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광개토태왕이 후연과 싸운 신성과 남소성의 싸움은 광개토태왕이 전투에서 패배한 기록으로 유일하다. 그래서 이러한 특징에 근거하여 신성과 남소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단 그동안 필자는 아래 글에서와 같이 광개토태왕이 고트족의 Alaric I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훈족과 고트족의 유럽에서의 역사는 그러므로 고구려의 역사라는 것을 밝혔으므로 이에 근거하여 추정하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압록수인 요수가 프랑스의 론강이라는 것과 동서로 천리에 걸쳐 있는 장백산이며, 태백산이며, 동시에 백두산은 알프스의 몽블랑산이라는 것을 아래 글과 같은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또한 아래 글과 같이, 패수는 라인강이며, 살수는 Saar river, 그리고 흉노의 시조 삭정을 봉한 고조선 시기의 약수는 스웨덴에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이들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것들에 바탕을 두고 추정하는 만큼, 이에 낯선 독자들은 아래 글을 먼저 읽고 본 글을 접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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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로마를 정벌한 훈족과 고트족의 일원인가?
서 론 그동안 필자는 최근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를 위시하여, '로마제국은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등의 글에서, 로마제국, 특히 비잔틴제국은 백제이다는 주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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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로마제국을 정벌했는가?
지난 글에서 우리는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훈족의 을딘, 고트족의 Alaric I이 유사하다는 것을 개인적인 자료, 왕조사를 비교하며 알아 보았다. 이 글에서는 지난 글에 이어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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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이 정벌한 후연은 어디 있었는가?
우선 후연과의 전쟁기록을 광개토태왕의 기록에서 살펴 보고, 이를 그 시대의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의 공격경로를 살펴 보자.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상술한 바와 같이,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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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one River가 요수라는 주장의 근거
1. 론강(요수)은 압록수이다. 다른 강에 비해 유난히 파랗다. 그래서 압록수이다. The Rhône (left) meeting the river Arve in Geneva 2. 론강(요수)은 3개의 강들이 만난다. 손강(Saune river)과 이제르강(Isere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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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로 천리나 펼쳐있는 장백산(백두산, 태백산)은 알프스산맥에 있다
필자는 그동안 론강이 압록수 즉 요수라 추정했다. 그리고 압록수에 가까운 백두산은 몽블랑산이 아닌가 했다. 오늘은 이 백두산=태백산=백산=장백산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해 보고자 한다. 이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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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는 패수인 라인강의 지류 Saar river이다
필자는 이미 라인강을 패수라 추정했다. 따라서 살수는 패수의 지류라고 밝혀진 바 라인강의 지류에서 찾아야 한다. 그동안 살수를 찾지 못해 여러 가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성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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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흉노의 시조 삭정을 봉한 약수지역은 동아시아에 없었다
단군 시기에 가륵단군이 BC 2177년 행실이 좋지 않은 요동태수 색정을 약수에 유배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용서하시고 그 땅에 제후로 봉하니 이가 곧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따라서 약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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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흉노에게 봉한 약수는 어디인가?
I. 머리말 지난 번 글에서 약수가 아시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리적 요건을 근거로 추정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러면 실제 약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실질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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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구려의 신성 남소성 관련 자료
아래에서 우선 신성과 남소성에 관한 국내의 역사자료를 살펴 보자
1) 삼국사기에서의 신성과 남소성에 관한 기록
아래 삼국사기 자료를 보면 고구려 서천왕 시기부터 신성에 행차한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 중천왕은 질투가 심한 왕비를 서해에 버린 기록이 있다. 필자는 이 서해가 대서양이 아닌가 한다. 즉 중천왕,서천왕 시기 고구려는 이미 서해 즉 대서양에 접했으므로, 요동(요수,론강의 동쪽)에 있는 신성에 행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국원왕 시기에 신성을 쌓았는데,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 오고, 345년에는 전연이 침략해 와서 남소성을 빼앗았다 했다. 즉 요동에 있는 신성과 남소성은 고구려의 국경에 연나라와 접한 지역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후 고구려가 이를 회복하였는지, 광개토태왕 9년, 399년(400년)에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빼았았다고 기록된다. 이후 광개토태왕은 2년후 이를 되찾았다고 위키백과 자료는 말한다. 양원왕 3년 547년에 신성을 수리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으므로 이를 말해 준다.
고구려 서천왕 (270-292)
7년 4월 (276) 신성에서 흰사슴을 잡다
7년 8월 (276) 신성에서 돌아오다
19년 4월 (288) 신성에 행차하다
19년 8월 (288) 흰사슴을 잡다
19년 11월 (288) 신성에서 돌아 오다
고구려 봉상왕 (292-300)
二年秋八月 모용외의 침략을 신성재 고노자가 물리치다 (293)
五年秋八月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296)
고구려 고국원왕
5년 1월(335) 신성을 쌓다
9년 (339)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오다
15년 10월(345) 전연이 침략해와서 남소성을 빼앗다.
(345-349) 4년 공백
고구려 광개토왕
9년 2월 (399)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고구려 양원왕 (545-559)
3년 7월 (547)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다
654년(보장왕 13년) 고구려 장군 안고가 신성에서 거란의 가한 이굴가에게 패퇴했다.
667년에는 당나라 이적의 공격을 받자 신성성주는 항전하려 하였으나 사부구는 성주를 결박하고 항복하여 결국에는 성이 함락되고 만다.
667년 연남생의 항복으로 목저성, 창암성 등의 성들과 함께 남소성은 당나라 (설인귀:두산백과)에 넘겨졌으며 (이 싸움에서 고구려 군사 5만이 죽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후에는 안동도호부에 예속되었다.
안시성, 요동성, 건안성 등과 함께 평양성이 함락되고 나서도 신성은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고연무의 부흥운동의 중심이 된 13개 성 중 하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하였다.
(자료 : 삼국사기, 서천왕, 고국원왕, 광개토왕, 양원왕, 인용출처 : 나무위키, 신성, 남소성, 위키백과)
2) 광개토태왕 시기 신성 남소성 전투 관련 자료
아래에서는 남소성과 신성에 관한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자료에 근거하여 고구려 역사에서의 전투관련 자료를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이는 이 성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차후 이들 위치를 추정한 것의 검토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남소성 (요동) (위키백과)
아래 남소성 전투 자료를 보면, 광개토태왕 시기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겼을 때, 국경지방 700여리를 잃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는 말한다. 즉 후연과의 전투에서 손실이 큰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2년후 탈환했다고 말한다. 고구려 말기에 연남생의 항복으로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이 당나라에 넘겨졌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 5만이 전사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는 말함), 이후에 이들 성들이 안동도호부에 속하게 되었다 한다. 즉 당나라와 고구려가 접한 지역에 이들 성들이 위치한 것임을 말해 준다.
" 400년 모용희 (모용귀: 두산백과)의 공격으로 신성과 함께 성을 후연에게 빼았겼지만 (이때 국경지방 700여리를 잃었으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02년 다시 탈환했다.
............
667년 연남생의 항복으로 목저성, 창암성 등의 성들과 함께 당나라 (설인귀:두산백과)에 넘겨졌으며 (이 싸움에서 고구려 군사 5만이 죽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후에는 안동도호부에 예속되었다. "
(자료 : 남소성, 위키백과,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신성 (요동)
신성에 대한 기록은 남소성 보다 더 풍부하다. 그리고 더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가까운 곳에 있으며, 거란, 연나라, 당나라 등과의 격전지였다. 아래 자료를 참고할 때, 신성은 다음과 같은 점이 요약된다.
(a) 신성은 3c부터 고구려의 서쪽 요충지로서 연나라, 거란, 당나라와의 전쟁시 중요 자역이었다.
(b) 당나라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신성은 안시성, 요동성, 건안성 등과 함께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이 된 13개 성중의 하나였다.
(c) 거란과 해족, 습족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거란 신성이라고도 한다.
(d) 백제의 부여 융이 신성에 와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다스렸는데, 부여 융이 죽은 후에는 발해, 말갈 등 여러 나라에 점령 되어 이곳에 있던 신성주(新城州)도 없어졌다 한다.
<위키백과>
"293년(봉상왕 2년) 음력 8월, 모용외가 침략했을 때, 신성태수이자 북부소형이었던 고노자가 기병 500기를 이끌고 신성으로 행차하려던 왕을 맞이하려다 모용외의 군대를 만나자 이들을 격파했다. 승전이후 고노자는 대형으로 승진했고 곡림을 식읍으로 받았다.
335년(고국원왕 5년)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고 종래의 신성과 다른 새로운 신성이 축성되었는데...
654년(보장왕 13년) 고구려 장군 안고가 신성에서 거란의 가한 이굴가에게 패퇴했다.
667년에는 당나라 이적의 공격을 받자 신성성주는 항전하려 하였으나 사부구는 성주를 결박하고 항복하여 결국에는 성이 함락되고 만다.
안시성, 요동성, 건안성 등과 함께 평양성이 함락되고 나서도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고연무의 부흥운동의 중심이 된 13개 성 중 하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하였다."
<나무위키>
"거란과 해족, 습족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거란신성이라고도 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원정하면서 거쳐갔으며 고구려 말기까지 당나라와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다.
신성의 고구려군은 613년 수양제의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당시 왕인공이 이끄는 수나라 군대를 막아냈으며 645년 당태종의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도 요동도행군 부대총관 이도종이 이끄는 당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낸다. 신당서에 의하면 645년 1차 여당전쟁 당시 요동도행군 대총관이었던 이세적이 "신성은 고구려 서쪽 경계를 지키는 성 가운데 최고의 요충지이다. 이 성을 먼저 도모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은 함락시킬 수 없다." 는 말을 남길 정도였으니 여수전쟁 및 여당전쟁에서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핵심 중추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667년 봄 발발한 3차 여당전쟁에서도 역시 수십만의 당나라 대군의 공격을 수개월 동안 잘 막아내었으나 667년 9월, 사부구 등이 신성주를 결박하여 이세적에게 항복하여 결국 당군에 함락되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669년 2월에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들 중 하나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삼국사기』에는 276년(서천왕 7) 왕이 이곳을 순시하였다고 한다. 봉상왕 때 모용외(慕容廆)가 변경을 침입하자 국상(國相)인 창조리(倉助利)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노자(高奴子)를 신성의 태수로 삼아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고국원왕 때 신성의 북쪽을 수축하였으며, 339년(고국원왕 9) 연나라 왕이 침입한 적이 있었으나 고국원왕이 성을 다시 튼튼히 쌓은 뒤 환도하였다고 한다.
