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공통

백제와 신라가 싸운 진성, 관산성, 구타모라 전투는 코카서스 Lazica지역에 있었다

CG PARK 2026. 9. 3. 11:49

 

I. 서 론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치열한 전쟁을 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의 시기가 지난 후, 백제와 신라의 회복 시기이다. 즉 고구려가 점령한 지역을 일부 회복하는 시점인 것이다. 고구려로 판단되는 고트족은 장수왕 시기 서로마제국 (한성백제)을 무너뜨리고, 이태리반도, 이베리아반도 등을 차지한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 성왕의 고토회복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이 이태리반도를 둘러싼 전쟁으로 추정했다. 진흥왕의 신주 설치, 성왕의 한성과 평양의 포기는 그래서 이태리 반도 북부부근과 그 서쪽지역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비잔틴의 Justinian I은 이태리반도를 회복하는데, 이 와중에 북부지역을 롬바르디왕국에 일부를 빼앗긴다. 필자는 게르만족에서 드문 카스트제도가 있는 이들 롬바르디왕국이 신라 진흥왕의 세력이라 판단한다. 그래서 필자는 성왕과 진흥왕의 관산성 전투도 여기 어디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최근 코카서스 지역의 연구를 통해서 관산성이 이 이태리반도의 어디가 아닌 코카서스의 Lazica지역에 있을 수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그래서 이글을 쓰게 되었다.

 

II. 본 론

 

1. 관산성에 대한 자료

 

아래 관산성 전투의 자료에서 일본서기는 함산성(函山城)을 언급하고 있고, 백제군이 승리하여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백제군 요새가 수축되었다 언급한다. 필자는, 위 귀절을, 이글을 읽는 분들이 잘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필자는 진흥왕의 가야정벌시 이사부 장군의 이름이 일본서기에서 이질부례.. 라 언급하는 것을 보고 인도지역의 가야역사임을 밝혀냈다. (아래 인용문 참조)

 

"일본서기에서는 이사부를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 라고 말한다. 이질부례가 Ishvara를 음가차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이사부의 아들 Isanavarman이 Maukhari의 초대 독립적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Sharvavarman이 사다함으로 판단된다. 즉 사다함은 이사부의 손자가 되는 셈이다. "

(필자의 글,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대가야는 인도 동북부에 있었다.' 일부)

 

즉 원래의 외국이름에 가깝게 잘 발음하는 한자를 쓴다는 것이다. 이두문자식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성왕은 554년 태자 부여창(훗날 백제 위덕왕)에게 군사를 주어 신라를 치게 했다.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지휘하는 백제의 주력군 말고도 가야에서 동원한 군사와 왜(倭)의 원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일본서기》긴메이키(欽明紀)에 보면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기무련(物部莫奇武連)의 군사를 앞세워 함산성(函山城, 管과 函은 같은 뜻)을 공격하게 했다. 관산성은 신라가 새로 점령한 한강하류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적 요지였다. 12월 9일 유시(酉時)에 백제군은 관산성을 불태우고 함락시켰다. 이때 신라에서는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등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에 맞섰지만, 부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모두 격파당하고 드디어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백제군 요새가 수축되었다.

..............

<전쟁의 발견>에서 이희진 교수는 초반 관산성 전투는 백제가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관산성 전투에 대한 한 《삼국사기》보다는 《일본서기》기록이 보다 더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또한 백제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9,600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4]라고 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대규모에 해당하는 3만이라는 수가 관산성에서 전멸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을 들어 백제가 입은 타격의 정도를 설명해왔지만, 같은 책 권41 열전1 김유신 상(上)에서는 "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官)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5]고 하고 있어 수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료 : 관산성 전투, 위키백과)

 

"554년 1월 혹은 7월, 백제가 수만의 백제군 본군에 가야군[17], 왜군 지원군까지 동원해 신라에게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바로 관산성 전투였다. 고구려는 관산성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라를 간접 지원하기 위해 약간의 군대를 따로 백제 웅천성 공격으로 보냈다. 여기서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직접 본군을 이끌어 고구려를 격퇴하고(백합야 전투) 신라 전선에도 초기에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며 몇 번의 승리를 거두고 관산성을 압박, 554년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해 불태웠다.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9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진성(珎城)을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군마 8천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관산성 전투가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면 진성 전투는 9월에, 관산성 함락은 12월에 벌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제군을 이끄는 태자 부여창은 신라 영역으로 더 진격해 들어가려 했고 백제의 늙은 대신이 반대했지만 부여창은 공격을 강행해 신라 땅 안쪽의 구타모라(久陀牟羅)라는 곳까지 들어가 보루를 쌓았다."

(자료 : 진흥왕, 나무위키)

출처: https://lostcorea.tistory.com/1029 [Lost World History 잃어버린 지구촌 역사:티스토리]

 

상기 글에서 먼저 진입한 진성(珎城)의 진은 보배, 보물이라는 뜻이다.(아래 자료 참조) 보물이 나는 지역의 성 또는 보물이 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진성과 관산성을 함락했다고 언급한다. 이어 더 안쪽의 구타모라라는 곳까지 들어가 보루를 쌓았다 한다.

 

보배 진

대법원인명용

부수 𤣩(구슬옥변) 총 획수 9획 획순보기

1. 보배, 보물(寶物)

2. 맛있는 음식(飮食)

3. 진귀하다(珍貴--), 희귀하다(稀貴--)

(자료 : 네이버사전)

 

관산성 전투 이전 이후의 아래 삼국사기 기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삼국사기》 백제 성왕 본기 (523-554)

 

一年夏五月 성왕이 즉위하다 (523)

一年秋八月 좌장 지충이 고구려를 패수에서 격파하다 (523)

二年 양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524)

三年春二月 신라와 서로 예방하다 (525)

四年冬十月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우다 (526)

527-528 : 2년 공백

七年冬十月 좌평 연모가 고구려와 전투하여 패배하다 (529)

530-531 : 2년 공백

十年秋七月 별이 비 오듯 떨어지다 (532)

533년 : 공백

十二年春三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534)

十二年夏四月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다 (534)

535-537 : 3년 공백

十六年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다 (538)

539년 : 공백

十八年秋九月 장군 연회가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540)

十九年 양에서 모시박사 등을 보내주다 (541)

542-546 : 5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547)

二十六年春一月 고구려가 예와 공모하여 독산성을 공격하다 (548)

二十七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지르다 (549)

二十七年冬十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다 (549)

二十八年春一月 장군 달기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다 (550)

二十八年春三月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하다 (550)

551-552 : 2년 공백

三十一年秋七月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하다 (553)

三十一年冬十月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가다 (553)

三十二年秋七月 성왕이 죽다 (554)

 

 

 

《삼국사기》 신라 진흥왕 본기 (540-576)

 

一年秋七月 진흥왕이 즉위하다 (AD 540)

一年秋八月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의 관작을 올려주다 (AD 540)

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540)

二年春三月 눈이 한 자나 내리다 (AD 541)

二年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다 (AD 541)

二年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다 (AD 541)

542-543 : 2년 공백

五年春二月 흥륜사가 완성되다 (AD 544)

五年春三月 사람들의 출가를 허락하다 (AD 544)

六年秋七月 국사를 편찬하다 (AD 545)

546-547 : 2년 공백

九年春二月 백제를 침입한 고구려를 공격하다 (AD 548)

十年 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내다 (AD 549)

十一年春一月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다 (AD 550)

十一年春三月 이찬 이사부가 두 성을 빼앗다 (AD 550)

十二年春一月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다 (AD 551)

十二年春三月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 (AD 551)

十二年 고구려를 침입하여 10개 군을 빼앗다 (AD 551)

十三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 (AD 552)

十四年春二月 황룡사를 짓다 (AD 553)

十四年秋七月 신주를 설치하다 (AD 553)

十四年冬十月 백제 왕의 딸을 소비로 삼다 (AD 553)

十五年秋七月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다 (AD 554)

十五年 백제가 관산성을 공격하다 (AD 554)

十六年春一月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다 (AD 555)

十六年冬十月 북한산에 순행하다 (AD 555)

十六年冬十一月 북한산에서 돌아오다 (AD 555)

十七年秋七月 비열홀주를 설치하다 (AD 556)

十八年 국원을 소경으로 삼다 (AD 557)

十八年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하다 (AD 557)

十九年春二月 귀족의 자제 등을 국원소경으로 옮기다 (AD 558)

十九年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다 (AD 558)

559-561 : 3년 공백

二十三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의 백성을 침략하다 (AD 562)

二十三年秋九月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다 (AD 562)

563년 : 공백

二十五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AD 564)

二十六年春二月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AD 565)

二十六年秋八月 아찬 춘부에게 국원을 지키게 하다 (AD 565)

二十六年秋九月 품주를 설치하다 (AD 565)

二十六年 진에서 불경을 보내다 (AD 565)

二十七年春二月 기원사와 실제사가 세위지다 (AD 566)

二十七年 동륜을 왕태자로 삼다 (AD 566)

二十七年 에 사신을 보내다 (AD 566)

二十七年 황룡사가 준공되다 (AD 566)

二十八年春三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7)

二十九年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다 (AD 568)

二十九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8)

二十九年冬十月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하다 (AD 568)

569년 : 공백

三十一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70)

三十二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71)

三十三年春一月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AD 572)

三十三年春三月 왕태자인 동륜이 죽다 (AD 572)

三十三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AD 572)

三十三年冬十月二十日 팔관연회를 열다 (AD 572)

573년 : 공백

三十五年春三月 황룡사의 장육상을 주조하다 (AD 574)

三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AD 575)

三十六年 황룡사의 장육상이 눈물을 흘리다 (AD 575)

三十七年 원화를 받들다 (AD 576)

三十七 안홍법사가 돌아오다 (AD 576)

三十七年秋八月 왕이 죽다 (AD 576)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554년 백제가 관산성을 공격한 내용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진흥왕 기록에서만 언급된다. 삼국유사에서는 백제의 진성 함락까지 언급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춘추필법을 삼국유사가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2. 541-562 기간의 Lazic war

 

그러면 상기 한국사의 내용이 비잔틴과 사사니언 페르시아 역사에서 있는지 검토해 보자. 관산성 전투기간인 554년을 전후한 기간에 비잔틴과 사사니언은 20여년에 걸친 Lazic war가 있었다. 이Lazica 전장터는 서부 Georgia의 지역(옛이름은 Colchis지역)으로 코카서스 지역에서 서쪽 흑해에 접한 지역이다. 흑해를 통한 무역로의 중요한 지역이라 서로 양보하기 힘든 지역이라 오랜 전쟁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를 보면서 살펴 보자.

