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I)
2021. 7. 17. 04:02ㆍ한국사/기타
부제 : 켈트족 보이족의 동방행은 진(秦)나라의 동방정벌이 아닌가?
부제 : 로마제국의 설립자인 에트루리아문명은 마한이 아닌가?
지난 글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I)'에서 우리 역사 자료를 통한 분석에서 낙랑의 위치는 알프스산맥인 이태리 북부지역 또는 단단대령 (=Dinaric Alps) 서쪽인 판노니아지역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다. 물론 이는 그동안 필자가 쓴 글을 바탕으로 추정한 결과이다.
그리고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에서 동양의 고대사 자료를 바탕으로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 또 한번 검토하였다. 한사군의 낙랑군은 고죽국이 있던 요수지역으로 결국 알프스 산맥에 있는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8세기부터 있던 낙랑지역은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으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알프스산맥에서 발칸반도까지 아우르는 Dacians지역이 아닌가 추정했다. 이 지역이 낙랑조선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중 일부가 낙랑국으로 기원전 2세기부터 고구려 대무신왕때까지 최씨네 낙랑국으로 발칸반도 북쪽지역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본 글 (III)에서는 이러한 가정이 서양역사에서 나타나는가를 살펴 보며 검토하고자 한다.
필자는 지난 글에서 Dacians에 대해 언급했다. 남부 폴란드에서 발칸반도, 흑해서안의 우크라이나지역까지 퍼져 있다는 Dacians이 여러 가지로 낙랑조선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본 블로그 글,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 참조) 그러나 Dacians은 발틱해까지 진출했다는 언급은 있어도 이태리 북부까지의 언급은 없었다. 그리하여 Dacians에 대해 보다 더 자료를 살피는 중, Dacians은 Boii족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래서 Boii족에 대한 자료를 살피던 중, Boii족은 기원전 4세기부터 라인강 서쪽에서 이태리 북부, 보헤미아지역 등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보이족은 기원전 194년 로마와 이태리 북부에서 전쟁을 하여 패배했다고 기술된다. 이는 위만이 BC 198년 조선을 위만조선으로 대체한 시기와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켈트족의 일원인 Boii족에 대해 더 살펴 보게 되었다.
로마사는 다뉴브강 이남에 대한 역사가 대부분이라 다뉴브강 북쪽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기록이 없다. 다만 카이사르 시절 갈리아 전쟁에 대한 역사에서 당시 갈리아지역, 즉 이태리북부지역, 프랑스 동남부지역, 스위스 오스트리아지역, 슬로바키아, 체코지역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카이사르의 갈리아전쟁, 로마의 갈리아령에 대한 역사가 이들 지역의 파악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갈리아의 골족은 켈트족이라 한다. 필자는 카이사르의 정복지역이 시기상으로 지역적으로 고구려의 고주몽이 점령한 비류국, 북옥저지역의 행안국, 등과 매칭된다는 점을 이미 언급했다. (본 블로그글, '졸본천은 Rhone river의 지류인 Jabron river로 추정된다', '고주몽이 정벌한 행안국은 스위스 서쪽 Noviodunum이다' 참조) 따라서 이들 갈리아전쟁사와 로마령 갈리아지역에 대한 자료를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켈트족의 일원이라는 보이족의 움직임을 표시한 아래 지도를 유의깊게 보시기 바란다.
연나라의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의 위만은 일부 유민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망명 왔다고 한다.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를 독일의 라인강으로 추정하는 필자는 아래 지도의 경로가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하는 경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보이족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게 된다.
보이족의 움직임에 대한 로마인들의 설명 (이태리 북부 및 보헤미안, 판노니아지역 진출) (source : Wikipedia)
아래 보이족 자료에서 보면, 보이족은 갈리아부족(=켈트족)으로, BC 390 - BC 195 시대에 걸쳐, 이태리 북부, 판노니아지역, 보헤미아지역, 그리고 남부 프랑스의 나르보넨시스지역에 거주했다 한다. 고고학 흔적들도 켈트족이 보헤미아에서 오늘날의 폴란드 실레시아지역까지 확장했음을 보이고 있다 한다.
이태리북부지역에 정착한 보이족은 기존의 에투루리아인들과 공존했으며, 보헤미아지역의 보이족들도 그러했다 한다. 그러나 보헤미아 동부에 있던 다키아인들은 보이족들이 쫓겨날 때까지 싸웠다 한다.
이태리북부에 있었던 보이족과 다른 켈트족들은 BC 194 - 193년 로마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이태리지역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갈리아지역 서부의 보이족들은 기원전 60년경 카이사르에 패했으며, 동부의 보이족들은 서기 8년에 로마제국에 흡수됐다.
보이족들은 전쟁과 농업만을 했다고 한다.
