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블라드미르 1세 (r 978-1015) -나무위키
2022. 8. 20. 04:18ㆍ역사 자료/키예프 루스
블라디미르 1세
최근 수정 시각: 2022-08-11 06:56:42
키예프 루스 제6대 대공
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 | Vladimir Sviatoslav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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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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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
Yaropolk Sviatoslav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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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러시아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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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ладимир Святослави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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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우크라이나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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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олодимир Святослави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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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슬라브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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Володимѣръ Свѧтославич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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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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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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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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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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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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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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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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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예프 루스 류리크 왕조의 제6대 대공으로 정복군주 스뱌토슬라프 1세의 3남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볼로디미르 1세'라고 부르며, 키예프 루스 최고의 대공으로 평가받는 명군이다. 서자에 3남이라는 어려운 환경에서 출발해 루스의 권력을 잡은 후, 나라를 공고히 함은 물론 조모 키예프의 올가의 숙원이었던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마케도니아 왕조 동로마 제국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키예프 루스를 문명 국가로 만들었다. 블라디미르 1세의 치세에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가 빛을 발하며, 서유럽을 비웃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문화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러시아 연방과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수호성인이며 우크라이나에서 자주 쓰이는 우크라이나 1흐리우냐 주화의 인물이다. 군주로써 받은 별명이 대왕인 것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느낄 수 있다.[5]
2. 생애
2.1. 초기 생애
950년대 초중반에 출생했으며, 태어난 해는 그의 형처럼선대 대공들보다는 추정 범위가 작다. 956년에서 958년 사이로 추정된다. 과격한 설로는 아예 942년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에서는 그의 아버지 스뱌토슬라프 1세의 생년도 927년까지 확 낮추어 버린다. 태어난 곳은 부댜티노라는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는 시골 마을이라는 기록과 프스코프라는 기록으로 양분된다. 태어났을 때가 키예프의 올가 치세이므로 이후 자란 곳은 확실히 키예프이다. 《원초 연대기》[6]에는 스뱌토슬라프 1세가 젊은 시절 낳은 아이들은 모두 키예프의 올가가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스뱌토슬라프 1세가 군사 행동에 심취해 너무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성녀인 할머니의 슬하에서 크는 동안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와 다르게 기독교에 친숙해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류베치의 말루샤라는 여인이었다. 노예 신분으로,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자면 말루샤는 원래 키예프의 올가의 하녀였다. 말루샤의 아버지는 류베치의 말라크라는 사람이었다. 저 '류베치'라는 지명 때문에 말라크에 대한 설이 갈리는데, 독일의 뤼베크 시도 러시아어로 '류베치'고, 슬라브계 드레블랴족의 대도시 중 하나도 '류베치'이기 때문이다. '류베치'가 뤼베크라면 키예프의 올가 시절에 독일 선교단으로 왔던 아달베르트의 수행원으로 추정되고, 류베치가 드레블랴족 도시라면 키예프의 올가에게 까불다 죽은 드레블랴족 공작 몰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이 설에 따르면 드레블랴족을 쳐부순 후 공녀를 취해서 노예로 삼은 것이다. 현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후자가 더 드라마틱해서 인기있는 가설이다. 올가의 노예가 된 말루샤는 당대의 풍습상 올가가 기독교로 개종할 때 자의 혹은 올가의 강요로 기독교로 개종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서유럽 사람이라는 설을 채용한다면 원래 기독교도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스뱌토슬라프가 그녀를 보고 반해서 그녀를 취해버렸고, 올가는 자기 아들이야 이교도니까 뭐라 못해도 기독교로 개종한 말루샤가 유부남인 스뱌토슬라프와 간음했다고 생각해 대노했다. 결국 올가 생전에는 스뱌토슬라프가 부댜티노에 숨겨두며 만나다가 올가가 죽은 후에 궁정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964년, 아버지 스뱌토슬라프 1세가 공식적으로 키예프 루스 대공으로 즉위하면서 블라디미르와 그의 형제들은 공자가 되었다. 969년, 키예프가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페체네그족에게 포위, 공격을 당할 때 키예프에 있었다. 스뱌토슬라프 1세가 회군해 페체네그족을 격퇴한 후, 할머니 키예프의 올가가 사망했다. 그 직후 야로폴크와 형제들은 아버지로부터 루스 땅을 분할받았다.[7] 첫째 형 야로폴크는 장남답게 키예프와 루스 남부의 주요 영토를 받았다. 그의 둘째 동생 올레그 스뱌토슬라비치는 키예프의 올가가 개척한 브루치[8]와 옛 드레블랴인들의 땅[9]을 받았다. 블라디미르는 노브고로드와 루스 북부 일대를 받았다. 사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원래 블라디미르를 배제하고, 루스를 남북으로 가르려고 했는데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대표자를 보내 노브고로드 일대에도 공작을 분봉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노브고로드는 키예프와 너무 멀어 야로폴크와 올레그가 거부했고, 그래서 막내 블라디미르가 노브고로드 공작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야망이 넘쳐흐르던 세 형제간의 분쟁은 예견되었다.
