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6. 08:43ㆍ한국사/고구려
지난 글에서 우리는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훈족의 을딘, 고트족의 Alaric I이 유사하다는 것을 개인적인 자료, 왕조사를 비교하며 알아 보았다. 이 글에서는 지난 글에 이어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정복 전쟁이 과연 훈족의 그것과 고트족의 그것과 유사성을 갖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필자는 이미 다음/네이버 블로그 글을 통해 '로마제국은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라는 주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본 분석을 이어 간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에 대해 이해를 원한다면 필자의 다음(blog.daum.net/lainfos)/네이버(blog.naver.com/lainfos) 블로그 글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은 4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392-394 : 백제, 거란, 비려와의 전쟁
2) 395-398 : 신라지원 백제, 가야, 왜와의 전쟁
3) 399- 405 : 백제, 후연과의 전쟁
4) 406-412 : 백제, 왜, 부여와의 전쟁
그러나 여기서는 백제와의 전쟁 및 신라지원 백제, 가야, 왜와의 전쟁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따라서 거란, 비리와의 전쟁, 후연, 부여와의 전쟁은 각각 별도의 글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이들의 위치와 관련하여 더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삼국사기는 년대별 기록으로 이어 나가지만, 또 다른 중요한 기록인 광개토태왕릉비는 사건 위주로 기록한 것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양 기록의 연대의 직접 비교가 애매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참조 하시고 본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란다.
I. 광개토태왕 초기 (392-394) 백제와의 전쟁
광개토태왕은 초기 백제와의 전쟁으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이는 이미 동천왕 (AD 227-248), 중천왕(248-270) 시기부터 시작한 고구려의 서진 정책의 연속이기도 하며 (본 블로그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참조), 부왕인 고국양왕이 전사한 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판단된다.
먼저 광개토태왕 초기 백제와의 전쟁은 대략 392-394기간동안 백제의 남부지역 공격으로 석현성 등 10 여성을 경략한 전쟁과 백제 북부 관미성 정복, 그리고 수곡성 방어, 마지막으로 패수에서의 전쟁 승리이다. 이러한 전쟁기록은 신라지원 전쟁 전의 기록으로 백제와의 전쟁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 시기에 거란, 비려와의 전쟁도 있는 것으로 기록되지만, 이 글에서는 백제, 왜, 가야, 신라지역에서의 전쟁만을 다루기로 함에 따라 거란, 비려와의 전쟁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글로 미루고자 한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개토태왕의 삼국사기 기록 (392-394)>
二年秋七月 10개의 백제성을 빼앗다 (AD 392)
二年秋九月 거란을 정벌하다 (AD 392)
二年冬十月 백제 관미성을 빼앗다 (AD 392)
三年秋八月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평양에 사찰을 창건하다 (AD 393)
四年秋七月 정예 기병으로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다 (AD 394)
四年秋八月 나라 남쪽에 7성을 쌓다 (AD 394)
四年秋八月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이기다 (AD 394)
(자료 : 삼국사기, 광개토대왕/생애, 나무위키)
1. 백제의 석현성 등 10여개 성 경략 (391 or 392)
역사자료는 광개토태왕의 백제 석현성 등 10여개 성 경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무너뜨렸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전쟁포로 5백 구를 사로잡고, 또 본국의 잡혀간 백성 1만을 불러서 타일러 돌아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원년.[4]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귀족들의 사병 제도를 철폐하여 군대를 통일시키는 등 정복전쟁을 위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행한 후 출병했다. 즉위한 지 고작 두 달만인 원년 7월에 친히 군대 4만 병력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진군해 백제를 정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 성과 한강 이북의 부락 다수가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졌다.
(자료: 광개토대왕/생애, 나무위키)
그럼 이러한 기록은 훈족과 고트족의 역사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먼저 훈족의 기록을 살펴 보자. 아래와 같이 짧게 표현되지만, 발칸반도지역을 유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위키피디아는 다른 설명을 붙여가며, 로마제국의 패배를 옹호하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패배 변명의 구실로 판단된다.
"In 392, however, the Huns were again involved in raids in the Balkans, together with various other tribes.[45] "
(source : History of Huns, Wikipedia)
그럼 고트족의 자료는 어떠한가? 아래 Alaric I에 대한 자료를 보면, 다른 부족들과 연합하여 391년 Thrace(발칸반도 트라키아지역, 현재 불가리아지역)를 침범했다고 분명히 기록된다. 위에서 살펴 본 훈족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Alaric I 의 전략적 능력과 군사력이 출중하여 로마황제 Theodosius가 Maritsa river를 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광개토태왕이 전략이 능하여 백제의 진사왕은 두려워 대적하지 않으려 했다는 나무위키 자료와 매우 유사한 표현이다. Maritsa river는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불가리아 남쪽에 있는 강이다.
Map of Maritsa River (source : Maritsa river, Wikipedia)
"Alaric began his military career under the Gothic soldier Gainas, and later joined the Roman army.[d] He first appeared as leader of a mixed band of Goths and allied peoples, who invaded Thrace in 391 but were stopped by the half-Vandal Roman General Stilicho. While the Roman poet Claudian diminished Alaric as "a little-known menace" terrorizing southern Thrace during this time, the latter's strategic abilities and forces were formidable enough to prevent the Roman Emperor Theodosius from crossing the Maritsa River.[16] By 392, Alaric had entered Roman military service, which coincided a reduction of hostilities between Goths and Romans.[17] In 394, he led a Gothic force that helped Emperor Theodosius defeat the Frankish usurper Arbogast—fighting at the behest of Eugenius—at the Battle of Frigidus.[18] Despite sacrificing around 10,000 of his men, who had been victims of Theodosius' callous tactical decision to overwhelm the enemies front lines using Gothic foederati,[19] Alaric received little recognition from the emperor. Alaric was among the few who survived the protracted and bloody affair.[20] Many Romans considered it their "gain" and a victory that so many Goths had died during the Battle of Frigidus River.[21] Recent biographer, Douglas Boin, posits that seeing ten thousand of his (Alaric's) dead kinsman likely elicited questions about what kind of ruler Theodosius actually had been and whether remaining in direct Roman service was best for men like him.[22] Refused the reward he expected, which included a promotion to magisterium and command of regular Roman units, Alaric mutinied and began to march against Constantinople.[23]"
(source : Alaric I, Wikipedia)
이 당시 트라키아지역은 아래 지도에서 보는 지역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도 트라키아지역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지만, 비잔틴제국시절 남부지역으로 줄어 들기 전에는 아래 지도 Diocese of Thrace 지역이라고 하였다. 즉 광개토태왕이 정복한 백제의 석현성 등의 10여 성 지역은 이 지역이라는 것이다.
Diocese of Thrace at 400 AD (source : Wikipedia)
"As the Greeks gained knowledge of world geography, "Thrace" came to designate the area bordered by the Danube on the north, by the Euxine Sea (Black Sea) on the east, by northern Macedonia in the south and by Illyria to the west.[8] This largely coincided with the Thracian Odrysian kingdom, whose borders varied over time. After the Macedonian conquest, this region's former border with Macedonia was shifted from the Struma River to the Mesta River.[9][10] This usage lasted until the Roman conquest. Henceforth, (classical) Thrace referred only to the tract of land largely covering the same extent of space as the modern geographical region.[clarification needed] In its early period, the Roman province of Thrace was of this extent, but after the administrative reforms of the late 3rd century, Thracia's much reduced territory became the six small provinces which constituted the Diocese of Thrace. The medieval Byzantine theme of Thrace contained only what today is East Thrace."
(source : Thrace, Wikipedia)
2. 관미성 싸움 (392)
이어서 백제의 북쪽 요충지인 관미성을 침공하여 빼았었다고 하였다. 백제 아신왕은 이에 대해 매우 분개할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럼 이 관미성은 어디인가?
필자는 과거 수곡성과 함께 관미성이 크리미아 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최근의 연구에서 판단이 바뀌었다. 수곡성은 소수림왕 시절(375)부터 해온 전투지역이며, 크리미아 역사에 고트족의 376년 경략 역사가 나온다. 즉 수곡성이 크리마아 반도의 Sudak Castle인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훈족의 이동경로를 나타내는 지도에 375년 크리미아반도에 공격하는 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곡성이 크리미아 해안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관미성도 여기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런데 관미성은 광개토태왕시기에 처음 언급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관미성을 정복한 시기가 거란을 침공한 한달 이후이다. 그래서 관미성은 거란의 지역과 매우 가까운 지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거란의 지역과 관련 있을 수 있는 관미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상세히 밝히고자 한다.
"다시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침공했는데,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 공략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 동안 끈질긴 공격을 감행한 끝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자료 : 광개토대왕/생애, 나무위키)
3. 수곡성 싸움 (394)
수곡성 싸움은 소수림왕 시기(375)에 백제와 싸운 것으로 삼국사기에는 나온다. 필자는 수곡성 싸움이 크리마아반도에서의 싸움으로 추정했다. 실제 크리미아 전쟁사(376)에서 기록되기도 한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런데 크리미아 역사에서는 250년에도 고트족이 침입했다고 나온다. 250년 고트족왕 Cniva왕의 정복전쟁으로 보인다. 250년 발칸반도에서 로마와 싸운 고트족왕 Cniva는 고구려의 중천왕 시기이다.('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글 참조) 그러나 중천왕 시기의 기록은 수곡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위나라를 이기고, 서해바다(=대서양)까지 진출한 왕이지만 기록은 매우 부실하다. 일제나 김부식의 역사왜곡을 위한 의도적인 편집의 결과일 수도 있다.
수곡성 싸움은 매우 중요한 싸움으로 비중이 느껴진다. 그런데 광개토태왕 시기의 수곡성 싸움에 대한 훈족, 고트족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단 4세기에서 8세기까지 Bulgars가 크리미아를 정복했다고 기술되는데, 이 Bulgars가 고구려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판단된다.
단 최근의 연구에서, 수곡성 전투, 관미성전투, 평양 전투, 패수에서의 전투가 모두 별도의 전투이며 거리상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미아 반도는 워낙 중요한 흑해의 전략지역이며, 백제인 로마제국이 점하고 있었던 지역이므로, 수곡성은 크리미아의 Sudak Fortress로 판단된다.
