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사를 통해본 신라와 당의 유사성 자료

2021. 9. 18. 02:47역사 자료/신라

 머리말

그동안 수나라와 당나라의 위치에 대해 고심해 왔던 필자는 최근 당나라가 서아시아에 있었다는 글에서 보듯이 당나라의 위치가 신라로 추정되는 사산왕조 페르시아 위치와 겹치는 것을 확인했다.

 

즉 그동안 신라가 당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에서 신라와 당의 싸움 등의 역사를 많이 들어 왔다. 즉 완전한 동일체가 아닌 모습도 많이 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 최치원 등의 예에서 보듯이 바로 옆나라라는 인식이 들게끔 신라와 당의 왕래가 많고, 언어나 문화의 차이가 거의 없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자의 우리나라식 발음이 당나라 시대의 발음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즉 당나라는 신라와 구분이 되면서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고, 당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되는 황소의 난 전에 일어난 방훈의 난 때 이는 계림에서 시작되어 당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었다고 한 기술 (자료 : 방훈의 난, 나무위키)에서 보듯이, 신라와 당의 위치가 매우 근접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알아 보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지난한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는 궁중사, 전쟁사, 반란사, 제도 등을 살펴 보고, 신라를 후기 파르티마제국, 사산왕조 페르시아 및 통일신라후 비잔틴제국으로 보는 필자는, 수와 당이 출현하는 진평왕시기부터의 신라의 역사, 수, 당의 역사, 진평왕시기부터의 사산왕조 페르시아 역사, 당나라의 출현과 관계가 깊을 것으로 사료되는 아랍의 역사, 수 당과 전쟁을 한 고구려의 역사와, 돌궐의 역사까지 살펴 보아야 하는 큰 작업이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구분과 일체성의 분석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기에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심정으로 시작한다.

 

또한 보다 상세한 분석을 위해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신라의 역사를 상세 비교하는 작업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후기 파르티마제국이 신라라는 주장을 I,II,III편에 걸쳐 분석한 이후의 시기 작업이 될 것이다.

 

본 글에서는 먼저 신라와 당의 유사성에 대해 궁중사와 기타 사실들을 열거하며 주장하고자 한다.

 

 

I. 궁중사를 통해 본 당과 신라의 유사성

 

신라와 당의 궁중사 중에서 특히 신라 문무왕 이후의 신문왕

 

1. 효소왕 휘 이홍과 당나라의 이홍

 

효소왕(이홍, 692-702)시 신목왕후 섭정 (692-702)

 

이홍 효소왕이 죽었을 때 측천무후가 2일간 정사를 보지 않았다 함.

 

효소왕(孝昭王, 687년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 재위: 692년 8월 20일(음력 7월 3일)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은 남북국 시대의 남국인 신라의 제32대 이다.

 

(金)이고, 이름은 이홍(理洪, 후에 이공(理恭)으로 개명)이다. 신문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이다. 691년(5세) 태자가 되었고692년 음력 7월에 (6세) 신문왕이 붕어하여 왕위에 올랐다. 692년부터 70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1][2]

692년(재위 원년), 당의 측천무후로부터,<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에 책봉됐으며 휘를 피하기 위해 좌-우이방부(理方府, 입법을 관할)를 좌-우의방부(議方府)로 개칭했다. 694년(재위 3년)에 문무왕의 동생인 대각간 김인문(金仁門)이 당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695년(재위 4년)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해 각각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관할케 했다. 698년(재위 7년) 3월에는 일본으로부터 온 사자를 숭례전에서 접견했다. 699년(재위 8년) 2월에 당에 조공했다. 700년(재위 9년) 5월,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을 진압했으며, 중시 김순원(金順元)이 이에 연루돼 파직당했다.

 

재위 11년 702년 8월 24일(7월 27일)에 10대의 나이에(16세)사망해, 시호는 효소왕으로 정하고, 망덕사의 동쪽에 매장됐다. ...효소왕이 죽자, 당의 측천무후가 죽은 효소왕을 위해 정무를 2일간 맡지 않았다고 한다.[1]

(자료 : 효소왕, 위키백과)

 

2. 당현종(이융기)과 신라의 성덕왕(김융기)

 

당현종(이융기,李隆基)과 성덕왕 (김융기, (金隆基)) : ‘융기’라는 동명 (한자도 같음)

 

당현종시 연호 개원, 성덕왕도 사용

 

"성덕왕(聖德王, ? ~ 737년)은 신라의 제33대 왕(재위: 702년 ~ 737년)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죽자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金)이고, 초명(初名)은 천중(天中)이며, 휘(諱)는 융기(隆基)였으나 당나라(唐)로부터 현종(玄宗) 황제와 휘가 같다는 항의를 받고 흥광(興光)으로 고쳤다.[1]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702년부터 708년까지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고 708년부터 73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영해군사(寧海軍使)의 작호를 주고, 각간 사공(思恭)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允忠), 사인(思仁) 등의 4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을 치게 하였으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발해를 치러 갔던 당군이 폭설을 만나 산길이 막히고, 얼어죽은 병사가 반을 넘자 당은 발해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신라도 출병하지 않았다. ....

군사적인 측면에서 신라의 경계 대상은 발해 그리고 일본이었다. 발해의 팽창에 맞서 신라는 20년(721년) 가을 7월에 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정부(丁夫) 2천 명을 뽑아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33년(734년)에 이르러 당은 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과 함께 정절(旌節)을 주어 발해의 견제를 맡겼다. 김지렴과 교대하게 된 김충신은 이때 현종에게 표를 올려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내려줄 것을 현종에게 요청하고 있다. 여름 4월에 신라에서는 대신인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고, 현종은 그를 내전에 불러 잔치를 열어준 뒤 위위소경(衛尉少卿)의 관작을 내리고, 비색 난포(襴袍)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0필을 하사했다. 지렴은 이때에 이르러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이듬해(735년) 다시 김의충(金義忠)을 당에 하정사로 보냈는데,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에서 죽어 당으로부터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받았다. 돌아오는 의충에 부쳐 당은 패강(浿江)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완전히 승인했다. 이는 신라와 당 사이에서 세력을 키운 발해에 대한 대항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패강 이남 지역의 영유권을 승인받은 뒤인 35년(736년)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시켜 평양(平壤)·우두(牛頭) 두 주(州)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자료 : 성덕왕, 위키백과)

 

3. 당의 측천무후와 신라의 신목왕후의 유사성

 

신문왕 (681-692 재위) ; 681 김흠돌의 난, 김씨 왕후 폐비, 신목왕후(681-692) 등장

신목왕후의 등장 : (중국)황제식의 결혼식

효소왕(이홍, 692-702)시 신목왕후 섭정 (692-702)

이홍 효소왕이 죽었을 때 측천무후가 2일간 정사를 보지 않았다 함.

성덕왕 (융기, 702-737 재위), 신목태후 섭정 (702-708)

 

- 신문왕 (681-692)

 

신문왕(神文王, ? ~ 692년, 재위: 681년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이다.

(金)이고, 휘는 정명(政明)이며, 자는 일소(日怊)이다.[1] 문무왕(文武王)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이다. 665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681년 7월에 선왕(문무왕)이 사망하면서 즉위하였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의 통치 기반을 굳히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을 빼앗아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

 

생애

문무왕과 자의왕후 김씨의 차남으로,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665년 동복 형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81년 8월,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金欽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정희(政姬)의 아들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실패하였고 처형되었다. 그의 딸 역시 폐위되었다. 즉위 한 달 만에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683년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딸(신목왕후 김씨)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2] 하여 예부에 소속시키고,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

 

683년 10월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보덕국(報德國)의 안승(安勝)에게 소판의 관직의 등급과 함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키자, 이에 반발하여 684년 11월보덕국이 지배하는 금마저(金馬渚)에서 안승의 조카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하였고 보덕국을 멸하였다.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지방 행정 조직을 강화했다.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달구벌로 수도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3]

 

687년 5월, 수조권 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689년 1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었다.

 

692년 8월 19일(음력 7월 2일)에 붕어하였고 능은 낭산 동쪽에 마련되었다.

가계

기타

각주진골왕통의 세 번째 왕이었으나 그는 모계로는 실제 성골에 해당된다. 그는 부계로는 진흥왕-진지왕-문흥왕(추존)-무열왕-문무왕으로 이어졌으며, 어머니 자의왕후 김씨는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구륜의 아들 김선품의 장녀(長女)이다. 문무왕과 자의왕후는 7촌 고모-조카간이 된다.

(자료 : 신문왕, 위키백과)

 

신목왕후 (683-692 왕후, 692-702 효소왕 섭정, 702-708 성덕왕 섭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목왕후(神穆王后)

 

생애 및 활동사항

 

신목왕후(神穆王后)는 내물왕의 8세손이자 김춘추의 사위인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이다. 681년(신문왕 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사건으로 그 딸이었던 신문왕의 왕비가 출궁되니, 683년에 간택되어 신문왕의 계비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목왕후와 신문왕의 혼인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혼인의 기일을 정하였다. 다음으로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주 01)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낸 것이 비단이 15수레이고,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5월 7일에 이찬 문영과 개원을 그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卯時)에 파진찬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부(梁部) 및 사량부(沙梁部)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맞아들였는데, 왕궁의 북문에서 수레에 내려 입궁하게 하였다.