2.2. 노브고로드 공작
972년, 노르웨이의 왕자 올라프가 노브고로드로 망명해왔다. 블라디미르는 몇 살 연하인 그를 맞아들였다. 아직 나이가 많지 않던 블라디미르의 통치를 도운 이는 어머니 말루샤의 오빠, 즉 블라디미르의 외삼촌인 도브리냐였다. 도브리냐가 에스토니아 지역에 공물을 수취하러 갔다가 도망 중에 강도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어 있던 올라프 왕자를 발견하고 구출했다. 블라디미르는 노브고로드에서 청소년기의 후반을 보내면서 도브리냐와 함께 안정적으로 노브고로드를 통치했으며 성장한 올라프는 훌륭한 장수가 되어 주었다.
977년, 맏형 야로폴크 1세가 둘째 형 올레그 스뱌토슬라비치를 상대로 내전을 개시했다. 블라디미르는 이 전쟁이 어떻게 될지 긴장하며 지켜보았는데, 맏형이 승전하고 둘째 형이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깜짝 놀란 블라디미르는 측근들을 데리고 노브고로드를 버린 채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노르웨이의 국왕인 '강력왕' 호콘 2세는 블라디미르의 인척이었는데, 블라디미르는 호콘 2세의 도움을 받아 많은 수의 바이킹 전사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난 978년, 블라디미르는 도브리냐와 올라프[10]를 양 옆에 끼고 대군을 이끌며 노브고로드로 진격했다.
2.3. 형과의 내전
블라디미르가 망명한 후 노브고로드 공작령은 야로폴크 1세의 손에 들어갔는데, 블라디미르가 정치를 잘 했던 건지 그가 군대를 이끌고 오자 노브고로드 공작령은 순식간에 블라디미르에게 돌아갔다. 블라디미르는 노브고로드에서, 노브고로드 현지인들과 슬라브 속국들인 추드족, 크리비치족들에게서 병사를 추가로 징집한 후 남진했다. 남진하는 경로에 있는 주요한 거점은 폴로츠크였는데, 노르드계 바랑인 귀족 라그볼로드가 통치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폴로츠크 공작 라그볼로드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딸 라그네다에게 청혼했다. 이에 야로폴크 1세도 전략적 이유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라그볼로드 공작은 그녀의 딸에게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라그네다는
노예의 자식의 신발을 벗겨줄 순 없습니다.[11] 저는 야로폴크 대공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내심 야로폴크 1세를 지지하던 라그볼로드는 이를 허락한 후 블라디미르에게 전령을 보내 딸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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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을 거절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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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거점 폴로츠크를 끌어들이지 못했으며
블라디미르는 당연히 개빡쳤고, 즉각 폴로츠크를 공격했다. 라그볼로드는 대항을 시도했지만 블라디미르 군대는 너무나도 강했고, 야로폴크 1세가 손도 써보기 전에 순식간에 패배했다. 블라디미르는 폴로츠크 성 내로 들어갔는데 라그볼로드 공작 가족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 이 때 옆에서 도브리냐가 너를 무시한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부추겼다('노예의 자식' 발언은 도브리냐 자신의 여동생에 대한 모욕이었으니까). 이에 블라디미르는 라그볼로드와 그의 부인, 즉 라그네다의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라그네다를 무참히 강간했다. 그러고는 쓰러진 라그네다가 보는 앞에서 라그볼로드 가족을 모두 직접 베어 죽였다. 그 후 라그네다를 아내로 삼았다.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폴로츠크를 삽시간에 무너뜨리고 드네프르 강으로 진입해 빠르게 키예프로 진군했다. 이때 야로폴크 1세 쪽의 대장군은 블루드라는 귀족이었는데, 블라디미르는 빠르게 블루드와 접촉해서 블루드가 야로폴크 1세를 배신하면 전후 그의 지위를 높여주겠다는 밀약을 맺었다. 이를 위해 블루드는 최근 키예프의 민심이 블라디미르에게 기울어 여기서 싸웠다간 백성들이 성문을 열 수 있다며, 인근에 있는 작지만 튼튼한 요새 로덴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는 이에 따랐다. 곧 블라디미르가 당도해 키예프에 무혈입성하고, 로덴을 포위했다. 작은 요새 로덴은 물자 비축량이 많지 않아 금새 기근 상태에 빠져버렸다. 상황이 악화되고 야로폴크 1세가 근심에 빠지자 블루드는 블라디미르 1세와 협상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의 친구이자 충신인 바랴즈코는 분명히 계략이고, 협상장에 갔다가는 죽을 거라며 대공을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키예프로 갔다. 6월 8일에 야로폴크 1세가 키예프 궁전에 들어서자, 블라디미르는 우선 형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궁전을 몰래 봉쇄한 후 3일 간 형에게 큰 연회를 베풀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6월 11일, 블라디미르는 전사 둘을 보냈다. 두 전사는 야로폴크 1세를 기습해 가슴을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 형을 죽인 후 블라디미르는 곧바로 키예프 루스의 대공에 취임했다. 블라디미르 1세 치세의 시작이었다.
