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왕국은 대월지인가 왜국인가?

2023. 3. 13. 02:24한국사/기타

지난 글에서 키메리언과 Dardanians, Trojans, Etruscans 등과의 연관성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리고 로마의 포에니전쟁이 로마지역의 세력이 북아프리카에 진출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조선왕 준왕의 한(韓)지역에의 남하와 고구려 협보의 남하에 따른 구야한국이 북아프리카에 있을 수 있다는 분석을 하였다. 이제 북아프리카 지역이 이러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북아프리카의 Berber(유목민)족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현재 바스크 및 샤르디니아가 가장 근접했다 한다. 샤르디니아는 과거부터 북아프리카와 함께 페니키아문명권이었으니 이해가 가나, 바스크지역이 거론된 것은 다소 의외이다. 필자는 바스크지역이 여러 모로 한민족과 가까운 모습을 확인했다. 바스크지역은 서고트왕국이 사라센 아랍세력에 망하면서, 그 지도층이 피난 갔던 지역이라 했다. 필자는 고트왕국을 고구려라 추정했다. 사라센 아랍은 신라라 추정했다. 즉 베베르족이 한민족과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Berbers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아래 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Berbers는 barbarian에 해당하는 말로 이해되었다 한다. 유럽에서 Barbarian을 말할 때는 로마시에는 로마제국 북쪽의 유목민족인 게르만족을 뜻하기도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서로 오십보 백보인 것으로 보이는데, 서양사가들이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즉 베베르족은 고구려와 같은 유목민족이라는 것이다. 남으로 간 준왕이나 협보를 연상케 한다.

 

Berbers족은 Numidian, Mauri, Moor, Libu족들과 관련이 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그 중에서 누미디아왕국(BC 202- BC 46)은 현재의 알제리아에서 튀니지아일부를 지역으로 하는 고대왕국이었다. 이 누미디아왕국의 좌측에는 Mauretania왕국(현재 모로코와 일부 알제리아 지역)이 있었다. 우측에는 로마지역이 된 튀니지아의 카르타고가 있었고, 남쪽에는 사하라사막이 있다.

 

 

"While Berber is more widely known among English-speakers, its usage is a subject of debate, due to its historical background as an exonym and present equivalence with the Arabic word for "barbarian."[36][37][38][39]

The Numidian, Mauri or Moor, and Libu populations of antiquity are typically understood to refer to approximately the same population as modern Amazigh or Berbers.......

 

Numidia (202 – 46 BC) was an ancient Berber kingdom in modern Algeria and part of Tunisia. It later alternated between being a Roman province and being a Roman client state. The kingdom was located on the eastern border of modern Algeria, bordered by the Roman province of Mauretania (in modern Algeria and Morocco) to the west, the Roman province of Africa (modern Tunisia) to the east, the Mediterranean to the north, and the Sahara Desert to the south. Its people were the Numidians."

 

(source : Berber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블로그(www.paul-park.com), 카테고리, 아프리카)

 

 

북아프리카의 과거 역사를 보면, 카르타고 외에 누미디아와 모레타니아왕국이 있었다. 누미디아와 모레타니아 왕국은 베베르족 왕국으로, 페니키아 문명과 합류한 카르타고와는 다른 성격의 왕국이다. 이들 또한 기원전부터 있던 왕국으로 전설적으로는 누미디아 Atlas왕이 기원전 6세기에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역사는 기원전 3세기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전쟁 시기부터 자세하게 전달된다. 따라서 이들을 살펴 봄으로써, 튀니지아의 카르타고왕국과는 다른 이들이 구야한국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즉 금관가야는 허황옥과 결합한 김수로왕의 세력이므로, 페니키아 문명과 결합한 튀니지아의 카르타고라 판명되지만, 이들과 다른 전통적인 베르베르족의 왕국인 누미디아왕국과 모레타니아왕국이 오히려 협보가 내려가 세운 구야한국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미디아왕국을 먼저 살펴 보고, 이어서 모레타니아왕국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9. Numidia 왕국 : BC 3세기 - BC 40

 

누미디아왕국은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북아프리카의 상당히 넓은 부분을 차지한 왕국이다. 누미디아왕국은 동쪽의 마실리(Massylii)와 서쪽의 마세실리(Masaesyli)로 나누어진다. 누미디아왕국의 좌측에는 무어(Moors)인이라 불리는 마우리(Mauri)족의 모레타니아왕국이 있었고, 우측에는 카르타고가 있었다.

