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신라

신라 김유신이 공격한 고구려의 낭비성은 메소포타미아의 니네베성인가?

CG PARK 2026. 9. 18. 14:08

 

I. 서 론

 

필자는 얼마전 백제와 신라가 싸운 가잠성은 코카서스의 트빌리시에 있는 성이 아닌가 했다. (아래 글 참조)

 

백제와 신라가 싸운 가잠성은 코카서스에 있었다.

 

백제와 신라가 싸운 가잠성은 코카서스에 있었다.

I. 머리말 코카서스지역은 여러 면에서 필자의 관심을 끌었었다. 지역에 만연한 고구려 형식의 Tower와 BC 3000년부터 있어 온 이들의 역사가 또한 필자의 관심을 끌어 왔다. 이 지역은 필자가 백제

lostcorea.tistory.com

 

필자는 상기 글에서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이 치열하게 싸운 전쟁이 비잔틴제국과 사사니언 페르시아가 약 30년에 걸쳐 싸운 비잔틴-사사니언 전투 (602-628) 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에서 당시 삼국사기에서 언급되는 왕재성, 속함성, 모산성, 우명산성, 늑노현, 낭비성 등에 대한 추가 연구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왜냐하면 이 긴 전쟁에서 나타난 성곽들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이 중에서 상기 전쟁 중 언급된 왕재성과 전쟁이 끝난 후 629년 김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쳐부수었다는 기록을 주시하고 이 왕재성과 낭비성의 위치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II. 본 론

 

 

1. 629년 전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역사

 

아래 자료는 앞으로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관계의 세부 내용을 고찰할 때에 참고가 되는 내용으로 싣는다.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본기 (590-618)

 

一年冬十月 영양왕이 즉위하다 (590)

一年 수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벼슬을 주다 (590)

二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591)

二年春三月 수가 왕을 책봉하다 (591)

二年夏五月 수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다 (591)

三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592)

593-596 : 4년 공백

八年夏五月 수에 조공하다 (597)

九年春二月 수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다 (598)

九年夏六月 수 문제가 영양왕의 관작을 빼앗다 (598)

九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다 (598)

九年秋九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598)

九年秋九月 백제 변경을 침략하다 (598)

599년 : 공백

十一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600)

十一年春一月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하다 (600)

601-602 : 2년 공백

十四年秋八月 신라 북한산성 공격에 실패하다 (603)

604-606 : 3년 공백

十八年 고구려 사신과 수 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치다 (607)

十八年夏五月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十九年春二月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608)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608)

609-610 : 2년 공백

二十二年春二月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다 (611)

二十二年夏四月 수의 병력이 탁군으로 집결하다 (611)

二十三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총공격을 명하다 (612)

二十三年春二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다 (612)

二十三年夏五月 수가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 황제가 장수들을 질책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장군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다(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거짓 항복하다 (612)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다 (612)

二十三年秋七月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에 대첩을 거두다 (612)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다 (613)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다시 논의하다 (613)

二十四年夏四月 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613)

二十四年夏四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613)

二十五年春二月 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614)

二十五年秋七月 항복을 청하다 (614)

二十五年秋八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614)

二十五年冬十月 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614)

615 - 617 : 3년 공백

二十九年秋九月 영양왕이 죽다 (618)

 

《삼국사기》 고구려 영류왕 본기 (618-642)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AD 618)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619)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619)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619)

620년 : 공백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621)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622)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623)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624)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624)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625)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626)

627년 : 공백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628)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629)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629)

630년 : 공백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631)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631)

632-637 : 6년 공백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638)

639년 : 공백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640)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640)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640)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641)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642)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642)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642)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642)

 

 

《삼국사기》 백제 무왕 본기 (600-641)

 

一年夏五月 무왕이 즉위하다 (AD 600)

601년 : 공백

三年秋八月 신라의 아막 산성을 공격하다 (602)

603-604 : 2년 공백

六年春二月 각산성[32]을 쌓다 (AD 605)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605)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토우)가 내리다 (AD 606)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AD 606)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AD 607)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08)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AD 608)

609-610 : 2년 공백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11)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611)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AD 611)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611)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612)

十三年夏四月 대궐 남문에 벼락이 치다 (AD 612)

十三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 인가가 유실되다 (612)

613-615 : 3년 공백

十七年冬十月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616)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616)

617년 : 공백

十九年 신라가 가잠성을 공격하다 (618)

619-622 : 4년 공백

二十四年冬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과하마를 보내다 (AD 623)

二十四年 신라의 늑로현을 공격하다 (623)

二十四年春一月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623)

二十四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623)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24)

二十六年冬十一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5)

