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타타르 - 나무위키
2022. 6. 22. 10:28ㆍ역사 자료/타타르
타타르
최근 수정 시각: 2022-06-10 08:07:37
타타르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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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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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 계통 부족의 하나. '타타르'라는 민족명은 고대 튀르크어로 '다른 사람들'을 뜻하며, 본래는 유럽, 러시아 등에서 튀르크-몽골-퉁구스 계통의 중앙아시아 종족을 통칭하는 말로도 쓰였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타타르인이 수니파 이슬람을 믿으며, 튀르크어족-킵차크어파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타타르인이 수니파 이슬람을 믿으며, 튀르크어족-킵차크어파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2. 역사
2.1. 광의의 타타르
엄밀히 말해 서양[2]에서 말하는 "타타르"는 중앙아시아의 몽골계와 튀르크계 유목민족을 모두 통칭하는 말이다. "몽골리아"라는 말이 정착되기 전까지 "타르타리"라고 불렀을 정도다.
서유럽 및 동유럽에서 '타타르'란 단어를 본다면 그냥 몽골계와 튀르크계가 혼합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 전부를 일컫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근대 이전 서유럽 문헌의 '타타르'란 그냥 '중앙아시아 여러 유목민족들'을 통칭하는 말이었지, 엄밀한 의미에서 '타타르 부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터키의 타타르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다가 크림 칸국의 멸망으로 쫓겨난 이들이 망명한 것이다. 이들이 바로 크림 타타르인으로 원래는 크림 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서유럽 및 동유럽에서 '타타르'란 단어를 본다면 그냥 몽골계와 튀르크계가 혼합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 전부를 일컫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근대 이전 서유럽 문헌의 '타타르'란 그냥 '중앙아시아 여러 유목민족들'을 통칭하는 말이었지, 엄밀한 의미에서 '타타르 부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터키의 타타르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다가 크림 칸국의 멸망으로 쫓겨난 이들이 망명한 것이다. 이들이 바로 크림 타타르인으로 원래는 크림 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비슷하게 다른 튀르크계 부족들도 훌레구 칸의 바그다드 원정 때 선봉대로 끌려온 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눌러 앉아 하자라인이 되었다.
몽골 제국의 유럽 진출 이후 킵차크 칸국이 내부적으로 붕괴하면서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노가이 칸국 등의 여러 튀르크화된 유목 국가로 나누어져 서로 반목하다가 결국 하나 둘씩 러시아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유럽, 특히 이들과 본격적으로 역사적 접점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이런 이슬람을 믿는 몽골-튀르크계 유목민들을 모두 뭉뚱그려 '타타르'라 불렀기 때문에 이 단어가 널리 퍼졌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3][4]을 일컬어 소위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대충 흑해에서 현 러시아령 연해주까지 펼쳐진 광활한 스텝 평원 전체를 그냥 뭉뚱그려 '타타르족의 땅'이란 뜻인 타타리아, 영어로는 타타리(Tartaria, Tartary)라고 불렀고, 유럽에서 나온 역사적 지도를 보면 청나라를 두고 중국령 타타리, 만주를 두고 극동 타타리, 크림 칸국이 한창 주름잡았던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은 소(작은) 타타리,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러시아령 타타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16세기~17세기 루스 차르국에서 나온 문서를 보면 불구대천의 원수인 카잔 칸국과 크림 반도의 무슬림 타타르들에게 대항하여 동시대 한창 청나라에게 밀려나 서쪽으로 도망치던 오이라트계 토르구트 부족, 즉 러시아 현지에서는 칼미크인이라고 불리는 불교 타타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 많다.
그리고 청나라는 튀르크나 몽골과 근연 관계에 있는 같은 알타이 제어 계통인 퉁구스인, 즉 만주족이 세웠고, 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인들도 여기 동조해 가담했다.
일반적으로 만주 및 몽골은 불교 타타르, 티무르 제국이나 킵차크 칸국, 오스만 제국 등 튀르크계는 이슬람 타타르로 서로 구분했으며, 만주족 내지 여진족의 근원지 중 하나인 연해주와 사할린의 사이 바다는 타타르 해협으로 불렀다. 심지어 인도의 몽골계 국가로 티무르의 후예들인 무굴 제국(구르카니)의 경우 인도 타타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식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중국 역시 청나라 정부를 놓고 '중국은 현재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묘사했을 정도였다.
사실 근대적 의미에서 언어, 문화, 역사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 등에 기반한 체계적인 인류학적 구분과 이를 뒷받침할만한 국제적 대학 체계와 학계라는 게 생기기 전에 이러한 문화적 교류와 각종 집단간의 상호 이해 과정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 이익과 직결된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니 저렇게 눈으로 딱 보이고 대충 보면 비슷무리해 보이는 생활 습관과 종교적 차이로 민족간 구분을 지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형태는 어떻게 보면 현대에도 어느 정도는 잔재가 남아 있는 편이다.미국에서 다른 나라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약간의 '오해'도 큰 역할을 했다. 바로 공교롭게도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뜻하는 '타르타로스'가 '타타르'와 매우 발음이 비슷했던 것이다.
'타르타로스'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보니, '몽골족'보다는 '타타르'라는 명칭이 더욱 깊이 와닿게 되었고, 그 때문에 중세 시기부터 서유럽에서는 몽골인이나 튀르크인이 "카프카스 산맥 지하의 타르타로스(Tartaros)에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기어나왔다."는 황당한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타르타로스'에서 나왔으니까 '타타르'라는 이름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실제로 튀르크는 훈족 시절부터 유럽을 공격했고, 악몽 같은 기세로 진격하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킵차크 칸국 군대도 튀르크 기병들이 주축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말이 필요없는 "유럽의 악몽" 이었으므로 이런 전설이 통했다. 그리고 서방의 튀르크인은 서돌궐에서 유래했는데 그 서돌궐이 차지한 영역이 바로 캅카스와 카스피 해, 우즈베키스탄 부근이었다.
이런 유럽인의 민간 전설에서 타타르에 대한 인식은 딱 모르도르에서 몰려나오는 오크 내지는 우르크하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나오는 '때거지, 군중, 군락' 등을 의미하는 '호드'의 러시아 단어인 'Орда'(오르다)란 단어를 아무런 접두사 없이 쓰면 역사 속의 그 킵차크 칸국을 의미할 정도로 이때의 충격이 깊게 각인되었다. 애당초 '호드'(Horde)라는 단어 자체가 영어에서 보통 킵차크 칸국을 의미하는 Golden Horde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 만큼 '몽골-타타르의 멍에'의 시기가 러시아에 깊은 상흔을 남겼기에, 이후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온전히 살아 남아 끊임없이 수많은 슬라브인들을 억압, 수탈하고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칭기즈 칸과 주치의 후예들인 카자흐, 키르기즈, 우즈벡, 그리고 더 나아가 티무르 제국 및 오스만 제국 의 각종 튀르크계 부족들을 적대하면서도[5][6] 내부적으로 복속된 타타르족 앞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하얀 대칸 (белый хан)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웠다.