"보이족(라틴어 복수형-Boii, 단수형-보이우스(Boius) ; 그리스어 Βόϊοι)은 철기 시대 후기의 갈리아 부족이며, 여러 시대에 걸쳐 갈리아 키살피나(북부 이탈리아), 판노니아 (헝가리와 그 서부 인근지역들), 보헤미아 주변과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 거주했다. 게다가 고고학 흔적들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켈트족들이 보헤미아에서 크워츠코 계곡을 통하여, 오늘날의 폴란드의 일부인 실레시아까지 확장했음이 나타났다.[1]
그들이 처음으로 역사속에서 출연한 것은 기원전 390년에 갈리아의 북부 이탈리아침공 때이며, 그 당시에 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의 도시를 자신들의 수도인 보노니아로 만들었다. 여러 전쟁이 겪은 후, 그들은 결정적으로 무티나(모데나) 인근에서의 전투에서 로마인들에게 패배하였고 그들의 영토는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키살피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2세기 뒤의 인물인 스트라보는 보이족이 켈트 이웃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게 멸망당했다기 보다는,보이족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땅에서 쫒겨나, 이스테르강 (=다뉴브강) 인근 지역으로 이주한 후, 타우리스키족과 함께 공존했으며,[2] 그들 부족 전부가 소멸될 때까지 다키아인들과 싸웠다 - 따라서 그들은 일리리아 지역을 양들을 위한 목초지로서 그들의 이웃들에게 남겨주고 떠났다.[3]
기원전 60년경에 보이족의 무리가 갈리아 서부 지역을 정복하려던 헬베티족의 실패한 시도에 가담했었고 비브락트 전투에서 그들의 동맹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했다. 카이사르는 고르고비나에 보이족의 잔당들을 정착시켰고 그들은 6년 뒤인 알레시아 전투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지원하기 위해 2천 명을 파견했다. 다뉴브강 지역의 동부 보이족들은 서기 8년에 로마 제국에 흡수됐다.........
이탈리아 북부 정착지
고대 시대 작가들에 따르면, 보이족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에 도달했다고 한다. 반면 세노네스족, 린고네스족, 케노마니족같은 보이족을 따라 이탈리아에 온 다른 부족들은 로마인들의 정복 시기에 역시나 갈리아족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보이족들의 기원지인 중앙 유럽에 정확한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게 되었고, 만약 갈리아 지역에 있더라면 독일 남부나 보헤미아 지역일 것이다.
폴리비우스는 켈트족이 에트루리아 문명의 가까운 이웃이었고 "아름다운 나라에 탐욕심을 쏟는다"라고 말했다.[6] 거대한 군대와 함께 포 계곡을 침입한 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정착하며, 포 계곡의 중심지 오른쪽을 차지한다. 스트라본은 이들이 그들의 땅을 떠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주해 왔고 켈트족 부족 중 큰 규모에 속한다는것을 확인하였다.[10] 보이족은 펠시나 (Felsina)라는 이름의 옛 에트루리아의 영토를 점령하고, 보노니아 (Bononia, 오늘날의 볼로냐)라고 이름 붙였다. 폴리비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에 거주하는 켈트족의 삶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벽이 없는 마을에 거주한다. 어떤 가구도 두지 않은 채 그들은 나뭇잎으로 된 침대에서 잠을 자고 고기를 먹으며 살며 전쟁과 농업만을 한다. 그들의 인생은 매우 단조로워서, 그들은 어떤 예술이나 과학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재산은 가축과 황금으로 구성되며, 그들이 원하면 어디서든 상황에 따라 들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애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가장 큰 두려움과 가장 강한 사람은 동반자와 동료가 가장 많다고 여겼다.[6]
볼로냐와 그 인근 지역에서의 고고학적 증거물들은 보이족이 에트루리아인들을 몰아내거나 강제로 떠나가겠금 했다고 말한 리비우스와 폴리비우스의 증언과는 모순된다. 오히려 보이족들은 펠시눔을 파괴하거나 그곳의 사람들을 몰살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나타났으며, 단순히 그곳으로 이주하여 결혼을 통해 그곳 사람들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었다.[11] 볼로냐 지역의 당시의 무덤에서는 라텐 문화 양식의 무기들과 다른 유물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동 거울 같은 에트루리아의 것들도 있었다. 비벨레산에서 멀지 않은 무덤에서는 라텐 문화 양식의 무기와 에트루리아 여성의 이름이 새겨진 병이 들어있기도 했다.
로마와의 전쟁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보이족은 로마에 맞서 다른 카살피나 갈리아족들, 에트루리아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또한 한니발과 함께 싸우기도 했고, 기원전 216년에는 로마의 장군 루시우스 포스투미누스 알비누스를 전사시켜 그의 두개골을 제물용 그릇으로 쓰기도 했다.[12] 조금 이전 시기인 기원전 234년에 벌어진 텔라몬 전투에서 패배했었고 기원전 194년 플라켄티아 (오늘날 피아첸차)와 기원전 193년 무티나 (오늘날 만토바)에서 다시 패배를 당했다. 그들의 수도를 상실한 이후, 보이족들은 스트라보의 기록처럼 대부분이 이탈리아를 떠났다.
다뉴브 지역의 보이족
고전 작가들의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이후 시대의 사료에서 확인된 판노니아의 보이족들은 단순히 이탈리아에서 떠나온 이들이 아니며, 훨씬 이전에 갈라진 부족들이 예전에 정착했던 것이였다. 이탈리아의 보이족들의 장례 의식은 매장등에서 동시대 보헤미아와 유사성을 보여주었는데, 매장은 키살피나 갈리아인들에게는 흔치 않은 것이었고, 서부 켈트족들에게 일반적인 토크가 없다는 점이 그랬다.[13] 이런 점들이 키살피나 보이족이 다른 곳에서 보다는 사실상 보헤미아에서 기원을 했었을 가능성을 높여주었다.[14] 알프스 북부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했었던 패배한 켈트족들의 일부는 단순하게 그들의 친척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note 2]
판노니아 보이족들은 기원전 2세기 말에 그들이 킴브리족과 튜턴족을 격퇴시켜내면서 다시 언급된다 (스트라보 VII, 2, 2). 이후 그들은 노레이아 (오늘날 오스트리아)를 공격한 직후 보이족의 한 무리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따르면 32,000명이라고 하며 - 그 숫자는 과장됐을 것이다)가 갈리아 서부에 정착하려던 헬베티족에 동참했다고 한다. 헬베티족이 비브락테에서 패배를 당한 후, 영향력 있는 아이두이족은 보이족들이 그들의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고르고비나 오피둠을 차지했다. 베르겐토릭스가 이끄는 전쟁의 시기에서도, 그들은 알레시아 전투에 2천 명의 병력을 보내며 그를 지원하였다 (Caes. Bell. Gall., VII, 75).