二十七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 등을 선사하다 (626)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626)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6)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27)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627)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628)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9)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630)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AD 630)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AD 630)

三十二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31)

三十三年春一月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다 (AD 632)

三十三年春二月 마천성을 개축하다 (AD 632)

三十三年秋七月 신라를 공격하다 (632)

三十三年 왕이 생초원에서 사냥하다 (AD 632)

三十三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32)

三十四年秋八月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33)

三十五年春二月 왕흥사를 준공하다 (AD 634)

三十五年春三月 대궐 남쪽에 연못을 파다 (AD 634)

635년 : 공백

三十七年春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36)

三十七年春三月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AD 636)

三十七年夏五月 장군 우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다 (636)

三十七年夏六月 가뭄이 발생하다 (636)

三十七年秋八月 망해루에서 잔치를 벌이다 (AD 636)

 
서기 637년 : 38년 봄 2월, 서울에서 지진이 났다.
- 3월, 다시 지진이 났다.
-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치니,
태종이 사신을 우대하여 위로하고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 단을 보냈다.**
서기 638년 : 39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서기 639년 : 40년 겨울 10월, 다시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서기 640년 : 41년 봄 정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 2월,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서기 641년 : 42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라고 하였다.
- 사신이 당 나라에 가서 소복을 입고 표문을 바쳐
“임금의 번신 부여 장이 죽었습니다”라고 알렸다.
황제는 현무문에서 추도 의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 이르기를
“먼 나라를 사랑하는 방도는 총명(寵命) 보다 나은 것이 없고,
죽은 자를 표창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하여 막혀 있는 것이 아니다.
고(故)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 부여장은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와서 정삭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표문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를 깊이 추도한다.
마땅히 상례 이상으로 영전을 표하여 광록대부로 추증하노라”라 하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보냈다.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본기 (579-632)

 

一年秋七月 진평왕이 즉위하다 (AD 579)

一年秋八月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AD 579)

一年 친동생을 갈문왕으로 봉하다 (AD 579)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AD 580)

二年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다 (AD 580)

三年春一月 위화부를 설치하다 (AD 581)

582년 : 공백

五年春一月 선부서를 설치하다 (AD 583)

六年春二月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다 (AD 584)

六年春三月 조부와 승부를 설치하다 (AD 584)

七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AD 585)

七年秋七月 지명이 진에 들어가다 (AD 585)

八年春一月 예부에 영 2인을 두다 (AD 586)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AD 586)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AD 587)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AD 588)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AD 589)

十一年秋七月 홍수가 나서 진휼하다 (AD 589)

590년 : 공백

十三年春二月 영객부에 영 2인을 두다 (AD 591)

十三年秋七月 남산성을 쌓다 (AD 591)

592년 : 공백

十五年秋七月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다 (AD 593)

十六年 수 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AD 594)

595년 : 공백

十八年春三月 담육이 수에 들어가다 (AD 596)

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596)

十八年冬十月 영흥사에 불이 나다 (AD 596)

十九年 삼랑사가 완성되다 (AD 597)

598-599 : 2년 공백

二十二年 원광법사가 돌아오다 (AD 600)

601년 : 공백

二十四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602)

二十四年秋八月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다 (AD 602)

二十四年秋九月 지명이 돌아오다 (AD 602)

二十五年秋八月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다 (AD 603)

二十六年秋七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604)

二十六年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다 (AD 604)

二十七年春三月 담육이 돌아오다 (AD 605)

二十七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AD 605)

606-607 : 2년 공백

三十年 원광이 걸사표를 짓다 (AD 608)

三十年春二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AD 608)

三十年夏四月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빼앗다 (AD 608)

三十一年春一月 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AD 609)

610년 : 공백

三十三年 수에 군사를 청하다 (AD 611)

三十三年冬十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AD 611)

612년 : 공백

三十五年 가뭄이 들다 (AD 613)

三十五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AD 613)

三十五年秋七月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다 (AD 613)

三十六年春二月 일선주를 설치하다 (AD 614)

三十六年 진흥왕비가 사망하다 (AD 614)

三十七年春二月 큰 잔치를 베풀다 (AD 615)

三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615)

三十八年冬十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다 (AD 616)

617년 : 공백

四十年 해론이 (가잠성에서) 백제와 싸우다 죽다 (AD 618)

619-620 : 2년 공백

四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1)

四十四年春一月 왕이 황룡사에 거둥하다 (AD 622)

四十四年春二月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다 (AD 622)

四十五年春一月 병부에 대감을 두다 (AD 623)

四十五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3)

四十五年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다 (AD 623)

四十六年春一月 시위부에 대감을 두다 (AD 624)

四十六年春三月 당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AD 624)