2.4. 루스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다
사실 취임 초기의 블라디미르 1세는 독실한 슬라브 신화의 교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직후 그는 키예프에 슬라브 신화의 판테온을 지었다. 또한 인신공양 제사도 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엔 첩도 수백명을 두었다고 한다. 이는 형 야로폴크 1세에 대한 정치적 스탠스였다는 설이 있는데, 야로폴크 1세가 기독교도로 추정되며 친기독교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어릴 때 조모인 성 키예프의 올가에게 교육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가 이미 기독교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는 987년에 일신교로의 개종을 선언하고, 어떤 종교가 자신과 루스에게 가장 좋을지 회의를 열었다. 블라디미르 1세가 후보군에 올린 종교는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 유대교였다. 여기서 가톨릭은 중심지가 너무 먼 데다 교황의 간섭이 강제된다는 것이 별로였고, 유대교는 믿는 민족이 멸망한 걸 보니 효험이 의심되는데다가 루스인과 대판 싸웠던 튀르크계 하자르인들의 국교였다는 것이 별로였으며, 이슬람은 루스인의 필수품이었던 술과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교리가 너무 치명적이라 탈락했다고 한다. 반면 정교회는 블라디미르 1세가 만난 신학자들이 인상깊었던 데다가 동로마 제국의 하기아 소피아에 다녀온 사절들이 정교회 사원은 여기가 천국인지 지상인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다고 증언하자 정교회를 채택했다고 한다. 이 중 유대교는 정말로 검토했는지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정교회와 이슬람에 대해선 실질적으로 관심을 보인 흔적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의사 겸 작가 알 마르와지는 10세기 후반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북쪽 야만인 왕이 호라즘 지역에 사절 넷을 보내 이슬람에 관심이 있으니 이맘을 보내달라고 청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는 종교 선택 회의가 있었다고는 해도 루스인들의 전적상[12] 정교회를 내정해놓고, 보여주기식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개종 타이밍은 동로마 제국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황제는 로봇마냥 국정만 돌본 황제로 유명한 명군 바실리오스 2세였다. 986년에 로마 귀족 바르다스 포카스가 황제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바르다스는 동로마 제국의 군사 중심지이던 아나톨리아 반도를 모조리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곤경에 빠진 바실리오스 2세는 황급히 병력을 데려올 만한 곳을 찾았는데, 눈에 띈 곳이 바로 키예프 루스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루스에게 동맹을 맺고 자신을 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1세는 바실리오스 2세에게 제국 황녀와의 결혼을 대가로 요구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당시 황녀는 바실리오스 2세의 여동생 안나[13]로 포르피로게니타[14]였다. 일전에 바실리오스 2세의 할아버지 콘스탄티노스 7세는 포르피로게니투스는 어떤 외국인에게도 결혼시키면 안 된다고 규정했는데[15], 실리주의자 바실리오스 2세에게 그런 건 없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989년, 바실리오스 2세는 블라디미르 1세에게 받은 6,000명의 군사로 아비도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바르다스 포카스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병력은 후일 바랑인 친위대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하지만 막상 황녀를 루스에 보내려니 찝찝해진건지 바실리오스 2세는 결혼 문제를 미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 1세는 크림 반도의 동로마 도시인 케르손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러자 바실리오스 2세는 결혼을 진행시키기로 했고, 안나는 그 대신 남편이 될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을 요구했다 이에 마침 개종하려고 했던 블라디미르 1세는 단박에 정교회로 개종했다. 세례명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서 따와 '바실리오스'로 했다.