신목왕후의 혼인은 중국식으로 거행된 최초의 왕실 혼례로서, 이는 유교적 이념의 확산을 통해 왕권강화를 추구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이때의 혼인의례가 중국 황제의 친영의례인 ‘명사봉영례(命使奉迎禮)’를 적용하고 있어 신라가 국가의 위상을 중국과 대등하게 놓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문왕과 신목왕후의 혼인은 고종남매간의 근친혼으로서 태종무열왕계의 중대 왕실이 결집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692년(신문왕 12)에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니 태자인 김이홍(金理洪)이 효소왕으로 즉위하였다. 효소왕은 687년생이니 692년 즉위 당시 6세였다. 어린 아들의 즉위로 신목왕후는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없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태후는 효소왕과 황복사 석탑을 조성하였다. 효소왕이 702년(효소왕 11) 16세의 나이로 사망하니 동모제(同母弟)인 김흥광(金興光)이 성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성덕왕은 뒤에 사리와 불상·다라니를 황복사 탑 속에 봉안하였다.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에 따르면, 태후는 700년(효소왕 9) 6월 1일 사망하였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태후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문무(文武) 4년 11월 임오조(壬午條)에 “(신라에서 일본에) 살찬(薩飡) 김소모(金所毛)를 보내어 모왕(母王)의 죽음을 알려왔다”는 기사가 나타난다.

 

신목왕후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전제왕권을 구축해가던 시기에 신문왕의 계비가 되었다. 독실한 불교신앙을 가져 탑을 조성하였으며, 일본에서 ‘모왕’이라 호칭할 만큼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일본서기(日本書紀)
  • 「신라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명(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황수영 편저,『한국금석유문』,1985)
  • 「신라 중대 신목왕후의 혼인과 위상」(이현주,『여성과 역사』 22,한국여성사학회,2015)
  • 「신라 신문왕대 국왕 친영례의 시행」(김수태,『신라사학보』 29,신라사학회,2013)
  • 「‘모왕(母王)’으로서의 신라 신목태후」(김태식,『신라사학보』 22,2011)
  • 「신목태후: 신라 중대 효소왕대의 정치적 동향과 신목태후의 섭정」(조범환,『서강인문논총』 29,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2010)
  • 「신문왕의 혼례의」(서영교,『백산학보』 70,백산학회,2004)
  • 「신라의 왕권과 귀족사회: 중대 국왕의 혼인 문제를 중심으로」(이영호,『신라문화』 22,2003)
  • 「신라 신문왕의 전제정권의 확립과 김흠돌의 난」(김수태,『신라문화』 9,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1992)
  • 「신라오대산사적과 성덕왕의 즉위배경」(신종원,『최영희선생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탐구당,1987)

주석

주01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례

집필자

집필 (1996년)김복순개정 (2017년)이현주(한양대 사학과, 한국사)

(자료 : 신목왕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측천무후

 

당고종 이치의 왕후 (654-683) : 674 천황, 천후 칭호, 14개의 연호, 백제,고구려 멸망

656년 황태자 이충(李忠) 폐위

 

자신의 장남 이홍 (李弘)을 황태자로 삼음. 바로 죽은 이홍 죽은(675)후 크게 슬퍼하여 의종 효공황제로 추종

차남 이현 (李賢) 황태자 삼음 : 고종과 한국부인(韓國夫人) (무후의 언니)사이의 불륜아 680년 폐위

 

680년 3남 이현(李顯) 황태자 삼음

당 중종 (이현, 즉위 683, 684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 705 복위-710) : 710 부인 위씨가 독살함 684 이경업의 난

 

당 예종(이단(李旦), 4남, 안국상왕(安國相王)) (684-690) 5개 연호 : 측천무후 => 황태후 (683-690) :

측천무후 (690-705) 무주 황제

 

당현종 (이융기, 712-737 전기 재위) 측천무후 막내딸 태평공주 713년 제거

 

- 측천무후 자료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630년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는 당나라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武周)의 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 우저톈[*])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황제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 라 부른다. 그녀는 중국을 통치한 200여 명의 황제들 중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다. 그런 만큼 당나라 멸망 이후 문치주의와 유교 시스템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던 송나라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다. 또한 여성의 중앙정치 진출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고대에 그녀가 어떻게 황제가 되려 했는가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욕심, 야욕, 욕망에 대한 것이 명나라까지의 주된 평가였다면 청말 개항 이후 신해혁명을 거치며 평가는 조금씩 달라졌다.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이며,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개명하였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624년에 태어나 705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통치는 당 태종에서 당 현종 시기로 이어지는 당나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발전 및 계승해 현종 시기의 당나라가 태종 이후 또 다시 전성기를 맞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태어난 연도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생애

 

초기

 

무조는 624년 음력 1월 23일에 당의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의 廣元)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되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李淵)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에 무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씨를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 무조의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시절 재상을 지낸 양달의 딸로 명문 출신이었다.[1]

 

후궁 시절

 

636년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4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렀다.[2] 무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다.[1]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의 재인(才人: 정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다.[3] 어느 날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 고 답하였다.[3]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조는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49년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무조의 간청으로 9남인 이치가 이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다.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낭〉(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4]

 

재입궁과 암투

 

무조가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치의 황후인 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씨는 당시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했는데, 이치가 무조와 밀회한 사실을 알고 이치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5] 왕씨는 무조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고 이치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황후 왕씨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 앞에서는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왕씨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복종한다고 여겨 이치 앞에서 여러번 그녀를 칭찬하였다.[6] 이치가 무조를 소의에 봉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자 왕씨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무조는 황후 왕씨와 소숙비 다음가는 지위인 소의가 되었다.[7]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황궁 안에서 왕씨나 그 일족이 오만한 태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기회 삼아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았고 왕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였다.[8]

 

그러던 어느날 무조가 딸 안정공주(장녀이자 태평공주의 언니)를 낳자, 아이를 좋아하는 황후 왕씨는 기뻐하며 무조의 처소를 찾아와 딸을 보고 갔다.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이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9] 이 때, 고종 이치가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였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 소의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영휘 6년(655년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 또한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불렀다.

 

비정한 어머니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남편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는 폐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 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보내졌다가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치는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도 신임이 두터웠지만 무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많았다.[10]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씨는 675년 합벽궁(合壁宮) 기운전(綺雲殿)에서 고종, 이홍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이홍은 그 자리에서 독살당하였다.[11]

 

이후, 그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여 이치의 총애를 받았다.[12] 무씨는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 모함하였다.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당하였고 이치의 요청으로 죽음만은 면하였으나 681년 수도에서 2,300리 떨어진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13] 이현은 유배지에서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퍼져 무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684년 무씨는 조사를 한다는 구실로 구신적을 파주로 보내 아들을 자살하게 하였고 조정에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구신적이 이현을 죽였다고 덮어씌웠다.[14]

 

황제로 향하는 발걸음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리고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649~698)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여진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다.

 

여제 무측천

 

그녀는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친 후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혹리를 동원해 그녀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양성한 후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이를 통한 혹리들의 정치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을 취한다. 비록 잔혹하게 황제의 지위에 올랐지만 정치가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국법을 엄격히 해 주나라의 일원적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뤄나갔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또한,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그녀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적인걸장간지 등이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그녀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 사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그녀가 재위하는 동안 당나라 장안성은 인구 100만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자리잡았으며, 이는 동서양을 통틀어 그 시대 현존하는 가장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동서양이 만나는 장이 바로 장안임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는 당 현종 시기 조로아스터 교, 경교 등이 전래될 정도로 가장 뛰어난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실의 함'을 만들기도 했으며, 50여 년동안 당나라에서의 민란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민생회복과 생산력 강화를 국정운영의 기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2년 3모작이 가능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자영농이 성장했으나, 도리어 전쟁이 더 이상 발발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영토가 확보되지 않자, 자영농이 조금씩 쇠퇴하고 지주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식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말년과 죽음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그리고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705년 음력 11월 2일, 거의 반 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존호, 시호, 묘호, 능호

 

황제 신분으로 올린 존호는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이며, 후에 개칭하여 천책금륜성신황제(天冊金輪聖神皇帝)로 존호를 고쳤으며, 태상황 신분으로 받은 존호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이다.

 

사후에 당나라 황후로 신분이 복원되어 시호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올렸으며, 후에 천후(天后),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성제(天后聖帝) 등으로 개칭 하였고, 최종적으로 올린 정식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능호는 고종과 합장 된 건릉(乾陵)이다.

 

평가

 

개원(開元) 4년(716년) 측천무후의 아들이었던 태상황(太上皇)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은 무측천의 시호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무측천의 정책을 부정했으며 그녀나 무씨 일족에 의해 숙청된 자들의 명예회복을 실시하였다.[15]

 

후세 중국 사회나 문인 사회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써 군주의 권한 위에 군림하면서 당의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부정적 평가가 이어졌고, 찬탈에 실패한 위황후의 행실과 함께 '무위(武韋)의 화(禍)'라 부르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치세 중의 사적에 대해서도 그녀가 정치를 펼쳤던 시대에 떠돌거나 도망친 호수가 늘어나는 등 전적(田籍) 파악이 등한시되고 은전(隠田)이 늘어나 균전제를 실시하기 곤란해졌으며, 측천무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앉혀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도 혹평되고 있다.