四十六年冬十月 백제가 6성을 포위하다 (AD 624)

四十七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5)

四十八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6)

四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주재성(왕재성)을 공격하다 (AD 626)

四十八年 고허성을 쌓다 (AD 626)

四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오다 (AD 627)

四十九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四十九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다 (AD 627)

四十九年秋八月 서리가 내리다

四十九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五十年春二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AD 628)

五十年 크게 가물어서 비를 빌었다 (628)

五十年 백성들이 굶주리다 (AD 628)

五十一年秋八月 (김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AD 629)

五十一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9)

五十二年 대궁의 땅이 갈라지다[17] (AD 630)

五十三年春二月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가다 (AD 631)

五十三年夏五月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다 (AD 631)

五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31)

五十三年 흰 무지개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다 (AD 631)

五十四年春一月 왕이 죽다 (AD 632)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2. 비잔틴-튀르크 연합 (626–628)

 

상기 비잔틴-사사니언 전쟁 와중에, 비잔틴의 Heraclius왕 (무왕)은 튀르크와 연합을 추구한다. 이 당시의 곡튀르크는 필자는 고구려로 추정한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 곡튀르크(고구려)는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트빌리시와 Derbent시를 점령한다. 이러한 와중에 곡튀르크 즉 고구려는 Nineveh를 점령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위키 자료에는 Nineveh 공격에 비잔틴군이 공격하여 왕재성을 공격한 것으로 서술한다. 곡튀르크가 데려온 4만명의 군이 합세한 것인지 언급은 없다. 그러나 필자는 니네베 공격에 곡튀르크군이 참여하여 결국 곡튀르군(고구려군)이 점령하지 않았나 한다. 그래서 신라 김유신(사사니언)이 고구려 (곡튀르크)의 낭비성 (Nineveh)을 쳐부순 것으로 추정된다. 629년이후 이 지역이 사사니언의 영역으로 나타난 지도를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필자의 이러한 추정이 맞는지 아래 자료에서 다시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

 

1) 연합의 배경 (568–625)

 

568년 일찌기, 이스타미 지휘하의 튀르크는 사사니언 페르시아와의 관계가 상업적인 문제로 틀어지자, 비잔티움으로 돌아 섰다. 이스타미는 소그디언 외교관 Maniah가 이끄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게 직접 보냈는데, 이들은 568년 도착하여 Justin II에게 실크를 선물하였을 뿐 아니라, 사사니언 페르시아에 대항한 연합을 제시했다. Justin II는 동의하였고, 튀르크 카칸에게 대사를 보내, 소그디언이 바라던 직접 실크로드 무역을 확보했다. (하기 내용)

 

Earlier, in 568, the Turks under Istämi had turned to Byzantium when their relations with Iran soured over issues of commerce.[132] Istämi sent an embassy led by the Sogdian diplomat Maniah directly to Constantinople, which arrived in 568 and offered not only silk as a gift to Justin II, but also proposed an alliance against Sasanian Iran. Justin II agreed and sent an embassy to the Turkic Khaganate, ensuring the direct Silk Road trade desired by the Sogdians.[133][134]

 

625년 튀르크는, 동부에서, 사사니언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박트리아, 아프카니스탄, 나아가 인더스강까지 차지하고 토하리스탄 Yabghus 체제를 확보했다. (하기 내용)

 

In the East, in 625, the Turks took advantage of the Sasanian weakness to occupy Bactria and Afghanistan as far as the Indus, and establish the Yabghus of Tokharistan.[135]

(source :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500-717))

 

곡튀르크는 568년 이미 비잔틴의 Justin II와 협력하여 실크로드 무역로 확보했다. 625년 곡튀르크는, 사사니언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박트리아, 아프카니스탄, 인더스강까지 차지하고, 토하리스탄도 확보했다.

 

2) Heraclius–Ziebel alliance (헤라클리우스-지벨 연합)

 

626년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격시, 헤라클리우스는 비잔틴자료에서 카자르라 부르는 부족과 연합을 맺었다. 이들은 Ziebel하에 있었는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곡튀르크의 서튀르크카칸국(Tong Yabghu에 의해 통치되는)으로 인식되고 있다. 헤라클리우스는 Ziebel에게 많은 선물과 황녀인 Eudoxia Epiphania 공주와의 결혼을 약속하며 그를 다루었다. (하기 내용)

 

During the 626 siege of Constantinople, Heraclius formed an alliance with people Byzantine sources called the "Khazars", under Ziebel, now generally identified as the Western Turkic Khaganate of the Göktürks, led by Tong Yabghu,[136] plying him with wondrous gifts and the promise of marriage to the porphyrogenita Eudoxia Epiphania.[132]

 

이러한 상황에서 626년 헤라클리우스는 곡튀르크의 세력인 카자르와 연합하였다. 선물과 비잔틴 황녀 공주와의 결혼 약속을 하고서.