수곡과 Sudak의 발음이 비숫한 것이 이러한 추정 이유의 하나이다. 그러나 수곡에는 계곡 곡자가 들어간다. 크리미아 해안가에 계곡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해안 안으로 들어가 계곡이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크리마에도 바위산이 많아 험준하다고 했다. 그런데 다뉴브강에도 계곡이 많다. 그래서 중부유럽, 서부유럽의 역사를 다시 고찰하는 가운데, 수곡성이 후보로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수곡성은 크리미아의 Sudak Fortress로 보면 위치상 백제로부터 상당히 북쪽에 위치한다. 흑해변에 있으니 수군이 이동하기에는 어렵지 않게 판단된다. 그래서 로마, 비잔틴제국, 제노이즈 등이 진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천왕시절 대서양까지 진출한 고구려가 백제에 흑해위의 지역을 놓고 전쟁을 한다는 것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결국 중서부 유럽에 대한 검토가 끝나야 최종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소수림왕 자료>
五年秋七月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다 (375)
六年冬十一月 백제를 침범하다 (376)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七年冬十一月 백제를 정벌하고 전진에 조공하다 (377)
八年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다 (378)
八年秋九月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다 (378)
(공백 : 378-383 : 5년)
(자료 : 삼국사기, 소수림왕, 나무위키)
"251년 왕비 연씨와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투던 관나부인(貫那夫人)의 투기가 심해 서해바다에 수장하였다. 254년 명림어수가 죽자, 비류패자(沸流沛者) 음우(陰友)를 국상에 임명하였다. 255년 왕자 약로(藥盧)주 01)를 태자로 삼았고, 다음해에는 공주를 연나부 출신 명림홀도(明臨笏都)에게 시집보냈다.
259년 중국 위(魏)나라 위지해(尉遲楷)가 침략해오자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추정되는 양맥지곡(梁貊之谷)에서 격파하였다."
(자료 : 중천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Throughout the later centuries, Crimea was invaded or occupied successively by the Goths (AD 250), the Huns (376), the Bulgars (4th-8th century), the Khazars (8th century)."
(source ; Crimea, Wikipedia)
Map of Crimea showing Sudak Fortress (source : Wikipedia)
Sudak Fortress in Crimea
4. 패수에서의 전투 (394)
패수 싸움은 평양성과 관계가 깊다. 즉 패수가 어디이냐 문제와 평양성이 어디이냐의 문제가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글에서 평양성이 카르파티안 산맥에 가까이 있는 부다페스트로 추정했다. 즉 고국양왕의 전사를 불러 오는 이 전쟁은, 고트족이 로마 Valens 황제 (백제 근초고왕 추정)에 밀려 카르파티안 산맥쪽으로 도주했다고 기록되는 전쟁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역 가까이에 부다페스트가 있고, 훈족의 수도가 볼가강가 또는 드네프로강가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했다고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양이 부다페스트라면 패수는 다뉴브강이 아닌가 한다.
패수에 관련한 자료를 보면, 1) ‘한서’ 지리지에는 패수현이 한사군의 핵심인 유주(幽州)의 낙랑군에 속했다고 기록돼 있어 낙랑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2) ‘수경’에는 위만이 망명하면서 건넌 강으로 당시 조선과 한나라와의 경계로 전한다. 3)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의 남쪽경계이다.
신당서에는 패수가 고구려의 남부 국경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동안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는 다뉴브강이 된다.
위만은 연나라에서 탈출하여 요수를 건너 요동으로 달아 나서 패수를 건너 낙랑을 지나 위만조선을 세웠다고 했다. 한서지리지에는 패수현이 낙랑군에 속했다고 했다. 즉 낙랑과 패수가 가까이 있고, 위만이 패수를 지나 위만조선을 세웠다고 했다. 다뉴브강은 부다페스트 근처에서는 남북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위만이 패수인 다뉴브강을 건너 낙랑인 Dacia지역에 올 수 있을 수 있다.
필자는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글에서 낙랑이 Carpi라고 했다. Dacia에 가까운 지역이며, 다뉴브강 위에 있다. 즉 다뉴브강이 패수가 된다. 미케네문명이 상나라의 그것이라는 주장을 한 글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에서 필자는 韓나라의 가능성을 이 지역에서 보았다.
필자는 요수를 우랄강이라 추정하고, 한(漢)나라를 페르시아지역으로 추정했다. 그래서 위만이 우랄강에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아무다리야 강(서쪽으로 흐르는 패수)을 건너 천산산맥 서쪽 Taxila 어디에 또는 인더스강(남북으로 흐르는 패수)을 건너 파키스탄의 수도인 Islamabad 근처에 왕험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리고 파르티마제국인 한나라의 동쪽에 Sakastan, Sistan 지역에 낙랑국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를 고구려의 대무신왕(막래)이 호동왕자를 앞세워 최리의 낙랑국을 점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패수가 된다면, 한나라 북변의 경계인 아무다리야강이나 (그래서 패수 가까이 있는 왕험성인 평양은 천산산맥 서쪽 어디라 추정) 한나라의 동쪽경계인 인더스강이 패수 후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최근 발칸반도 위의 Dacia지역이 낙랑의 새로운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낙랑지역 밑에 대방이 있어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된다고 판단했었다. 그리고 고국원왕, 광개토태왕, 장수왕시의 평양은 부다페스트라 추정된다. 신당서에 고구려의 남쪽 경계가 패수라는 것을 고려하면 패수는 부다페스트가 가까이 있는 다뉴브강이 된다. 그러나 이 패수는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되지 않는다. 요동이라는 개념도 현저히 바뀌게 된다.
즉 패수가 여러 곳이 되고 낙랑의 지역이 두 곳이 되는 것이다.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 (수경), 아니다 서쪽으로 흐른다, 또는 패수 동쪽 이야기가 나오니 남북으로 흐르는 모습도 있다 등으로 여러 패수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패하, 패강이란 말도 이용되었다. 낙랑도 낙랑군 또는 낙랑국으로 갈라진다고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패수지역을 추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보다 많은 연구와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패수지역 전쟁이 훈족의 역사와 고트족의 역사에서 다뉴브강지역을 두고 하는 전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패수에 대한 연구는 패수, 요수, 낙랑, 위만조선, 한나라, 연나라, 위나라 등의 모든 위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II. 광개토태왕의 신라지원 및 백제, 가야, 왜의 싸움 (395-412)
1.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백제, 가야, 왜와의 전쟁 (395-405)
광개토태왕의 백제와의 싸움은 더욱 전선을 넓혀 가야, 왜, 신라에까지 이르른다. 백제의 아신왕이 계속 반발하고 전쟁을 걸어 오니, 광개토태왕은 백제의 수도까지 쳐들어가 항복을 받고, 아신왕은 항복을 한 후, 직접적인 대응이 아닌, 왜에 도움을 청해 왜가 전쟁에 뛰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 왜는 백제의 왕자들이 지배하는 체제로, 왜의 도움을 받아 백제의 왕권싸움을 하기도 했다.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모두 그러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백제의 후견세력인 가야와 왜애 대한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라는 이 와중에 희생양이 되는 모양새이다.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광개토태왕의 정복사를 훈족의 역사, 고트족의 역사와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나온 내용을 보면, 백제의 잦은 대항에 분노한 광개토태왕은 아리수(다뉴브강)를 건너 백제의 수도에 육박하고 포위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백제왕이 항복하고 천명의 남녀와 공물을 바치니 용서하고 물러났는데, 광개토태왕은 58성을 획득하였다 하였다. 이는 총괄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395- 410년까지의 약 15년동안의 내용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석의 편리를 위해 395-405 년(395-398 & 399-405), 406-413년의 두 기간으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자료 (395-405)
백잔(百殘)[17]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2면
아래 고구려 자료를 보면 399년부터 신라 지원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백제의 아신왕 자료를 보면 395년부터 고구려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으로 기술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삼국사기 자료는 395-398 기간동안 공백으로 나타난다. 역시 의도적인 삭제로 보이며, 일제나 김부식의 편집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401년 공백, 403-404 공백, 등으로 Alaric I 고트족왕이 로마와 발칸반도를 경략하는 시기를 모두 공백으로 처리했다. 역시 의도적인 편집 결과로 판단된다. 그리고 연(燕)나라와의 전쟁만 기록하고 있다. 자료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일제나 김부식의 의도적인 삭제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아래 언급되는 일본서기의 404-405년 기록은 그래서 그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본다. 바로 이시기에 훈족의 트라키아 점령이 있었고, 고트족 Alaric I왕은 이태리 공격(401-403)이후 Pannonian provinces(404-405)에 있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대방계의 공격과 고구려에 의한 패퇴와 관련한 기록으로 보인다고 말하여진다. 이 모두가 다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대방은 트라키아지방이며 (그 위는 낙랑지역), 트라키아지역 남쪽에 왜로 보이는 세력이 있었거나, 또는 해상세력(sea peoples?)인 왜가 다른 곳에서 이곳에 공격하려 와서 고구려에 의해 대패했거나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라는 글에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지역에 Dorian이 점령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Dori 즉 도이(島夷), 즉 왜의 세력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왕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까지 진격하였다고 기술된다. 이런 Dorian에 관한 추정이 상기 일본서기 내용과 연관된다고 필자는 추정한다.
"399년,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다시 한번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지만, 백성들이 이젠 고구려와 전쟁을 해도 개죽음이란 걸 알았는지 징집을 피해 신라, 왜국으로 달아나버려(...) 군사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달아난 백성 가운데 유즈키노키미(弓月君, ゆづきのきみ)[24]를 필두로 한 일부는 다시 왜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신라의 저지를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25]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고구려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백제는 일단 고구려 대신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는 신라부터 정리하기로 생각해, 맹서[26]를 어긴 채 왜와 화통하게 되었고, 마침내 백제에 의해 끌어들여진 왜가 신라를 침공했고 앞서 근초고왕 시대 369년에 백제가 '평정'했던[27] 가야인들까지 왜의 신라 침공에 동참했다.
영락 9년(399), 이러한 남방의 정세를 감지한 것인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행차하고 있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서 왜인의 침공을 받았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사신에게 밀계(密計)를 알려준 뒤 돌려보내고, 광개토대왕 9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인지 후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지만[28] 모용성은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를 잡아 그대로 신성과 남소성을 먹어버렸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그 와중에도 보병과 기병 5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로 보냈다.[29]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부터 왜인을 구축하며 신라성까지 이르렀고, 왜인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패퇴하자 이를 추격해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러 성을 항복시켰다. 항복시킨 성에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두 가지 해석이 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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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리추 덴노(履中天皇) 5년 기록인 404년 영락 14년에 묘한 기록에 대한 기술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에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신화적 문구로 기록되어서 애매하게 기술되어있으나 년도수를 얼추보면 덴노가 자신의 아내까지 죽고 화를 부른 쿠루마모치노키미(車持君, クルマモチノキミ)에게 책임을 묻고 삼신(三神)을 바쳤다라고 되어있다. 피 냄새와 재해 재난의 주범이 츠루기타치노히츠기노미코(劍刀太子王, ツルギタチノヒツギノミコ, 검도태자왕)라고 되어있다.