 


Lazic war는 Colchidian War라고도 하는데 조지아 역사에서는 위대한 Egrisi 전쟁이라고도 하며, 비잔틴제국과 사사니언 제국이 이 Lazica지역의 통제를 위해 싸운 전쟁이다. 541-562년 20년에 걸친 전쟁인데 이후 50년 평화조약으로 전쟁이 끝나고, 이 조약에 의해 비잔틴제국은 페르시아에게 매년 공물을 지불하는데, 이는 페르시아에 의해 이 Lazica지역이 비잔틴제국의 속국이라는 것은 인정받는 대가이다. 이 Lazica 전쟁에 대해서는 Procopius와 Agathias의 저서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아래 내용)

The Lazic War, also known as the Colchidian War or in Georgian historiography as the Great War of Egrisi[1] was fought between the Byzantine Empire and the Sasanian Empire for control of the ancient Georgian region of Lazica. The Lazic War lasted for twenty years, from 541 to 562, and ended with the Fifty-Year Peace Treaty, which obligated the Byzantine Empire to pay tribute to Persia each year for the recognition of Lazica as a Byzantine vassal state by Persians. The Lazic War is narrated in detail in the works of Procopius and Agathias.[2]


Lazica

Lazica는 흑해의 동쪽해안에 위치하여 코카서스를 건너 카스피해로 가는 중요한 산고개들을 통제하는 양 제국에 매우 핵심적인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비잔틴으로서는 페르시아가 (코카서스) 이베리아를 통해 흑해해안에 가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다른 한편 페르시아는 바다에 접근할 길을 갖고 이제까지 그들의 확실한 지배하에 있던 (코카서스) 이베리아로부터 영토를 통제할 수 있는 희망을 가졌는데, 이것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아래 내용)

Lazica, situated on the eastern shore of the Black Sea, and controlling important mountain passes across the Caucasus and to the Caspian Sea, had a key strategic importance for both empires. For Byzantines, it was a barrier against a Persian advance through Iberia to the coasts of the Black Sea. Persians on the other side hoped to gain access to the sea, and control a territory from which Iberia, which was by now under their firm domination, could be threatened.[3]

Lazica지역은 비잔틴과 사사니언 페르시아에게 모두 중요한 전략적 위치이며, 상대방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는 곳이었다.


Lazica는 이동이 어려운 지형이며, 자연적으로 난공불락의 국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더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다 : Petra, Archaeopolis, Sarapanis, Skande, Phasis, Rhodopolis, Uchimerion, Kotayon, Onoguris, Trachea, Sebastopolis, Pitius.(아래 내용)

Lazica featured a difficult terrain and was surrounded by naturally impregnable borders. Besides, it was protected by strong fortresses, including Petra, Archaeopolis, Sarapanis, Skande, Phasis, Rhodopolis, Uchimerion, Kotayon, Onoguris, Trachea, Sebastopolis and Pitius.[4]

Lazica지역은 지형적으로 이동이 어려우며, 주위의 난공불락의 자연으로 또한 많은 요새로 보호되어 있는 곳이다.

흑해연안의 Lazica지역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Background (배경)


페르시언 사사니언은 Lazica를 532년 영구평화조약에 의해 로마/비잔틴의 영향영역으로 인식하였다. 그때까지, 비잔틴은 지역왕국에의 영향을 증가시키기 위해, 지역의 왕 Tzath I의 개종을 고집했다: 그는 522/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Justin I에 의해 영세를 받고 왕족으로 인정받았다. 비잔틴병력이 Lazica와 그 이웃 Abasgia (현재의 Abkhazia, 대부분 해안도시 Poti, Sebastopolis, Pitius, 위치는 상기 지도 참조)에 주둔하였다.(하기 내용)

The Persian Sasanians recognized Lazica (Egrisi) as part of the Roman/Byzantine sphere of influence by the "Eternal Peace" Treaty of 532. By that time, in order to foster their influence over the local monarchy, the Byzantines had insisted on the conversion of the king, Tzath I: he received both baptism and royal attributes in Constantinople from Emperor Justin I (Justinian's predecessor) in 522/3.[5] Byzantine garrisons were stationed in Lazica and in neighboring Abasgia, mostly in the coastal cities of Poti, Sebastopolis and Pitius.

사사니언은 Lazica지역을 비잔틴의 영향하의 지역으로 532년 영구평화조약으로 인정했다. 비잔틴은 지역의 왕에게도 개종을 강요했다. Lazica지역뿐만 아니라 Abkhazia지역(주로 해안)에도 비잔틴 주둔군이 있었다.


왕국의 수도 Archaeopolis는 요새화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Petra(현재의 Tsikhisdziri, Batumi의 북쪽)에 있는 해안길의 왕국 남쪽의 접근지역도 요새화되었다. 536년에는 그러나 비잔틴의 완전 보호령이 되었는데, 이는 왕이 새로운 Magister Militum John Tzibus(비잔틴)에게 모든 권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Tzibus가 Lazic 무역인들의 무역의 자유을 비잔틴의 이익을 위해 빼앗았을 때, 541년 만연한 불만이 총궐기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힘없어진 왕 Gubazes II는 비밀리에 비잔틴에 대항하여 페르시아의 도움을 구했다. (하기 내용)

The kingdom's capital, Archaeopolis, was fortified, as well as the southern access to the kingdom on the coastal road at Petra (present day Tsikhisdziri, north of Batumi). In 536, however, the Byzantine presence turned into a full protectorate, as the king lost many powers to the new magister militum per Armeniam John Tzibus. When Tzibus curtailed the freedom of trade of Lazic tradesmen to advance Byzantine interests, the popular dissatisfaction led to a full-scale uprising in 541, and the weakened king, Gubazes II, secretly sought Persian assistance against the Byzantines.

이 지역은 해안가의 Petra와 보다 내륙의 Archaeopolis지역에 핵심 요새가 있었다. (위치는 상기 지도 참조). 536년 비잔틴의 지역 군사령관이 지역의 무역의 자유를 뺏는 등 완전 보호령화하자, 지역민들은 541년 반란을 일으키고, 힘이 없어진 지역왕 Gubazes II는 비밀리에 페르시아의 지원을 청했다. 이에 페르시아의 선공으로 Lazic war가 발생한 것이다.

<요약 연대기>

532년 페르시아 비잔틴 영구 평화조약 체결

536년 라지크왕국은 비잔틴의 피보호령화 됨

비잔틴 Tzibus가 라즈인들의 무역의 자유 박탈

541년 라즈인의 반발로 반란 일어남

라지크왕(Gubaze II)이 페르시아에 도움 요구

 

War (전쟁)

 

라지크전쟁은 541-562년기간동안 약 20년간 지속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아래 상세 내용은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Ruins of the Petra fortress and the Church of St. John the Baptist

 

Those calls were answered that year by the Persian king Khosrow I, who entered Lazica, captured the Byzantine main stronghold of Petra, and established another protectorate over the country.[6] Khosrow I retreated to Persia a year later after an abortive invasion of Commagene. In 543, a Roman invasion of Armenia was defeated by a small Persian force at Anglon, and Khosrow I unsuccessfully besieged Edessa in Mesopotamia a year later. A peace treaty was signed in 545.[7]

 

<요약 연대기>

541년 호스로 1세의 페트라 함락, 페르시아의 보호령화

542년 호스로 I세의 Commagene 침범 실패 및 페르시아로 철수

543년 비잔틴의 아르메니아 (Anglon) 공격 실패

544년 호스로왕 메소포타미아의 Edessa 포위공격 실패

545년 비잔틴 - 페르시아 평화 조약

 

The remains of the Roman fortifications of Archaeopolis

 

In Lazica, Khosrow I's attempt to establish direct Persian control over the country and the missionary zeal of the Zoroastrian priests soon caused discontent in Christian Lazica and King Gubazes revolted in 548, this time against the Persians. Gubazes II requested aid from Emperor Justinian I and allied with the Alans and Sabirs. Justinian sent 7,000 Roman and 1,000 Tzani (relatives of the Lazes) auxiliaries under Dagisthaeus to assist Gubazes and besieged the fortress of Petra but faced tough resistance from its heavily outnumbered garrison.