 

코카서스에 있던 튀르크는 626년 사사니언을 유린할 4만명의 병력을 보내 동맹에 응답했다. 이는 페르시아-튀르크 전쟁 627-629의 시작이었다. 비잔틴과 곡튀르크의 연합작전은 트블리시를 포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비잔틴은 성벽을 부수기 위해 Traction trebuchets란 공성기계를 사용했는데, 이는 비잔틴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하기 내용)

 

The Turks, based in the Caucasus, responded to the alliance by sending 40,000 of their men to ravage the Sasanians in 626, marking the start of the Perso-Turkic war of 627–629.[115] Joint Byzantine and Göktürk operations were then focused on besieging Tbilisi, where the Byzantines used traction trebuchets to breach the walls, one of the first known uses by the Byzantines.[f][137]

 

626년 곡튀르크는 4만명의 병력을 보내 비잔틴과 코카서스에서 연합공격을 하였다. 이는 또한 627-629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의 시작이었다. 연합작전은 트빌리시의 포위공격에 집중되었다. 비잔틴은 이 공격시 최초로 돌을 날려 보내는 공성기기를 이용했다.

 

호스로는 Shahraplakan휘하의 천명의 기병을 트블리시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보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628년 후반쯤에 트블리시는 함락되었다. Ziebel은 그해말에 죽어서 Epiphania는 야만인에게 시집가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포위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헤라클리우스는 티그리스 상류에 그의 진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기 내용)

 

Khosrow sent 1,000 cavalry under Shahraplakan to reinforce the city,[138] but it nevertheless fell, probably in late 628.[139] Ziebel died by the end of that year, however, saving Epiphania from marriage to a barbarian.[115] While the siege proceeded, Heraclius worked to secure his base in the upper Tigris.[121]

(source :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500-717))

 

호스로는 천명의 기병을 보내 트빌리시 방어를 보완하였으나, 628년 후반쯤 트빌리시는 함락되었다.

 

3.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Nineveh 전투 (627)

 

비잔틴과 사사니언의 약 30년에 걸친 긴 전쟁의 마지막은 니네베전투라 판단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왕재성과 낭비성의 후보가 되는 지역이 니네베이므로 보다 자세히 살펴 보자. 

 

.이라크내 Nineveh위치 (자료 : 위키피디아)

 

627년 9월 중순, 헤라클리우스는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겨울 급습작전으로 침범했고, Ziebel은 트블리시 포위를 계속하였다. Edwrad Luttwak는 624-626년 겨울의 헤라클리우스의 계절적 후퇴가 627년에는 크테시폰을 위협하는 높은 리스크로 변하였다고 기술한다. 이는 왜냐하면 페르시언들은 이러한 전략적으로 비효율적인 공격에 익숙해져서 국경의 병력을 심장부를 방어하기 위해 불러 들이지 않는 결정을 하게끔 하였기 때문이다. (하기 내용)

 

In mid-September 627, Heraclius invaded the Iranian heartland in a surprising winter campaign, leaving Ziebel to continue the siege of Tiflis. Edward Luttwak describes the seasonal retreat of Heraclius for the winters of 624–626 followed by a change in 627 to threaten Ctesiphon as a "high-risk, relational maneuver on a theater-wide scale" because it habituated the Persians to strategically ineffective raids that caused them to decide not to recall border troops to defend the heartland.[140]

 

627년 9월 헤라클리우스는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급습했다. 트빌리시의 포위는 카자르군이 계속했다. 이는 페르시아에게는 예상치 못한 수도공격이었다.

 

헤라클리우스의 병력은 2만5천과 5만 사이의 비잔틴병력과 4만의 곡튀르크병력이었는데, 곡튀르크 병력은 익숙하지 않은 겨울 조건과 페르시언의 조롱으로 곧 철수했다. 그는 신속하게 진격하였으나 아르메니언 Rhahzadh지휘하의 페르시아군에의해 미행되었다. 라자다는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비잔틴군이 남쪽 앗시리아로 이동하면서 모든 보급품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하기 내용)

His army numbered between 25,000 and 50,000 Byzantine troops and 40,000 Göktürks that quickly deserted him because of the unfamiliar winter conditions and harassment from the Persians.[141][142] He advanced quickly but was tailed by a Persian army under the Armenian Rhahzadh, who faced difficulties in provisioning his army due to the Byzantines taking most of the provisions as they moved south toward Assyria.[142][143][144]

 