신성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의 하나였으나 667년(보장왕 26) 9월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에게 함락되었다. 당나라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봉천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설치하고 옛 고구려 영토를 관할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부여융(扶餘隆)을 이곳에 데려와 안동도호부를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부여융이 죽은 뒤에는 이곳이 발해 · 말갈 등 여러 나라에 점령되어 이곳에 설치하였던 신성주(新城州)도 함께 없어졌다고 한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신성이 ... 요충지로 군사상 중요한 곳이라 하였고, 고구려도 이곳이 국도와 연결되는 국방상의 요해지로 중요시하던 곳이었다."
3) 광개토태왕 비문 속의 신성과 남소성
광개토태왕 비문에도 신성과 남소성이 언급된다. 먼저 신성과 남소성이 수묘인편에 등장하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다. 즉 광개토태왕 시기 신성과 남소성을 후연으로부터 회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덕중의 '태왕의 꿈' (덕산서원)자료에는 신성과 남소성이 백제를 쳐서 얻은 성중의 하나로 언급된다. 김기현의 자료나 나무위키의 자료 등에서는 미확인 글자로 남아 있다. 백제의 부여 융이 신성에 와 안동도호부를 다스린 것도 뭔가 백제와 연관성을 말하는 듯 하다. 신성과 남소성을 후연이라는 나라에 빼앗긴 언급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자료이다. 이렇게 볼 때, 거란, 연나라(전연과 후연), 백제, 당나라와 전투한 지역이 되는 신성과 남소성이 된다.
** 신성 남소성은 백제를 쳐서 얻은 성중의 하나 (김덕중, '태왕의 꿈' 자료)
김기현, 나무위키 등 다른 자료에서는 신성, 남소성이 백제 정벌지역 비문에서 미확인(언급 무) 된다 한다.
** 신성 남소성은 광개토태왕 비문 수묘인편에 등장 : 신성은 3가에 간연하고 남소성은 1가에 국연한다.
4) 거란과 연나라
상기 신성과 남소성 자료를 보면, 거란신성이니 하며 거란과 관련된 지역을 말하면서도 또한 전연, 후연 등 연나라와 관련된 신성과 남소성이다. 그래서 거란과 연나라의 차이점을 알아 보고자 한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를 보면, 거란은 당나라의 안동도호부 (거단주)에 속한 지역으로 언급된다. 또한 4세기경 거란은 모용선비의 연나라 영향력 아래 있다가 388년 북위에 토벌당한 후 일부가 고막해를 중심으로 독립한 세력으로 말하여진다.
"글단-걸단은 연원이 훨씬 오래된 발음일 가능성도 있는데,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난 뒤에 설치된 안동도호부의 속주 중 하나로 거단주(去旦州)가 있었으며 이는 고구려의 원래 행정구역명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
요사의 기록에 의하면 모용선비의 분파이나 거란사와 요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대체로 거란족이 동호계 선비족 중 우문선비의 분파로서 우문선비, 고막해와 함께 원 선비족에서 분리되었다고 인식한다. 4세기경 거란은 모용선비의 전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 하에 놓인다. 388년 고막해가 탁발선비의 북위에 토벌당해 부족들이 흩어지면서 독립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서에 기록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하나의 집단으로서는 이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 : 거란, 나무위키, 본블로그, 카테고리: 거란)
아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에서는 거란이라는 이름은 554년 편찬된 위서에 나오지만, 삼국사기에 소수림왕 시기 (378년) 거란이 북변을 침략하였고, 광개토태왕이 391년 거란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4세기경부터 거란이라는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기 나무위키 자료와 일맥 상퉁한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이는 패려가 거란의 한 지파로 추정한다고 한다.
또한 거란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907년 텡그리카간에 즉위하였다고 한다. 916년에는 중국식 황제를 자칭하고,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한다.
거란 관련하여 아래 자료에서, '텡그리카간'이나 ' 비려(碑麗)' 또는 '패려(稗麗 )'라는 언급은 거란이 한민족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거란어가 실위, 말갈, 두막루국의 말과 같다는 중국 사서내용 (아래 자료 참조)이나 유튜브 자료 (본 블로그, 카테고리, 거란 요나라, 자료 참조)를 고려하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북만주의 두막루와 실위는 북유럽에 있었다
부여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다 한다. 그러나 역사속에 나타나는 부여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북만주 탁리국(또는 색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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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이란 이름은 554년에 편찬된 『위서(魏書)』에 나오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소수림왕 8년인 378년에 거란이 북변을 침략하였다거나, 광개토대왕이 391년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패려(稗麗) 또한 거란의 한 지파(주7)로 추정하고 있다.
거란족은 8부족이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당나라 말과 오대(五代)의 혼란이 지속된 9세기 후반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통합되었다. 거란을 통일한 야율아보기는 907년에 ‘텡그리카간[天可汗]’에 즉위하였으며, 916년에는 중국식의 황제를 자칭하였다. 또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자료 : 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 블로그, 카테고리, 거란)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와 글단(거란) 및 두막루국과 같다." (북사 실위)
"실위는 글단(거란)의 별종으로....그 언어는 말갈이다. " (신당서 북적 실위)
(자료 : 길공구 님 블로그, 실위와 거란의 언어/몽올실위 관련 중국 정사 발번역,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공유자료, 카테고리, 말갈 거란 실위 물길)
아래 위키백과 자료에서는 모용황이 처음엔 조선왕을 칭하였다가 이후 연나라를 건국하고 337년 연왕을 자칭하였다는 것을 보면, 연나라 지역도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은 처음엔 조선왕(朝鮮王)을 칭하였고, 이후 연나라를 건국하여 337년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수도를 용성(龍城)으로 정하여 연나라를 건국하였다. 이 국가를 전연(前燕)이라고 불렀다"
(자료 : 모용부, 위키백과)
아래 나무위키 자료를 보면, 후연의 모용희가 거란을 정벌하러 12월 용성을 출발했다가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는데, 거란의 위세에 눌려 퇴각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거란과 연나라는 별개라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400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광개토태왕 시기에 연나라와 거란을 구분한 것과 일치한다.
"그해(405년) 12월, 후연의 황제 모용희는 다시 거란을 정벌하러 용성을 출발해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다가 생각보다 강했던 거란의 위세에 놀라 퇴각하고 만다. "
(자료 : 광개토태왕/생애, 나무위키)
이상을 고려할 때, 거란과 연나라는 구분되면서도 고구려의 서쪽이나 북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나라는 고구려의 서쪽, 요동과 요서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성과 남소성의 위치를 말해 준다.
그러나 거란신성이 해족, 습족의 중심지라는 언급은 거란이 연나라보다 더 우측 또는 북쪽에 있지 않나 한다. (아래 자료 참조)
해족(奚族)은 스위스에 있던 Helvetii족이다.
해족(奚族)은 스위스에 있던 Helvetii족이다.
최근 돌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돌궐 주위에 있는 해족에 대해 궁금하게 됐다. 과연 해족은 유럽 역사에서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필자는 과거, '고주몽이 정벌한 행안국은 스위스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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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5년에 광개토대왕은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 비려[12]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을 격파하니, 600 ~ 700영에 마소와 양떼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요동을 거쳐 국경을 돌아보고 사냥을 즐기다 왔다. ........
여기서의 비려 또는 패려에 대해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거란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요동과 인접해 있는 점에서 위치가 들어맞고, 사람을 돌려받으러 갔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서술과 일치한다. 구체적으로는 거란의 '필혈부(匹絜部)'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이설이 있지만, 적어도 요하 중, 상류 지역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자료 : 광개토태왕/생애, 나무위키)
III. 서양사에서의 관련 자료
서양사에서는 대충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5세기 초의 Immigration period를 묘사한다. 그러면서 훈족의 서진으로 말미암아, 게르만족들이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이 합세하여 서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밀려서 이동하는 것이라면, 같이 이동하는 것이 아닌 별개의 이동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같이 이동한다. 그리고 훈족과 다른 고트족을 언급하는데, 필자는 고트족이 훈족이고 고구려 세력이라 판단한다. 이미 위에서 본 필자의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AD 401 Pressure on Roman Borders (source : Wikipedia)
1) 고트족왕 Alaric I과 로마의 Stillicho 전투내용
고트족왕 Alaric I은 401-402년 로마제국의 Stillicho장군과 이태리 북부지역 싸움에서 두번 패했는데, 401년 Battle of Pollentia와 402년 Battle of Verona에서였다. 서고트족왕 Alaric I은 전투에서의 특출한 전술능력으로 당시 로마 황제 Honorius 가 감히 맞설 용기가 없었다 한다. 이러한 언급은 광개토태왕과 당시 백제왕 아신왕의 입장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럼 이제 이 두개의 전투에 대해 좀더 알아 보자.
"Stilicho's campaign in the North
Stillicho는 이태리북부에서 많은 군사를 모았다. 그는 이 군대로 401년에 서로마제국에 주요 위협이 되는 반달족과 알란족에 대항해 싸우려 했다. Raetia지방과 Noricum지방의 국경지역은 반달족과 알란족에 의해 유린될 위험에 있었다. Stillicho는 준비를 마친후 침력자들과 싸우러 북부지역으로 로마군과 함께 진격했다. (아래 자료)
Stilicho had assembled a large army in northern Italy. [7] [8] With this army he planned in 401 to march against the Vandals and Alans, who posed a major threat to the Western Roman Empire. The Vandals and Alans themselves were hunted by the Huns and the border provinces Raetia and Noricum were in danger of being overrun by the drifting peoples. After Stilicho had completed his preparations, he marched with the imperial army to the North against the invaders.
