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의 숙신은 누구인가?

2021. 10. 15. 12:12한국사/기타

한국 고대사에서 숙신에 대한 언급은 필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그전에는 숙신이 읍루나 말갈 정도의 것으로 생각하고, 혹시 유럽의 북해에 접해있는 Saxons족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 스카이데일리지에 실린 이을형씨의 글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오손/오환/숙신, 펌글 참조). 이을형씨는 숙신씨가 동이족의 일원으로 가장 오래되었으며, 예맥조선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글을 통해, 예맥조선, 낙랑조선을 언급하는 것을 들어 필자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들어 보지 못한 언급인 것이다. 이미 필자는 낙랑조선에 대해 관심이 있어, 낙랑 시리즈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낙랑조선의 범위가 크며, 또한 예맥과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 곤혹스러운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데 이을형씨의 글을 보며,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필자가 의구심을 가졌던 예맥과 낙랑조선의 관계를 잘 정리해 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예맥조선이 있었고 그후에 낙랑조선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중국 사가들이 감추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낙랑조선이란 글귀도 후한서에 잠깐 언급된 것에서 시작했음을 알린 바 있다. 

 

그래서 이을형씨의 주장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필자는 또한 언급된 숙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Saxons족과 더불어 우리 역사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켈트족, 그러나 그 정체가 좀처럼 밝혀지지 않는 것에 대해 고심해 오던 터였다. 그런데 이을형씨의 숙신에 대한 언급으로 그 실마리가 풀린 듯 하다. 그래서 펜을 들게 되었다.

 

 

 

1. 이을형씨의 주장에 따른 숙신

 


"진서각주(晋書斠注)에 보면 동이가 백여국으로 분립했다고 하고 있다.(晋書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四夷), 이는 우리 민족이 여러 부족으로 분파, 분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이족중(東夷族中) 4300년 전에 지나 문헌에 나타난 것은 오직 숙신씨뿐이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 [근세 인류학자가 동북민족은 다 숙신(肅愼)에서나왔다]고 했다.(渤海國志長編 卷十六 族俗考 第三).

 

이는 동이족의 시조가 숙신씨라고 가리킨 것이라고 고(故) 최인(崔仁)선생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숙신씨에서 분파된 동이족 중, 숙신씨의 정통을 계승한 자가 바로 한민족(韓民族)이라 하고 있다.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에 [尙書傳 貊海東夷(肅愼之命, 傳原文作貌 釋文作貊)]이라 했다.(黑龍江志稿 卷一 地理志) 즉, 예맥은 동이의 해상에 있다. 숙신지명(肅愼之命)의 원문(原文)에 모(貌)로 기록했는데 전문(篆文) 초문(草文)에 해석하는 석문(釋文)에 맥(貊)이라 풀이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숙신을 맥(貊)이라 풀이했다는 뜻이다. 즉 숙신이 예맥이요 예맥이 숙신이라 가리키는 것이다. 또 서전(書傳) 여오장(旅獒章) 주(注)에 주무왕(周武王) 당시에 숙신씨 화살을 수입했다고 하고, 동서(同書) 무성편(武成篇)에 주무왕(周武王) 당시 예맥(銳麥;濊貊)이 한족(漢族)과 병칭(竝稱)되어 있다.

 

숙신씨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요, 예맥은 동이족의 주체로서 동이족의 시조와 동이족의 주체가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은 숙신(肅愼)이 예맥(銳麥;濊貊)이요 예맥이 숙신이라는 사실을 더욱 긍정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숙신씨와 그 지류(支流)가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에 합병되어 완전히 한민족(韓民族)으로 성장했다. 후한서 동이전에 숙신씨의 분파인 읍루(挹婁)가 한(漢)나라가 흥(興)한 후 부여(夫餘)에 합병됐다.

 

진서각주에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 숙신(肅愼), 읍루를 합병했다고 하고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 할 때에 그 이십사군(二十四軍) 우익(右翼)에 숙신도(肅愼道)가 있는 것을 보면 숙신이 고구려에 합병 된지 오래다 하고, 송서(宋書)에 고구려가 숙신씨의 고시(고(楛矢), 석족(石鏃)을 지나에 수출했다고 하고 있는데 앞뒤가 안 맞는 점은 유의할 점이다."

 

(자료 : 이을형, '숙신씨 예맥조선 낙랑조선 역사 숨겼다', 스카이데일리, 2021. 9.21.,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오손/오환/숙신, 펌글 참조)

 

 

 

2. 삼국사기에서 숙신에 대한 언급

 

1) 고구려 태조왕 시기

 

서기 121,  숙신에서 사신이 오다.