627년말 가까운 시기에 니네베 폐허 근처에서 헤라클리우스는 라자다와 전투를 벌였다. 이는 페르시아 원군이 도착하기 전이었다. 니네베전투는 12월 12일 안개속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신속군 병력의 이점을 줄이는 것이었다.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군을 평원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지는 척 후퇴하다가 페르시언이 놀라게 방향을 틀어 공격했다. (하기 내용)

Towards the end of the year, near the ruins of Nineveh, Heraclius engaged Rhahzadh before reinforcements could reach the Persian commander.[145] The Battle of Nineveh took place on 12 December, in the fog, reducing the Persian advantage in missile troops. Heraclius feigned retreat, leading the Persians to the plains, before reversing his troops to the surprise of the Persians.[146]

 

8시간의 전투끝에, 페르시언은 갑자기 근처의 언덕으로 후퇴했으나, 전투는 참패는 아니었다. 전투중에 약 8천명의 페르시아군이 전사했다. 대주교 Nikephoros의 Brief History는 기록하기를, 라자다가 헤라클리우스에게 1대1 대결로 도전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응하고 라자다를 단 한번의 찌르기로 죽였다. 다른 두 도전자들이 다시 싸웠으나 모두 헤라클리우스에게 졌다. 그러나 그는 입술에 상처를 입었다. (하기 내용)

 

After eight hours of fighting, the Persians suddenly retreated to nearby foothills, but the battle did not become a rout.[122][147] During the battle, approximately 6,000 Persians were killed.[148] Patriarch Nikephoros' Brief History suggests that Rhahzadh challenged Heraclius to personal combat, and that Heraclius accepted and killed Rhahzadh in a single thrust; two other challengers fought against him and also lost.[122][149] However, he received an injury to his lip.[150]

 

(source :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500-717))

 

627년말 니네베 전투에서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군을 패배시켰다.

 

이는 626년 왕재성을 백제가 공격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는데, 여기가 아닌가 한다. 바로 이 근처에 왕의 거처 Dastagird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니네베에 호스로II왕이 요새를 쌓았다는 아래 기록을 참고하면 왕재성은 니네베성일 수 있다.

 

한편 니네베는 김유신이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낭비성이라는 이름과 유사하다. 낭비성의 한자의미는 여자와 활이다. 즉 여성전사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스키타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키타인의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추정이다.

 

King Khosrow II (591–628) built a fortress on the west bank, and two Christian monasteries were constructed around 570 and 595.

(source : Nineveh,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사산왕조 (488-651))

 

 

Nineveh Mashki gate in Mosul, Iraq (source : wikipedia) The reconstructed Mashki Gate of Nineveh (since destroyed by the Islamic State)

 

4. End of the War (628)

 

더이상 헤라클리우스를 대적할 페르시아군이 없자, 헤라클리우스의 승승장구하는 병력은 호스로의 궁전이 있는 Dastagird를 유린하고 300개의 비잔틴 깃발을 되찾고 어마어마한 재물을 획득했다. (하기 내용)

 

With no Persian army left to oppose him, Heraclius's victorious army plundered Dastagird, which was a palace of Khosrow's, and gained tremendous riches while recovering 300 captured Byzantine flags.[151]

 

헤라클리우스는 마침내 호스로의 궁전이 있는 Dastagird를 유린하고 약탈로 많은 재화를 획득했다. 신라가 백제에게 공격당한 왕재성(626년)이 니네베성임을 확인 시켜 준다.

 

호스로는 이미 Susiana산으로 도주하여 크테시폰의 방어를 위한 지원군을 집결하려 했다. 헤라클리우스는 호스로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나는 평화를 추구한다. 나는 페르시아를 불태울 의사가 없으나 그대에 의해 강요된다. 이제 우리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품자. 모든 것이 불타기 전에 불을 끕시다. (하기 내용)

 

Khosrow had already fled to the mountains of Susiana to try to rally support for the defense of Ctesiphon.[121][122] Heraclius then issued an ultimatum to Khosrow:

I pursue and run after peace. I do not willingly burn Persia, but compelled by you. Let us now throw down our arms and embrace peace. Let us quench the fire before it burns up everything.