 

 

Berber kingdoms in Numidia, c. 220 BC (green: Masaesyli under Syphax; gold: Massyli under Gala, father of Masinissa; further east: city-state of Carthage). (source : Wikipedia)

 

Numidia(202-40 BC)는 아프리카 북서쪽의 누미디언의 고대왕국으로 원래는 현재의 알제리아지역에 있었는데, 더 영역을 넓혀가서 동쪽의 튀니지아, 리비아와 서쪽의 모로코 일부를 차지했었다. 포에니전쟁기간중에는 동서로 나뉘어 로마편과 카르타고편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였고, 줄리어스 시저와 폼페이의 전쟁 중에 서로 편이 다른 곳으로 싸우며, 로마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아래 자료 참조)

 

"Numidia (Berber: Inumiden; 202–40 BC) was the ancient kingdom of the Numidians located in northwest Africa, initially comprising the territory that now makes up modern-day Algeria, but later expanding across what is today known as Tunisia, Libya, and some parts of Morocco. The polity was originally divided between the Massylii in the east and the Masaesyli in the west. During the Second Punic War (218–201 BC), Masinissa, king of the Massylii, defeated Syphax of the Masaesyli to unify Numidia into one kingdom. The kingdom began as a sovereign state and later alternated between being a Roman province and a Roman client state.

 

Numidia, at its largest extent, was bordered by Mauretania to the west, at the Moulouya River,[3] Africa Proconsularis to the east, the Mediterranean Sea to the north, and the Sahara to the south. It was one of the first major states in the history of Algeria and the Berbers.

 

 

1) 누미디아왕국의 역사 (BC 220 - BC 112)

 

 

The Numidian mausoleum of El-Khroub photographed in 2000

 

누미디아는, 그리스 역사가들이 말하기를, 유목민이라는 Nomads(Nomades)에서 유래했다 한다. 즉 이들은 유목민 출신이라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Greek historians referred to these peoples as "Νομάδες" (i.e. Nomads), which by Latin interpretation became "Numidae" (but cf. also the correct use of Nomades).[4] Historian Gabriel Camps, however, disputes this claim, favoring instead an African origin for the term.[5]

 

The name appears first in Polybius (second century BC) to indicate the peoples and territory west of Carthage including the entire north of Algeria as far as the river Mulucha (Muluya), about 160 kilometres (100 mi) west of Oran.[6]

 

누미디언은 2차 포에니전쟁시에 동쪽의 마실리는 카르타고편에, 서쪽의 마세실리는 로마편에 서서 싸웠다. 이들은 유목민이라서 말타기에 능해 기병이 큰 역할을 하였다.

 

The Numidians were composed of two great tribal groups: the Massylii in eastern Numidia, and the Masaesyli in the west. During the first part of the Second Punic War, the eastern Massylii, under their king Gala, were allied with Carthage, while the western Masaesyli, under king Syphax, were allied with Rome. The Kingdom of Masaesyli under Syphax extended from the Moulouya river to Oued Rhumel.[7]

 


Map of Numidia at around 220 BC[8]

 

그러나 기원전 206년에는 새로운 왕들이 동맹을 맞바꾸었다. 즉 동쪽의 마실리의 Masinissa왕은 로마와 동맹을 맺고, 서쪽의 마세실리왕 시팩스(Syphax)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하였다.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나자, 누미디아는 마실리 하나로 통합되었다. 또한 기원전 148년에는 카르타고의 남쪽도 차지하게 되었다. 마시니사왕은 서쪽으로 아틀라스산맥 남쪽 Fezzan까지 진출했다. (아래 자료 참조)

 

However, in 206 BC, the new king of the eastern Massylii, Masinissa, allied himself with Rome, and Syphax of the Masaesyli switched his allegiance to the Carthaginian side. At the end of the war, the victorious Romans gave all of Numidia to Masinissa of the Massylii.[6] At the time of his death in 148 BC, Masinissa's territory extended from the Moulouya to the boundary of the Carthaginian territory, and also southeast as far as Cyrenaica to the gulf of Sirte, so that Numidia entirely surrounded Carthage (Appian, Punica, 106) except towards the sea.[9] Furthermore, after the capture of Syphax the king in modern day Morocco with his capital based in Tingis, Bokkar, had become a vassal of Massinissa.[10][11][12] Massinissa had also penetrated as far south beyond the Atlas to the Gaetuli and Fezzan was part of his domain.[13][14]

 

기원전 179년, 마시니사왕은 Delos (남 에게해 중앙의 섬)주민으로부터 금관을 받았다. 그들에게 식량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시니사왕의 동상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Delos애 세워졌다. 또한 Rhodes로부터 온 원주민에 의해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의 아들들은 또한 Delos섬에 그의 동상을 세웠고, Bithynia왕, Nicomedes도 마시니사 동상을 세웠다. (아래 자료 참조)

 

 

중앙의 Delos섬 위치 (파란색)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Anatolia북쪽에 있는 Bithynia왕이 Masinissa왕 동상을 세운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 누미디아와 교역이 있었다고 해석된다. Rhodes 섬도 아나톨리아 바로 밑에 있는 섬이다. 즉 아나톨리아 지역과 누미디아 지역과 무역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해석은 아직 잘 모르겠다. 지중해에 퍼져 있는 Sea peoples의 상호 관계일 수 있다. 그러나 누미디아왕국이 기마민족이라는 것은 sea peoples과의 연관성에 대해 의문표를 던진다.