Siege of Asti (Asti의 포위)
Alaric 은 이러한 병력 움직임을 틈타 이태리를 이해 가을에 침략했다. Alaric은 Aquileia 도시 가까이 있는 반도의 알프스 국경을 넘는 길을 따라 이태리로 들어 왔다. 6-9개월에 걸쳐 이태리북부 길에 고트족의 침략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Alaric은 별 저항없이 Honorius 황제가 머무는 밀라노를 유린했다. 로마 황제는 고트족의 빠른 진격에, 황급히 도망쳤으나 Hasta(=Asti)도시 이상을 갈 수 없었고, 곧 Alaric에 의해 포위되었다. (아래 참조)
Alaric took advantage of this troop movement by invading the Prefecture of Italia, which happened in the autumn of that year. [9] Alaric's entry into Italy followed the route indicated in Claudian's poetry, when he crossed the Alpine border of the peninsula near the city of Aquileia. Over a period of six to nine months there were reports of Gothic attacks along the northern Italian roads, where Alaric was spotted by Roman travelers. Without encountering much resistance, he marched plundering to Mediolanum (Milan), where Emperor Honorius was staying. The emperor hastily fled from the rapid advance of the Goths, but did not get further than the city of Hasta, which was soon besieged by Alaric.
Stillicho는 알프스 북쪽에 주요 병력과 함께 머물렀다. 다가오는 겨울이 황제를 구하는 것을 막았다. 알프스 통로가 402년 3월 좋아지자, Stillicho는 선출된 변력으로 이태리로 돌아 왔다. Alaric은 Via Postimia길에서 Stillicho를 처음 맞딱뜨렸다. 이 과정에서 Alaric의 포위망은 뚫렸다. (아래 참조)
Stilicho stayed with the main force north of the Alps. The approaching winter prevented him from relieving the emperor. As soon as the Alpine passes permitted in March 402, Stilicho returned to Italy with a selected vanguard. Alaric first encountered Stilicho along the route over the Via Postumia. In doing so he forced Alaric to break the siege. [10]

The system of fortresses that protected the passage of the Julian Alps was abandoned in 401, allowing Alaric to begin his invasion of Italy.
Battles of Pollentia and Verona (Pollentia전투와 Verona 전투)
두개의 전투가 있었다. 첫번째는 402년 4월 2일 Pollentia에서 있었는데, Stillicho가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Alaric의 부인과 자녀들이 잡혔고 지난 5년간 Alaric이 취한 많은 보물들이 취해졌다. Stillicho는 퇴각하는 Alaric 군대를 추격했고, 포로 상환을 제시했으나 (Stillicho가 불리한 상황?) 거절되었다. 두번째 전투는 Verona에서 였는데, Alaric이 두번째로 패배했다. (아래 자료)
Two battles were fought. The first was at Pollentia on 4 April 402 (Easter Sunday), where Stilicho (according to Claudian) won an impressive victory by capturing Alaric's wife and children, and more importantly, by seizing much of the treasure take that Alaric had captured over the past five years. [11] Stilicho pursued Alaric's retreating troops and offered to return the prisoners, but was refused. The second battle was at Verona, where Alaric was defeated for the second time. [11]
(source : Gothic war (401-403),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2) 남소성과 신성 전투로 추정되는 전쟁
(1) Battle of Pollentia (401)
Pollentia전투는 402년 4월 6일 Stillicho의 로마군과 Alaric I의 서고트군 사이에 전투로서, 1차 고트족 이태리 침략(401-403)기간 중에 일어났다. 로마군은 승리했고 Alaric은 퇴각했다. 다음해 Verona전투에서도 Aaric은 패배했다. 이후 Alaric은 이태리로부터 철수하여, Stillicho의 죽음이후, 409년의 2차 침입까지 이 지역은 평화로왔다. (아래 참조)
"The Battle of Pollentia was fought on 6 April 402 between the Romans under Stilicho and the Visigoths under Alaric I, during the first Gothic invasion of Italy (401–403). The Romans were victorious, and forced Alaric to retreat, though he rallied to fight again in the next year in the Battle of Verona, where he was again defeated. After this, Alaric retreated from Italy, leaving the province in peace until his second invasion in 409, after Stilicho's death.[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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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ric은 일리리언 진용으로 재정비한 후 401년말 내지 402년초에 이태리를 침범했다. 밀라노의 궁정은 이 침범으로 곧 위협을 당했으나 Stillicho는 왕의 도주가 사기를 떨어뜨린다 생각해, Honorius왕이 머무를 것을 설득하고, Stillicho는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Gaul과 독일의 barbarians들로 병력을 충원하였다. 이태리에는 고트족에 저항할 병력이 없었다. (필자 주 : 의문이 가는 설명). Rhaetia를 침범하는 Alemanni는 Stillicho에 의해 패배하여, Gaul사단에 합류하여, Stillicho가 왕을 구하는데 같이 싸웠다. (아래 참조). (필자 주 : 실제로는 Alemanni병력이었다는 설명)
Alaric, established in his new Illyrian command, now set his sights on the western empire. Crowned king of the Goths by his troops for his successes hitherto, Alaric only waited long enough to exploit the resources of the Imperial armories in the province to finally supply his troops with adequate weapons and armor,[19] and then invaded Italy, in late 401 or early 402.[20] The Imperial court at Milan was immediately threatened by the invasion, but Stilicho, thinking that the emperor's flight would demoralize his subjects, persuaded Honorius to stay put while he himself crossed the Alps north to recruit reinforcements from Gaul and the barbarians of Germany. Italy itself contained no forces with which to resist the Goths. The Alemanni, who were then invading Rhaetia, were won over by Stilicho, and joined the Gallic legions, whom they had been fighting, in Stilicho's effort to save the emperor.[21][11]: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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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icho의 도착으로 Hasta 포위가 중단되자. barbarians은 서쪽으로 Pollentia로 퇴각했다. 일부 병사들은 계속 퇴각하기를 바랐으나, Alaric은 로마군과 일전을 치룰 준비를 했다. Stillicho는 Alaric을 기습작전을 펴 402년 4월 6일 Easter Sunday에 공격했다. 이때 아리언 고트족은 종교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엇갈리고 있다. 대부분의 로마 자료는 확실한 승리를 주장하나, 고트족 사가는 그 반대의 결과를 확인한다. (아래 참조). (필자 주 : 서로 이겼다고 하는 주장은, 각각, 한번 패하고, 또 한번은 이겼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추정함)
Interrupted (as above) by Stilicho's arrival in the attempt to lay siege to Hasta, the barbarians retreated west to Pollentia. Although some of his soldiers wished to continue the retreat, Alaric remained resolved to force the issue, and prepared for a pitched battle with the Roman army. In view of this Stilicho, hoping to take Alaric by surprise, chose to attack on Easter Sunday, 6 April 402, when the Arian Goths would be occupied with religious celebration. (Stilicho's impiety is a subject of scandal amongst some Christian historians.)[23][24]: 55 The result of the ensuing battle is a subject of partisan controversy, with most of the Roman sources claiming a clear victory, while the Gothic writers affirm the opposite result.[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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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math
이후, 403년까지 Alaric과 서고트군은 발칸지역으로 물러나,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405년 내지 407년에 Stillicho와 Allaric은 조약을 맺어 4천파운드의 금과 절대적 충성을 맞교환했다. (아래 참조) (필자 주 : 4천파운드의 금을 제공했다는 것은 로마군이 패배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By 403 Alaric and the Visigoths had been pushed back to the Balkans where they remained a minor threat.[11]: 512 In 405 (according to Adrian Goldsworthy) or 407 (according to Averil Cameron) Stilicho and Alaric formed a treaty which conceded the latter's demands of title for himself and concession of 4,000 pounds of gold for his troops in exchange for absolute allegiance to the former.[29]: 139
(source : Battle of Pollent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2) Battle of Verona (402)
Verona전투는 402년 6월 Alaric의 서고트군과 Stillicho가 이끄는 로마군 사이의 전투이다. Alaric은 패배하여 이태리로부터 철수했다. .... Alaric은 401년말 알프스와 Adige강을 건너 이태리를 침범했다. Stillicho는 밀라노에 있는 왕궁을 방어하기 위해 Gaul지역인의 병력충원을 위해 북쪽으로 달려갔다. (아래 참조)
"The Battle of Verona was fought in June 402 by Alaric's Visigoths and a Roman force led by Stilicho. Alaric was defeated and forced to withdraw from Ital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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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ric invaded Italy in late 401, crossing the Alps and the River Adige, and Stilicho dashed north to bring reinforcements from Gaul for the defence of the emperor's court at Mediolanum (modern Milan)......
Alaric은 협정을 준수하기 위해 포강을 건너 Gallia Transpadne로 (북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고, Stillicho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Alaric은 그러나 라인강을 건너 Gaul지역으로 서로마를 침범하는 계획을 시작했다. Alaric의 계획과 이동을 알아챈 Stillicho는 Gaul지역에서 Rhaetia로 오는 산의 길목에 복병을 두었다. (아래 참조)
In obedience to the treaty Alaric led his army north, and crossed the Po into Gallia Transpadne, closely shadowed by a cautious Stilicho. Once across the river, however, Alaric began plotting a new invasion of the Western Empire, this time across the Rhine into Gaul. Stilicho, kept informed of Alaric's plans and movements by spies within the Gothic camp, considered himself absolved of the treaty, and laid an ambush for the Goths in the mountain passes from Gaul into Rhaetia, which lay on Alaric's proposed route.[8]...........