— Heraclius's ultimatum to Khosrow II, 6 January 628[152]

 

호스로는 Susiana (Susa)로 도주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최후통첩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는 크테시폰을 공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Nahrawan운하를 건너는 다리가 무너져 막혔기 때문이며, 그는 운하를 우회하려 하지 않았다. (하기 내용)

 

However, Heraclius could not attack Ctesiphon itself, as the Nahrawan Canal was blocked due to the collapse of a bridge leading over it,[151] and he did not attempt to bypass the canal.[153]

 

비잔틴군은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Nahrawan운하의 다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여하튼 페르시아군은 반란을 일으키고 호스로 II를 전복하고그의 아들 Kavad II (Siroes로도 알려진)를 대신 왕으로 세웠다. 호스로는 지하감옥에 갇혀 5일을 고생하다가 5일째 화살에 맞아 서서히 죽어갔다. Kavad는 즉시 헤라클리우스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헤라클리우스는 힘든 조건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비잔틴제국도 거의 기진맥진 상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기 내용)

 

Regardless, the Persian army rebelled and overthrew Khosrow II, raising his son Kavad II, also known as Siroes, in his stead. Khosrow was shut in a dungeon, where he suffered for five days on bare sustenance – he was shot to death slowly with arrows on the fifth day.[154] Kavad immediately sent peace offers to Heraclius. Heraclius did not impose harsh terms, knowing that his own empire was also near exhaustion.

 

이러한 상황에서 호스로 II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어 왕이 된 Kavad II는 비잔틴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평화조약에 의해 비잔틴은 그들이 상실했던 모든 영토를 되찾고, 그들의 포로를 찾고, 전쟁배상금을 받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614년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던 True Cross와 다른 유물을 되찾았다. (하기 내용)

Under the terms of the peace treaty, the Byzantines regained all their lost territories, their captured soldiers, a war indemnity, and most importantly for them, the True Cross and other relics that were lost in Jerusalem in 614.[154][155][156]

(source :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500-717))

 

이 평화조약에서 비잔틴은 그들이 상실했던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전쟁포로를 되찾고, 전쟁 배상금을 받았다. 빼앗겼던 성물도 되찾았다. (아래 629년 지도 참조) 그러나 기존의 사사니언 영토를 추가적으로 획득한 것은 없다.

 

 

The Byzantine Empire in 629 after Heraclius had reconquered Syria, Palestine and Egypt from the Sassanid Empire. (source : wikipedia)

 

 

5. Nineveh의 곡튀르크 점령 여부

 

629년, 고구려의 낭비성이 김유신에게 공격을 당했다 했으니, 낭비성이 고구려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자료에는 Nineveh에 비잔틴군이 공격한 내용만 언급된다. 따라서 이 상황을 튀르크 시선에서 본 아래 글을 보자.

 

튀르크-비잔틴 동맹은 아랍의 정복전의 마지막 비잔틴-페르시아 전쟁동안에 620년대에 회복되었다. 627년 Tong Yabghu 카칸은 그의 조카 Bori Shad를 파견했다. 튀르크는 카스피해 연안의 Derbent 요새를 덮치고 아제르바이젠과 죠지아로 들어 가서 약탈하였으며ㅡ 트블리시를 포위하고 있는 헤라클리우스를 만났다. (하기 내용)

“The Turk-Byzantine alliance was revived in the 620s during the last great Byzantine-Persian war before the Arab conquests. In 627 Tong Yabghu Qaghan sent out his nephew Böri Shad. The Turks stormed the great fortress of Derbent on the Caspian coast, entered Azerbaijan and Georgia, did a good bit of looting and met Heraclius who was besieging Tiflis.

 

곡튀르크의 동맹군은 627년 카스피해 연안의 Derbent 요새를 함락하고, 아제르바이젠과 조지아를 유린하고, 트빌리시 포위에 동참했다.

 

트블리시 포위공격이 시간을 끌자, 튀르크는 떠나고 헤라클리우스는 남쪽으로 가서 페르시언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튀르크는 돌아와서 트블리시를 함락하였고 주둔군을 학살했다. 비잔틴 대신에, Chorpan Tarkhan이라 불리는 튀르크 장군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다. (하기 내용)

When the siege dragged on, the Turks left and Heraclius went south and won a great victory over the Persians. The Turks returned, captured Tiflis and massacred the garrison. on behalf of the Byzantines, a Turk general named Chorpan Tarkhan then conquered most of Armenia.”

(source : Western Turkic Khaganate,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1st Turkic Khaganate)

 

트빌리시 포위공격이 시간을 끌자, 튀르크는 일시 떠났으나, 헤라클리우스가 남쪽으로 가서 페르시아에 큰 승리를 하자, 튀르크는 돌아 와서 트빌리시를 함락하고 대부분의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다. 아제르바이젠, 조지아를 유린하고, 아르메니아를 곡튀르크가 정복했다는 기록은 비잔틴, 사사니언 기록에서는 언급이 없었다.

 

종전후인 629년 상기 지도에서도 니네베 지역은 사사니언 페르시아 지역으로 표시되었다. 튀르크가 일시적으로 떠났다고 기록한 것도 조금 수상하다. 헤라클리우스의 니네베 전투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의심한다. 로마사학자들의 춘추필법의 일환일 것이다.