다시 한번 보이족의 일부는 그들의 전통적인 본거지에 인접한 곳에 잔류했는데, 브라티슬라바를 중심으로 한 도나우 강과 무어 강이 있는 헝가리 저지대에 정착했다. 기원전 60년경에 그들은 부레비스타 왕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다키아인들과 격돌하여 패배했다. 로마인들이 서기 8년에 마침내 판노니아를 정복했을 때, 보이족들은 그들에게 저항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옛 영토는 데세르타 보이오룸 (deserta Boiorum, "데세르타"라는 말의 의미는 공백이나 인구가 드문 땅이라는 뜻이다.)이라 불렸다.[15] 그렇다고 해서 보이족들이 절멸당한 것은 아니었는데, 다뉴브 강가 관할권 관리자 (praefectus ripae Danuvii) 통치하에서 키비타스 보이오룸 에트 아잘리오룸 (civitas Boiorum et Azaliorum, 이웃한 부족 아잘리이 [Azalii]과 함께)이라는 도시가 존재하기도 했다.[16] 키비타스는 도시와 그 주변의 부족 구역을 지정하는 일반적인 로마의 행정 용어이다. 보이족의 키비타스는 카르눈툼에 인접해 있었다.
(자료 : 보이족, 위키백과,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공화국 Boii War, 펌글 참조)
이러한 보이족들의 움직임은 아래 지도에서 켈트족들의 움직임과 연관되는 것 같다. 아래 지도에서 La Tene Culture (BC 450-BC 1c)는 초록색으로 보여 주며, 그전의 Halstatt Culture (BC 750-450 BC)는 노란색지역이다. (고대 유럽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대 유럽, 펌글 참조)
Map showing the approximate location of the Boii in Bohemia and in Italy. The contemporary La Tène culture is indicated in green tones, the preceding Hallstatt culture in yellow. (source : Wikipedia)
- 에트루리아 문명과 보이족의 관계
상기 보이족의 이태리 북부지역 침범은 보이족과 에트루리아와의 충돌로 기록된다. 아래 지도는 보이족이 있던 Cisalpine Gaul지역이다. 보이족은 보노니아(오늘날 볼로냐)란 도시 (아래 두번째 그림의 Felsina) 이름을 남겼다 한다.
Map of Cisalpine Gaul (BC 194) (source : Wikipedia)
Extent of Etruscan civilisation and the twelve Etruscan League cities. (source : Wikipedia)
(By NormanEinstein - Based on a map from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173 No.6 June 1988.,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41378)
기원전 900년경부터의 에트루리아문명은 위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기원전 500년까지 포강의 북부지역으로 확장했다. 에트루리아문명은 League (도시연맹)로 설명된다. 로마제국에 의해 기원전 27년 완전히 병합된다.
"The earliest evidence of a culture that is identifiably Etruscan dates from about 900 BC.[4] This is the period of the Iron Age Villanovan culture, considered to be the earliest phase of Etruscan civilization,[5][6][7][8][9] which itself developed from the previous late Bronze Age Proto-Villanovan culture in the same region.[10] Etruscan civilization endured until it was assimilated into Roman society.
Assimilation began in the late 4th century BC as a result of the Roman–Etruscan Wars;[11] it accelerated with the grant of Roman citizenship in 90 BC, and became complete in 27 BC, when the Etruscans' territory was incorporated into the newly established Roman Empire.[4]"
(source : Etruscan Civilizatio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Etruscan Civilization, 펌글 참조)
에트루리아인들은 스스로를 Rasna라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Tyrrhenians이라 부르는데, 고대 로마인들은 이들을 Tusci 혹은 Etrusci라 불렀다. 흔히 블리는 Tuscian이나 Turskum 등의 Turs는 Tower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들은 높은 언덕에 Walls을 치고 살았다. 그래서 Tower를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래서 Tower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의미한다고 한다.
A former Etruscan walled town, Civita di Bagnoregio (source : Wikipedia)
"The Etruscans called themselves Rasenna, which was shortened to Rasna or Raśna (etymology unknown).[19][20][21]
In Attic Greek, the Etruscans were known as Tyrrhenians (Τυρρηνοί, Turrhēnoi, earlier Τυρσηνοί Tursēnoi), from which the Romans derived the names Tyrrhēnī, Tyrrhēnia (Etruria), and Mare Tyrrhēnum (Tyrrhenian Sea),[22] prompting some to associate them with the Teresh (one of the Sea Peoples named by the Egyptians).
