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9. 13:27ㆍ과거의 생각
다음블로그(blog.daum.net/lainfos)에 실린 다음 글 : '고대사에서 안지역은 어디인가?' 및 '한국 고대사에서 '안(安)'지역에 대한 소고(2)'에서 필자는 '안(安)'지역이 중앙아시아 또는 그 서쪽에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제 그 구체적인 지역을 말하고자 한다.
그동안 '안'지역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안국(安國)'과 '강국(康國)'이 중앙아시아의 소국으로 표시되는 지도를 월지국의 이동을 설명하는 중국사료의 자료를 보았었다. 그리고 소그디아와 관련이 있는 안록산에서 안국과 강국이 소그디아와 관련한 지역이라는 것을 중국사료가 주장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중국 사료에서는 안세고의 안식국을 파르티마제국이라 했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기로는 장수왕의 시호에 있는 '강국(康國)'은 중앙아시아지역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흑해연안에서 더 서쪽으로 가야 맞는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이름 '안', 그리고 안장왕(안흥왕)의 이름 '안'에 걸맞는 지역은 결코 중앙아시아가 아닌 흑해지역 또는 그 서쪽 어딘가 생각하는 상황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중국의 위치를 현 중공의 위치로 주장하는 중국의 사료 왜곡 해석은 필자의 생각과 다른 것이다. 필자는 중국이 페르시아지역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바이다. 낙양과 장안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현 중공의 땅을 중국지역으로 보고 '안'지역을 추정하는 그들의 시각은, 역으로 생각하면, 중국이 페르시아지역에 있었다면 '안'지역은 중앙아시아가 아닌 그보다 더 서쪽에 있어야 그들의 논리에도 맞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및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 글을 쓰면서 '안'지역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고 펜을 들게 되었다.
'안(安)'지역은 흑해지역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은 아래에 열거한 15가지 이유에서이다.
1. 하(夏)나라의 수도 '안읍', '양성'이 '대하(大夏)'에 있었는데, 이 대하가 Dacia이며, Dacia는 흑해연안을 포함하고 있었다.
대하를 중국측은 Daxia라 한다. Daxia=>Dakia=>Dacia로 추정되며, Dacia는 발트해(북쪽), Vistula river (폴란드내 강, 서쪽), 드네프로강 (동쪽)의 넓은 지역을 포함한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흑해연안을 포함하고 있다.
"North of the Danube, Dacians occupied a larger territory than Ptolemaic Dacia, stretching between Bohemia in the west and the Dnieper cataracts in the east, and up to the Pripyat, Vistula, and Oder rivers in the north and northwest.[68] In BC 53, Julius Caesar stated that the Dacian territory was on the eastern border of the Hercynian forest.[67] According to Strabo's Geographica, written around AD 20,[69] the Getes (Geto-Dacians) bordered the Suevi who lived in the Hercynian Forest, which is somewhere in the vicinity of the river Duria, the present-day Vah (Waag).[70] Dacians lived on both sides of the Danube.[71] [72] According to Strabo, Moesians also lived on both sides of the Danube.[37] According to Agrippa,[73] Dacia was limited by the Baltic Ocean in the North and by the Vistula in the West.[74] The names of the people and settlements confirm Dacia's borders as described by Agrippa.[73][75] Dacian people also lived south of the Danube.[73]"
(source : Dacians, Wikipedia)
그렇다면 이러한 Dacia지역에 하나라 시대에 흑이로 추정되는 이들이 왔을까? 아래 자료를 보면 BC 3000 경부터 인도유럽인들(유목 전사들)이 우크라이나지역이나 러시언 초원지대에서 이지역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즉 하나라가 시작되는 BC 2000년경 훨씬 전부터 이 다키아지역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아래 인도유럽인들의 이동경로를 나타내는 지도를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vidence of proto-Thracians or proto-Dacians in the prehistoric period depends on the remains of material culture. It is generally proposed that a proto-Dacian or proto-Thracian people developed from a mixture of indigenous peoples and Indo-Europeans from the time of Proto-Indo-European expansion in the Early Bronze Age (3,300–3,000 BC)[63] when the latter, around 1500 BC, conquered the indigenous peoples.[64] The indigenous people were Danubian farmers, and the invading people of the BC 3rd millennium were Kurgan warrior-herders from the Ukrainian and Russian steppes.[65]"
