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2021. 6. 22. 01:06ㆍ한국사/기타
우리는 역사에서 창해에 대한 아래 4번의 언급을 본다. 이 창해에 대한 위치추정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창해는 동예의 위치를 알려 주며, 또한 신라와 금관가야와 관련 있는 실직곡국의 위치도 알려 준다. 동예, 실직곡국, 파조국이 창해 3국이라 했기 때문이다. 동예는 바로 북쪽에 동옥저가 있으며,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며,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 때, 백제에 매우 적대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낙랑도 초기에는 우호관계에 있었으나 곧 매우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였다. 따라서 창해의 위치추정은 초기 백제의 위치와 위례성의 위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 글의 창해에 대한 위치추정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창해에 대한 언급은 다음의 4가지이다.
1) 진나라 진시황 암살 사건에 관련된 창해 역사 이야기
2) 한나라 한무제때 예군 남려가 투항하여 창해군을 설치했다는 이야기
3) 위나라의 조조가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보며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
4) 동예, 실직곡국, 파조국은 창해 3국이라는 언급
이를 차례로 검토하며, 창해의 위치 추정을 시도하고자 한다.
1) 진나라 진시황 암살 사건에 관련 된 창해 역사 이야기와 창해의 위치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창해 역사 이야기는 진(秦)나라에 망한 한(韓)나라 (진한(秦韓)?)의 장량이 창해역사를 구해 꾸민 일이다.즉 진(秦)나라와 한(韓)나라가 근접했다는 것이며, 이 한(韓)나라가 삼한(마한, 진한, 변한) 또는 진한(秦韓)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마한을 비롯한 삼한이 지중해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요수는 론강이라 추정했다. 또한 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선인 패수는 라인강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진(秦)나라의 고공상하장에 있던 왕검성은 라인강 상류, 론강상류가 만나는 Rhone Valley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필자는 장수왕 시기의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항가리의 부다페스트로 추정했는데, 이 Rhone Valley에 있는 왕검성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평양(平壤)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있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유후세가』에 기록된 인물로, 장량과 더불어 진시황을 척살하려다 실패한 인물.
장량은 회양(淮陽)에서 동쪽으로 가 '창해군'이란 인물을 만났으며("東見倉海君"), 그에게 역사(力士)를 소개받았는데 그가 곧 창해 역사라 불리는 인물이다. 장량은 창해 역사를 위해 120근이나 되는 철추를 만들어줘서 진시황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자[1] 하비성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역사상으로는 기록이 단 한 줄 나올 뿐인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게다가 창해라는 지명은 진나라에는 없는 군이다. 사기집해에서는 '창해군'을 '동이의 군장'으로 추측하였고, 당나라 시대의 인물 사마정이 집필한 '사기색은'은 한나라 때 동이의 예군(君) 남려가 투항하자,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을 근거로 해서 유사한 지역일 것이라고 추측해서 예맥계 이민족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 무제 시절 예인 28만명이 고조선을 버리고 한나라에 투항하자 무제는 그들을 위해 창해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사기의 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元朔元年,武帝年也。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
원년(기원전 128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 《후한서》 동이열전 번역출처 "
(자료 : 창해역사,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진나라, 펌글 참조)
위의 자료에서 창해역사를 소개한 창해군(倉海君)이란 동이의 군장 (사기 집해에서 추정)이란 사람이 언급된다. 즉 이때 창해군이란 명칭이 이미 동이의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장량은 회양(淮陽)에서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을 만났다는 것이다. 회양(淮陽)은 평양(平陽)과 같이 볕양(陽) 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지역에 있는 진나라지역에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창해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다음 예군의 남려 투항사건에서 나타난다.
2) 한무제시의 예군 남려 투항과 창해군 설치 이야기에서의 창해의 위치
한(漢)나라 한무제때 BC 128년 예군 남려가 28만명을 데리고 한나라에 투항했다고 하며, 이 지역을 창해군으로 하였으나 곧 폐지하였다고 한다. (상기 자료 참조)
한(漢)나라는 위만의 왕검성을 정벌했어도 너무 멀어 지키기 힘들어 패수로 경계를 하였다 했다. 당시 조선원정에 나섰던 장군들을 모두 참수한 것을 보면 성공한 전쟁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위만조선의 내부 분열로 주화파가 승리하여 한(漢)나라와 강화(BC 108)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만조선보다 20년 앞선 위의 예군 남려의 투항 (BC 128)이후 여기에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창해군을 3년후 곧 폐지했다는 것은 한(漢)나라가 이지역을 지키기 힘들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창해군까지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다. 인접한 연나라, 제나라의 등 이민족의 공격에 방어도 해야 했다. 결국 어사대부인 공손홍의 건의에 따라 창해군을 폐지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예군 남려가 투항했을 당시 요동군에 귀속된 것을 보면 요수의 우측에 있는 요동군과 가까운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燕)과 제(齊) 지역이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창해군이 있던 지역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한다.