The ancient Romans referred to the Etruscans as the Tuscī or Etruscī (singular Tuscus).[23][24] Their Roman name is the origin of the terms "Toscana", which refers to their heartland, and "Etruria", which can refer to their wider region. The term Tusci is thought by linguists to have been the Umbrian word for “Etruscan,” based an inscription on an ancient bronze tablet from a nearby region.[25] The inscription contains the phrase turskum ... nomen, literally "the Tuscan name". Based on a knowledge of Umbrian grammar, linguists can infer that the base form of the word turksum is *Tursci,[26] which would, through metathesis and a word-initial epenthesis, be likely to lead to the form, E-trus-ci.[27]
As for the original meaning of the root, *Turs-, a widely cited hypothesis is that it, like the word Latin turris, means "tower", and comes from the Greek word for tower: τύρσις.[28] On this hypothesis, the Tusci were called the "people who build towers"[28] or "the tower builders".[29]
(source : Etruscan Civilizatio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Etruscan Civilization, 펌글 참조)
에트루리아 문명(Etruscan Civilization)은 중앙유럽의 Urnfield Culture에서 전래 되었다는 의견과 내생적으로 존재했다는 주장 (BC 1세기의 Dionysus), 또는 아나톨리아 Lydia에서 이주했다는 주장(BC 5세기의 Herodotus, BC 1세기의 Strabo 등)들이 있다. 인도유럽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들이 죽은 후 화장을 한 후 재를 항아리에 담아 놓는 풍습이 대륙 중부 유럽의 Urnfield Culture와 같다고 하여 이들이 중부 유럽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래 자료 참조)
또한 알프스부족의 일원인 스위스 북쪽의 Rhaetians들은, Gaul족에 의해 침범을 당한 에트루리아인들이 이동해서 정착한 부족이라 주장한다. (BC 1세기의 역사학자 Levy, 1세기의 역사학자 Pliny the Elder 주장)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Rhaetians지역이 고주몽이 점령한 행안국이 있는 북옥저지역이라 추정했다.
"The 5th-century BC historians Thucydides[36] and Herodotus,[37] and the 1st-century BC historian Strabo[38], did seem to suggest that the Tyrrhenians were originally Pelasgians who migrated to Italy from Lydia by way of the Greek island of Lemnos. They all described Lemnos as having been settled by Pelasgians, whom Thucydides identified as "belonging to the Tyrrhenians" (τὸ δὲ πλεῖστον Πελασγικόν, τῶν καὶ Λῆμνόν ποτε καὶ Ἀθήνας Τυρσηνῶν). As Strabo and Herodotus told it,[39] the migration to Lemnos was led by Tyrrhenus / Tyrsenos, the son of Atys (who was king of Lydia). Strabo[38] added that the Pelasgians of Lemnos and Imbros then followed Tyrrhenus to the Italian Peninsula. And, according to the logographer Hellanicus of Lesbos, there was a Pelasgian migration from Thessaly in Greece to the Italian peninsula, as part of which the Pelasgians colonized the area he called Tyrrhenia, and they then came to be called Tyrrhenians.[40]
There is some evidence suggesting a link between the island of Lemnos and the Tyrrhenians. The Lemnos Stele bears inscriptions in a language with strong structural resemblances to the language of the Etruscans.[41] The discovery of these inscriptions in modern times has led to the suggestion of a "Tyrrhenian language group" comprising Etruscan, Lemnian, and the Raetic spoken in the Al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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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the 1st-century BC historian Dionysius of Halicarnassus, a Greek living in Rome, dismissed many of the ancient theories of other Greek historians and postulated that the Etruscans were indigenous people who had always lived in Etruria and were different from both the Pelasgians and the Lydians.[42] Dionysius noted that the 5th-century historian Xanthus of Lydia, who was originally from Sardis and was regarded as an important source and authority for the history of Lydia, never suggested a Lydian origin of the Etruscans and never named Tyrrhenus as a ruler of the Lydians.[42] ......
Similarly, the 1st-century BC historian Livy, in his Ab Urbe Condita Libri, said that the Rhaetians were Etruscans who had been driven into the mountains by the invading Gauls; and he asserted that the inhabitants of Raetia were of Etruscan origin.[43] The Alpine tribes have also, no doubt, the same origin (of the Etruscans), especially the Raetians; who have been rendered so savage by the very nature of the country as to retain nothing of their ancient character save the sound of their speech, and even that is corrupted.
First-century historian Pliny the Elder also put the Etruscans in the context of the Rhaetian people to the north, and wrote in his Natural History (AD 79):[44] Adjoining these the (Alpine) Noricans are the Raeti and Vindelici. All are divided into a number of states. The Raeti are believed to be people of Tuscan race driven out by the Gauls, their leader was named Rae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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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ral archaeologists who have analyzed Bronze Age and Iron Age remains that were excavated in the territory of historical Etruria have pointed out that no evidence has been found, related either to material culture or to social practices, that can support a migration theory.[53] The most marked and radical change that has been archaeologically attested in the area is the adoption, starting in about the 12th century BC, of the funeral rite of incineration in terracotta urns, which is a Continental European practice, derived from the Urnfield culture; there is nothing about it that suggests an ethnic contribution from Asia Minor or the Near East.[53]
(source : Etruscan Civilizatio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Etruscan Civilization, 펌글 참조)
켈트족의 Urnfield Culture의 영향을 받았다면 에트루리아인들은 인도유럽인들이다. 이 지역 유물로서 Swaststika (卍자)가 새겨진 유물이 나온 것은 이를 증명해 준다고 본다. (아래 그림 참조). 인도 불교의 형상이기도 한 이 만자 문양은, 우리는 세종대왕의 두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에 이미 출현한 이 만자 문양을 20세기의 나치의 문양으로만 서구인들이 인식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Etruscan pendant with swastika symbols from Bolsena, Italy, 700–650 BC. Louvre (source : Wikipedia)
에트루리아에서는 구리와 철을 생산하여 부를 쌓았다. 그리하여 이태리반도, 서지중해, 그리스, 카르타고, 페니키안 등과 교역을 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mining and commerce of metal, especially copper and iron, led to an enrichment of the Etruscans and to the expansion of their influence in the Italian peninsula and the western Mediterranean Sea. Here, their interests collided with those of the Greeks, especially in the sixth century BC, when Phocaeans of Italy founded colonies along the coast of Sardinia, Spain and Corsica. This led the Etruscans to ally themselves with Carthage, whose interests also collided with the Greeks.[69][70]"
(source : Etruscan Civilizatio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Etruscan Civilization, 펌글 참조)
이러한 에트루리아인들은 남쪽에 로마의 원형인 라틴왕국(BC 753-338 BC)(후에 로마 공화국)이 있었고, 이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경부터 로마공화국의 침략에 의해 결정적으로 약해지다, 기원전 264년 로마공화국(BC 330-27 BC)에 통합된다. (자세한 내용은 Roman-Etruscan War 참조,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Etruscan, 펌글 참조).