 

이런 가정의 경우, 니네베가 낭비성이라면, 신라의 김유신이 629년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했다는 것과 퍼즐이 맞는다. 니네베에 고구려군이 있으려면, 튀르크군이 헤라클리우스와 함께 남진하여 니네베를 공동 공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이 니네베 지역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비잔틴이 종전조약에서 사사니언에게 양보한 결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6. 낭비성(娘 아가씨 랑, 臂 쇠뇌자루 비)의 의미

 

대법원인명용

부수 (육달월) 총 획수 17획 획순보기

1.팔(어깨와 손목 사이의 부분)

2.팔뚝

3.쇠뇌(여러 개의 화살이나 돌을 잇따라 쏘는 큰 활) 자루(끝에 달린 손잡이)

(자료 : 네이버사전)

 

낭비성의 낭비는 여자와 큰 활과 관련된 의미, 즉 여전사, Amazons, 또는 그와 관련된 스키타인의 의미라 추정된다. 또한 Nineveh는 과거 New Assyria왕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뉴앗시리아가 역사적으로 스키타인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 보자

 

7. 뉴앗시리아와 스키타인 관계

 

1) 뉴앗시리아 Ashurbaniapl왕 재위시 역사

 

앗시리아의 북쪽 코카서스 남쪽에 사는 인도 유럽 유목민족 키메리언은 Ashurbanipal의 아버지 지배시기에 앗시리아를 침범했다. Esarhaddon이 그들을 패배시킨 후, 키메리언은 방향을 돌려 아나톨리아 서쪽에 있는 리디아왕국(Gyges가 통치)을 공격했다. 꿈에 앗시리아의 신 Assur의 조언을 얻은 후에, Gyges는 그의 외교사절을 앗시리아에 보내 Ashurbanipal이 도움을 요청했다. (아래 내용)

The Cimmerians, a nomadic Indo-European people living in the southern Caucasus north of Assyria, had invaded Assyria during the reign of Ashurbanipal's father. After Esarhaddon defeated them, the Cimmerians had turned to attack the Lydian kingdom in western Anatolia, ruled by the king Gyges. After allegedly receiving advice from Assyria's god, Assur, in a dream, Gyges sent his diplomats to ask Ashurbanipal for assistance.

 

앗시리아는 리디아가 존재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으나, 두 나라가 통역을 통해 성공적으로 대화가 이루어진 후, 키메리언의 리디아 침범은 기원전 665년에 패배되었으며, 두명의 키메리언 수장들은 니네베의 감옥에 갇히고, 많은 양의 전리품이 Ashurbanipal군에 의해 확보되었다. (아래 내용)

The Assyrians did not even know that Lydia existed and after the two states successfully established communication with the help of interpreters, the Cimmerian invasion of Lydia was defeated in c. 665 BC, with two Cimmerian chiefs being imprisoned in Nineveh and large amounts of spoils being secured by Ashurbanipal's forces.

 

앗시리아군이 리디아 원정에서 어디까지 관여했는지는 알려지 않으나, Gyges는 이 도움에 실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12년 후, Ashurbanipa과의 동맹을 깨고, 대신 이집트의 Psamtik I과 동맹을 하였다. 이후, Ashurbanipal은 Gyges를 저주하였고, 리디아가 기원전 652-650년에 적군들에 의해 유린되었을 때, 앗시리아에서 매우 기뻐했다. (아래 내용)

The extent to which the Assyrian army was involved in the Lydian campaign is unknown, but it appears that Gyges was disappointed with the help as he just twelve years later broke his alliance with Ashurbanipal, allying with Psamtik I of Egypt instead. After this, Ashurbanipal cursed Gyges and when Lydia was overrun by its enemies c. 652–650 BC there was much rejoicing in Assyria.[37]

 

앗시리아군이 엘람에 원정하는 동안, 페르시아, 키메리언, 메데스 연합군은 니네베 수도로 진격했고 시의 성벽에 도달했다.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Ashurbanipal은 그의 스키타인 동맹들을 불렀으며, 적군을 성공적으로 패배시켰다. (아래 내용)

While the Assyrian forces were on campaign in Elam, an alliance of Persians, Cimmerians and Medes marched on the capital Nineveh and managed to reach the city's walls. To counteract this threat, Ashurbanipal called on his Scythian allies and successfully defeated the enemy army.

(source : Ashurbanipal,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뉴앗시리아 외)

 

즉 앗시리아의 Ashurbanipal왕은 Medes, Cimmerians, Persians의 Nineveh시 연합공격에 맞서, 스키타인과 동맹을 맺고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Nineveh와 스키타인의 연관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아래 Nineveh의 벽화를 보면서 더 알아 보자.