 

한편으로 그녀가 권력을 쥐었던 시기에 중국에서 농민반란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관 말기의 호수가 줄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활은 그전보다 안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나아가 그녀의 인재 등용 능력은 측천무후를 혹평했던 후세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측천무후에 의해 등용되었던 인재들이 현종 시대 개원의 치를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또한 전근대의 사학자들 가운데서도 「밝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평했던 남송(南宋)의 홍매(洪邁)[16]나 「여자 중의 영명한 군주」(女中英主)라 부르며 현상 유지나 구습 타파에 대해 호평한 청대(清代)의 조익(趙翼)처럼 무측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도 존재한다. 중국의 주석 마오쩌둥(毛沢東)의 부인으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지휘했던 장칭(江青)에 이르러서는 마오 사후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명실공히 중국의 국정을 쥐었던 측천무후를 자신에게 겹쳐서 이를 칭찬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장칭과 문혁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부정되었으나 무측천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속 텔레비전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다.

 

가족 관계

(자료 : 측천무후, 위키백과)

 

당태종과 무열왕의 시호 태종; 시기가 차이있는데? 향후 분석 과제

 

문무왕 비문에서 나타난 태조는 누구?

 

4. 당현종과 신라의 효성왕과 경덕왕

 

당현종의 긴 재위기간과 전기, 후기의 상반된 행동 – 성덕왕과 효성왕 경덕왕 시기

 

- 당현종 (이융기, 생몰 685-762, 재위 712-756(황제), 756-762 (태상황)

 

개요

의 승승장구와 급전직하, 그 모두를 주도한 군주

천보(天寶), 즉 하늘이 내린 보물과도 같았던 여인과 후세에 길이 전해질 로맨스 스토리를 남긴 낭만천자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름은 이융기(李隆基). 당예종 이단의 아들이다.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로 줄여서 명황제(明皇帝). 당명황(唐明皇)이라고도 불린다. 묘호는 현종으로 검을 현(玄)을 쓰는 게 특징.

2. 즉위 이전


처음에는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책봉되었다. 할머니인 측천무후가 집권하고 있던 무렵에 소년기를 보냈는데 측천무후 집권기부터 내심 반기를 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의 근위대인 남북위군[1] 중 일부인 만기군을 슬슬 포섭하고 있었던 듯 싶다. 사실 반기를 들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측천무후가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당예종의 첩을 여럿 죽였기 때문이다.(...)[2] 이후 큰어머니인 위황후와 그 딸인 안락공주가 큰아버지 중종을 독살(710년 6월 2일)하자[3] 6월 20일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던 만기군을 움직이고 우림군까지 장악한 다음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아 정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위씨와 무씨 가문 일파[4]를 대부분 참살하고 정국을 수습하면서 아버지를 황위에 복위시켰다. 공헌도로만 따지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태자가 될 수 있었지만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미묘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적장자이자 큰형이었던 송왕 이성기가 스스로 양보함으로써 큰 무리없이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5][6]이 이후 고모인 태평공주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는데 태자로서 길게 있을 경우 위험할 수 있다 여긴 예종은 얼마 안가 그에게 양위하여 27세에 당나라의 6번째 황제가 되었다.

 

3. 황제로서

3.1. 명군이자 성군으로서

 

즉위하자마자 현종은 태평공주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여야 했다. 태평공주는 여러 번 현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즉위 다음해(713) 태평공주와 그 일파까지 숙청하여, 측천무후가 물러난 후 연거푸 무력을 동원한 정변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안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유능한 재상들을 등용하고 측천무후 시기부터 진행되던 사회변화[7]에 맞추어 제도를 개혁하며, 국방력을 재건하고 대외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라를 최전성기로 끌어올렸다. 수문제 당시 인구수를 넘은 때도 바로 당 현종 재임기로, 당현종의 재위 말기인 754년에 당나라 인구는 약 906만 9천 호[8]인데, 수양제 재위 3년차(606) 때 인구 약 890만 7천 호[9]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 시기 현종을 보좌한 유능한 재상으로는 요숭ㆍ송경ㆍ장가정ㆍ장열ㆍ이원굉ㆍ두섬ㆍ한휴ㆍ장구령[10] 등이 있는데, 요숭과 송경은 개원지치 초창기를 빛낸 명재상으로서 정관지치를 보좌한 방현령ㆍ두여회와 비견될 만하다. [11] 한휴는 현종에게 자주 간언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한휴가 재상이 되고 나서부터 폐하는 단 하루도 즐겁게 지내신 적이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잔소리꾼[12]이었다. 그외에 유명한 정치가로는 유능한 재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정국을 길게 주도했던 원건요, 재정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우문융이 있다.[13]

단순히 이러한 유능한 재상들의 목록만 놓고 본다면 '신하를 잘 둬서 명군'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종의 강력한 황권을 생각한다면 저러한 명신들은 현종을 보좌하는 자들이고, 결국 정책을 실시하는 주체는 황제 현종이 분명하다. 즉, 개원지치를 실시해 당이 직면했던 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로는 현종에게 있는 셈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화적법' 이다. 이 법은 추수기에 국가에서 강남 등 곡창 지역의 곡식을 시가의 2~3할 정도 더 높게 처서 사들여(화적) 이를 각지의 군진들에 직접 공급하고, 빈번히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수도권 관중 지역[14]에도 공급하는 제도로, 기존의 지조(농민들이 직접 부담)와 영전(군사들이 둔전을 행함)을 대체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성공을 거두어 2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데 성공한다. 이런 식의 괜찮은 제도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루는 데 성공한 공로는 결국 현종에게 있다.

대외적으로는 현종은 기존의 부병제를 기반으로 하는 당의 군제가 측천무후 집권기에 파탄을 맞자 당의 군제를 모병제 중심으로 개혁하는 데 성공. 개원 말엽(730년대)에는 부병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리고 당은 이러한 모병제로 구축된 대규모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재정비하고 대외적으로 다시끔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외 활동에는 천운도 따랐다. 측천무후 치세부터 예종 대에 이르기까지 돌궐의 가한으로써 군림하며 돌궐 제2제국을 전성기에 올려놓고 하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묵철가한(카파간 카간)이 무척이나 허무한 죽음[15]을 당함으로써(716년) 돌궐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발예고ㆍ회흘ㆍ동라ㆍ습ㆍ복고 등 돌궐에 복속되었던 5개 부족이 한꺼번에 귀부해오면서 북방국경선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후 대처에서 미숙함을 보이면서 뒤를 이은 비가가한(빌게 카간)-궐특근(퀼 테긴)에 의해 다시 돌궐은 상당한 세력을 회복하지만 묵철의 전성기와 같은 압도적인 위용은 보여주지 못하게 되면서 현종은 상당히 여유있게 돌궐에 대응할 수 있었다. 물론 개원지치 시절엔 그래도 돌궐이 여전히 힘을 내고 있던 시기이기에 기본적으로는 돌궐 수하 부족들을 귀부시키고 돌궐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17] 

 

이러한 왠지 운 좋은(...) 전개는 토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시기의 토번은 매우 강성했으며, 측천무후 즉위 초 가르친링은 당나라에 안서 사군 우리에게 넘기고 서돌궐 반 잘라서 나눠 먹는 거 어떠심? 이라고 제안할 정도로[18]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700년 가르친링이 토번 내부의 정변으로 인해 숙청 당하고, 이후 토번은 정치적 혼란에 의해 약화되었다. 그래도 개원 초기(710년대) 토번은 상당히 강성하였던 데다 경운 2년(예종 시기. 710년) 토번으로 시집간 금성 공주[19]의 탁목읍으로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 지역을 그냥 줘 버리는[20] 삽질을 한 결과 다수의 기병을 충원하는 데 성공한 토번군이 714년 대규모로 침공해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나[21], 군제 재정비를 마무리지은 당은 점차 토번의 침공을 막아내고 밀어붙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729년 안서-하서-농우 지역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이었던 석보성을 삭방 절도사 이의[22]가 점령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인 토번은 730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을 요청했다.

이후 737년 다시 토번과 전쟁이 발발하고 석보성을 741년에 다시 빼앗겼지만, 당은 또다른른 요충지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하여 토번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였다

거란족 또한 마찬가지로, 현종은 이이제이를 적절히 걸어 거란을 분열시키고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발해를 상대로는 실패를 맛보아, 등주를 공격당하고 반격에 나섰으나 이역시 실패해 버렸다. 

 

이시기 당은 모병제로 유지하는 대규모의 군진과, 이를 지역별로 엮어서 통솔하는 절도사직을 신설하였고 천보 연간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절도사직 10개가 설치되었다. 736년에 그 유명한 이임보가 재상의 일원이 되어 장구령[23]을 몰아내 버리면서 불길한 징조가 감돈다. 그리고 737년, 현종은 황태자 이영, 악왕 이요, 광왕 이거를 사사시키고 738년 충왕 이여를 황태자로 세워 태자를 교체했다.