"예족의 지도자인 예군 남려가 고조선을 배신하고 28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고, 이에 팽오(彭吳)가 예(濊)와 고조선을 조율한 뒤 한이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당시 한나라는 패수(浿水)를 고조선과의 경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만번한(滿番汗)부터 마자수를 건너 패수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에는 그곳에 살던 고조선 친화적인 중국계 망명인들로 인하여 한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닿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진의 옛 빈 땅[秦故空地]'이라는 구절로 나타났다. 무제는 이곳을 영토화하고 패수까지 진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군현의 운영과 유지를 위한 물자 및 인력 징발로 인해 인접한 연(燕)과 제(齊) 지방[2]이 피폐해져 봉기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무제는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길까지 교통로를 정비할 것[3]을 명하였지만, 당시 어사대부였던 공손홍(公孫弘)의 건의로[4] 무산되고 창해군은 폐지된다. 인력과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고조선의 일부를 영토화하려 했던 무제의 시도는 불과 2년도 안 되어 무산되었다. 그러나 창해군이 폐지됐다고 그 땅을 한이 모조리 상실한 것은 아니고, 압록강 위쪽의 만주 땅에는 무차(武次)현, 서안평(西安平)현, 번한(番汗)현이 살아남아 요동군 동부도위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뒤, 동부도위 섭하가 고조선의 기습을 받아 살해당하고, 이후 고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창해군이 있던 자리에는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이 설치된다."
(자료 : 창해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나라, 펌글 참조)
필자가 요수로 추정한 론강의 우측에는 Rhone Valley로 알프스산맥의 일부이다. (본 블로그 글, 'Rhone River가 요수라는 주장의 근거' 참조). 필자가 추정한 진의 고공상하장이라 하는 왕검성지역도 이 근처 지역이다. (본 블로그 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독일의 라인강인가?' 참조). 따라서 창해군이 이 지역에서 지중해 바다에 접한 지역이라 판단된다. 이 지역 또한 요수의 동쪽이다. 우리는 대수맥, 소수맥의 맥족이 이 대요수, 소요수에 있는 것으로 안다. 따라서 이 근처에 창해군이 있던 예족이 살지 않았나 한다.
Roman Empire with Dioceses in AD 300 (source : Wikipedia)
3)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본 조조의 이야기와 창해의 위치
위(魏)나라 실질적 창업주인 조조가 북방의 오환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갈석산(碣石山)에 오르면서 즉흥적으로 읊었다는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각자해 놓았다 한다. 갈석산 중턱 바위에 새긴 이 시는 '동쪽으로 갈석산에 이르러 창해를 바라보니'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한다.
필자는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는 조조의 시를 언급하며, 갈석산이 론강의 서쪽, 'Massif central', 즉 요서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론강이 요수라면 갈석산은 어디인가?' 참조). 위나라의 북방의 오환은 중유럽지역으로 추정된다. 흉노의 묵특선우는 북방의 정령 (실위, 덴마크지역)를 점령했다. (본 블로그 글, '북부여계인 두막루와 실위는 북유럽에 있었다' 참조). 오환은 '정령(丁令)의 서남쪽이자 오손(烏孫)의 동북쪽에 있어서 외지고 빈곤하였다.'(자료 : 오환, 위키백과) (본 블로글, '프랑스 동남부 Occitania는 오손왕국인가?' 참조). 따라서 창해를 프랑스 'Massif central'에서 바라본 지중해로 추정했다. 필자가 위에서 창해군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한 것을 고려하면, 창해가 이태리반도 서쪽의 지중해라는 것이 밝혀진다.
4) 창해 3국에 대한 언급
사마천이 창해군(倉海君)을 예맥족으로 추정한 것을 보면 예군의 남려가 있던 곳이 동예인지도 모른다.왜나하면 동예는 실질곡국, 파조국과 함께 창해 3국이라 했기 때문이다. (아래 자료 참조)
"창해군(蒼海郡)은 설치된지(기원전 128년) 3년만에 폐지된 행정명이긴 하지만, ....... 즉, 초한쟁패기 혹은 그 이전부터 '창해'를 자칭하는 무리가 있었고, 후에 한무제에게 귀의한 이들이 이 이름을 계승해 사용하길 주청해 창해군이 설치된 가능성이 있다는 것.[2] 일단 사마천이 창해군(倉海君)의 정체를 예맥족으로 추측한 근거는 그러하다
반면, 장량이 만났다던 창해군이 진(秦)나라의 현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남쪽의 이민족 제오(諸奧)의 군장으로서 월나라가 초나라에게 멸망하자 월왕 무강(無彊)의 아들이 독립하여 스스로를 창해군(倉海君)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사람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동예는 실직곡국, 파조국과 함께 창해삼국이라 불렸다."