 

2) Nineveh 벽화의 모습

 

아래 Nineveh의 벽화는 앗시리아의 Ashurbanipal 시기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모든 병사가, 심지어 왕까지 고깔모자의 투구를 쓰고 있다. 위의 역사공부에서 앗시리아의 왕 Ashurbanipal은 스키타인과 동맹을 맺고, 메디언, 키메리언, 페르시언과 싸웠다 하였으니, 스키타인의 모습을 예상했으나, 왕을 포함한 모두가 스키타인의 투구와 매우 유사한 투구를 쓰고 있다. (아래 그림 참조)

 

 

상기 투구는 아래 그림의 스키타인의 Phrygian cap과는 약간의 차이를 두나 이란의 Behistun inscription에 나타난 스키타인의 투구와는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Scythians (source : Simeon Netchev (CC BY-NC-SA), World History Encyclopedia)

 

Scythian 왕 Skunda in Behistun inscription (자료 : 위키피디아)

 

Amazonomachy, detail, late 2nd to early 3rd century CE, front and side of a sarcophagus, Roman. Pentelic marble. (source : Scythians, World History Encyclopedia)

(Exhibit in the Sackler Museum, Harvard University, Cambridge, Massachusetts, USA. The museum permitted photography of this artwork without restriction.)

 

III. 결 론

 

이상의 연구 결과를 고려할 때, 니네베성은 비잔틴이 공격할 시 626년에는 왕재성으로서 보이며, 이후 곡튀르크가 일시적으로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가 낭비성을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간은 그뒤 사사니언의 혼란한 내란 시기를 고려할 때, 아랍세력에 의해 다시 찾을 때까지 곡튀르크군이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629년 낭비성의 언급은 한국사에서 아마존 여전사 또는 스키타인에 관한 최초의 언급으로 판단된다. 페르시아에서는 3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파르티언 왕조 시기, Musa of Parthia (BC 2 - AD 4, 알영 부인 시기?)와 사사니언 왕조시기, Boran (r 630, 631-632)과 Azarmidokht(r 630-631)이다. 파르티언은 여러 모로 스키타인의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여왕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스키타인의 문화 때문인지 모른다.

 

또한 필자는 관산성 전투에 관한 연구에서 이 코카서스지역에 많은 스키타인의 후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가야지역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글 참조)

 

백제와 신라가 싸운 진성, 관산성, 구타모라 전투는 코카서스 Lazica지역에 있었다

 

백제와 신라가 싸운 진성, 관산성, 구타모라 전투는 코카서스 Lazica지역에 있었다

I. 서 론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치열한 전쟁을 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의 시기가 지난 후, 백제와 신라의 회복 시기이다. 즉 고구려가 점령한

lainfos.tistory.com

 

 

또한 김유신이 새로운 아랍세력의 일부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사사니언 페르시아는 이 전쟁후 쇠약해져 아랍세력에게 망했다 위키피디아는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문무왕 (재위 661-681)은 아랍의 무아위아(Muawiyah I, r 661-680)라 추정한다.

 

진평왕이 후손인 아들이 없어 여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둘이 계승했다고 한국사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진평왕(Khosrow II)의 아들(Kavad II, r 628)이 왕위에 오른 후 경쟁이 될 만한 남자 왕손들을 모두 죽였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On 25 February, Sheroe, along with his commander Aspad Gushnasp, captured Ctesiphon and imprisoned Khosrow II. He then proclaimed himself as shah of the Sasanian Empire and assumed the dynastic name of Kavad II. He proceeded to have all his brothers and half-brothers executed, including the heir Mardanshah, who was Khosrow's favourite son. The murder of all his brothers, "all well-educated, valiant, and chivalrous men",[2] strapped the Sasanian dynasty of a future competent ruler, and has been described as a "mad rampage" and "reckless".[3] Three days later he ordered Mihr Hormozd to execute his father. However, after the regicide of his father, Kavad also proceeded to have Mihr Hormozd killed.[4] His sisters Boran and Azarmidokht reportedly criticized and scolded him for his barbaric actions, which made him filled with remorse.[5]

(source : Kavad II,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사산왕조 (488-651))

 

그 뒤 Adrashir III (r 628-630), Shahrbaraz (r 630) 등의 내란시기를 거쳐 여왕(Boran, 630, 631-632, Azarmidokht, r 630-631)이 뒤를 이은 것으로 말한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특히 신라부문에서 많은 윤색을 한 역사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상으로 Nineveh성이 왕재성이면서 낭비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자 한다. 우리 조상들의 역사의 현장이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