물론 유일하게 살아남은 킵차크계 국가인 크림 칸국은 같은 튀르크계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알아서 복속되어 영주국이 되었다. 이후 카잔이나 아스트라한 등 다른 타타르와 이 크림 타타르는 여러모로 달라져서 카잔, 아스트라한, 시베리아 타타르는 러시아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크림 칸국은 튀르크인의 몽골적인 유목민 전통을 잘 보존하게 되었다.
몽골 제국의 유럽 진출 이후 킵차크 칸국이 내부적으로 붕괴하면서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노가이 칸국 등의 여러 튀르크화된 유목 국가로 나누어져 서로 반목하다가 결국 하나 둘씩 러시아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유럽, 특히 이들과 본격적으로 역사적 접점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이런 이슬람을 믿는 몽골-튀르크계 유목민들을 모두 뭉뚱그려 '타타르'라 불렀기 때문에 이 단어가 널리 퍼졌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3][4]을 일컬어 소위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대충 흑해에서 현 러시아령 연해주까지 펼쳐진 광활한 스텝 평원 전체를 그냥 뭉뚱그려 '타타르족의 땅'이란 뜻인 타타리아, 영어로는 타타리(Tartaria, Tartary)라고 불렀고, 유럽에서 나온 역사적 지도를 보면 청나라를 두고 중국령 타타리, 만주를 두고 극동 타타리, 크림 칸국이 한창 주름잡았던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은 소(작은) 타타리,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러시아령 타타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16세기~17세기 루스 차르국에서 나온 문서를 보면 불구대천의 원수인 카잔 칸국과 크림 반도의 무슬림 타타르들에게 대항하여 동시대 한창 청나라에게 밀려나 서쪽으로 도망치던 오이라트계 토르구트 부족, 즉 러시아 현지에서는 칼미크인이라고 불리는 불교 타타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 많다.
그리고 청나라는 튀르크나 몽골과 근연 관계에 있는 같은 알타이 제어 계통인 퉁구스인, 즉 만주족이 세웠고, 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인들도 여기 동조해 가담했다.
일반적으로 만주 및 몽골은 불교 타타르, 티무르 제국이나 킵차크 칸국, 오스만 제국 등 튀르크계는 이슬람 타타르로 서로 구분했으며, 만주족 내지 여진족의 근원지 중 하나인 연해주와 사할린의 사이 바다는 타타르 해협으로 불렀다. 심지어 인도의 몽골계 국가로 티무르의 후예들인 무굴 제국(구르카니)의 경우 인도 타타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식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중국 역시 청나라 정부를 놓고 '중국은 현재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묘사했을 정도였다.
사실 근대적 의미에서 언어, 문화, 역사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 등에 기반한 체계적인 인류학적 구분과 이를 뒷받침할만한 국제적 대학 체계와 학계라는 게 생기기 전에 이러한 문화적 교류와 각종 집단간의 상호 이해 과정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 이익과 직결된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니 저렇게 눈으로 딱 보이고 대충 보면 비슷무리해 보이는 생활 습관과 종교적 차이로 민족간 구분을 지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형태는 어떻게 보면 현대에도 어느 정도는 잔재가 남아 있는 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약간의 '오해'도 큰 역할을 했다. 바로 공교롭게도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뜻하는 '타르타로스'가 '타타르'와 매우 발음이 비슷했던 것이다.
'타르타로스'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보니, '몽골족'보다는 '타타르'라는 명칭이 더욱 깊이 와닿게 되었고, 그 때문에 중세 시기부터 서유럽에서는 몽골인이나 튀르크인이 "카프카스 산맥 지하의 타르타로스(Tartaros)에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기어나왔다."는 황당한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타르타로스'에서 나왔으니까 '타타르'라는 이름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실제로 튀르크는 훈족 시절부터 유럽을 공격했고, 악몽 같은 기세로 진격하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킵차크 칸국 군대도 튀르크 기병들이 주축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말이 필요없는 "유럽의 악몽" 이었으므로 이런 전설이 통했다. 그리고 서방의 튀르크인은 서돌궐에서 유래했는데 그 서돌궐이 차지한 영역이 바로 캅카스와 카스피 해, 우즈베키스탄 부근이었다.
이런 유럽인의 민간 전설에서 타타르에 대한 인식은 딱 모르도르에서 몰려나오는 오크 내지는 우르크하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나오는 '때거지, 군중, 군락' 등을 의미하는 '호드'의 러시아 단어인 'Орда'(오르다)란 단어를 아무런 접두사 없이 쓰면 역사 속의 그 킵차크 칸국을 의미할 정도로 이때의 충격이 깊게 각인되었다. 애당초 '호드'(Horde)라는 단어 자체가 영어에서 보통 킵차크 칸국을 의미하는 Golden Horde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 만큼 '몽골-타타르의 멍에'의 시기가 러시아에 깊은 상흔을 남겼기에, 이후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온전히 살아 남아 끊임없이 수많은 슬라브인들을 억압, 수탈하고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칭기즈 칸과 주치의 후예들인 카자흐, 키르기즈, 우즈벡, 그리고 더 나아가 티무르 제국 및 오스만 제국 의 각종 튀르크계 부족들을 적대하면서도[5][6] 내부적으로 복속된 타타르족 앞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하얀 대칸 (белый хан)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웠다.
물론 유일하게 살아남은 킵차크계 국가인 크림 칸국은 같은 튀르크계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알아서 복속되어 영주국이 되었다. 이후 카잔이나 아스트라한 등 다른 타타르와 이 크림 타타르는 여러모로 달라져서 카잔, 아스트라한, 시베리아 타타르는 러시아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크림 칸국은 튀르크인의 몽골적인 유목민 전통을 잘 보존하게 되었다.
2.2. 협의의 타타르(몽골계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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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 부족은 괵튀르크(돌궐) 제국 시기부터 명칭이 확인되는 실위계 부족으로, 카마그 몽골 등과 함께 몽골 고원에 자리잡고 사는 여러 부족들 가운데 하나였다.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실위계 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몽골 초원으로 이주한 세대인 타타르는 점차 부족 연맹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키르기즈인들이 '9성 타타르의 나라'(Toquz Tatar Eli)라고 부른 것과 송나라의 사신 왕연덕(王延德)이 '9성 달단'(九性 韃靼)이라 부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초원으로 이주한 타타르는 튀르크계 돌궐 및 위구르(회흘 또는 회골) 제국과 충돌하거나 이들에게 복속되어 살았으며, 야율아보기에 의해 거란족의 요나라가 성립한 이후부터는 요나라의 속부가 되었다.