Battle[edit]
고트족은 Verona가까이 있는 산계곡에 갇히고 사방은 Stillicho 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Alaric의 군은 심한 손실을 입었으나, Alaric과 그의 용감한 병사들은 로마 병사 포위망을 뚫고 옆의 언덕에 위치했다. Stillicho의 비판에 의하면, Alaric은 줄어든 병력에 나쁜 조건에서 쉽게 끝내, 동서로마제국에 심각한 위협을 영원히 끝낼 수 있었다 한다. 여하튼 Alaric은 도망쳐 알프스를 넘어 일리리아로 갔다. 고트족왕은 계속 추격되었다. (아래 참조)
The Goths found themselves trapped in the mountain valleys near Verona, surrounded on all sides by Stilicho's forces. In the battle that ensued, named after the neighbouring city, Alaric's army suffered heavy casualties, though the king himself managed to break through the Roman lines to erect his standard on an adjacent hill, followed by his bravest soldiers.[9] According to Stilicho's critics, Alaric with his reduced army were in sufficiently bad condition at this point as to have easily been exterminated, forever terminating a serious threat to the Roman Empires of East and West. In any case, Alaric was able to escape and straggle over the Alps into Illyricum with the sorry remains of his once-splendid army. For the moment, the Gothic king was thoroughly chaste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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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icho의 Alaric에 대한 402년 승리는 그러나 재앙의 연속으로 이어져 불명예스럽게 408년 죽음을 맞았다. 405-406년의 게르만족의 수장 Radagaisus(고트족)의 침범은, 비록 Stillicho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그 이후, Gaul지역으로 향해, Gaul지역이 유린되고, 로마제국에서 영원히 상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래 참조)
Stilicho's triumph over Alaric in 402 was followed by a series of disasters which culminated in the Magister militum's disgrace and death in 408. The invasion of Radagaisus at the head of a large Germanic army (405-6), though repelled by Stilicho, was redirected in the next years on Gaul, which was overrun and permanently lost to the Empire.[11]
Stillicho는 그 다음해 Constantine III의 반역을 막을 수 없었으며, Costantine III는 게르만을 회유하여 이들이 Britain, Gaul, Spain을 취하도록 했다. 후에 Stillicho는 왕궁의 경쟁자인 Olmpius의 계략에 빠져, 사형당했다. (아래 참조)
Stilicho was unable to prevent the usurpation of Constantine III in the next year, who conciliated the Germans and thus took control of Britain, Gaul, and Spain.[12] In the year afterward, Stilicho himself fell to the intrigues of Olympius, his rival in the court of Honorius, and was executed at the latter's misguided orders.[13]
(source : Battle of Veron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3) 남소성과 신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의 존재
(1) Castle of Pollenzo
a) Pollentia (Pollenzo 성곽 소재지)의 로마시기의 군사적 요충지 여부
Pollentia는 Tanaro강의 좌측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고대에는 Ligurian 문화지역이다. 토리노에서 남부 지중해 해안으로 가는 길의 위치이며, Hasta(Asti)로 가는 갈라지는 위치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이다. (아래 자료 참조)
즉 토리노에서 남쪽으로 지중해 해안으로 가는 주요 길목에 위치한 것이다. 또한 로마제국 왕 Honorius가,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왕 Alaric I이 수도인 밀라노를 점령하자, 피신하여 Arles(프랑스 남부)로 가고자 했으나, 고트족의 기병에 막혀 Asti(Hasta)에 머물렀는데, 다행히 긴 city walls 덕분에 고트족의 포위 공격을 버티다가, 라인강지역으로부터 Stillicho의 원군이 와서, Asti로 가는 길목인 Pollentia전투에서 고트족왕 Alaric I에게 승리했다는 것이다. (아래의 Asti 내용 참조)
"Pollentia, known today as Pollenzo (Piedmontese: Polèns), was an ancient city on the left bank of the Tanaro. It is now a frazione (parish) of Bra in the Province of Cuneo, Piedmont, northern Italy.
In antiquity Pollentia belonged to the Ligurian Statielli, Augusta Bagiennorum (modern Roncaglia in the Comune of Bene Vagienna) being 16 km to the south. Its position on the road from Augusta Taurinorum (modern Turin) to the coast at Vada Sabatia (modern Vado Ligure, near Savona), at the point of divergence of a road to Hasta (modern Asti), gave it military importance. Decimus Brutus managed to occupy it an hour before Mark Antony in 43 BC. Here Stilicho on April 6, 402, fought the Battle of Pollentia with Alaric I, which though undecided led the Goths to evacuate Italy."
(source : Pollent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Piedmont Province, Italy (source : Wikipedia)
Piedmont Province (source : Wikipedia)
Asti city walls, Italy
In 124 BC the Romans built a castrum, or fortified camp, which eventually evolved into a full city named Hasta. In 89 BC the city received the status of colonia, and in 49 BC that of municipium. Asti became an important city of the Augustan Regio IX, favoured by its strategic position on the Tanaro river and on the Via Fulvia, which linked Derthona (Tortona) to Augusta Taurinorum (Turin). Other roads connected the city to the main passes for what are today Switzerland and France.
The city was crucial during the early stages of the barbarian invasions which stormed Italy during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In early 402 AD, the Visigoths had invaded northern Italy and were advancing on Mediolanum (modern Milan) which was the imperial capital at that time.
Honorius, the young emperor and a resident in that city, unable to wait for promised reinforcements any longer, was compelled to flee from Milan for safety in the city of Arles in Gaul. However, just after his convoy had left Milan and crossed the River Po his escape route through the Alps was cut off by the Gothic cavalry. This forced him to take emergency refuge in the city of Hasta until more Roman troops could be assembled in Italy. The Goths placed Hasta under siege until March when General Stilicho, bringing reinforcements from the Rhine, fought and defeated them at the Battle of Pollentia.
After this first victorious defence, thanks to a massive line of walls, Hasta suffered from the barbarian invasions which stormed Italy after the fall of the Western Empire, and declined economically.
(source : Asti (Hast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b) Alemanni의 참전
그런데 Stillicho의 원군에는 Alemannie의 병사가 있었다는 아래 기록이 심상치 않다. 이태리에는 고트족에 대항할 군사가 없었는데, Rhaetia지역을 침략한 Alemanni를 Stillicho가 이겨서 이들을 데리고 싸워서 왕을 구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즉 Alemanni병력이 Pollentia전투에서 Alaric I 고트족왕에게 이겼다는 것이다. 이는 묘하게 후연의 모용희가 광개토태왕에게 이겼다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필자는 Alemanni가 거란, 연나라가 아닌가 추정했다. 더구나 Stillicho도 아래에서 검토되겠지만, 후연의 모용희와 사망년대가 매우 유사하다. 후연의 모용희는 407년 권력 다툼 끝에 풍발의 거사로 암살되었지만, Stillicho는 Suebi족의 일종인 Vandals족 출신으로 권력다툼 끝에 408년 죽었다 한다.
또한 한국사에서는 광개토태왕이 2년 후 남소성, 신성을 회복했다고 한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신성, 남소성에 수묘인을 둔 것을 보면 이는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사에서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런데 아래 기록에 Pollentia전투의 승패에 대한 주장이 엇갈린다 한다. 로마소스에는 이들이 이겼다 하고, 고트족 사가는 그 반대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이는 처음에 후연이 이겼다가 2년후 다시 광개토태왕이 회복하였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서로 이긴 것만 주장하는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더욱 이곳은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희가 싸운 곳으로 추정된다.
"Italy itself contained no forces with which to resist the Goths. The Alemanni, who were then invading Rhaetia, were won over by Stilicho, and joined the Gallic legions, whom they had been fighting, in Stilicho's effort to save the emperor.[21][11]: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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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sult of the ensuing battle is a subject of partisan controversy, with most of the Roman sources claiming a clear victory, while the Gothic writers affirm the opposite result.[25]"
(source : Battle of Pollent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c) Pollenzo Castle은 남소성인가?
(a) Pollentia는 남부의 지중해 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이다.
신성은 고구려의 국도로 연결되는 도로에 있다 했다. 필자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압록수 요수 가까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요수인 론강의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요수인 론강은 알프스의 원천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 지중해로 흐른다. 따라서 서쪽으로 흐르는 지점에서 스위스의 어느 도시가 아닌가 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즉 남부 지중해 해안으로 가는 지점에 있는 Pollentia는 신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남소성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신성이 ... 요충지로 군사상 중요한 곳이라 하였고, 고구려도 이곳이 국도와 연결되는 국방상의 요해지로 중요시하던 곳이었다."
발해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발해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백제의 한성 추정에 앞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평양성을 공격했고, 근초고왕은 평양성 남쪽에 (북)한성을 수도로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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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연남생의 항복과 남소성
남소성은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의 아들들 권력 다툼에서 진 연남생의 당나라에의 항복에서도 언급된다. 목저성, 창암성 등과 함께 설인귀에 넘겨졌는데, 전투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잘 판단이 안선다. 그러나 남소성의 이러한 유사한 이야기가 서양사에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667년 연남생의 항복으로 목저성, 창암성 등의 성들과 함께 남소성은 당나라 (설인귀:두산백과)에 넘겨졌으며 (이 싸움에서 고구려 군사 5만이 죽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후에는 안동도호부에 예속되었다. "
(자료 : 남소성, 위키백과)
그런데 필자는 우연히 흑해위의 Old Great Bulgaria에 대한 역사를 접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고구려 말기의 일부 역사로 보인다. (아래 필자의 글 자료 참조). 그런데 이 자료에서 Kubrat Khan은 연개소문으로 추정된다. 연개소문은 폴란드 지역의 역사 Samo's Empire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2856441040
흑해위 Old Great Bulgaria는 고구려 말기의 역사이다
흑해위 지역에는 AD 632년부터 불가리아가 나타난다. Old Great Bulgaria, Kara Bulgar, Volga 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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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Khan Kubrat의 아들들이 왕권다툼으로 분열하여 나라가 망할 때, 셋째(Asparukh), 넷째(Kuber) 아들들은 발칸으로 피신하고, 막내 다섯째(Alcek, Alzek)는 이태리로 피신했다 했다. (아래 인용 글 참조). 필자는 이태리로 피신한 Alcek이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으로 추정된다. 667년 연남생은 이 당시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하였다. 즉 여기서도 남소성이 이태리 북부에 있는, 고구려의 남쪽에 있는 성의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다.