 

 

<요약 연대기>

 

548년 페르시아의 직접통치 의도에 반발한 라지크왕의 반란

동시에 라지크왕은 비잔틴 Justinian I에 도움 요청하고

Alans 및 Sabir와 연대

 

비잔틴은 7천의 로마병과 천명의 보조병 파견하여

페트라 요새 포위공격 그러나 강력한 저항 직면

 

Persian reinforcements under Mihr-Mihroe defeated a small Byzantine force guarding the mountain passes and then relieved the besieged Petra. Lacking enough supplies, Mihr-Mihroe garrisoned 3,000 men in the fortress and marched to Armenia leaving 5,000 soldiers to supply Petra. This force was destroyed by Dagisthaeus at the Phasis river in 549. The next Persian offensive also proved to be unsuccessful with the commander Chorianes killed in a decisive battle at the river Hippis (now the Tskhenistskali).

 

<요약 연대기>

 

548년 페르시아 지원군(Mihr-Mihroe장군)이 와서 고개길의

소규모 비잔틴군 격파하고 페트라 요새 포위 해소

페르시아군 일부는 보급품을 위해 아르메니아로 이동

 

549년 Phasis 강에서 비잔틴 Dagisthaeus에게 페르시아군 패배

Hippis강(Tskhenistskali)에서 페르시아군 패배

페르시아 사령관 Chorianes 전사

 

 

Nevertheless, the Persians manage to resupply Petra. The new Byzantine commander Bessas quelled a pro-Persian revolt of the Abasgi tribe, took and dismantled the fort of Petra after a lengthy siege and fierce fighting as Mihr-Mihroe did not arrive in time. The latter unsuccessfully diverted his force against Archaeopolis in 551 as many of his men were lost due to a lack of supplies.

 

<요약 연대기>

 

549년 페르시아의 페트라 재보급 성공

549년 비잔틴군 (Bessas)은 Abasgi 친페르시아 반란 진압

551년(?) 장기간 포위끝에 비잔틴군이 페트라 요새 함락 및 파괴

551년 페르시아 Mihr-Mihroe군은 보급부족으로 Archaeopolis 에 병력 지원 못함 (비잔틴에 의한 Archaeopolis함락)

 

 

However, the latter was unopposed elsewhere in the field and managed to capture Cotais and the fortress of Uthimereos, blocking the important roads to the highland regions of Scymnia and Souania, which were also captured by him later. In the summer of 555, he dislodged a superior Byzantine-Lazic force at Telephis and Ollaria by stratagem and forced them to retreat to Nesos. Mihr-Mihroe died of illness shortly after and was replaced by Nachoragan.

 

<요약 연대기>

 

551년 페르시아 Mihr-Mihroe군은 Cotais, Uthimereos요새 함락

이어서 Scymnia, Souania 함락 (위치는 상기 지도 참조)

 

555년 여름 페르시아군은 Telephis and Ollaria에서

비잔틴-라지크군 격파

비잔틴-라지크군은 Nesos(Phasis강 중간지점)로 후퇴

 

페르시아의 Mihr-Mihroe 사령관 죽음과 새로운 사령관

Nachoragan 부임

 

 

King Gubazes quarreled with Byzantine commanders Bessas, Martin, and Rusticus, complaining to emperor Justinian. Bessas was recalled, but Rusticus and his brother John eventually murdered Gubazes. To redress this with a victory on the battlefield, the Byzantine generals launched a full-scale assault at Onoguris, which was repulsed by a small force under Nachoragan, who momentarily took and destroyed the main Byzantine base at Archaeopolis, which Mihr-Mihroe had twice tried and failed to take.

 

 

<요약 연대기>

 

555년 Gubazes왕과 비잔틴 장군 사이의 불화

555년 비잔틴 Bessas 호출 및 Rusticus, John의 Gubazes 살해

555년 비잔틴군의 Onoguris 총공격 및 패배 (페르시아

Nachoragan의 소규모 병력에 패배)

555년 페르시아 Nachoragan장군의 Archaeopolis 비잔틴 기지

일시적 함락 및 파괴

 

These defeats and the murder of the Lazic king caused a bitter feud between the Lazic and Byzantine generals. The Lazi people got the Emperor to nominate Tzathes, the younger brother of Gubazes, as their new king, and Senator Athanasius investigated the assassination. Rusticus and John were arrested, tried, and executed. In 556, the allies retook Archaeopolis and routed Nachoragan in his abortive attack on Phasis. In the autumn and winter of the same year, the Byzantines suppressed a rebellion staged by the mountain tribe of the Misimians, and finally made peace.

 

<요약 연대기>

 

555년 라지크와 비잔틴 장군 사이의 심각한 분열

라즈인의 다음 왕 Tzathes (Gubazes동생) 등극

비잔틴 원로원에서 Gubazes왕 암살 관련 조사

비잔틴의 Rusticus, John 체포 및 재판과 사형

 

556년 비잔틴-라지크 연합군은 Archaeopolis 재함락

556년 페르시아 Nachoragan의 Phasis 공격 완패

556년 가을-겨울 비잔틴의 Misimians족 반란 진압

 

 

Outcome (결과)

 

In 557, a truce ended the hostilities between the Byzantines and Persians. By the "Fifty Years Peace" of Dara of 562, the Byzantine Empire was obliged to pay tribute to Persia each year for the recognition of Lazica as a Roman vassal state. Although no clear winner emerged from the conflict, the Sasanian Empire thus held a slight advantage since Rome was required to pay a set amount to Persia annually.[8] The Persian Empire encyclopedia claims that the Sasanian Empire won this war,[9] but some historians say that the result of the war was indecisive.[10]

(source : Lazic war,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요약 연대기>

557년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휴전

562년 Dara에서 50년 평화조약 체결

이 조약에 의거 비잔틴은 매년 공물 페르시아에 지불

이 조약에 의거 페르시아는 라지크의 비잔틴 속국 인정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 전쟁의 승리 주장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 전쟁은 승자가 없다 평가

 

 

<Lazic war 연대기 종합>

 

532년 페르시아 비잔틴 영구 평화조약 체결

536년 라지크왕국은 비잔틴의 피보호령화 됨

라지크인들의 무역의 자유 박탈

541년 라자크인의 반발로 반란 일어남

라지크왕의 페르시아 도움 요구

541년 호스로 1세의 페트라 함락, 페르시아의 보호령화

542년 호스로 I세의 Commagene 침범 실패 및 페르시아로 철수

543년 비잔틴의 아르메니아 (Anglon) 공격 실패

544년 호스로왕 메소포타미아의 Edessa 포위공격 실패

545년 비잔틴 - 페르시아 평화 조약

 

548년 페르시아의 직접통치 의도에 반발한 라지크왕의 반란

동시에 비잔틴 Justinian I에 도움 요청,

Lazic왕의 Alans 및 Sabir와 연대

비잔틴은 7천의 로마병과 천명의 보조병 파견하여

페트라 요새 포위공격 그러나 강력한 저항 직면

 

548년 페르시아 지원군(Mihr-Mihroe장군)이 와서 고개길의

소규모 비잔틴군 격파하고 페트라 요새 포위 해소

 

549년 Phasis 강에서 페르시아군 패배

Hippis강에서 페르시아군 패배

페르시아의 페트라 보급품 보급성공

비잔틴군 (Bessas), Abasgi 친페르시아 반란 진압

비잔틴군의 페트라 요새 함락 및 파괴

 

549년 페르시아의 페트라 재보급 성공

549년 비잔틴군 (Bessas)은 Abasgi 친페르시아 반란 진압

551년 비잔틴군이 페트라 요새 포위

551년 페르시아 Mihr-Mihroe군은 보급부족으로 Archaeopolis 에 병력 지원 못함 -> 비잔틴의 Archaeopolis 함락?

 

551년 페르시아(Mihr-Mihroe)은 Cotais, Uthimereos요새 함락

이어서 Scymnia, Souania 함락

 

552년 비잔틴군은 551년부터 포위한 페트라요새 함락 및 파괴

 

555년 여름 페르시아군은 Telephis and Ollaria에서

비잔틴-라지크군 격파

비잔틴-라지크군은 Nesos로 후퇴

 

555년 페르시아의 Mihr-Mihroe 병사 및

Nachoragan으로 사령관 교체

 

555년 Gubazes왕과 비잔틴 장군 사이의 불화

비잔틴 장군 Bessas 호출 및

Rusticus, John의 Gubazes 살해

555년 비잔틴군의 Onoguris 총공격 및 패배

(페르시아 Nachoragan의 소규모 병력에 패배)

555년 Nachoragan가 Archaeopolis기지 일시적 함락

 

 

555년 라지크와 비잔틴 장군 사이의 심각한 분열

라즈인의 다음 왕 Tzathes (Gubazes동생) 등극

비잔틴 원로원에서 Gubazes왕 암살 관련 조사

비잔틴의 Rusticus, John 체포 및 재판과 사형

 

556년 비잔틴-라지크 연합군은 Archaeopolis 재함락

 

556년 페르시아 Nachoragan의 Phasis 공격 완패

 

556년 가을 겨울 비잔틴의 Misimians족 반란 진압

 

557년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휴전

 

562년 Dara에서 50년 평화조약 체결

이 조약에 의거 비잔틴은 매년 공물 페르시아에 지불

이 조약에 의거 페르시아는 라지크의 비잔틴 속국 인정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이 전쟁의 승리 주장

역사가들은 이 전쟁은 승자가 없다 평가

 

565년 Justinian I 사망, 조카인 Justin이 왕이 됨

 

560s 역모사건 있었으나 Justinian이 관용을 베품

Justin에게 계승하라는 유언도 의문이 제기됨

즉 Justinian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있음

성왕이 모반에 의한 죽음이라는 주장과 일맥 상통

Justinian은 애민정신(pity)이 강했음

종교정책에 대한 여러 조치 있었음

 

 

The Byzantine-Sassanid frontier in the Caucasus and Asia Minor at the time of Justinian's death in 565.