안나와 결혼한 블라디미르 1세는 자신이 세운 슬라브 신화 만신전을 파괴하고, 슬라브 신화의 신상들을 모조리 부수거나 강에 던질 것을 명령한 후[16] 나라 곳곳에 성당을 세웠다. 그 후 989년에 전 루스의 개종을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루스인들에게 성당으로 가서 세례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키예프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게 따랐으나 블라디미르 1세의 외삼촌 도브리냐가 다스리던 노브고로드에선 개종 거부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바랑인 기독교도 페오도르와 요안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들은 훗날 최초의 루스인 순교자로 인정되었다. 키예프에 대교구가 설치되었고 노브고로드, 체르니히우, 페레야슬라블 등에도 교구가 설치되었다. 이후 997년에는 페체네그족 족장 쿠추그를 개종시키고, 1007년에 페체네그 교구를 설치했다.
2.5. 외치
981년에 폴란드의 미에슈코 1세와 전쟁을 벌여 프르셰미슬 일대를 장악했고, 볼가 강 일대의 슬라브계 브야티치족들을 다시 공격해[17] 공물을 받아냈으며 983년에는 발트족의 일파인 야트빙거족들을 정복하고 발트 연안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984년에는 드네프르 강 상류의 슬라브계 라디미치족들[18]를 쳐서 복속시켰다. 985년에는 볼가 불가르와 전쟁을 개시해 그들을 제압하고 루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리고 그대로 볼가 강을 타고 남진하여 일전에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공격당한 후 남아있던 하자르 칸국의 잔당들을 공격해 루스의 속국으로 삼았다. 992년에는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공격해 백크로아티아인들을 복속시키고, 최초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루스의 영토로 만들었다. 1000년에는 동로마 제국을 도와 불가리아로 출병하기도 했다.
반면 페체네그족을 상대로는 끊임없이 방어해야 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에 의하면 페체네그족은 드네프르 강의 지류 근처로 움직이며, 키예프로 말을 달리면 하루 만에 가는 거리 즈음에서 배회하면서 루스를 위협했다고 한다. 또 암살당한 맏형 야로폴크 1세의 친구이자 충신이었던 바랴즈코도 페체네그족으로 망명해 끊임없이 페체네그족을 선동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페체네그족을 상대로 여러 번 패배했고, 지긋지긋한 페체네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드네프르 강변에 장성을 건설하고 그 사이사이에 많은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전쟁만 한 것이 아니라 외교도 많이 했는데, 헝가리 왕국의 성 이슈트반 1세, 보헤미아 공국의 경건공 볼레스와프 2세, 폴란드 왕국의 용감공 볼레스와프 1세,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 교황 실베스테르 2세 등과 평화적으로 교류한 기록이 남아있다.
