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6. 15:03ㆍ한국사/기타
창해는 푸를 창(蒼) 또는 큰 바다 창 (滄)자를 쓴다. 한무제 당시에 예군 남려가 항복하여 세운 창해군은 푸를 창(蒼)자를 썼다. 반면 조조가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시를 읊었다는 창해는 큰 바다 창(滄)자를 썼다. 즉 창해는 푸르며 큰 바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황허강 등이 창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지중해는 예전부터 푸른 색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Carthago가 있는 튀니지아에서 푸른 색 바다색갈을 신성시하는 것도 그렇고, 터어키 아나톨리아지역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강을 Goksu (=Blue Water in Turkish)라 칭한 것도 그러하다.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창해군이 설치된 예군 남려의 지역을 알프스산맥이 있는 론강과 라인강의 상류지역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창해 3국의 동예는 동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고,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 동옥저가 있고, 서쪽으로는 낙랑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진한이 있다고 한다. (아래 예와 옥저 자료 참조)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예(濊)는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驪)·옥저(沃沮)와, 남쪽으로 진한(辰韓)과 접하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와 닿고, 서쪽으로는 낙랑(樂浪)이 있다. 예 및 옥저와 구려는 본시 모두 조선(朝鮮)의 땅이다.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飮食以籩豆.
옛날 무왕(武王, 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왕으로 봉하니,1 기자가 (조선 사람들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 누에치는 법 등을 알려 주었고 또한 8조(八條)의 가르침을 제정하였다. 그 사람들은 서로 언제나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호를 닫음이 없었고, 부인(婦人)들은 정신(貞信)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다.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準, 自稱王.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그로부터 40여 세(世) 후, 조선후 준(準) 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을 칭하였다. 한나라 초에 큰 난이 일어나 연(燕)·제(齊)·조(趙) 사람들로서 다른 땅으로 피해가는 자가 수만여 구였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으니, 나라를 전하기를 손자인 우거(右渠) 대에 이르렀다.
元朔元年, 濊君南閭等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臨屯·玄菟·眞番四(部)[郡].
원삭(元朔) 원년(B.C. 128)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이르러 내속하였는데, 무제(武帝, 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으나 수년만에 파하였다. 원봉(元封) 3년(B.C. 108)에는 조선을 멸하였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番)의 4군을 설치하였다.
至昭帝 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玄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 建武六年, 省都尉官, 遂棄領東地, 悉封其渠帥爲縣侯, 皆歲時朝賀.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에 임둔과 진번을 파하고 낙랑과 현도에 합쳤다.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겨갔다.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후에 그 경토(境土)가 넓어지자, 다시 (단단대산)영동(領東)의 7현(縣)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내속한 이후로 풍속이 점차 박(薄)해져 법으로 금하는 것도 또한 점차 많아져, 60여 조에 이르렀다. 건무(建武) 6년(30)에 (낙랑 동부)도위의 관직을 허물고, 드디어 영동의 땅을 포기하되, 그 거수(渠帥)들을 모두 현후(縣侯)에 봉하으니, 모두 해마다 조하(朝賀)하였다.
無大君長, 其官有侯·邑君·三老.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其人性愚慤, 少嗜欲, 不請匄. 男女皆衣曲領.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界, 不得妄相干涉.
대군장(大君長)이 없으며, 그 관직으로는 후(侯)·읍군(邑君)·삼로(三老)가 있다.2 늙은이가 스스로 이르기를 구려의 동종(同種)이라 하였으며, (고구려와) 언어와 법속이 대저 서로 비슷하였다.3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성실하며 기욕이 적어 청하거나 빌어먹지 않는다. 남녀는 모두 곡령(曲領, 깃이 둥근 옷)을 입으며, 그 풍속에 산천(山川)을 중히 여기니, 산과 냇가에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 함부로 서로 간섭할 수 없다.
同姓不昏. 多所忌諱, 疾病死亡, 輒捐棄舊宅, 更造新居. 知種麻, 養蠶, 作緜布. 曉候星宿, 豫知年歲豐約. 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祠虎以爲神.