(source : Dacians, Wikipedia)
그럼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필자는 이전의 글 '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에서 Dacian에 속하는 Carpi(peolple)이 낙랑이라고 추정했다. 이들은 좌식문화 (sedentary culture), 초가집에 살며, 도자기문화가 있었으며, 농업과 가축을 길렀으며, 늑대와 연관성이 있다고 했다. 종교적으로는 제정일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아래 글 참조) 즉 우리 고대사의 단군시대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키아지역이 하나라 지역이라는 추정에 무리가 없다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자료는 https://paulcgpark.blogspot.com, 'Dacian' 영문 글 참조)
"Dacian religion was considered by the classic sources as a key source of authority, suggesting to some that Dacia was a predominantly theocratic state led by priest-kings. However, the layout of the Dacian capital Sarmizegethusa indicates the possibility of co-rulership, with a separate high king and high priest.[154] Ancient sources recorded the names of several Dacian high priests (Deceneus, Comosicus and Vezina) and various orders of priests: "god-worshipers", "smoke-walkers" and "founders".[154] Both Hellenistic and Oriental influences are discernible in the religious background, alongside chthonic and solar motifs.[154]
According to Herodotus' account of the story of Zalmoxis or Zamolxis,[11] the Getae (speaking the same language as the Dacians and the Thracians, according to Strabo) believed in the immortality of the soul, and regarded death as merely a change of country. Their chief priest held a prominent position as the representative of the supreme deity, Zalmoxis, who is called also Gebeleizis by some among them.[11][230] Strabo wrote about the high priest of King Burebista Deceneus: "a man who not only had wandered through Egypt, but also had thoroughly learned certain prognostics through which he would pretend to tell the divine will; and within a short time he was set up as god (as I said when relating the story of Zamolxis)."[231] "
(source : Dacians, Wikipedia)
하나라의 도읍지
반유목적·반농경적 사회였던 하나라는 그 특성에 따라 도읍지나 거주지를 이동하였으며, 이동할 때마다 젊은 남자가 수령의 지위로 거주의 이동을 주도하였다.
변천표 국왕 당시의 지명
곤(鯀) | 대하(大夏) | 산서(山西) 운성(運城) 샤현(夏縣) |
숭(崇) | 하남(河南) 낙양(洛陽) 쑹현(嵩縣) | |
우(禹) | 고밀(高密 = 밀도(密都)) | 하남 낙양 신안현(新安縣) 경내. |
양성(陽城 ※양성 양적(陽城陽翟)) | 하남 덩펑(登封) 가오청 진(告成鎭) | |
양적 | 하남 허창(許昌) 우주(禹州) | |
진양(晉陽 ※진양 린펀(晉陽平陽)) | 산서 태원(太原) 진위안 진(晉源鎭) | |
린펀시 | 산서 임분(臨汾) 서남쪽. | |
안읍(安邑 ※대하 안읍(大夏安邑)) | 산서 운성 샤 현 동북쪽. | |
계(啓), 태강(太康) | 양적 | 윗줄과 동일. |
태강, 중강(中康) | 짐심(斟鄩) | 일설로는 하남 낙양 라오청구(老城區) 동쪽 18 km 얼리터우 유적(二里頭遺跡), 일설로는 하남 공의(巩義) 서남쪽 29 km 치톈 진(芝田鎭) 샤오차이 촌(稍柴村) |
상(相) | 제구(帝丘)(= 상구(商丘) | 하남 복양(濮陽) 서남쪽. |
짐심 | 윗줄과 동일. | |
예(羿) | 서(鉏) | 일설로는 현재 하남 화현(滑縣) |
예, 한착(寒浞) | 궁석(窮石) | 하남 낙양 남쪽. |
소강(少康) | 윤(綸 = 윤읍(綸邑)) | 하남 상구(商丘) 위청현(虞城縣) 서쪽. |
하읍(夏邑) | 하남 상구 샤이현(夏邑縣) | |
제구(帝丘) | 윗줄과 동일. | |
저(杼) | 원(原) | 일설로는 현재 하남 제원(濟源) 서북쪽 2 km 묘가(庙街) 원성(原城) |
저, 괴(槐), 망(芒), 설(泄), 불강(不降), 경(扃) | 노구(老丘) | 허난 성 카이펑시(開封市) 카이펑현(開封縣) 친리우 진(陳留鎭) |
근(廑), 공갑(孔甲), 고(皋), 발(發) | 서하(西河) | 일설로는 현재 하남 안양(安陽) 동남쪽. |
걸(桀) | 짐심 | 윗줄과 동일. |
하남(河南) | 일설로는 현재 하남 낙양 라오청 구 동쪽 18 km 얼리터우 유적 |
(자료 : 하나라, 위키백과, 현위치 추정은 현 중공지역으로서 무시하기 바람)
하나라의 왕 중에 '태강, 중강, 소강'이 있는데 (모두 '강(康)'으로 불렸는데, 후일 서열을 넣었다함) '강(康)'이 강국(康國)의 '강(康)'이다. 즉 하(夏)나라도 안국(安國) 위의 강국(康國) 위치를 포함한 것이 아닌가 한다. Dacia의 지역과 유사하다. 도읍지 중에 대하, 안읍, 진양, 양성이 보인다. '안읍(安邑)'을 수도로 한 것을 보면 역시 '안(安)'지역을 점하고 있었다. 안읍은 이후 전국시대의 위나라, 한나라 수도로 나타난다. 큰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Dacia의 넓은 지역 중 흑해 연안을 안지역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후의 열거된 이유에서 더 밝혀진다.