 

3.2. 암군으로서

그러나 이런 태평성세가 계속되며 재위 중반을 넘어가자 황제도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명재상들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한다. 즉위 초기의 현종은 상당히 검소한 인물이었지만, 이 시기 즈음부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보통 기점으로 잡는 건 741년에 연호를 개원에서 천보(天寶)로 바꾼 이후로, 이때문에 현종 후반의 치세를 개원성세에 대비하여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외 정책에서는 유명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무장 고선지가 서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일시적으로 영토가 크게 넓어졌고 재정도 나아졌으나, 이슬람 세력의 등장, 이들과 충돌한 천보 10재[24] (751년)에 일어난 탈라스 전투 이후로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25]

내치 측면에서는 고종 이후 측천무후의 치세를 거치면서 몰락했던 관롱 귀족세력이 유명한 간신 이임보를 필두로 내세워 다시 정국을 장악했으며, 개원의 치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빈천한 가문 출신의 과거제로 입문한 관료들은 세력을 상실하고 밀려나게 되었다. 이는 752년 이임보가 사망한 이후 총애하던 후궁 무혜비 사후 맞아들인 양귀비가 등장하여 양씨 일가의 전횡으로 국정의 문란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에 이임보는 장성 안쪽의 내지 절도사직을 문신이 아닌 무신이 담당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막았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지방 절도사들의 세력이 급성장한 탓에 결국 이임보 사후 절도사직을 셋이나 역임하던 안녹산이 755년 안록산은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까지 들이쳤고, 현종은 사천을 향해 피난가기에 이르렀다. 이임보가 권력을 잡은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피난길에 이게 다 양귀비와 양국충 때문이라고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들고 일어나서, 양국충은 죽고 양귀비는 병사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귀비가 죽자 일단 사태는 수습되어 무사히 피난갈 수 있었지만 현종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사천에 피난 가 있는 동안에 다른 방면으로 피난을 보내 분조를 이끌고 있던 황태자가 병사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숙종이 되었다. 자칫하면 황실의 분란이 일어날 위기였지만, 현종에게도 공연히 고집을 부렸다가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파악할 총기는 아직 남아 있었는지, 양귀비의 죽음으로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 정식으로 양위를 인정하고 사천에서 순순히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4. 퇴위 후

이후 각지에서 반란군을 토벌하려는 세력과 숙종의 반격으로 장안을 탈환하여 757년 장안에 돌아와 은거했으며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762년 78세로 죽었다. 늙은 황제는 죽는 순간까지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죽었다..고 하는데, 안사의 난 진행 과정을 보면 별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것 같지 않은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장안 탈환 이후 안록산에게 붙었던 대신들 처벌 내용을 보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현종에게 숙종이 제발 좀 봐달라고 싹싹 비는 내용이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물론 안사의 난 때문에 양귀비가 죽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런 강력한 현종의 영향력에 두려움을 품은 숙종 옹위파가 두 황제 사이를 갈라놓아 결국 현종의 최측근인 고력사를 비롯, 여러 측근들이 귀양가고 그 자신도 말년에는 흥경궁에서 태극궁으로 거처가 옮겨져 유폐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가 죽었다. 그리고, 현종 사후 13일 뒤에 아들 숙종도 죽어 당의 정국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는 나라의 쇠퇴로 이어지게 된다.

 

5. 평가

“그 나라의 바로 전 임금인 당 명황만 하더라도 양귀비란 계집에게 미쳐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탓에 필경 안녹산의 난을 빚어 내어 오랑캐의 말굽 아래 그네들의 자랑하는 장안이 쑥밭을 이루고 천자란 빈 이름 뿐, 촉나라란 두메 속에 오륙 년을 갇히어 있지 않았는가.” 

현진건, 「무영탑」中


개원성세라는 전성기를 이끌었으면서 나라의 쇠퇴까지도 초래한 군주라서 평가가 여러 가지로 엇갈리곤 한다. 역시 인생은 말년까지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현한 임금.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거의 그를 상징하는 요소이며 그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거리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현종이 양귀비와 놀아나다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가인데, 이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도덕적 역사관이기도 하지만, 사실과도 좀 다르다. 후기의 현종이 암군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은 잘 따져보면 정치적인 영역에 가깝다. 바닥까지 몰락했던 관롱 귀족 집단이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여 국정을 전횡하는 것을 다름 아닌 그가 방관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 개혁도 몇차례 시도했지만 이에 반하는 귀족들이 정국을 장악했는데 그게 과연 먹히겠는가. 이런 상태에서 자신에게 간언하는 과거제 출신 관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현종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변화들을 학자들이 상징적으로 평가한 것이 '양귀비와 놀아나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임보 사후 양국충이 집권하면서 이들 관롱 귀족 세력은 다시 힘을 크게 상실한다. 양국충은 가문이 빈천한 과거 급제자 출신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아 이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과거 출신 관료들은 외척인 양국충의 지원으로 기용되었다는 게 약점이 되어 양씨 가문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개원지치 즈음에 군진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절도사 제도도 문제가 심각했다. 막대한 수의 직업 군인을 지방의 군사 지휘자가 단독으로 통솔하여 군벌이 되기 쉬운 태생적 단점을 가진 절도사제는 그렇기에 엄중한 통제가 필요한 제도였으나, 천보 시대부터 관리가 극도로 소흘해진다. 대표적인 안록산의 경우 평로 절도사로 14년, 범양 절도사로 12년, 하동 절도사로 5년을 재임했고, 이들 셋을 겸임하는 상태로 있었는데, 절도사의 원래 정해진 임기가 2년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건 말 그대로 관리를 손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안록산이 통제하던 병력은 지방 절도사들이 관리하던 총 병력인 48만 6,900명 중 37.8%인 18만 3,900명, 여기에 수만명에 달하는 사병 집단까지 확보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통제 불능의 세력이 된 것. 이걸 방관한 말년의 현종이 과연 암군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결국 이런 거대한 병력을 통제하고 있던 안록산이 반기를 들면서 말 그대로 대책이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결국 당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그 책임을 현종과 양귀비라는, 정국 혼란의 상징적이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이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6. 기타

한국의 성씨인 인천 이씨가 이 사람과 연관이 있다.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6대조 할아버지인 허기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당에 왔다가, 안사의 난 당시 피난가는 현종을 따라가게 됐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 현종이 그에게 이씨 성을 줬다고 한다.

황자였을 때 장안성 동쪽 춘명문 부근에 있던 융경방(隆慶坊)에 저택이 있었는데, 황제로 즉위한 후 방의 이름을 흥경방(興慶坊)으로 고치고 여러 차례의 공사 끝에 방 전체를 흥경궁(興慶宮)이라는 이름의 궁궐로 만들었다. 732년에는 장안성 북쪽의 대명궁과 남쪽의 곡강지 인근에 있던 이궁인 부용원 및 그 중간에 있는 흥경궁을 연결하는 협성(夾城)을 장안성 동쪽 성벽에 잇댄 이중 성벽으로 완성해 황제 전용 통로로 사용했다. 현종 때의 특기할 사항 중 하나는 천보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친 것. 즉 천보 3년 이후부터는 천보 3재, 4재... 이런 식으로 써야만 했다는 뜻. 그래도 지엄한 천자의 명령인지라 당나라 전역은 물론 이웃나라 신라에서도 천보 ~재라고 표기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천보 11재(752년)라고 적힌 습자용 목간이 있다. #

 

표기가 '재' 에서 '년' 으로 회복된 건 현종의 아들 숙종 때인 건원 원년 2월로, 그 동안 천보(天寶), 지덕(至德), 건원(乾元)의 3개 연호가 20년 이상 사용되었다[26]. 78세까지 장수했기에, 차기 황제가 될 아들손자증손고손을 생전에 모두 봤다. 현종의 고손인 순종이 태어난 해가 761년, 바로 현종이 붕어하기 1년 전. 등극하기 전에는 당나라 격구 대표 선수였다고 한다.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앙아시아 소그드인[27]으로 추정되는 조야나희와의 사이에서 혼혈 수안 공주를 두었다. 별개로 총애했던 양귀비와 안록산이 비만으로 알려져서 뚱보 취향의 황제라고 불린다.(...)