2.6. 내치
988년에 수많은 아들들에게 루스 곳곳을 분할하여 분봉했다. 이후 키예프 루스가 산산조각나면서 갈라지는 공국들의 많은 수가 이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기독교 개종 후 아마 990년대 초반에, 블라디미르 1세는 보야르[19]들과 포사드니크[20]들을 모아서 평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10진법에 기반한 새로운 행정 및 군사 체계를 조직했고, 《교회 헌장》을 제정해 교회의 권한도 정했다. 법도 다듬었는데, 고대 슬라브인의 관습법인 '비라'를 명문화한 후 동로마 제국의 로마법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그 후 로마법을 기반으로 비라 법을 섞어[21] 키예프 루스 국법을 완성했다. 따라서 키예프 루스도 이제부터 로마법을 따르는 국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역을 크게 진흥시켰으며, 원래 동로마의 솔리두스화나 이슬람의 디르함화를 받아 쓰던 키예프 루스에서 최초로 화폐를 발행했다. 금화와 은화 두 종류를 발행했으며 금화는 '즐라트크', 은화는 '스레브레니크'로 불렀다. 동로마 제국의 화폐와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었으나 그리스식 복식을 입은 블라디미르 1세의 모습과 블라디미르 1세의 이름을 넣어 발행했다. 아쉽게도 당대의 국제 화폐였던 솔리두스와 디르함에 밀려 블라디미르 1세 사후엔 추가로 발행되지 못하고 금세 사라졌다.
기독교의 도입과 함께 블라디미르 1세는 문맹 퇴치 정책을 추진했다. 사람들이 성경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신앙 생활을 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아토스 산 출신의 불가리아인 수도자들을 불러들여 귀족 아이들을 교육하게 했다. 이 정책의 결과는 블라디미르 1세 사후부터 러시아 문학이 꽃피는 것으로 드러난다. 또 다른 기독교와 관련된 정책은 복지 정책이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자선 활동을 통해 기초적인 복지를 실현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대공 자신의 돈으로 축제를 베풀었고, 빈민들에게도 빵, 고기, 야채, 꿀, 술 등을 수레에 실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성당을 세우면서 조모 키예프의 올가가 시작한 석조 건물 건축을 계속 진행한 것은 덤으로 화려한 성당을 위시로 한 여러 석조 건물이 루스 곳곳에 세워졌다.
2.7. 말년
말년에 블라디미르 1세는 계승에 손을 대려 했다. 원래 키예프 루스는 영토 자체는 분할상속하고, 대공위는 장남에게 상속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었는데, 당시 장남 비셰슬라프는 요절했고, 그 다음 순위였던 야로폴크 1세의 아들이자 블라디미르 1세의 양자인 스뱌토폴크 1세나 블라디미르 1세의 친자인 이지아슬라프가 대공위를 받는 것이 맞았으나 블라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녀 안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중 형인 보리스에게 대공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이에 마음이 급해진 스뱌토폴크 1세는 양아버지를 시해하려다 걸려서 투옥당했고, 아버지를 싫어했던 이지아슬라프와 라그네다[22]의 네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노브고로드 공작 야로슬라프 1세는 아예 키예프로 보내는 세금과 군사를 끊어버렸다.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 1세는 야로슬라프 1세를 토벌하려고 군사를 준비했는데, 노년에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에 걸려 1015년 7월 15일 베레스토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주변 사람들은 스뱌토폴크 1세를 자극하지 않고, 보리스에게 대공위를 물려주기 위해 블라디미르 1세의 죽음을 숨기고 키예프로 돌아갔다. 한편 스뱌토폴크 1세는 대공의 죽음을 알고 말았다. 그는 푸트샤와 보야르라는 두 전사를 보내 비셰고로드라는 곳에서 페체네그족의 동태를 정찰하고 키예프로 돌아오던 보리스를 암살하고, 보리스의 동복동생인 글레브도 키예프로 불러들인 후 죽였다. 따라서 스뱌토폴크 1세가 키예프 루스의 대공위를 이어받았다.
2.8. 사후, 전설이 되다[편집]
사망 직후부터 성자로 취급받았다. 그의 시신은 동로마 제국의 황녀 안나와 함께 그가 세운 키예프 십일조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13세기 즈음까지 루스 국내에서만 성자로 취급받다가 13세기 후반에 세계 곳곳의 각종 기독교 《전례서》에 일제히 블라디미르 1세가 등장했으므로 이 즈음에 공식적으로 가톨릭과 정교회 양쪽에서 시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할머니 키예프의 올가가 시성된 시점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시성될 때 단숨에 일반 신자 출신으로써 최고의 영예인 사도와 동등한 성인에 올랐다. 그의 묘소는 잘 보존되어 오다가 1240년 몽골 제국의 바투가 키예프를 파괴할 때 십일조 대성당이 파괴되면서 이곳에 묻혀있던 여러 루스 군주들의 묘소와 함께 파괴되었다가 1635년 키예프 대주교 페테르 모길라가 블라디미르 1세의 유골을 찾아내었다.