요나라에서는 몽골 초원의 실위, 튀르크계 유목 부족들을 모두 조복(阻卜)으로 불렀기에 타타르도 이 시기에는 조복의 한 일파로 간주되었고, 북송에서는 타타르를 달단이라 칭하거나 백달단(白韃靼)'이라 부르는 옹구트 부족과 구분지어 흑달단(黑韃靼)으로 불렀다.
타타르는 옹구트, 옹기라트 부족과 마찬가지로 영토 안에 비단길의 하나인 초원길이 지나고 있어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으며[7], 지리적으로 선진국인 북송, 요, 서하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다른 몽골계 부족들보다 기술력이나 문화 수준이 높았다.
정치적으로 타타르는 요나라 조정에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으며 요나라의 황제를 위해 군대를 제공했다. 반대로 요나라는 그 대가로 절도사나 상온, 대왕, 태사와 같은 높은 관직을 수여하고, 조공 무역을 개시해 타타르와 경제적 이익을 서로 주고 받았다.
요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일부 타타르인들은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긴 여정에 참여했으며, 나머지는 그대로 고향에 남았다. 아무래도 영토가 금나라와 가깝다보니 타타르는 곧바로 금나라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요나라에서 하사한 관인을 바쳤다. 그 대가로 금나라는 타타르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그들을 매개로 몽골 초원의 제부족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타타르는 카마그 몽골 최초의 칸이자 칭기즈 칸의 증조부인 카불 칸 때부터 카마그 몽골 연맹과 대립했다.[8] 카불 칸의 6촌 동생이자 후계자인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와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타타르에 보내 결혼 동맹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금나라 황제가 내려주는 은상에 눈이 먼 타타르는 오히려 딸을 직접 데리고 오는 암바가이 칸을 배신하고 그를 금나라의 폭군 해릉양왕에게 팔아 넘겼다. 이 때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10]에 끌려간 암바가이 칸은 사지가 찢겨 문자 그대로 끔살당했다.[11]
이러한 배신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깊은 원한, 타타르가 금나라의 명령을 받고 수행해 준 감정(減丁) 정책은[12] 카마그 몽골을 비롯한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들이 타타르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카마그 몽골 연맹은 이 원한을 갚기 위해 타타르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여기에 타타르가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장인 예수게이 바아투르를 비겁하게 독살한 것까지 더해져 타타르는 카마그 몽골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13] 예수게이의 후계자인 테무진은 타타르에 복수하고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천천히 세력을 모았다.
예수게이를 죽여 카마그 몽골 연맹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킨 타타르는 초원의 패권을 차지하는 듯 했으나 후원 세력인 금과의 관계가 파탄나는 바람에 금나라의 지원이 끊기고, 생존을 위해 금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1194년 겨울,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크게 패퇴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챈 테무진 칸은 타타르를 급습해 1200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카마그 몽골의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의 하나인 타타르족과 격전을 벌여 마침내 전멸시킴으로써 초원 전역에 강력한 위용을 떨치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남자들은 학살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완전히 흡수해서 카마그 몽골 안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테무진 칸은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1202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를 넘어 올코이 강의 지류인 실루겔지트 강 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알치 타타르와 차강 타타르를 공격했다(실루겔지트 전투). 이미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대부분의 주력 병력을 잃고 지리멸렬 상태에 있었던 타타르족은 이 전투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나 인터넷 등에서는 이들 타타르족이 바투의 서방원정 등에 동원되었고 이들이 러시아 등 구소련의 타타르족이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이런 주장은 '광의의 타타르'와 '협의의 타타르'를 구별하지 못해 발생한 해프닝일 뿐이다. 앞에서도 나와 있듯이 타타르란 몽골 침입 이전부터 튀르크계 민족들의 멸칭이었다.
협의의 타타르족은 칭기즈칸에 의해서 수레바퀴보다 키 큰 남자는 모두 절멸당하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았으며 살아있는 남자들조차 몽골에 흡수당해서 사라졌다. 단, 이 와중에 말살 계획이 새는 바람에 타타르족의 발악으로 몽골인들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14]
한편, 타타르족 출신 중에서 시기 쿠두쿠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에 호엘룬 에케의 양자로 키워져서 훗날 몽골 제국의 요직을 맡았고, 타타르 예수이, 타타르 예수게 자매는 칭기즈 칸의 카툰이 되었다.
요나라에서는 몽골 초원의 실위, 튀르크계 유목 부족들을 모두 조복(阻卜)으로 불렀기에 타타르도 이 시기에는 조복의 한 일파로 간주되었고, 북송에서는 타타르를 달단이라 칭하거나 백달단(白韃靼)'이라 부르는 옹구트 부족과 구분지어 흑달단(黑韃靼)으로 불렀다.
타타르는 옹구트, 옹기라트 부족과 마찬가지로 영토 안에 비단길의 하나인 초원길이 지나고 있어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으며[7], 지리적으로 선진국인 북송, 요, 서하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다른 몽골계 부족들보다 기술력이나 문화 수준이 높았다.
정치적으로 타타르는 요나라 조정에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으며 요나라의 황제를 위해 군대를 제공했다. 반대로 요나라는 그 대가로 절도사나 상온, 대왕, 태사와 같은 높은 관직을 수여하고, 조공 무역을 개시해 타타르와 경제적 이익을 서로 주고 받았다.
요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일부 타타르인들은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긴 여정에 참여했으며, 나머지는 그대로 고향에 남았다. 아무래도 영토가 금나라와 가깝다보니 타타르는 곧바로 금나라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요나라에서 하사한 관인을 바쳤다. 그 대가로 금나라는 타타르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그들을 매개로 몽골 초원의 제부족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타타르는 카마그 몽골 최초의 칸이자 칭기즈 칸의 증조부인 카불 칸 때부터 카마그 몽골 연맹과 대립했다.[8] 카불 칸의 6촌 동생이자 후계자인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와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타타르에 보내 결혼 동맹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금나라 황제가 내려주는 은상에 눈이 먼 타타르는 오히려 딸을 직접 데리고 오는 암바가이 칸을 배신하고 그를 금나라의 폭군 해릉양왕에게 팔아 넘겼다. 이 때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10]에 끌려간 암바가이 칸은 사지가 찢겨 문자 그대로 끔살당했다.[11]
이러한 배신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깊은 원한, 타타르가 금나라의 명령을 받고 수행해 준 감정(減丁) 정책은[12] 카마그 몽골을 비롯한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들이 타타르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카마그 몽골 연맹은 이 원한을 갚기 위해 타타르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여기에 타타르가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장인 예수게이 바아투르를 비겁하게 독살한 것까지 더해져 타타르는 카마그 몽골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13] 예수게이의 후계자인 테무진은 타타르에 복수하고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천천히 세력을 모았다.
