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상경 용천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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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상경용천부 / 上京龍泉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는 만주에 위치한 과거 발해 5경 중 하나이자 수도였던 도시이다. 발해는 상경용천부 외에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 서경압록부, 남경남해부가 있었다.
상경성이 당의 장안성의 영향을 받았고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중국 학계의 견해인데 중국 학계의 주장은 대부분 근래의 고고학적 성과로 인하여 부정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단계적 조형설을 주장하기도한 중국 학자 위존성을 비롯한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상경성의 문지(門地)의 수와 성의 규격 등이 당시 홀한주도독의 책봉을 받았던 발해의 사정과 들어맞으므로 상경성의 제도와 규모는 당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당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장안성에 비해 작은 규모로 성을 지은 것은 단순히 세력의 규모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책봉의 지위에 맞는 주군급(州郡)급 성시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들은 1997년 11호 문지가 발굴되면서 부정당하기 시작한다. 1997년 이전까지는 10호 문지만이 확인 되어서 중국 지방정권설의 주요 논거가 되었으나 11호 문지가 발굴되고 연이어 12호 문지로 여겨지는 결구(缺口)가 발굴되면서 장안성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식임이 확인 되었다.
또한 발해의 5경제는 당의 5경제와는 그 의미가 다른데, 당의 5경제는 4년 남짓 실행됐던 반면 발해의 5경제는 160여 년간 존속되며 요와 금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발해는 북방민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멸망 직후 발해 유민들은 거란과 여진으로 흘러들어가 그들의 제도와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요와 금의 불교 문화와 각종 문화 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지방제도였던 5경제, 6경제에서도 발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유사성 때문에 오늘날 한국, 일본 학계에서는 요와 금의 5경제는 발해의 5경제를 본받아 실행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구난희, 한규철, 이병건, 송기호 등의 논문을 참고할 것.)
발해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되어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으며, 상경궁 유적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 발굴 작업 중이며, 사진조차도 공개되지 않았다. 오직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비문 관련 기사처럼 온갖 루머나 추측도 횡행하는 상황.
궁성의 일부는 문화재 관리 당국의 안내를 받아 관람할 수는 있다. 대개, 궁성 정문과 입도를 돌아보고 흥룡사에 방문하는 코스로 관람이 진행된다.
2. 역사[편집]
2.1. 제1기(755~785)[편집]
안사의 난 이후 문왕 대흠무는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는데 이 때부터 상경이 발해의 중요도시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수도성에 해당하는 상경성은 홀한성(忽汗城)으로도 불렸다. 문왕 말년 다시 동경용원부(팔련성)로 재천도한다.
2.2. 제2기(794~926)[편집]
2.3. 발해 멸망 이후[편집]
거란이 설치한 괴뢰국인 동란국의 수도가 되었고 이름도 천복성(天福城)으로 바뀌었다. 동란국은 10년 만에 해체되었고, 이후 발해인들이 모여 정안국을 세우지만 정안국은 남경남해부와 서경압록부를 중심으로 해 상경용천부는 외곽으로 밀려났다. 한편, 975년에 발해의 부여부(扶餘府) 지역이었던 거란 황룡부(黃龍府)에서 당시 황룡부 위장(衛將)이었던 발해 유민 연파가 거란에 반기를 들었다가 올야성(兀惹城)으로 패주하는데 이때 도주한 올야성은 올야국의 중심지였으며 상경성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정안국과 올야국이 거란에 의해 망하고 난 뒤, 상경성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폐허가 되었다.
3. 도시 구조[편집]
당의 장안을 본 따 도시계획을 짰다. 그러다 보니 마찬가지로 장안성을 참고한 일본의 헤이조쿄 및 헤이안쿄와도 비슷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도시 바깥엔 여러 성, 다리, 무덤군이 밀집해 있다. 통일신라의 서라벌도 마찬가지로 발해,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장안성 구획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2] 중학교, 고등학교 역사(동아시아사) 시험에 단골로 나온다.
3.1. 상경성[편집]
상경용천부의 성은 총 세가지다. 가장 밖을 둘러싼 외성(外城), 정부기관 및 궁성을 둘러싼 황성(皇城), 궁궐을 둘러싼 궁성(宮城). 이 구조는 상술했듯 당나라 장안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고려의 본궐, 장락궁, 고려궁지와 동일한 구분이 된다. 그러나 아래에 적혀있다시피 구분만 같을 뿐 실제 구조는 꽤나 차이가 있다.
3.1.1. 외성(外城)[편집]
가로 4600 미터, 세로 3400 미터의 크기이다. 성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었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에서 기원한 온돌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평양성 외성, 백제 왕조의 부여 나성, 조선 왕조의 한양도성 격이다.