현재 블라디미르 1세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루스계 국가에서 자국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이자, 자국과 자국 문화의 근원이 되는 인물로 기리는 위인이다. 1853년 러시아 제국은 키예프에 성 블라디미르 1세 기념동상을 세웠다. 1782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가 제국 4등급 훈장으로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제정했다. 1862년에는 키예프에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이 세워졌다. 1957년 러시아 정교회는 교단 훈장 중 두 번째로 높은 등급으로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제정했다. 소련 시대엔 종교적보다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서 많이 기려졌고 블라디미르 1세가 거쳐간 지역과 아닌 지역을 막론하고 동상을 많이 세웠다. 2002년에는 러시아 국가근위대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졌다. 2008년에는 우크라이나가, 2010년에는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1세와 키예프 루스의 개종을 기념하는 휴일을 만들었다. 공식적인 최고위 기독교 성인인만큼 그의 이름을 딴 성당은 수도 없이 많으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는 무수히 많은 곳에 그의 이름이 붙어있고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우크라이나 흐리우냐 1흐리우냐 화폐에는 블라디미르 1세의 초상화가 독립 직후부터 현대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있다.[23] 2020년에는 러시아 해군 SSBN 보레이급 잠수함 4번함 블라디미르 대공함이 취역했다. 러시아는 연해주 지역 중 한 곳 앞바다에 블라디미르 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블라디미르 1세가 개인적으로 쓰던 문장은 후에 류리크 가문의 상징처럼 되었다가 현재도 우크라이나 국장 및 각종 우크라이나의 상징에 당당히 박혀있다. 우크라이나 국장의 삼지창처럼 생긴 무늬가 블라디미르 1세의 문장이다.
블라디미르 1세는 민담을 거쳐 많은 문학 작품과 극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민담에서의 블라디미르 1세는 그의 어머니 말루샤와 함께, 다른 대공들의 이미지와 슬라브 전래 민담에 내려오는 영웅들과 섞여서 전형적인 인자한 성군 캐릭터로 변했으며, 말루샤는 엄청난 통찰력을 가진 선한 마녀에 가깝게 그려졌다.
3. 가족
이교도일 시절에 많은 첩을 두었었고 일부다처제에 따라 아내 자체도 많았다. 《원초 연대기》에는 블라디미르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할 때 일부일처제를 도입하면서 그 전에 들였던 아내들한테 계속 궁전에 있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물어는 봤다는데 형식상이었던 것 같다. 기록에 남은 그의 아내는 출신을 알 수 없는 체치나, 형 야로폴크 1세의 미망인이었던 동로마 수녀, 강간하고 일가족을 몰살한 후 납치한 폴로츠크 공녀 라그네다, 역시 출신을 알 수 없는 아델, 백크로아티아 공주 출신 말프리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 황녀 안나이다.
체치나는 장남 비셰슬라프를 낳았다. 비셰슬라프는978년 경에 태어났다. 988년에 노브고로드 공작위를 받았고 1010년에 요절했다. 스칸디나비아 쪽 《사가》에 비셰슬라프로 추정되는 인물이 스웨덴 국왕의 미망인인 거만한 시그리드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가 있긴 한데 근거는 없다.
동로마 수녀는 979년 경에 스뱌토폴크 1세를 낳았다. 그런데 《연대기》에 블라디미르 1세가 동로마 수녀를 취할 때 이미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그렇게 낳은 것이 스뱌토폴크 1세라고 했기에 정황상 친아버지는 야로폴크 1세이다. 블라디미르 1세는 조카인 스뱌토폴크 1세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으나 스뱌토폴크 1세는 끝끝내 자신의 아버지는 블라디미르 1세가 아닌 야로폴크 1세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988년에 투로프 공작위를 받았으며 1015년에 양부인 블라디미르 1세가 죽자 사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대공위에 올랐다.