예수게이를 죽여 카마그 몽골 연맹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킨 타타르는 초원의 패권을 차지하는 듯 했으나 후원 세력인 금과의 관계가 파탄나는 바람에 금나라의 지원이 끊기고, 생존을 위해 금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1194년 겨울,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크게 패퇴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챈 테무진 칸은 타타르를 급습해 1200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카마그 몽골의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의 하나인 타타르족과 격전을 벌여 마침내 전멸시킴으로써 초원 전역에 강력한 위용을 떨치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남자들은 학살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완전히 흡수해서 카마그 몽골 안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테무진 칸은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1202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를 넘어 올코이 강의 지류인 실루겔지트 강 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알치 타타르와 차강 타타르를 공격했다(실루겔지트 전투). 이미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대부분의 주력 병력을 잃고 지리멸렬 상태에 있었던 타타르족은 이 전투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나 인터넷 등에서는 이들 타타르족이 바투의 서방원정 등에 동원되었고 이들이 러시아 등 구소련의 타타르족이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이런 주장은 '광의의 타타르'와 '협의의 타타르'를 구별하지 못해 발생한 해프닝일 뿐이다. 앞에서도 나와 있듯이 타타르란 몽골 침입 이전부터 튀르크계 민족들의 멸칭이었다.
협의의 타타르족은 칭기즈칸에 의해서 수레바퀴보다 키 큰 남자는 모두 절멸당하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았으며 살아있는 남자들조차 몽골에 흡수당해서 사라졌다. 단, 이 와중에 말살 계획이 새는 바람에 타타르족의 발악으로 몽골인들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14]
한편, 타타르족 출신 중에서 시기 쿠두쿠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에 호엘룬 에케의 양자로 키워져서 훗날 몽골 제국의 요직을 맡았고, 타타르 예수이, 타타르 예수게 자매는 칭기즈 칸의 카툰이 되었다.
2.3. 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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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를 내몽골 초원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되찾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에서는 바로 이 내몽골에서 북원이 멸망해 차하르부, 오르도스부, 투메드부 등의 몽골 6부족 연맹으로 분리되자 몽골 부족들을 원래 호칭인 "몽고"(蒙古) 대신에 "달단"(韃靼) 혹은 "달달"(達達)이라고 불렀다. 물론 몽골인도 '달단의 자식'이라는 의미로 "달자"(達子)라고 불렀다.
참고로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 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카마그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다. 결국 칭기즈 칸에 의해 멸족당하고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몽골인과 몽골을 도와 이들에 흡수, 동화된 또 다른 몽골계 민족인 거란족들이 몽골 제국이 북중국을 정복할 때, 참모 및 관료 등의 지식계층을 담당하게 되자 야만인이란 의미의 '타타르'란 말도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고, 한족에 의해 명나라가 성립된 후, 몽골을 경멸적인 용어로 '타타르'로 호칭하기 시작했으며 아예 북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 즉 여진족도 명나라에서는 당연히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오랑캐'란 말은 원래 몽골계 우량카이족에서 유래한 북방 이민족에 대한 한국어 멸칭으로 사실상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타타르'란 용어도 역시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그 외 다른 퉁구스 제족들과 다우르족(몽골계 제족)도 포함시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명나라에 의해 '달자'라는 비하를 받은 여진족들이 세우고, 내몽골의 몽골계 부족들이 합류해 건국한 유목민 정복왕조 청나라에서는 '달단'이라는 명칭을 폐기했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애초 한족 왕조 때 자신들을 비하하던 명칭을 청왕조가 굳이 그대로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달자'라는 용어는 만주와 외만주 즉 연해주로 진출해오던 러시아의 카자크 족을 청나라에서 '코가 큰 오랑캐'라는 뜻의 "대비달자"(大鼻㺚子)라고 부른 것이 조선에까지 전해져 조선에서도 '대비달자'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다.
참고로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 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카마그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다. 결국 칭기즈 칸에 의해 멸족당하고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몽골인과 몽골을 도와 이들에 흡수, 동화된 또 다른 몽골계 민족인 거란족들이 몽골 제국이 북중국을 정복할 때, 참모 및 관료 등의 지식계층을 담당하게 되자 야만인이란 의미의 '타타르'란 말도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고, 한족에 의해 명나라가 성립된 후, 몽골을 경멸적인 용어로 '타타르'로 호칭하기 시작했으며 아예 북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 즉 여진족도 명나라에서는 당연히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오랑캐'란 말은 원래 몽골계 우량카이족에서 유래한 북방 이민족에 대한 한국어 멸칭으로 사실상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타타르'란 용어도 역시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그 외 다른 퉁구스 제족들과 다우르족(몽골계 제족)도 포함시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명나라에 의해 '달자'라는 비하를 받은 여진족들이 세우고, 내몽골의 몽골계 부족들이 합류해 건국한 유목민 정복왕조 청나라에서는 '달단'이라는 명칭을 폐기했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애초 한족 왕조 때 자신들을 비하하던 명칭을 청왕조가 굳이 그대로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달자'라는 용어는 만주와 외만주 즉 연해주로 진출해오던 러시아의 카자크 족을 청나라에서 '코가 큰 오랑캐'라는 뜻의 "대비달자"(大鼻㺚子)라고 부른 것이 조선에까지 전해져 조선에서도 '대비달자'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다.
3. 현황
3.1.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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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 영내 타타르인의 거주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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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시절 영내 각지의 타타르인들의 복식과 외양을 묘사한 그림. 사진 왼쪽부터 시베리아 타타르, 크림 타타르, 볼가 타타르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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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타타르인은 민족지학적인 관점에서 '볼가 타타르인'(러시아어: Поволжские татары, 타타르어: Идел буе татарлары)으로도 더 잘 알려진 '볼가-우랄 타타르인'(Волго-уральские татары, Идел-Урал татарлары), '아스트라한 타타르인'(Астраханские татары, Әстерхан татарлары), '시베리아 타타르인'(Сибирские татары, Себер татарлары)의 세 집단으로 나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볼가 타타르인(특히 카잔 타타르인)과 아스트라한 타타르인 간에는 유의미한 차이점이 거의 없고, 시베리아 타타르인 역시 공교육상에서 러시아어와 볼가 타타르어를 학습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경계가 옅어지고 있다. 통상적으로 러시아어권에서 '타타르인'(Татары)이라고 하면, 이들 세 집단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타타르인은 2010년 기준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 영내에 540만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최대의 소수민족으로 간주된다.