우리는 로마의 시조라 하는 Romulus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신화를 안다. 그런데 로마는 누가 창시자인지 그 역사가 애매하다. BC 394년에 Gaul족이 로마시에 침입하여 역사자료가 없어져서 그렇다 하는데...... 여하튼 에트루리아 문명이 로마의 라틴지역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아래 자료 참조). 그리고 에트루리아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로마는 조그만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와서야 수로시스템 등 거대 인프라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로물루스 형제의 늑대 젖먹는 동상이 에트루리아 문명의 조각이라는 아래 사진은 그래서 에트루리아 문명이 로마제국의 설립자라 할 수 있다고 본다. 위키피디아도 이런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왜 늑대 (Wolf)가 등장할까? 이후에 분석되는 Dacians도 Wolf를 상징하고 그들의 신으로도 섬겼다. 우연의 일치인가? 만약 에트루리아인들과 Dacians들과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The Capitoline Wolf, long considered an Etruscan bronze, feeding the twins Romulus and Remus (source : Wikipedia)
"Those who subscribe to a Latin foundation of Rome followed by an Etruscan invasion typically speak of an Etruscan "influence" on Roman culture – that is, cultural objects which were adopted by Rome from neighbouring Etruria. The prevailing view is that Rome was founded by Latins who later merged with Etruscans. In this interpretation, Etruscan cultural objects are considered influences rather than part of a heritage.[74] Rome was probably a small settlement until the arrival of the Etruscans, who constructed the first elements of its urban infrastructure such as the drainage system.[75][76] "
(source : Etruscan Civilizatio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Etruscan Civilization, 펌글 참조)
에트루리아인들의 종교를 보아도 이들은 인도유럽인으로 보인다. 해, 달, 등 자연을 신으로 하고, 사랑의 신, 전쟁의 신, 죽음의 신, 등을 믿는 다신교 종교이다. (아래 글 참조)
"The Etruscan system of belief was an immanent polytheism; that is, all visible phenomena were considered to be a manifestation of divine power and that power was subdivided into deities that acted continually on the world of man and could be dissuaded or persuaded in favour of human affairs. How to understand the will of deities, and how to behave, had been revealed to the Etruscans by two initiators, Tages, a childlike figure born from tilled land and immediately gifted with prescience, and Vegoia, a female figure. Their teachings were kept in a series of sacred books.
Three layers of deities are evident in the extensive Etruscan art motifs. One appears to be divinities of an indigenous nature: Catha and Usil, the sun; Tivr, the moon; Selvans, a civil god; Turan, the goddess of love; Laran, the god of war; Leinth, the goddess of death; Maris; Thalna; Turms; and the ever-popular Fufluns, whose name is related in some way to the city of Populonia and the populus Romanus, possibly, the god of the people.[82][83]
Ruling over this pantheon of lesser deities were higher ones that seem to reflect the Indo-European system: Tin or Tinia, the sky, Uni his wife (Juno), and Cel, the earth goddess. In addition, some Greek and Roman gods were taken into the Etruscan system: Aritimi (Artemis), Menrva (Minerva), Pacha (Dionysus). The Greek heroes taken from Homer also appear extensively in art motifs.[82][83] "
(source : Etruscan Civilizatio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Etruscan Civilization, 펌글 참조)
필자에게 켈트족은 아직 많은 의문을 주는 존재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한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것 같은 지역에 어김없이 켈트족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러나 아직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다. 필자는 본 블로그 글, '춤을 통해 본 조상들의 활동영역'이란 글에서 켈트족과 한민족과의 많은 연관성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실제 켈트족은 Urnfield Culture (BC 1300-750 BC), Halsttat Culture (BC 750-450 BC), La Tene Culture (BC 450-BC 1c)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그런데 필자가 추정하기에 이들 지역은 우리의 고대 고조선 문명이 있던 지역이 아닌가 생각하는 지역이다. 필자는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문명이 상나라의 그것이 아닌가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 참조). 실제 고조선의 성곽 같은 존재가 유럽대륙은 물론 Insular Celts인 영국에서도 발견된다. (본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지역 추정' 참조)
그런데 이러한 켈트족의 일원인 Boii족이 이태리북부에 진입했다. 이태리북부지역에는 여러 부족의 켈트족이 존재했다. 아래 지도의 Insubres족도 켈트족의 일원으로 지금의 롬바르디지역에 있었으며, Mediolanum(Milan, 밀라노)란 도시를 세웠다.
필자가 이러한 켈트족의 북부 이태리지역 진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켈트족의 이러한 진입이 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군지역, 그 이전에는 위만조선의 중심지역, 또 그 이전에는 기준의 조선지역과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The peoples of Cisalpine Gaul, 391-192 BC. (source : Insubres, Wikipedia)
"The Insubres or Insubri were an ancient Celtic[1] population settled in Insubria, in what is now the Italian region of Lombardy. They were the founders of Mediolanum (Milan)."