정이 많은 황제로 불리곤 한다. 중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후궁을 들이고 이들을 성욕 처리 또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는 적절치는 않았다 해도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특히 양귀비 이전에 총애했던 매비 강씨와의 눈물나는 일화는 현종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1] 남군 16위군과 북군 우림군 및 만기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 이융기의 생모인 덕비 두씨가 무측천을 저주했다는 죄로 사사당했다.[3] 독살 건은 현종이 쿠데타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4] 무삼사 사후에도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씨 가문은 위씨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융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태평공주까지 정변에 동참한 걸 보면 무씨 가문과 측천무후의 자식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 실제로 무씨 가문의 전횡은 말년의 측천무후의 심기를 어지럽힌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5] 형인 이성기와 신왕 이성의는 각각 근면성실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황제에 오른 뒤에도 현종과의 우애가 지극했다고 한다. 즉위하자마자 식사와 생활은 물론이고, 기다란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형제들과 같이 잠을 잤을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말 그대로 '그림자 형제'로, 당태종은 같은 뿌리를 두고 엮어 자라는 대나무와 같다고 하여 '죽의(竹義)'라고 그 우애를 정의하기도 했다. 특히 이성기는 개원 29년, 재위 30년만에 숨을 거두자 고력사에게 시를 짓게 할 정도로 애도했다고. 이성기는 피리에, 동생 이융범은 비파에 능했다고 한다.[6] 동생 이융범과 설왕 이융업은 태평공주 숙청에 동참한 즉위 공신급이었으며, 이융범은 선비와 예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융업은 개원 13년 처형인 위빈과 황보순이 당현종 중병 중 길흉을 논하다가 발각 되어 위빈은 몽둥이로 맞아 죽고(...), 황보순은 좌천되었다. 물론 우애를 깨진 않은 정도. 당 현종은 이융업을 손수 위로하며 "내가 만약 형제를 시기하고 막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천지신명이 벌을 내릴 것"이라고 다짐했고, 이후로도 이융업이 아프자 당 현종은 손수 간호를 하다가 촛불이 바람에 날려 수염을 태워먹은 적이 있는데, "아우가 낫는다면 수염이 문제냐"면서 대범하게 넘겼다고 한다. 오오.[7] 균전제가 붕괴하여 율령제도 변화했다.[8] 약 5288만 명으로 추정.[9] 약 4600만 명으로 추정.[10] 참고로, 이 순서는 재상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시대 순이다.(...)[11] 요숭은 제한이 "공은 당시의 문제를 구해낼 수 있는 재상이다."라고 하니까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을 어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무진장 자랑스러워했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이란 뜻의 '구시지상'[12] 이때 현종의 대답은 전형적인 명군의 발언이다. "짐은 야위었으나 천하의 백성들은 반드시 살이 쪘을 것이다. 내가 한휴를 기용한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일 따름이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이 발언이 나온건 개원 21년(733). [13] 단, 뇌물을 밝히는 게 심해서 우문융은 재상직은 올랐으나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다.[14] 당은 수도를 장안에 잡고도 자주 낙양으로 정부가 움직이곤 했는데, 이는 관중 지역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것으로 '축량천자'(逐糧天子)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15] 신당서에 따르면 홀로 있을 때 자장[16] 학령전과 우연히 만나 참수당했다고 하고, 통감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발예고를 완파하고 승리감에 취해 경비병 없이 홀로 돌아가다가 발예고의 패잔병 일부와 우연히 조우, 공격받아 사망하고 그 수급이 자장 학령전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정말 이것이 측천무후와 대등한 위치에 서서 하북을 총공깽으로 몰아넣으며 유목 민족 전체를 아우르던 위대한 가한의 죽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무하다.[16] 군진에 소속된 장교 중 소장급으로, 요즘으로 따지면 잘해야 중대장ㆍ대대장쯤 되는 지위[17] 비가가 734년 독살당하면서 돌궐 제2제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18] 이 제안은 당시 조정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19] 이렇게 정략적인 이유로 외국에 시집보내는 공주를, 중국에서는 화번공주라 불렀다.[20] 이 건의는 토번의 뇌물을 먹은 양주 도독 양구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21] 이에 상당히 다혈질이던 현종은 기존의 농우 일대의 병력에 더해 병력 10만과 군마 4만필을 추가로 징발하고 스스로 토번으로 친정하려는 의도까지 내비첬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친정은 그만뒀다.[22] 황족이지만 현종의 형제는 아니었다.[23] 한 고조를 보좌했던 장량의 후손이다[24] 당 현종 천보(天寶)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쳤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결론적으로 당 숙종의 건원(乾元) 원년부터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25] 참고로 탈라스 전투로 인해 제지술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까지 전해졌고 결과적으로 유럽은 큰 변화를 겪었다. 자세한 사항은 탈라스 전투 항목 참조.[26] 다만 이전 버전에서는 載라는 표기를 '괴악하다', '난리를 쳤다' 라고 단정하며 안녹산의 난까지 연결시켰었으나, 그건 지나친 표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조별로 특정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 문자가 제각기 달랐으며(가령 학교를 가리키는 글자를 예로 들면 하나라에서는 校, 은나라에서는 序, 주나라에서는 庠를 사용했다), 오늘날처럼 年이라는 글자가 '한 해' 를 가리키게 된 것은 주나라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반면 載는 요순시대에 '한 해' 를 가리키는 글자로 쓰였던 것으로, 어쩌면 요순 시대를 재현하겠다는 의지에서 이런 조치를 내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건 상관없는 백성들이야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상관없는 백성들' 중에 문자 생활을 했던 사람이 얼마나 되려고?[27] 이란계 백인 민족으로 상업에 능했다고 한다.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소수 민족인 야그노브인이 이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자료: 당현종, 나무위키)

 

 

 

5. 당현종시 양귀비와 신라 경덕왕시 왕후들

 

당현종(후기 737-756)시기의 양귀비 등장

 

당현종(융기, 712-737, 737-756 (양귀비) 재위)

 

713년 고모 태평공주 일당 제거

 

- 양귀비 (생몰 719-756)

 

개요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2]라는 직함이 붙은 것이다.[3] 그러니까 귀비 양씨. 정사에서는 양귀비의 본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야사 <명황잡록(明皇雜錄)>에서는 양귀비의 아명이 옥환(玉環)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에 양옥환(楊玉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4]이며 용주(容州)[5]에서 출생했다. 17살 때 현종의 제18황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하였으며, 27살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6]로 책립되었다. 이게 막장이라면 막장인데, 왜냐하면 무혜비의 아들이 수왕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총비였던 시어머니가 죽자 며느리가 그 자리를 계승한 꼴. 참고로 전남편 수왕 이모는 천보 4년(745년) 경에 위소훈(韋昭訓)의 셋째 딸인 위(韋)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였고 전처인 양씨와의 사이에서는 두지 못했던 자녀를 후처인 그녀나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많이[7] 두게 된다.


다년 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양귀비는 물론 자매와 친족에게까지 현종이 후대하니, 이런 상황을 백거이가 쓴 장한가에 묘사했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 3천 미녀가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3천 명분 총애가 한 사람에 내리네

遂令天下父母心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네


양귀비의 자매가 누린 부귀영화로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양귀비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8])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당시 양귀비의 옷을 만드는 전문인력만 7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 리가 없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게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도 죽음을 강요했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중국 4대 미인,[9] 또는 5대 미인의 한 명으로 정사(正史)에선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적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소리다. 요즘 같은 시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


옛날 벽화나 그림을 보면 미인상은 통통하거나 육덕지게 살집이 있는 모습이 미인상이었다. 왜냐면 당시 음식이 귀해서 살이 찔 수 있는 사람들은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통통할수록 미인으로 보았다.[10] 현대는 지방이 거의 없는 마른 체형이 미의 기준이지만, 매비가 양귀비를 욕한 것은 양귀비에 대한 질투에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당나라는 당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주해 살던, 지금으로 치면 미국 같은 다문화 국가였기 때문에 유럽이나 중동의 영향을 받아 육덕 체형의 미인이 인기가 있었다.[11]

양귀비는 가무(歌舞)에도 뛰어나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양귀비의 별명인 해어화(解語花)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라는 의미로, 동시대의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장한가(長恨歌)》를 노래하여 양귀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정작 양귀비 자신은 정치나 권력 투쟁에는 관심이 없이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한 편이었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오빠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록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켜 아기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훗날 안록산이 간신(양국충)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고 양귀비가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록산이 사랑에 빠져 안록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인기인이라 양귀비, 양귀비비사, 대당부용원 등 양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여러 편 만들어졌다.

야사지만 양귀비는 겨드랑이 냄새(암내)가 심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시종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닐 정도라, 양귀비는 항상 향이 나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 현종은 고질적인 축농증이 있어 양귀비의 암내를 몰랐다고 한다.

마약에 쓰이는 꽃인 양귀비는 당연히 여기서 따온 이름인데, 마치 마약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것처럼 양귀비에게 빠져서 나라를 피폐시킨 당 현종의 모습이 매우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12]

(자료 : 양귀비, 나무위키)

 

효성왕 (737-742 재위) : 739 왕비 박씨 출궁, 739 이찬 김순원(수로부인의 남편)의 딸 혜명: 왕비

740년 후궁 영씨 편애, (왕비족의)후궁모살, 후궁 부 영종의 반란

 

효성왕(孝成王, ? ~ 742년, 재위: 737년 ~ 742년)은 신라의 제34대 이다. 성은 (金)이고,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고 경덕왕의 형이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계비(繼妃)인 소덕왕후(炤德王后)이고, 비는 739년 맞이한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혜명(惠明)이다.

 

생애

738년 2월, 선대의 성덕왕을 조문한 당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당나라는<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新羅王)>에 책봉 되었다. 당나라와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여, 738년 4월에는 「도덕경」을 하사 받았다.

 

739년 정월에 이찬 의충(義忠)이 죽자 이찬 신충(信忠)으로 중시를 삼았다. 2월에 동모제(同母弟) 헌영(後 경덕왕)을 파진찬으로 삼고, 3월엔 김순원의 딸 혜명을 왕비로 들였다. 5월에 헌영을 태자로 삼았다.

 

740년 8월, 후궁(後宮)의 아버지인 파진찬 영종(永宗)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영종을 죽였다. 효성왕이 후궁을 총애하자, 왕비 족당이 이를 시기하여 후궁을 모살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영종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재위 6년 742년 5월에 사망하여, 시호는 효성왕으로 추봉하였다.

 

가계

  • 부왕 : 성덕왕(聖德王, 691~737 재위: 702~737)
  • 모후 : 소덕왕후 김씨(炤德王后 金氏) -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19년(720년) 3월에 납비(納妃). 23년(724년)에 사망.
  • 후궁 : 이름 미상
    • 서자 : 수충(守忠) - 생졸 미상
    • 왕후 : 왕후 박씨(王后 朴氏) - 739 출궁을 당함
    • 왕후 : 혜명부인 김씨(惠明夫人 金氏) -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 후궁 : 영씨(英氏) - 파진찬 영종(英宗)의 딸

(자료 : 효성왕, 위키백과)

 

경덕왕 (742-765 재위) : 삼모부인(=사량부인) (수로부인의 딸) 및 후궁, 이찬 김순정의 딸

사량부인 폐비 (이유 : 아들 못낳는다)

만월부인 (음기 가득?)