아래 지도를 보면 인도유럽어족의 이동 상황을 알 수 있다. BC 4000년부터 BC 1000년까지의 모습이다. 코카서스산맥 위를 중심으로 흑해연안을 거쳐 발칸반도, 아나톨리아로 가는 이동로를 보여 주고 있다. 하나라가 BC 2000 - BC 1600 기간이므로 상나라와 함께 오렌지색의 지역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지역이 흑해연안을 포함한다 할 수 있다.
Scheme of Indo-European migrations from ca. 4000 to 1000 BC according to the Kurgan hypothesis. The magenta area corresponds to the assumed Urheimat (Samara culture, Sredny Stog culture). The red area corresponds to the area which may have been settled by Indo-European-speaking peoples up to ca. 2500 BC; the orange area to 1000 BC.[17]:30
(source : Proto-Indo-Europeans, Wikipedia)
2. 상(商)나라의 수도 '은(殷)'은 '안(安)지역에 있었다.
Dacia지역은 BC 15c-12c시기에 청동기 시대 Tumulus-Urnfield warriors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은 발칸을 거쳐 아나톨리아로 이동했으며, 스키타이의 영향하에 있었다 한다. 즉 상나라 시대에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Indo-Europeanization was complete by the beginning of the Bronze Age. The people of that time are best described as proto-Thracians, which later developed in the Iron Age into Danubian-Carpathian Geto-Dacians as well as Thracians of the eastern Balkan Peninsula.[66]
Between BC 15th–12th century, the Dacian-Getae culture was influenced by the Bronze Age Tumulus-Urnfield warriors who were on their way through the Balkans to Anatolia.[67] When the La Tène Celts arrived in BC 4th century, the Dacians were under the influence of the Scythians.[67]"
(source : Dacians, Wikipedia)
아래 글에서도 상나라는 하나라와 깊은 연관성을 보여 준다.
"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자료 : 상나라, 위키백과)
아래 표에서 상왕조의 시조 '설'의 시기와 상나라 건국시조 '탕왕'시 수도 '박'은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보인다.
"The Sumerians practiced similar irrigation techniques as those used in Egypt.[77]"(source : Sumer, Wikipedia)
상나라 말기의 수도 '은(殷)'도 당시 왕이 '안왕(安王)', '강조(康祖)' 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안'지역, '강'지역이 아닌가 한다. 상구(商邱) 등의 도시 이름은 하나라의 수도로서도 보인다.
상나라의 도읍지
설(契) | 박(亳) | 바그다드 |
번(蕃) | ||
소명(昭明) | 지석(砥石) | |
상(商) | ||
상토(相土) | 상구(商丘) | |
“태산(泰山) 아래” | ||
상구 | ||
왕해(王亥) | 은(殷) | |
상갑미(上甲微)(망(芒) 33년 ~ 공갑(孔甲) 9년) | 업(鄴) | BC 1840 - 1644 |
“상후(商侯 =은후(殷候))”(공갑 9년 ~ 걸(桀) 15년) | 상구(商丘 ※=商邱) | BC 1644 - 1615 |
태을(大乙) 탕(湯) — 대무(大戊) 밀(密)(걸 15년 ~ 중정(中丁) 원년) | 박 | BC 1600-1422 |
중정 장(莊), 복임(卜壬) 발(發)(중정 원년 ~ 하단갑(河亶甲) 원년) | 오(囂) | BC 1421-1386 |
전갑(戔甲) 정(整)(하단갑 원년 ~ 조을(祖乙) 원년 혹은 2년) | 상(相) | BC 1385-1377 |
차을(且乙) 등(滕) ~ 차정(且丁) 신(新)(조을 원년 혹은 2년 ~ 남경(南庚) 3년) | 비(庇) | BC 1376-1328 |
형(邢) | ||
남경 경(更), 상갑(象甲) 화(和)(남경 3년 ~ 반경(盤庚) 15년?) | 엄(奄) | BC 1327-1315 |
반경(般庚) 순(旬) | 은(殷) (안왕,강조) | BC 1314-1076 |
제신(帝辛) 수(受) | 조가(朝歌) | BC 1075-1046 |
(자료 : 상나라, 위키백과, 기간은 왕의 재위기간을 참고한 필자의 추산)