같은 성(姓) 기리는 혼인하지 않는다.4 꺼리고 기휘하는 바가 많아, 질병으로 (사람이) 사망하면, 늘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로 지어 거하였다. 마(麻)를 심거나 누에치고 면포를 짓는 법을 알았다. 새벽에 별자리[星宿]를 살펴 그 해의 풍요함과 쇠함을 미리 알았다.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니, 이를 이름하여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낸다.
邑落有相侵犯者, 輒相罰, 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能步戰,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樂浪檀弓出其地. 又多文豹, 有果下馬, 海出班魚, 使來皆獻之.
읍락(邑落)에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다면, 늘 서로를 벌하여 생구(生口)와 소, 말로 배상하게 하니, 이를 이름하여 책화(責禍)라 한다.5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써 갚는다. 도적이 적다. 보전(步戰)에 능하며, 3장(丈) 길이의 창[矛]을 만드는데, 혹은 여러 사람이 이를 동시에 쓰기도 하였다. 낙랑의 단궁(檀弓)이 이 땅에서 나온다. 또한 무늬있는 표범이 많고,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는 반어(班魚)가 나는데 사신이 올때마다 이를 바친다.6"
(자료 : 후한서 동이전 예조,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낙랑 옥저 동예 부여, 펌글 후한서 동이전 예조 by 원한의 거리)
동예의 위에 있는 동옥저에 대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와 주변국에 대한 위치 설명은 다음과 같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하였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 예는 남으로 진,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6] "
(자료 : 옥저, 위키백과,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낙랑 옥저 동예 부여, 펌글 참조)
필자는 단단대령을 발칸반도의 Dinaric Alps로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벌한 개마국은 어디인가?' 참조) 상기 옥저에 관련 글에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동옥저의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고 했다. 필자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이 발칸반도 위의 Carpathian Mountains에 있는 Kezmarsky stit (2566m, in Slovakia)라고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벌한 개마국은 어디인가?' 참조) 이것을 고려하면 동예와 동옥저는 발칸반도 동쪽의 흑해에서 에게해에 접하게 된다.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스키타이족인 Thracia, Moesia가 있었다.
그런데 필자는 예군의 남려가 한나라에 항복하여 설치된 창해군의 위치가 알프스산맥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필자는 이 지역으로 4세기에 Burgundians인 동부여가 오데르강과 비스툴라강 사이의 폴란드지역에서 이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추정했다. (필자의 글,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참조). 따라서 이 지역에 있던 예족이 동부여의 침입으로 인하여 발칸반도의 동예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본다.
Roman Empire with Dioceses in AD 300 (source : Wikipedia)
우연히 접하게 된 재야사학자의 글, '원래의 창해군 예와 이동후 동예의 위치 찾기 -윤여동설'에서 동부여에 의해 예가 바닷가의 동예로 이동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동예가 이동한 것이 시간적으로 동일한 주장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부여에 의해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필자와 같은 추정이다. 단지 필자는 동예가 우리나라 동해에 접한 것이 아닌 흑해, 에게해에 접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다르다.
예는 위의 후한서 동이전 자료에서 '보전(步戰)에 능하며, 3장(丈) 길이의 창[矛]을 만드는데, 혹은 여러 사람이 이를 동시에 쓰기도 하였다.'는 기술이 눈에 띈다. 로마사에서 긴창을 이용하여 보병이 진군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동양사에서는 볼 수 없는 전술이다. 그런데, 필자가 추정한 동예의 위치인 발칸반도 이 지역에는 트라키아가 있었다. 트라키안은 우연인지 모르지만 긴 창을 쓰는 전술의 원천지로 기술된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Thracians, 펌글 참조). 특히 척후병으로서 긴 창을 쓰는 트라키언의 오랜 전통(Peltast)을 언급하고 있다.