 

- 경덕왕 (742-765)

 

경덕왕(景德王, ? ~ 765년, 재위: 742년 ~ 765년)은 신라의 제35대 왕이다. 성은 (金)이고, 휘는 헌영(憲英). 효성왕의 동복 동생이며, 아버지는 제 33대 왕 성덕왕. 어머니는 이찬 순원(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왕비는 서불감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부인(満月夫人, 경수왕후(景垂王后)). 효성왕에게 아들 없었기 때문에 742년 5월에 효성왕의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

생애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으로 효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742년 10월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1] 

 

753년 8월에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2] 

 

경덕왕 때는 신라가 극성기에 달한 때로 제반 제도·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는 한편,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행정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대개는 한자식으로 개혁하고,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 신라의 행정 구역 참조) .[3][4]

 

경덕왕은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하였으며, 굴불사(堀佛寺)를 비롯하여 영흥(永興)·원연(元延)·불국(佛國) 등의 절을 세웠다. 그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의 소리는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인 동시에 국보(29호)이며, 후에는 봉덕사 종으로 불렀다. 경덕왕은 과도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 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경덕왕 10년(751년)에는 불국사가 완공되었으며, 757년 3월에는 녹읍이 다시 지급되었다. 

 

그리고 국학을 태학이라 고쳤다. 또한 집사부의 중시를 시중으로 고쳤다.

 

가계

  • 부왕 : 성덕왕
  • 모후 : 소덕왕후 김씨
    • 왕후 : 삼모부인 김씨 -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
    • 왕후 : 경수왕후 김씨(景守王后 金氏) 또는 (만월부인 김씨 滿月夫人 金氏) - 서불한(舒弗邯) 의충(義忠)의 딸
    • 후궁 : 순씨 - 이찬 순정의 딸

(자료 : 경덕왕, 위키백과)

 

개요

 

신라의 35대 왕.

그 동안은 명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오히려 신라 중대의 왕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왕이다. 경덕왕의 주요 정책은 한화 정책과 녹읍 부활인데, 이것이 각각 왕권 강화(한화 정책)와 귀족세력 강화(녹읍 부활)이라는 모순되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2. 생애

 

제33대 성덕왕의 삼남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34대인 효성왕의 동복 동생으로, 원래대로라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적었지만 형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태자에 책봉되고 왕위에 올랐다. 왕비로 사량부인(沙梁夫人)[3], 만월부인(滿月夫人)[4]이 있다.

나당전쟁 이후 소원해졌다가 아버지 성덕왕 대에 다시 나라와 우호 관계를 튼 이후 경덕왕 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류가 다시 크게 증가했으며, 제도·지명·관직 등을 당나라 식으로 개편하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펼치고,[5] 산업 발전에 힘써서 신라 중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 때부터 신라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그 원인은 전제 왕권 구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었다.

어쨌거나 당시 신라가 전성시대였다는 것은 "742년 10월에 일본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753년에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등 알 수 있다. 혹은 "친일본(=반당)파와 친당파와의 오랜 싸움에서 친당파가 승리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후 일본은 신라 침략 계획을 세우고 500여 척의 배를 동원하는 등의 준비를 하지만, 최종 책임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사망한 이후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일본이 침공을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발해가 동의하지 않아서였다. 발해는 대충 일본의 비위만 맞춰 주면서 신라 침공 계획에는 차일피일 미루는 식으로 회피해버렸던 것.(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참조)

 

3. 전국 지명, 관직명 한화 정책

 

경덕왕 시대에 펼쳐진 한화 정책은 말 그대로 중국화 정책이다. 757년 전국 9주의 명칭과 군현의 지명을 모두 당나라 식으로 바꾸어 한자화했는데, 한국사 최초의 지리덕후가 경덕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읍면 단위까지, 전국에 경덕왕이 건드리지 않은 지명이 드물 정도로 대대적으로 바꾸었다.[6] 또한 759년에는 중앙 관직명도 한자화한다. 집사부 중시를 시중으로, 국학을 태학으로 명칭을 바꾸는 등 꽤나 많이 바뀌었다. 

다만 모든 지명을 뜬금없이 완전히 다른 중국식 지명으로 바꿔버린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원래 고유어 지명의 음과 한자의 뜻, 어감까지 모두 고려해서 바꾸었다. 예를 들어 경덕왕이 바꾸고 지금까지 사용하는 전라남도 보성군을 보면 이전 백제 때 지명은 복홀군(伏忽郡)이었다. '복홀'은 "'보'라는 이름의 성"이란 의미의 지명을 음차한 것인데,[7] 옛 지명의 음을 살리면서도 의도적으로 '보배롭다'(寶)란 좋은 뜻의 한자를 끼워맞춰 보성군(寶城郡)으로 고쳤다.

그리고 경덕왕이 한화하기 이전 고유 지명은 한자 표기에 의미가 좋지 않은 한자를 사용하는 지명이 많았다. 예를 들면 주검 시()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바로 시체의 시 자다. 예를 들어 충북 옥천군의 옛 이름인 고시산군(古尸山郡)이나 울산광역시의 옛 이름인 우시산(于尸山) 같은 것이다. 이게 다 삼국시대 초반 한자가 막 도입되던 시절에 한자 뜻은 접어두고 단지 음차해 표기하기 위해 한국어 지명과 발음이 같은 아무 한자나 사용한 흔적인데 이런 안 좋은 의미의 한자, 혹은 강원도 인제군의 고구려 시절 지명인 저족현(猪足, 족발이란 뜻이다)처럼 한자 뜻으로 읽을 때 이상하거나 의미가 없는 한자 지명들은, 중국에 맞먹는 한문 능력을 갖춘 지식인이 늘고 이두향찰도 보급돼 사회 전반에 한자가 아주 익숙해진 신라 중대 이 때쯤부터는 그냥 놔두기 껄끄러운 것이었다.

이때 처음 시도되었던 지명 한화 정책은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현재까지 내려오는 한자어 지명의 기초가 되었고, 21세기 현대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전국 각지의 지명들은 경덕왕 시대에 지어진 이름 그대로거나, 경덕왕 버전에서 도중에 약간 바꾼 것이 상당히 많다. 당장 나무위키에서 xx시, yy군 문서 아무거나 들어가서 역사란 보면 지명 변천에서 경덕왕은 반드시 언급되는 수준이다.

간혹 경덕왕의 지명 한화 정책 때문에 고유 지명이 잊혀지고 중국과 비슷해져 버렸다고 경덕왕을 까는 경우도 있지만,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덕왕이 고치기 이전의 고유어 음차 지명들도 '전부' 기록에 다 남아있다. 즉 경덕왕이 고쳐서 고대의 고유 지명이 잊혀버렸다는 것은 오해다. 단지 후손들이 경덕왕 버전 지명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거지, 그 전 옛 지명들도 경덕왕이 남겨놓은 기록을 통해, 당시 신라가 지배하고 있던 범위 안에서 시군 단위로는 모두 고증 가능하다.

그리고 경덕왕이 한화 정책을 하지 않았더라도 고려조선시대 1천년 도중에 결국 한화정책은 진행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한화정책은 엄밀히 따지면 경덕왕 시대에 혼자서 바로 해치우고 그게 지금까지 쭉 계속되는 건 아니다. 당장 경덕왕 다음 혜공왕 때 많은 지명이 원상복귀되기도 했었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국가답게 신라는 고유어로 된 왕호나 관직명, 관등 체계(갈문왕매금파진찬 등)와 같은 토착적인 문화를 하대까지도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에 반해 새롭게 새 국가를 건설해야 했던 고려는 토착문화 대신 당대의 최신 시스템이었던 당제(唐制)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운용해야 했고, 따라서 경덕왕대에 처음 시도된 한화 정책을 고려 시대부터 다시 되살려 본격적으로 시행했고 조선 시대까지 쭉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금까지 전해진 관직명만 살펴봐도 삼국시대신라와 고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8]

이 한화정책은 녹봉제와 더불어 왕권 강화를 위해 시작된 경덕왕의 야심찬 정책이었지만, 결국 지명과 제도, 관직이 바뀌어도 귀족 세력의 약화는 뚜렷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위 내내 버라이어티한 자연재해가 일어났고,[9] 이를 핑계삼아 귀족들이 한화 정책을 추진하는 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757년, 녹읍제가 부활한다. 

4. 진골 귀족의 압박에 끌려다닌 왕?

 

흔히 경덕왕은 녹읍 부활을 들어 귀족들 세력 견제에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고, 이는 최신 학설을 싣는데 가장 보수적인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이나 교과서를 따르는 각종 시험에서는 그 정도로 간단히 가르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반박하는 설도 많이 제기되고 있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4.1. 녹읍의 부활

 

일반적으로 이는 경덕왕이 진골 귀족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 부활시킨 것으로 이해되지만, 정작 《삼국사기》 경덕왕조의 녹읍 부활 이후를 보면 경덕왕은 이후에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정치를 펼치고 있다. 지방 행정 한화 정책이나 관직 한화 정책은 모두 녹읍제를 부활시킨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녹읍 부활은 757년 3월이고 지방 행정 한화 개편은 그 해 12월부터 시작했으며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편한 것은 759년 정월부터다. 만약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수행된 것이라면, 경덕왕이 이런 정책들을 펼칠 수 있었을 리 없다. 오히려 이는 경덕왕의 왕권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경덕왕 대에는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고, 그 이전 왕들 대부터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국가 재정이 말이 아닌 것은 당연지사. 신문왕 대에 제정된 녹봉제가 확실히 진골 귀족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녹봉제는 국가에서 일일이 그 지급에 신경을 써야 하니 그 관리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족한 국가 재정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경덕왕도 귀족들이 자기 몫 땅을 알아서 관리하니까 유지 비용이 덜 드는 녹읍제를 시행한 것이다.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에게 이익인 것은, 경덕왕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후로도 경덕왕이 자신의 정책을 계속 시행했던 것으로 보아 경덕왕의 왕권은 충분히 강력했고, 이로 볼때 녹읍제를 실시해도 왕권이 강력하므로 자신이 관리를 잘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다가 상술된 국가 재정 문제까지 합쳐져서 녹읍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758년 2월에 경덕왕은 "중앙 관리나 지방관이 휴가를 청한 것이 만 60일이 되는 사람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참고로 동시대 당나라는 관리가 1년을 기준으로 약 100일까지 휴가를 쓸 수 있었고, 후대의 고려 시대에는 관리가 받았던 공식적인 휴가일만 60일이었으며, 개인이 임의로 쉴 수 있는 날까지 합치면 1년에 100일에서 120일 정도였다. 즉 밑에서 일하는 관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가혹하고 힘든 조치였다.