 

이 시기에 숙신 관련하여 사신이 왔다는 간단한 언급뿐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시기에 후한의 유주자사, 현도태수, 요동태수 등과 치열한 전쟁을 한다.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하므로, 요동과 현도는 론강의 우측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아래 자료에서 고구려는 선비족과 함께 요동을 공격했다고 한다. 즉 선비족이 요수(론강)의 동쪽에 있는 Suebi족이 되는 것이다. 선비족은 고구려 유리왕 시절부터 복속시켰다. 흉노의 묵특선우시절(BC 200년경)부터 복속한 선비족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숙신이 Saxons이라면 북해변에 있었다. 즉 요동군과 현도군에서 북쪽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위협을 느껴서 또는 요동군과 현도군의 위협을 느껴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낼 수 있다고 판단한다.  

 

"121년에 큰 승리를 하는데, 한나라에서 유주 자사 풍환, 현도 태수 요광, 요동 태수 채풍 둥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수성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해 방심하게 만든 뒤 몰래 3천의 군사로 현도, 요동을 습격해 2천여 명을 죽였으며, 여름 4월에 선비족 8천명과 함께 요동을 공격해 채풍이 추격하자 신창현에서 싸우다가 채풍, 용단, 공손포 등을 죽였다."

 

(자료 : 태조대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상/동명성왕-태조왕, 펌글 참조)

 

 

 

2) 고구려 서천왕 (270-292) 시기

 

277-279 : 3년 공백

 

서기 280년, 왕의 동생 달가를 보내 숙신의 단로성을 빼앗다.

 

281-285 : 5년 공백

(자료 : 서천왕, 삼국사기)

 

"11년 겨울 10월, 숙신이 침입하여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나, 나의 덕은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먼 곳에 떨치지 못하여, 인근의 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제 지략있는 신하와 용감한 장수를 얻어 외적을 부수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특출한 계략을 지녀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왕의 아우 달가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될만 합니다.”


왕은 곧 달가를 보내 숙신을 치게 하였다. 달가가 뛰어난 계략으로 적을 기습하여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이고, 주민 6백 여 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6․7개소의 부락을 항복하게 하여 부용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으며, 겸하여 양백․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자료 : 서천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상/차대왕-봉상왕, 펌글 참조)
 

 

서천왕시기에 고구려는 대서양인 서해에 이미 접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천왕 시기에 이미 질투가 심한 관나부인을 서해에 수장했다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숙신은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했는데, 숙신이 Britain지역에 있는 숙신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달가가 기습하여 빼앗은 단로성은 아일랜드의 Doona castle인지 모른다. (필자의 글, ' 광개토태왕 비문으로 본 정벌지역 추정' 참조).

 

그리고 달가는 주민 6백여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겼다 했다. 이 당시 동부여를 필자는 Oder river와 Vistula river 사이에 있는 Burgundians으로 추정했다. 이 지역의 남쪽은 발칸반도 위쪽 파노니아지역이 된다. 이 지역에 켈트인이 기원전 4-3세기부터 이동해 있었다고 위키자료는 말한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elts, 'Celtic settlement of Southeast Europe' 펌글 참조). 이 지역은 켈트족 보이족이 원래 있던 보헤미아지역이라 서술하기도 한다. 비록 구체적 연대는 다르지만, 달가가 이동시킨 숙신인이 이 지역의 켈트족이 아닌가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한다. 즉 숙신이 Saxons도 될 수 있지만, 또한 Celts족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Saxons족은 기원후 5세기-6세기에 유럽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즉 이전에는 켈트족이 주로 머물렀다 한다. 따라서 숙신이 켙트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기 (391-413)

 

 

영락 8년 (광개토태왕 8년, 398) 식신 정복 : 광개토태왕 비문 자료

 

삼국사기 : 395-398 : 4년 공백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기에도 숙신이 언급된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이 시기 (395-398)가 공백으로 남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광개토태왕 비문이 있어 398년 숙신 (식신)을 정벌했다 한다. 필자는 이 숙신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에 있지 않았나 한다. 즉 여기서의 숙신도 켈트족지역이라는 것이다. 아일랜드에 있는 Duluce castle, Carlow castle (가루성), O'Brian castle 등이나, 스코틀랜드에 있는 Dun Castle 등이 광개토태왕의 흔적이 아닐까 한다. (필자의 글,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지역 추정' 참조)