 

3. Nokalakevi (=Archaeopolis)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Nakalakevi (현재의 Archaeopolis)에 대해 알아 보자.

 

 

Nokalakevi는 지역에서는 Nokalaku로 알려져 있으며, 어떤 자료에 의하면 Djikha Kvinji 또는 Jikhankuji로, 또한 Archaeopolis (고대 그리스어로 Old city)와 Tsikhegoji (조지아어로 Fortress of Kuji (구지 요새))로 알려진 이마을은 조지아에서 Samegelo-Zemo Svaneti 지역, Senaki 구에 있는 고대유적 장소이다. (하기 내용)

 

Nokalakevi (Georgian: ნოქალაქევი), locally known as Nokalaku (Mingrelian: ნოქალაქუ) and according to some sources[which?] as "Djikha Kvinji" or "Jikhankuji" (Mingrelian: ჯიხანქუჯი), also known as Archaeopolis (Ancient Greek: Ἀρχαιόπολις, "Old City") and Tsikhegoji (in Georgian "Fortress of Kuji"), is a village and archaeological site in the Senaki municipality, Samegrelo-Zemo Svaneti region, Georgia.

 

 

Nokalakevi는 고대 그리스어로 Archaeopolis이며, 조지아어로는 Tsikhegoji 즉 Fortress of Kuji이다. Kuji라는 말이 구타모라, Kutaisi 등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Archaeopolis site 

 

History

 

 

Nokalakevi 유적은 Tekhuri 강 옆에, 서부 조지아의 Samegrelo의 Colichian 평원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약 20ha를 점하고 있으며, 이 장소는 비잔틴 초기 역사학자들에게는 Archaeopolis로 알려졌고, 이웃한 조지아인(Kartlian) 연대기에서는 Tsikhegoji 또는 Kuji (Colchian 지배자 또는 eristavi(지방 지배자))요새로 알려져 있다. 요새는 Martvili 길위의 현대의 Senaki 타운로부터 15km떨어져 있고, Tekhuri강을 건너는 중요 지점을 관리하는데, 이는 Samegrelo중앙에 있는 Chkhorotsqu로 향하는 옆의 언덕을 감싸고 있는 전략적인 길의 교차점에 있다. (아래 내용)

 

Located by the Tekhuri River, on the northern edge of the Colchian plain in Samegrelo, western Georgia, lie the ruins of Nokalakevi. Occupying approximately 20ha, the site was known to early Byzantine historians as Archæopolis, and to the neighbouring Georgian (Kartlian) chroniclers as Tsikhegoji, or the fortress of Kuji — a Colchian ruler or eristavi. The fortress is located 15 km from the modern town of Senaki on the Martvili road, and would have commanded an important crossing point of the river Tekhuri, at the junction with a strategic route that still winds through the neighbouring hills to Chkhorotsqu in central Samegrelo.

 

 

Nikalakevi는 Tekhuri강을 건너는 중요 지점을 관리하며 전략적인 길의 교차점에 있다. 그 유적은 20ha를 점하고 있다.

 

 

Nokalakevi-Archaeopolis는 6세기동안에 코카서스남부에서 비잔틴제국과 사사니언 사이 싸운 주요 전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곳은 사사니언 페르시언과 이베리언(동부 조지아인/Kartlian) 공격으로부터 Lazika(현대의 Mingrelia)를 지키는 주용 요새중의 하나였다. 540-562년 전쟁동안에, 페르시언은 비잔틴과 Laz인으로부터 Nokalakevi-Archaeopolis를 취하는데 실패하여, 결국 Lazika를 통제하지 못했다. (아래 내용)

 

Nokalakevi-Archaeopolis played a part in the major wars fought between the Byzantine Empire and Sasanians in the South Caucasus during the sixth century AD. It was one of the key fortresses guarding Lazika (modern Mingrelia) from Sasanian, Persian and Iberian (East Georgian/Kartlian) attack. During the war of AD 540-562, the Persians' failure to take Nokalakevi-Archaeopolis from the Byzantines and the Laz eventually cost them control of Lazika.

 

상기 Lazic war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Nokalakevi (=Archaeopolis)는 Lazic war의 주요 전쟁터였다. 사사니언 통제지역인 동쪽 코카서스 이베리아지역으로부터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사사니언 페르시아는 Lazic 전쟁에서 이곳을 취하는데 실패하여, Lazica를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평화조약에서 양보한 이유로 판단된다.

 

 

 

Nokalakevi-Archaeopolis의 초기 비잔틴 방어요새들은 이 장소가 Tekhuri강을 굽어 보고 있는 이 위치의 이점을 이용했다. Tekhuri강은 이 요새의 서쪽으로 지역의 화강암을 관통하는 협곡을 만들었다. 이 장소의 북쪽의 가파른 바위투성이의 땅은 이 성채가 거의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 상부 시가와 아래 시가를 연결하는 성벽이 있는데, 이곳에서 4-6세기동안에 지은 석조건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후기 로마시대의 지층 아래에,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점령과 폐기의 여러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아래 내용)

 

The early Byzantine defensive fortifications of Nokalakevi-Archaeopolis take advantage of the site's position within a loop of the river Tekhuri, which has carved a gorge through the local limestone to the west of the fortress. The steep and rugged terrain to the north of the site made the citadel established there almost unassailable. A wall connected this 'upper town' to the 'lower town' below, where excavations have revealed stone buildings of the fourth to sixth century AD. Beneath these late Roman period layers there is evidence of several earlier phases of occupation and abandonment, from the eighth to second centuries BC.[1]

 

 

Archaeopolis(Nokalakevi)의 지형은 서쪽의 Tekhuri강과 협곡으로,북쪽은 가파른 바위투성이의 땅으로 되어 있어 성채를 거의 공격할 수 없는 요새가 되었다. 위 아래 시가를 연결하는 성벽에서 4-6세기 석조건물이 발견되었다. 지층 아래에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의 점령과 폐기의 역사가 나타났다.

 

 

Archaeological work at the site (이 장소에서의 고고학적 작업)

 

 

1833부터 1931년까지 여러 팀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비잔틴 황제 모리스 (584-602)시기의 금동전 화폐들이 발견되었고, 이곳이 Aia라는 그리스 Argonaut신화속의 고대 Colchian 수도가 이곳 Kutaisi라는 그동안의 인식을 확인해 주었다. (아래 참조)

 

Modern study of the site began in the decades before the formal Russian annexation of Samegrelo, with a visit by the Swiss philologist Frédéric Dubois de Montpéreux in 1833-4. He identified the ruins as the Archaeopolis of Byzantine historians and argued that the site was Aia, the ancient Colchian capital of the Greek Argonaut myth.[2][3] This stimulated scholarly interest, which culminated in the 1920s with proposals for an archaeological excavation. In the winter of 1930-31, a joint German-Georgian team, led by Dr Alfonse-Maria Schneider of Freiburg University, traced the line of the walls and excavated about 40 survey trenches and one of the towers, as well as what they erroneously believed to be the agora in the 'lower' town. Their findings — including a hoard of gold solidi of the Emperor Maurice (AD 584-602) — confirmed Dubois de Montpéreux's identification of the site with Archaeopolis, without settling the question of Aia.[4] Most scholars[who?] continued (and continue) to prefer the traditional identification of Aia with Kutaisi.

 

(source : Nokalakevi,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500-717))

 

유물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비잔틴 황제 모리스(r 584-602)시기의 금동전이 발견되어 이후 비잔틴의 지배가 확인되었고, 그리스 신화 속의 Argonaut의 Gold Fleece를 위한 마지막 방문지인 Colchis 수도인 Aia가 가까운 Kutaisi임이 확인되었다.

 

아래 유튜브를 보면 이 지역 성채의 유적 영상을 볼 수 있다.

 

 

https://youtu.be/Y4yuGnAhGMk?si=dcUeXM_qtaT_yJm7

ATINATI: Nokalakevi

This archaeological site, located near the village of Nokalakevi in the Samegrelo province, boasts a rich history dating back to Antiquity.

Ancient Archaeopolis comprised a lower city and a citadel, both interconnected by defensive walls. Along with the huge fortification walls, with the main gate in the middle, the lower city preserves the ruins of palaces, baths, barracks, and three churches, two of which survive at ground level only, while the third was restored in the Middle Ages.