Illustration of 5th–4th century BC Thracian peltast. (source : Thracians, Wikipedia)
그러나 트라키안은 인도유럽인이므로 중앙아시아 등에서 오래 전에 이동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이후 기원후 3-4세기 중간에 다른 곳에서 이동한 민족이라는 언급은 없다. 동예와 매칭하면 동예가 이 지역에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한나라 시절의 서양역사는 로마로 뭉뚱그려 놓아서 분리하여 분석할 수 없다. 로마공화국 시절에도 로마제국과 동일 영토를 가졌다고 그려 놓으니, 더욱 그렇다. 또한 한무제 시기에 로마공화국 역사에서는 특별한 전쟁을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창해군이 발칸반도에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 근처의 Dacians이 낙랑과 깊은 연관성을 보이는 것을 보면 위만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이 패수인 라인강에서 발칸반도까지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본 블로그 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독일의 라인강인가?' 참조). 그렇지만 고구려 태조왕 시기에 고구려는 예맥과 함께 후한(및 부여)과 싸운 역사를 볼 때, 후한시기에도 라인강 서쪽에 있던 한나라가, 아무리 한무제시절이라 해도, 발칸반도까지 전 조선지역을 정벌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따라서 창해군은 발칸반도 지역이 아닌 알프스산맥지역으로 추정되며, 예는 이 지역에서 동으로 이동하여 발칸반도에 와서 동예가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고구려 동천왕 시절, 위의 관구검의 침략시 고구려는 많이 밀려 옥저까지 피신한 상태였다 하는데, 이때 3세기에 예맥도 같이 동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을 살펴 보면,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밀렸다고 하는 자료도 있고 (관구검, 두산백과 자료,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 동옥저까지 피신했다는 자료도 있다. (관구검, 나무위키 자료,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 두산백과 자료는 남옥저까지 밀렸는데, 현도태수 왕기가 계속 추격해, 남쪽의 낙랑지역까지 동천왕이 피신했다는 언급도 있는 것으로 보아, 남옥저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더 후퇴한 것을 동옥저까지 피신한 것으로 기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천왕이 관구검과 초기 전투는 비류수강에서 있었는데, 나중에는 관구검에 의해 고구려가 환도성까지 함락당하고, 동옥저까지 피신한 것을 보면 대단히 많이 밀린 형국이다. 필자는 비류수강이 요수인 론강에 가까이 있는 강으로, 고구려 초기 주몽시절 송양의 비류국이 있는 프랑스의 Vienne지역으로 추정했다. (본 블로 글, '졸본천은 Rhone river의 지류 Jabron river로 추정된다' 참조). 그리고 북옥저, 남옥저는 스위스의 Augusta Raurica지역으로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북옥저는 스위스 북쪽 Augusta Raurica에 있었다' 참조).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동옥저는 발칸반도 동쪽 해안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론강에서 발칸반도까지 밀린 고구려의 형세는 매우 위중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왕명이 이 시대에 동천왕, 이후 회복기의 중천왕, 서천왕으로 이어지며, 고구려가 대서양인 서해까지 진출한 것으로 판단해 보면, 위나라의 관구검의 침입 역사는 사실인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는 왕이 죽으면 강에 묻는 관습이 있었는데, 다뉴브강가에 많은 묘지(graves)가 있다는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고한다면,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의 무덤이 점차 서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판단되어, 고구려의 서쪽으로의 회복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천왕 시기에 동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알프스산맥에 있는 평양(平壤)이 아닌 항가리 부다페스트의 동평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창해는 지중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한다. 갈석산에서 바라본 창해는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가 될 것이고, 동예의 창해는 발칸반도와 접한 지중해를 가리킨다고 본다. 따라서 창해 3국의 하나인 실직국, 파조국은 발칸반도 남쪽의 지역으로 추정되며, 실직곡국과 음즙벌국은 소아시아 터어키 아나톨리아지역에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지역은 진한이라 할 수 있으며, 페르시아에 진출한 파사이사금 시절의 신라가 아르메니아지역의 금관가야 김수로왕에게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분쟁 조정을 맡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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