 

"영락 8년, 광개토대왕은 요동의 정반대인 고구려 동북방 변방으로 한 부대의 군대를 파견해 숙신족[17]을 순찰하였다. 이때 그들의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삼백여인을 붙잡았다. 이후로 숙신족은 고구려에 조공을 약속하고 내정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기로 하여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전의 서천왕 대에도 숙신족을 복속시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때의 숙신족 복속은 재복속이나 지배력 강화, 또는 서천왕 대에 복속시킨 숙신족과는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는 경우 서천왕 대 복속된 숙신은 송화강 유역, 이 때 복속된 숙신은 목단강 유역의 것으로 보는 주장이 유력하다.[18]

이때의 숙신이란 세력은 훗날 물길 - 말갈로 변모하는 세력으로 발해를 거처 여진 - 만주족이 된다라는게 학계의 통설이긴 한데, 연구가 축적되면서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가 서로 별 연관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는 흑룡강,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에 이르며 서남으로는 현재의 연길 지방 이북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숙신이라 통칭되는 숙신계 종족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중앙 집권화가 되지 않고 서로 남남으로 퍼저있었다.광개토대왕 대에 복속한 숙신은 그 규모로 보아 숙신족 중 일부 세력으로 보인다.

이때 복속된 숙신은 장수왕 대에 고구려에 얹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부용 세력이 된것 같다. 하지만 또다른 숙신계인 물길이 성장하여 고구려를 괴롭힌다.

참고로 식신(숙신족) 혹은 백신의 정체는 아직까지 불명이다. 위의 서술은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와있는 백신토곡(帛愼土谷)[19] 복속 기사를 바탕으로 도출한 것인데, 백신의 백자를 백으로 판독하느냐 식으로 판독하느냐에 따라 복속 대상이 달라질수 있다. 비문이 워낙 훼손이 심해서 정확한 판독이 어렵고, 따라서 확실히 어떤 단어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帛)자나 식(息)자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자료 : 광개토태왕 생애,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광개토태왕, 펌글 참조)

 

 

Abandonned underwater castle (celtic ruins?) in Scotland

 

 

Carlow Castle in Ireland

 

 

3. 로마사에서 Britain 지역에 대한 언급

 

그러면 로마사에서는 이러한 숙신의 언급 시기에 어떻게 기술되었나 궁금하게 된다. 왜냐하면 필자는 로마사가 우리의 삼국사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1) 고구려 태조왕 시기 숙신의 사신이 왔다는  121년 전후의 로마와 Britain

 

이 시기는 로마 황제 Hadrian (117-138) 시기이다. 스코틀랜드와 사이에 Hadrian Wall을 세웠다는 그 황제이다. 그러나 이 당시 특별한 전쟁 언급은 없다. 단지 방어적 목적으로 세웠다 한다. Hadrian 황제는 각 지역을 직접 눈으로 보고자 순방한 것으로 특징되는데, 122년에 Britannia and the West를 순방한 것으로 기술된다.  방문 전에 119-121 기간동안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122년 Hadrian Wall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한다. 즉 스코틀랜드지역에서 남으로 쳐들어 왔다는 의미이다. Britain지역 숙신을 켈트족으로 본다면, 켈트족에 대한 방어벽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숙신과 관련한 고구려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 시기의 백제는 기루왕 시기(77-128)로서, 삼국사기 기록에서 117-124의 8년기간은 공백으로 되어 있다.

 

 

"Prior to Hadrian's arrival in Britannia, the province had suffered a major rebellion, from 119 to 121.[78] Inscriptions tell of an expeditio Britannica that involved major troop movements, including the dispatch of a detachment (vexillatio), comprising some 3,000 soldiers. Fronto writes about military losses in Britannia at the time.[79] Coin legends of 119–120 attest that Quintus Pompeius Falco was sent to restore order. In 122 Hadrian initiated the construction of a wall, "to separate Romans from barbarians".[80] The idea that the wall was built in order to deal with an actual threat or its resurgence, however, is probable but nevertheless conjectural.[81] A general desire to cease the Empire's extension may have been the determining motive. Reduction of defence costs may also have played a role, as the Wall deterred attacks on Roman territory at a lower cost than a massed border army,[82] and controlled cross-border trade and immigration.[83] A shrine was erected in York to Brittania as the divine personification of Britain; coins were struck, bearing her image, identified as BRITANNIA.[84] By the end of 122, Hadrian had concluded his visit to Britannia. He never saw the finished wall that bears his name."