라그네다는 기록에 남은 자식이 가장 많다. 첫째 이지아슬라프는 978년 경에 태어났다. 987년에 치욕을 잊지 않은 어머니 라그네다가 밤중에 블라디미르 1세를 칼로 찔러 죽이려다 대공이 잠에서 깨는 바람에 걸린 일이 있었다. 대노한 블라디미르 1세가 그 자리에서 그녀를 죽이려 할 때 헐레벌떡 달려온 이지아슬라프가 울며,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를 가리며 서자 마음이 흔들린 블라디미르 1세가 처벌을 보류했다가 988년에 이지아슬라프에게 폴로츠크 공작위를 주면서 라그네다를 폴로츠크로 함께 보냈다고 한다. 이지아슬라프는 자슬라브라는 도시를 새로이 건설하여 폴로츠크 공국의 중심지로 삼았다. 조용하고 착하며 인내 깊은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1001년에 요절했다. 둘째 야로슬라프 1세는 같은 해, 그러니까 978년 초에 형이 태어난 직후 바로 잉태되어 그 해 말에 태어났다고 한다. 988년에 로스토프 공작위를 받았고, 1010년에 이복형 비셰슬라프가 죽은 후 그의 노브고로드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1016년에 이복형 스뱌토폴크 1세를 쳐서 이기고 키예프 루스 대공위를 찬탈했다. 셋째 브셰볼로드는 볼린스키의 공작위를 받았으며 1013년에 요절했다. 넷째 프레드슬라바는 장녀로, 스뱌토폴크 1세가 이복동생 보리스를 죽이고 대공위에 오르자 이를 비난하고 동복오빠 야로슬라프 1세에게 스뱌토폴크 1세를 칠 것을 부탁했다. 이에 야로슬라프 1세가 남진해 대공위를 찬탈할 때까진 좋았으나 스뱌토폴크 1세가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대공위를 다시 빼앗자 스뱌토폴크에게 잡혔고, 그녀의 미모에 눈독들이던 볼레스와프 1세의 첩으로 보내졌다. 다섯째이자 차녀인 프레미슬라바는 헝가리 왕국의 탈모공 라슬로에게 시집갔다. 여섯째이자 3녀인 므스티슬라바는 넷째 언니와 함께 볼레스와프 1세에게 잡혀갔다.
아델은 983년 경에 므스티슬라프를 낳았다. 그는 트무타라칸스키 공작위를 받았고 후에 야로슬라프 1세와 내전을 벌여서 체르니고프 공작위를 쟁취했다. 끝끝내 그 땅을 지켜냈으나 그의 아들이 요절한 탓에 므스티슬라프가 죽은 후 트무타라칸스키와 체르니고프 공작령은 야로슬라프 1세에게 돌아갔다. 둘째 스타니슬라프는 스몰렌스크 공작위를 받았다가 블라디미르 1세 생전에 요절했다. 셋째 수디슬라프는 프스코프 공작위를 받았으나 내전기에 잡혀 투옥되었는데 장수했다고 한다.
말프리다는 988년 경에 스뱌토슬라프를 낳았다. 스뱌토슬라프는 드레블랸스키 공작령을 받았다. 1015년에 스뱌토폴크 1세가 이복동생들인 보리스와 글레브를 살해하자 겁을 먹고, 외가가 있는 백크로아티아 지역으로 도주하려다 스뱌토폴크의 군대에 잡혀 살해당했다.
황녀 안나[24]는 990년 경에 보리스를, 그 얼마 후에 글레브를 낳았다. 보리스는 로스토프 공작위를, 글레브는 무롬 공작위를 받았다. 이들은 그들의 어머니의 신분 때문이지 블라디미르 1세가 가장 사랑하는 두 아들이었다. 1015년 블라디미르 1세의 사망 때 보리스는 페체네그족 경계 임무에 나가 있었는데, 스뱌토폴크 1세가 보낸 전사들에게 암살당했다. 글레브 역시 야로슬라프 1세의 만류를 뿌리치고 키예프로 갔다가 살해당했다. 셋째 마리야 도브로네가는 1011년에 터울을 좀 두고 태어났다. 1018년에 이복언니들과 함께 볼레스와프 1세에게 잡혀갔다 풀려났고 이후 폴란드 공작 카지미에시 1세에게 시집갔다.