(자료 : 창해역사,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진나라, 펌글 참조)
그런데 창해 3국인 동예, 실직곡국, 파조국의 위치는 동예 아래에 실직곡국이 있었고 실질곡국 아래에 파조국이 있었다 한다. 동예가 요수 동쪽의 지중해 해안가에 있는 나라로 추정되는데, 만약 동예 남쪽에 실직국이 있다면, 실직국의 위치는 창해 바다에 있는 섬인지도 모른다. 실직국 남쪽에 있는 파조국도 그럴지 모른다.
"파조국(波朝國)[1]이 있었는데, 기록상으로는 서기 50년경에 실직국 안일왕(安逸王) 때 파조국을 침공해 합병했다. 10여년 뒤 윗쪽에서 동예가 쳐들어오자 안일왕은 잠시 나라를 남쪽인 파조국으로 옮겼다......
신라 파사 이사금 23년(서기 102년)에 남쪽의 음즙벌국과 영토 분쟁으로 싸움이 벌어지자...신라에게 중재를 요청했는데 신라는 금관국 김수로왕에게 떠밀었고, 김수로왕은 분쟁 지역을 음즙벌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판결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신라 귀족을 살해한 범죄자를 음즙벌국이 보호하다가 신라의 침공에 크게 털리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 타자가 될까 겁을 먹은 실직국도 알아서 신라에 자진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2년 뒤인 파사 이사금 25년(서기 104년) 허무하게 항복한 것이 아쉬웠는지 주전파와 주화파가 갑론을박하다 주전파가 힘을 얻었는지 곧 신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결국 신라가 보낸 토벌군에 패해 망했다."
(자료: 실직국,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펌글 참조)
파조국에 대해서는 별로 자료가 없다 단 실직국의 자료에서 파조국에 대한 주석 설명은 다음과 같다.
"파단국(波但國)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위와 외위는 관등명이 맞대어 지는데 파진찬에 맞대어지는 피일(彼日)은 금석문에서 파일(波日), 파단(波旦)으로 나타난다. 일(日)은 해로 피일(彼日)은 바다의 옛말 밯과 통한다. 파진찬(波珍飡)을 해간(海干)으로 부르기도 했고 파조현(波朝縣)을 해곡(海曲)으로 바꾼걸로 보아 파단국의 파단은 바다를 뜻한다. 파조현은 삼국사기에선 파차현(波且縣) 조선시대 서적에선 파조현이라 적혀있다. 조선에선 단(旦)자를 조(朝)자로 피휘했으므로 차(且)는 단(旦)의 오기로 보인다." (자료 : 실직국, 나무위키)
즉 파조국은 바다와 매우 관련이 많은 국명이다. 따라서 창해 가운데에 있는 섬나라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실직국과 파조국은 창해 바다에 있는 섬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실직국과 음즙벌국과 관련한 신라 파사이사금 시절의 상기 이야기를 고려하면, 지중해의 코르시카섬이나 사르데냐섬에 이들 국가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나 신라가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된다.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있을 수 있다는 암시가 또 나온다. 그리고 사르데냐섬은 그 위가 가라해라고 불려지는 주호국이라고 필자는 추정했다. 주호국이나 임나, 가라는 왜라 우리는 역사에서 말한다. 그러면서도 광개토태왕이후 금관가야(가락국, 가라?)는 약해지고 대가야가 강해졌다고 우리는 역사에서 말한다. 즉 가야가 왜가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도 그 위치가 가야의 위치를 말하고 있다. 만약 가야와 왜가 동일한 집단이라면, 지중해에 있는 금관가야는 시실리섬이나 Carthago가 될 수 있다. 김수로왕이 42-199 AD 재위기간을 말하고 있지만, 이 지역의 역사가 BC 3세기쯤에도 있었다 하면, 금관가야는 로마와 Punic War를 한 Carthago가 될 수 있다. 이는 필자가 요수가 론강이라는 것을 추정하기 전에, 그동안 가야를 파르티마제국과 로마 사이에 있는 아르메니아지역으로 추정했던 필자의 추정이 재검토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의 위치 추정도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므로 다음으로 미룬다.
단 이 글에서는 예(동예)가, 그동안 필자가 잠정적으로 추정했던 발칸반도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닌, 보다 서쪽으로 이동한 요수근처의 지중해 연안에 있다는 추정결과를 보여 준다. 앞으로 낙랑의 위치, 위례성의 위치 추정 등이 확인되면 보다 동예의 위치가 확실해 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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