 

참고로 이곳 Archaeopolis에서의 비잔틴과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전투내용(관산성 전투)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551년 비잔틴-라지크 연합군의 Archaeopolis 함락

555년 페르시아군의 Archaeopolis 일시적 함락

556년 비잔틴-라지크 연합군의 Archaeopolis 재함락

 

 

4. Kutaisi

 

상기 유물 조사에서 언급된 Kutaisi(구타시(久陀市)?)에 대해 알아 보자. 필자는 관산성 전투에 대해 일본서기에서 언급된 '구타모라(久陀牟羅)' 지역이 여기가 아닌가 하는 추정하고 있다.

 

Kutaisi는 조지아공화국의 Imereti지역의 한 도시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지속된 도시의 하나이며, 조지아에서는 2025년 인구 16만여명으로 트빌리시, 바투미 다음의 3변째로 큰 도시이다. 트빌리시의 서쪽 221km에, Rioni강에 있다. Imereti의 수도이다. (아래 내용)

 

Kutaisi (/kuːˈtaɪsiː/ koo-TY-see;[5] Georgian: ქუთაისი pronounced [ˈkʰut̪ʰais̪i] ) is a city in the Imereti region of the Republic of Georgia. One of the oldest continuously inhabited cities in the world, it is the 3rd-largest city in Georgia after Tbilisi and Batumi with a population of 160,971 as of 2025.[3] It lies 221 kilometres (137 miles) west of Tbilisi, on the Rioni River, and is the capital of Imereti.

 

Kutaisi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의 하나이며, 조지아에서 트빌리시, 바투미 다음으로 3번째 큰 도시이다.

 

 

 

View of Kutaisi

 

 

역사적으로 조지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 중세에 Abkhazia왕국, 조지아왕국, 후에는 이메레티왕국의 수도로서 Colchis의 정치적 중심지이다. 2012년 10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Kutaisi는 조지아정부의 분산화의 노력으로 조지아 의회가 자리 잡았다. (아래 내용)

 

Historically one of the major cities of Georgia, it served as the political center of Colchis in the Middle Ages as the capital of the Kingdom of Abkhazia[6] and Kingdom of Georgia and later as the capital of the Kingdom of Imereti. From October 2012 to December 2018, Kutaisi was the seat of the Parliament of Georgia as an effort to decentralize the Georgian government.

 

Kutaisi는 중세의 Abkhasia왕국, 조지아왕국, Imereti왕국의 수도로서, Colchis의 정치적 중심지이다.

 

History

 

고고학적 증거가 말하기를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5세기에 Cholchis의 수도였다. 아폴로니우스 로디우스 작가가 지은 그리스 서사시 Argonautica에서 Jason과 Argonautis가 Colchis까지 여행하는데, Kutaisi가 Aeetes왕의 거주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라고 생각한다고 믿어진다. (아래 내용)

 

Archaeological evidence indicates that the city functioned as the capital of the Colchis in the sixth to fifth centuries BC.[7] It is believed that in the Argonautica, a Greek epic poem about Jason and the Argonauts and their journey to Colchis, author Apollonius Rhodius considered Kutaisi their final destination as well as the residence of King Aeëtes.

 

Kutaisi는 기원전 6-5세기에 Colchis의 수도였으며, 그리스 신화의 Gold Fleece를 찾기 위한 Jason과 Argaonauts의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였으며, 신화 속의 Aeetes왕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후에는 아랍에 의해 잠시 점령되기까지는 Lazica왕국의 수도였다. 서부 조지아에 대한 아랍의 침범은 736년 Lazic, Iberian과 연합한 Abkhazians에 의해 격퇴되었다. 786년쯤에는 Leon II왕이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고, 수도를 Kutaisi로 옮기고, 왕조의 결합을 통해서, Lazica와 Abasgia를 통합하였다. (아래 내용)

 

Later, it was the capital of the kingdom of Lazica until being occupied briefly by the Arabs. An Arab invasion into western Georgia was repelled by Abkhazians jointly with Lazic and Iberian allies in 736, towards c.786, Leon II won his full independence from the Byzantine Empire and transferred his capital to Kutaisi, thus unifying Lazica and Abasgia via a dynastic union.

 

(source : Kutaisi, wikipedia, 인용출처: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500-717))

 

Kutaisi에 대한 아랍의 점령은 736년 Lazic, Iberian, Abkhazian 연합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786년쯤에는 비잔틴제국(통일 신라)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이루었고, 왕조의 결합으로 Lazica와 Abkhasia의 통합된 왕국의 수도는 Kutaisi가 되었다.

이상으로 구타모라로 추정되는 Kutaisi(구타시?)에 대해 알아 보았는데, 그 위치가 일본서기의 내용과 일치한 지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Tsikhisdziri (Petra 요새지역)

 

Tsikhisdziri는 Petra 요새가 있는 지역으로 확인되는 지역이며, 페트라성은 진성으로 추정되는 바, 이 지역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자.

 

Tsikhisdziri는 Late Antique시기의 고고학적 유물의 본고장이며, 주류 학자들은 로마가 세운 도시 요새 페트라라고 확인된다. (아래 내용)

 

Tsikhisdziri is home to an archaeological site and ruins of a Late Antique fortified town, which is identified by mainstream scholarship with the Roman-built city-fortress of Petra.

 

고고학자들은 로마가 세운 페트라 요새 도시라 한다.

 

 

Tsikhisdziri

 

 

 

The ruins of ancient Petra

 

 

Archaeology (고고학)

 

Artifacts (유적)

 

 

Tsikhisdziri 장소는 흑해의 암석이 많은 해안가에 위치한다. ..

 

The Tsikhisdziri site is located on a rocky coastline of the Black Sea,

 

Tsikhisdziri는 535년 Justinian I황제의 명에 의해 세워진 로마시 페트라요새라고 주류학자들에 의해 인정된다. 535년이후, 사사니언 페르시아와 Lazic war에서 이 도시의 소유를 위한 계속된 전쟁이후, 로마인들에 의해 철거되었는데, 551년이후 적의 목표가 다시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래 내용)

 

The Tsikhisdziri site is identified by the mainstream scholarly opinion with the Roman city–fortress of Petra, founded at the behest of the emperor Justinian I in 535 and, after a series of battles for the possession of that city during the Lazic War with Sasanid Iran, demolished by the Romans themselves to prevent it again becoming the enemy's target in 551.[9]

 

535년 비잔틴 황제 Justinian I에 의해 세워진 페트라 요새라고 고고학자들은 인정한다. 암석이 많은 해안가에 있는 요새이다.

 

기원후 3세기의 아이템들의 집합- 금세공품, 은과 청동으로된 그릇들, 구슬들 그리고 주화들 - 지금은 Tsikhisdziri 보물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1907년 여기서 발견되어서 러시아 Saint Petersburg의 Hermitage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아래 내용)

 

A collection of the 3rd-century AD items—gold jewelry, silver and bronze vessels, beads, and coins—and now known as the Tsikhisdziri treasure was found there in 1907 and then acquired by the Hermitage Museum in Saint Petersburg, Russia.[4]

 

이곳에서 3세기 아이템으로 금세공품, 은그룻, 청동그룻, 구슬들, 주화 등이 이 지역에서 1907년 발견되었다. 이러한 보물의 발견은 이 지역의 페트라성이 진성(珎 보배진, 城)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Architecture (건축물)

 

Tsikhisdziri요새는 해안의 두 언덕위에 있는데, 서로 이중 성벽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아래 내용)

 

The Tsikhisdziri fortress was situated on two coastal hills, connected to each other through double walls...

 

(source :Tsikhisdzi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500-717))

이 요새는 해안의 두 언덕위에 있는데, 이중 성벽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The ruins of a 6th-century basilica at Tsikhisdziri.

 

 

6. Petra

 

진성으로 추정되는 페트라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자.

 

Lazic War

 

Tzibus가 페트라의 무역을 독점하자 Lazi와 로마와의 관계가 틀어졌다. Lazic왕 Gubazes는 비밀리에 사사니언의 도움을 구했다. 이것이 541년 호스로 I세에 의한 사사니언군의 침범을 초래했고, 20년의 Lazica 전쟁에서 페트라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아래 내용)

 

Tzibus' monopolization of trade in Petra soured Rome's relations with the Lazi, whose king, Gubazes, secretly sought Sasanian assistance against Rome.[3] This occasioned an invasion by a Sasanian army under Khosrow I in 541 and twenty years of war in Lazica, in the course of which Petra changed hands several times.

 

541년 호스로는 이 도시의 요새에 대한 처음 공격에서 실패했으나, 그의 병력을 비밀리에 건축된 터널을 통해 보냄으로써 페트라를 함락하였고 타워를 파괴했다. 이는 로마인이 굴복하게끔 했다. 호스로는 전쟁에서 죽은 Tzibus의 부를 도용하였으나, 도시의 로마인은 사려깊게 대우했다. (아래 내용)

 

In 541, Khosrow, following an initial unsuccessful assault on the fortifications of the city, captured Petra by sending his troops through a secretly constructed tunnel and destroying the towers, which induced the Romans to capitulate. Khosrow appropriated the riches of Tzibus, who was killed in battle, but treated the Romans of the city with consideration.[6][7]

 

541년 호스로1세는 페트라성의 함락에 성공한다. 타워를 파괴했고, 죽은 성주의 보물을 취했다.