더욱이 한제이 덴노(反正天皇)는 고구려계로 알려진 인물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죽고 405년에 그 자리에 앉는다. 이 기록을 두고 고구려가 당시 일본 열도로 신라에서 가야와 일본(왜)의 군사력을 몰아낸이후 일본을 직접 침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기록상으로 볼때 404년이면 왜가 다시 대방계를 공격하여 고구려가 격퇴했던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자료 : 광개토태왕/생애, 나무위키)
<광개토태왕 삼국사기 기록 (395-413)>
AD 395-398 : 4년 공백
九年春二月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AD 399)
十年 후연 숙군성을 공격하다 (AD 400)
AD 401 공백
十二年冬十一月 후연을 침략하다 (AD 402)
AD 403-404 : 2년 공백
(자료 : 광개토태왕/생애, 나무위키)
- 백제 아신왕의 자료 (395-405)
395년에도 백제의 북벌은 계속되어 8월 백제 최고의 명장 진무를 다시 시켜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갔다. 백제군의 규모는 자세히 기록돼있진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군보다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기병 7천을 이끌고 와서 전투한 결과 백제군이 대패해 8천명이나 전사했다고 한다.[15] 아신왕은 복수하기 위해 11월에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본인이 직접 7천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고구려에 쳐들어가려 했으나 한강을 건너 청목령까지 갔지만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얼어죽기에 이르자 되돌아와 한산성에서 군사들을 위로했다.
아신왕의 공격은 매번 실패하고 있었지만, 거의 1년에 한 번씩 연례적으로 쳐들어갈 정도였고, 적이 백제 하나 뿐이 아니라 거란 등등 싸우고 있는 적이 많아서 고구려 입장에서는 굉장히 눈엣가시였다. 이렇게 계속되는 아신왕의 공세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전격적으로 공격, 백제의 수도를 비롯한 수십개 성을 함락시켜버린 뒤 기어이 아신왕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이 때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면,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이후로는 영원히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16]라고 외쳤으며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덤으로 58성 700촌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자료 : 백제 아신왕, 나무위키)
<아신왕 삼국사기 기록(395-405)>
四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서 20일 만에 사라지다 (AD 395)
四年秋八月 왕이 진무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다 (AD 395)
四年冬十一月 패수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출전하다 (AD 395)
396 년: 공란
六年夏五月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를 파견하다[27] (AD 397)
六年秋七月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AD 397)
七年春二月 진무를 병관좌평에 임명하다 (AD398)
七年春三月 쌍현성을 축조하다 (AD 398)
七年秋八月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에 이르다 (AD 398)
七年秋九月 서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시키다 (AD 398)
八年秋八月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사와 말을 징발하다 (AD 399)
九年春二月 혜성이 규와 루 성좌에 나타나다 (AD 400) (=서쪽에 혜성이 나타나다)
九年夏六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400)
401년 공백
十一年 큰 가뭄이 들어 왕이 기우제를 지내다 (AD 402)
十一年夏五月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청하다 (AD 402)
十二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이 도착하다 (AD 403)
十二年秋七月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AD 403)
十四年春三月 흰 기운이 왕궁의 서쪽에서 일어나다 (AD 405)
十四年秋九月 아신왕이 죽다 (AD 405)
(자료 : 백제 아신왕 , 나무위키)
<신라 내물마립간 삼국사기 기록 (395-402)>
四十年秋八月 말갈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AD 395)
396년 공백
四十二年秋七月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다 (AD 397)
398년 공백
四十四年秋七月 누리가 날아와 들판을 덮다 (AD 399)
四十五年秋八月 살별이 동쪽에 나타나다 (AD 400)
四十五年冬十月 내구마가 슬프게 울다 (AD 400)
四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AD 401)
四十六年秋七月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오다 (AD 401)
四十七年春二月 왕이 죽다 (AD 402)
(자료 : 내물 마립간, 나무위키)
<삼국사기 실성마립간 기록 (402-412)>
一年春二月 실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402)
一年春三月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다 (AD 402)
二年春一月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다
二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다 (AD 403)
三年春二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四年夏四月 왜병이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여 물리치다 (AD 405)
(자료 : 실성마립간, 나무위키)
이제 이러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광개토태왕시기의 역사 기록이 훈족이나 고트족의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아래 훈족의 기록을 보면, 395년부터 대대적인 로마와 페르시아 공격에 나선다. 참고로 이를 아래와 같이 번역한다.
'395년 훈족은 로마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선다. 그해 여름, 훈족은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공격하고, 한편 395년 겨울에, 다른 훈족 공격군은 다뉴브강을 건너 트라키아지방을 약탈하고, 달마티아 지역(아드리아 해안쪽 판노니아지역)을 위협했다. 아시아 공격 그룹은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의 아시아지역을 침범했다.
한 그룹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넜으나 로마군에 의해 패했으며, 한편 다른 두 그룹 즉 Basich and Kursich에 의해 리드되는 그룹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위협했다. 이중 한 그룹은 페르시아에 의해 패했으며, 다른 그룹은 Derbend Pass로 성공적으로 후퇴했다. 마지막 훈족그룹은 소아시아를 유린했다. 훈족의 군대는 시리아와 카파도키아를 초토화 시키고 안티오크를 위협했다. .... 398년 Eutropius는 마침내 군사를 정비해 지역의 질서를 회복했으나, 훈족의 군대는 Eutropius를 패배시키지 않고 물러났는데, 자의에 의해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Sinor는 주장하기를 소아시아와 페르시아를 침략한 훈족의 대규모 공격은 이들 지역을 점령하거나 정착하려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유린하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Maenchen-Helfen은 페르시아 공격을 리드한 Basich and Kursich는 404년 또는 407년 로마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자료에 의하면 훈족은 Xailandur를 리더로 하여 이후에도 계속 아르메니아를 공격한 것으로 나타난다. '
- 훈족의 당시 정복활동(395-405)
- First large scale attack on Rome and Persia (395-398)
In 395 the Huns began their first large-scale attacks on the Romans. In the summer of that year, the Huns crossed over the Caucasus Mountains, while in the winter of 395, another Hunnic invasion force crossed the frozen Danube, pillaged Thrace, and threatened Dalmatia.[48] Sinor argues that these two events were likely not coordinated,[49] but Kim believes they were.[40] The forces in Asia invaded Armenia, Persia, and the Roman provinces in Asia. One group crossed the Euphrates and was defeated by a Roman army, while two armies, recorded in later sources as under the leadership of Basich and Kursich, rode down the Euphrates and threatened the Persian capital of Ctesiphon. One of these armies was defeated by the Persians, while the other successfully retreated by Derbend Pass.[49] A final group of Huns ravaged Asia Minor.[50] The Huns devastated parts of Syria and Cappadocia, threatening Antioch.[51] The devastation was worse because most Roman forces had been moved to the West due to Roman power struggles there.[52] In 398 Eutropius finally succeeded in gathering an army and restoring order in the province.[53] It seems likely, however, that the Huns left of their own accord without Eutropius having defeated them in battle.[49][54]
Sinor argues that the much larger scale of the attacks on Asia Minor and Persia indicates that the bulk of the Huns had remained on the Pontic steppes rather than moving into Europe at this time.[55] It seems clear that the Huns did not intend to conquer or settle the territories they attacked, but rather to plunder the provinces, taking, among other things, cattle. Priscus, writing much later, reports hearing from the Huns at Attila's camp that the raid was launched due to a famine on the steppes.[56] This may also have been the reason for the raids into Thrace.[49] Maenchen-Helfen suggests that Basich and Kursich, the Hun leaders responsible for the invasion of Persia, may have come to Rome in 404 or 407 as mercenaries:[57] Priscus records that they came to Rome to make an alliance.[58]
Hunnic attacks against Armenia would continue after this raid, with Armenian sources noting a Hunnic tribe known as the Xailandur as the perpetrators.[59].....
In 400, Gainas, rebellious former Roman magister militum fled into Uldin's territory with an army of Goths, and Uldin defeated and killed him, likely near Novae: he sent Gainas's head to Constantinople.[61] Kim suggests that Uldin was interested in cooperating with the Romans while he expanded his control over Germanic tribes in the West.
In 406, Hunnic pressure seems to have caused groups of Vandals, Suebi, and Alans to cross the Rhine into Gaul.[65] Uldin's Huns raided Thrace in 404–405, likely in winter.[66][67]
Also in 405, a group of Goths under Radagaisus invaded Italy, with Kim arguing that these Goths originated from Uldin's territory and that they were likely fleeing from some action of his.[63] Stilicho, the Roman magister militum responded by asking for Uldin's aid: Uldin's Huns then destroyed Radagaisus's army near Faesulae in modern Tuscany in 406.[68] Kim suggests Uldin acted in order to demonstrate his ability to destroy any groups of barbarians who might flee Hunnic rule.[63] An army of 1000 of Uldin's Huns were also employed by the Eastern Roman Empire to fight against the Goths under Alaric.[69] After Stilicho's death in 408, however, Uldin switched sides and began aiding Alaric under an army under the command of Alaric's brother-in-law Athaulf.[64]
(source : History of Huns, Wikipedia)
Late in the fall of 404 and in 405, according to Sozomen:
"About this time the dissensions by which the church was agitated were accompanied, as is frequently the case, by disturbances and comotions in the state. The Huns crossed Ister and devastated Thrace. The robbers in Isauria, gathered in great strength, ravaged the towns and villages between Caria and Phoenicia."[9]
(source: Uldin, Wikipedia)
즉 광개토태왕의 고구려군이, 신라로 추정되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수도 크테시폰)와 백제로 추정되는 동로마의 아나톨리아지역(카파도키아), 시리아지역, 가야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지역을 모두 공격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 공격이 이지역을 점령하고 정착하려한 것이 아니며, 후에는 자의적으로 물러났다고 했다. 광개토태왕이 신라지원의 목적으로 백제지역, 가야 지역, 왜가 침범한 신라지역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것으로, 우리 역사의 내용과 매우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광개토태왕릉비의 내용을 보면 광개토태왕은 '관병(官兵)'이란 표현을 쓴다. 즉 동족인 신라, 백제를 관리하는 개념인 것이다.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고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후 을딘의 훈족은 404-405년 트라키아지역을 철저히 유린했다고 Sozomen은 기록하고 있다. (상기 자료 참조) 이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에 의한 왜의 철저한 패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훈족의 상기와 같은 기록은 고트족의 기록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 보자.
고트족의 왕 Alaric I은 396년 아드리아해안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 펠로폰네소스반도까지 진출했다고 아래 설명된다. (아래 자료 참조). 훈족의 활동에서도 395년 겨울 다뉴브강을 지나 트라키아를 유린하고 Dalmatia을 위협했다고 한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은 39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 수도를 함락시킨후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냈다. 백제의 수도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위례성이 Illyria지방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왔다. 위례와 Illyria(일리리아), 발음도 비슷하다.
광개토대왕은 39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전격적으로 공격, 백제의 수도를 비롯한 수십개 성을 함락시켜버린 뒤 기어이 아신왕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자료 : 아신왕, 나무위키)
이후 Alaric I은 402년 봄 이태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는데, 왜 공격했는지 목적을 알 수 없다고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는 말한다. 실제로는 401년 늦게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태리반도의 알프스 경계를 넘어 북부 이태리를 6개월에서 9개월동안 공격했다고 기술된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반달족 출신인 Stilicho가 이끄는 로마군이 두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404-405년 기간에 Alaric I왕은 발칸반도 트라키아 남쪽 그리스지역으로 방향을 돌려 공격한다. 훈족의 기록과 동일한 모습이다. 일본서기에 나와 있듯이 왜군이 대방계를 공격한 것이 404-405년인데, 이 전쟁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낙랑이 Carpi 즉 다뉴브강 위의 Dacia지방이라 했다. 낙랑 밑에 대방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선이라 했다. 즉 대방이 트라키아지역이 되는 것이다. 일본서기 내용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왜군을 참혹한 수준으로 패배시키고, 왜국에 친 고구려 정권을 세운다. 고트족 왕 Alaric I도 이지역에 한 4년 머물렀다고 위티피디아 자료는 말하고 있다.