"After Kubrat's burial in Mala Pereshchepina, the Khazars, who had triumphed in the collapse of Onoguria, subjugated Kubrat's eldest son and heir Batbayan, forcing his other sons to flee north up the Volga (2nd son Kotrag) and west into the Balkans (4th son Kuber and 3rd son Asparukh) and Italy (5th son Alcek, Alzek)[19] "
(자료 : Old Great Bulgar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lostcorea), 카테고리, Bulgars 참조)
그런데 667년 당시 이태리 북부는 Lombards에 속했다. 필자는 Lombards역사가 신라의 진흥왕의 역사라 추정한다. 당시 이태리 지역을 두고 백제의 성왕(Byzantine)과 신라의 진흥왕(Lombards)이 다툰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이태리는 고구려의 점령지역이었다. (고구려로 추정되는 Odoacer and 동고트족 점령지역). 그러면 당나라에 항복했다는 연남생의 이야기가 신라로 간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였지만 동일체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운동이 고구려 멸망 후에도 일부 13개 성을 중심으로 있었다. 이때 신라는 안동도호부, 계림도독부 등의 당나라 야심에 대적하여,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대적했다 한다. 이와 비슷한 역사가 서양사에서 서고트왕국의 일부가 남프랑스지역에서 버티는 역사가 있었다. 바로 Septimania지역인데 (아래 지도 참조), 719년 아랍세력(신라)이 점령하였는데, 결국 759년 Frank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아래 자료 참조). 남소성으로 추정되는 Pollenzo Castle이 Septimania지역의 우측에 있지만 유사한 지역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상기 연남생으로 추정되는 Alzek가 이태리로 갔다는 것이 설명된다고 본다.
Map of Septimania in 537 AD (source : Wikipedia)
Septimania[1] is a historical region in modern-day southern France.[2] It referred to the western part of the Roman province of Gallia Narbonensis that passed to the control of the Visigoths in 462, when Septimania was ceded to their king, Theodoric I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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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gion of Septimania was invaded by the Andalusian Muslims in 719, renamed as Arbūnah and turned into a military base for future operations by the Andalusian military commanders.[5][6] It passed briefly to the Emirate of Córdoba, which had been expanding from the south during the same century, before its subsequent conquest by the Christian Franks in 759,[5][6] who by the end of the 9th century renamed it as Gothia or the Gothic March (Marca Gothica). After the Frankish conquest of Narbonne in 759, the Muslim Arabs and Berbers were defeated by the Christian Franks and retreated to their Andalusian heartland after forty years of occupation, and the Carolingian king Pepin the Short came up reinforced.[5][6]
667년 연남생이 이태리로 갔다는 상기 추정은 또한 이렇게도 설명된다. 당시 이태리북부와 중부는 아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Lombards왕국이었으며, 이는 신라의 진흥왕시기부터 진출한 지역이다. 결국 774년, 롬바르드 왕국(신라 일부) 이태리지역 대부분은 프랑크왕국(당나라)에 귀속된다.
https://lainfos.tistory.com/321
롬바르드는 진흥왕의 신라지역이다
I. 서론 그동안 신라의 위치에 대해 고심해왔다. 파사이사금이 있으니 페르시아 지방에 있는 것 확실하여, 그동안 페르시아 역사로 비교하며, 신라가 사산왕조 페르시아라는 것을 밝혔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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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bards Kingdom in 652 (source : Wikipedia)
(c) Pollenzo Castle의 역사
아래 사진의 Pollenzo castle은 19세기 재건축된 것이다. 그러나 로마시대부터 요새로서 존재하며 여러번 세워지고 파괴되었다 한다. 고고학적 유물로 보아도 로마시대부터 중세까지의 성곽으로서의 존재를 알수 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그 아래 사진은 성곽과 이어진 Pollenzo church인데, 고딕양식으로 1940년대에 지었다 한다. 기존의 토대위에 다시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남소성은 광개토태왕의 수묘인제에 등장하는 성이기에 교회안에 tombs가 있었을 수 있다. 흔히 발견되는 역사이다.
"In the two-thousand-year history of Pollenzo ("Pollentia" for the Romans) fortifications, castles and churches have been built and destroyed several times.
The ancient Pollenzo - the Museum of Bra - included in the circuit of the Open Castles - exhibits finds from the Roman and early medieval periods from the archaeological excavations of the site -
(source: Castle of Pollenzo, wikipedia)
Pollenzo Castle, Italy
Church of Pollenzo (source : Wikipedia)
(2) Castelvecchio (Old Castle 의미) in Verona
이제 Verona에 있는 Castlevecchio 성이 신성인가에 대해 검토해 보자.
Italia, Annonaria, AD 400
a) 로마제국 시기의 Verona 역사
Verona는 로마제국 초기부터 전력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특히 Adige valley를 건너 북쪽유럽에 연결되는 지점으로 전력적 중요성을 가졌고, 이는 Via Claudia Augusta (Ostiglia부터 Brenner Pass를 거쳐 오늘날이 오스트리아로 가는 길)를 건설하게 했다. (아래 자료 참조)
"Under the Augustan Empire, the city became an even more important strategic hub, as it was used as a temporary base for the legions, particularly after the conquest of Raetia and Vindelicia (15 BC). It was precisely the increased importance of the Adige Valley as a link with northern Europe, and by virtue of Verona's strategic importance, that allowed the construction of the Via Claudia Augusta, which led from Ostiglia (where another road from Rome arrived) to the Brenner Pass and thus into present-day Austria. Augustus provided for the territorial rearrangement of the peninsula by subdividing it into eleven regiones; Verona was then incorporated into the Regio X Venetia et Histria, which included the populations of the Cenomani Gauls, Rhaetians, Euganei, Veneti, Carni and Histri.[26]
(source : History of Veron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2세기 들어서는 로마제국의 249년, 283년, 312년의 civil wars의 장이 되었다. 그래서 Verona는 북쪽 유럽으로부터 침입에 노출되었는데, 예를 들어 Marcomannic Wars에서는 Aquileia가 포위되는 상황이 있었다. 그래서 265년에는 Arena를 포함하는 city walls이 확대되었다. 이는 특히 Alemanni가 Ravenna까지 내려 오는 일이 있은 후에 결정되었다. 이 Verona walls은 Alemanni가 다시 이태리를 쳐들어와 Verona시를 포위 공격하는 것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래 자료 참조)
Beginning in the second century, Verona, like most cities in northern Italy, lost its function as a center of first importance, but became the scene of Roman civil wars: the city was affected by the wars involving Emperor Philip the Arab and Decius in 249, Carinus and Julian of Pannonia in 283, and Constantine I and Ruricius Pompeianus, with the battle of 312. Verona was then exposed to barbarian invasions and was Italy's first bulwark against attacks from northern Europe, such as during the Marcomannic Wars at the end of the second century, when a horde of Marcomanni and Quadi, who had recently besieged the city of Aquileia, were expelled by the imperial troops of Emperor Marcus Aurelius, who was advancing near the city.[30][31]
......
Emperor Gallienus, in 265, had the city walls enlarged to include the Arena, fortifying it in only seven months, from April to December of that year, as is attested by the inscription on the architrave of Porta Borsari: this decision was made after the Alemanni had pushed as far as Ravenna. With Gallienus, a period of tranquility began for the city, but ensuring its security meant burdens and taxes on the citizens that made it less prosperous. Under Claudius Gothicus, the walls served as a deterrent against the siege of the city by the Alemanni, who, having reentered Italy, decided to abandon it.[32]
(source : History of Veron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401년에 고트족이 Venice를 침략했고, 402년에는 고트족왕 Alaric I이 Verona city walls에 갇히는 상황이 되었고, 그 다음해에 Battle of Verona에서 고트족은 다시 패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침략은 자주 있었으며, 452년 훈족 왕 Attilla라는 이태리를 침범하여 50만명을 동원하여 Verona까지 파괴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The 4th century was a relatively quiet period for the city, and it was not until the 5th century that new battles took place: already in 401 the Goths invaded Venice, and in 402 their defeated king Alaric I locked himself inside the city walls, but the following year they were defeated again at the Battle of Verona.[33] Invasions were frequent during this period: in 452, the Hun king Attila invaded Italy, leaving a trail of destruction with half a million men that ended in Verona: there he was met by a delegation of the Roman Senate, composed of Pope Leo I, the consul Gennadius Avienus and the prefect Trygetius, who persuaded the Hun king to retreat to Pannonia.[34]
(source : History of Veron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b) 역사속에서의 신성과 Verona
아래 자료를 보면 신성은 고구려 서천왕 시기(276년)부터 언급된다. 모용부와의 싸움으로 293-399년까지 고구려는 신성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667년이후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의 서쪽 요충지로 언급된다.
고구려 서천왕 (270-292)
7년 4월 (276) 신성에서 흰사슴을 잡다
7년 8월 (276) 신성에서 돌아오다
19년 4월 (288) 신성에 행차하다
19년 8월 (288) 흰사슴을 잡다
19년 11월 (288) 신성에서 돌아 오다
고구려 봉상왕 (292-300)
二年秋八月 모용외의 침략을 신성재 고노자가 물리치다 (293)
五年秋八月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296)
고구려 고국원왕
5년 1월(335) 신성을 쌓다
9년 (339)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오다
고구려 광개토왕
9년 2월 (399)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고구려 양원왕 (545-559)
3년 7월 (547)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다
654년(보장왕 13년) 고구려 장군 안고가 신성에서 거란의 가한 이굴가에게 패퇴했다.
667년에는 당나라 이적의 공격을 받자 신성성주는 항전하려 하였으나 사부구는 성주를 결박하고 항복하여 결국에는 성이 함락되고 만다.