3.1.1. 볼가 타타르
오늘날 러시아의 카잔, 타타르스탄,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타타르인은 '볼가-우랄 타타르인' 혹은 '볼가 타타르인'으로 불린다. 이들은 불가르 칸국의 주민족이었던 볼가 불가르인의 후손에 가깝다. 다만 1,000년 넘게 러시아인들과 계속 혼혈되어 사실상 러시아인에 가까운 외형을 보인다.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16%만 동아시아에서 유래하고, 84%는 슬라브계와 중동계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모계 유전으로만 따지면 러시아인에 더 가깝다.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그냥 러시아인으로 보일 정도인데 사실 러시아인들도 억양으로 타타르인들을 겨우 구분한다. 또다른 구분 기준은 바로 이름과 성씨이다. 이름이 그리스어·슬라브어 어원과 거리가 먼 이브라김(Ибраги́м, 타타르어로 Ибраһим / İbrahim), 일다르(Ильда́р, Илдар / İldar), 라빌(Рави́ль, Равил / Rawil), 루스탐(Руста́м, Рөстәм / Röstäm)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물론 가풍에 따라서는 타타르인 혈통에 구애받지 않거나 혼혈로 인해 러시아어 이름을 쓰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대다수의 타타르인이 러시아인과 구분되는 전통적인 성씨 자체는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즈마일로프(Изма́йлов, Исмәгыйль / İsmäğil이 어원), 카람진(Карамзи́н, Кара морза / Qara morza가 어원), 나리시킨(Нары́шкин, Нарышко / Narışko가 어원으로 추정됨), 툭타미셰바(Туктамы́шева, Туктамыш / Tuqtamış가 어원), 투르게네프(Турге́нев, 몽골어 Түргэн / Türgen이 어원), 유수포프(Юсу́пов, Йосыф / Yosıf가 어원)와 같이 무슬림식이거나 몽골어·튀르크어 계통의 어휘가 쓰인 성씨를 지녔다면 역사적으로 타타르인 가계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어말이 -티노프(-тди́нов)거나 -울린(-у́лин 또는 -у́ллин) 형태인 성씨 역시 타타르어 이름을 러시아어 성씨 형태로 바꾼 것이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타타르계가 많다. 사실 러시아 일대는 슬라브계가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 비교적 근대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가문명이나 지명 중에는 다양한 소수민족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편이다.
아버지가 타타르인으로 알려진 유명 패션 모델 이리나 샤크의 원래 성씨는 셰이흘리슬라모바로 "이슬람 원로 학자"라는 뜻의 아랍어/오스만어 단어 '샤이쿨 이슬람'(شيخ الإسلام)에 러시아 여성 성 접미사 -ova(ова)가 붙은 형태이다.[15] 과거 튀르크-타타르 무슬림 문화권에서 '셰이흘이슬람'(셰이쿨 이슬람)은 대법관을 지칭하는 어휘이기도 했다. 출처. 타타르인들이 이웃한 러시아인들을 모방하며 러시아식 성씨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상 중 유명한 사람 이름이나 직함에서 따와 성씨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볼가 타타르인은 대부분 무슬림이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며 문화나 생활 양식은 러시아인과 거의 흡사하다. '크랴셴'이라고 불리는 기독교로 개종한 볼가 불가르족 후손들이나 카자크들과도 오랫동안 협력하는 관계였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타타르인에게 많은 특혜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타타르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과 거래하면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스테판 라진의 반란과 예멜리안 푸가초프의 반란 당시, 타타르를 포함한 볼가-우랄 일대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봉기에 합류했다. 이 때문에 결국 러시아 제국 정부는 1784년 타타르인 귀족이었던 '모르자'(Морза / Morza)[16]들에게 러시아 귀족에 상응하는 권리를 보장하고, 1788년 오렌부르크에 오렌부르크 이슬람 종무원(Оренбургское магометанское духовное собрание)을 설립하여 볼가-우랄 일대와 중앙아시앙 무슬림 소수민족 관리의 상당 부분을 이들에게 일임했다.
19세기 초부터 카잔 대학은 러시아 문화를 타타르인과 카자흐인에게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교육정책을 크게 강화했다. 당대의 러시아인 튀르크 학자이자 정교회 선교사였던 니콜라이 일민스키(Николай Ильминский, 1822년 4월 23일 ~ 1891년 12월 27일)는 학교를 추가로 설립하고, 타타르인 교사들을 채용하여 타타르어로 러시아식이나 유럽식 교육을 하게 했다. 서구식 교육의 확대는 볼가 지역의 대다수의 타타르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타타르인들의 서구화 교육과 근대화 운동은 자디드주의(Джадидизм, Җәдитчелек / Cäditçelek) 운동이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자디드주의 운동 교육가이자 타타르 민족주의자로는 카윰 나스이리(Каюм Насыйри / Qayum Nasıyri, 1825년 2월 2일 ~ 1902년 8월 20일)가 있다. 농촌 종교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잔과 부하라의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즈베크어를 공부했다. 러시아어는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한동안 러시아 신학교에 비교종교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1871년 신학교를 떠나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교육관에 입각하여 이슬람 과목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산수, 지리, 역사, 음악, 미술 등도 가르쳤다. 이 외에도 타타르어로 된 러시아어 학습 교재와 타타르어-러시아어 사전을 저술하고 볼가 타타르인들의 구전 문학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등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카잔 대학에서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러시아 문화에 상당수준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크와 무슬림 문화유산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많은 볼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영토 각지에서 자디드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 영토 밖 동튀르키스탄으로도 건너가 교육 봉사를 하며 그곳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위구르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기도 했다.