이후에도 Alaric I왕의 이태리 공격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407년, 410년 등 2차례에 걸쳐 이태리 로마를 포위했다고 기술된다. (406-412 기간 분석 아래 영문 자료 참조)
- 고트족 Alaric I 당시 (395-405) 정복전쟁 자료
"Alaric's forces made their way down to Athens and along the Adriatic coast, where he sought to force a new peace upon the Romans.[27] His march in 396 included passing through Thermopylae further into Greece, during which his troops plundered for the next year or so as far south as the mountainous Peloponnese peninsula.[36] "............
Invading Italy
According to historian Michael Kulikowski, sometime in the spring of 402 Alaric decided to invade Italy, but no sources from antiquity indicate to what purpose.[41][g] Using Claudian as his source, historian Guy Halsall reports that Alaric's attack actually began in late 401, but since Stilicho was in Raetia "dealing with frontier issues" the two did not first confront one another in Italy until 402.[43] Alaric's entry into Italy followed the trek identified in the poetry of Claudian, as he crossed the peninsula' s Alpine frontier near the city of Aquileia.[44] For a period of six to nine months, there were reports of Gothic attacks along the northern Italian roads, where Alaric was spotted by Roman townspeople.[45] Along the route on Via Postumia, Alaric first encountered Stilicho.[46]
Two battles were fought. The first was at Pollentia on Easter Sunday, where Stilicho achieved an impressive victory, taking Alaric's wife and children prisoner, and more significantly, seizing much of the treasure that Alaric had amassed over the previous five years' worth of plundering.[47][h] Pursuing the retreating forces of Alaric, Stilicho offered to return the prisoners but was refused. The second battle was at Verona,[47] where Alaric was defeated for a second time. Stilicho once again offered Alaric a truce and allowed him to withdraw from Italy.
Kulikowski explains this confounding, if not outright conciliatory behavior by stating, "given Stilicho's cold war with Constantinople, it would have been foolish to destroy as biddable and violent a potential weapon as Alaric might well prove to be".[47] Halsall's observations are similar, as he contends that the Roman general's "decision to permit Alaric's withdrawal into Pannonia makes sense if we see Alaric's force entering Stilicho's service, and Stilicho's victory being less total than Claudian would have us believe".[49] Perhaps more revealing is a report from the Greek historian Zosimus—writing a half a century later—that indicates an agreement was concluded between Stilicho and Alaric in 405, which suggests Alaric being in "western service at that point", likely stemming from arrangements made back in 402.[50][i] Between 404 and 405, Alaric remained in one of the four Pannonian provinces, from where he could "play East off against West while potentially threatening both".[47]
Fate was not kind to the Empire, as "Alaric’s return to the north-west Balkans brought only temporary respite to Italy, for in 405 another substantial body of Goths and other barbarians, this time from outside the empire, crossed the middle Danube and advanced into northern Italy, where they plundered the countryside and besieged cities and towns" under their leader Radagaisus.[52] Although the imperial government was struggling to muster enough troops to contain these barbarian invasions, Stilicho managed to stifle the threat posed by the tribes under Radagaisus, when the latter split his forces into three separate groups. Stilicho cornered Radagaisus near Florence and starved the invaders into submission.[52][j] Meanwhile, Alaric—bestowed with codicils of magister militum by Stilicho and now supplied by the West—awaited for one side or the other to incite him to action as Stilicho faced further difficulties from more barbarians.[54]
(source : Alaric I, Wikipedia)
고구려 역사를 훈족의 역사와 고트족의 역사와 비교했다.
이제 백제의 동 시기 역사를 로마제국사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우선 백제의 삼국사기 기록을 다시 살펴 보자.
백제는 아래 기록과 같이 398년-400년 고구려의 공격에 대항하는 전쟁을 묘사한다.
398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漢山)에 이르렀는데, 눈이 많이 와서 철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높은 산맥지역에 한산이 있다. 이는 코카서스산맥에 있는 산일 수 있고, 한성이 서로마에 있다면 한산은 이태리 북부 알프스산맥의 어디일 수 있다. 이는 보다 유럽에 대한 역사 공부를 한 후에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399년 군사와 말을 징발하자, 백성들이 왜와 신라로 달아났다고 한다. (나무위키 자료 참조) 즉 왜와 신라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동로마의 백제가 아닌가 한다.
400년 혜성이 규와 루 성좌에 나타났다는 것은 서쪽에 외적의 침입이 있었다는 뜻이다. 동로마의 서쪽으로부터 아나톨리아, 발칸반도에의 고구려군(=훈족) 침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400년 일식 기록은 동로마에서 일어난 Gainus의 반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훈족 자료에서는 훈족의 을딘이 Gainus의 목을 베어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고 기술된다.
이후 402년 왜에 큰 구슬을 요청한 것은 군사적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결국 404-405년 왜의 패배를 기록한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광개토태왕이 트라키아 정벌 (훈족기록),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의 정벌(고트족 Alaric I의 기록)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와중에 아신왕은 405년 사망한다. 왜의 도움을 받은 전지왕의 정변으로 시해 되었다고 하나, 고구려와의 전쟁 패배 가운데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백제 아신왕 삼국사기 기록 (398-405)>
七年秋八月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에 이르다 (AD 398)
七年秋九月 서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시키다 (AD 398)
八年秋八月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사와 말을 징발하다 (AD 399)
九年春二月 혜성이 규와 루 성좌에 나타나다 (AD 400)
九年夏六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400)
401년 공백
十一年 큰 가뭄이 들어 왕이 기우제를 지내다 (AD 402)
十一年夏五月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청하다 (AD 402)
十二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이 도착하다 (AD 403)
十二年秋七月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AD 403)
十四年春三月 흰 기운이 왕궁의 서쪽에서 일어나다 (AD 405)
十四年秋九月 아신왕이 죽다 (AD 405)
(자료 : 백제 아신왕 , 나무위키)
그럼 이러한 백제에서의 상황은 로마제국의 상황에서 확인되는가?
서고트족의 Alaric I왕이 395년 공격을 시작해 마케도니아, 트라키아를 유린하면서 Constantinople로 진군한다는 기록을 보면 훈족의 공격, 고트족의 공격 내용과 유사함을 보여 준다. 단 로마사는 서고트족 왕 Alaric I을 한 때 로마제국을 위해 일했다는 등, 로마의 한 Military Magister 자리에 관심이 있다는 등, 고트족 용병이 로마를 위해 싸웠다는 등, 자기 미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훈족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고트족의 언급으로 일관한다. 훈족이 고트족이고 이들 모두 고구려라면, 이들이 백제의 용병일 수가 없다. 로마를 미화하려는 사이비 사가들의 논리로 판단된다.
또한 아래 자료에서 반달족 출신 장군 Stilicho, 고트족 출신 용병부대장 Gainus 등이 로마 황제들의 견제를 받으며, 왕권을 위한 싸움에 휘말려서 희생되거나 (Stilicho경우), Constantinople 근처에 가서 Rufinus를 죽이는 반란(395)을 일으켜(Gainus 경우), 로마제국은 고트족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하는데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중 고트족 Gainas가 395년 11월 Constantinople근처까지 가서 Arcadius 황제를 만나고 일행중 한 사람인 Rufinus를 갑자기 죽였다는 것은, 396년 광개토태왕이 수군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의 수도까지 진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왕제와 10명의 대신을 인질로 데려갔다는 기록을 연상하게 한다. 시기도 유사하고 수군으로 근접한 수도(왕성)가 Constantinople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로마 황제를 만났다는 것은 수도에 진격했다는 것이고, 황제와 같이 만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만큼 동로마측에서 방어준비를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황제가 고트족 즉 고구려에게 항복한 셈인데, 이를 포장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심지어 삼국사기 백제사에도 아신왕이 항복한 기록은 없다. 단지 광개토왕릉비에 나올 뿐이다.
이어서, Alaric I이 그리스에 있을 때, 1) 397년 로마제국의 Stilicho와 Eutropius가 Alaric I을 막기 위해 아드리아 해안의 Dalmatia지역인 Illyricum의 방어를 위해 협력을 모색한 점, 2) Alaric I이 일시적으로 Epirus (그리스 중부)로 후퇴했다는 서술, 3) Stilicho를 견제하는 동로마황제인 Arcadius가 Stilicho에게 지원군을 보내는 것에 동의를 안해 Stilicho가 서고트족을 막는 것을 포기하여 공적으로 몰린 점, 4) Eutropius의 요구에 의해 Arcadius(동로마황제)가 Alaric I에게 Illyricum Military Magister를 제안했다는 점, 5) 동시에 동로마는 아프리카의 Military Magister인 Guildo에게 연계(군사적 지원)를 서로마 황제 Honorius로부터 동로마 황제 Arcadius로 옮기라고 설득했다는 점, 그리고 이것 때문에 6) 서로마와 동로마와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기록 등은 눈길을 끈다.
즉 397년 Alaric I의 그리스 침입은 위의 1)-4)내용을 고려할 때, 동로마에게 매우 위협적인 상황인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프리카의 지원병력을 모색했다는 5)의 기록은 왜의 도움을 청한 백제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어서 7) 398년 Eutropius는 아르메니아에 침입한 훈족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여 Arcadius황제가 직위(consulship)를 주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399년 실패하고, 8) 소아시아에 정착한 동고트족(Theodosius I & Tribigild)이 Eutropius의 제거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서술, 9) 결국 Arcadius황제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왕비 Eudoxia의 주장에 따라, 권력다툼의 희생인 된 Eutropius를 제거했다 (399년)는 기록 등이 눈에 띤다.
7), 9)의 권력다툼의 모습을 보인 서술가운데도, 8)의 서술은 동고트족이 소아시아에 진출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리고 이것이 더 위기를 높혔다고 서술된다.