 

 

15세기 지도에서 Bithynia 위치 (보스포러스해협 가까이 있다) (자료 : 위키피디아)

 

In 179 B.C. Masinissa had received a golden crown from the inhabitants of Delos as he had offered them a shipload of grain. A statue of Masinissa was set up in Delos in honour of him as well as an inscription dedicated to him in Delos by a native from Rhodes. His sons too had statues of them erected on the island of Delos and the King of Bithynia, Nicomedes, had also dedicated a statue to Masinissa.[15]

 

마시니사왕이 BC 148년 죽은 후, 그의 아들 Micipsa에 계승되었고, BC 118년 Micipsa가 죽은 후 그의 두아들 Hiempsal과 Adherbal에게 계승되었는데, 마시니사의 손자(서자의 손), Jugurtha가 Hiempsal과 계승전쟁에서 이겼다. Jugurtha는 누미디언사이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한다. 그는 이어 Adherbal과 전쟁을 했다. (아래 자료 참조)

 

After the death of the long-lived Masinissa around 148 BC, he was succeeded by his son Micipsa. When Micipsa died in 118 BC, he was succeeded jointly by his two sons Hiempsal I and Adherbal and Masinissa's illegitimate grandson, Jugurtha, who was very popular among the Numidians. Hiempsal and Jugurtha quarrelled immediately after the death of Micipsa. Jugurtha had Hiempsal killed, which led to open war with Adherbal.[16]

 

 

2) 로마와의 전쟁(BC 112 - BC 104) (Jugurthine War)

 

BC 112년 Jugurtha는 Adherbal과 전쟁 중에, 그를 도우는 로마 상인 몇몇을 죽였다. 로마와의 짧은 전쟁 후, Jugurtha는 항복하고 매우 좋은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는 매수에 의한 부정으로 의심되어, 현지 로마 사령관은 로마로 소환되고, Jugurtha도 소환되었다. 그러나 로마에서 그의 과거 난폭하고 잔인함이 널리 알려지자, 누미디언 라이벌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았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러나 윗글에서 Jugurtha는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했다. 상기 내용은 로마사가들이 왜곡한 내용일 수 있다고 본다.

 

By 112 BC, Jugurtha resumed his war with Adherbal. He incurred the wrath of Rome in the process by killing some Roman businessmen who were aiding Adherbal. After a brief war with Rome, Jugurtha surrendered and received a highly favourable peace treaty, which raised suspicions of bribery once more. The local Roman commander was summoned to Rome to face corruption charges brought by his political rival Gaius Memmius. Jugurtha was also forced to come to Rome to testify against the Roman commander, where Jugurtha was completely discredited once his violent and ruthless past became widely known, and after he had been suspected of murdering a Numidian rival.

 

결국 로마공화국과 누미디아 사이에 전쟁이 났고, 전쟁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이는 누미디아가 상당히 강력한 대응을 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결국 로마 장군 Marius는 Sulla Quaestor를 이웃나라인 모레타니아에 보내 Jugurtha를 지원하지 못하게 했다. 모레타니아의 Bocchus I의 도움으로, Sulla는 Jugurtha를 생포하고 전쟁은 끝난다. (아래 자료 참조)

 

이는 누미디아가 모레타니아와 동맹을 맺고 로마공화국과 전쟁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모레타니아가 동맹을 배신하고 로마공화국과 결탁하여 Jugurtha가 생포된다.

 

War broke out between Numidia and the Roman Republic and several legions were dispatched to North Africa under the command of the Consul Quintus Caecilius Metellus Numidicus. The war dragged out into a long and seemingly endless campaign as the Romans tried to defeat Jugurtha decisively. Frustrated at the apparent lack of action, Metellus' lieutenant Gaius Marius returned to Rome to seek election as Consul. Marius was elected, and then returned to Numidia to take control of the war. He sent his Quaestor Sulla to neighbouring Mauretania in order to eliminate their support for Jugurtha. With the help of Bocchus I of Mauretania, Sulla captured Jugurtha and brought the war to a conclusive end. Jugurtha was brought to Rome in chains and was placed in the Tullianum.[17]

Jugurtha was executed by the Romans in 104 BC, after being paraded through the streets in Gaius Marius' Triumph.[18]

 

 

3) 분리된 왕국 (BC 104 - BC 44)

 

BC 104년 Jugurtha가 죽은 후, 누미디아 서쪽끝은 모레타니아왕 Bocchus I에게 주어진다. (로마공화국에 협력한 대가일 것이다. ) 그러나 왕국은 지역 왕자에 의해 계속 통치된다. BC 88년 Gauda왕의 죽음이후, 누미디아 왕국은 동쪽의 보다 큰 왕국과 서쪽의 보다 작은 왕국(Petite Kabylie, 산악지형지역)으로 나뉘어지며, 서쪽의 왕국은 동쪽왕국의 속국일 수 있다. (동쪽 왕국은 주화를 발행하는데, 서쪽은 그렇지 못한 것을 두고 추정함). (아래 자료 참조)