동국대학교 윤선태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녹읍제와 관련된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데, 당나라는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급여가 반 정도로 축소 지급되었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공식 휴가기간을 빠듯할 정도로 줄여서, 녹읍을 포함한 보수를 줄여 국가 재정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라고 해석하고 있다. 

오늘날 직장 생활로 비유하자면, 회사가 허용하는 휴가 일자가 절반이나 줄었으며, 휴가 신청 횟수가 줄어든 허용 일자를 넘어가면 자동으로 회사에서 잘라버린(…) 거라고 볼 수 있는 셈. 이런 조치에 귀족이나 관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 것은 당연했겠지만, 이런 불만을 안고도 경덕왕은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 만큼 왕권이 강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문무 관료전 체제를 붕괴시켜 오히려 문무 관료전을 통한 무인들에 대한 토지 지급이 끊긴 덕택에 이후 혜공왕 때는 규모가 큰 반란이 일어났는데, 알다시피 문무 관료전은 무인들에게도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을 뺏긴 것에 불만을 품어 96각간의 난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왕권의 강화가 되려 무예에 능한 귀족이나 관리들의 불만만 폭발시킨 셈이 된다. 흔히 통일신라를 문치주의가 가장 강했던 시기라고 하는 것도 실은 경덕왕이 만들고 원성왕이 이것에 대해 절정을 끌어올렸기에 그러했다(...) 이로부터 반란은 거듭되는데 이 반란을 완전히 해결한 사람들이 신무왕이 집권하기 전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침내 무장 세력이었던 장보고와 그를 돕던 신무왕이 이것을 일시적으로 종식시키는데 애석하게도 신무왕은 단군 이래 재위가 가장 짦은 왕이 되었다(...) 신무왕은 본시 무장 세력들을 돕던 왕이었었고 문무왕 이후 신무라는 무의 시호가 붙은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4.2. 귀족들의 압박?

 

그리고 상대등 김사인이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도 귀족들이 경덕왕을 압박한 사례로 거론되는데, 사실 김사인은 태종 무열왕의 3남인 김문왕의 증손자로 성덕왕 때 이찬을 지냈으며, 김사인의 아들인 김유정 역시 경덕왕에게 중용되며 중시를 지냈다. 즉 김사인은 왕을 반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왕의 친위 세력이다. 이 날의 기록을 보면,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자 왕이 씹은 게 아니라 가납(간언을 받아들임)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곧 경덕왕이 비판을 수용하는 유교적 군주상을 지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고 이듬해 병으로 물러났다는 것도, 그가 성덕왕 때부터 활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연로해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상대등 김신충과 시중 김옹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물러났다는 것 역시 잘못된 설명이다. 김신충은 앞서 언급된 김사인의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며 선왕 효성왕의 측근이었던 인물이고 김옹의 경우는 경덕왕의 첫 장인인 김순정의 손자다. 본래 상대등은 시중과 달리 매우 길게 재임할 수 있었고 종신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신충은 6년째 재임 중이었고 김옹은 3년째 재임 중이었다. 그런 관직이 교체된 것은, 오히려 왕이 이런 관직들까지 교체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그 후임으로 김양상을 시중으로 임명한 것도 이상하게 볼 것 없는게, 김양상이 내물왕계의 인물이라지만 김양상의 외할아버지가 성덕왕이다. 그래서 경덕왕에게 김양상은 조카가 된다. 이전에 김양상은 제6위 아찬이었는데 신라에서 시중은 제5위 대아찬 이상부터 임명될 수 있었던 관직이다. 김양상을 시중에 임명한 것도 경덕왕의 정치적 안배.

이로 볼 때 경덕왕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으며 견제에 실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골 귀족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책을 그대로 수행해 성사시킨 것을 보면 오히려 그는 통일신라의 국왕 중 신문왕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국왕이라고 할 수 있다. 

5. 경덕왕 대의 사회와 문화

 

아버지 성덕왕 대에 건설한 물시계(漏刻) 관리 부서 누각전에 천문학자를 추가 배치하고, 당시의 대학인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배치하는 등 학문적 진흥도 이뤄졌다.

국력이 강대했고 이 때 실질적으로 신라는 옛 고구려 남부 핵심 영토였던 패서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패서는 나당전쟁 승리와 성덕왕 시대에 당나라에 영유권을 인정받은 뒤 느슨한 형태로 옛 고구려 계통의 토호들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있었는데, 경덕왕 시대에 들어 여러 성을 새로 쌓고 주민을 이주시켜 많은 군현을 설치한다. 

당나라 대종 황제에게 만불산을 보내는 등 외교 관계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잘 유지되었던 시대였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는 의전 문제로 여전히 투닥투닥했지만 크게 충돌이 있진 않았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그의 치세는 차츰차츰 신라 전성기의 마지막 시대이자 쇠망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황금기의 마지막이란 점에서, 훗날 청나라의 건륭제와 비슷한 위치인지도...

한편 성덕대왕신종의 건립이 진행된 시기이기도 했으나, 이는 계속 실패했고, 아들 혜공왕 재위 때인 771년 완성되었다(…).[10] 하지만 그 외에도 754년 황룡사 종(皇龍寺鐘)을 주조하고, 석굴암(石窟庵)의 축조를 비롯하여 불국사(佛國寺) ·굴불사(掘佛寺)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의 수축과 탑 ·불상의 제작에 힘쓰는 등 불교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편 경덕왕은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랑들을 지도하던 승려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했는데 이 때 향가가 발전하기도 했다. 월명사충담사가 이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예이다.

6. 후계자

 

사량부인 김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폐비[11]하고 만월부인 김씨를 새로 들인다. 만월부인과의 사이에서 다음 왕인 혜공왕을 낳는데,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의 탄생에 대한 설화가 전해진다. 표훈대덕 문서도 참조. 여하간 아들을 너무 늦게 낳은 탓에 후계자인 혜공왕은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쇠퇴의 원인 제공자.

이 설화에 의하면 경덕왕의 음경 크기가 8촌(약 20cm ~ 21cm)[12]이었다고 한다.(...) [13] 결국 아들을 못 보는 건 부인 탓으로 돌아갔고 그래서 사량부인도 폐비됐던 것인데, 만월부인은 누구보다도 음기가 가득한 기운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 양기가 넘치는(?) 경덕왕과 적격이었다. 그리고 아들을 보기 위해서 표훈대덕 스님을 불러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께서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했는데 상제한테 갔다온 표훈대덕이 아뢰기를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경덕왕이 다시 표훈대덕에게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부탁하자, 표훈대덕이 하늘을 갔다와서 상제가 바꿀 순 있지만 그렇게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경덕왕은 비록 나라가 위태로워져도 아들을 얻어 왕위를 계승하게 하겠다고 말했으며, 이후 만월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때문에 혜공왕은 원래 딸이었던 것을 아들로 바꾼 운명이기 때문에 여자아이 놀이를 좋아하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혜공왕이 젊은 나이에 피살되면서 그의 대는 끊기고 무열왕 계통은 왕위에서 멀어지게 되며, 신라도 수백년에 걸쳐 쇠락기로 접어든다.

752년 윤 3월 22일, 신라 왕자 대아찬(大阿飡) 김태렴과 공조사(貢調使) 김훤(金暄), 왕자를 호송하는 김필언(金弼言) 등 700여 인이 7척의 배를 타고 와서 하카타[14]에 입항했다.
6월 14일 신라 왕자 김태렴이 신라 국왕의 사명을 받들어 인사를 올리고 예물을 올렸다.

 

-《속일본기》


일본 기록 《속일본기》에는 신라 왕자라고 자칭하고 코켄 덴노 시대 일본을 방문한 김태렴(金泰廉)이 등장하는데, 국내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진짜 경덕왕의 아들인지 사기꾼인지는 알 수가 없다. 김태렴을 사기꾼이라고 보는 근거는 일본에 무리를 끌고 가서는 왕자를 자칭하며 "신라가 일본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식으로 현혹하고 많은 물건을 팔아치웠지만, 정작 일본에서 그 다음 해에 신라에 보낸 왜국 사신은 무례하게 군다고 신라에서 쫓겨나버렸다. 김태렴이 저자세로 나간 것과는 정반대.

그리고 김태렴이 신라의 왕자라고 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752년 당시 경덕왕에겐 왕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왕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걸 넘어서, 삼국유사를 보면 만월부인과 표훈대덕 이야기 등 왕자를 얻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758년에야 겨우 훗날 혜공왕이 되는 왕자 김건운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 752~753년 당시에 경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을 리가 없다.