어느 나라나 분열되어 싸우면 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로마제국은 그 숱한 분열과 왕권다툼에도 큰 로마제국을 이어간 것처럼 역사를 설명한다. 필자는 이에 매우 회의가 간다. 다른 나라에서 왕조가 바뀌면 나라가 바뀌는 것처럼 역사를 썼다면 아마 로마제국은 100년을 가지 못하고 다른 나라가 일어 나고 망했을 것이다. 우리가 로마사를 연구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 로마제국의 상황 (395-398)
The first crisis facing the young emperor was the rebellion of the Visigoths in 395, under the command of Alaric I, who sought to take advantage of the accession of two inexperienced Roman Emperors.[13] As Alaric marched towards Constantinople, plundering Macedonia and Thrace, the eastern court was unable to deal with them, as Theodosius had taken the majority of the eastern regiments with him to Italy, and were now in the hands of Stilicho.[14] Perhaps sensing an opportunity to consolidate his power of the eastern half of the empire as well, Stilicho declared that Theodosius had made him guardian over both his sons. Declaring he was marching to deal with Alaric, he set off to the east, reaching Thessaly, leading both his own forces as well as the Gothic mercenaries whom Theodosius had taken west in the civil war with Eugenius. Arcadius and Rufinus were more concerned by the threat of Stilicho than by one of Alaric;[15] Arcadius ordered Stilicho not to proceed any further, but instead to send back the eastern regiments. Stilicho complied, falling back to Salona, while the Gothic mercenaries under the command of Gainas marched onwards to Constantinople.[16] When Arcadius and Rufinus greeted Gainas with his army in the Campus Martius outside of Constantinople on 27 November 395, Rufinus was suddenly assassinated on the parade ground by the Goths, on the orders of Stilicho and possibly with the support of Eutropius.[17] With Rufinus's death, they were Eutropius and Arcadius' wife, Eudoxia, who would assume roles of advisor and/or guardian of the emperor, in place of Rufinus.[18]
While Eutropius consolidated his hold on power in the capital, the distracted government continued to turn a blind eye to the presence of Alaric in Greece.[19] Although at first Eutropius may have coordinated with Stilicho around the defence of Illyricum, by 397, when Stilicho had returned and proceeded to blockade Alaric, who then retreated into Epirus, the atmosphere of the eastern court had changed.[20] As neither Arcadius nor Eutropius was keen to have Stilicho intervening in the affairs of the eastern empire, they provided no further military aid to Stilicho, who then abandoned the blockade of the Visigoths.[21] At Eutropius's urging, Arcadius declared Stilicho to be a hostis publicus, and came to an arrangement with Alaric, making him magister militum per Illyricum.[22] At around the same time, the eastern court persuaded Gildo, the Magister utriusque militiae per Africam, to transfer his allegiance from Honorius to Arcadius, causing relations between the two imperial courts to deteriorate further.[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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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in 398, Eutropius led a successful campaign against the Huns in Roman Armenia, his convincing of Arcadius to grant him the consulship for 399 triggered protests across the empire. For traditionalists, the granting of the consulship to a eunuch and former slave was an insult to the Roman system and other contemporary Romans, and the western court refused to recognize him as consul.[27] The crisis came to escalate when the Ostrogoths who had been settled in Asia Minor by Theodosius I, and led by Tribigild, revolted, demanding the removal of Eutropius. The emperor sent out two forces to deal with Tribigild; the first one under Leo was defeated. The second one, commanded by Gainas, rival of Eutropius in the Eastern court, returned to Arcadius, and argued that the Ostrogoths could not be defeated and that it would be sensible to agree to their demand.[28] Although Arcadius was still wanting to support Eutropius, it was the intervention of his wife Eudoxia that finally brought Arcadius to making decision opposite to his will, who saw an opportunity to get rid of the powerful rival and replace him as the main influential figure over Arcadius.[29] Arcadius therefore dismissed Eutropius and sent him into exile (17 August 399), before recalling him to face trial and execution during the autumn of 399.
(source : Arcadius(383-408), emperor in the East, Wikipedia)
399-405 기간동안의 로마제국의 상황은 어떤가?
398년 훈족의 아르메니아 침입이 언급된다. 그리고 동고트족이 소아시아를 공격했다고 기술된다. 그리고 동고트족의 침입은 막을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하는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Gainas를 언급하고 있다.
400년에는 Constantinople 수도에 Gainas가 관련있는 듯한 반란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앞의 고트족 내용에서 보았듯이 Gainus가 이끄는 고트족의 동로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침입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고트족 서술내용은 396년에 가까와, 광개토태왕의 396년 시기와 유사한데, 로마 제국 서술에서는 이 시기가 400년으로 4년 정도 차이가 있다.
서로마에서는 401년 Alaric I 고트족왕이 이태리공격을 해올 때, Honorius 황제는 수도인 Milan (밀라노)에 있었다가, 성곽도시로서 보다 안전한 Ravenna로 옮겼다고 서술된다.
Stilicho 로마 장군(반달족 출신)은 401-402 기간 이태리 북부 싸움에서 Alaric I에 두번 승리했다고 기술된다. 405년에는 고트족 Radagaisus가 다뉴브강을 건너 이태리를 침범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406년 Stilicho가 패배시켰다 한다. 그리고 그 고트족 병력을 자기 수하에 흡수했다고 한다. 반달족 출신 Stilicho 정체가 의심된다. 고구려(훈족, 고트족)가 흡수한 반달족의 세력이 아닌가 의심된다.
405-406에는 수에비족, 반달족, 알란족, 고트족이 연합하여 라인강을 건너 Gaul지역을 침략했다고 기술된다.이태리 공격을 일단락하고 더 서진했다는 의미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로마사의 기록(395-405)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훈족, 고트족의 역사기록을 대부분 확인해 주면서도, 당시 아신왕의 백제 수도가 Constantinople일 수 있다는 점, 위례성이 Dalmatia인 Illyricum에 있을 수 있다는 점 등을 시사 하고 있다고 본다.
- 로마제국의 상황 (399-405)
"With Eutropius' fall from power, Gainas sought to take advantage of Arcadius's current predicament.[32] He joined the rebel Ostrogoths, and, in a face to face meeting with Arcadius, forced the emperor to make him magister militum praesentalis and Consul designate for 401.[33] Arcadius also acquiesced when Gainas asked for the dismissal of further officials, such as the urban prefect Aurelianus, as well as a place for settlement for his troops in Thrace.[34] However, Arcadius refused to agree to Gainas's demand for an Arian church in Constantinople for his Gothic mercenaries, following the advice of John Chrysostom, the Archbishop of Constantinople and the intervention of Eudoxia.[35]
By July 400, the actions of Gainas had irritated a significant portion of the population of Constantinople to the point that a general riot broke out in the capital.[36] Although Gainas had stationed his troops outside of the capital walls, he was either unable or unwilling to bring them into the capital when many Goths in the city were hunted down and attacked.[37] As many as 7,000 Goths were killed in the rioting; those who took refuge in a church were stoned and burned to death, after they received the emperor's permission, nor was it condemned by the Archbishop of Constantinople, John Chrysostom.[38]
Although initially staying his hand (probably through the intervention of the new Praetorian Prefect of the East Caesarius),[39] Gainas eventually withdrew with his Gothic mercenaries into Thrace and rebelled against Arcadius. He attempted to take his forces across the Hellespont into Asia, but was intercepted and defeated by Fravitta, another Goth who held the position of magister militum praesentalis. Following his defeat, Gainas fled to the Danube with his remaining followers, but was ultimately defeated and killed by Uldin the Hun in Thrace.[40]....
(source : Arcadius (383-408), emperor in the East, Wikipedia)
At first Honorius based his capital in Milan, but when the Visigoths under King Alaric I entered Italy in 401 he moved his capital to the coastal city of Ravenna, which was protected by a ring of marshes and strong fortifications.[10] While the new capital was easier to defend, it was poorly situated to allow Roman forces to protect Central Italy from the increasingly regular threat of barbarian incursions. It was significant that the Emperor's residence remained in Ravenna until the overthrow of the last western Roman Emperor in 476. That was probably the reason why Ravenna was chosen not only as the capital of the Ostrogothic Kingdom in Italy, but also for the seat of the Byzantine exarchs as well.[10]
The next crisis was the Visigothic invasion of Italy in 402 under the formidable command of their king, Alaric. Stilicho was absent in Raetia in the latter months of 401, when Alaric, who was also the Eastern Empire's magister militum in Illyricum, suddenly marched with a large army through the Julian Alps and entered Italy.[13]
Stilicho hurried back to protect Honorius and the legions of Gaul and Britain were summoned to defend Italy. Honorius, slumbering at Milan, was caught unaware and quickly fled to Asti, only to be pursued by Alaric, who marched into Liguria. Stilicho defeated Alaric at Pollentia, on the river Tanarus on Easter Day (6 April 402). Alaric retreated to Verona, where Stilicho attacked him again. The Visigoths, weakened, were allowed to retreat back to Illyricum.[14] In 405 Stilicho met an invasion of Italy led across the Danube by Radagaisus. They brought devastation to the heart of the Empire, until Stilicho defeated them in 406 and recruited most of them into his forces.[10] Then, in 405/6, a tribal confedration, composed of Suevians, Vandals, Alans and Goths crossed the frozen Rhine and invaded Gaul.
(source : Honorius, Wikipedia)
이 당시의 신라 상황은 어떠한가?
395년 말갈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쳤다고 시작한다. 395년 훈족의 침입을 격퇴했다고 사산왕조 페르시아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후 400년 살별이 동쪽에 나타난다고 했다. 보통 살별의 나타남은 외적의 침입을 말하는데 쓰였다. 400년이면 고구려의 공격이 있을 수 있고, 아니면 백제와 연합한 왜의 침입이 있을 수 있다. 고구려의 공격은 훈족의 경로를 보건데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서쪽으로부터 공격이다. 따라서 동쪽으로부터 외적의 침입은 위의 설명이 안된다.
그리고 400년 내구마가 슬피 운다고 했다. 내구마는 임금의 하사품으로 자주 쓰였다고 하는 것을 보아 왕의 변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실성왕이 고구려군과 함께 돌아와 왕권을 잡는데, 이러한 상항에서 내물마립간의 변고가 생긴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변고를 감추기 위해 김부식은 왕의 죽음을 2년 늦출 수도 있다고 본다.
내구마[ 內廐馬 ]
내구(內廐)에 속한 말. 임금의 하사품으로도 자주 쓰임.
용례
- ㉠(45년) 10월에 임금이 상어하는 내구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 ; 十月 王所嘗御內廐馬 跪膝流淚 哀鳴 [삼국사기 권제3, 3장 뒤쪽~4장 앞쪽, 신라본기본기 3 내물이사금]
[네이버 지식백과] 내구마 [內廐馬]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신라 내물마립간 삼국사기 기록 (395-402)>
四十年秋八月 말갈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AD 395)
396년 공백
四十二年秋七月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다 (AD 397)
398년 공백
四十四年秋七月 누리가 날아와 들판을 덮다 (AD 399)
四十五年秋八月 살별이 동쪽에 나타나다 (AD 400)
四十五年冬十月 내구마가 슬프게 울다 (AD 400)
四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AD 401)
四十六年秋七月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오다 (AD 401)
四十七年春二月 왕이 죽다 (AD 402)
(자료 : 내물 마립간, 나무위키)
이러한 신라의 상황은 사산왕조 페르시아 역사에 나타나는가?