 

548년, Justinian은 Dagisthaeus하의 군을 보냈다 - 이번에는 사사니언의 헤게모니에 불만인 Lazi와 연합하여 - 페트라를 함락하라 보냈다. 연합군은 도시를 포위하였고 두개의 지원군 지상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Mihr-Mihroe 장군 지휘하의 페르시아군은 포위군이 더 지탱할 수 없게 했다. 결국, Dagisthaeus는 549년 페트라를 함락하지 못하고 같은 해 철수했다. 551년 로마-Lazi군은 Bessas지휘하에 두번째 포위공격을 시작했다. 일년이 더 지난후(552), 도시는 함락되었고, Bessas는 요새가 다시는 페르시언 목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 성곽을 완전히 파괴했다. (아래 내용)

 

In 548, Justinian sent a force under Dagisthaeus—this time allied with the Lazi, who had become discontent with Sasanian hegemony—to retake Petra. The allies besieged the city and defeated two Sasanian field armies sent to its aid, but subsequent maneuvers by the Iranian commander Mihr-Mihroe made the besiegers' positions untenable. Eventually, Dagisthaeus failed to retake Petra in 549 and withdrew the same year.[8] In 551, a Roman–Lazi army under Bessas began a second siege. After more than a year, the city fell and Bessas razed the city fortress to the ground to prevent it again becoming a Sasanian target.[9][10]

 

548년 비잔틴-라지크 연합군의 페트라 포위공격은 실패했다. 549년 비잔틴-라지크 연합군은 철수했다. 551년 두번째 포위공격끝에 552년 페트라성을 함락했고 파괴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는 이 Tsikhisdziri 장소가 7세기에 다시 잘 살아나서, 그후로도 요새성벽이 이용되고 반복적으로 수리되었음을 말해준다. (아래 내용)

 

However, recent archaeological evidence from Tsikhisdziri suggests that the site survived well into the 7th century AD and beyond, with the fortification walls remaining in use and repeatedly repaired.[11]

(source : Petra, Lazica,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 (500-717))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7세기이후 다시 요새가 사용되고 반복적으로 수리 되었음이 밝혀졌다.

 

Ruins of a fortress at Tsikhisdziri identified as Petra (source : wikipedia)

 

앞에서 살펴 본 기록에 의하면, 진성(보배진, 재성)이 해안가의 Petra성으로 보이는데, 이 성에서 금, 은, 청동기 등의 보물이 나왔다 한다.

 

그래서 이 지역 Colchis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고자 한다. 즉 Colchian은 누구이며, 이들의 문화는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 보고자 한다.

 

 

 

7. Colchian

 

그리스-로마 지리학에서 Colchis는 Egrisi의 조지아 정치집단에 대한 지명이다. 이들은 흑해의 동쪽해안에 위치하며, Abkhazia를 포함한 서부 조지아가 중심이다.(아래 내용)

 

In classical antiquity and Greco-Roman geography, Colchis[a] (/ˈkɒlkɪs/;[24] Ancient Greek: Κολχίς) was an exonym for the Georgian polity[b] of Egrisi[c] (Georgian: ეგრისი) located on the eastern coast of the Black Sea, centered in present-day western Georgia also including the region of Abkhazia.

 

이들 Colchian은 흑해 동쪽해안에 위치한 Abkazia가 중심이라는 언급이다. 즉 이들이 이 문화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Colchians은 일반적으로 현대의 Laz와 Mingrelian부족의 조상으로서 초기의 Zan-speaking부족이다. David Marshall Lang에 의하면, 근대 조지아국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인 Colchians은 중기 청동기시대에 코카서스에 정착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래 내용)

 

Its population, the Colchians, are generally believed to have been primarily early Zan-speaking tribes, ancestral to the modern Laz and Mingrelian peoples.[5][25][26][27][28] According to David Marshall Lang: "one of the most important elements in the modern Georgian nation, the Colchians were probably established in the Caucasus by the Middle Bronze Age."[29][30]

 

현대 Laz와 Mingrelian의 조상인 Colchians은 청동기 중기에 정착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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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his영토는 지금 조지아 서부에 대부분 있었다. 지금의 조지아지방, Samegrelo, Imereti, Guria, Adjara, Svaneti, Racha와 Abkhazia, 그리고 러시아의 Sochi, Tuapse지역, 그리고 현재 튀르키예의 Artvin, Rize, Trabzon지방이다. (아래 내용 참조)

 

Colchis territory is mostly assigned to what is now the western part of Georgia and encompasses the present-day Georgian provinces of Samegrelo, Imereti, Guria, Adjara, Svaneti, Racha; Abkhazia; modern Russia's Sochi and Tuapse districts; and present-day Turkey’s Artvin, Rize, and Trabzon provinces.[39][40]

 

Colchis의 영토는 지금의 조지아 서부지역뿐만 아니라 터어키의 동북지역 Trabzon 등을 포함하며, 러시아의 Sochi 등 지역을 포함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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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llection of Colchian gold bracelets and necklaces found in Vani, western Georgia

(조지아 서부, Vani에서 발견된 Colchian의 금팔찌 및 금목걸이 모음)

 

Colchis, Kolkha, Qulha, Kikhi는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존재한 초기 조지아 인종의 정치집단이다. Colchians이란 이름은 그리스-로마 인종지리에서 흑해 동쪽에 사는 초기의 Kartvelia부족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용되었다. (아래 내용)

 

Colchis, Kolkha, Qulḫa, or Kilkhi,[41][42][43][44] which existed from the c. 13th[45] to the 1st centuries BC, is regarded as an early ethnically Georgian polity; the name of the Colchians was used as the collective term for early Kartvelian tribes which populated the eastern coast of the Black Sea in Greco-Roman ethnography.[46][32][33][47][48]

 

Colchis는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존재한 나라이다. Colchians이란 이름은 흑해 동쪽해안의 Greco-Roman부족인 Kartvelian 부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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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에, 고대시기의 사학 연구자인 Peter Ushakov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기원전 18-15세기의 고대에서는 Abkhazian-Circassian부족 그룹이 코카서스의 서부 반절의 전 지역 - 흑해연안에서 유프라테스강의 원천에 이르는 전 Colchis지역 - 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들은 4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Mitanni, Colchians, Abasgi, Ubykhs 등의 부족이다. (아래 내용)

 

At the beginning of the XX century, a researcher of ancient history Peter Ushakov notes: "In ancient times, during the 15th-18th centuries BC, the tribes of the Abkhazian-Circassian group inhabited the entire space of the western half of the Caucasus from the Black Sea province through the whole of Colchis in a continuous strip to the sources of the Euphrates and were divided into four branches: the people of Mitanni, Colchians, Abasgi and Ubykhs."[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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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이후, Colchis는 Aeetes, Medea, Golden Fleece, 불을 뿝는 Colchis bulls의 전설적 고향이며 Argonauts의 마지막 장소인 Aea로 확인되었다. (아래 내용)

 

From the fifth century B.C.E. onwards, Colchis was identified as Aea, the mythical home of Aeëtes, Medea, the Golden Fleece, and the fire-breathing Colchis bulls[73][74] and was the destination of the Argonauts.[75][76]

 

Colchis는 또한 Amazons의 고향일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Amazons은 또한 Colchis의 스키타인 오리진이라고도 말해진다. (아래 내용)

 

Colchis also is thought to be a possible homeland of the Amazons.[77][78][79][80][81][82] Amazons also were said to be of Scythian origin from Colchis.[83]

 

Colchis가 여전사 아마존의 고향일 수 있다는 것은 이들 지역이 스키타이 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Colchian culture에 나타나는 금조형물 등이 이를 말해 준다. 필자는 가야가 꼬깔모자를 쓴 스키타이가 아닐까 하는 글을 썼다. 즉 이 지역도 가야지역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 살펴 본 아래 자료와 같이 백제가 가야와 왜를 동원한 기록은 이 Colchis지역이 가야지역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어떤 가야지역인지 말 수 없다.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지휘하는 백제의 주력군 말고도 가야에서 동원한 군사와 왜(倭)의 원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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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his이름은 우라르트말 Qulha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8세기 중반에 , 우라르트왕 Sarduri II은 비석에 Qulha에 대한 승리를 적어 놓았다. 그러나 Qulha의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있다. 어떤 학자는 Qulha(Colchis)이름이 조지아 서부의 땅을 원래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는 Qulha가 남쪽, 터어키의 Gole에 가까운 지역이라 주장한다. (아래 내용)

 

The name Colchis is thought to have derived from the Urartian Qulḫa.[53] In the mid-eighth century BC, Sarduri II, the King of Urartu, inscribed his victory over Qulḫa on a stele; however, the exact location of Qulḫa is disputed. Some scholars argue the name Qulḫa (Colchís) originally referred to a land to the west of Georgia.[54][55] Others argue Qulḫa may have been located in the south, near modern Göle, Turkey.[56]

 

Colchis지역이 기원전 8세기 중반 Urartu왕의 금석문에 의해 Urartu왕국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Bronze lamp featuring Zeus and Ganymede from western Georgia, c. 3rd century BC, Georgian National Museum

 

Colchis는 그리스신화에서 Medea와 Golden Fleece의 고향일뿐 아니라 Argonauts의 마지막 장소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금, 철, 목재, 꿀이 풍부하여 고대 Helenic 도시국가들에게 자원을 수출한 것으로 서술된다. Colchis는 다양한 인구를 가졌다. 그리스와 로마 자료에 의하면, 70개에서 300개의 언어가 Discourias (현재의 Sukhumi)에서만 말해지고 있었다 한다. (아래 내용)

 

Colchis is known in Greek mythology as the destination of the Argonauts, as well as the home to Medea and the Golden Fleece.[22] It was also described as a land rich with gold, iron, timber and honey that would export its resources mostly to ancient Hellenic city-states.[23] Colchis likely had a diverse population. According to Greek and Roman sources, between 70 and 300 languages were spoken in Dioscourias (modern Sukhumi) alone.[6]

 

Colchis지역에 금, 철이 많이 나서 수출하였다 한다. Golden Fleece신화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는 보물이 많은 성이라는 진성이 이곳 Lazic지역의 Petra성일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Bronze lamp featuring Heracles, Ariadne and elephants, 1st century BC, Georgian National Museum.