또 당시 경덕왕의 나이는 752년 기준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30대 초반이었다. 왜냐하면 경덕왕의 어머니는 소덕왕후 김씨인데 그녀가 성덕왕에게 시집을 온 때는 720년이었다. 그러므로 효성왕과 경덕왕은 모두 720년 이후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소덕왕후는 724년에 사망했으므로 김태렴이 일본을 방문했던 752년에는 경덕왕의 나이는 29~32세였다. 겨우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경덕왕에게 외국에 입조시킬 만큼 장성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7.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경덕왕 본기
一年夏五月 경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일본국의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다
二年春三月 가 한번에 송아지 3마리를 낳다
二年春三月 당나라에서 효성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하다
二年春三月 당에서 경덕왕을 책봉하고 전왕의 관작을 잇게 하다
二年春三月 당 황제가 직접 풀이한 효경을 1부 주다
二年夏四月 김의충을 딸을 왕비로 삼다
二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二月 왕의 아우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二年冬十二月 당이 신라 사신에게 관직과 관복을 주다
三年春一月 유정을 중시로 삼다
三年春閏二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三年夏四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다
三年 (744) 요사스러운 별이 나타났다가 열흘 만에 사라지다
四年春一月 김사인을 상대등으로 삼다
四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四年夏五月 날이 가물다
四年夏五月 대정을 중시로 삼다
四年秋七月 동궁을 수리하다
四年秋七月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을 설치하다
五年春二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年夏四月 죄수들을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다
五年夏四月 150명에게 승려가 되도록 허락하다
六年春一月 중시를 시중으로 고치다
六年春一月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다
六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六年春三月 진평왕에 벼락이 치다
六年 날이 가물다
六年 눈이 오지 않다
六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퍼지다
七年春一月 천구가 땅에 떨어지다
七年秋八月 태후가 영명신궁으로 거처를 옮기다
七年秋八月 정찰 1인을 두다
七年秋八月 북쪽 변경을 검찰하게 하고 14개 군현을 두다
八年春二月 폭풍이 불다
八年春三月 천문박사와 누각박사를 두다
九年春一月 시중 대정이 물러나고, 조량을 시중으로 삼다
九年春二月 어룡성에 봉어를 두다
十一年春三月 급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으로 삼다
十一年秋八月 동궁아관을 두다
十一年冬十月 창부에 사 3인을 더 두다
十二年秋八月 (753)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접견하지 않다
十二年秋八月 무진주에서 흰 을 바치다
十三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三年夏五月 성덕왕비를 세우다
十三年夏五月 우두주에서 지초를 바치다
十三年秋七月 영흥사와 원연사를 수리하다
十三年秋八月 가물고 누리가 있다
十三年秋八月 시중 조량이 물러나다
十四年 웅천주 향덕의 효행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다
十四年 망덕사 탑이 흔들리다
十四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四年秋七月 죄수를 사면하고 노약자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다
十四年秋七月 김기를 시중으로 삼다
十五年春一月 상대등 김사인의 간언을 받아들이다
十五年春一月 당현종에게 조공하니 시를 지어 주다
十五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五年夏四月 대영랑이 흰 여우를 바치니 벼슬을 주다
十六年春一月 신충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六年春三月 녹봉을 없애고 녹읍을 주다
十六年秋七月 영창궁을 다시 수리하다
十六年秋八月 조부에 사 2인을 더 두다
十六年冬十二月 9주의 이름을 고치고 군현을 소속시키다
十七年春一月 염상을 시중으로 삼다
十七年春二月 휴가가 만 60일이 된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다
十七年夏四月 의학에 뛰어난 사람을 내공봉에 임명하고, 율령 박사를 두다
十七年秋七月 왕자가 태어나다
十七年秋八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八年春一月 관직명을 고치다
十八年春二月 관직명을 고치다
十八年春三月 (759) 혜성이 3월에 나타났다가 가을에 사라지다
十九年春一月 도성 동쪽에서 북치는 소리가 들리다
十九年春一月 궁궐 안에 큰 못을 파다
十九年春一月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를 놓다
十九年夏四月 김옹을 시중으로 삼다
十九年秋七月 왕자 건운을 왕태자로 책봉하다
二十年春一月 하늘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다
二十年夏四月 (761)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一年夏五月 6개의 성을 쌓고 태수를 두다
二十一年夏五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二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二年秋七月 서울에 큰 바람이 불다
二十二年秋八月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다시 피다
二十二年秋八月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관직에서 물러나다
二十二年秋八月 이순이 경덕왕에게 간언하다
二十三年春一月 만종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양상을 시중으로 삼다
二十三年春一月 (764) 살별이 나타나고, 이 나타났다 사라지다
二十三年冬十二月十一日 많은 유성이 나타나다
二十四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四年夏五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벼슬을 주다
二十四年夏六月 (765) 유성이 별을 범하다
一年夏六月 경덕왕이 죽다
 

[1] 추측 시기는 722년 ~ 724년이다. 생모 소덕왕후가 부왕인 성덕왕과 함께 산 기간은, 720년 3월에 혼인해서 724년 12월에 사망할 때까지다. 형 효성왕이 721년 ~ 722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경덕왕은 722년 ~ 724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2] 《삼국사기》에 각주로 "옛 기록(古記)에는 765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767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 쪽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되어 있다.[3] 김순정의 딸로, 삼모부인(三毛夫人)이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사량부인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미녀 수로부인으로 추정된다.[4] 743년(경덕왕 2년)에 맞이한 후비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 경수왕후(景垂王后), 경수태후 또는 경목왕후(景穆王后)라고도 불린다.[5] 현대에 대한민국에서 쓰는 수많은 지명들이 대부분 이 때 처음 만들어졌다.[6] 고구려/백제/초기신라 때 사용한 지명을 경덕왕이 안 건드리고 그대로 놔둔 경우도 아주 드물지만 있긴 있다. 아산시 탕정, 임실군 등.[7] 이외에도 '-홀' 지명은 전국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미추홀 등[8] 발해의 경우도 나라가 한 번 망하고 새로 건국했다는 점에서 고려와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당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이로 인해 고려와 비슷한 관제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한 두 나라는 당제를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9] 대략 이상 기후나 이상 현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 해가 없는 해보다 적은 정도로, 천구성이나 혜성과 초신성, 폭풍우와 벼락, 지진, 가뭄 등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10] 아버지 성덕왕이 전제 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를 기리는 종의 주조 역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11] 다만, 사량부인을 폐한 것은 단순히 아들을 못 본 것 뿐 아니라 일본 기록에도 등장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대귀족 김순정 쪽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존재한다.[12]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24cm 정도 되지만, 옛날의 길이 단위는 오늘날 단위보다 작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13] 그런데 경덕왕이나 지증왕을 비롯한 몇몇 왕의 거대한(!) 음경 크기에 대한 기록은, 그 왕들의 권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는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남성다움이나 건장한 육체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그래서 강력한 왕권을 이룬 왕에 대해 실제 크기가 어떻든지 간에(...) 음경 크기를 과장하는 방법으로 그 왕을 추앙하는 경향이 었었다는 것이다.[14] 현재의 후쿠오카 시

(자료 : 경덕왕, 나무위키)

 

II. 기타사항을 통한 의문점

1. 장안의 서시, 동시과 신라 지증왕시의 시장제도 (동시전)

지증왕시 509에는 시사(市肆, 혹은 시전)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무역과 상인들의 거래를 단속, 통제하였다.

 

Chang’an event in Tang dynasty

The West Market (西市);

The East Market (東市)

(source : Chang’an, Wikipedia)

 

- 효소왕시 695년(재위 4년)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해 각각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관할케 했다.

 

2.인구

서라벌 (금성) (신라)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진한

한 호(戶)에 5명 정도라고 가정시 경주 한 곳에만 8~9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뜻”

(자료 : 서라벌, 나무위키)

 

장안 (당)

Around AD 750, Chang'an was called a "million people's city" in Chinese records, while modern estimates put it at around 800,000–1,000,000 within city walls.(source : Chang’an, Wikipedia)

 

3. 신라의 9주제도와 당의 절도사 제도 : 반란이 많음

용이한 통합 정책, 그러나 왕권이 약하고 군의 힘이 세지면 반란이 많음.

 

4. 신라 경덕왕시 당제도로 개편

경덕왕 때 당제도로 개편, 한자식 행정 단위 (757), 관직명 중국식 개편 (759)

무열왕시 당의 복장, 당의 연호 사용

 

5. 당의 멸망시기와 신라의 멸망 시기 유사

당 (618- 907)

신라 ( - 935)

 

6. 당의 멸망 전 혼란시기에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 있었다는 기록

신라, 후백제를 통일한 고려가 당을 통일한 것이면 신라는 당이라는 논리가 됨

 

7. 계림에서 일어난 방훈의 난 : 신라와 당의 인접성

방훈의 난(龐勛之亂)은 중국 당나라 말기 의종 때 서주 무녕군(武寧軍번진(藩鎭)의 군인인 방훈(龐勛)이 일으킨 대형 반란으로868부터 869까지 지속되었다구보의 난 다음으로 일어나서 반란이 종료된 지 7년 후에 일어난 황소의 난 이전 사이에서 발생한 대형 반란이었으며신당서》에서조차 '당나라는 황소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지만화근은 계림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평할 정도로당나라가 본격적인 패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게 만든 황소의 난의 전주곡을 마련하였다.

8. 장보고, 최치훈, 당나라 유학 국자감(?)의 예 : 당과 신라의 인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