(source : Insubres, Wikipedia)
위에서 보았던 보이족의 활동내역을 다시 한번 살펴 보자. 기원전 4세기에 이태리북부에 진입하는 보이족은 켈트계의 세노세스족, 린고네스족, 케노마니족 등과 함께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보이족의 기원지가 중앙유럽의 보헤미아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의견은 남부 프랑스가 기원지라고도 한다. (필자는 후자의 의견을 더 중시한다)
이러한 보이족의 중앙유럽 기원지 추정은, 우리가 처음에 보이족의 이동이 라인강 서쪽에서 출발한 것으로 나타난 지도와 같은 로마인에 의한 설명과는 다른 추론이다. 그러나 보헤미안지역 등에도 동시에 진출한 보이족의 이동 흔적이 이러한 중앙유럽 기원지 설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면, 보이족은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로마와 맞서 다른 카살피나 갈리아족들과 에트루리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싸웠다 했다. 또한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온 한니발과도 그들의 길잡이를 하며 같이 로마에 대항해서 싸웠다고 한다. 즉 기원전 250년경 -기원전 193년까지의 약 50년동안은 보이족은 로마와 치열하게 싸운 것이다.
이들은 파노니아지역에도 오래전부터 거주 했는데, 일부는 오스트리아의 노레이아를 공격한 후, 헬베티족이 갈리아 서부에 정착하려던 노정에 동참했다고 한다. 그러나 BC 58-52 BC기간에 카이사르에 패배한 후, 갈리아 서부의 켈트족의 일원인 Aedui(Haedui)족(해두국?)의 허락하에 그들의 영토에 정착한다. 필자는 Helveti족이 있던 오스트리아지역에 고주몽이 정벌한 행안국이 있었다 추정하고, Aedui(Haedui)족은 동부여왕 대소의 동생(후에 갈사국왕)에 의해 흡수된 마한의 거수국인 해두국이라 추정했다.
Map : : Gaul (58 BC) with important tribes, towns, rivers, etc. and early Roman provinces.(source : Wikipedia)
보이족의 일부는 항가리 저지대에 정착했으나, 기원전 60년 다키아왕국과 싸워 패배했으며, 서기 8년 로마인들이 판노니아를 정복했을 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고 기술된다.
"고대 시대 작가들에 따르면, 보이족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에 도달했다고 한다. 반면 세노네스족, 린고네스족, 케노마니족같은 보이족을 따라 이탈리아에 온 다른 부족들은 로마인들의 정복 시기에 역시나 갈리아족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보이족들의 기원지인 중앙 유럽에 정확한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게 되었고, 만약 갈리아 지역에 있더라면 독일 남부나 보헤미아 지역일 것이다......
로마와의 전쟁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보이족은 로마에 맞서 다른 카살피나 갈리아족들, 에트루리아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또한 한니발과 함께 싸우기도 했고, 기원전 216년에는 로마의 장군 루시우스 포스투미누스 알비누스를 전사시켜 그의 두개골을 제물용 그릇으로 쓰기도 했다.[12] 조금 이전 시기인 기원전 234년에 벌어진 텔라몬 전투에서 패배했었고 기원전 194년 플라켄티아 (오늘날 피아첸차)와 기원전 193년 무티나 (오늘날 만토바)에서 다시 패배를 당했다. 그들의 수도를 상실한 이후, 보이족들은 스트라보의 기록처럼 대부분이 이탈리아를 떠났다.
다뉴브 지역의 보이족
고전 작가들의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이후 시대의 사료에서 확인된 판노니아의 보이족들은 단순히 이탈리아에서 떠나온 이들이 아니며, 훨씬 이전에 갈라진 부족들이 예전에 정착했던 것이였다. 이탈리아의 보이족들의 장례 의식은 매장등에서 동시대 보헤미아와 유사성을 보여주었는데, 매장은 키살피나 갈리아인들에게는 흔치 않은 것이었고, 서부 켈트족들에게 일반적인 토크가 없다는 점이 그랬다.[13] 이런 점들이 키살피나 보이족이 다른 곳에서 보다는 사실상 보헤미아에서 기원을 했었을 가능성을 높여주었다.[14] 알프스 북부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했었던 패배한 켈트족들의 일부는 단순하게 그들의 친척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note 2]
판노니아 보이족들은 기원전 2세기 말에 그들이 킴브리족과 튜턴족을 격퇴시켜 내면서 다시 언급된다 (스트라보 VII, 2, 2). 이후 그들은 노레이아 (오늘날 오스트리아)를 공격한 직후 보이족의 한 무리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따르면 32,000명이라고 하며 - 그 숫자는 과장됐을 것이다)가 갈리아 서부에 정착하려던 헬베티족에 동참했다고 한다. 헬베티족이 비브락테에서 패배를 당한 후, 영향력 있는 아이두이족은 보이족들이 그들의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고르고비나 오피둠을 차지했다. 베르겐토릭스가 이끄는 전쟁의 시기에서도, 그들은 알레시아 전투에 2천 명의 병력을 보내며 그를 지원하였다 (Caes. Bell. Gall., VII, 75).