395년 훈족이 수도인 크테시폰에 가까운 Asuritan을 공격해와 큰 피해를 주었는데, Bahram IV가 싸워 크게 승리했다고 기술된다. 신라기록에서 말갈을 격퇴한 기록과 일치한다. (두 기록 모두 승리의 진실성이 의심된다) 그러나 그 뒤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단지 399년 바람4세가 자국군에 의해 암살되고 Yazdegerd I가 즉위한다는 기록뿐이다. 승리한 바람4세가 자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간다. 물론 반란이 있어 그럴 수도 있지만... 만약 실성왕이 고구려의 힘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400년 내물마립간을 죽였다면 사산왕조 페르시아 내용과 잘 일치한다. 즉 여기도 역사왜곡의 미화작업이 신라와 같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자료에도 미화한 기록만 있어 뭔가를 감추기 위한 왜곡의 냄새가 난다.
-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상황 (395-398)
In 395, the Huns invaded the Sasanian province of Asuristan, where they ravaged much of the countryside and took many captives. Bahram IV then had an army sent against them, which managed to kill a great deal of them and regain the riches they had taken including the captives.[10]
Bahram IV has been reported to be an ineffective and unpopular monarch, which generally implies that the nobility and Zoroastrian clergy loathed him.[11] He was ultimately killed in 399 by his own troops.[12] He was succeeded by his brother Yazdegerd I.[12]
(source : Bahram IV, Wikipedia)
2.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남쪽 순행 전쟁(410)
광개토태왕의 후반기인 405-413기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408년까지의 후연전쟁과 409년 나라 동부에 6성을 쌓는 일, 그리고 410년 남쪽지방을 순행하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후연과의 전쟁은 차후로 분석하기로 한다.
409년 나라 동부에 6개성을 쌓은 것도 미스테리이다.
이 기간 중 가장 기대를 하는 년대는 410년이다. 남부지방을 순행했다고 하는데, 고구려의 당시 남부는 훈족이나 고트족 자료에 의하면 다뉴브강 남쪽의 발칸반도의 트라키아지역, 모에지아지역이나 그리스 지역, 이태리 로마지역, 이태리 남부지역 시실리섬지역이 될 수 있다. 이들 지역은 왜의 세력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
410년은 또한 광개토태왕릉비 기록에 의하면 동부여의 정벌기록이 있는 해이다. 역시 동부여가 어느 위치에 있는 부여를 말하는지 궁금하다. 삼국사기에 409년 나라 동부에 6개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동방으로의 정벌을 의미할 수 있다. 동부여 정벌에 대한 분석은 별도의 연구로 미루고자 한다.
- 고구려의 상황 (405-412)
十五年春一月 후연이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AD 405)
十六年秋七月 해충과 가뭄으로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AD 406)
十六年冬十二月 후연이 목저성을 공격해왔으나 패배하다 (AD 406)
十七年春二月 궁궐을 증축 수리하다 (AD 407)
十八年春三月 북연에 사신을 보내다 (AD 408)
十九年夏四月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다 (AD 409)
十九年秋七月 나라 동쪽에 6성을 쌓다 (AD 409)
二十年秋八月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 (AD 410)
AD 411-412 : 2년 공백
二十三年冬十月 광개토왕이 죽다 (AD 413)
(자료 : 광개토태왕/생애 (391-412), 나무위키)
이후 406-412년 기간동안에 대해 삼국사기는 연나라와의 전쟁만을 언급하다가 410년 남쪽을 순행했다고 하였다. 그럼 이 시기의 내용 중 우리는 훈족의 내용과 고트족의 내용, 그리고 로마사에서 어떻게 서술하는지 살펴 보자.
아래 훈족의 서술에서는 405년 고트족 Radagaisus가 이태리 즉 서로마를 공격한 것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훈족의 을딘이 고트족과 싸우고 반달족 출신 로마장수 Stilicho와 협력하다가, 408년 Stilicho가 로마를 배반을 했다고 죽임을 당하자, 갑자기 훈족의 을딘왕이 고트족의 Alaric I의 brother-in-law인 Athaulf와 같은 편이 되었다고 한다. 고트족 역사에서는 Alaric I왕은 이은 왕이 Ataulf이다. 즉 Uldin과 Alaric I이 동일인이고 광개토태왕이라면, Ataulf는 광개토태왕의 태자가 되는 것이다. 409년 왕자 거련을 태자로 했다고 고구려 삼국사기에서 말하고 있으니 거의 같은 시기이다. Stilicho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반달족 출신으로, 결국 고구려에 합류한 세력이 아닌가 한다.
408년에는 모에지아의 Castra Martis성을 취했다고 서술된다. 그리고 협상과정에서 높은
대가를 요구하여 거절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상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역시 패배의 상황을 감추려는 설정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408년 Uldin휘하 훈족이 대규모로 동로마제국을 공격했는데 실패했다고 간단히 언급된다. 동로마 공격이 방어되었으면 자세히 자랑할 만한데, 그런 내용은 없다. 이미 396년에 항복했기 때문에, 별 저항없이 전쟁이 없이 순행하는 정도로 끝난 것을, 훈족이 이기지 못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413년이후는 훈족의 Uldin이 정변으로 죽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글이 서술되었다.
- 훈족에 대한 서술 내용 (406-412)
Also in 405, a group of Goths under Radagaisus invaded Italy, with Kim arguing that these Goths originated from Uldin's territory and that they were likely fleeing from some action of his.[63] Stilicho, the Roman magister militum responded by asking for Uldin's aid: Uldin's Huns then destroyed Radagaisus's army near Faesulae in modern Tuscany in 406.[68] Kim suggests Uldin acted in order to demonstrate his ability to destroy any groups of barbarians who might flee Hunnic rule.[63] An army of 1000 of Uldin's Huns were also employed by the Eastern Roman Empire to fight against the Goths under Alaric.[69] After Stilicho's death in 408, however, Uldin switched sides and began aiding Alaric under an army under the command of Alaric's brother-in-law Athaulf.[64]
Also in 408, the Huns, under Uldin's command, crossed the Danube and captured the important fortress Castra Martis in Moesia.[70] The Roman commander in Thrace attempted to make peace with Uldin, but Uldin refused his offers and demanded an extremely high tribute.[71] However, many of Uldin's commanders subsequently defected to the Romans, bribed by the Romans.[60] It appears that most of his army was actually composed by Scirii and Germanic tribes, whom the Romans subsequently sold into slavery.[64] Uldin himself escaped back across the Danube, after which he is not mentioned again.[72] The Romans responded to Uldin's invasions by attempting to strengthen the fortifications at the border, increasing the defenses at Constantinople, and taking other measures to strengthen their defences.[64][73]
Hunnic mercenaries had also formed Stilicho's bodyguard:[66] Kim suggests they were a gift from Uldin.[64] The guard was either killed with Stilicho,[64] or is the same as an elite unit of 300 Huns who continued to fight for the Romans against Alaric even after Uldin's invasion.[66]
During this same time, probably between 405 and 408, the future Roman magister militum and opponent of Attila Flavius Aetius was a hostage living among the Huns.[74].....
Under Uldin, the first Hunnic ruler named in contemporary sources, the Huns launched a first unsuccessful large-scale raid into the Eastern Roman Empire in Europe in 408.....
Sources on the Huns after Uldin are scarce.[64][75] In 412 or 413, the Roman statesman and writer Olympiodorus of Thebes was sent on an embassy to "the first of the kings"[64] of the Huns, Charaton. Olympiodorus wrote an account of this event, which exists now only fragmentarily. Olympiodorus had been dispatched to appease Charaton after the death of a certain Donatus, who "was unlawfully put to death".[75] Historians such as E. A. Thompson have assumed that Donatus was a king of the Huns.[76] Denis Sinor, however, argues that given his obviously Roman name Donatus was likely a Roman refugee living among the Huns.[76] Where Olympiodorus met Charaton is also unclear: due to Olympiodorus's traveling by sea, they may have met somewhere on the Pontic steppe. Maenchen-Helfen and Sinor, however, believe it more likely that Charaton was located in Pannonia.[76][77] Also in 412, the Huns launched a new raid into Thrace.[77]
(source : History of Huns, Wikipedia)
고트족의 내용은 Jordanes에 의한 역사서에 의존했기 때문에 보다 상세한 내용이 서술된다. 그러나 6세기 Jordanes의 역사서는 당시 비잔티제국 황제인 Justinian을 위해 썼기 때문에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평가된다. 특히 Jordanes는 Christian이라서 그런지 비기독교인 훈족이나 고트족왕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아래 고트족에 대한 406-412기간에 대한 내용은 훈족의 서술내용과 마찬가지로 서로마제국에 대한 공격내용이 주를 이룬다.
407년 Alaric I은 Noricum(현재 오스트리아)에 진을 치고 서로마황제에게 4000파운드 금을 내놓지 않으면 총공격을 하겠다고 한다. Stilicho의 설득에 의해 서로마황제와 원로원이 이에 동의했으나, Stilicho가 Alaric I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두번이나 놓쳤다며 의심을 받고 (Stilicho는 Alaric에게 부탁하여, Alaric이 피렌체 외곽까지 진격해 온 고트족 장수 Radagaisus를 멈추게 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가족들까지 살해당하게 된다. 부하나 친척중 살아 남은 자들은 Alaric I 진영으로 합류한다. 급기야 Alatic I은 알려지지 않은 액수를 요구하고 Stilicho의 부하나 친척중 살아 남은 사람들의 송환을 요구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3만의 병력을 이끌고 Julian Alps를 넘어 로마로 진격한다. 로마로 와서 로마를 포위하고 아사작전(Strict Blockade)을 3일 동안 펼친다. 결국 기아에 직면한 시민들은 5천파운드의 금, 3만파운드의 은, 4천개의 실크전투복, 3천개의 분홍색으로 염색된 가죽, 3천파운드의 후추를 Ransom으로 제공한다. 4만명의 고트족노예도 돌려준다. 이렇게 첫번째 로마 포위는 끝난다.
409년 Alaric 과 동행한 Ataulf는 Honorius 황제의 폐위와 추방 (depose and exile)을 요구한다. Honorius는 Constantinople로 부터 온 40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는 배가 도착하자 Ravenna로 도망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Alaric은 Honorius황제를 폐위한다.
Ravenna와 협상이 잘되지 않자, Alaric은 410년 8월 다시 3차이자 마지막 Sack of Rome을 시작한다. 3일만에 결국 시민들은 황금으로 안전을 얻었다. Alaric은 떠나면서 황제의 누이, 그리고 성직자들을 데리고 갔다.
(Alaric took clerics and even the emperor’s sister, Galla Placidia, with him when he left the city. )
인질이 아닌가 한다. 아신왕의 항복시 왕제와 10명의 대신을 인질로 데려간 내용을 연상케 한다. 즉 410년에 이르러, 서로마 황제가 항복하는 모습이다.
Alaric은 이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남쪽 시실리섬으로 가려다 풍랑에 실패하고, 돌아 오는 길에 병으로 죽었다고 하며, 강에 묻었다고 한다. 시실리아 있는 왜의 임나성을 순행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 고트족에 대한 서술내용 (406-412)
Second invasion of Italy
Sometime in 406 and into 407, another assemblage of barbarians, consisting primarily of Vandals, Sueves and Alans, crossed the Rhine into Gaul while at the same time a rebellion—under a common soldier named Constantine—occurred in Britain and spread to Gaul.[55] Burdened by so many enemies, Stilicho's position was strained.