 

After the death of Jugurtha, the far west of Numidia was added to the lands of Bocchus I, king of Mauretania.[6] A rump kingdom continued to be governed by native princes.[6] It appears that on the death of King Gauda in 88 BC, the kingdom was divided into a larger eastern kingdom and a smaller western kingdom (roughly the Petite Kabylie). The kings of the east minted coins, while no known coins of the western kings survive. The western kings may have been vassals of the eastern.[19][20]

 

시저와 폼페이의 내란 전쟁은 BC 46년 독립된 누미디아 왕국의 종말을 초래한다. Sava강과 Ampsaga강사이의 서쪽 왕국은 Bocchus II에 넘어 가고, 동쪽 왕국은 로마 지방이 된다. 서왕국의 일부와 Cirta도시는 짧은 기간동안 Publius Sittius하에 자주성을 가진다. BC 44-40 BC사이에, 누미디아왕 Arabio는 Sittius를 죽이고 고대서왕국을 차지한다. 그러나 Arabio는 로마 내전에 관여되어 죽임을 당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civil war between Caesar and Pompey brought an end to independent Numidia in 46 BC.[6] The western kingdom between the Sava (Oued Soummam) and Ampsaga (Oued-el-Kebir) rivers passed to Bocchus II, while the eastern kingdom became a Roman province. The remainder of the western kingdom plus the city of Cirta, which may have belonged to either kingdom, became briefly an autonomous principality under Publius Sittius. Between 44 and 40 BC, the old western kingdom was once again under a Numidian king, Arabio, who killed Sittius and took his place. He involved himself in Rome's civil wars and was himself killed.[20]

(source : Numid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블로그(blog.naver.com/lainfos), 카테고리, 아프리카)

 

 

4) 로마공화국 말기 혼란기이후의 누미디아 역사(BC 44 - AD 40)

 

위에서 간략히 넘어간 로마공화국 말기 시저와 폼페이의 갈등속에서 누미디아왕국도 연관된다 했다. 이에 대해서 다른 자료를 이용해 보다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이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어떻게 관련있을까 고민하는 필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협보의 구야한국이 아프리카로 갔다면 이시기(AD 3)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In c. 44 BCE a Numidian warrior named Arabio, who had fought for Pompey and fled to Spain, returned and took the western regions from Bocchus II, had Sittius executed, and re-founded the kingdom of Numidia. He could not keep from becoming embroiled in Rome's conflicts following Caesar's assassination, however, and was executed by Sextus Pompey, son of Pompey the Great (warring against the forces of Mark Antony and Octavius Caesar), who suspected him of disloyalty.

 

(번역) 기원전 44년 Arabio라 불리는 누미디언 전사는 폼페이를 위해 싸웠다가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그후 다시 돌아와 Bocchus II로부터 서쪽지역을 취하고 Sittius를 죽이고 누미디아왕국을 재건했다. 시저가 암살 된 후, 로마의 혼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어서, 결국 폼페이의 아들인 Sextus Pompey에게 살해 당했다. (폼페이는 Mark Antony와 Octavius Caesar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였다.) Sextus Pompey는 Arabio의 충성에 의심을 하였다.

After Sextus was executed, Octavius and Antony fought each other and, following Antony's defeat at Actium in 31 BCE, Octavius reorganized the provinces of Rome. After Julius Caesar's forces defeated Pompey's at the Battle of Thapsus, and Juba I had committed suicide, Juba's son (known as Juba II, c. 29 BCE - c. 23 CE) was taken to Rome to participate in Caesar's triumph. He remained in Rome where he was educated according to Roman custom and became completely Romanized. He went on military campaigns with the young Octavius and was instrumental in his victory at Actium. As part of Octavius' reformation, therefore, it was natural that Juba II would be given Numidia c. 29 BCE.

 

(번역) Sextus가 처형된후, 옥타비우스와 안토니는 서로 싸웠고, 안토니는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패배했다. 옥타비우스는 로마의 지방을 재조직했다. 줄리우스 시저의 군대가 Thapsus전투에서 폼페이를 패배시킬 때, Juba I은 자결하고, Juba의 아들, Juba II (BC 29-AD 23)가 로마로 보내져 시저의 개선행사에 참여했다. 그는 로마에 머무르며, 로마의 관습에 따라 교육받고 완전히 로마화 되었다. 그는 젋은 옥타비우스의 원정에 참여하여 악티움에서의 승리에 기여했다. 따라서 옥타비우스의 재구성에서 Juba II에게 기원전 29년 누미디아가 주어진 것은 당연했다.