발해 상경성 외성은 위 왕조들과 구분이 같이 됐지만 그 구조나 모습은 크게 차이난다. 왜냐하면 고구려, 백제는 현대적 정의로 외성으로 구분되지만 당나라가 만든 형식과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발해의 도성은 다른 한국 왕조의 도성들과 비교해보면 이질적인 느낌이 들 수 있다. 우리 왕조들 중 당제(唐制) 도성제를 철저히 본떠온 왕조는 발해 뿐이다.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등은 당나라가 건국되기도 한참 전에 이미 나라의 기틀이 완성된 왕조였으므로 독자적인 도성제를 구축했고 중국 도시계획은 나중에 부분적으로만 도입하였다. 고려, 조선은 발해처럼 당제 도성제를 따오긴 했지만 나성>황성>궁성 같은 전체적인 틀만 따왔고 성곽의 구체적 구조는 우리 왕조 고유의 특징들을 그대로 가져 왔다. 그렇기에 다른 우리 왕조와 발해의 도성을 비교하면 꽤나 큰 차이가 있다.
3.1.2. 황성(皇城)[편집]
외성의 북쪽 중앙에, 궁성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가로 1050 미터, 세로 500 미터이며 남문(황성 정문)이 있고 동, 서문이 있었다. 여러 건물 부지가 남아있어 발해의 3성 6부가 이 곳에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정석(?)답게 평지에 세워졌고 크기가 작다. 비교되는 고려 개경의 황성은 그런 거 없고 산을 에워쌌고 크기도 매우 컸다.
3.1.3. 궁성(宮城)[편집]
궁성 안의 궁궐은 고구려의 안학궁과 비슷한 구조가 특징으로, 총 7개에 달하는 큰 건물들이 일렬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모두 5개가 확인되어 제 1궁전, 제 2궁전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중 제 2궁전의 규모가 특기할만 한데, 돌로 된 기단의 크기가 정면 120m, 측면 30m 정도다.
궁성 정문은 오봉문(五鳳門)으로 불린 듯 하며 제 1궁전은 금란전(金鑾殿)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가장 먼저 축조된 성으로 보이며 궁성에 이어 황성, 외성 순으로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궁성은 조선 왕조의 경복궁 격이다.
4. 현재[편집]
중국이 상경용천부를 복원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실제로 추진할 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전망이 있다.#
다만 복원과 정비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발해를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말갈족이 세웠으며, 당나라에 예속된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간주하는 중국 정부의 시각에 따라 상경성을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모방한 것으로 보고 건물의 배치나 각 부재의 기준 척도로 당척(唐尺)을 채택하는 등 당시 당나라의 규격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발해나 일본이 장안성 도시구조를 참고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일본의 헤이안쿄 문서의 설명과 같이 현지화도 어느 정도 되었는데 이 점이 간과되고 있다.
중국이 상경성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한다면 한·중 간에 외교 분쟁과 역사 갈등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앞서 고구려 관련 두 세계유산은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한국사 왕조의 유적에 중국이 단독으로 등재를 시도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 밖에도 황성 일대를 제외한 성 내부엔 이미 고구마 밭 농경지와 함께 크고 작은 마을이 들어선 상태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궁성 내부에서도 경작이 이뤄지고 유구를 임의로 가져다 가재도구로 사용했었지만,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발해가 재조명되며, 중국 정부에서 경작지를 폐쇄하고 임의로 반출한 유구를 회수했다. 현재는 궁성 일부를 관람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궁성 내부는 육안으로 바라볼 수만 있으며 진입은 제한된다. 사실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폐허와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5. 둘러보기[편집]
[1] 상경용천부에 세워진 해당 비석에는 사연이 있는데, 한국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 가운데 하나인 동경성 전투(1933.6.7)가 벌어졌던 곳이 바로 이 상경용천부 옛 터 인근이었다. 당시 지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과 중국 길림구국군 제14사의 합작으로 조직된 한중 연합 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이 동경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그들을 성밖으로 내쫓는데 성공했는데, 일본군은 전사자 150여 명의 시체를 상경용천부터 인근에 파묻고 앞면에 ‘충혼비(忠魂碑)’, 뒷면에 ‘정기장산하(正氣壯山河)’ 라고 쓴 비석을 세웠고, 8·15 이후 중국 정부가 앞뒤의 비문을 모두 갈아 없애버리고 ‘발해 상경 용천부 유지’ 라고 써넣었다고.참교육 물론 그 정부가 현재의 중국 공산정부는 아니다. #[2] 단, 서라벌의 경우 상경성이나 헤이조쿄, 헤이안쿄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온 대도시인지라 기존 시가지에 장안식 바둑판 구획을 도입한 독특한 도시로 변모했다.