 

(source : Hadria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N-An dynasty(96-192), 펌글 참조)

 

 

 

2) 고구려 서천왕 시기(270-292) 달기가 숙신을 정벌한 시기 280년 전후의 로마사에서의 Britain

 

이 당시 로마의 황제는 Probus (276-282)황제 시기이다. 280-281 시기에 3명의 반란자가 있었다. 즉 Julius Saturninius in Syria, Proculus in Lyon (Franks), Bonosus in Cologne (Germany)가 그것이다. 즉 이런 지역에서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Britain지역에서 반란이 일어 났는데, 어느 장군의 도움으로 진압했고, 이를 282년 Consul에 임명했다 한다. 고구려 달가의 숙신 정벌과 안국군 지위를 준 것을 연상케 한다. 이 당시의 백제는 고이왕 시절 (234-286)인데, 삼국사기에는 279-282 기간동안 4년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도 280년 전후 8년(277-279, 281-285)이 삼국사기에서 공백으로 되어 있다.

 

 

"In 280–281, Probus put down three usurpers, Julius Saturninus, Proculus and Bonosus.[29] The extent of these revolts is not clear, but there are clues that they were not just local problems (an inscription with the name of Probus erased has been found as far as Spain).[30] Following this, Probus then put down a revolt by an unnamed rebel in Britain with the assistance of a certain Victorinus, who was later made consul in 282.[31][32] During the winter of 281, the emperor was in Rome, where he celebrated his well-deserved triumph.[32] "

 

(source : Probu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235-364), 펌글 참조)

 

 

 

3)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기 숙신을 정벌했다는 398년 전후의 로마와 Britain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398년 숙신(식신)정벌은 광개토태왕 비문에 언급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395-398 기간동안 공백으로 되어 있다.

 

로마사 자료에서는 Honorius 황제시의 장군인 반달족 출신의 Stilicho가 398년 Britain으로 가서 스코틀랜드의 Picts 족 침입을 막았다 한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매우 적은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당시 로마는 고트족왕 Alaric I에 대항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또한 Stilicho는 정체가 매우 모호하다.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왕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Honorius황제 명에 의해 죽었으며, 후에 Alaric I왕이 그 가족과 부하들을 돌려 달라고 했다고 한다. 반달족은 부여족인 Burgundians으로서, 광개토태왕이 동부여를 함락하자, 부여의 5대 압록부가 광개토태왕을 흠모해 따라 나섰다는 역사적 기술이 있다. 여하튼 저윽이 광개토태왕 기록에 짜 맞춘 것같은 기록이 존재하지만, 숙신이 Britain 지역 그것도 켈트족 지역 기술과 매칭되고 있다.

 

"The invasion by the Picts, 398 AD

 

Stilicho also fought a war in Britain in this time period, likely in the year 398. The campaign against the Picts is highly disputed. The troops defending the British provinces probably defeated an invasion by the Picts without any support from Stilicho – who is never recorded to have left Italy in 398. However, a critical analysis of Claudian suggests that it went badly.[23] Stilicho, however, did send orders and funds to strengthen the defences around Hadrian's Wall.[24] "

(source : Stilicho,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W. Roma(364-476), 펌글 참조)


 

 

4. 숙신과 켈트족

 

그러면 이상에서 살펴 본 것을 고려하면, 숙신은 Britain지역의 켈트족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을형씨가 주장하는 동이족으로서의 숙신이 켈트족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본 블로그의 글 '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1), (2)'에서 스키타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이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에 밀려, 서진하면서 아나톨리아를 거쳐, 발칸반도, 나아가 중유럽, 북유럽, Gaul지역, 히스패니아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위키자료와 The History Files 자료를 통해 파악한 바 있다. 그리고 프랑크족의 Sicambri도 키메리언의 일종이라 했으며, 이 키메리언이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이 아닌가 하는 뉴앙스의 글을 분석했다. 프랑스의 Gaul족이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로 건너 가서 정착했다고 한다. 즉 Gaul족은 켈트족의 다른 이름이며,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Britain지역까지 이동하는 역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들 켈트족이 앞에서 언급한 이을형씨가 주장하는 동이의 숙신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고구려가 그리고 부여가 이들 지역에 있음을 이미 여러 글에서 밝혔다. 그리고 필자가 추정하는 백제, 신라 지역도 이러한 키메리언의 이동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즉 동이의 구성원인 고구려, 부여, 백제, 신라의 모든 지역이 이들의 활동지역과 겹치는 것이다. 그래서 동이의 선조가 숙신이라는 어찌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주장이 현실로 다가오는 결과에 필자도 놀라게 된다.  최근에 오스트리아의 한 학자가 Hallstatt문명의 소금광산에서 채취한 분뇨를 분석한 결과, 2700년전에 이들은 발효식품으로 만든 치즈와 맥주를 먹고, 채식을 했다는 것을 밝혀 냈다 한다. 발효 음식과 채식은 한민족 음식의 특징이다. 필자가 가정하고 추정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라서 그냥 흘려 듣지 않게 된다. 참고로 아래 켈트족의 유럽에서의 활동반경을 나타내는 지도를 싣는다. 켈트족에 관련 자료는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elts에서 'Celts' 펌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들의 종교관에서 삼신 (Three Mothers deity) 등 숫자 3에 관련된 것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띈다.