3. 전국시대 '한(韓)'나라는 초기에 '안읍'이 수도였다가 '위(魏)'나라에게 '안읍'을 빼았겼다. 당시 '진(晉)'나라는 한(韓), 위(魏), 조(趙)의 세나라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삼진(三晉)이라 했다 한다. 이 한(韓)나라가 좌우로 바다가 있었고 남쪽에 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한나라의 위치가 그리스 반도 위치로 판단된다. 남쪽의 왜는 Dorians을 의미하지 않나 판단한다. 도리(Dori) = 도이(島夷) = 왜 의 추정이다. BC 5세기 이후 펠로폰네소스, 크레타섬 등에 나타난 Dorians은 sea people로 추정되며, 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포함한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다. (구체적 자료는 https://paulcgpark.blogspot.com 'Dorians' 참조)
즉 한(韓)나라가 흑해지역에 있다가 위(魏)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안읍'은 흑해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4. 통일 왕조 진(秦)의 진시황의 할아버지는 '안국공(安國公)'이었다. 진시황의 진(秦)나라는 알렉산더제국으로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다음 블로그 글, '진시황의 진나라는 알렉산더제국인가?' 참조). 그러므로 마케도니아에서 출발한 알렉산더제국이라면 '안국공'의 '안국'은 마케도니아에서 가까이 있는 나라일 것이다. 즉 흑해연안에 있을 수 있다.
5. 광개토태왕의 이름은 '담덕'이다. 그런데 중국 사료에서는 '안'이라 했다. 훈족의 'Uldin'을 필자는 광개토태왕으로 보는데, 항가리의 Udin의 family site에서 주장하기를, Uldin은 흑해지방에서 태어났고,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광개토태왕의 출생지는 미상이다. 필자는 이 시기의 고구려의 평양은 부다페스트로 판단된다. (다음 블로그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참조) 훈족의 역사에서도 볼가강 (또는 드네프로강) 주위의 수도에서 항가리의 부다페스트로 수도를 옯겼다고 위키피디아는 서술하고 있다. 이는 장수왕 시기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안'지역이 흑해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6. 장수왕의 시호 중에 강왕(康王)(=康國의 왕)이란 호칭이 있다.
장수왕이 서거했을 때 외교관계가 각별했던 북위의 효문제는 "康王(강왕)"이라는 시호를 보냈다 한다. '康國(강국)'의 康(강), '康居(강거)'국의 그 '康(강)'자이다. '강국(康國)'은 '안국(安國)'의 북쪽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안(安)'지역이 흑해지역으로 판단된다.
7. 가야국 중에 '안라국(安羅國)'이 있었다. 난 이 안라국이 흑해연안에 있는 Lazica지역 즉 Abkhazia지역이 아닌가 한다.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 (백제의 성왕 추정)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Khosrau I (신라의 진흥왕 추정)의 주요 쟁탈지역이었다.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안라국'이 신라의 속방국으로 묘사된다. 즉 흑해지역과 '안'이 연결된다.
Abkhazia area (Lazica area) (source : Wikipedia)
8. 고구려 평강공주의 배우자인 온달 장군의 '온(溫)'은 강거(康居) 사람의 성씨라 한다. 강거는 강국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온달장군은 한강 유역의 회복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난 이 한강이 코카서스산맥 아래 Kura River라 추정했다. (다음 블로그 글, '고구려, 신라, 백제가 다투던 한강은 코카서스산맥 아래 Kura River이다' 참조)
즉 강국(康國)이 코카서스 산맥 위 지역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아래가 '안국'지역인 흑해연안이다.
평강공주의 아버지 평원왕(또는 평강상호왕)은 휘가 양성(陽成)이다. 하나라 도읍지 '양성', 안장왕의 이름 '양성'이다. 즉 이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평주자사, 평로절도사 등 평(平) 지역도 이와 가까운 지역일 것이다. 평양(平陽)도 그렇다.
9. 고구려 안장왕 (安藏王)(재위 519-531)(안흥왕, 휘 : 흥안(興安))의 이름 또한 '안', '양성'이라 했다. 이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라의 수도 안읍, 양성과 일치한다. (고구려 시대 후기 안(安)으로 시작하는 왕명을 가진 왕들의 출생지는 모두 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안'지역을 흑해 지역으로 본다.