타타르스탄과 인접한 바시코르토스탄에도 많은 볼가 타타르인이 러시아인, 바시키르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 바시키르인들도 볼가 타타르인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인과 혼혈화한 튀르크계 무슬림 민족이다. 한티-만시 자치구와 카자흐스탄에도 상당히 많은 타타르인이 살고 있다. 카자흐인은 원래 이슬람 수피즘과 텡그리 신앙을 동시에 믿는 이중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예배법이나 이슬람 신학에는 거의 무지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식민화 이후 타타르인들이 카자흐스탄에 들어오면서 예배법을 익히고 이슬람 신학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은 다른 나라였지만 러시아 제국 시기를 거치며 카잔 타타르인과 아스트라한 타타르인은 서로 차이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동화되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그냥 러시아인으로 보일 정도인데 사실 러시아인들도 억양으로 타타르인들을 겨우 구분한다. 또다른 구분 기준은 바로 이름과 성씨이다. 이름이 그리스어·슬라브어 어원과 거리가 먼 이브라김(Ибраги́м, 타타르어로 Ибраһим / İbrahim), 일다르(Ильда́р, Илдар / İldar), 라빌(Рави́ль, Равил / Rawil), 루스탐(Руста́м, Рөстәм / Röstäm)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물론 가풍에 따라서는 타타르인 혈통에 구애받지 않거나 혼혈로 인해 러시아어 이름을 쓰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대다수의 타타르인이 러시아인과 구분되는 전통적인 성씨 자체는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즈마일로프(Изма́йлов, Исмәгыйль / İsmäğil이 어원), 카람진(Карамзи́н, Кара морза / Qara morza가 어원), 나리시킨(Нары́шкин, Нарышко / Narışko가 어원으로 추정됨), 툭타미셰바(Туктамы́шева, Туктамыш / Tuqtamış가 어원), 투르게네프(Турге́нев, 몽골어 Түргэн / Türgen이 어원), 유수포프(Юсу́пов, Йосыф / Yosıf가 어원)와 같이 무슬림식이거나 몽골어·튀르크어 계통의 어휘가 쓰인 성씨를 지녔다면 역사적으로 타타르인 가계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어말이 -티노프(-тди́нов)거나 -울린(-у́лин 또는 -у́ллин) 형태인 성씨 역시 타타르어 이름을 러시아어 성씨 형태로 바꾼 것이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타타르계가 많다. 사실 러시아 일대는 슬라브계가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 비교적 근대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가문명이나 지명 중에는 다양한 소수민족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편이다.
아버지가 타타르인으로 알려진 유명 패션 모델 이리나 샤크의 원래 성씨는 셰이흘리슬라모바로 "이슬람 원로 학자"라는 뜻의 아랍어/오스만어 단어 '샤이쿨 이슬람'(شيخ الإسلام)에 러시아 여성 성 접미사 -ova(ова)가 붙은 형태이다.[15] 과거 튀르크-타타르 무슬림 문화권에서 '셰이흘이슬람'(셰이쿨 이슬람)은 대법관을 지칭하는 어휘이기도 했다. 출처. 타타르인들이 이웃한 러시아인들을 모방하며 러시아식 성씨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상 중 유명한 사람 이름이나 직함에서 따와 성씨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볼가 타타르인은 대부분 무슬림이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며 문화나 생활 양식은 러시아인과 거의 흡사하다. '크랴셴'이라고 불리는 기독교로 개종한 볼가 불가르족 후손들이나 카자크들과도 오랫동안 협력하는 관계였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타타르인에게 많은 특혜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타타르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과 거래하면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스테판 라진의 반란과 예멜리안 푸가초프의 반란 당시, 타타르를 포함한 볼가-우랄 일대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봉기에 합류했다. 이 때문에 결국 러시아 제국 정부는 1784년 타타르인 귀족이었던 '모르자'(Морза / Morza)[16]들에게 러시아 귀족에 상응하는 권리를 보장하고, 1788년 오렌부르크에 오렌부르크 이슬람 종무원(Оренбургское магометанское духовное собрание)을 설립하여 볼가-우랄 일대와 중앙아시앙 무슬림 소수민족 관리의 상당 부분을 이들에게 일임했다.
19세기 초부터 카잔 대학은 러시아 문화를 타타르인과 카자흐인에게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교육정책을 크게 강화했다. 당대의 러시아인 튀르크 학자이자 정교회 선교사였던 니콜라이 일민스키(Николай Ильминский, 1822년 4월 23일 ~ 1891년 12월 27일)는 학교를 추가로 설립하고, 타타르인 교사들을 채용하여 타타르어로 러시아식이나 유럽식 교육을 하게 했다. 서구식 교육의 확대는 볼가 지역의 대다수의 타타르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타타르인들의 서구화 교육과 근대화 운동은 자디드주의(Джадидизм, Җәдитчелек / Cäditçelek) 운동이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자디드주의 운동 교육가이자 타타르 민족주의자로는 카윰 나스이리(Каюм Насыйри / Qayum Nasıyri, 1825년 2월 2일 ~ 1902년 8월 20일)가 있다. 농촌 종교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잔과 부하라의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즈베크어를 공부했다. 러시아어는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한동안 러시아 신학교에 비교종교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1871년 신학교를 떠나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교육관에 입각하여 이슬람 과목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산수, 지리, 역사, 음악, 미술 등도 가르쳤다. 이 외에도 타타르어로 된 러시아어 학습 교재와 타타르어-러시아어 사전을 저술하고 볼가 타타르인들의 구전 문학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등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카잔 대학에서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러시아 문화에 상당수준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크와 무슬림 문화유산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많은 볼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영토 각지에서 자디드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 영토 밖 동튀르키스탄으로도 건너가 교육 봉사를 하며 그곳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위구르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기도 했다.
타타르스탄과 인접한 바시코르토스탄에도 많은 볼가 타타르인이 러시아인, 바시키르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 바시키르인들도 볼가 타타르인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인과 혼혈화한 튀르크계 무슬림 민족이다. 한티-만시 자치구와 카자흐스탄에도 상당히 많은 타타르인이 살고 있다. 카자흐인은 원래 이슬람 수피즘과 텡그리 신앙을 동시에 믿는 이중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예배법이나 이슬람 신학에는 거의 무지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식민화 이후 타타르인들이 카자흐스탄에 들어오면서 예배법을 익히고 이슬람 신학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은 다른 나라였지만 러시아 제국 시기를 거치며 카잔 타타르인과 아스트라한 타타르인은 서로 차이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동화되었다.
3.1.2. 시베리아 타타르
문자 그대로 시베리아에 사는 타타르인들로 이들이 세웠던 나라가 시비르 칸국이다. '시베리아'의 어원은 시비르 칸국에서 왔으며, 튜멘 주는 이름부터가 원시 튀르크어인 '튀멘'[17]에서 왔다.
시베리아 타타르인은 과거 시비르 칸국의 중심지였던 튜멘 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첼랴빈스크 주에서도 원주민이었고 지금도 소수가 잔존해 있다.