그 외에 포즈비즈드라는 아들이 확인되며, 이름이 슬라브 신화 유래라 서열이 높은 아들이었을텐데 어머니에 대한 기록도, 받은 영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사생아였던 모양이다.
[1] 러시아어로는 Великий, 발음은 벨리키
[2] 러시아어로는 Святой, 발음은 스뱌또이
[3] 956년 설과 958년 설이 있다.
[4] 노브고로드 공작은 969년에 취임
[5] 서양권에서 군주를 부르는 별명은 보통 그의 특징을 꼬집어 정하며, 놀리다시피 정한 별명도 부지기수다. 당장 블라디미르 1세의 할아버지 이고리 1세는 다 늙어서 통치한다고 '늙은이'라 불렸으며 이고리 1세 대신 즉위했던 노브고로드의 올레그는 예언자를 비웃다가 그 예언자의 예언대로 죽었다고 해서 '예언자'가 별명으로 붙었다. 그런데 별명마저 군주를 치켜세우는 표현이라면 그는 보통 성군이 아니라는 뜻이다.
[6] 러시아 고대~중세 역사를 다룬 거의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완벽한 기록이다. 연대기 작가이자 키예프의 수도사였던 네스토르(1056~1114)가 1113년경에 완성한 연대기이다. 키예프 루스 영토 전역에서 막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쓴 연대기로 많은 역사적 사실은 물론 슬라브 전설, 게르만 전설도 많이 담겨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다만 역사와 전설을 섞어 써서 중요한 사건에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시대적 한계도 있다.
[7] 스뱌토슬라프 1세 본인은 불가리아를 직할령으로 삼았다.
[8]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오우루치.
[9] 러시아어로 '드레블랸스크'라 불렀던 모양이다. 올레그는 '드레블랸스크 공작 올레그'로도 불린다.
[10] 이후 올라프는 내전에서 공을 세우고, 높은 자리를 받았으나 블라디미르 1세의 여인과 염문이 나는 바람에 루스에서 도망쳤다. 그 후 폴란드와 발트 해 연안에서 모험을 거친 후 노르웨이로 돌아가 왕위를 찬탈하고 '올라프 1세'로 즉위했다.
[11] 당시 루스의 결혼식 풍습으로 첫날밤에 아내는 엎드려 남편의 왼쪽 신발을 벗겨준 후 신발에 이마를 문질렀다. 남편은 아내를 가볍게 때린 후 오른쪽 신발을 벗고 자신의 겉옷을 아내에게 덮어주었다.
[12] 이미 키예프의 올가, 야로폴크 1세 두 정교도 군주를 배출한 상태였던데다 정교도도 많았다.
[13] 이 때 이미 독일 국왕 오토 2세와 서프랑크 국왕 로베르 2세의 청혼을 거부한 상태였다.
[14] 포르피로게니투스의 여성형.
[15] 동로마 제국은 제위의 여계 계승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피로게니투스를 외국에 넘기는 건 외국에 동로마 제위 요구자를 만드는 짓이었다.
[16] 이때의 정황을 두고 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절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서술이 엇갈린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모든 백성들이 기독교로의 개종을 기뻐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서술한 반면, 소련 시절에는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온 신들의 신상이 파괴된 것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되어 있다.
[17] 이미 스뱌토슬라프 1세가 두 번 공격한 적이 있는 부족이었다.
[18]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공격한 적이 있는 부족이었다.
[19] 키예프 루스의 공작, 백작과 같은 봉건 귀족.
[20] 키예프 루스의 시장 직.
[21] 비라법의 핵심은 살인을 사형이 아닌 벌금으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로마법에서 사형과 눈 뽑기, 거세 등 고문 종류를 들어낸 뒤 그 자리에 비라법의 벌금제도를 집어넣었다.
[22]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온 가족을 잃은 것 때문에 원래부터 아버지를 적대했다.
[23] 3차 개정안까지는 지폐에 그려졌으나 4차 개정안에서 1흐리우냐가 동전이 되면서 동전으로 옮겨갔다.
[24] 여러 역사기록에는 불가리아 여인으로도 나오는데, 현재는 황녀 안나 이야기가 맞다는 게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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