10. 당과의 전투가 있었던 요하 서쪽에 있는 '안시성(安市城)'이라 했다. 필자는 요수인 압록강을 우랄강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음 블로그 글, '요수, 살수, 패수 비정을 통한 갈석산의 위치 검토' 글 참조) 요하 서쪽 즉 우랄강 서쪽이라면 흑해연안이 될 수 있다. 안시성에 대해서는 추후 추가 연구가 있을 예정이다.
11. 백제지역인 안남(安南)도호부, 고구려 지역인 안북(安北)도호부, 그리고 안서(安西)도호부, 안동(安東)도호부가 있었다. 필자는 백제가 로마이고 고구려는 다뉴브강을 경계로 백제와 마주하고 있었다고 추정했다. 그래서 안남, 안북, 안서, 안동의 축이 되는 '안'지역은 흑해로 판단된다. 서안(西安)이 평양이라 하는데, 필자가 추정하는 부다페스트 평양은 흑해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고려 태조가 936년(태조 19)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주(全州)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것이 처음이다.
4년 뒤인 940년 다시 전주로 고쳤다. 951년(광종 2)에는 고부(古阜)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1019년(현종 10)에 다시 고부군으로 바꾸었다. 995년(성종 14)에 이와 함께 영암군에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를 두었는데, 이곳은 1018년에 다시 영암군으로 낮추었다.
1018년과 1019년에 고부에 설치되었던 안남도호부와 영암에 두었던 낭주안남도호부를 없앤 뒤, 1018년에 전주를 안남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1022년 다시 전주로 고쳤다. 1150년(의종 4)에는 수주(樹州)를 안남도호부로 삼았다.
수주는 1215년(고종 2)에 다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고쳤으며, 1308년(충렬왕 34)에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부평부(富平府)로 낮추었다.
『고려사(高麗史)』의 1272년(원종 13) 11월 기사일 기사를 보면, 삼별초가 안남도호부에 침입하여 부사 공유(孔愉)와 그의 처를 붙잡아 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때의 안남도호부가 수주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자료 : 안남 도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즉 안남도호부는 백제, 후백제의 위치를 말한다. 필자는 다음 블로그의 여러 글에서 백제가 지금의 터어키에 있었다는 주장을 했다. 실제 지금까지 터어키에 '지리산 (Giresan)'이란 명칭이 존재한다. 터어키는 흑해 아래에 있다. 즉 안남지역은 흑해 남쪽이 되는 것이다.
"본래 고구려에서 설치한 팽원군(彭原郡)에서 계승된 것으로, 931년(태조 14) 안북부(安北府)란 명칭으로 설치되었다. 983년(성종 2)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라 불렀고,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북대도호부라 불렀다....
남방의 도호부가 지방민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것에 비해, 북방의 도호부는 새로 정복한 변경의 이민족을 통솔하기 위한 군사적 지방통치기구였다. 따라서 남방의 도호부가 지역 사정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거듭한 반면에, 북방의 도호부는 국경의 확대에 따라 더욱 발전하였다.
918년 평양도호부를 설치해 여진족의 노략질을 대비했으나 평양도호부가 서경(西京)으로 승격하면서 북경(北境) 개척의 기지를 더욱 전진시켜 안주에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반란이나 외적 침입을 막는 데 지대한 구실을 하였다.
1219년(고종 6) 10월 의주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오직 안북도호부와 구주(龜州)·연주(延州)·성주(成州) 등은 성을 굳게 지켰다. 또한 묘청(妙淸)의 난과 조위총(趙位寵)·김보당(金甫當)의 난 때 안북도호부에서 반란군을 잡아올렸다. 이는 남방 도호부의 성격을 띠는 예이다.
1010년(현종 1) 11월 거란이 침입했을 때, 안북도호부사 공부시랑 박섬(朴暹)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서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거나, 몽고침입시 사르타이〔撒禮塔〕가 안북도호부에 있으면서 개경정부와 강화를 교섭했던 사실, 1130년(인종 8) 12월 백성들이 창주(昌州)·삭주(朔州) 등지에 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금나라와 공식으로 약속한 것을 안북도호부에서 보고한 사실은 북방 도호부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료 : 안북대도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북은 흑해 북쪽지역으로 고구려의 북쪽지역이다. 필자는 발해를 Khazar Empire로 보는데, 이를 멸망시킨 거란이 이들 북쪽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고려때 거란이 침입했을 때 안북도호부가 가까이 있었다. 즉 안북의 '안'도 흑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995년(성종 14)풍주(豊州)에 설치하였다가 이후 해주(海州)로 옮겼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풍주에 설치된 도호부를 안서도호부라 하지 않지만 이 때 안동·안남·안북 도호부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풍주도호부가 안서도호부로 추정된다. 해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폭지군(瀑池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가 군의 남쪽이 바다에 임하여 있으므로, 해주라 하였다.