 

즉 Juba I, Juba II 모두 줄리우스 시저편에 서서 싸웠고, 시저가 죽은후에는 옥타비우스편에 서서 싸웠다. 그래서 그 보상으로 Juba II에게 누미디아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Juba II가 로마에서 교욱받고 완전히 로마화 되었다는 표현에 주목한다. 협보가 주몽과 같이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몽이 울리우스 시저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풀타크 같은 이는 워낙 로마사에 미화작업을 하여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은 간다. 앞으로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고구려와 관련하여 검토하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 따라서 협보는 주몽과 같이 있던 만큼, 로마화 되었다는 Juba II가 협보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Juba II는 52년을 재위한다. 너무 길다. 즉 두사람의 통치를 하나로 묶은 것일 수 있다.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장수왕의 경우도 같다) 그러므로 AD 3년 협보가 이동했다 하므로, 그 이후의 Juba II는 협보의 누미디아일 수 있다. 또한 Juba II는 기원전 27년 서쪽의 Mauretania로 수도를 옯겼다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협보는 이베리아반도 연안을 통해 내려가서 모레타니아 (지금의 모로코지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후 동쪽으로 누미디아쪽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본다. 이시기가 Juba II 시기가 아닌가 한다. Juba는 유바 <->엽바 <-> 엽보 <-> 협보 로 생각할 수 있다. (서쪽의 Mauretania는 mauri족이라 한다. 마우리<->마리 즉 주몽과 함께한 '마리'로 볼 수 있다. 마리, 협보, 이들이 부여에서 주몽과 함께하였다 하는데, 이 북아프리카 지역이 서부여, 남부여지역일 수도 있다. 이는 대단히 큰 주제이므로 별도로 연구하고자 한다. )

UNDER THE REIGN OF JUBA II, NUMIDIAN ART, SCIENCE, & CIVILIZATION FLOURISHED, EVEN AFTER HE MOVED HIS CAPITAL TO MAURETANIA.

Juba II의 치세하에, 누미디언의 예술, 과학, 문명이 꽃을 피운다. 그가 모레타니아로 수도를 옯긴 후도 마찬가이지다.

Juba II married Cleopatra Selene II, daughter of Mark Antony and Cleopatra VII, who encouraged Egyptian art and architecture in the kingdom. The pyramids of Numidia date from this period as does the Royal Mausoleum which still stands in Tipasa Province, Algeria. Juba II was a highly respected scholar and author of a number of works cited regularly by later ancient historians. He initiated no military expeditions but is said to have sponsored a number of scholarly missions of exploration and possibly archaeology. Under his reign, Numidian art, science, and civilization flourished, and this continued even after he moved his capital to Mauretania c. 27 BCE. He made his son, Ptolemy (c. 23-40 CE), co-ruler c. 21 CE and tutored him in how to reign in accordance with Roman customs.

(번역) Juba Ii는 Mark Antony와 Cleopatra VII의 딸, Cleopatra Selene II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이집트 예술과 건축을 이 왕국에서 권장했다. 누미디아의 피라미드는 이시기로부터인데, 알제리아의 Tipasa지방에 아직도 남아 있는 Royal Mausoleum도 마찬가지이다. Juba II는 매우 존경받는 학자이고 그후 고대 역사가들에 의해 인용되는 많은 작품들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군사적 원정은 하지 않고, 많은 학문적 탐구 그리고 아마도 고고학에 후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치하에 누미디언 예술, 과학, 문명이 꽃을 피웠고, 이는 기원전 27년 모레타니아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그의 아들 Ptolemy(AD 23-40)가 AD 21년부터, 같이 통치하게 했고, 로마의 관습에 맟추어 통치하는 법을 가르쳤다.

 

협보는 오이, 마리와 달리 행정가였다 한다. 즉 학문의 조예가 깊을 수 있다. 상기 Juba II가 학자이며, 많은 작품을 쓴 작가였다는 기록이 협보를 연상하게 한다. 고고학 연구도 후원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일 것이다. 고조선의 회복에 관심있는 고부몽을 연상케 한다. 주몽은 비류국을 합병한 후 '다물'이라 했다 한다. 다물은 고토를 회복했다는 뜻으로 안다. 또한 줄리우스 시저는 Gaul지역 원정을 하면서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한다. 필자는 무장인 주몽이 이런 능력이 있었을까 또는 그런 여력과 시간이 있었을까 의문을 가졌는데, 당시의 협보가 하지 않았나 추측하게 한다.

 

After Juba's death in 23 CE, Ptolemy of Mauretania continued his policies and emulated him as a scholar and patron of the arts. His reign was so successful that Mauretania – which included the regions which had once been western Numidia – became one of the wealthiest Roman provinces. Ptolemy was murdered by the Roman emperor Caligula in 40 CE after Caligula had invited the scholar to visit him. The motivation behind the murder remains unclear. With Ptolemy's death, the Numidian dynasty of the Massylii which had been established by Masinissa ended.

 

(번역) Juba가 AD 23년 죽은 후, 모레타니아의 Ptolemy는 계속하여 Juba의 정책을 이어가며, 학문과 예술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한때 서누미디아였던 지역까지 포함한 모레타니아를 로마의 지방 중 가장 부유한 곳의 하나가 되게 하였다. Ptolemy는 로마 황제 Caligula에 의해 AD 40년 살해되었다. Caligula는 학자가 Ptolemy를 방문하게 한 후 Ptolemy를 살해했다. 이 살인의 동기는 밝혀지지 않는다. Ptolemy의 죽음과 함께, 마시니사에 의해 세워진 마실리 누미디아왕국은 끝을 맺는다.