 

 

"Triplicity is a common theme in Celtic cosmology, and a number of deities were seen as threefold.[137] This trait is exhibited by The Three Mothers, a group of goddesses worshipped by many Celtic tribes (with regional variations).[138]"

(source : Celt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elts, 펌글 참조)

 

 

유럽에서의 켈트족의 활동 영역 (source : Wikipedia)


Diachronic distribution of Celtic peoples, in the traditional view:

  Core Hallstatt territory, by the sixth century BC
  Maximal Celtic expansion by 275 BC
  Lusitanian area of Iberia where Celtic presence is uncertain
  Areas where Celtic languages remain widely spoken today

 

진서각주(晋書斠注)에 보면 동이가 백여국으로 분립했다고 하고 있다. 켈트족도 여러 부족이 있다. 켈트족의 일원인 보이족은 다키아 지역에 진출하고자 할 때, 다키아족의 거센 반발로 다키아 지역에 진출하지 못했다 한다. 서진한 켈트족이 다시 동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숙신이 켈트족이라는 단순한 매칭은 어려워 보인다.

 

키메리언은 말위에서 뒤돌아 활을 쏘는 배사법의 활공격이 특징을 이루는데, 켈트족의 어느 기록에도 이러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서양사에서 켈트족의 이동이라고 말하는 기록은 이 당시의 아시아에서 온 전사들의 그룹을 모두 켈트족으로 묘사하는 단순함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숙신과 켈트족은 조선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5. 예맥은 동이의 해상에 있다.

 

상기 이을형씨 자료에 '(예)맥은 동이의 해상에 있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글귀가 있다. 즉 바다와 관련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추정하는 고대 중국은 대서양에 인접한 프랑스 지역으로 보인다. 따라서 동북쪽의 동이와 관련된 바다는 대서양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맥은 후에 고구려 부여 세력이 된다. 백제 신라는 남쪽에 있는 세력으로 예맥과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여와 관련 있는 지역으로 바다와 관련 있는 지역은 북해지역, 발트해지역이다.

 

필자는 북부여의 지역이 발트해의 덴마크지역이라 추정했다. 또한 고구려의 일부인 것으로 추정되는 동고트족이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나왔다고 6세기의 고트족 역사학자 Jordanes는 말했다. 스웨덴의 전설에는 훈족과 형제지간으로 훈족의 병력 지원 요청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흑해지역의 수도에 같이 있었다는 언급도 나온다. 스칸디나비아반도 특히 스웨덴과 관련 있는 민족이 선비족인 Suebi족이다. Heruli족도 관련 있다 하는데, 이들은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왕 Alaric I과 함께 서진해 갔다. 그리고 필자는 이들 지역이 황두실위를 비롯한 실위가 있던 방대한 지역으로 추정했다. 몽골족의 원류라 하는 몽골실위는 핀란드지역에 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에서의 출토된 유물과 암각화 중, 청동 빗, 그리고 소를 이용한 쟁기로 밭을 가는 모습의 암각화가 눈에 띈다. 보다 자세한 자료는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대유럽'에서 'Nordic Bronze Age' 펌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카테고리, 북유럽 편에도 'Iron Age Scandinavia' 펌글이 있다. 아래는 덴마크에 있는 복원된 철기시대의 시골의 초가집 모습이다.

 

 

Denmark reconstructed iron age house (source : Wikipedia)

 

 

'맥이 동이의 해상에 있다'는 글에 대한 해석은 북유럽을 가정할 경우에만 해석이 가능하다. 한국의 고대사를 한반도나 현 중공의 일부지역에서 찾고자 한다면 이에 대한 해석의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Europe late Bronze Age (source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