983년 12목의 하나였고, 995년 12주 절도사를 둘 때에는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여, 양주(楊州)와 함께 좌우보(左右輔)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4도호를 둘 때, 이름을 바꾸어 해주안서도호부라 하였는데, 1122년(예종 17)에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그 뒤 1247년(고종 34)에 해주목이 되었다."
(자료 : 안서도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흑해의 서쪽을 안서라 하면 발칸반도가 되고 그 남쪽에 에게해가 된다. 위에서 해주 안서부의 명칭이 지형적으로 대칭된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당나라는 태종·고종 연간에 국력이 융성해져 그 영역이 사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변경지대에 도호부를 두었다. 안동도호부는 안북(安北)·선우(單于)·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 도호부와 함께 6개의 도호부를 구성하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초대 도호로 임명된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는 2만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하면서 고구려 땅을 9도독부(都督部)·42주(州)·100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릴 방침이었다.
이 때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그 유력자 중에서 도독·자사(刺史)·현령(縣令)을 삼아 고구려인의 자치에 맡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 자체가 어디까지나 계획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무렵, 검모잠(劒牟岑)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당에 대항하였다.
한편, 신라가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당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은 670년에는 도호부의 치소(治所)를 신성(新城)주 01)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신라와의 전투에서 잇달아 참패한 당은 676년 2월에 한반도를 포기한 채 도호부의 출정본부를 요동성(遼東城)주 02)으로 옮겼다. 이 때 부치(府治)를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의 직책을 주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으로 보내 자치를 허락하게 됨에 따라 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그 뒤, 697년에 당의 요동지배의 일대 근거지였던 영주(營州)가 거란인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당의 안동도호부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고구려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를 건국함에 따라 그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은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로 하여금 만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방침을 채택해 일단 도호부를 폐지하고, 699년에 안동도독부를 두어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임명, 부임하도록 하였다.
그 뒤, 704∼705년경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도호부는 부치를 714년에 평주(平州)로, 743년에는 요서군 옛성으로 옮겼다. 그 임무는 설치 당시의 고구려유민에 대한 감시로부터 말갈족 견제로 변경되었으며, 차차 도호부 자체의 실권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 폐지되었다.:"
(자료 : 안동도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동도호부는 흑해 동쪽인 코카서스산맥지역이나 카스피해 동쪽 지역으로 할 수 있다.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758년 폐지되었다는 것은 안동도호부 가까이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말갈족인 Alans이 이지역에 있었다.
12. 신라의 고승들은 '철문관'을 지나 '안국(安國)'으로 갔다고 했다. 필자는 철문관을 코카서스산맥아래 있는 'Caspian Gate'라 추정했다. (다음 블로그 글, '진시황의 진나라는 알력산더제국인가?' 참조 ) 이 철문관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흑해지역이 된다. 한(漢)나라의 장건도 이 철문관을 지나 서역으로 갔을 것이다.
13. 안록산은 강거(康居)출신인 아버지와 돌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다. 그래서 성씨가 강(康)이라고도 한다. '안사의 난' 때에 주로 낙양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후에 장안으로 나아갔다. 필자는 낙양의 동쪽이라 해서 낙동강으로 칭한 낙동강은 유프라테스강으로 추정했다. (다음 블로그 글,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코카서스산맥 아래 아르메니아에 있었다.' 참조) 즉 낙양은 다마스커스 정도로 추정한다. 장안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판단한다. 따라서 안록산의 난이 중앙아시아 소그디아지역에서 발생하면 위치 추정이 안맞게 된다. 그러나 '강국'의 남쪽에 있는 '안'지역을 흑해지역으로 추정하면 안동도호부에 있는 안록산이 낙양을 먼저 공격하게 되는 지리적 추정이 맞게 된다. 즉 중국측에서 주장하는 안국과 강국 위치가 중앙아시아라는 주장이 틀린다는 것이다.
14. 안세고의 안식국(安息國)을 중국측은 파르티마제국이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안식국도 흑해쪽이라 추정한다.
"안세고는 안식국의 왕자였으나 왕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했다. 세고(世高)는 자(字)이다. 성인 안(安)은 그의 출신국인 안식국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와 선경(禪經)에 정통하였다.
안세고는 148년에 뤄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을 비롯하여 34부 40권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자료 : 안세고, 위키백과)
필자는 이 당시의 파르티마제국을 신라로 추정했다. (다음 블로그 글, 상대(BC 57- AD 225)의 신라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 (II), (III) 참조). 따라서 상기의 안식국은 후기 신라의 고승들이 철문관을 통해 방문한 흑해연안에 있는 서역의 안국이 아닌가 한다. 왜 서쪽으로 갔을까? 상기의 안세고 같은 고승이 있는 것을 보면 안국에 간 이유을 이해할 수 있다.