안시성, 요동성, 건안성 등과 함께 평양성이 함락되고 나서도 신성은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고연무의 부흥운동의 중심이 된 13개 성 중 하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부여융(扶餘隆)을 이곳(신성)에 데려와 안동도호부를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부여융이 죽은 뒤에는 이곳이 발해 · 말갈 등 여러 나라에 점령되어 이곳에 설치하였던 신성주(新城州)도 함께 없어졌다고 한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신성이 ... 요충지로 군사상 중요한 곳이라 하였고, 고구려도 이곳이 국도와 연결되는 국방상의 요해지로 중요시하던 곳이었다.
(자료 : 삼국사기, 서천왕, 고국원왕, 광개토왕, 양원왕, 인용출처 : 나무위키, 신성, 남소성,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상기 내용은 고구려가 3세기부터 신성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가까이 있는 연나라와 신성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로마 역사에서는 연나라 또는 거란으로 보이는 Alemanni와 Verona에서 다툰 기록을 보인다. 그런데 필자는 로마제국을 백제로 추정했다. 필자는 Julius Caesar는 고구려의 주몽으로 추정하며, 반면 Augutus는 백제왕 온조로 추정한다. 따라서 다소 혼합된 역사로 보이는데, 삼국사기의 백제, 고구려에 대한 자료 부실(공백기간이 너무 많음)로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또한 필자는 이태리반도의 로마등 중부이남 지역은 서신라지역이 아닌가 한다.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로마는 외적이 로마시를 압박할 때, 로마시를 지킬 병력이 없어 다른 곳에서 병력이 와야 지킨다는 상식밖의 이야기를 자주한다. 시실리 지역은 임나 왜의 지역으로 보이며, 라벤나 등 지역을 포함한 이태리 북부 일부지역은 백제로 추정된다. (인도의 라마야나 신화 기록은 라마와 라벤나의 싸움을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Verona지역의 역사가 백제의 역사가 아닌 고구려의 역사일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고구려의 미천왕 시기 고구려는 낙랑군 대방군을 축출했으며, 서안평을 점령했다. 서안평은 낙랑군, 대방군이 중국 본토와 연락하는 길목에 있었으며, 이를 점령하자 낙랑군, 대방군이 고구려군에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서안평이 프랑스 남부 론강 하류지역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이후 고구려가 이태리 북부의 서쪽일부를 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Alemanni (연나라, 거란) 관련하여 고구려의 역사와 유사한 로마역사 대응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로마제국 역사에서 359년 Julian 왕(361-363 재위)은 Mainz에서 라인강을 건너 Alemanni의 6개 소국왕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로마인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한다.(아래 참조)
"The Roman writer Ammianus Marcellinus reports that Julian crossed the Rhine at Mainz in 359 and concluded a peace treaty with the Alemannic kings Hariobaud, Macrian, Urius, Ursicinus, Vadomarius and Vestralpus after they agreed to return all prisoners."
이때는 고구려의 고국원왕 (재위 331-371) 시기이다. 고구려는 이 시기에 전연의 모용황으로부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 받고(343년), 고국원왕의 왕모 주씨를 돌려 받았다 (355년).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후 356-368년 13년간 기록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묘하게 359년 기록이 있는 시기가 공백으로 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시기 (392, 395년) 패려, 비리(거란으로 추정)가 고구려인 포로들을 돌려 보내지 않자 공격하여, 거란에 잡혀있던 고구려 백성, 만명을 되찾아오는 것은 물론, 거란족 500명까지 포로로 잡아 왔다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거란족은 약탈하며, 마을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로마제국에서도 Alemanni와 전쟁이 많았던 바 (265년, 268-269년, 271년 등), 포로가 된 이들이 많아 359년 Julian왕이 구해왔다고 할 수도 있다. 상기 고국원왕 시기 공백을 고려하면 뭔가 숨기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이므로, 고구려와 연나라의 역사를 로마제국과 Alemanni의 역사로 미화하였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 고트족왕을 이겼다는 로마제국의 장수 Stillicho가 후연의 모용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후 검토 내용 참조) 즉 승리한 역사를 모두 로마의 승리 역사로 미화하는 역사왜곡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김덕중 씨가 펴낸 '태왕의 꿈' (덕산서원 2014년 간)에서는 광개토태왕이 백잔을 공격하여 공취한 108성 중에 신성과 남소성이 언급되어 있다. 즉 삼국사기와 달리 신성과 남소성의 전투가 후연과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전투였다는 것이다. 김부식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이런 결과는 서양사에서 로마제국(백제)와 고트족(고구려)의 전투가 되어 일치하는 면이 있다.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도 Stillicho가 Alemanni병력을 이용하여 Alaric I과 싸웠다는 기록을 보면, 연나라나 거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연(후연)나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이 후연에 개입하여 풍발이 거사하게 만들어 고운이 북연을 세우게 했을 수도 있다. 이후 장수왕 시절 북연의 풍흥이 고구려에 와서 방자하게 굴다가 장수왕에게 죽는 경우를 당하는 것을 보면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어느 정도 고구려의 후연 멸망에의 개입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2310424565
고구려 장수왕이 공격한 풍홍의 북연은 프랑스 북부 Gaul지역에 있었다.
장수왕은 436년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공격하고 북연의 왕 풍홍을 고구려로 데려 왔다 한다.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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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성의 역사로 알아 보는 로마사와의 검토는 그만두고, 아래의 다른 조건 검토로 대체하고자 한다.
Area settled by the Alemanni, and sites of Roman-Alemannic battles, 3rd to 6th centuries(source : Wikipedia)
5세기 후반 중부유럽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c) 교통의 중심지 신성과 Verona
아래 자료는 신성이 군사적 요충지이면서도 고구려 국도와 연결되는 국방상의 요해지라 하였다. 필자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스위스의 쥬네브가 아닌가 추정했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신성이 ... 요충지로 군사상 중요한 곳이라 하였고, 고구려도 이곳이 국도와 연결되는 국방상의 요해지로 중요시하던 곳이었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2513119553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사, 로마사를 통한 고구려 수도 위치 추정 (1)
지난 번 글 발해고를 통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추정해 보았다. 론강을 압록수, 즉 요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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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도는 Verona의 도로 연결의 중심지 역할을 묘사하고 있다. 위에서 고구려의 국도가 국내성이라면 스위스의 쥬네브로서, 이태리 북부의 알프스산맥을 넘어 가야 한다. 이길이 Via Claudia Augusta 길이다.
Verona 의 교통 중심지 역할 (Via Postumia + Via Claudia Augustia) (자료 : 위키피디아)
The Via Claudia Augusta is an ancient Roman road, which linked the valley of the Po River with Rhaetia (encompassing parts of modern Eastern Switzerland, Northern Italy, Western Austria, Southern Germany and all of Liechtenstein) across the Alps.
(source : Via Claudia Augustia, wikipedia)
동서로 연결되는 Via Postumia는 아래 지도에서 Light blue색갈의 도로이다. 이태리 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인 Genoa에서 출발하여 아드리아 해안의 Aquileia에 달하는 길이다. (아래 지도 및 자료 참조)
Via Postumia is highlighted in light blue. It is reached from Rome at Placentia via the Via Flaminia (dark blue) followed by the Via Aemilia (red).
"The Via Postumia was an ancient military Roman road of northern Italy constructed in 148 BC by the consul Spurius Postumius Albinus Magnus.
It ran from the coast at Genoa through the mountains to Dertona, Placentia (the termination of the Via Aemilia) and Cremona, just east of the point where it crossed the Po River. The Via Postumia and the via Aemilia were the most important axes of traffic in Cisalpine Gaul.[1]
From Cremona the road ran eastward to Bedriacum, the current town of Calvatone, where it forked, one branch running to the right to Mantua, the other to the left to Verona, crossing the Adige river on the Ponte Pietra, the only bridge on the Adige river at that time, and then traversing the Venetian plain, crossing the Piave River at Maserada sul Piave until finally reaching Aquileia, an important military frontier town founded by Rome in 181 BC.
(source : Via Postumia, wikipedia)
d) 군사적 요새로서의 신성과 Verona
이러한 육로 교통의 요지에 있는 Verona는 또한 그 방어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도시가 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요새지의 역할을 한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긴 city walls과 두개의 요새인데, 그중 하나의 요새가 지금의 Castelvecchio 자리이다. (아래 자료 참조)
"Since its founding, the city of Verona has played a prominent role as the center of connections between east and west and north and south. In particular, its location at the mouth of the Adige Valley, the main communication route between Italy and Germany, allowed those in control of this position to be able to assert themselves in the nearby Lombard and Veneto territories.[6] As a result of this relevance due to its peculiar geographical location and its topographical and economic characteristics, as early as the Roman era Verona became a strategic, well-fortified center, the crossroads of three consular roads: the Via Claudia Augusta, which connected the Danube with the Po, the Via Postumia and the Via Gallica, which connected Aquileia with Genoa and Turin, respectively.[7]
(source : Verona defensive system, wikipedia)
Monumental works forming a repertoire of nearly 2,000 years of the history of fortification art are still visible in the urban area, which is why the city has been decreed a UNESCO World Heritage Site;[2] the ruins of the Roman fortified city, the perimeter of the Scaliger walled city with its castles, the structure of the Venetian fortress, as well as the final layout of the Habsburg stronghold still remain.
(source : Verona defensive system, wikipedia)
The city of Verona was, since ancient times, a strategic location for the control of the transalpine routes that connected the Po Valley with central Europe via the Adige Valley. The temporary occupation of the city in 102-101 B.C. by the Cimbri revealed for the first time in the eyes of the Roman Senate the importance of the control and defense of this town, at that time still under the rule of the Venetian allies.[1]
(source : Roman walls of Verona, wikipedia)
Outside the curtain wall, to the south of the city center, there must have been several forts used as defensive outposts of the city, built or renovated during the interventions enforced by Emperor Gallienus. One of the forts would have been located near an important road junction, at which the road coming from Hostilia and the southern ring road with the Via Postumia and the Via Gallica converged, while a second fort must have stood in the area now occupied by Castelvecchio, guarding the intersection of the Via Postumia and Via Gallica.