그래도 첼랴빈스크처럼 우랄 산맥 근처에서는 시베리아 타타르족을 중심으로 몽골 형질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사실 어쩌다가 간혹 등장하는 정도라고 보는 게 맞다.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타타르족은 50만명 가까이 되지만, 이들 대부분은 타타르어를 쓰는 볼가 타타르인이며, 시베리아 타타르어[18]를 사용하는 시비르 칸국의 후예 '시베리아 타타르족'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날에는 7천여명 이하에서 20만명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3.1.3. 크랴셴
크랴셴인(Кряшены, Керәшеннәр) 혹은 '세례 받은 타타르인'(Крещёные татары, Керәшен татарлары)은 기독교(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타타르인이다. '크랴셴'이라는 민족명은 '세례 받은'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 '크레숀'(Крещён)에서 유래했다. 볼가 타타르인과 종교만 다르고 분포 지역과 언어는 대동소이하다. 러시아어 러시아 내 34,000여 명, 카자흐스탄 내 20,000여 명이 거주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타타르인의 후손으로 간주된다. 다만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예브게니 바르카르 교수에 의하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타타르인들은 대부분 유수포프, 투르게네프 가문의 경우처럼 러시아인으로 바로 흡수되었고, 크랴셴인의 직계 조상은 원래부터 기독교인이었거나 텡그리 신앙을 믿는 부족들이 정교회로 개종한 것이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상당수가 티무르 제국에 의해 중앙아시아에서 쫓겨날 때 일부가 볼가강 유역으로 피난 가 크랴셴인의 직계 조상에 흡수되었다는 가설도 있다.[19] 극단적인 경우로 이들을 몽골 제국 시대 이전 기독교로 개종한 튀르크계 케레이트족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일부 타타르인 마을 전체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을 내 과거 무슬림 조상들이 묻힌 무덤과 모스크 터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3.1.4. 나가이바크
이 외에도 기독교를 믿는 타타르계 민족으로는 나가이바크인(Нагайбаки, Нагайбәкләр)이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타타르인이나 노가이인들이 첼랴빈스크 지역에 배치된 카자크 부대에 소속되면서 카자크 문화를 받아들이고,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내 다른 민족들과 통혼하면서 러시아화 된 케이스이다. 첼랴빈스크에 주둔한 나가이바크 코사크 군대는 종종 바시키르인, 추바시인 등 근방의 소수민족들이 봉기할 때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해당 지역이 러시아화한 이후에는 카자흐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타타르어의 방언 연속체에 해당하는 나가이바크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소련 및 그 후신인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이들을 그냥 크랴셴으로(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는 볼가 타타르로) 분류할 때도 많았으나, 이들이 카자크 부대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행정 편의상 타타르인과 별개의 민족으로 분류하는 편이었다. 1920~30년대까지 별개의 민족으로 분류되던 이들도 소련에서 카자크의 입지가 격하되면서 나가이바크인도 한동안 독자적인 소수민족 지위를 상실하고, 믿는 종교에 따라 볼가 타타르인이나 크랴셴으로 분류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나가이바크인들이 자신들은 언어만 타타르어에 가깝고 문화적으로는 카자크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자 다시 독자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나가이바크인 인구 규모는 1989년 기준 11,200여 명, 2010년 기준 8,000여 명이다. “페르샴페누아즈”라는 인구 4,000여 명 규모의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나가이바크어와 문화가 보존되고 있다. 특이하게도 기독교를 믿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노루즈[20]를 기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2. 크림 반도
자세한 내용은 크림 타타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참고하십시오.
3.3. 리투아니아 & 벨라루스 &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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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중앙아시아 5개국
중앙아시아 5개국(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도 타타르족이 사는데, 이들은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이슬람교가 주류인 튀르크 문화권[21]과 교역을 해왔으며, 19세기 후반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모더니즘 운동을 이끄는데 기여했다.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인들은 원래 명목상으로는 무슬림이었지만 19세기까지 텡그리 신앙 문화의 영향력이 더 강했으나, 타타르족 상인들과 관료들이 카자흐스탄에 유입된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소련 시절 스탈린이 행한 대숙청 시기에는 크림 타타르족 상당수가 중앙아시아 사막 지대로 강제 이주된 전력이 있다. 중앙아시아계 민족들과 타타르인 간에는 서로 문화 교류 외에도 통혼도 활발한 편이라서, 오히려 카자흐스탄 같은 지역에서는 타타르인 기독교도인 크랴셴이 더 눈에 띌 정도라고 한다.
3.5.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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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약 3,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56개 공인 민족들 중에서 인구 순위가 55위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 신장에 와서 무역을 하거나 교사로 봉사하려고[22] 정착한 볼가 타타르족과 크림 타타르족 상인들의 후손이다.[23] 신장 위구르 자치구내의 타타르족들은 타타르어를 사용할 때 아랍 문자를 사용한다.
현재도 타타르족은 중국 내 여러 민족 중 가장 평균 교육 수준이 높은 민족이다. 2000년 통계 기준으로 중국 소수민족 평균 문맹률이 14%, 한족 평균이 8%였으나 중국 내 타타르족은 1.8%에 불과했다. 단순히 문맹률만 낮은 게 아니라 고등교육 이수율도 월등한데 2000년 통계 기준으로 인구대비 대학생 및 대졸자 비율이 한족의 5배(!)에 달했다. 출처.
3.6. 일본
타타르족들 중에도 러시아 제국, 소련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도 있어서 이들이 일본에서 타타르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내 타타르인/바시키르인들은 러시아인 공동체에 소속된 경우도 있지만, 터키인 공동체에도 소속되는 경우가 있다. 일본 현대사 초기 재일 타타르인/바시키르인들은 일본이 터키와 혈맹 관계를 구축할 때 및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와 교역할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터키에서 일본 이슬람계를 지원하는 이유로 일본의 타타르인들은 재일 터키인으로 분류되며, 고베 모스크와 도쿄 자미도 일본 내 타타르인들과 바시키르인들이 중추가 되어 지어졌다. 이들 중 일제강점기 때 조선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한국 내 무슬림 공동체의 시초이다.
3.7. 기타 국가
벨라루스에도 일부 볼가 타타르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 뉴욕의 립카 타타르, 일본의 시베리아 타타르/바시키르인 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핀란드의 타타르인들도 해당국가의 현대 이슬람사 초창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동유럽의 타타르인들이 기병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 무역에 종사하던 연유로 평균 생활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았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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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내 타타르인
핀란드내에는 소수의 볼가 타타르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핀란드내 볼가 타타르족들은 19세기부터 핀란드에 정착했고 핀란드내 무슬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계 핀란드인의 일부에 속해 있지만, 터키계 핀란드인의 일부에 속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역시 크림 타타르인 외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 이후로 유입된 립카 타타르인 인구와 러시아 제국 시절 이후로 유입된 볼가 타타르인 인구가 있다.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루마니아에는 도브루자 타타르인이라고 부르는 노가이인 탈영병(...)들이나 크림 타타르인 난민들의 후손 인구가 약 2만여 명 정도 거주한다고 한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노가이인들이 유목을 해서 생산성이 낮다고 생각하여, 원래 살던 카스피해 일대에서 우크라이나 아조프 해 북부 일대로 강제이주시킨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의미로 천막들을 수거하여 불태워버렸는데,[24] 이 과정에서 노가이인 상당수가 얼어죽거나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갔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으로 탈주한 노가이인과 크림 타타르인들은 가까운 루마니아 남부 해안지대로 이주하여 오스만 군 병사로 봉사하며 루마니아인들과 불가리아인들의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하는 비정규군 스케빈저 역할을 맡았다. 루마니아가 오스만 제국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노가이인, 크림 타타르인 후손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른바 도브루자 타타르인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몽골 서부에도 소수의 타타르족이 거주하는데 이들은 몽골 서부의 다른 튀르크계 소수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주류 민족인 할하 몽골인들과 사이가 매우 나쁘다. 타타르인 외에 튀르크계 부족들로 카자흐인, 키르기즈인, 위구르인, 우즈베크인, 투바인 등이 존재하고 이 중 티베트 불교도인 투바인을 빼면 모두 이슬람을 믿는다.