고려말 불법을 구하러 서역에 가기도 했다고 한다. (원출처 : 한국고전종합 DB, 가정집 제2권, 경사 보은광교사의 기문, 인용출처 : 대조선사 연구회, 러브선, 불법은 인도가 아니라 서역에 있었다)
블교에 대한 유럽지역 자료는 현재 찾기 힘들다. 거의 기독교지역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의 Buda는 부처(Budha)를 가리키는 말로 판단된다. 고구려 장수왕이 (부다페스트) 평양에 절 7개를 지었다고 했다.
백제 성왕은 불교에 심취한 전륜성왕이라 했다. 그러나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는 소피아 성당을 지으며 기독교를 장려한 황제로 묘사된다. 오스만제국 시절 소피아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변경했다. 그후 박물관으로 존재하다가, 최근 터어키가 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한다 하여 바티칸 성당이 유감을 표명했다. 어느 것이 역사의 진실인지 모르는 것이다.
15. 장건의 서역 여행
"장건은 대완(大宛), 대월지, 대하(大夏), 강거(康居) 등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그 외 주변의 나라 5, 6개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고 한다. 장건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대완은 흉노의 서쪽에 있고 한나라에서는 정서(正西)이고 한나라로부터 만 리입니다. 그 나라의 풍속은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어 주식으로 삼습니다. 포도주를 담그고 핏물 같은 땀을 흘리는 한혈마(汗血馬)[6]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그 조상은 천마(天馬)의 새끼라고 합니다. 성곽이 있고 그 안에 가옥을 짓고 삽니다. 그 나라의 지방에는 크고 작은 성 70여 개가 있고 백성들은 수효는 수십 만에 달합니다. 그들의 무기는 창과 활이며 군사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쏩니다. 그 북쪽에는 강거, 서쪽에는 대월지, 서쪽에는 대하, 동북쪽에는 오손(烏孫)이 있고 동쪽에는 우온(扜鰛)과 우전(于窴)이 있습니다. 우전의 서쪽에는 강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들어갑니다. 그 동쪽의 강은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흐릅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흘러들어갔다가 그 남쪽의 황하의 발원지에서 솟아납니다. 옥돌이 많이 산출되고 황하는 중국으로 흐릅니다. 누란(樓蘭)과 고사(古事)는 성곽이 있고 염택과 인접해 있습니다. 염택에서 장안까지는 5천 리입니다. 흉노의 왼쪽은 바로 염택의 동쪽이고 농서(隴西)의 장성에 이르러 남쪽으로는 강(羌)과 접하고 한나라와 통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오손(烏孫)은 대원의 동북 쪽으로 2천 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유목을 하는데 흉노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만 명이고 싸움에 나서면 용감합니다. 옛날에는 흉노에 복속되었지만 지금은 세력이 커져 흉노에 보낸 인질들을 모두 귀국시키고 지금은 회합에 참가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강거(康居)는 대원 서북으로 2천 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떠돌아다는 생활을 하며 월지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길 수 있는 군사가 8-9만에 이르고 대원과 이웃해 있습니다. 나라는 작아 남쪽지방은 월지에 의해 통제되고 동쪽은 흉노를 받들고 있습니다. 엄채(奄蔡)[7]는 강거에서 서북쪽으로 2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목생활을 하며 강거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0여만 명에 달하고 끝이 보이지 않은 큰 못[8]을 접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곳이 북해(北海)인 것 같습니다. 대월지는 대완의 서쪽으로 3천 되는 곳에 있고 규수(嬀水)의 북쪽에 있습니다. 그 남쪽에는 대하(大夏)가 있고 서쪽에는 안식(安息)이 있고 북쪽고에는 강거가 있습니다. 유목국가로 떠돌아다니며 가축을 따라 거처를 옮겨다닙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2십만에 달합니다. 옛날 나라가 강했을 때는 흉노를 가볍게 대했으나 흉노에 모돈(冒頓)이 대선우가 되고 나서 윌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노상선우(老上單于) 때에는 월지왕을 죽여 그 두개골 뼈로 그릇을 만들어 술을 마셨습니다. 원래 월지는 돈황(敦煌)과 기련산(祁連山) 사이에 나라를 세웠는데 흉노에게 패한 후에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원(大宛)을 지나 대하(大夏)를 쳐서 그들을 신복시키고 마침내 규수(嬀水) 북쪽 평원에 도읍을 세우고 왕정(王庭)으로 삼았습니다. 원래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월지인들이 남산과 강족(羌族)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며 살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불렀습니다. 안식(安息)은 대월지의 서쪽 수천 리에 있습니다. 