다시 한번 보이족의 일부는 그들의 전통적인 본거지에 인접한 곳에 잔류했는데, 브라티슬라바를 중심으로 한 도나우 강과 무어 강이 있는 헝가리 저지대에 정착했다. 기원전 60년경에 그들은 부레비스타 왕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다키아인들과 격돌하여 패배했다. 로마인들이 서기 8년에 마침내 판노니아를 정복했을 때, 보이족들은 그들에게 저항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옛 영토는 데세르타 보이오룸 (deserta Boiorum, "데세르타"라는 말의 의미는 공백이나 인구가 드문 땅이라는 뜻이다.)이라 불렸다.[15] 그렇다고 해서 보이족들이 절멸당한 것은 아니었는데, 다뉴브 강가 관할권 관리자 (praefectus ripae Danuvii) 통치하에서 키비타스 보이오룸 에트 아잘리오룸 (civitas Boiorum et Azaliorum, 이웃한 부족 아잘리이 [Azalii]과 함께)이라는 도시가 존재하기도 했다.[16] 키비타스는 도시와 그 주변의 부족 구역을 지정하는 일반적인 로마의 행정 용어이다. 보이족의 키비타스는 카르눈툼에 인접해 있었다.
(자료 : 보이족, 위키백과,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공화국 Boii War, 펌글 참조)
이러한 보이족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기원전 390년이후 역사에 등장한 보이족은 누굴까? 중국사는 이때가 춘추 (BC 770-403 BC), 전국(BC 403-221BC) 시대이다. 즉 주(周)나라가 쇠퇴하고 춘추오패 (진(晉(후에 한(韓), 위(魏), 조(趙)로 분리됨), 제, 초, 오, 월)를 거쳐 진(秦)나라가 재통일 하기 전후의 기간이다. 진(秦)나라는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06년에 망하고, 한(漢)나라로 이어진다. 보이족이 참여한 한니발이 개입된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Punic War는 BC 264-201 BC기간에 있었다. 즉 Punic Wars시기는 진(秦)나라의 중국통일전 전국시대에서 중국통일후 한(漢)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전국 칠웅 (진(秦), 초(楚),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중 초(楚)나라는 남쪽에 위치하고 넓은 지역을 가졌으며, 매우 강대했으나, 이민족으로 취급을 당했다 한다.(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춘추전국시대, 펌글 참조)
필자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Punic War이 초(楚)나라 지역을 포함한 진(秦)나라와 관련된 전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초(楚)나라는 월(越)나라를 흡수했으며, 이 월나라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반달족이 Alans족과 함께 아프리카에 진출해 AD 6세기경 큰 왕국(대월지?)을 세운 나라의 중심지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월나라가 이 지역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이들 지역의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아직도 국기에 초생달(반달)(월(月), Moon)이 들어가 있다.
아무리 카르타고가 강했었다 해도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로마까지 오는 경로를 거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여정 가운데 존재한 모든 나라들을 복속시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켈트족은 북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유럽대륙의 이러한 지역, 히스패니아에 있었다. 즉 Punic War에 카르타고에 의해 동원된 세력 중의 하나로서 켈트족의 보이족이 참여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초(楚)나라는 켈트족이 점령한 이베리아반도 지역일 수 있고, 이러한 초나라를 병합한 진(秦)나라는 유럽 대륙 동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켈트족인 보이족이 참여하여 동방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가정은 진(秦)나라가 보헤미아지역까지 진출하여 확보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진(秦) 고공지 상하장이란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楚)나라를 점령한 진(秦)나라 단독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 경우 카르타고에서 출발했다는 Punic war 의미를 해석하기가 불가능하다.
아래의 켈트족의 유럽에서의 진출지도를 보자. 기원전 6세기까지 Halstatt Culture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지역이 노란색갈부분이다. 연녹색부문은 켈트족이 BC 275년까지 진출한 지역이다. 진초록색은 지금까지 켈트어가 많이 이용되는 지역이고, 이베리아의 서쪽 흰색부문은 켈트족의 존재가 불확실한 Lusitanians지역이다. 켈트족이 중부유럽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 Halstatt Culture의 중심으로 이후 BC 275년까지 중서부유럽 및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한 지도를 보면, 그리고 위의 추리를 고려하면, 켈트족 지역은 중국사의 초(楚)나라를 병합한 진(秦)나라 (BC 9C - BC 206) 영역에 가깝다는 추정이다.
Celts Expansion in Europe (source : Wikipedia)
그렇다면 진나라의 팽창과 켈트족의 팽창을 매칭할 수 있다. 그러면 보이족의 동으로의 이동(BC 390년이후)은 진(秦)나라의 동으로의 확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진나라의 일부 세력인 보이족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며, 이태리북부에 진입하고 보헤미아, 판노니아, 서갈리아의 나르보네시스에 진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이들에게 점령당한 것은 그래서인 것 같다. 로마에 의해 이태리북부지역에서 보이족이 격퇴 당한 것(BC 194)은 진(秦)나라가 망한후 (BC 201), 기존의 마한의 지역세력(진(秦)나라에 의해 망한 한(韓)나라의 일부지역)이나, 위만에 의해 이미 점령된 마한세력(BC 197년이후)에 의해 진(秦)나라 잔여세력이 축출되는 과정을 묘사한 전쟁이 아닌가 한다.
Punic War의 로마 승리도 초나라를 병합한 진(秦)나라가 쇠퇴하는 과정에서 한(韓)나라의 일부 세력인 마한에 의해 진(秦)나라 세력이 전쟁에서 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초나라가 카르타고인 아프리카 북부에까지 걸쳐 있었는가는 다소 회의가 가지만, 초나라가 월나라를 병합했다고 하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프랑스남부를 거쳐 오는 경로는 중국의 강남 남쪽을 의미한다. 즉 초나라지역이다. 진(秦)나라는 결국 초나라를 병합하고 (BC 223), 진(秦)나라의 일부가 된 월나라의 세력인 카르타고가 참여한 전쟁이 한니발이 참여한 Punic War(BC 264-201 BC)일 것이다. 한니발은 소아시아지역의 Phrigians 출신이라 한다. 즉 용병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Punic War에 패한 후, 소아시아로 돌아가 그곳에서 조용한 생을 마감했다는 위키피디아 기록이다.