(source : Colchis,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Caucasus Colchis)

 

8. Colchian culture

 

Colchian문화는 약 기원전 2700년부터 기원전 700년까지 번성한 조지아 서부에 중심을 둔 청동기 철기 시대 문화이다. 흑해연안에 먼저 정착하고 후에 내륙으로 발전해갔다. 초기 Colchian 단계를 거쳐 고전시대 그리스식민지 시대가 이어진다. 나무 건축, 습지 적응, 다양한 매장의식 등으로 특징지워지는데 - Pichori와 Ergeta처럼 - , 많은 고고학적 기록이 있다. 이 문화는 특히, 청동기 철기 금속물, 제사용 술잔들, 그리고 특별한 도자기 등으로 유명하다. Koban culture와 특별히 깊은 지역적 교류를 보여 주며, 다른 문화와도 교류가 많아 폭넓은 문화적 네트워크를 보여 준다. (아래 내용)

 

The Colchian culture is a Bronze and Iron Age archaeological culture centered in western Georgia, which flourished from approximately 2700 BCE to 700 BCE. It developed following environmental shifts that enabled more permanent settlement along the Black Sea coastline and further inland. It is divided into Proto-Colchian and Early Colchian phases, later succeeded by Classical-era Greek colonization. Distinguished by wood-based architecture, marshland adaptations, and varied burial rites, Colchian sites — like Pichori and Ergeta — offer a deep archaeological record. The culture is notable for its bronze and iron metallurgy, ritual drinking vessels, and peculiar ceramics. Strong regional interactions with the Koban culture and others reflect broad cultural networks.........

 

Koban Culture는 코카서스 북쪽과 중앙에 위치한 문화로서 스키타이 문화이다. 따라서 이들과 긴밀하게 연관된 Colchian 문화도 스키타이 문화라는 것이다.

 

Colchian문화의 건축물은 우선적으로 나무로 되었으며, 가끔 짚과 흙으로 된 담장이 있다. (아래 내용)

 

Architecture in the Colchian culture was primarily wood-based, often with wattle-and-daub walls..........

 

장례관습은 특히 다양한데, 중앙 콜치스지역의 지하의 수갱분묘에서 북부 Abkhazia지역의 거석 고인돌 등으로 다양하다. (아래 내용)

 

Burial practices were notably diverse, ranging from shaft graves in central Colchis to megalithic dolmens in northern Abkhazia.....

 

Abkhazia지역은 거석 고인돌로 하는 장례관습이 있다 한다.

 

금속세공의 중심지는 Abkhazia지역의 Chorokhi강유역과 Racha와 Lechkhumi지역의 산간지역인데, 지역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도자기 제조는 대부분 손으로 만들고, 검정색 윤이 나며, 거친표면을 가진 도자기는 장식이 되어 있고 바퀴가 달려 있으며, 수직적 피리모양과 동물형태의 손잡이가 있다. 콜치언 재료 문화의 특기할 만한 요소는 제사용 술 전통인데, 이는 세련된 술잔으로 증명된다. (아래 내용)

 

The main centers of metallurgy were located in the Chorokhi River basin, in Abkhazia, and in the mountainous regions of Racha and Lechkhumi, with significant local variation. Ceramic production evolved from mostly hand-made, black-polished and coarse pottery to decorated, wheel-made wares with broad vertical fluting and zoomorphic handles.[12] A noteworthy element of Colchian material culture is its ritual drinking tradition, as evidenced by finely crafted drinking vessels.[13]

 

금속세공의 중심지는 Abkhazia지역과 Racha, Lechkhumi 산간지역이라 한다. 도자기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제사용 술잔그룻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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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hian 문화는 코카서스 북중부의 Koban 문화(1400-600 BC)와 여러가지 금속세공 형태에서 공통점을 가지며, 또한 중부의 Greater 코카서스산맥의 남쪽 언덕에 있는 Tlia 지역과도 강한 문화적 교류를 보여 준다. (아래 내용)

 

The Colchian culture bordered and shared numerous forms of metalwork with the contemporaneous Koban culture of the north-central Caucasus (c. 1400–600 BC), as well as with the site of Tlia in the southern foothills of the central Greater Caucasus, reflecting a robust network of cultural interaction.

 

금속세공에 있어서 Koban 문화와 동질성을 갖는다는 것은 같은 스키타이문화라는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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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치언 문화는 신석기, 초기 청동기, 철기문화이며, 코카서스의 서쪽, 대부분 서부 조지아의 문화이다. 이 문화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범 콜치언 문화(2700-1600BC)와 고전 콜치언문화(1600-700BC)의 두가지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북코카서스의 Koban 문화에 의해 계승되었고, 콜치언 영향은 Shida Kartli, Meskheti, 북동쪽 아나톨리아에 널리 펴져 있다. (아래 내용)

 

Colchian culture (Georgian: კოლხური კულტურა; 2700 BCE to 700 BCE)[1] is Neolithic, early Bronze Age and Iron Age culture of the western Caucasus, mostly in western Georgia. Colchian culture was divided into two periods: Proto-Colchian (2700–1600 BC) and Ancient Colchian (1600–700 BC). It was partially succeeded by the Koban culture in Northern Caucasus and Colchian influence also spread in Shida Kartli, Meskheti, North-Eastern Anatolia.[2]

 

콜치언 문화는 북동쪽 아나톨리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Pontus지역도 스키타이지역이고 아마존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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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치언문화는 흑해연안을 따라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Colchis란 고대 지역명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주로 잘 발달된 청동기제조와 예술적 장인정신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무덤에서 많은 아이템의 구리 및 청동기 제품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연구된 무덤들은 Abkhazia지역, Sukhumi 산지역들에 위치하며, Racha언덕에서는 벽돌 타일과 그림 등이 발견되었으며, 콜치언 평원에서는 집단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아래 내용)

 

It is named after the ancient geographic region of Colchis, which covered a large area along the Black Sea coast. It is mainly known for highly developed bronze production and artistic craftsmanship.[4] There are many items of copper and bronze found in ancient graves. Graves found and studied have been located in the Abkhazia region,[5] the Sukhumi mountain complexes,[6] the Racha highlands where brick tiles and graffiti have been found, and the Colchian plains (კოლხეთის დაბლობი [ka]) where collective graves have been found.

 

Abkhazia지역, 특히 Sukhumi지역의 무덤에서 청동기 및 구리제품이 많이 발견되었다 한다.

 

집단무덤은 콜치언 문화의 마지막 단계(기원전 8세기-6세기)에서 발생하였다. 이들 무덤에서는 청동기 제품이 발견되어 콜치언문화의 해외무역 거래를 보여 준다. 이 시기에 무기 및 농기구 생산의 증가가 나타난다. 구리광산의 증거가 Racha, Abkhazia, Svaneti, Adjara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콜치언 평원에서는 왕궁의 유적이 있었다. (아래 내용)

 

Collective graves occurred during the last stages of the Colchian culture (c.8th century to 6th century BCE). In these graves bronze items were found that represented foreign trade occurred with the Colchian culture. At this time an increase in the production of weapons and agricultural tools is seen. Evidence of copper mining has been found in Racha, Abkhazia, Svaneti, and Adjara.[4][6] Ruins of palaces are present in the Colchian Plains.[7]

 

Colchian 문화는 흑해해안에 접하였으므로, 무역거래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무기 및 농기구 생산 증가가 해외 무역을 위한 것이었다는 언급이다. 구리 광산의 증거가 Abkhazia, Svaneti, Adjara, Racha 등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Colchian 문화는 콜치언 도끼, 낫, 짧은 창, 납작한 도끼, 활모양과 원통형의 도끼, 혁대, 팔찌, 지지물, 조각상 들로 특징지어진다. 자주 페인트칠 하고, 콜치스 종교적 관념을 나타내는 조각적 표현 아이템도 가끔 있다. 콜치언은 현대의 서부 조지언 - 특히 Zans/Chans, Megrelians과 Laz people, 또한 조지아 북쪽 Svaneti지역의 Svans의 조상들이다. (아래 내용)

 

Colchian culture is characterized by Colchian axes, sickles, short spears, flat axes, bow-shaped and cylindrical axes, belts, bracelets, bearings, and statuettes. The items are often painted and sometimes even with the sculptural expression expressing the religious ideas of the Colchis. Colchians are the ancestors of the modern day western Georgians, most notably Zans/Chans (ჭანები) - Megrelians and the Laz people, as well as Svans of the northern region of Svaneti in Georgia.