 

이 당시의 누미디아, 모레타니아 왕국을 협보가 내려가 세운 구야한국으로 본다면, 상기 기록은 구야한국이 AD 40년에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멸망 시킨 주체인 로마의 Caligula왕이 고구려인지 백제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로마 초기의 역사가 고구려, 백제 초기의 역사만큼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AD 40년은 백제의 2대 다루왕 시기이며, 고구려의 3대 대무신왕 (AD18-44)시기이다. 대무신왕은 부여의 대소왕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부여를 멸망시킨다. 이어 재위 9년 (AD 26년) 개마국과 구다국의 항복을 받았다 한다. 여기서 구다국(句茶國)이 구야한국이 아닌가 한다. 즉 부여세력과 연관 있을 수 있는 이곳을 고구려 대무신왕이 부여정벌 후 항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부여가 남방세력이라는 붉은 색 까마귀 일화(부여왕 대소가 보낸 까마귀 일화 내용 참조, 대무신왕, 나무위키 자료 참조)는 부여가 남방에 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함을 제기한다. 즉 로마의 Caligula왕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일 수 있다.

 

(source : The Masaesyli and Massylii of Numidia -World History Encyclo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블로그(blog.naver.com/lainfos),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5) 누미디아왕국의 문화

 

아래에서는 누미디아왕국의 문화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이 이들이 구야한국과 관련되어 있는지 분석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필자는 기대한다. 특히 같은 유목민의 특성이 있는 만큼, 한민족의 특성이 있는지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CULTURE OF THE MASAESYLI & MASSYLIi

(마사실리와 마실리의 문화)

 

먼저 이들의 전설에서 ANTAENUS왕의 이야기가 전한다. 매우 강력한 왕으로서 전쟁에서 패배한 역사가 없다는 식의 내용이 전한다. 그리고 이 왕의 무덤이 언급된다. (아래 자료 참조)

 

Evidence for the long history of the Masaesyli and Massylii of the region is, possibly, the Neolithic site of Msoura (also given as Mzoura) near modern-day Asilah, Morocco. The site is a ring of 168 megaliths astronomically aligned around a tumulus which, legend claims, is the tomb of the king Antaeus, best known from the Greco-Roman tales of Hercules. In the story, Antaeus cannot be defeated as long as his feet are touching the earth and so Hercules lifts him into the air and crushes him to death. The origins of the legend may have been inspired by a Numidian king who drew his strength from his land.

 

 

이들은 모두 다신교를 믿고, 조상숭배를 했으며, 죽은 사람(특히 죽은 왕들)을 숭배했고, 음력 달력을 이용했으며, 해와 달을 숭배했다. 고인돌 같은 거석문화의 흔적도 있다. 신, 동물, 사물을 의인화 해서 숭배하는 이들의 주요 신들의 일부는 고대 이집트 (Amun, Osiris, Neith 신 등)에 전해졌다. 이러한 신들은 Libya에 근원이 있다고 고대 사가들은 언급하는데, 리비아는 자주 누미디아를 언급하는 단어였다. (아래 자료 참조)

 

Both tribes/federations were polytheistic, practiced ancestor worship, and venerated the dead (especially past kings), followed a lunar calendar, and also worshipped the sun and the moon. The claim by later Greek and Roman writers that they worshiped stones most likely comes from sites like Msoura and is clearly wrong; the Numidians were no more worshiping the stones than the people of Britain and Scotland were at Stonehenge or the Ness of Brodgar (two sites which are similar in construction to Msoura). Worship of anthropomorphic deities developed later in their history and, it is claimed, resulted in some of the most important gods to be exported to ancient Egypt: Amun, Osiris, and Neith. These deities are sometimes referenced by ancient historians as originating in 'Libya' which was a term often used for Numidia.

 

상기 Amun, Osiris, Neith를 클릭하면, 이들 이집트 신들에 관련 자료가 나오는데, 아래 일부 내용만 간략히 소개한다. 이들은 고대 이집트의 왕들이 신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중 Amun은 BC 2400-2300 BC 시기에 Thebes의 지역신으로 피라미드에 언급되었다 한다. 태양과 공기의 신이다. Osiris는 지하세계의 심판의 신으로 힘의 상징이다. Neith는 왕국이전 (BC 6000-3150 BC)부터의 가장 오래된 신으로 전쟁의 신, 창조의 신, 출산의 어머니신, 그리고 죽은자의 영혼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아래 자료 참조) Osiris신의 모습은 고깔모자를 쓴 왕의 모습이다.

