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金海)는 금관가야와 신라 사이의 바다이다
2024. 7. 14. 03:22ㆍ한국사/가야
석탈해가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에게 도전했다가 실패한 일화가 있다. 그런데 그후 석탈해가 물러 나는 장면이 특이하다. 김수로왕의 병선이 석탈해의 수군들을 쫓다가 계림이 보이자 물러났다는 일화이다. 즉 금관가야와 신라 사이는 바다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김해(金海)란 지명이 말 그대로 이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현재 한반도에는 김해지역이 육지에 있다. 즉 현재 한반도에 가야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니 한반도는 역사 속의 한국사 일부 지역일 수 있어도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래 내용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내용이라 한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자료 : 수로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가야/왜)
상기 자료가 술법을 논하는 것을 보면, 다소 현설성이 떨어진 이야기가 있으나, 탈해가 배를 타고 나가 계림의 땅으로 달아났다는 것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판단된다. 즉 김수로왕의 가락국과 계림의 신라는 바다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석탈해가 다파라국 출신이라는 것과 다파라국이 고구려의 협보가 연안을 따라 도착한 구사한국과 가라해, 다파라국 이야기에서 더욱 구체화 된다. (아래 자료 참조)
"한단고기 고구려본기 중
협보가 마한의 산중에 살았는데 그를 따라서 사는 자가 수백여집이나 되었다. 여러해 동안 흉년이 들어 떠돌아 다니다가 장혁을 알게 되었다. 이에 무리를 꾀어 양식을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바다와 포구를 거쳐 조심조심 배를 저어 곧장 구사한국에 이르렀다. 이곳이 가라해 북쪽해안이다. 여기서 머문지 몇 달만에 아소산에 옮겨 살았다. 이 사람이 다파라국 시조이다.
협보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외에 실질적인 2인자로 추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부여에서 온 유리가 왕이 되자 미움을 사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마한의 구사한국 혹은 구야한국에 도달했다고 전한다.
구야한국은 남가라로, 전성기에는 대가라로 불렸고, (한반도) 남단뿐만 아니라 바다건너 왜 지역의 구주에 또 하나의 분국을 이루었고, 구주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한단고기에 전하길 구주에 있던 구야한국은 변진 구야국인들이 모여 산 곳으로, 구야본국인들이 직접 다스렸다고 한다. '
출처: https://lainfos.tistory.com/345 [Hidden World History 감추어진 지구촌 역사:티스토리]
즉 협보의 이야기, 석탈해의 이야기, 그리고 금관가야 김수로왕 이야기 모두에서 가야는 고구려, 신라로부터 바다건너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김해는 바다를 지칭한 지명이라는 것이 역사적 자료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면 금관가야가 어디 있었느냐? 에 대해서는 아래 두개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수군이 이용하는 병선 5백척을 운영하는 국가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금관가야는 북아프리카 튀니지아의 카르타고가 아닌가 한다.
Modern reconstruction of Punic Carthage. The circular harbor at the front is the Cothon, the military port of Carthage, where all of Carthage's warships (Biremes) were anchored. (source : Wikipedia)
https://lainfos.tistory.com/345
https://lainfos.tistory.com/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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