 

(source : Colchian Culture,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Caucasus Colchis)

 

Colchians은 현대의 Laz people, Megrelians, Svaneti지역의 사람들의 조상이라 한다.

 

아래 그림들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장식품들인데, 스키타인의 문화로 보인다.

  • Colchian gold diadem
  • Colchian pendants, riders and horses on wheeled platforms, Georgian National Museum
  • Colchis gold

 

  • Colchic axis. Characteristic Ornaments

 

  • Figurine of the goddess Nike

 

 

아래 유튜브는 Abkhazian의 춤, 특히 Svanetian 스타일이라 한다. 역동적이고 빠른 춤동작은 매우 인상적이다. 스키타인의 후손들의 춤이 아닌가 한다.

 

https://youtu.be/mDIODx6mIJg?si=Qh6qX24FXOQ9L-HP

Georgian folk dance group "Abkhazeti". Abkhazian - Svanetian Stylized dance .

 

 
 

 

 

이상의 Colchian culture와 Colchis의 역사를 살펴 보았는데, 이 지역이 스키타인의 문화를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코카서스 북부의 Koban culture와 긴밀한 관계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북방문화의 특성을 보인다 판단된다.

 

 

 

III. 결 론

 

이상의 긴 글을 정리하며 마무리 하고자 한다. 관산성전투가 코카서스에서 있었다는 결론은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에서 도출될 수 있다.

 

 

 

1) 첫째, 공격 순서의 일치이다.

 

아래 기록에서 보면, 백제의 부여창은 먼저 신라의 진성을 공격했고, 이어서 관산성 전투를 했다. 이어서 신라의 영역으로 더 들어가려 했는데, 백제의 늙은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부여창은 공격을 강행해, 신라땅 안쪽의 구타모라까지 들어 가 보루를 쌓았다 했다. 즉 진성, 관산성, 구타모라의 순으로 내륙으로 들어 갔다.

 

 

"554년 1월 혹은 7월, 백제가 수만의 백제군 본군에 가야군[17], 왜군 지원군까지 동원해 신라에게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바로 관산성 전투였다. 고구려는 관산성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라를 간접 지원하기 위해 약간의 군대를 따로 백제 웅천성 공격으로 보냈다. 여기서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직접 본군을 이끌어 고구려를 격퇴하고(백합야 전투) 신라 전선에도 초기에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며 몇 번의 승리를 거두고 관산성을 압박, 554년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해 불태웠다.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9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진성(珎城)을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군마 8천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관산성 전투가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면 진성 전투는 9월에, 관산성 함락은 12월에 벌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제군을 이끄는 태자 부여창은 신라 영역으로 더 진격해 들어가려 했고 백제의 늙은 대신이 반대했지만 부여창은 공격을 강행해 신라 땅 안쪽의 구타모라(久陀牟羅)라는 곳까지 들어가 보루를 쌓았다."

(자료 : 진흥왕, 나무위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비잔틴과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전쟁에서도 흑해해안의 Petra성에서 시작해, 내륙에 있는 Archaeopolis요새, 그리고 나아가 더 북쪽에 있는 Kutaisi로 들어간 공격경로를 보인다. 페르시아는 이베리아쪽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내륙쪽이 페르시아에 가까운 쪽이 되는 것이다. (상기 지도 참조)

 

즉 이러한 지형의 일치는 이곳이 관산성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2) 두번째는 시기의 일치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관산성 전투가 554년 한번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에 관한 여러 자료는 여러 해에 걸친 공방과 승패가 서로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Lazic 전투에서는 556년 Archaeopolis요새가 비잔틴에 의해 함락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한 역사 - Lazic war : 541-556 - 를 보여 준다. 따라서 평화조약이 승자가 없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시간상 일치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3) 세번째, 필자가 그동안 연구해온 것을 바탕으로 하는 판단, 즉 비잔틴제국은 백제이고,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라는 가정하에 관산성 전투의 역사가 비잔틴제국과 사사니언 페르시아 사이의 Lazic war역사와 매우 일치한다는 점이다.

 

또한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은 백제 성왕이고,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Khosrow I은 신라의 진흥왕이라는 전제가 딱 들어 맞는다.

 

 

4) 네번째, 아마도 결정적인 요인은 일본서기에서 언급된 '구타모라' 지명이다. 이 지명이름은 Colchis지역의 Kutaisi(구타시?)와 매우 근접하다. 필자도 놀라게 되는 결과이다. 필자는 과거 일본서기의 이름을 근거로 대가야가 인도에 있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즉 이사부(이질부례)와 사다함의 이름과 비슷한 것을 인도역사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발음을 한자로 쓰는 이두문자가 아닌가 한다.

 

 

5) 다섯째, 백제는 가야, 왜와 연합한 세력으로 싸웠다 한다. 그런데 Lazic war는 비잔틴제국과 Laz people (Lazica kingdom)과 연합하여 페르시아와 싸웠다.

 

그리고 Colchian culture와 Laz people, Abkhazians이 이들의 후손으로 언급되고, 아마존 여전사와 스키타인의 문화를 보여 준다. (아래 내용 참조)  필자는 가야가 꼬깔모자를 쓴 스키타인의 세력이 아닌가 추정했다. 즉 Lazica kingdom은 스키타인의 세력인 가야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어느 가야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추후 연구과제이다.

 

Abkhazian women, particularly those of older age, are traditionally portrayed as peacemakers, decision makers, and mediators in times of combat and conflict.

(source : Women in Abkhazia,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Caucasus Colchis)

 

 

6) 여섯째, 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고구려와 백제의 백합야 전투(553년)이야기이다. 이는 신라가 은밀히 고구려와 내통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 달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찾아 보니, 백제로 추정되는 비잔틴은 554년 고구려로 추정되는 Goths족과 Dalmatia(발칸반도 서쪽 해안 지역)에서 전투를 했다 한다. 백제의 부여창이 이겼듯이, 고트족이 패배한 것으로 기술된다.

 

 

7) 일곱째, 보물이 있는 성으로 해석되는 진성의 전투내용이다. 삼국유사에서만 기록된 이 전투는 관산성전투 이전의 전투로 기록된다.

 

그런데 필자가 소름끼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성이 흑해 동쪽 해안가에 Petra성이 있다. 실제 이곳에서, 금, 은 등의 세공품이 1907년 유물로 발견되었다. 또한 Colchis지역은 금, 철, 목재, 꿀 등 수출을 하고 있었다 한다. 구리광산 흔적도 발견되었다. 즉 이곳은 해안가에 위치하여 금 등을 수출하는 무역항으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Petra성이 진성으로 확실히 추정되는 것이다.

 

 

8) 필자는 한 때, 관산성이 이태리 북부 어디가 아닌가 생각했다. 비잔틴의 Justinian I(백제 성왕)의 이태리지역 진출과 신라 진흥왕 시기의 롬바르디왕국의 이태리북부 지역 진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료를 자세히 보니, 롬바르디 왕국은 이 Lazic war가 있던 시기에 고구려로 추정되는 고트족과 싸웠다. 이후 570년 넘어간 시기에는 롬바르디왕국이 비잔틴과 싸웠지만 시기상 관산성 전투와 맞지 않는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는 이태리 반도에서 있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이상으로 관산성전투에 관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외에도 관산성전투와 관련된 많은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부여창은 위키피다에서는 Justin이라는 장군으로 나온다. 그러나 Justin II 왕으로 되진 않는다. Justinian I의 다음 황제인 Justin II 비잔틴황제는 계승과정이 석연치 않은 왕이다. Justinian I왕은 살아 생전에 발생한 반역 음모 사건을 용서했다는 이야기가 기술된다. 죽은 후에 계승자를 조카인 Justin II에게 승계한다는 전달도 의심을 받으며, Justin II는 Justinian I이 죽은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궁으로 들어와서 왕위 계승과 전왕의 서거를 동시에 알렸다 한다. 즉 왕위계승을 둘러싼 Dynastic conflict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왕 다음은 위덕왕인데 비잔틴자료에 비해 재위기간이 매우 길다. 위덕왕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비잔틴의 Maurice황제는 훨씬 후에 등극하고 지나친 원정으로 군부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는 성왕의 죽음이 귀족계층의 모반의 결과일 수 있다는 한국사 자료와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한강 관련하여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필자는 북한산주, 한수, 등에 쓰이는 한(漢)의 글자에 매우 큰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방이 세운 漢나라 한자이기 때문이다. 언제 한반도에 중국의 한나라가 진출한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 한양 등에 쓰이는 한자이다. 아마도 과거 나라의 지명이름을 무조건 이식한 결과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필자는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는 프랑스와 이태리에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로마공화국과 카르타고의 Punic war이 유사한 역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사서에서 한수는 황하의 지류중 하나로 거론된다. 동진이 관련된 한수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방의 한나라 글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코카서스지역에 있을 수 없다. 필자는 압록수인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코카서스 주위에서 중국사와 유사한 역사기록을 잘 보지 못했다. 단 청나라 역사는 있을 수도 있다. 즉 한강유역이 어느 곳이냐는 또한 많은 추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를 표하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