따라서 켈트족의 일원인 보이족은 진나라의 영역인 이태리북부, 보헤미아지역까지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지역이 후에 진고공지 상하장이란 지역이 되지 않을까 추정한다. 보이족이 옛 영토인 보헤미아지역은 사람들이 드물어 데세르테 보이오름이라 했다 한다. 진(秦) 고공지(진나라의 옛 빈땅의 뜻)로 해석되는 것이다.
진(秦)나라에 의해 한(韓)나라가 망해서 장량은 창해역사를 구하여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했다. 창해에 인접한 한(韓)나라가 마한, 진한 등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그러므로 진(秦)나라가 이곳까지 진출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秦)나라가 망한 후, 눌려 있던 연(燕)나라 세력이 다시 일어나는 현상이 한(漢)나라 초기 시기 연(燕)나라의 노관과 위만의 이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漢)나라가 진(秦)나라를 이어 받은 후 10년이 못되어 한(漢)나라의 제후국인 연(燕)나라의 노관과 위만이 각각 흉노와 조선으로 망명한다. 흉노와 조선은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사이이다.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도 역사적으로 화하족보다는 동이족과 더 가까운 것으로 묘사된다. 진(秦)나라가 망하고 한(漢)나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연(燕)나라의 위만은 진(秦)나라의 고공지 상하장(故空地 上下鄣)인 곳으로, 그러나 과거 진(秦)나라에 복속되었던 준왕 조선지역에 들어 온다.
후일 발해는 대진국(大辰國)이라 칭했다 한다. 마한, 진한, 번한 등이 속했던 진국(辰國)이 있었다 하는데, 이 지역을 포함하고 있어, 그런 명칭을 다시 사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마제국을 중국에서는 '대진(大辰 또는 大秦)제국'이라 칭한다. 모두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를 구성한 진한(辰韓) 사람들은 진(秦)나라의 노역이 너무 가혹해 탈출한 유민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강력한 진(秦)나라를 만들었던 춘추오패의 한사람인 목공은 죽은 후 177명의 가신들이 순장을 당해 진(秦)나라가 일시적으로 쇠하였다고 한다. 즉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진(秦)나라와 삼한의 관계 역사가 있는지 모른다.
보헤미안지역까지 진출한 켈트족의 보이족은 동부의 다키아인들과 계속 전쟁을 한다. 결국 다키아인들에 의해 보이족 세력은 모두 소멸한다. 미구에 BC 60년경 갈리아 서부로 옮겨가 아이두이지역에 정착한다. 이러한 과정은 위만이 진번 등까지 진출하였다가 한(漢)나라와의 전쟁패배로 사라지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진번 임둔지역에서는 토착세력이 한(漢)나라와의 결탁을 통해 위만세력을 쫓아낸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년 다키아왕국에 의해 보헤미아의 보이족세력이 쫓겨난 것이 이를 말해준다고 본다. 기존에 존재하던 보이족 세력을 위만이 흡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이 한(漢)나라에 의해 망하자 눌려 있던 조선의 토착세력이 위만세력화한 보이족을 물리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Dacians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독립된 낙랑국의 세력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다소 장황하기도 했던 본 글을 다시 정리하자면 본 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켈트족의 중요한 부족인 보이족의 이동역사를 통해 '진 고공지 상하장'이란 지역이 이태리 북부 또는 보헤미안 지역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했다.
2) 진 고공지 상하장이란 지역을 추정할 수 있음으로써, 라인강이 패수라고 추정한 필자에게 그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진(秦)나라의 영역 추정을 처음 시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 켈트족의 일원인 보이족이 보헤미아가 고향이라 하는 분석도 있지만, 프랑스 남부가 고향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필자는 이런 주장에 더 힘을 싣는다. 보이족의 동부 이동의 역사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에 같은 켈트족인 Aedui족이 있는 프랑스 서갈리아 (론강 서부인 요서지역)으로 돌아간 역사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이는 진나라의 출발지라는 성격을 가질 수 있어 더욱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4) 보이족의 이동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태리 북부지역의 에트루리아문명에 대해 더 알게 되었으며, 인도유럽인인 이들이 로마제국의 원천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에트루리아문명의 위치로 말미암아, 이 근처가, 진 고공지 상하장을 찾아간 위만과 고조선의 위치, 나아가 한사군의 낙랑군의 위치일 수 있다는 것이며, 또한 이들이 마한문명일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5) 그동안 필자가 의문을 품어 왔던 켈트족의 정체에 대해 다소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갈리아지역이 모두 켈트족의 활동무대였으며, 이베리아반도도 진출했다는 점을 인식하여 향후 역사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이다.
6) 필자가 고주몽이 정벌한 북옥저의 행안국으로 추정한 오스트리아의 Helveti족과 갈사부여왕에게 흡수 당한 마한의 거수국인 해두국, 즉 Aedui(Haedui)족이 켈트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한민족과 켈트족의 연관성을 파악하는데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과 달리 이미 기원전 18세기부터 낙랑의 이름이 단군세기에서 거론되었다. 따라서 낙랑국, 낙랑조선 등 보다 넓은 의미의 낙랑을 찾는 일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다키안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인 것으로 판단되는바, 다음 글 (IV)로 미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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