[1] 중국내 소수민족인 타타르족에 대해서는 '塔塔爾族 / 塔塔尔族' (tǎtǎ'ěrzú)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2] 서유럽/ 동유럽과 러시아. 특히 접촉이 잦았던 러시아인들
[3] 1230년대~1480년
[4] 바투의 러시아 원정부터 1480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와 킵차크 칸국의 칸 아흐마드가 맞붙어 승패없이 끝나버린 우그라 강 전투까지. 1220년대에 칭기즈 칸의 부장 베수드 제베 노얀이 지휘했던 일시적인 러시아 스텝 지역 원정기간은 제외한다.
[5] 러시아가 우랄 산맥을 넘어서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을 물리적으로 평정하고,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건 일러도 19세기 중엽이었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세적 우위도 같은 세기 초에야 본격적인 기술력, 행정력의 차이로 굳혀졌다. 애초에 무전도, 기관총도, 철조망도 없었던 시절에 유목민 습격 하나 하나 다 파악하고 막을 수 있을 만큼의 국경 통제란 불가능했고, 지역도 그 거대한 러시아인 만큼 동유럽의 슬라브 중심 제국들에게 튀르크계 유목민족들의 노예 사냥은 비교적 근대까지 실존했던 큰 위협이었다.
[6] 민담 설화 같은 자료들을 보면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측에서 타타르의 습격은 딱 한국에서의 말 안 들으면 호랑이가 물어간다 정도의 존재감을 풍긴다.
[7] 말과 모피를 주고 유목민들의 생필품인 철기와 주요 무역 결제 수단인 비단을 받았다.
[8] 이것도 있고 사소한 원한도 있었는데 옹기라트부의 사인 테긴이라는 노인이 병이 들자 타타르족 샤먼을 불러 병을 치료하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샤먼이 도착하자 병이 더 위독해져 그만 죽어버렸고 때문에 가족들은 타타르족 샤먼을 탓했다. 그래도 일단 말은 않고 있었는데 죽은 샤인 테긴의 누나의 남편이자 당시 몽골의 초대 칸인 카불 칸이 화를 내며 타타르족 샤먼을 죽여버렸고 때문에 둘 사이가 틀어졌다. 여담으로 정작 카불 칸이 죽어가자 암바가이 칸이 다시 타타르족 샤먼을 불렀는데 또 똑같은 일이 벌어져서
[9] 사이는 또 틀어졌다(...) 그 이후는 뭐, 타타르족은 암바가이 칸을 금나라에 팔아먹고 예수게이를 암살하여 몽골에 제대로 어그로를 끌렸고 결국은 칭기즈 칸이 타타르를 제대로 아작내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9] 병세 악화-사망-샤먼 살해
[10] 쿠빌라이 칸의 시대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가 되었다.
[11] 이 때의 일은 훗날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정벌하는 명분이 되었고, 이에 금나라의 선종은 암바가이 칸의 유물을 돌려주었다.
[12] 감정(減丁)은 금나라가 몽골계 부족들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실시한 정책으로 방목을 위해 부족과 떨어져 있는 청년들을 납치하거나 부족을 습격해 부족민들을 잡아가는 정책이었다.(쉽게 말하면 이이제이의 일종이다.) 포로들은 금나라로 끌고 가 노예로 만들거나 붙잡은 자리에서 곧바로 죽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감정'에 치를 떨었고, 금나라를 깊이 증오했다.
[13] 사실 원인은 이것만이 아니다. 죽인 것 자체도 원한살 만한 일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접대의 관습을 어기고 비겁하게 독살했기 때문이었다.
[14] 이렇게 된 이유는 벨구테이가 실수했기 때문이었는데 테무진 칸은 어지간히 빡쳤는지 평생에 걸쳐 신뢰한 벨구테이를 이 때의 일로 한동안 쿠릴타이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15] 다만 그녀의 이름 '이리나'는 “평화”라는 뜻의 그리스어 어원을 둔 정교회식 이름이다.
[16] '귀족'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미르자(میرزا)에서 유래했다.
[17] Tümen: 몽골어 및 만주어에서도 10,000 내지는 백부장을 의미한다. 만주어 '투먼'에서 유래한 지명이 두만강과 중국 지린성의 투먼시이다. 터키어에선 사단을 의미한다.
[18] 타타르어보다는 카자흐어에 더 가깝다.
[19] 중동에서 주로 발견되는 E1b1b1-M35 DNA는 무슬림 볼가 타타르인의 경우 15~23% 정도가 보유하고 있으나, 크랴센인의 경우 29%가 보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J2-M172 DNA는, 무슬림 볼가 타타르인들은 1~3% 정도 보유하고 있으나 크랴셴인의 경우 6%가 보유하고 있다.
[20] 조로아스터교의 새해맞이 명절로 중동 및 중앙아시아 무슬림 민족 상당수가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관습상 꾸준히 기념하는 명절이기도 하다.
[21] 타지키스탄의 경우 이란계 민족인 타지크인이 주류이지만 똑같이 이란계 민족이 주류인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튀르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튀르크계 민족인 우즈베크족이 최대 소수민족이기도 하다.
[22]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신장의 무슬림 상인들은 유교의 전통 경전을 암기시키는 중국식 학교 대신에 터키인이나 타타르인 교사들이 서구 학문과 이슬람 신학을 동시에 가르치는 학교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23] 문화대혁명 때는 반대로 신장의 무슬림 민족들이 소련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24] 원래 노가이 칸국이 있었던 자리는 오이라트계 칼미크인들이 쳐들어가 칼미크 칸국을 세운 상황이었고, 일부 노가이인들이 살던 땅은 다시 코사크들이나 독일인 이주 농민들에게 나누어줬다. 처음에 노가이 칸국을 제거할 때 이용되었던 칼미크인들도 나중에 같은 이유, 같은 방법으로 토사구팽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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