During this crisis in 407, Alaric again marched on Italy, taking a position in Noricum (modern Austria), where he demanded a sum of 4,000 pounds of gold lest he embark again on a full-scale invasion. At this point, Stilicho, whose earlier efforts to deal with the usurper Constantine had failed, convinced the Western Emperor Honorius and the Roman senate—who begrudgingly agreed[56]—to pay the sum and unleash Alaric's forces on their new enemy.[57] Despite how sensible Stilicho’s plan was in the grand scheme of things, since he had correctly evaluated the dangers, arguing for Alaric's intervention after having failed to contain the threat to Rome, fatally weakened his standing.[57] Twice Stilicho had allowed Alaric to escape his grasp and despite having also stopped Radagaisus, who made it all the way to the outskirts of Florence, the Roman general now came under suspicion.[58]
...............
In 408, Western Emperor Honorius ordered the execution of Stilicho and his family, in response to rumors that the general had made a deal with Alaric.[k] While Stilicho had been murdered, so too had his loyal supporters and many thousands of barbarian auxiliaries, along with their wives and children, those that remained alive or escaped joined Alaric at Noricum.[60] Rome had made itself more vulnerable as a result and Alaric now once again made demands on Honorius for an unknown sum of gold and for the return of the civilian dependent hostages belonging to his new followers—if they remained alive.[61]
When Alaric was rebuffed, he led his force of around 30,000 men—many newly enlisted and understandably motivated—on a march toward Rome to avenge their murdered families.[62] Crossing the Julian Alps in September 408, Alaric stood before the walls of Rome (now with no capable general like Stilicho as a defender) and began a strict blockade. No blood was shed this time; Alaric relied on hunger as his most powerful weapon. When the ambassadors of the Senate, entreating for peace, tried to intimidate him with hints of what the despairing citizens might accomplish, he laughed and gave his celebrated answer: "The thicker the hay, the easier mowed!" After much bargaining, the famine-stricken citizens agreed to pay a ransom of 5,000 pounds of gold, 30,000 pounds of silver, 4,000 silken tunics, 3,000 hides dyed scarlet, and 3,000 pounds of pepper.[63] Along came 40,000 freed Gothic slaves. Thus ended Alaric's first siege of Rome.[51]
After having provisionally agreed to the terms offered by Alaric for lifting the blockade, Honorius recanted; historian A.D. Lee highlights that one of the points of contention for the emperor was Alaric's expectation of being named head of the Roman Army, a post Honorius was not prepared to grant to Alaric.[64] When this title was not bestowed onto Alaric, he proceeded to not only "besiege Rome again in late 409, but also to proclaim a leading senator, Priscus Attalus, as a rival emperor, from whom Alaric then received the appointment" he desired.[64] Meanwhile, Alaric's newly appointed "emperor" Attalus, who seems not to have known the limits of his power or understand his dependence on Alaric, failed to take the latter's advice and lost the grain supply in Africa to a pro-Honorian comes Africae, Heraclian.[65] Then, sometime in 409, Attalus—accompanied by Alaric—marched on Ravenna and after receiving unprecedented terms and concessions from the legitimate emperor Honorius, refused him and instead, demanded that Honorius be deposed and exiled.[65] Fearing for his safety, Honorius made preparations to flee to Ravenna when a ship carrying 4,000 troops arrived from Constantinople, restoring his resolve.[64] Now that it was clear Honorius no longer needed to negotiate, Alaric (regretting his choice of puppet emperor) deposed him, perhaps to re-open negotiations with Ravenna.[66]
Sack of Rome
Main article: Sack of Rome (410)
Negotiations with Honorius might have succeeded had it not been for the influence of another Goth, Sarus, an Amali, and therefore hereditary enemy of Alaric and his house.[51] Why Sarus, who had been in imperial service for years under Stilicho, intervened at this moment remains a mystery, but Alaric interpeted this attack as Ravenna-directed and as bad faith from Honorius. No longer would negotiations suffice for Alaric, as his patience had reached its end, which led him to march on Rome for a third and final time.[67]
On 24 August 410, Alaric and his forces began the sack of Rome, an assault that lasted three days.[68] After hearing reports that Alaric had entered the city—possibly aided by Gothic slaves inside—there were reports that Emperor Honorius (safe in Ravenna) broke into "wailing and lamentation" but quickly calmed once "it was explained to him that it was the city of Rome that had met its end and not 'Roma'," his pet fowl.[68] Writing from Bethlehem, St. Jerome (Letter 127.12, to Principia)[l] lamented: "A dreadful rumour reached us from the West. We heard that Rome was besieged, that the citizens were buying their safety with gold . . . The city which had taken the whole world was itself taken; nay, it fell by famine before it fell to the sword."[68] Nonetheless, Christian apologists also cited how Alaric ordered that anyone who took shelter in a Church was to be spared.[69][m] When liturgical vessels were taken from the basilica of St. Peter and Alaric heard of this, he ordered them returned and had them ceremoniously restored in the church.[70] If the account from the historian Orosius can be seen as accurate, there was even a celebratory recognition of Christian unity by way of a procession through the streets where Romans and barbarians alike "raised a hymn to God in public"; historian Edward James concludes that such stories are likely more political rhetoric of the "noble" barbarians than a reflection of historical reality.[70]
According to historian Patrick Geary, Roman booty was not the focus of Alaric's sack of Rome but that he had come for needed food supplies.[71][n] Historian Stephen Mitchell asserts that Alaric's followers seemed incapable of feeding themselves and relied on provisions "supplied by the Roman authorities."[72] Whatever Alaric's intentions were cannot be known entirely, but Kulikowski certainly sees the issue of available treasure in a different light, writing that "For three days, Alaric’s Goths sacked the city, stripping it of the wealth of centuries."[67] The barbarian invaders were not gentle in their treatment of property as substantial damage was still evident into the sixth century.[70] Certainly the Roman world was shaken by the fall of the Eternal City to barbarian invaders, but as Guy Halsall emphasizes, "Rome’s fall had less striking political effects. Alaric, unable to treat with Honorius, remained in the political cold."[69] Kulikowski sees the situation similarly, commenting:
But for Alaric the sack of Rome was an admission of defeat, a catastrophic failure. Everything he had hoped for, had fought for over the course of a decade and a half, went up in flames with the capital of the ancient world. Imperial office, a legitimate place for himself and his followers inside the empire, these were now forever out of reach. He might seize what he wanted, as he had seized Rome, but he would never be given it by right. The sack of Rome solved nothing and when the looting was over Alaric’s men still had nowhere to live and fewer future prospects than ever before.[67]
Still, the importance of Alaric cannot be "overestimated" according to Halsall, since he had desired and obtained a Roman command even though he was a barbarian; his real misfortune was being caught between the rivalry of the Eastern and Western empires and their court intrigue.[73] According to historian Peter Brown, when one compares Alaric with other barbarians, "he was almost an Elder Statesman."[74] Nonetheless, Alaric's respect for Roman institutions as a former servant to its highest office did not stay his hand in violently sacking the city that had for centuries exemplified Roman glory, leaving behind physical destruction and social disruption, while Alaric took clerics and even the emperor’s sister, Galla Placidia, with him when he left the city.[70] More than the city of Rome itself was victim to the forces under Alaric, but the remainder of Italy, as Procopius (Wars 3.2.11–13) writing in the sixth-century later relates:
For they destroyed all the cities which they captured, especially those south of the Ionian Gulf, so completely that nothing has been left to my time to know them by, unless, indeed, it might be one tower or gate or some such thing which chanced to remain. And they killed all the people, as many as came in their way, both old and young alike, sparing neither women nor children. Wherefore even up to the present time Italy is sparsely populated.[75]
Whether Alaric's forces wrought the level of destruction described by Procopius or not cannot be known, but evidence speaks to the subsequent population decrease, as the number of people on the food dole dropped from 800,000 in 408 to 500,000 by 419.[76] Rome's fall to the barbarians was as much a psychological blow to the empire as anything else, since some Romans citizens saw the collapse resultant from the conversion to Christianity, while Christian apologists like Augustine (writing City of God) responded in turn.[77] Lamenting Rome's capture, famed Christian theologian Jerome, wrote how "day and night" he could not stop thinking of everyone's safety, and moreover, how Alaric had extinguished "the bright light of all the world."[78] Some contemporary Christian observers even saw Alaric—himself a Christian—as God's wrath upon a still pagan Rome.[79]
Not only had Rome's sack been a significant blow to the Roman people's morale, they had also endured two years' worth of trauma brought about by fear, hunger (consequent the blockades), and illness.[80] However, the Goths were not long in the city of Rome, as only three days after the sack, Alaric marched his men south to Campania, from where he intended to sail to Sicily—probably to obtain grain and other supplies—when a storm destroyed his fleet.[81] During the early months of 411, while on his northward return journey through Italy, Alaric took ill and died at Consentia in Bruttium.[81] His cause of death was likely fever,[82][o] and his body was, according to legend, buried under the riverbed of the Busento in accordance with the pagan practices of the Visigothic people. The stream was temporarily turned aside from its course while the grave was dug, wherein the Gothic chief and some of his most precious spoils were interred. When the work was finished, the river was turned back into its usual channel and the captives by whose hands the labor had been accomplished were put to death that none might learn their secret.[83][p]
(source : Alaric I, Wikipedia)
백제 삼국사기 기록은 거의 없다. 408년 왜에 지원을 받은 서술만 있고 이후 408-415까지 공백이다. 아마도 일제의 농간이 아닌가 한다.
- 405-412 백제 기록
五年 왜국에서 야명주를 보내오다 (AD 408)
408-415 : 7년 공백
태자 시절 이름은 영이었다. 부왕인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한 후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뒤로는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아신왕은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태자 영(전지왕)을 볼모로 보내게 된다. 그리하여 태자 영은 397년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일본에 머물게 된다.
405년 아신왕이 갑작스레 승하했다. 갑자기 그가 승하한 것은 광개토대왕에게 연달아 털리고 내외적으로도 막장 가도를 달리는 와중에 발생한 국내 정쟁으로 인해 시해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자 영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아신왕의 동생인 부여훈해가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섭정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아신왕의 막내 동생인 부여설례가 진씨 세력과 모의해 쿠데타를 일으켜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왜에서 귀국하던 태자 영은 충신 해충(解忠)으로부터 숙부 설례가 찬탈했다는 국내 정세 변화를 전해들었고,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왜인의 호위를 받으며 어느 외딴 섬에 머물렀다. 진씨 세력의 지원을 받은 설례와 태자 영을 지지하는 해씨 세력 간의 정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해씨 국인(귀족)들이 설례를 제거하며 대치 상황을 끝냈고, 이후 태자 영이 도성으로 돌아와 전지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해씨 세력의 지원 덕분에 전지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전지왕 즉위 후 해씨 세력 인사들이 대거 등용된다. 전지왕은 귀국할 때 도와주었던 해충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의 조(租) 1,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内臣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측 친정인 해씨 집안을 국정에 맞아들이게 되었다. 전지왕을 왕으로 옹립한 해씨 세력들은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해씨 세력에 의해 옹립된 국왕 전지왕의 실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아신왕 때까지 권세를 누렸던 외척 진씨 집안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6]
한편 전지왕은 즉위 과정에서 해씨 세력과 더불어 동생 여신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는데, 그리하여 즉위 후 여신을 중용하여 상좌평으로 임명했다. 이는 최초의 상좌평 임명이었다.
