕은 다시 한번 후연을 공격해 연군에서 100여인을 살육·약탈했다.
연군은 본래 베이징의 계현이 치소지만, 연군은 399년에 태수 고호가 북위에 갖다 바친고로 이 시점에는 대릉하 유역에 이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 역사 문화 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저서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서 앞선 모용희의 사냥을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출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짐승이나 동사로 5천여 명이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무엇보다 한참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군이 코앞까지 처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사냥이나 다니고 있다는게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
후연도 더 이상의 굴욕을 참을 순 없었는지 405년에 이르러 모용희가 군대를 몰아 요동성으로 직접 쳐들어 온다. 모용희는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모용희가 동행한 황후 부씨와 함께 성을 깎아버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를 틈타 고구려군이 방어 태세를 정비하여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한다.
그해 12월, 후연의 황제 모용희는 다시 거란을 정벌하러 용성을 출발해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다가 생각보다 강했던 거란의 위세에 놀라 퇴각하고 만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행한 황후 부씨가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치중까지 내버리고 3천 리를 달려서 꿩 대신 닭이라고 고구려의 목저성을 기습했지만 참패하고 만다.
광개토대왕 15년 봄에 고구려에 가뭄이 들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기간에는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 안 좋은 관계로 후연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듬해 고구려의 사정은 궁궐을 증축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여겨진다.
영락 17년에는 광개토대왕은 보기 5만으로 모종의 적과 사방합전(四方合戰)하여 모조리 참살했다. 노획한 개갑이 만여 령이고 군수 물자가 부지기수에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누성, 우불성 등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이 부분에서 적이 누군지 알려주는 내용이 판독 불가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적을 후연으로 보는 설과 백제나 왜로 보는 설이 갈리고 있다. 만약 후연이라면 같은 해에 발생한 후연의 멸망과 큰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결국 같은 해인 광개토대왕 16년 7월에 후연의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막장 황제 모용희의 목숨을 빼앗고 모용운을 추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용운은 본래 고구려의 지파로서 과거 환도성 함락 당시 연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며 모용보의 양자였는데, 이 때문인지 왕위에 오른 뒤 고씨로 성을 갈았다. 후연이 북연으로 바뀐 것.[37] 하필이면 고구려 사람인 모용운을 골라 세운 것으로 미루어 풍발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일단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17년 3월, 광개토대왕은 북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종족을 베풀었다.(叙宗族)' 모용운이 고씨로 성을 회복한 것을 본가(?)인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연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남연과의 교섭
408년 광고를 도읍으로 삼아 ... 남연에 사신을 보내어 천리인(千里人) 10명과 천리마 1필, 큰 곰 가죽, 장니[38]를 선물로 건넸다. 이에 남연 왕 모용초는 기뻐하며 물소[39]와 (말하는) 앵무새를 답례품으로 보냈다.[40]
전후맥락을 알 수 없는 기록으로 그냥 단순한 국가 간 교섭인지 다른 배경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
-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삼국사기 기록 (395-407)
AD 395-397 : 3년 공백
九年春二月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AD 398)
十年 후연 숙군성을 공격하다 (AD 399)
AD 400 공백
十二年冬十一月 후연을 침략하다 (AD 401)
AD 402-403 : 2년 공백
十五年春一月 후연이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AD 404)
十六年冬十二月 후연이 목저성을 공격해왔으나 패배하다 (AD 405)
十八年春三月 북연에 사신을 보내다 (AD 407)
(자료 : 광개토태왕/생애, 나무위키)
Sometime in 406 and into 407, another assemblage of barbarians, consisting primarily of Vandals, Sueves and Alans, crossed the Rhine into Gaul while at the same time a rebellion—under a common soldier named Constantine—occurred in Britain and spread to Gaul.[55]
(source : Alaric I, Wikipedia)
"There was good reason for this as the western empire was effectively overstretched due to the massive invasion of Alans, Suebi and Vandals who, although they had been repulsed from Italy in 406, moved into Gaul on 31 December 406,[15] and arrived in Hispania in 409."
(source : Honorius, Wikipedia)
상기 연나라와 고구려 전쟁 시기에, 광개토태왕으로 보이는 고트족의 Alaric I은 반달족, 수에비족 그리고 말갈로 보이는 Alans족들과 함께 라인강을 건너 Gaul 지역으로 진군했다. 따라서 연나라는 라인강을 건너 Gaul 족 지역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405년 후연의 모용희는 요동성 공격에 실패했다고 나온다. 고트족의 Alaric I의 공격진로를 볼 때, 요동성은 라인강 근처에 있게 되는 셈이다.
이는 그동안 필자가 추정해온 우랄강이 요수라는 것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사실 우랄강이나 볼가강, 드네프로강, 돈강 주위가 요수라고 추정하면서도 백산에 대한 의문은 풀지 못했다. 백두산이 우랄산맥 우랄강 어디에 있다면 그 위치가 애매한 것이다. 그리고 그다지 역사적인 위치가 되지 못했다. 반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백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요수의 동남쪽에 말갈의 백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매우 혼란에 빠졌다. 결국 요수를 다시 추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설의 한민족사 2'를 쓰면서 요수가 Rhone River라는 것을 다시 추정하게 되었다. 필자의 블로그에 쓴 '론강이 요수라는 주장의 근거'라는 글에서 보는 것처럼, 프랑스에 있는 Rhone River가 요수가 되면, 위의 연나라의 요동성 공격은 용이하게 이해된다.
즉 광개토태왕이 공격한 후연은 현재 프랑스 Rhone River 서쪽에 있는 Gaul 지역에 있던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연나라에서 탈출한 위만이 요수인 Rhone Rver를 건너 요동의 험독현에 왕험성을 세웠다는 것을 설명 가능하게 한다. 즉 위만은 Rhone River를 건너, Rhone Valley에 험한 계곡에 왕험성을 세운 것이고 이지역이 단군조선이 있던 지역이라는 것도 유추된다.
따라서 요수의 좌측에 Gaul지역에 거란(글안)의 요나라가 있고, 요나라전의 발해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즉 거란(글안)의 위치도, 발해의 위치도, 따라서 선비족의 위치도 이 근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비족의 나라인 수나라도 이 지역에 있었을 것이며,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도 이 지역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요의 요임금도 이 근처에서 있었을 것이며, 다른 한자의 평양(平陽)도 이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평주 등의 평(平)지역이 이 요수지역이라는 것이 된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안(安)지역과 평(平)지역을 정복해서 평안(平安)호태왕의 시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한 경로도 이 Rhone River 좌측에서 공격해 나가 부다페스트의 평양(平壤)까지 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위나라 북위 등이 이 Rhone River 좌측이나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주몽도 이 요수 주위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북부여나 동부여도 여기서 멀지 않다는 것이 된다.
이조의 선조는 이 Rhone River에 있는 의주를 넘어 좌측 명나라로 가려 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지중해에서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만주를 점한 청나라도 이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정말 혁명적인 결과이다. 그래서 이 근처에 있었을 지도 모르는 광개토태왕비가 청나라의 감시속에 숨겨 있다가 현재의 한반도 북쪽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한민족이 비통하게 느껴진다.
이는 철저한 감추기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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