 

이들 신들이 누미디아를 뜻하는 Libya(리비아)에 그 근원이 있다는 위의 언급이 눈길을 끈다. 즉 리비아지역의 Garamantes문명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 Amun, Osiris, Neith 관련 자료 참조

(Amun (also Amon, Ammon, Amen, Amun-Ra) is the ancient Egyptian god of the sun and air. He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gods of ancient Egypt who rose to prominence at Thebes at the beginning of the period of the New Kingdom (c. 1570-1069 BCE). His cult was the most powerful and popular in Egypt for centuries....Amun is first mentioned in the Pyramid Texts (c. 2400-2300 BCE) as a local god of Thebes along with his consort Amaunet. At this time, the supreme god of Thebes was the war god Montu and the creator god was regarded as Atum (also known as Ra). Montu was a fierce warrior who protected the city and helped it expand while Atum was the supremely powerful, self-created deity who arose on the primordial mound from the waters of chaos at the beginning of creation. Amun, at this time, was associated with protecting the king but, largely, was simply a local fertility god paired with his consort Amaunet as part of the Ogdoad, eight gods who represented the primordial elements of creation. (source : Amun, World History Encyclopedia))

 

(Osiris is the Egyptian Lord of the Underworld and Judge of the Dead, brother-husband to Isis,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gods of ancient Egypt. The name `Osiris' is the Latinized form of the Egyptian Usir which is interpreted as 'powerful' or 'mighty'.

(source : Osiris, World History Encyclopedia)

 

(Neith (aka Net, Neit or Nit) and is one of the oldest deities of ancient Egypt who was worshipped early in the Pre-Dynastic Period (c. 6000 - 3150 BCE) and whose veneration continued through the Ptolemaic Dynasty (323 - 30 BCE), the last to rule Egypt before the coming of Rome. She was a war goddess, goddess of creation, mother goddess who invented birth, and funerary goddess who cared for and helped to dress the souls of the dead. (source : Neith, World History Encyclopedia))

Groundhopping Merseburg (CC BY-NC-SA)

 

그리스, 로마 작가들은 페니키아의 Dido여왕이 카르타고에 도착했을 때, 기존의 유목민이 있었고 그래서 이들은 누미디언으로 불리웠다. 이들은 고대 작가들에 의해 Libyans으로 불리웠고, 기원전 2세기 Polybius에 의해 Numidians으로 처음 불리웠다. 마새실리, 마실리란 이름이 이들이 자신들을 불렀던 이름인지 불확실하며, 아마도 다른 이들에 의해 불려진 이름일 지 모른다. (아래 자료 참조)

 

The Greek and Roman writers claim that the Phoenicians, ancestors of the Carthaginians, founded Carthage in c. 814 BCE under the Queen Dido. Upon their arrival, they encountered peoples living a nomadic existence and these were therefore referred to as Numidae (nomads) which eventually gave rise to the practice of calling them Numidians. They are first referenced as 'Numidians' by Polybius (2nd century BCE) though they are also frequently cited as 'Libyans' by ancient writers. It appears that they called themselves the Masaesyli and Massylii but this is unclear and those terms may have been names others called them.

 

이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것은 이들에 대한 것은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 있는 것만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lack of clarity regarding the names of the tribes (and whether they were single tribes or coalitions) reflects how little the later writers of their history knew about them. Numidian history was not written by Numidians but by the Romans and the Greeks and, naturally, focus only on those aspects of culture which interested them. The Roman writer Sallust (86-35 BCE), for example, was governor of Numidia and observed the culture first-hand but leaves out many details which are mentioned by other writers, presumably because these did not interest him personally.

 

 

누미디언 자신들에 의한 기록은 적어도 기원전 3세기이후 이들이 쓴 Tifinagh(Tifinay로 발음됨)로 알려진 기록인데, 이들은 중요한 사람들과 event에 대해 언급했다. 아마도 노르만인이 Runes(돌애 새긴 글)에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들과 대화하거나 중요 event들을 축하하기 위해 Tifinagh를 사용했을 것이다. Thugga에 있는 무덤이나 기념물, Tipasa의 유적들, Medracen의 mausoleum 등은 이들이 매우 발달된 문화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내부적인 역사서적이나 비문, 조형물 등은 없다. (아래 자료 참조)

 

Although the text of Numidia's ancient history is written by others, the people of the land did leave behind their own stories in their own way. The script known as Tifinagh (pronounced `Tiffany') was in use from at least the 3rd century BCE onward and, although the inscriptions in Tifinagh found thus far do not constitute any kind of text, they do attest to important people and events. It is possible that the ancient Numidians used the Tifinagh text the way the Norse used runes: as a means of celebrating events or communing with the gods, not as a form of everyday communication, but this is speculative. Tombs and monuments such as those at Thugga, the ruins at Tipasa, and the mausoleum of Medracen all attest to a highly advanced culture but no indigenous historical text, inscription, or reliefs accompany them.

 

THE ROMANS EMPLOYED NUMIDIAN CAVALRY AS MERCENARIES, AS DID CARTHAGE, IN THE SECOND PUNIC WAR, WHICH PIT THE TRIBES AGAINST EACH OTHER ACCORDING TO THEIR ALLEGIANCE.