그들의 풍속은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고 벼와 보리를 경작하고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성읍은 대원과 비슷하며 나라에 속한 성읍은 대소 수백 개가 있으며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달해 그중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嬀水)가 흐르고 있고 시장이 있는데 백성들이나 상인들은 수레와 배를 가지고 인접한 나라나 수천 리 되는 먼 곳을 다니며 장사를 합니다. 은으로 돈을 만들고 그 표면에 왕의 얼굴을 넣고 왕이 죽으면 재빨리 동전을 바꿔 왕의 얼굴을 다시 넣습니다.[9] 그들은 가죽 위에 글을 써서 기록합니다. 그 나라 서쪽에는 조지(條枝)가 있고 북쪽에는 엄채(奄蔡), 여헌(黎軒)이 있습니다. 조지(條枝)는 안석의 서쪽 수천 리 되는 곳에 있고 서해에 맏닿아 있습니다. 기후는 덥고 습합니다. 농사를 짓고 벼를 경작합니다. 큰 새가 있는데 그 알이 마치 항아리와 같이 큽니다. 사람은 매우 많은데 가는 곳마다 소군장(小君長)들이 있습니다. 안식은 이 나라를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안식의 장로는 조지에는 약수(弱水)와 서왕모(西王母)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대하는 대원의 남쪽 2천 리 되는 곳의 규수 남쪽에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을 하고 성을 짓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사는데 대원과 같습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대군장은 없고 가는 곳마다 성읍에는 소군장이 있습니다. 그들의 군사는 약하고 싸움을 싫어합니다.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데 능숙합니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이주해와 그들을 공격해서 패주시키고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하의 인구는 매우 많아 백만이 넘습니다. 그 도성은 람지성(藍氏城)이라고 하는데 시장이 있어 여러 가지 물품들을 사고팝니다. 그 동남쪽에는 신독국(身毒國)이 있습니다."- 사기 대완열전 |
그런데 장건은 이런 말도 했다.
"신이 대하에 있을 때 공(邛)에서 생산되는 죽장(竹杖)과 촉(蜀)에서 나는 베를 보고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대하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나라 상인들이 신독(身毒)의 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신독은 대하의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을 하고 대체적으로 우리 대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날씨는 불순하고 습하며 여름에는 몹시 덥다고 했습니다. 그 백성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그 나라에는 아주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 건(騫)이 추측해본 바, 대하는 우리 한나라에서 서남쪽으로 1만 2천 리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신독국은 대하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고 또 촉에서 만든 물품들이 있으니 아마도 촉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대하로 사자를 보낸다면 강(羌) 족의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길이 험할 뿐 아니라 강족이 매우 싫어할 것입니다. 또 북쪽으로 조금 돌아간다면 흉노에게 잡히고 말 것입니다. 촉으로 곧바로 간다면 길도 가깝고 도중에 도둑 걱정도 없을 것입니다."- 사기 대완열전 |
(자료 : 장건, 나무위키)
Bulgars migration in Europe (source : Wikipedia)
대월지는 중앙아시아 동쪽에 이주했다가 흉노에 밀려 코카서스산맥 주위로 이동했다가 다시 흉노에 밀려 더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상기 지도의 Bulgars, 즉 부여족의 이동과 유사한 경로를 보인다. 유럽사에서는 훈족과 부여족만이 동양에서 이동해 온 민족으로 말한다. 월지국이 마한의 목지국인지 더 검토가 필요하지만 유럽사에서 월지국에 대한 서술이 없는 것을 보면 부여족의 이동이 그것이 아닌가 한다. 흉노와 부여족의 관계도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부여족은 흉노와 대항한 한(漢)나라와 협력한 점을 보면 부여족과 고구려, 백제와 완전한 동일시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상기 지도에서 '안'지역으로 판단되는 흑해연안지역이 이들이 이동한 지역이 된다.
즉 위의 장건이 말하는 대월지, 대하가 흑해 서쪽에 있는 지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건은 안식(安息)은 대월지의 서쪽 수천리에 있다고 했다. 당시 한(漢)나라를 파르티마제국으로 가정하고 위의 보고를 해석하면, 지금 중공의 땅을 한나라로 보고 해석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즉 장건은 중앙아시아로 (오손을 제외하고) 여행한 것이 아니라, 흑해 서쪽의 지역으로 여행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상의 여러 가지 경우를 검토한 결과 '안'지역은 흑해지역이라는 것이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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