(source : Roman walls of Verona, wikipedia)
The Via Gallica was an ancient road of northern Italy which connected the Roman municipia of the Pianura Padana.[1] It started from the Via Postumia next to Verona, and connected Brescia (Brixia), Bergamo (Bergamum) and Milan (Mediolanum), passing near Lake Garda.
(source : Via Gallica, wikipedia)
Castelvecchio, Verona, Italy
이와 같은 도로상의 요충지 역할과 군사적 요새로서의 역할을 볼 때, Verona의 Castelvecchio자리에 신성이 있지 않았나 추정된다. 지금의 Castelvecchio는 14세기 건설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으로 고구려의 치 등의 모습이 확연하다. (아래 자료 참조). 원래의 모습을 많이 참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Castelvecchio (Italian: "Old Castle") is a castle in Verona, northern Italy. It is the most important military construction of the Scaliger dynasty that ruled the city in the Middle Ages.[1]
The castle is powerful and compact in its size with very little decoration - one square compound built in red bricks, one of the most prominent examples of Gothic architecture of the age, with imposing M-shaped merlons running along the castle and bridge walls. It has seven towers, a superelevated keep (maschio) with four main buildings inside. The castle is surrounded by a ditch, now dry, which was once filled with waters from the nearby Adige."
(source : Castelvecchio, wikipedia)
e) 수묘인 제도에 거론된 신성과 Verona
남소성과 더불어 신성은 광개토태왕 비문에서 수묘인 제도의 지역으로 거론된다. 따라서 Tombs를 가진 Cathedral 등이 있나 살펴 보자. Castelvecchio 성 옆에 있지는 않지만 같은 Verona시에 Tombs를 가진 Cathedral 같은 건물이 있다. 바로 Scaliger Tombs이다. (아래 사진 및 자료 참조)
View of the Scaliger Tombs. In the foreground the tomb of Cansignorio Mastino II and that of Mastino II behind. (source : Wikipedia)
"The Scaliger Tombs (Italian: Arche scaligere) is a group of five Gothic funerary monuments in Verona, Italy, celebrating the Scaliger family, who ruled in Verona from the 13th to the late 14th century.
The tombs are located in a court outside the church of Santa Maria Antica, separated from the street by a wall with iron grilles. Built in Gothic style, they are a series of tombs, mostly freestanding open tabernacle-like structures rising high above the ground, with a sarcophagus surmounted by an elaborate baldachin, topped by a statue of the deceased, mounted and wearing armour."
(source : Scaliger Tombs, wikipedia)
3) 로마제국 장군 Stillicho와 후연의 모용희 비교
로마제국 장군으로서 Honorius 왕의 후견인 Stillicho는 Alaric I고트족왕에 대한 두번 전쟁의 승리로 각광을 받았다가, 이후 Alaric I과의 전쟁에서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고 Alaric I왕과 협력하는 관계 등으로 의심을 받다가, 결국 권력다툼 속에 408년 죽음을 당한다. Stillicho는 Suebi족의 일종인 Vandals족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달려 있었다.
또한 Stillicho는 Alaric I 고트족왕과 Pollentia, Verona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Rhaetia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북부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는 Alemanni지역에서 온 것이며, Alemanni병력을 이끌고 왔다 했다. 이는 Stillicho가 Alemanni세력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필자는 Alemanni세력을 거란으로 추정한다. 후에 이들은 요나라로 추정되는 Holy Roman Empire (독일 중심)를 세운다. (아래 필자 글 참조)
후연의 왕 모용희는 399년 광개토태왕과의 전쟁에서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는다. 이후 2년 후 다시 광개토태왕이 이들 성을 되찾았다 한다. 모용희는 주위 형제들과의 왕권 다툼 속 와중에, 풍발의 거사로 실각하고 407년 죽는다. 풍발은 모용운을 왕으로 하며, 모용운은 성을 고씨로 고치고 (모용운은 고구려로부터 연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사람의 후예라 함) 북연을 세운다. 이후 북연은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복원한다. 모용부도 선비족의 일원이다.
연나라는 거란의 세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으나, 거란은 후에 독립세력으로 등장한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한 후 세워진 안동도호부에 거단주가 있어 고구려의 행정체계를 답습했다 한다. 즉 거란 세력이 안동도호부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안동도호부는 신성, 남소성, 등을 포함하였다 했다. 즉 거란세력이 신성, 남소성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는 후연도 거란세력과 중첩되는 모습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비려, 패려 등으로 언급되는 세력이 거란으로 추정된다 하는데, 이들은 염수 주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염수를 스위스 Bex지역의 소금광산 주위로 추정한다. 소금광산 아래로 강이 흘렀다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은 해족인 Helvetti족(켈트족의 일종)의 거주지역인데, 2-4세기동안 Alemanni가 끊임없이 침범하였다 하며, 5세기에는 Burgundians이 이 지역을 점거했다 한다. 그래서 이 주위로 Alemanni와 Burgundians이 거주한다 하였다. 그래서 언어도 두가지로 나뉜다 하였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등장하는 비려, 패려는 이들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위에 군사적 성곽인 Chillon Castle(Fort)이 있다. 이곳이 거란신성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상기 연구 대상인 남소성과 신성의 신성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즉 후연과 다툰 신성은 보다 좌측으로 역시 요동지역이지만 (론강의 우측), 이태리 북부에 있는 Verona 신성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종합할 때, Stillicho는 후연의 모용희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4) Alemannie와 거란, 후연
전연, 후연의 연나라와 거란은 서양사의 누구일까? 필자는 Alemanni라고 판단한다. Alemanni는 게르만족의 하나로서, 요수인 론강가에서 또 라인강의 주변에서 있었는데, 스위스지역까지 있게 된다. 후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의 일부로 추정되는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일부가 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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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역사는 신성로마제국 역사에 숨어 있다
요즈음 흑해 연안의 불가리아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어 볼가 불가리아, 카자르 칸국 등을 살펴 보게 되었다. 자연히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비교하게 된다. 필자는 이미 Old Great Bulagria 역사
lostcorea.tistory.com
5C 후반 Central Europe (자료 : 위키피디아)
Frankish Kingdom in 511 (source : World History Encyclopedia)
Frankish Kingdom in 628 (source : Wikipedia)
상기 지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Alemanni는 알프스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것도 이태리 서북부쪽 밀라노 북쪽으로 알프스 산맥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밑에는 고구려 세력인 Odoacer, 동고트국이 있고, 이후에는 롬바르드왕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치는 그동안 필자가 후연의 세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위치이다. 따라서 후연은 Alemanni에 해당하고, 이는 Stillicho와 모용희의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더 높힌다고 하겠다.
5) 신성과 남소성은 왜 수묘인지역으로 되었을까?
광개토태왕 비문에 수묘인 지역 지정을 해놓은 성들과 지역이 있는데, 그 중에 신성과 남소성이 포함되어 있다. 신성은 3가(家)에 간연하고, 남소성은 1가(家)에 간연한다고 했다. 유럽의 성들의 역사를 보면 어느 family가 지켜왔다고 하는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이러한 수묘인 family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곽과 연결된 성당의 지하에 tombs이 숨겨있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든다. 여하튼 광개토태왕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핍박받는 삶을 안타까와 이들 지역을 공격하여 조상의 후예들을 보살피는 목적으로도 원정을 다녔다고도 했다. 그래서 수묘인 지역은 조상들의 주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성과 남소성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Vernoa지역과 Pollentia지역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Pollentia 지역 : Ligures 지역,
상기 연구에서 남소성으로 추정되는 Pollenzo castle이 있는 Pollentia지역은 아래 지도에서 Ligurian 지역이다. Ligurian은 켈트족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고, 이웃의 Etruscan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Ligures or Ligurians were an ancient people after whom Liguria, a region of present-day north-western Italy, is named.[1] Because of the strong Celtic influences on their language and culture, they were also known in antiquity as Celto-Ligurians.[2]
로마이전 시기에는 리구이언은 이태리북부 뿐 아니라 사르디니아, 시실리, 프랑스남부, 코르시카 그리고 이베리아반도 북동쪽 카탈로니아까지 진출하였다 한다. (아래 참조)
In pre-Roman times, the Ligurians occupied the present-day Italian region of Liguria, Piedmont, northern Tuscany, western Lombardy, western Emilia-Romagna, and northern Sardinia, reaching also Elba and Sicily.[3][4] They inhabited also the French region of Provence-Alpes-Côte d'Azur and Corsica;[5][6][7][8] however,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around 2000 BC the Ligurians occupied a much larger area, extending as far as what is today Catalonia (in the north-eastern corner of the Iberian Peninsula).[9][10][11]
고대 리구리언의 원천은 확실하지 않다. 리구리언의 언어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인도유럽어이거나 그 이전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아래 참조)
The origins of the ancient Ligurians are unclear, and an autochthonous origin is increasingly probable. What little is known today about the ancient Ligurian language is based on placenames and inscriptions on steles representing warriors.[12][13] The lack of evidence does not allow a certain linguistic classification; it may be Pre-Indo-European,[14] or an Indo-European language.[15]
풀타크에 의하면, 리구리언은 자신들을 Ambrones이라 부른다 하는데, 이는 북유럽의 Ambrones와 관계를 말할 수 있다. (아래 참조)
The Ligures are referred to as Ligyes (Λιγυες) by the Greeks and Ligures (earlier Liguses) by the Romans. According to Plutarch, the Ligurians called themselves Ambrones, which could indicate a relationship with the Ambrones of northern Europe.[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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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bo처럼, 역사가 Pliny the Elder도 Liguria가 Varus강과 Magra강 사이에 있다고 한다. 또한 리구리언은 Var(=Varus)강의 다른 쪽과 알프스에도 산다고 했다. (아래 참조)
Just like Strabo, Pliny the Elder situates Liguria between the rivers Varus and Magra. He also quotes the Ligurian peoples living on the other side of the banks of the Var and the Al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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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alpine Ligures는 현대 프랑스의 남동쪽, 알프스와 론강사이에 살며, 그리스 식민지인 마르세이유와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한다. (아래 참조)
Transalpine Ligures are said to have inhabited the South Eastern portion of modern France, between the Alps and the Rhone river, from where they constantly battled against the Greek colony of Massali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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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Liguria에는 BC 3700년부터 구리광산이 있었다 한다. (아래 참조)