(자료 : 전지왕, 나무위키)
《삼국사기》 전지왕 본기
一年秋九月 전지왕이 즉위하다 (AD 405)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AD 406)
二年春二月 진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年秋九月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다 (AD 406)
三年春二月 여신을 내신 좌평에 임명하다 (AD 407)
四年春一月 여신을 상 좌평에 임명하다 (AD 408)
五年 왜국에서 야명주를 보내오다 (AD 408)
408-415 : 7년 공백
(자료 : 백제 진지왕, 나무위키)
아래 서로마제국의 당시 상황 (406-412) 서술은 고트족의 서술내용과 유사하다. 단 서로마 황제와 Alaric이 평화협상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로 식량을 구하러 간 Attalus (고트족 서술에서 나오는 황태자 Ataulf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Attila와 비슷한 이름이다)가 아프리카의 로마편 지역군에 의해 패배하여 식량을 구하지 못하자, Honorius가 협상에서 배짱을 부리니, Alaric의 로마 포위가 시작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즉 아프리카에 있는 왜의 세력 지원을 의미한다고 판단된다.
- 로마제국의 서술 (406-412)
The situation in Britain was even more difficult. The British provinces were isolated, lacking support from the Empire, and the soldiers supported the revolts of Marcus (406–407), Gratian (407), and Constantine III. Constantine invaded Gaul in 407, occupying Arles, and while Constantine was in Gaul, his son Constans ruled over Britain.[15] By 410, Britain was effectively told to look after its own affairs and expect no aid from Rome.[16]
There was good reason for this as the western empire was effectively overstretched due to the massive invasion of Alans, Suebi and Vandals who, although they had been repulsed from Italy in 406, moved into Gaul on 31 December 406,[15] and arrived in Hispania in 409. In early 408, Stilicho attempted to strengthen his position at court by marrying his second daughter, Thermantia, to Honorius after the death of the Empress Maria in 407[17] making Honorius the last Western Roman Emperor to have multiple wives. Another invasion by Alaric was prevented in 408 by Stilicho when he forced the Roman Senate to pay 4,000 pounds of gold to persuade the Goths to leave Italy.[18]
In 410, during Honorius's reign over the western Roman Empire, Rome was sacked for the first time in almost 800 years.[2]....
In 409, Alaric returned to Italy to claim more gold and land to settle in, as feudatory vassals of the Empire, which Stilicho had promised him. Honorius refused to fulfill his former general's promises and Alaric marched on Rome,[22] which bought him off after a short siege with Rome on the verge of famine.
A palace revolution in Honorius' court led meanwhile to a change of ministers, and those hostile to the Goths were replaced by officers favorable to Alaric, who began peace negotiations. While the embassy was absent, a new change occurred at Ravenna, and Honorius disclaimed the peace which was on the verge of being concluded.[23] The enraged Alaric returned to Rome and forced the Senate to elect Priscus Attalus as emperor, who ratified Alaric's former treaty with Stilicho.[24]
In 410, the Eastern Roman Empire sent six legions (6,000 men; due to changes in tactics, legions of this period were about 1,000 soldiers, down from the 6,000-soldier legions of the Republic and early Empire periods)[25] from Ravenna to aid Honorius, but Alaric ambushed the legions on the way, and only a handful of them reached Rome.[26] To counter Attalus, Honorius tried to negotiate with Alaric in addition to restricting grain shipments to Rome from North Africa. Attalus dispatched an army to conquer Africa and restore the grain supply to Rome, but the governor, Heraclian, who was loyal to Honorius, wiped out this force as soon as it landed on the coast.[27] As Rome was dependent on North African grain for sustenance, the populace was faced with the prospect of famine, and they blamed Attalus for the impending calamity. Growing desperate, Attalus searched for means of pacifying the people, but found himself, in consequence of conciliatory expenditures, incapable of satisfying his debt to Alaric, and thus alienated both Romans and Goths. In turn he came out to be exploited in political terms.
Confronted with the increasing unpopularity and truculence of Attalus, Alaric dethroned him in 410 and proposed to renew negotiations with Honorius.[28] Honorius, overconfident at Attalus' fall and the victory of his general Heraclian over Attalus' African expeditionary force, refused negotiation, and declared Alaric the eternal enemy of the Republic.[29] The infuriated Alaric turned on the defenseless Rome and sacked the city.
(source : Honorius, Western Empire, Wikipedia)
406-412 기간동안 신라의 내용은 별 내용이 없다. 407년 동쪽과 남쪽으로 왜가 침입했다는 기록뿐이다. 그리고 408-412년 4년동안은 공백이다. 김부식의 작품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미화작업의 결과로 본다. 407년 왜가 침입했을 때 격퇴했으면 물리쳤다 할 것인데, 그럴 만한 사정은 아니고,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고 말하기도 창피하니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다. 412년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는 것은 이미 고구려의 도움을 받았거나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삼국사기 신라의 내용 (406-412)
五年秋七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五年冬十月 서울[14]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406)
五年冬十一月 얼음이 얼지 않다
六年春三月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입하다 (AD 407)
年夏六月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다 (AD 407)
七年春二月 대마도 군영을 정벌하려다 그만두다 (AD 408)
408-412 : 4년 공백
十一年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다 (AD 412)
(자료 : 실성마립간, 나무위키)
그런데 신라의 내용이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는 유혹을 느끼게 한다. 400년 살별이 동쪽에서 나타난다, 407년 왜인이 동쪽 변경, 남쪽 변경을 침입했다, 408년 왜의 대마도 군영을 정벌하려다 그만 두었다는 삼국사기 서술이 있다. 우연히 400년은 고트족 Alaric왕이 이태리 동북부에 진격하고, 408년에는 남쪽 시실리섬에 가려다 풍랑을 만나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서로마가 신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서로마 황제를 폐위시키는 것도 약 10년의 연대 차이가 나지만 실성왕으로 교체하는 고구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후 이태리는 고트족 장수(고구려)로 보이는 Odoacer에 의해 지배된다. 후일 백제가 개로왕시 475년 망할 때 원군으로 다른 백제군 지원군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역사를 기억한다. (페르시아에서 오기에는 수군으로 오기 용이하지 않다.) 위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위례성은 Illyria지역 (Dalmatia지역)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서기에는 475년 개로왕의 백제가 망할 때, 위례성이 떨어졌다고 했다. 즉 동로마의 모습이 더 백제에 가까운 기록을 보인다. 그리고 신라가 이미 왜에 볼모를 보내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의 침입이 있었다. 또한 신라 역사에서 왜의 침입이 유난히 많다. 페르시아 역사에서는 이점이 설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마가 신라라면 왜의 많은 침입이 용이하게 설명될 수 있다. 인도 동부 보드가야에 있는 사찰에서, lama-silla, Mangla-Gauri를 신봉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신화적인 라마야나도 신봉 대상 중의 하나이다. 라마야나 설화에는 Lama와 Ravena가 등장한다. 왠지 로마와 라벤나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신라역사에서 475년 전후로 망했다는 역사는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서신라, 동신라의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대한 사료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탐라국 역사 연구에서 밝혔지만, 왜는 인도양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백제의 22담로 중 하나로, 우리나라, 일본, 동남아시아 섬들, 인도 남부 타밀제국, 심지어 캘리포니아 북쪽의 부상국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페르시아 신라도 동남부 해안에 왜의 출물이 많을 수 있다. 그런데 페르시아 역사에서는 아직 이러한 왜에 대한 기록을 아직 별로 보지 못했다. 여하튼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래 사산왕조 내용도 신라와 같은 미화작업의 결과로 판단된다는 내용이 보인다.
-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서술내용 (406-412)
During Yazdegerd I's rule, his western neighbours in the Eastern Roman Empire were in turmoil; the Ostrogoths were raiding the Balkans, the Franks had begun a rebellion, a civil war was raging, and the eastern provinces were rioting.[1] Instead of exploiting the empire's weakened state, Yazdegerd I had Roman Christian prisoners who were saved after an Iranian victory over the Huns returned to Roman territory.[1] The Roman emperor Arcadius (r. 383–408) asked Yazdegerd for aid to guarantee the succession of his young son, Theodosius, as a result of the shah's generosity.[1][8]
This account is only mentioned by the 6th-century Roman historian Procopius and was questioned by his fellow Roman historian Agathias, who wrote that the report was "on the lips" of "Roman commoners and aristocrats alike"[9] but was absent from contemporary sources.[8] Yazdegerd I agreed to act as Theodosius' protector, however, and threatened to wage war against whoever sought to put him in danger.[8][1] According to Procopius, "Loyally observing the behests of Arcadius, [Yazdegerd] adopted and continued without interruption a policy of profound peace with the Romans, and thus preserved the empire for Theodosius."[1] The shah sent Antiochus, "a most remarkable and highly educated advisor and instructor", to educate Theodosius.[1]
(source : Yazdegerd I (399-420), Wikipedia)
이상으로 다각도로 살펴 본 자료를 바탕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광개토태왕은 로마로 진격하여 동로마, 서로마제국의 황제들의 항복을 받고, 인질들을 데리고 철수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아신왕의 항복과 인질의 제공을 보여준다고 본다. 단 시기상으로 동로마제국은 396년 시기로 아신왕의 항복시기와 거의 같은데, 서로마제국 황제는 410년 항복하며 인질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라의 수도로 추정되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크네시폰에의 진격에서도 보듯이, 광개토태왕의 신라지원 왜구 퇴치전쟁이 있었고, 아르메니아도 진격한 것을 보면, 가야세력의 퇴치도 있던 것으로 분석된다. 아르메니아의 가야퇴치가 '가라'성까지 가서 공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의 임나성은 필자는 과거에 시실리섬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는데, 서로마제국 공격시 410년 시실리아섬에 가려 했다는 기록이 이를 의미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반도까지 진격한 것은 이 근처의 왜의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판단되는데, 아직 구체적 임나성 가능성은 사이프러스섬외에는 이 지역에서 찾지 못했다. 과거 미케네문명이후 도이 즉 왜로 보이는 Dorians은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반도, 크레타섬 등이 그 근거지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450년대이후 반달족이 왜의 근거지로 보이는 북아프리카, 스페인 동쪽에 있는 섬, 샤르데나섬, 시실리, 펠로폰네소스반도지역, 크레타섬 등을 공격한 것도 상기하고자 한다.
본 글에서 의문이 되는 사항들은, 앞으로 고구려의 장수왕 시기, 문자왕 시기를 훈족과 고트족의 움직임에 비추어 더 분석해 보면, 의문사항에 대한 보다 확실한 해답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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