 

로마인들은 누미디언 기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카르타고도 마찬가지였는데,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이들 부족들이 동맹에 따라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리스, 로마 역사가들에 의하면, 누미디언들은 채식주의자이며, 술을 삼가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였다. 남자들은 한사람의 정부인을 두고 다른 첩들을 두었으며, 그래서 대가족제였다. 어린이들과 어른들은 때로는 그들의 집주위에 나체로 있었으며, 공공모임에서 벨트없이 느슨한 튜닉옷(소매가 없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웃옷)을 입었다; 이들은 또한 샌들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높은 에너지, 채식의 생활습관은 이 지역의 기후와 더불어, 이들이 장수하고 건강하게 살게 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According to the Greek and Roman historians, the Numidians adhered to a vegetarian diet, abstained from alcohol, and engaged in regular exercise. Men would take a wife and then other women as concubines, so families were usually large. Children and adults often went naked around their homes and wore loose-fitting tunics without a belt at public gatherings; they also wore sandals or went barefoot. Their high-energy, vegetarian lifestyle, coupled with the climate of the region, afforded them long lives and robust health.

 

마실리 누미디언은 자주 그들의 말과 과련 기술로, 마새실리보다 칭송된다. 이들은 그들의 말들과 아주 긴밀히 지내서 말하지 않고도 갖는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말안장이나 말 굴레 없이도 그들의 타는 말을 잘 조종하였다. (전쟁시에는 채찍이나 prod(꼭꼭 찌르는 뾰족한 것). 로마인들은 누미디언 기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으며, 카르타고도 마찬가지여서,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그들의 동맹에 따라 서로 싸우기도 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Numidians of the Massylii are often praised for their skill with horses, more so than the Masaesyli, and it is said that the people grew up in such close contact with their horses that they formed an unspoken bond and required neither saddle nor bridle to control their steeds (though they did use a whip or prod in battle). The Romans employed Numidian cavalry as mercenaries, as did Carthage, in the Second Punic War, which pit the tribes against each other according to their allegiance.

 

누미디언 기병들은 창이나 칼, 단검 등의 경무장이었으며, 말의 목에 로프만 이용하여 말을 타고, 무릎과 목소리로 말을 조종하며, 기습공격에 주로 동원되었다. 그들은 창을 던지고 물러나는 그리하여 적으로 하여금 큰 손실을 입게 하였다. 부족이나 연합들은 그들의 왕이 있으며, 왕은 전장의 우두머리가 되어 전쟁을 리드하고, 용병으로서 그들의 군대를 지휘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Numidian cavalry were lightly armed with a javelin and possibly a sword or dagger. They rode using only a rope around the horse's neck, controlling it with their knees and voice, and were deployed effectively as shock troops. They would engage the enemy, hurl their javelins, and retreat, usually inflicting heavy casualties. Each federation of tribes was led by their king (or chief) who may originally have been a war-chief selected to lead in times of conflict and who led his troops as mercenaries in the wars of other nations.

 

(source : The Masaesyli and Massylii of Numidia -World History Encyclo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블로그(blog.naver.com/lainfos),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이상의 연구에 의하면, 누미디아 왕국은 기마민족인 유목민으로서 왜국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왜가 단지 도서에 있는 해적집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문화에서 간편한 복장, 샌들이나 맨발의 관습, 채식주의, 조상 숭배 및 자연 숭배 사상, 그리고 창이나 칼, 단검을 이용하지만 활을 이용하지 않는 점 등은 구주의 왜국 가능성을 말해 준다. 그리고 왜가 구이의 하나에 속한다는 기록, 구한의 하나일 수 있다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편, 변진, 변한, 가야, 가락, 남마한 등의 이미지도 있다고 본다. 이집트에 건너간 Osiris신의 모습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아래 그림 참조), Neith여신은 우리의 마고할머니, 삼신할머니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또한 마시니사, 마실리, 마새실리 등의 이름에서 말마자를 쓰는 마한의 이미지도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이런 가능성도 가지고 북아프리카 지역을 더 연구할 것이다.

 

 

Standing Osiris (source : Wikipedia)

(By Jeff Dahl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248602)

 

그리고 광개토태왕비에 의하면 왜국은 대대로 고구려의 부용국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북아프리카의 왜국들이 협보의 구야한국이후 고구려의 부용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의 구다국 항복과 관련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협보가 누미디아왕국의 마지막 시기 Juba II의 시기에 도래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이다. 협보의 높은 지위의 행정가 이력은 그가 높은 학식의 소유자일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Juba II이후의 누미디아왕국의 문화 융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누미디아왕국은 이전부터 유목민족의 왜국으로 존재하다가 협보의 이동으로 구야한국이 되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구야한국은 모레타니아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협보가 내려온 경로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모레타니아왕국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또한 그후에는 리비아와 관련된 Garamantes문명에 대해서도 더 연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