Copper begins to be mined from the middle of the 4th millennium BC in Liguria with the Libiola and Monte Loreto mines dated to 3700 BC. These are the oldest copper mines in the western Mediterranean basin.[20] It was during this period of the Copper Age in Italy that we find throughout Liguria a large number of anthropomorphic stelae in addition to rock engravings.[12][13]
The Polada Culture (a location near Brescia, Lombardy, Italy) was a cultural horizon extended in the Po valley from eastern Lombardy and Veneto to Emilia and Romagna, formed in the first half of 2nd millennium BC perhaps for the arrival of new people from the transalpine regions of Switzerland and Southern Germany.[21] Its influences are also found in the cultures of the Early Bronze Age of Liguria, Romagna, Corsica, Sardinia (Bonnanaro culture) and Rhone Valley.[22][23][24] There are some commonalities with the previous Bell Beaker Culture including the usage of the bow and a certain mastery in metallurgy.[25]
The Bronze tools and weapons show similarities with those of the Unetice Culture and other groups in north of Alps. According to Bernard Sergent, the origin of the Ligurian linguistic family (in his opinion distantly related to the Celtic and Italic ones) would have to be found in the Polada culture and Rhone culture, southern branches of the Unetice culture.[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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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부터 1910년까지 Genoa에서 발굴된 유물에 의하면, 리구리언인들은 Etruscan과 그리스인들과 무역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BC 5세기에는 이 도시의 중세 고대도시가 있는 언덕에서 Castello(Castle)라 불리는 군사요새가 발견되었다. (아래 참조)
According to excavations carried out in the city between 1898 and 1910, the Ligurian population that lived in Genoa maintained trade relations with the Etruscans and the Greeks, since several objects from these populations were found.[44][45] In the 5th century BC the first town, or oppidum, was founded at the top of the hill today called Castello (Castle), which is now inside the medieval old town.[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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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구리언은 화장(cremations)을 했는데, 이는 Etruscan과 켈트족의 영향이다. (아래 참조)
Ligurian sepulchres of the Italian Riviera and of Provence, holding cremations, exhibit Etruscan and Celtic influences.[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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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의 리구리아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이들의 언어, 주요 신들은 켈트문화와 모양과 형식에서 유사하다고 한다. (아래 참조)
During the Iron Age the spoken language, the main divinities and the workmanship of the artifacts unearthed in the area of Liguria (such as the numerous torcs found) were similar to those of Celtic culture in both style and type.[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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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적 리더는 없었고, 부족회의에서 선출되었다. 본래 노예제도도 없었다. 전쟁포로는 죽이거나 제물로 바쳐졌다. (아래 참조)
There were no dynastic leaders either: the Ligurian "king" was elected as leader of a tribe or a federation of tribes; only in late period did a real dynastic aristocratic class begin to emerge. Originally there was no slavery: prisoners of war were massacred or sacrificed.[86]
BC 1세기의 역사학자 Diodorus Siculus는, 리구리언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힘든 일을 같이 했다고 기술했다. (아래 참조)
Diodorus Siculus, in the first century B.C., writes that women take part in the work of toil alongside men.[87]
Dress
또 이 역사학자는 타이트한 바지에 허리에 가죽허리띠와 갈색 걸쇠를 둘렀고, 다리는 없는 의상이었다. 다른 옷은 "sagum"(로마병사들이 입는 소매없는 겉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위해 동물가죽을 입었다. (아래 참조)
Diodorus Siculus reports the use of a tunic tightened at the waist by a leather belt and closed by a clasp generally bronze; the legs were bare.[92] Other garments used were cloaks "sagum", and during the winter animal skins to shelter from the cold.[93]
Lucan(AD 61)은 리구리언은 긴머리에 붉은 색-갈색 머리였다고 묘사했다. (아래 참조)
Lucan in his Pharsalia (c. 61 AD) described Ligurian tribes as being long-haired, and their hair a shade of auburn (a reddish-brown):
(source : Ligures, wikipedia)
상기 내용을 고려하면, 리구리언은 켈트족 문화와 스키타인 문화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켈트족 문화와 스키타인문화가 고조선의 그것이라 추정했다. 그래서 조상들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을 리구리언 지역의 남소성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철기시대의 이태리의 종족별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2) Verona 지역
상기 지도에서 Etruscan 지역에 있는 Verona는 Etruscan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아래 Etruscan의 벽화에서 스키타인의 모습을 보이는 모자를 쓴 여인들이 보인다. 즉 Etruscans은 스키타인문화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한다.
(자료 : 유튜브 화면 screenshot, Ancient DNA unravels where the Etruscans came from)
앞에서 리구리언과 같이 Etruscan들도 그리스와 무역활동을 했다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 암흑기에는 스키타인의 지역이 아닌가 추정했다.
또한 Etruscan 사회에서는 여성의 위치가 당당하고 상속을 받았으며, 모계사회전통을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이 또한 스키타인 문화라 할 수 있다. 아마조네스 여인국 여성들은 스키타인들과 만나 종족을 이어왔다고 필자는 코카서스지역의 역사에서 밝혔다. 이 여인국 여성들은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갔다고 하는데, 스키타인도 또한 그랬다.
Women Who Shocked the Ancient World©Women Who Shocked the Ancient World (image credits: wikimedia)
In a world where women were expected to stay silent and invisible, Etruscan women shocked their contemporaries by doing the exact opposite. They attended banquets alongside men, owned property, and even kept their family names after marriage. Roman writers were scandalized by this "improper" behavior, but tomb paintings show these women lounging at feasts, wearing elaborate jewelry, and clearly enjoying high social status. Some scholars believe Etruscan society may have been matrilineal, with inheritance passing through the mother's line—a practice that would have been revolutionary in the ancient Mediterranean.
따라서 신성이 있는 지역으로 판단되는 Verona가 Etruscan 사회, 나아가 스키타인의 사회로 추정되는 바, 이들 조상들의 지역을 지키는 수묘인제가 신성에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물론 고구려인 인들의 묘를 지키는 일이 우선되었겠지만.
(3) Pavia지역
이태리 북부에 있는 Pavia도시도 리구리언이 세웠다 한다.(Pliny the Elder언급). Ptolemy는 켈트족이라고 했다. 이 지역은 로마의 주용한 군사지역이었다. (아래 참조)
Dating back to pre-Roman times, the town of Pavia was said by Pliny the Elder to have been founded by the Laevi and Marici, two Ligurian, or Celto-Ligurian, tribes, while Ptolemy attributes it to the Insubres, a Celtic population. The Roman city, known as Ticinum, was a municipality and an important military site (a castrum) under the Roman Empire.
(source : Pavia, wikipedia)
그런데 이 Pavia지역에서 아래와 같은 유물이 만들어지고 아래 그림과 같은 문양을 선택했다. 이들 모양은 전형적인 스키타인의 문화이다. 즉 리구리언과 켈트족 지역에 스키타인이 진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스키타인 연구에서 중부유럽에서 서쪽으로 켈트족지역에 스키타인이 진출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Diocesan Museum of Pavia, Sicilian-Arab master, crosier, ivory (12th century)
Coat of Arms of the county of Pavia under the Visconti Dynasty
(4) Adige river
이태리 북동쪽에 Adige river가 있다. (아래 지도 참조). 그런데 이 이름의 원천은 불명확하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북코카서스지역에서 Circassian을 일컫는 Adyghe란 말이 우리말이라고 추정했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이러한 우리말 지명이름은 스키타인지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산스크리스트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프랑스 남동지역근처에 Varus river가 있다 Varus란 지명도 산스크리스트어 Var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 자료 참조)
- Varus river (Sanskrit; var, Old Norse ; vari)
The Var (French: [vaʁ] ⓘ, Occitan: [ˈbaɾ]; Italian: Varo; Latin: Varus) is a river located in the southeast of France. It is 114 km (71 mi) long.[1] Its drainage basin is 2,812 km2 (1,086 sq mi).[2]............
The river name is attested in Latin as Vārus and in Ancient Greek as Ouãros (Οὐᾶρος). It stems from the Indo-European root *uōr- (earlier *uer-), meaning 'water, river' (cf. Sanskrit vār, Old Norse vari).[5]
(source : Var river, wikipedia)
"The Adige[a] is the second-longest river in Italy, after the Po. It rises near the Reschen Pass in the Vinschgau in the province of South Tyrol, near the Italian border with Austria and Switzerland, and flows 410 kilometres (250 mi) through most of northeastern Italy to the Adriatic Sea.
The name of the river is of unknown origin.[2]
(source : Adige river, wikipedia)
https://blog.naver.com/lainfos/223488122259
한국어 지명이 있는 스키타인 활동지역
근래에 들어 사카, 스키타인에 대한 연구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이는 과거 키메리언에 대한 연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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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말과 스키타인의 문화가 엿보이는 신성과 남소성지역, Pollentia, Verona지역이 수묘인제도에 언급되는 것에 이러한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IV. 마무리말
이상으로 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신성과 남소성의 위치가 이태리 북부의 Verona, Pollentia지역여부의 파악,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 고구려와 거란의 관계, 로마와 Alemanni와의 관계, 고트족왕 Alaric I과 로마의 Stillicho장군의 싸움, Stillicho장군과 후연의 모용희의 동일성 가능, Alemanni지역의 연나라, 거란지역 여부, 광개토태왕이 백잔에서 공취한 108성 중의 하나인 신성과 남소성이 백제지역이었을 수 있다는 추정 등이 거론된 긴 글이었다. 또한 신성과 남소성이 광개토태왕 비문에서 수묘인제가 운용된 지역이었다는 이유를 밝혀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사의 주요 무대가 유럽지역이었다는 필자의 추정에 힘을 보태는 또 하나의 연구였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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